백자 속에 뜬 달
- 백윤석 -
오늘도 어김없이 백자 속에 달이 드네
어머니가 신주 모시듯 정성스레 닦아 놓은
누구도 가져가지 않을 저 백자 저수지.
삼대가 모여사는 인적드문 초가집
새 달을 받기 위해 비워둔 그 속으로
뒤섞인 노오란 달은 경계없이 떠오르고.
어머니는 달빛 뿌려 두엄을 만들어
호박이랑 채소랑을 맛나게 키우시네
빛나는 달빛을 받아 더 싱그런 저 빛깔.
문장부호, 느루 찍다*
- 백윤석 * 2016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점 하나 못 챙긴 채 빈 공간에 갇히는 날
말없음표 끌어다가 어질머리 잠재우고
글 수렁 헤쳐 나온다,
바람 한 점 낚고 싶어
발길 잡는 행간마다 율격 잠시 내려놓고
어머니 말의 지문 따옴표로 모셔다가
들레는 몇 몇 구절을
초장으로 앉혀야지
까짓것, 급할 게 뭐람 쌍무지개 뜨는 날엔
벼룻길 서성이는 달팽이도 불러들여
중장은 느림보 걸음,
쉼표 촘촘 찍어 보다
그래도 잘 익혀야지, 오기 울컥 치미는 날
뙤약볕 붉은 속내 꽉 움켜쥔 감꼭지로
밑줄 쫙! 종장 그 너머
느낌표를 찍을 터
* 느루 : 한꺼번에 몰아치지 않고 길게 늘여서.
* 어질머리 : 어질병
* 율격 : 정형적인 구조를 갖춘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연속적이거나 반복적인 언어의 리듬
* 들레 : 들러리
* 벼릇길 : 아래가 강가나 바닷가로 통하는 벼랑길
* [당선소감] / 꿈에서 조차 글 썼던 힘든 시간들의 보상인듯
꿈에서도 글을 썼습니다. 꿈속에서 쓴 글이 너무 좋아 잊지 않으려고 반복해서 외우다가 다 외웠다
싶어 눈을 뜨면 캄캄 절벽 같은 앞날…. 2000년부터 글을 썼으므로 햇수로 따지면 꽤 오랜 시간이지
요. 신춘문예 최종심에 몇 차례 거론된 후 절필한지 5년. 늦게 떠났던 이민생활의 어려움이 다시 펜
을 들게 했습니다. 작년 9월 부랴부랴 귀국해서 근 1년여를 잠을 아끼며 창작과 퇴고를 거듭했습니
다. ‘이 힘들고 고된 길을 왜 내가 사서 가려 하는지’에 대해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
만두고 싶은 순간을 사리물고 버텨내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시련 뒤에는 반드시 즐거움이 온다는
걸 몸소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행복합니다. 힘겨웠던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버텨준 제 자신이 자랑스
럽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기회를 주신 경상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 시조의 눈을 뜨게
해주신 윤금초 교수님, 한분순 선생님, 같이 공부한 열린시조학회 회원들, 그리고 배우식 회장님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부모의 이민에도 구김살 없이 훌륭하게 자라준 아들 세진과 딸
유진이와 이 영광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가 걸음마의 시작입니다. 방심하지 않고 치열하게
우리의 가락을 노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심사평-박기섭]‘느루 찍은’ 문장부호, 행간의 변화 이끌어
새해 벽두, 우리는 신생의 불씨를 안고 완고한 기성의 벽을 허무는 한 편의 득의작을 기대한다. 본심
에 오른 작품들은 역사와 자연, 인간과 생명에 대한 다양한 성찰과 인식의 층위를 보여주었다. 정독
끝에 ‘다산, 화성에 오르다’(송태준), ‘김 발장을 뜨며’(김승재), ‘막그릇을 위한 안단테’(송
정자), ‘구형왕릉’(임채주), ‘문장부호, 느루 찍다’(백윤석) 등을 가려냈다. 그 중에서 올해의
당선작은 ‘문장부호, 느루 찍다’다. 제목부터가 현대시조의 ‘현대성’을 강하게 부각하는 이 작품
은 메타시의 성격이 짙다. 시조 3장의 속성을 적절한 비유와 적확한 표현으로 풀어내고 있다. 말없음
