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스크랩] 한산도대첩

이름없는풀뿌리 2015. 3. 22. 20:51

이순신의 3대첩, 임진왜란 3대첩, 세계 4대해전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한산도대첩. 그 과정과 결과를 <이순신과 임진왜란>(1권, 한산도해전 편)에 소개되지 않은 현장 사진들을 덧붙여 봄으로써 독자분들이 해전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편집한 것입니다.

 

 

수백 년을 앞서 실현된 순수 함포전.. 전쟁의 판세를 뒤집다

 

한산도해전은 양측 도합 2만여 명(각각 1만여 명)이 격돌한 중세기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군 함대는 전투 시작 1시간 만에 궤멸되었던 반면, 조선 함대가 치른 희생은 놀랍게도 사망 10여 명(부상 100여 명)에 불과했고, 그 마저도 창칼에 의한 것이 아닌 총포에 의한 것이었다.

 

백병전으로 승패를 가름하던 시대에 현대 해전에서나 볼 수 있는 순수 함포전을 구사하여 완벽한 승리를 거둔 명 해전사! 한산도해전이야말로 이순신 해전의 핵심 원리라 할 수 있는 속공전과 '거북선+학익진에 의한 협격전'이 빛을 발한 세계 최고의 해전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일까?

 

거제도는 큰 섬이다. 그리고 육지와의 내왕길은 견내량 해협이다. 지금이야 구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가 놓여져 있지만, 그 옛날 견내량은 극동 3국의 해양사에서도 이름 높았던 남해안 최대의 포구였다. 때문에 견내량에 대해서는 수군 병졸들뿐 아니라 고기잡이나 장사꾼 배의 뱃사공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도 한산도해전을 '견내량해전'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당시만 해도 한산도는 무인도 정도에 불과했고 견내량은 조정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해협이었기 때문이다. 해전의 경과를 보면 해전의 명칭은 한산도해전이나 견내량해전 그 어느 쪽으로 불러도 타당하다. 다만 오늘에 와서는 한산도가 더 유명해졌기 때문에 한산도해전으로 회자되고 있을 뿐이다.

 

 

견내량 북단에서 바라본 견내량 해협. 앞에 있는 다리가 신거제대교,

뒤쪽이 구거제대교. 다리 오른쪽에 보이는 육지가 통영이다. 

 

 

대해전의 조짐.. 견내량 북단에 집결한 왜선단

 

(1592년 7월 7일)...난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있던 미륵도의 목자(왕실의 말을 기르는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 김천손이 우리의 배를 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크고 작은 왜적의 배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경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나와 고성 땅 견내량으로 들어가 정박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적들을 칠 전략을 엄히 지시해 두었습니다.

<견내량파왜병장>(92. 7. 15.)

 

김천손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왜선단은 무려 70여 척 규모의 대 함대였다. 이순신은 후방에도 비슷한 규모의 제2, 제3의 함대가 포진해 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일본 측에서 드디어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지시해 두었다'는 것은 해전에 대비하여 작전회의를 가졌음을 말한다. 이순신은 정보가 수집되면 즉시 제장들을 모아놓고 입수된 정보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했는데 이날도 김천손이 보고한 바에 따라 작전을 수립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 선단의 병력도 산출해 보았을 것이다.

 

총 병선 수:   70여 척

큰 왜선:       36척 × 180명 = 6,480명

중간 왜선:    24척 × 80명   = 1,920명

작은 왜선:    13척 × 20명   =   260명

합계:                                 8,660명

 

최소 8천에서 1만의 병력이었다(일본의 전사 연구가들 중에는 한산도해전 당시 왜군 측은 사상자 수만 9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적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서 모조리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는 세부 작전을 논의했다.

 

8일에는 이른 아침에 적선이 정박해 있는 곳을 향해 가다가 바다 중간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적의 큰 배 1척과 중간 배 1척이 탐색하면서 나오다가 우리를 보고는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그래서 (탐색선을 내보내서) 쫓아가 살펴보게 하니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2척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견내량파왜병장>(92. 7. 15.)

