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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52 : 몽골, 또 다른 한국]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4:38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52 : 몽골, 또 다른 한국]


 

 

몽골, 또 다른 한국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0>
등록일자 : 2005년 08 월 09 일 (화) 20 : 00   
 

  『원사(元史)』는 또 하나의 『고려사(高麗史)』
  
  1990년 대만에 거주하는 세계적인 몽골인 학자 한촐라 교수는 한국에 도착하자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라고 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한촐라 교수의 고향은 동명성왕의 원주지로 추정되는 홀룬보이르 초원(대싱안링 북동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촐라 교수의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한국이 몽골의 '어머니의 나라', 이 말은 아마도 몽골의 시조신인 알랑고아의 아버지가 고주몽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알랑고아의 삶은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특히 유목생활에서 남편이 없이 살아갈 때의 그 처절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명성왕 원주지(추정). ⓒ김운회  

  칭기즈칸의 어머니도 알랑고아와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처절한 가난과 절망 속에서 자식을 키웠고 그 아들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칭기즈칸을 정신적 지주로 삼는 몽골에게는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바로 알랑고아이며 민족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머니의 나라가 한국일 수밖에요. 한국은 바로 고주몽의 나라이니까요.
  
  몽골에서는 한반도를 '솔롱고스', 즉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즐겨 입는 무지개의 일곱 색깔 그 색동옷의 고향이 바로 몽골입니다.
  
  솔롱고스, 한마디로 '꿈의 나라'입니다. 모질게 춥고 힘든 유목생활에서 끝없이 남으로 내려오고 싶은 몽골의 소망의 표현이 바로 '솔롱고스'가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몽골은 또 다른 한국'이고, '한국은 또 다른 몽골'입니다.
  
  한국에서는 복숭아나무를 귀신을 쫓는 나무라고 하여 불에 태우지를 않지요. 몽골은 불로써 모든 부정을 없애는데 복숭아나무를 절대로 불에 넣어 태우지 못하게 합니다. 몽골에 있어서도 복숭아나무는 바로 귀신을 쫓는 나무지요.
  
  터키 말이나 몽골어·한국어·일본어가 유사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긴 이야기는 못하고 제가 별로 아는 바도 없으니 한두 가지 예만 들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검다(black)라는 말에 대해서 이들 언어들을 보면 다음과 같지요.
  
  터키어 ――― 몽골어 ――― 한국어 ――― 일본어
  카라(kara) 카르(kar) 검다 구로(くろ)
  
  그리고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orum)의 경우 중국의 문헌에는 각라화림(喀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화림(和林) ·화령(和寧) 등으로 쓰입니다. 유목민들이 가진 천손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태양(太陽, 日)을 보면 몽골어에서는 '나ㄹ'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말[날]과 완전히 같지요. 유목민들이 동쪽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은 흉노·돌궐·거란 이래의 전통입니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태음력으로 1월1일을 차강사르(흰색의 달)라고 하여 최고의 명절로 칩니다. 설날을 차강사르라고 부르는 것은 백색이 길상·풍부·순결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빔을 입고 밖으로 나가 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동이 트면 먼저 해가 뜨는 방향으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립니다. 하늘에 예를 올릴 때 마유주나 우유 등을 하늘로 뿌리는데 이것을 차찰[배천(拜天 : 하늘에 절함)]이라고 한다. 이 같은 의식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샤만 신앙의 유풍이지요. 우리가 하는 해맞이 풍습과 다를 바 없지요.
  
  몽골은 우리와 같이 백색 숭배의 풍습이 강합니다(몽골이 훨씬 더 심하죠). 몽골인은 종종 겔의 입구에 천마(天馬)를 그린 깃발을 내걸고 있는데 말은 행운을 상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애마(愛馬)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후 말이 없으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몽골인들은 백마(白馬)를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한답니다.
  
  동몽골의 다리강가 지방에는 한국의 색동저고리와 같은 전통의상이 내려오고 있지요. 이 일대는 고대의 코리(貊)족의 이동과 관계가 있고, 또 그들이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성이 깊습니다.
  