표·따옴표·쉼표·느낌표 같은 문장부호를 제목 그대로 느루 찍음으로써 행간의 변화를 이끈다. 네 수의
결구를 각기 다르게 처리한 데서 보듯, 일상에 만연한 감성의 상투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창조의지가
충일하다. 이는 신춘문예에서 기대하는 분명한 미학의 개진을 보여주는 일이다. 또 한 사람의 시인을
맞는 기쁨이 크다. 시조의 묵정밭을 가는 보습이 된다는 각오로 정진해 주길 바란다. - 박기섭 시인
* 필자의 종합평(이봉수,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3자의 자리에 4자 음보가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사하고 4자의 자리에 [급할 게 뭐람] [잘 익혀야지]
등 5자 음보가 점령하고 있어 숨 가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조창작을 문장부호로 풀어내는 재미있
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수에서 말없음표(.....)를 찍으면서 무엇을 그려낼까? 궁리하다가 시조율
격은 좀 벗어나더라도 어머니 말을 따옴표(“ ”)에 넣어 초장으로 삼고(둘째 수), 느림보 달팽이의
걸음같이 연속적으로 쉼표( , , , ,)를 동원하여 중장을 만들고(셋째 수), 그래도 종장만은 감꼭지로
밑줄 쫙! 긋는 심정으로 강하고 힘차게 때리고 느낌표( ! )를 찍어 마감하겠다(넷째 수)고 한다. 발
상이 기발하여 상투적인 서정시나 애정시를 벗어나 현대시조의 참 맛을 보게 하는 작품이다. 한 편
[느루] [들레] [벼룻길] 등 현대인이 잘 쓰지 않는 단어를 동원하여 독자를 밀어내는 것은 이 작품의
큰 흠이라 하겠다.
문장부호, 느루 찍다2
- 백윤석 -
마흔의 강 훌쩍 너머 등 떠밀린 첫 맞선에
더께 앉힌 화장발로 곰보 감춘 저 아가씨
에둘러 말 더듬다가
찍어버린 말없음표
생김새는 그러해도 심성 하난 곱더라고
무딘 입 침 튀기며 설득하는 엄마 앞에
국자를 거꾸로 들고
의문부호 슬몃 찍고
집안, 학벌 다 좋다고 혼인 날짜 서두를 땐
우리 엄마 치맛바람 손쉽게 제압하던
아버지 헛기침 빌어
쉼표 꾹! 찍어 보다
살다 살다 알겠더라, 말로는 다 못해도
몰라본 신데렐라, 신사임당 그러안고
엄지손 곧추세워서
느낌표를 찍을 터
* 시작노트: 글을 쓰다보면 같은 제목으로 여러 편을 쓸 때가 있다 이 글도 마찬가지인데 1이 너무
유명해져서 2는 서랍 속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아류 글은 쓰지 말아야겠다
마지막 편지
- 백윤석 / 연간지 『오늘의시조』(오늘의시조시인회의, 2023) -
봄꽃 가득
피던 자리
빙하 돌연 솟습니다
만물 녹인
그대 체온 사라진 연유겠죠
빙하는
나를 휘감아
마음까지 얼립니다
이제 와 후회한들
되돌릴 수 있을까요
당신의 안녕 빌며 서녘 하늘 우러를 때
곱게 핀 저녁노을이
걱정마라 전합니다
그래요,
나 어리석어
보내고야 안답니다
천길 벼랑 가로막아 소식조차 끊겼어도
동살이
새 아침 열 듯
환히 밝혀 가소서
스팸메일
- 백윤석 / 시집 『스팸메일』(2019) -
1
한 톨 씨앗 잎눈 뜨는 문패 없는 내 뜨락에
잔뜩 덧난 상처마냥 몸 불리는 메일들이
용케도 바람벽 넘어와
술술 옷을 벗는다
끊임없이 거듭되는 공복의 내 하루가
한순간 눈요기로 허기나마 면해질까
꼿꼿이, 때론 덤덤히
삭제키를 눌러댈 뿐
2
눈발처럼 떠다니는 많고 많은 인파 속에
어쩌면 난 한낱 눈먼 스팸메일 같은 존재
뮤참히 구겨진 채로
휴지통에 던져질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외로 선 골방에서
팽개쳐져 들어앉아 변명조차 잊었어도
엉켜진 오해의 시간
술술 풀 날 기다리는,
* 백윤석(1961-) 筆名 지음(知音)
* 1961년 서울 출생·건국대 경영학과 졸업
* 중앙시조백일장 4회 입상
* 현재 (주)예인건설산업 근무
* 2016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등단.