 

유인전을 계획하고 있던 조선 함대는 적에게 함대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순신-이억기-원균 함대의 순으로 이동했으며, 함대 간에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렇게 이동해 가다가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를 지나 곧장 견내량 쪽으로 다가갔고, 원균과 이억기 함대는 방화도와 한산도의 고등산 뒤편으로 들어가 매복을 시작했다. 

 

견내량 남단에서 정탐중이던 왜군 탐색선들은 '적선단 발견' 상황을 본대에 알리기 위해 곧바로 견내량으로 들어갔다. 이에 이순신 함대의 탐색선들도 왜군 탐색선을 따라 견내량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리고는 적 함대의 규모 등을 파악하고는 다시 견내량을 빠져 나왔다.

 

 

미륵도에서 바라본 한산도 앞바다. 사진 우측 끝에 보이는 섬이 한산도 바로 옆에

위치한 화도, 좌측이 방화도, 멀리 좁은 바다 구간이 견내량 남쪽 입구이며,

우측편에 흐리게 보이는 큰 섬이 거제도다.

 

 

 
한산도 앞바다. 좌측이 화도, 우측이 한산도, 가운데 멀리 보이는 섬이 거제도다.

 

... 견내량은 지형이 협착하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처럼 큰 배는 서로 부딪혀서 싸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왜적들은 형세가 궁해지면 바다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가겠기에,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완전히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통영) 사이에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도 없고, 행여 뭍으로 올라가더라도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견내량파왜병장>(92. 7. 15.)

 

글의 내용대로만 본다면, 조선 함대가 견내량에 직접 와서 보니 그곳의 지형이 좁아 해전을 하기에는 마땅한 장소가 아님을 깨닫고 유인전을 준비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유인전에 대한 구상은 이전의 기동훈련 때, 그리고 전날 작전회의 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장계(견내량파왜병장)에는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해전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진행사항을 기준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순신이 '해전을 하기에 좁다'라고 한 말을 바꾸어 해석하면 당항포해전 때 선보인 '쌍학익진(사방포위진)을 펼치기에는 좁다'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명의 수사들과 함대 지휘관들은 전날 계획한 작전대로 유인전에 돌입했고, 이순신 함대 역시 견내량 남단 입구 쪽에 위치해 있는 해간도 어귀에서 유인전을 준비했다.

 

 

2단계 유인작전

 

... 먼저 판옥선 5, 6척으로 선봉의 왜적들을 쫓아가 공격할 기세를 보이도록 하자, 왜적들도 일제히 돛을 올리고 쫓아왔습니다. <견내량파왜병장>(92. 7. 15.)

 

왜군 함대의 주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수륙의 맹장이었다. 와키자카 함대는 "조선 함대를 섬멸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고 출동한 입장이었다. 때문에 조선 함대의 유인선단을 보자 거침없이 추격에 나섰다.

 

1단계 유인작전을 위해 견내량으로 들어간 유인선단을 기다리는 동안 이순신 함대는 해간도 어귀에서 2단계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적을 견내량에서 끌어내기만 한다면 일단 작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해간도에서부터 한산도 앞바다까지는 적을 유인해 내기가 보다 쉬울 것이라는 게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40여 척의 대선으로 선단을 구성한 것이나 견내량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들은 틀림없이 조선 함대의 섬멸을 벼르고 출동한 함대였고, 왜군들 역시 마음 놓고 접전을 펼치고자 한다면 보다 넓은 바다를 선호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해협쪽으로부터 총포 소리가 들려왔다. 1단계 작전이 성공했음을 예감한 이순신 함대 진영에는 침묵의 환호가 터졌다. 이윽고 1단계 유인전에 나섰던 전선들이 견내량을 빠져 나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뒤로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왜선들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따라붙고 있었다. 적선단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유인선단들은 해간도를 지나자 기다리고 있던 본대에 곧장 합류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에서 인용한 '견내량에서의 유인전' 그림

 

유인선단이 본대에 합류하자 이순신 함대는 바로 2단계 유인전을 시작했다. 이순신 함대는 선수를 ㄷㄹ려 한산도 쪽으로 향했고, 추격해 오던 왜의 선봉은 이를 놓칠세라 해간도 앞을 신속하게 통과했다. 선두가 통과하자 중간과 후미의 선단들도 모두 견내량을 빠져 나왔다.