  겨울철에 몽골의 아이들은 비석치기나 '샤가'를 합니다. 샤가는 우리의 윷놀이와 같은 놀이죠. 이러한 풍경은 30~40년 전에 한국의 겨울에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습니다. 물론 윷놀이는 아직도 즐기는 놀이이지만요.
  
  (1) 너무 닮은 그대
  
  제가 잘 아는 유명 방송인 한 분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이 유명 방송인은 몽골 민속이나 우리 뿌리를 찾으러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일로 바이칼 호수에 취재차 갔다가 어느 몽골의 오두막에 들렀답니다. 겉모습은 우리네 강원도의 산골에 있음직한 집과 흡사하더랍니다.
  
  그 분은 아무 생각 없이 집안에 들어섰고 그 집에 있던 몽골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는데 둘 다 너무 놀라서 서로 부둥켜안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이 분의 말씀은 이 몽골 할머니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모습과 똑 같았다는 것이지요. 그 몽골 할머니도 당신과 너무 닮은 이 분을 보고 그만 끌어안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잠시 정신을 차린 후 몽골 할머니의 입에선 러시아 말이 나오고 자기의 입에서는 한국말이 나와서 오히려 어색해지더랍니다.
  
  그 후 이 분은 우리의 뿌리를 찾아야겠다는 남다른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몽골과 접해본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알 수 없지만 어떻게 한국인과 이렇게 닮을 수가 있지?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친근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사실로 말하면 과거의 만주 쥬신도 너무 닮아 구별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이 부분은 만주쥬신 부분에서 살펴보지요), 그들은 지금 한족(漢族)에 지나치게 동화되어 찾기가 어렵죠. 만주에서 만주쥬신을 만나기가 쉽지도 않습니다. 청나라 말기 - 모택동 정부 이후 한족들이 대거 이주 정착하였기 때문이죠.
  
  몽골은 어떻게 보면, 중국과 비교적 많이 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쥬신의 원형을 잘 보관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주 쥬신은 중국과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중국에 쉽게 동화되어버린 감이 있습니다.
  
  몽골전문가인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몽골과 고구려는 형제 관계였다고 합니다. 멀리 대흥안령(大興安嶺) 남단에서 발원하는 할흐강(江)이 보이르 호수(湖水)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할힌골솜'이라는 곳이 있고 여기에는 석상(石像)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꼬우리(꾸리 : Khori - 고구려, 고리, 구리)'족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석상을 중심으로 서쪽은 몽골이 살고 있고 동쪽은 코리족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서로 통혼(通婚)하며 같은 풍습과 민족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저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고주몽)으로부터 몽골과 고구려로 나눠졌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초원(草原)에서 몽골과 꼬우리(꾸리) 양족(兩族)의 여자들이 오줌을 누다 서로 만나면 몽골의 여자는 왼손을, 꼬우리족의 여자는 오른손을 흔들어 형제애(兄弟愛)를 과시하곤 했다고 합니다.
  
  몽골인들의 고유 신앙을 한족들은 산만교(珊蠻敎), 또는 살만교(薩滿敎)라고 불렀습니다. 산만((珊蠻 : 비틀거리는 야만인)이라니 무슨 야만족(野蠻族)처럼 들립니다만 샤먼, 즉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샤먼 신앙, 즉 샤머니즘을 말하는 것이지요. 한족(漢族)들은 꼭 이런 식으로 표기를 해야 적성이 풀리는 모양입니다. 이 샤만에 대하여 "여진어로 무구(巫嫗 : 늙은 여자 무당)(『三朝北盟會編』卷3)", 또는 "하늘에 대하여 기원하는 사람(祝神人)을 말한다(『滿洲源流考』卷3)"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만주 몽골 쥬신의 가장 일반적인 신앙인데 반도 쥬신(한국)의 경우에도 매우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즉 자연계에 모든 만물이 정령이 있으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님(天神)이 되는 것입니다. 무당이 북을 치고 방울을 울리고 춤을 추어 귀신을 부르고 병을 고치는 등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오늘날에도 한국에서는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대부분 사람들의 카운슬러(counsellor)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들이 부부 금슬관리에 대학진학 상담, 비즈니스 고문(顧問)은 물론이고 의사노릇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샤먼 신앙의 전통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몽골인가 흉노인가?
  
