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末年)의 백석(白石)
詩 백편 얻겠다며 滿洲를 유랑하다
돌아온 조국 하늘은 붉은 旗로 뒤덮히고
絶筆한 30여년 歲月 그 자체가 詩 한편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8/1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① 1937-1938(26-27세) : 1936시집<사슴>이후 함흥영생고보 교사 시절
② 1939-1939(28-28세) : 조선일보 재입사, <여성>지 편집 사직하고 ③ 정주, 신의주거쳐
④ 1940-1941(29-30세) : 당시 만주국 신찡(新京, 현재 長春)에서 측량보조원등 유랑
⑤ 1942-1945(31-34세) : 안동 세관 근무, 광산 잡역
⑥ 1945-1945(34-34세) : 해방과 더불어 신의주, ⑦ 고향 정주에 과수원 잡역
⑧ 1946-1959(35-48세) : 평양 생활(고당 비서, 김일성대 강의, 아동문학, 번역활동)
⑨ 1959-1996(48-85세) : 삼수군 관평리 하방, 양치기등 생황하면서 1962(51세)까지 체재 찬양 글
이후 1963년부터 사망시까지 33년간 절필(絶筆), 유언 :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원고를 불태워라”
덧붙임) 1948년 8.15건국 이후의 백석 문학 이해
백석의 문학연보를 살펴 보면
10대(1929년 18세) 조선에서의 기초 학습기
20대 전기(1936년 25세까지) 일본 유학과 조선일보 기자, 『사슴』등 初期 詩作期
20대 후기(1939년 28세까지) 함흥 영생고 교사, 조선일보 재입사, 初期 詩作期
30대 전기(1945년 34세까지) 100편의 시를 쓰겠다는 각오로 만주 유랑 中期 詩作期
30대 후기(1950년 39세까지) 해방후 조만식 비서, 남측 문학지에 시 발표 末期 詩作期
40대 전기(1959년 48세까지) 번역문학, 아동문학에 소일
40대 후기(1962년 51세까지) 삼수갑산 하방, 체재 찬양시, 평론, 정론 暗黑 詩作期
50대 이후(1996년 85세사망까지) 絶筆期로 대별할 수 있다 하겠다.
청산학원을 졸업할 당시 이미 5개국어에 능통했고
만주 유랑 시절 러시아어를 심도있게 습득하려 러시안인 마을에 세들어 살기도 했던 백석은
해방이후 문우들이 많이 살던 서울로 남하하지 않고 북에 남아
스승 조만식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서 비서겸 러시아어 통역을 하기도 했다.
후배 고정훈이 백석에게 2차례 월남을 제안 했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한다.
1) 고당 선생을 모셔야 한다.
2) 처 그리고 큰아들 화제만 데리고 혹은 혼자만 못 간다.
다른 가족과 친지가 너무 많아 월남하면 남은 일가족이 고초를 겪을 것이다.
3) 모두 같이 간다해도 남에 생활 터전이 없어 힘들지도 모른다,
4) 이젠 감시가 심해져서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그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가족 공동체와 고향의 의미가 남달랐음을 생각하면,
고향 정주에 世居하고 있던 형제, 친척들을 생각하면,
안동에서 결혼한 피아니스트 문경옥과 헤어지고
죽을 때까지 50년 넘게 해로하며 3남2녀를 두게되는 3번째 결혼한 아내(리윤희)를 생각하면
많은 文友와 知人들이 있는 남쪽으로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백석은 고당이 연금당하면서
북한 정권 찬양 문학을 강요하는 主流에서 멀어지면서
러시아 문학 번역과 아동문학(특히 동시)에 깊이 천착하게되고
점점 공산 정권의 눈밖에 나지 않았나 싶다.
625 남침시 월북 문인들이 서울에 와 정치 선동에 참여했지만
백석이 이에 가담했다는 자료는 나오지 않았음이 이를 말해준다 하겠다.
그 당시 지인에게 “더러운 글을 쓰지 않고 번역만 할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그는 그 당시 1년에 10여권의 러시아 문학을 최고 수준으로 번역하는
동화(童話)와 번역 활동으로 문학의 끈을 놓지 않고 소일했다 한다.
그러한 백석은 1958년 공산 정권 문예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붉은 편지”사건으로 自我批判을 강요받은 뒤 양강도로 추방당하게 된다.
이때에 백석은 북한 문학기관지에 童詩, 正論, 評論등을 통해
백석답지 않은 공산 체재 찬양, 남조선과 미제 비판의 글들을 올리게 된다.