 

 

 

견내량 북쪽에서 바라본 견내량 남쪽. 앞에 보이는 조그만 섬이

견내량 남쪽 입구에 위치해 있는 해간도다.

 

우리 배가 일부러 물러나서 돌아오니 왜적들이 줄곧 뒤쫓아 와서 바다 가운데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견내량파왜병장>(92. 7. 15.)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신의 함대가 견내량을 반쯤 통과했을 때 '이순신이 혹시라도 두 동강 내기 작전으로 나오지는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을 했다. 그러나 전 함대가 무사히 견내량을 통과하자 일단 안심했고, 이순신의 본대마저 줄행랑을 치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쾌재를 불렀다.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견내량을 통과하기만 하면 노량해협까지는 이렇다할 험로가 없었다. 따라서 한려수도 해안을 차지하고 나면 전라도 지역은 쉽게 공략할 수 있기 때문에 와키자카로서는 일단 신명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천혜의 해협을 거저 얻게 된 사실에 대해 경우에 따라서는 한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건만 와키자카는 전혀 의심치 않았고, 오히려 이순신의 이러한 행동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찍이 용인에서 자신에게 패한 전라감사 이광의 부장이 바로 이순신이라는 점이었다. 와키자카는 이순신이 자기가 온 줄도 모르고 싸움을 걸어왔다가 기함에 나부끼는 자신의 대장기를 보고는 줄행랑을 친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이순신도 달아났고 견내량도 차지했으며, 앞은 탁 트인 바다였기 때문에 기습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와키자카는 도주하는 적의 앞을 가로막기만 하면 조선 함대는 독 안의 쥐가 되어 일망타진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의 참모들 역시 승리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과제는 달아나는 적을 쫓아 일망타진하는 것뿐이었다. 이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와키자카의 추격령이 왜군 함대에 하달됐다.

 

 

완성되는 그림, 한산대첩도

 

2단계 유인작전을 시작한 이순신 함대는 뱀섬을 돌아 방화도와 화도 앞을 경쾌하게 내달렸다. 신바람이 난 것은 왜군 측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곧 주무기인 조총과 일본도 앞에서 궤멸당할 조선 함대를 그리면서...

 

이 시각 화도와 고등산 뒤쪽에 매복해서 퇴로 차단과 협공을 준비하고 있던 나머지 두 함대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을 목도하면서 감탄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날의 계획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이 점차 완성 단계에 접어들자 이억기와 원균 함대 진영에는 피가 멎을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그림의 완성은 이들 함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적 선단을 유인하던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갑자기 세 갈래로 분항(分航)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함대의 분항과 학익진의 시작

<이순신과 임진왜란>(1권, '한산도해전') 중에서

 

... 이때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학이 날개를 편 듯한 모양의 학익진(鶴翼陣)을 이루어 일제히 진격하라고 명령을 내리니... <견내량파왜병장>(92. 7. 15.)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쪽으로 갈라진 함대의 좌우측 선수가 이내 왜선단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와키타카와 그의 참모들은 정연한 모습으로 순식간에 대형을 바꾸는 이순신 함대를 바라보며 놀란 듯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알 수 없는 광경에 아연 긴장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 놈들이 왜 저러는 것이냐?"

와키자카가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병법에도 도망가던 적이 머리르 돌리는 것은 반드시 어떤 계교가 숨어 있기 때문이라지만, 와키자카로서는 이순신 함대의 이 같은 움직임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의아스럽기는 그의 참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숨겨진 계략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드디어 임진왜란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한산도 앞바다에서의 학익진이 왜선단 코앞에서 요란한 군악과 함께 장엄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밝혀진 계략

 

선수를 되돌린 이순신 함대의 중앙부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양쪽 날개 쪽은 포위를 하려는 듯 군악을 울리면서 각기 방향을 틀어 급행했다.