  여러분들은 그 동안 흉노(匈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흉포하고 농경민을 괴롭히는 초원의 무법자로 말입니다. 흉노의 주무기는 활이죠.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이구동성으로 흉노는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단순히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해서만 강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탁월한 정보수집능력과 전술의 유연성(flexibility)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후퇴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후퇴하면서도 활로 적에게 치명상을 입혀 전세(戰勢)를 역전시키기가 다반사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흉노, 도대체 이들은 누구입니까?
  
  우선 말부터 봅시다. 흉노는 중국어로는 슝누[xiongnu]인데 몽골어의 훙(XYH)에서 나온 말로 문어(文語)에서는 훙누로 들립니다. 이 말의 뜻은 몽골어로 그저'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음차(音借 : 음을 빌려 표현)하여 한족(漢族)들은 흉노(匈奴)로 불렀지요. 그런데 이 흉(匈)자가 '입심이 좋은(시끄러운)' 이라는 의미이고 노(奴)자는 노예(奴隸)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이 그 민족의 명칭이 된다는 것도 거북스러운데 이것을 아예 '시끄러운 노예'라고 표기했다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한국인의 명칭을 한족(중국인)이 '사기 사(詐)'와 '누더기 람(襤)'을 사용하여 詐襤(사람 : 성품은 사기를 잘치고 몸은 거지 꼬락서니)이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모욕적인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흉노라는 말은 적합한 말이 아니니 다른 말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황병란의 연구에 따르면 흉노(匈奴)는 산시(陝西) 지역의 서남지역·서북지역·허베이(河北) 지역 대부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했으며 주(周)나라 때는 융적(戎狄[룽띠]), 또는 견융(犬戎[취엔룽])이라고 불렀고 전국시대 이후에는 호(胡), 또는 흉노(匈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황병란, 『중국고대사』(1958) 102쪽]. 즉 흉노와 호(胡)는 다른 종족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흉노는 오히려 유럽에 가까운 인종으로 치부하고 호(胡)는 만주족을 뜻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이 부분의 전문 연구자인 정수일 교수(단국대)에 의하면, 흉노는 특정 종족집단이 아니라 알타이 산맥의 동남쪽에 거주했던 유목민의 총칭이라고 합니다. 크게 본다면 이 민족에서 동으로는 쥬신이 나타났고 서쪽으로는 훈족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흉노가 서유럽을 뿌리째 흔든 '훈족'이라는 것은 1750년대 프랑스의 드 기네(Joseph de Guignes, 1721~1800)가 제시한 이후 여러 가지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흉노는 유럽이나 일본학자들에 의하면 몽골계통이나 투르크 계통, 몽골-투르크 혼합계통·슬라브 계통·이란 계통 등에 속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중부 유럽까지 가는 동안 많은 피가 섞였겠지요.
  
  흉노는 모두루 대단군[모돈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 시대가 전성기였습니다. 그는 칭기즈칸과 유사한 분으로 알타이 주변의 초원 지대의 대부분 민족을 하나로 묶어버립니다. 이때 흉노의 땅은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 등에 이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유념할 것은 정수일 교수의 지적처럼 흉노란 어떤 단일한 씨족이나 부족에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흉노란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집합체라는 것이지요. 이 점은 여러 관련 전문가들의 지적에서 나타납니다. 사실 흉노만 하더라도 휴도(休屠, 혹은 屠各)·우문(宇文)·독호(獨狐)·하뢰(賀賴)·강거(羌渠) 등 여러 부족이 있었고 또 하나의 부족이 몇 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흉노 = 쥬신'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쥬신은 흉노의 일파로 주로 알타이 동부 지역에서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지에 거주하는 민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알타이 서부 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초원 쪽으로 진출한 민족은 제외하는 것입니다. 물론 민족적으로 많은 연계성을 가지고 있지만 천 수백 년 이상을 단절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같이 분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의 <유목민이 본 세계사>에서도 중국의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 때부터는 동호(東胡)와 흉노(匈奴)를 다른 듯이 서술하기는 해도 한(漢)나라 때까지도 흉노니 동호니 하는 말은 특정한 민족이나 부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의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로도 사용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후 지속적으로 흉노와 한(漢)나라는 투쟁의 길로 접어들다가 흉노의 일부는 서쪽의 초원으로 이유도 모르게 사라져가고 나머지는 남흉노·북흉노로 나눠져 중국의 동북방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몽골 쥬신을 북흉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흉노는 중국에 복속하고 북흉노는 후한 명제(明帝, 58~75)와 화제(和帝, 89~105) 때 한나라에 쫓겨 일부는 서역으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선비(鮮卑) 쪽으로 모이게 됩니다. 이들은 사마염의 진나라가 팔왕의 난(290~306)으로 약화된 틈을 타서 다시 흥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상의 내용을 다시 그림을 통해 살펴봅시다.
  