* 제27회신라문학대상, 오늘의시조시인상 , 나래시조 젊은시인상 수상. 시집 『스팸메일』.
태백산하(사설지름시조) / 석암 정경태 창 / 동촌제작실
태백산하(太白山下) 에굽은 길로 중 서넛 가는 중(中)에 그 중에 그 중에말째 중아 게 잠깐
말 물어보자
간이별만사(人間離別萬事)중에 독숙공방(獨宿空房)을 마련하시던 부처님이 어느 절 법당(法
堂) 탁전(塔前) 탁자(卓子)위에 감중련(坎中連)하옵시고 두럿이 앉은 모양 보았던가
소승(小僧)도 수종청송(手種靑松)이 금십위(今十圍)로되 모르옵고 상좌(上座) 노스님 아도
신가 (하노라)
태백산 아래 조금 휘어 돌아가는 길로 중 서너 명 가는 중에 제일 끝에 가는 중아, 거기에
서 잠깐 말 좀 물어 보자.
우리 인간들이 서로 이별하는 많은 일 중에서도, 짝이 없이 혼자 살아야만 하는 신세를 마
련하신 부처님은 도대체 어느 절 탑전 탁자 위에 감중련 수인을 하시고 홀로 떨어져 앉아계
시는가?
저도 제 손으로 소나무를 심어 지금 열 아름 정도는 되었지만 모르겠고, 혹시 저 덕이 높으
신 노스님께서나 아시는가 합니다.
* 작품 해설 : 이 사설지름시조는 화자가 중에게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인간사 중에
독숙공방을 마련한 부처를 본 적 있느냐”화자가 말째 중에게 물어보았다.“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말째 중의 대답이다. 부처인들 일부러 그런 독숙공방까지야 마련했겠느냐는 것이다. 화자는 임 떠난
애타는 심정을 화풀이하기 위해 일부러 말째 중에게 어깃장을 놓고 있다. 뻔한 물음에도 말째 중이
이를 모르는 척하고 있다. 혹 아실는지 모르니 저 앞에 가시는 높으신 스님께서나 물어보라는 것이
다. 감중련은 팔괘의 하나인 감괘의 상형 ‘’을 이르는 말이다. 감괘의 가운데 획이 이어져 틈이 막
혔다는 뜻으로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수인을 뜻하는데 수
인은 불상의 여러 가지 손가락의 형상을 의미한다.‘수종’은 손수 심은, ‘청송’은 푸른 소나무를,
‘금십위’는 열 아름을 말한다. 제일 어린 중이기는 하나 내 손수 심은 푸른 소나무가 지금은 열 아
름 쯤 된다는 것이다. 나이가 꽤 들었다는 것을 금십위로 표현했다. 사설시조와 지름 시조를 섞어 부
르는 창법이 사설 지름 시조이다. 남창 지름시조의 초장의 높은 선율과 평시조의 중·종장의 기본 선
율에다 사설시조의 촘촘한 가락을 붙여서 부른다. 이 사설 지름 시조에는 평탄하게 부르는 평시조의
가락과 초장을 높여서 부르는 지름시조의 가락과 리듬을 촘촘하게 해서 부르는 사설시조 가락이 섞여
있다.‘태백산하’ 사설지름시조는 정경태 선율보의 대표적인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