'저건 또 왜 저러는 것일까?'

적의 앞을 가로막아 서는 것은 전장에서 다반사로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왜군 측에서는 저렇게 적은 숫자로 자신들을 포위한다는 것은 아무 실효가 없는 부질없는 짓으로 보였다. 의외의 상황에 부닥친 와키자카는 모든 정황을 종합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순신이 도망쳐도 결국에는 잡힐 것을 알고는 사생결단으로 나오는구나. 용맹한 자라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군...!'

 

와키자카는 드디어 총공격을 가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지휘봉을 들어 공격을 지시하려는데 갑자기 등 뒤쪽에서 "쾅!" "쾅!" 하는 포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와키자카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화도와 고등산 뒤편에서 또 다른 전선들이 떼를 지어 군악을 울리며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병이다! 이것이 놈들의 계교였구나!!"

와키자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응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말로만 듣던 거북 모양의 맹선들이 각기 한두 척의 전선을 이끌고 정면과 좌우에서 달려 나오고 있었다.

 

 

왜군 함대를 포위하는 조선 함대

<이순신과 임진왜란>(1권, '한산도해전') 중에서

 

와키자카의 기함 지휘부와 각 함대 왜장들은 자신들이 적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분을 삭이지 못하면서도 이미 기동을 시작한 거북선단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북선의 돌격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적이 예상을 깨고 대공세로 전환했다는 것 자체가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와키자카는 이렇게 된 이상 우선 이순신의 기함이 버티고 있는 정면의 적부터 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급히 돌격선단에 돌격을 명령했다.

"돌진하라!"

정면 돌파였다. 그 방법만이 지금까지의 여세를 몰아 이순신과 조선 함대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방책으로 보였고, 좌우와 후미의 적들은 이순신의 지휘부를 깨고 나면 손쉽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군 돌격선단 제1진인 5척의 왜선들이 정면 돌파를 시도하기 직전 조선 함대의 그림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림의 모습은 적을 완전히 포위한 '쌍학익진(사방포위진)'이었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펼쳐진 조선 함대의 쌍학익진

<이순신과 임진왜란>(1권, '한산도해전') 중에서)

 

... 왜군 돌격선단이 50m 지점을 통과해 올 즈음,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양측에서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사격전을 개시했다.

"콰-쾅! 쾅!"

"타타탕! 탕! 탕!"

대포 사격에 이어진 중발화 대발화탄의 연쇄적인 폭발음도 엄청났다. 바다를 뒤흔드는 포성과 함께 자욱한 흑색 화약 포연이 선체와 바다를 뒤덮으며 순식간에 양측 함대의 시야가 가려졌고, 그 순간 메케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왜군 측은 15문(5척*3문)의 일본식 대포가 사격에 나섰고, 5척의 층루선에 승선하고 있던 조총수들이 사격에 가담하고 있었다. 선당 50정이면 무려 750발의 조총탄이 날아온 셈이다. 반면 조선 함대 측은 정면과 좌현대포 쏘기를 연속했으므로 80문(2문+6문)*10척)의 대포들이 5척의 왜군 돌격선에 포탄을 집중시켰다.

 

 

천자총통(뒤)과 지자총통. 해남 우수영관광지 전시관 소장 

 

당시 일본 대포의 구경은 4~5cm. 사정거리는 약 200~300m였다고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큰 조총격인데 왜군의 대포로는 두께가 10cm에 달하는 70m 밖에 있는 판옥선의 방탄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악하는 왜군 함대

 

오늘에 와서 분석해 보아도 당시 양측의 화력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조선 함대 측은 경미한 손실만 입었고, 왜군 돌격대 제1진인 5척의 층루선들은 완파 내지는 반파되어 전열에서 이탈해야만 했다.