 
  기원전후의 흉노의 활동영역(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262쪽 재구성). ⓒ김운회

  
  그림을 보시면 한족(漢族)이 흉노라고 부른 종족들이 알타이를 중심으로 퍼져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서쪽 지역의 흉노들은 더욱 서쪽으로 옮겨가고 있고, 동쪽 지역의 흉노들은 더욱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래서 서쪽으로 이동한 민족들을 훈족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죠). 몽골의 경우, 이들 흉노족들의 거주영역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습니다.
  
  흉노(훈)는 보드(Bod)라 불리는 혈연 공동체가 보둔(Bodun)이란 부족공동체로 확대되고 이것이 정치적 종합체인 흉노 사회를 구성함으로써 부족연합체인 유목 국가로 성장합니다. 흉노는 광대한 목초지에 분산되어 사는 유목인이지요. 그렇지만 그들을 지배하는 핵심 지배집단이 있어서 전체 부족들을 이끌어 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지배집단이 가진 풍습과 전통이 전체 흉노(훈)를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흉노의 정치적 특성은 족장의 계승이나 전쟁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각지의 수령들이 어느 한 곳에 집합하여 회의한 후 중요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몽골 쥬신이나 만주 쥬신도 같은 행태를 보입니다.
  
  지배선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의 전쟁에서 패배한 민족은 대부분 승리한 민족에 흡수되는 것이고 흉노가 북아시아를 제패하자 "모든 유목민족들은 우리가 흉노(皆以爲匈奴)"라고 했으며 선비가 장악하자 "모든 유목민족들은 우리는 선비(皆自號鮮卑)"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지배선, 「匈奴·鮮卑에 관한 二·三」 『동양사학연구』제25호, 171쪽).
  
  이 부분은 쥬신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농경화한 민족들이나 한족화(漢族化)된 민족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한족(漢族)들은 정체성이 워낙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아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세계의 주인 칭기즈칸의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쥬신과 한족의 이질성(異質性)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쥬신의 생태는 마치 자연계의 볼복스(Volvox)를 연상시킵니다.
  
  볼복스(Volvox)류는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 생물로의 이행 단계에 있는 생물로 경우에 따라서 서로 떨어져 살기도 하고 함께 모여서 살기도 합니다. 볼복스는 단세포생물이 5백~5천 개가 모여서 공 모양의 군체를 이루는데, 군체(群體)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운동·먹이섭취·생식 등의 역할을 분담하도록 특수화됩니다. 그러나 볼복스는 여러 세포로 구성되어 있어도 필요에 의해 합쳐져 있기 때문에 다세포 생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저 군체로 보죠.
  
 
볼복스(Volvox). ⓒ김운회  

  볼복스는 개체 상호간에 세포질 다리로 연락하여(개체 상호간에 서로 연결하는 기능이 나타나) 편모의 움직임이 통합되어 있죠. 세포에는 이미 역할분담이 있고 생식전문 세포가 있어 새로운 군체를 만듭니다. 이 같은 군체의 특성은 다른 경우도 상당히 유사합니다.
  