일제하의 수 많은 문인들이 일제 찬양의 길로 들어섰을 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그러한 조선반도를 피하며 만주에 피신하여 생활했을 때에도
생계를 위해 만주국 측량기사보조원을 할 때 일본식 이름을 올린 것 말고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그가
그러한 공산체재 부역 문학에 동참하였음에
우리는 실망하게 되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만주 유랑시절엔 홀홀단신이어서
운신하기에 자유로워 그의 신조대로 처신하기 쉬웠지만
해방후 공산치하의 백석에겐 리윤희와 결혼하여 3남2녀의 식솔이 있었음을 상기하면
그러한 방법으로 문학의 양심을 지키기보다 가족들을 생각한 처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시 1959년 부르조아적 잔재로 비판받고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 축산반(양치기)으로 쫓겨났으며
1962년 이후에는 북한 문단에서 아예 종적을 감추게 된다.
그나마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으게 다행이었다.
이는 그를 이해하고 지원하던 12년 연상인 북한의 힘있는 문학가요 정치인인
한설야의 1962년 말 실각과도 유관한 일이 아닌가 한다.
삼수갑산 하방시에도 조선로동당을 찬양하는 글들이 계속되는데
그러한 글들 대부분은 백석 글이 맞긴한데 아주 수준이 낮은 글이어서
언어의 정제된 조탁과 깔끔한 구성을 가진 기존의 백석의 글이라곤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제3인공위성”, “나루터”등 詩들을 보면
이즈음의 다른 시들은 서정성을 나타내다가도 당이 어떻구 원쑤가 어떻구하는
백석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문구가 삽입되곤 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공산치하의 엄혹한 환경 속에서 처절한 백석의 생존법이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아동문학 평론에서
“사상만이 아니라 문학성 자체에 대해서도 중점을 두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는데 이따금 표출되는 이러한 그의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작가적 양심이
1962년 이후 북한 문단에서 아예 사라지게 된 원인이라 생각된다.
일제의 1940년대 조선어 말살정책과 함께 이 땅의 수많은 저명한 문인들이
천황찬가, 종군 독려의 시에 부역하는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는 말할 것 없고
일제 괴뢰국 만주국의 말단 직원에 봉직하였으면서도
그러한 친일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백석의 순수문학을
오염시킬 수 밖에 없었던 공산치하의 나찌즘에 버금가는
냉혹한 현실에 처했던 백석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할 것이다.
최근 전교조가 장악한 우리의 교육계에서 우려할 만한 현상의 하나는
이즈음의 공산 찬양의 백석의 아동문학을 아무런 걸름 장치없이
교육계에서 수용하여 교과서에 소개되고 수능에 출제되기까지 하는데
이렇게 그의 다분히 自意가 아닌 것으로 추측되는 작품을
무차별한 교육용 교재로 사용함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사료된다.
본바탕이 순수문학이었던 그의 문학가로서의 양심은
그러한 공산치하에서의 그의 글들이 후세에 남겨지길 원치 않았는지
아내 이윤희에게“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원고를 불태워라”라는 유언을 하였다니
해방 후의 그의 작품들은 절대 그가 추구하는 문학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배달9222/개천5923/단기4357/서기2024/8/1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씀.
1980년대 중반, 양강도 삼수군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백석의 옆이 부인 이윤희, 뒤에는 차남 중축과 막내딸 지제. 좌측은 그의 공민증 사진이다.
* 붉은기 사상
'붉은기'라는 말은 1920∼30년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 시기에 사람들이 불렀다는 '적기가'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1980년대까지 '붉은기 중대운동',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등과 같은 충성·노력경쟁 운동과 연계시켜
사용되었다. 1990년대 들어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대외적 위기와 김일성 사망, 거듭된 자연재해라는 위기상
황에서 외부로부터의 바람을 차단하고 내부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붉은기사상이 제창되었다. 붉은기사상이 체계화
된 것은 1995년 8월 28일자 노동신문 정론인 '붉은기를 높이 들자'를 통해서였다.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환경 속에
서도 북한은 사회주의를 끝까지 고수하겠다는 것이 이 사상의 핵심이다. 1997년 1월 1일, 신년 공동사설에서 붉은
기사상은 '사회주의에 대한 필승의 신념과 수령 결사 옹위정신'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1998년의 신년 공동사설에
서도 '전당, 전군, 전민이 위대한 김정일 동지의 붉은기사상으로 일색화될 때 점령하지 못할 요새란 있을 수 없다’
고 밝힘으로써 이 사상이 김정일 체제의 고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북한이 붉은기사상을 주장한다고 해
서 변화를 거부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외부에 의한 체제 변화는 거부하지만, 자체적인 실용주의적 변화는 지속
하겠다는 것이 북한이 1990년대 후반 이후 보여주고 있는 정책적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