 

돌격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박살나는 광경을 지켜본 와키자카와 왜장들은 혀를 내두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저 꿈만 같았고, 그렇게 큰 대포 소리도 난생 처음이었다. 달아나던 조선 함대가 어느 순간 펼쳐보인 학익진, 그 다음 자신들이 내린 돌격령, 그리고 나란히 열을 맞춰 앞으로 나와 선 10여 척의 조선 함대 전선들... "정면 쏘아! 좌현 쏘아!"를 번갈아 가며 매 단계마다 왈칵 왈칵 토해내는 자욱한 포연, 그리고 불타기 시작하는 돌격선...

 

이 모두가 실제가 아닌 허상을 보는 듯했고, 그 짧은 순간에 조선 함대가 선보인 변화무쌍항 진법과 전법들은 환상적이다 못해 왜군들을 경악케 했다.

 

... 왜군 돌격대 제 1진을 간단히 격파한 10여 척의 판옥선단은 이번에는 우측으로 선체를 돌렸다. 2차 돌격전을 준비하던 왜군 돌격대에게 '너희들도 나올 테면 나와 보라!'는 태도로 보였다. 때문에 왜군 돌격부대들은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기를 주저했다.

 

왜군 돌격대장들은 불과 얼마 전 용인전투에서 5만의 조선 근왕군을 평원의 소떼 몰 듯 흩어지게 했던 와키자카 직속의 무장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비친 조선 수군은 용인에서 겨루었던 조선 육군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돌격대의 돌격전이 먹혀들지 않자 왜군 함대는 바다 한가운데에 정체된 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우물쭈물 하고 있는 사이에 왜군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사건이 또 터졌다. '소경배'로 알려진 거북선들이 자신들의 진영 속을 헤집고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산도대첩의 현장인 한산도 앞바다. 좌측 방향이 견내량 쪽이다.

 

 

'일시에 모두 해치워버린' 해전

 

... 파국으로 내몰린 와키자카는 최후의 수단으로 직할 선단을 이끌고 정면을 향해 발진했다. 그러나 거댓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조선 함대는 이 순간 포위망을 바짝 좁혀왔고, 더욱 요란하고 빨라진 템포의 군악을 울리며 신기전, 대장군전, 장군전, 차대전을 동원한 일격필살의 '일시집중타'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런 살탄들이 판옥선 1척당 5발씩 쏘았다면 '판옥선 60척 ×  5발 = 300발'이다. 이 300발은 와키자카의 기함과 호위함들을 목표로 날아갔기 때문에 왜군 지휘부는 '살탄 장대비'를 얻어맞은 꼴이 되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와키자카의 지휘부가 집중공격을 받게 되자 왜군 함대는 순식간에 와해되기 시작했다.

 

 

진주성에 전시되어 있는 천자대포(총통)와 살탄

 

"장군! 속히 퇴각을 명하소서!"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한 와키자카의 참모들이 와키자카를 향해 부르짖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동감한 와키자카도 즉각 퇴각령을 내렸다. ... 퇴각의 나팔이 울리자 왜군 함대는 방향을 돌려 견내량 쪽으로의 퇴각을 시도했다. 그 광경을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일제히 진격하여 각각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쏘아대어 먼저 적선 2, 3척을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은 기가 꺾여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모든 장수와 병사들, 그리고 군관들은 승리한 기세를 타서 펄쩍펄쩍 뛰면서 서로 앞을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총탄을 교대로 쏘아댔는데 그 형세는 마치 바람불고 천둥치듯했습니다. 그리하여 적의 배를 불태우고 왜적을 사살하기를 한꺼번에 해치워 버렸습니다. <견내량파왜병장>(92. 7. 15.)