  예를 들면 점균은 흩어져 있는 이웃들과 느슨하게 집합체를 만들어 하나의 군체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로 모이면 점균이 아니라 1~2mm의 괄태충 모양으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게 되면, 그 가운데 일부는 포자가 되고 다른 부분은 포자를 지탱하다가 결국은 소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주위의 조건이 좋아지면 포자는 발아하여 다시 분열을 하는 원래의 단세포로서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을 보면 교묘하다고 할 만큼 세포가 모여서 서로 도우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죠.
  
  이와 같이 개체에서 군체를 이루는 생물들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은 같은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즉 개체들 내부에 흐르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공통성이 이들의 결합을 촉진하는 것이죠. 종류가 다른 것은 하나로 합칠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목민들이 족보(族譜)를 중시하는 이유도 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속성 때문이겠지요. 유목민들은 공통성을 끝없이 유지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족(漢族)과 쥬신을 섞어 놓았을 경우에 화합이 안 되는 이유도 그 근본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쥬신계열의 정복자들이 중국을 통일하고 더 큰 영토와 영광을 주어도 한족들은 그들을 자기들의 황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한족과 쥬신은 서로 합쳐질 수가 없습니다. 보세요, 아무리 새끼 중국인들이 천년 이상 한국을 지배하고 중국에 동화(同化)하려고 온갖 몸부림을 쳐도 한국인들이 중국인이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아마 새끼 중국인들도 한국을 중국의 한 성(省)으로 만드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할 것입니다.
  
  일본인(열도쥬신)과 아이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누는 열도쥬신과 수천 년을 같이 살아도 융합하지 못하고 물위에 뜬 기름처럼 살다가 훗가이도(北海島) 저편으로 밀려갔지요.
  
  그래서 몽골인들은 아무리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그들을 만나는 순간 이내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한족(漢族)들은 TV나 영화 등을 통해 매일 봐도 이상하게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다 이런 이유들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흉노가 세상을 지배하자 "모든 유목민족들은 우리가 흉노(皆以爲匈奴)"라고 했으며 선비가 장악하자 "모든 유목민족들은 우리는 선비(皆自號鮮卑)"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왜냐고요? 이들은 같기 때문이죠.
  
  유목민들의 역사를 보면 외부에서는 알기 어렵지만 영걸(英傑)이 나타나면 흩어진 부족들이 하나로 쉽게 뭉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국가라는 정치 체제(political system)를 갖추어져야만 '민족적 일체감(national identity)'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유태인들이 유태의 유일신에 대한 숭배 신앙이 있음으로 일체감을 형성하듯이 유목민들도 어떤 일체감, 예를 들면 천손족(天孫族)이라든가 샤머니즘이라든가 하는 어떤 공통의 요소들이 이들을 뭉치게 하는 힘으로 보입니다.
  
  만주쥬신과 몽골쥬신은 국가의 생성 중간 단계 상태에서 수천 년간 이어왔습니다. 유목민들은 볼복스처럼 개별적인 부족으로 살기도 하고 환경이 되면 국가를 구성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부족연맹의 성격이 대단히 강하고 각 부족간의 합의에 따라 공동체의 결속을 다집니다. 마치 가야 연맹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지요. 가야는 여러 개로 되어있지만 가야라는 하나의 연맹으로 단결력을 과시하지요. 이런 환경 하에서는 왕권 즉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황제 권력들이 제대로 형성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메이저(major) 부족이 나타나면 그 부족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성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쥬신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있지만 언제라도 하나가 되려는 속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송사(宋史)』에, "거란의 경우, 강토는 비록 넓었지만 인구와 말의 수가 적어서 남쪽으로 중국을 경략할 때는 반드시 고려·발해·여진·실위 등을 이끌고 회전(會戰)한다.(『宋史』326 郭諮列傳)"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서는 "거란의 풍속은 말갈과 같다(『北史』94 契丹)."고 하여 만주쥬신(숙신계)과 몽골 쥬신(동호계)이 다르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만주 쥬신과 몽골 쥬신을 다르게 보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은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는 하나로 간주했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중국을 정벌하고 지배할 때는 결혼을 통하여 더욱 결속을 다지고 하나로 결합하여 그 힘을 바탕으로 중국을 경영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주쥬신과 몽골쥬신의 결합은 동등한 부족의 재생산 과정인 셈이지요.
  
  예를 들면 청나라의 경우에는 한족(漢族)과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하였지만 몽골에 대해서는 철저히 혼인을 장려합니다. 청나라 황제마다 몽골 왕공의 딸을 후비로 삼고 청 황제의 공주와 왕자들은 몽골의 왕공의 자제와 결혼을 합니다[임계순, 『청사』(신서원 : 2001)]. 몽골의 황녀(皇女)와 고려의 왕의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설이 다소 길었군요. 이제 정리해 봅시다. 흉노란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집합체이고 쥬신은 흉노의 일파로 주로 알타이 동부 지역에서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지에 거주하는 민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알타이 서부 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초원 쪽으로 진출한 민족은 제외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쥬신과 흉노의 관계를 아시겠죠?
  
  (3) 쥬신의 나라 몽골
  
  몽골은 8세기 무렵 흑룡강 상류인 에르군네(Ergüne) 강[河] 유역에서 몽올실위(蒙兀室韋)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여 당나라·위구르·토번 등이 붕괴, 또는 와해되는 틈을 타서 지속적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11~12세기 무렵에는 오난(Onan) 강[河] 일대까지 진출합니다. 오난강으로 진출한 몽골은 게레이드(Kereyid)·메르키드(Merekid)·타타르(Tartar)·나이만(Naiman) 등의 부족들과 서로 다투면서 성장하다가 1206년 칭기즈칸을 중심으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민속원 : 2001) 205쪽].
  
  몽골의 기원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몽골은 동호(東胡)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몽골은 한나라 초기 흉노의 모두루 단군임금이 동호를 제압하자 살아남은 부족들이 동쪽으로 와서 그 가운데 어떤 무리는 선비가 되고 어떤 무리는 오환(烏桓)이 되고, 후에 이들은 다시 실위(室韋 : 몽골)·거란(契丹)이 되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남쪽에 있는 동호는 거란이 되었고 북쪽에 있는 동호는 몽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나라 때에 이르러 현재의 흑룡강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몽골 또는 모골 또는 머골(蒙兀)이라는 이름이 이 때 나타났다는 것이지요[屠寄,『蒙兀兒史記』1 世紀].
  
  몽골의 원류인 동호계는 주로 해(奚 : 현재의 내몽골 지역), 습(飁) 실위(室韋 : 현재의 몽골 지역) 등 입니다(『新五代史』74 契丹 ; 『北史』94 奚).
  
  해(奚 - 여자노예라는 의미), 습(飁 - 큰바람), 실위(室韋 - 집에서 잘 다듬은 가죽) 등 말들이 이상하죠? 대부분 욕설에 가깝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그 이유는 이 말들이 음차(音借 : 발음을 빌림)를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족(漢族)들은 여전히 이들을 욕설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한족을 잘 봐주려고 해도 신성한 민족이름이 이게 뭡니까? 이렇게 함부로 불러도 됩니까?
  
  이 한자말들은 서로 다르게 보여도 발음은 모두 [쉬], 또는 [쇠]에 가깝게 나타납니다. 즉 해(奚 [xī]), 습(飁 [xí]), 실위(室韋 [shìweí]) 등으로 예(濊), 또는 예맥(濊貊)과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똥고양이와 단군신화' 참고). 발음으로만 보면 이들은 예맥과는 구별이 잘 안 되지요. 결국은 철과 관련된 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해는 거란이 되고 실위가 바로 몽골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는 거란과 동류인 "해(奚)는 본래 흉노의 별종(『新五代史』74 契丹)"이라고 합니다. 『북사(北史)』에 따르면, "해는 거란과 이종동류로 본래 고막해(庫莫奚)라 하였는데 그 선조가 동호의 우문(宇文)의 별종(『北史』94 奚)"이라고 합니다. 요나라 태조가 해(奚)를 정벌하면서 "거란과 해(奚)는 언어가 서로 통하니 하나의 나라이다(『遼史』72 宗室列傳)."라고 합니다. 요나라는 자신의 발상지인 현재 내몽골 자치구 빠린줘치(巴林左旗)를 상경(上京)으로 하였습니다(『契丹國志』22 四京本末).
  