 

 

한산도해전에서 거둔 전과

 

다음의 표는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 이억기, 원균 함대가 깨친 왜선의 수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를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이순신, 이억기, 원균 함대의 전적(한산도해전에서)

 

첫째, 큰 배(층루선)는 전라좌수영 단독, 또는 전라우수영과 공동으로 깨뜨렸다는 점이다. 아울러 좌수영 쪽은 시종일관 층루선을 표적으로 공격하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왜군 측은 중간 배와 작은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이억기 함대에게 저지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포위당한 왜선들 중에서 해상 탈출에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훗날 와키자카가 살아서 김해 쪽에 다시 나타난 사실로 보아 그 역시 배로 탈출한 것이 아니라 헤엄을 쳤거나 나무판자나 부유물 등에 의지해서 탈출했을 것으로 보인다.

 

넷째, 전라 좌우수영 함대의 철통같은 포위망으로 인해 왜선들은 원균 함대가 위치하고 있던 후미 지역까지는 접근하지 못했던 것 같다. 원균 쪽에서 깨친 왜선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하지만 헤엄쳐서 달아나거나 널빤지 등을 타고 도망치던 왜병들은 원균 쪽에서도 많이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섯째, 왜선 중 14척은 애초부터 포위망 밖에 있었기에 무사히 달아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왜군 함대가 견내량을 종대로 빠져 나왔고, 추격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앞쪽의 선단과 뒤쳐진 후미 선단 간에는 길게 늘어진 종대형 진형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후미에 뒤쳐져 따라오던 14척은 본대가 난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곧장 도망쳤다.

 

 

 

한산도대첩이 이후 임진왜란사에 미친 영향 

 

세계 해전사를 보면, 16세기는 물론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해전 초반에는 대포를 쏘고 중반부터는 적선에 갈고리를 걸어 당겨서 타넘은 후에 백병전으로 끝장을 보는 접현전 방식이 주된 해전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현대식 해전을 방불케 하는 함포전만으로 해전을 치렀다.

 

일본군의 돌격전과 백병전은 일본의 전국시대,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때는 물론 태평양전쟁 때까지도 상대방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중세의 신통치 않은 총포류를 가지고 일본군의 돌격전과 백병전을 철저하게 따돌렸다.

 

한산도해전이 있었던 날은 이른 새벽 당포항을 떠나 전투-노획물 수거-부상자 치료-저녁 작전회의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 해전사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이고 긴 하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해전에 소요된 시간은 약 2~3시간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산도해전에서의 승리로 조선은 남해상에서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서해 보급로 개척에 사활을 걸고 있었던 왜군들에게 전략상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패배를 안겨 주었다. 한산도와 이후 벌어진 안골포 해전에서의 승리가 가져온 영향에 대해 굳이 간추려 본다면 다음과 같다.

 

1)일본의 서해 진출 야욕을 분쇄하였다.

2)서해 보급로 개척 실패로 평안도-함경도까지 진출했던 왜 육군의 영지구축 활동이 위축되었고, 왜군들의 전의가 크게 꺾였으며, 이듬해 5월 남해안으로 전격 철수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3)그때까지도 구원병 파견에 소극적이던 명나라에 구원 출병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전쟁은 조-일 양자 구도에서 조-명-일의 삼국전쟁으로 확대된다.

4)조선 수군의 화약무기 활용을 통한 승리 방정식이 육군의 수성전 등에 적용되면서 크고 작은 전과를 거두게 된다.

5)단기전을 계획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략을 장기전으로 수정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남해안 주요 거점에 왜성 축성 작업이 본격화된다.  

 

 

한산섬 앞바다

 

결결이 일어나는 파도

파도 소리만 들리는 여기

귀로 듣다못해

앞가슴 열어젖히고

부딪혀 보는 한산섬 바다!

 

뒷 파도 앞 파도를 치면

앞 파도는 가슴을 치고

가슴 속마저

파도가 일어나면

던진 듯 넋이랑 몸뚱이랑

뜨고 잠기는 한산섬 바다!

 

들어도 들어도

알 길 없는 설법일러니

소리로 빛깔로 속속들이 베어들어

어느 새 살 되고 뼈 되고

피 되어 솟는 한산섬 바다!

 

-노산 이은상-


 

 


거북등대가 있는 제승당 앞바다
출처 : 파랑새는 오늘도 비상을 꿈꾼다
글쓴이 : 다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