 
  거란 발상지. ⓒ김운회

  『북사(北史)』에 따르면 "실위는 대체로 거란의 부류로서 남쪽에 있는 것은 거란이 되고 북쪽에 있는 것은 실위라고 불렀다.(『北史』94 室韋)"고 합니다. 실위는 발음이 예맥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예맥이나 숙신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사(北史)』에서도 "실위는 풍속이 말갈(靺鞨)과 같다(『北史』94 室韋)."라고 합니다. 이 실위는 바로 이전의 오환·선비이며 그 후 거란·해·실위가 되고 후일 몽골이 되지요.
  
  선비·거란·오환·해·실위·말갈·숙신·동호 등등으로 불러왔던 민족들이 실제로는 별로 다르지 않는데 그 동안 우리는 너무 다르게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모두가 한족(漢族)의 사가(史家) 덕분입니다. 그래서 한족(漢族)들이라면 지방의 특색 정도에 불과한 것을 쥬신의 경우에는 무슨 유럽의 나라들과 한국이 다르듯이 묘사를 한 것이지요.
  
  이 점은 새끼중국인들의 근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대부분의 한국 사가들도 그대로 가진 속성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을 대표한다면서 민족사학에 대해서 이렇게 비난하고 있지요.
  
  "만주의 지배족이었던 여진·거란·몽고 등 이른 바 동이족 전체를 배달족(倍達族)이라는 이름 아래 동족(同族)으로 간주하고 배달족 전체의 시조를 단군(檀君)에서 찾고 단군 이래의 고유 신앙을 민족문화의 핵심으로 높이 선양하였다 … 이러한 민족주의 사학은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이 정신적 기초가 되어 일제에 많은 타격을 주고 만주식민사업을 방조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우리 민족의 범주를 동이족 전체로 확대 해석한 것은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한영우,「총론」『한국사 특강』(서울대학교 한국사 특강편찬위원회 : 2003) 9쪽]."
  
  이것이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연구의 종합적 발전적 성과"로 자화자찬하면서 대학 교양교재로 내놓은 책입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민족주의 사학이 오히려 일본의 극우 제국주의자들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지를 않나(망국의 백성들이 만주에서 식민사업을 제대로 했을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역사를 동이족 중심으로 본다는 방식 자체가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쥬신의 연구, 참으로 갈 길이 멀군요. 저도 최소 50년은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만주와 몽골 쥬신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쥬신에 대한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선비·거란·오환·해·실위·말갈·숙신·동호 등등으로 다르게 생각한 것은 이들이 제대로 국가체제도 갖추지 못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지역적으로 기후라든가 환경에 따라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각기 독특한 풍습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특히 몽골의 경우에는 자연환경이 가장 혹독한 쥬신의 북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 문화의 일부는 쥬신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형태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식주(衣食住)라든가 변발과 같은 머리 모양새·유물·분묘제도·결혼풍습·샤머니즘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동일 집단으로 판단할 수 있는 주요한 문화적인 근거들을 상당한 부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한족(漢族)이나 '새끼 중국인'들이 반드시 명심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쥬신은 적어도 한족만큼 자부심이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그런 예가 있나요? 그런 예는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봅시다. 몽골이 같은 민족인 거란인들과 사이가 나빴던 것은 거란인들이 지나치게 한화(漢化)하여 동질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몽골도 중국을 경멸하여 '거란'이라고 부르죠.
  
  여기서 거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 넘어갑시다. 거란은 한국과 중국의 사가들에 의해 외면을 받아왔지만 쥬신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나라입니다. 몽골은 바로 거란과 같은 동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란의 역사를 아는 것은 몽골의 역사를 아는 것도 됩니다.
  
  거란은 "과거 흉노의 종족이다(『舊五代史』137 契丹)"라고 하기도 하고 "거란은 동호로 그 선조는 흉노에게 격파되어 선비산에서 살았다(『唐書』129 北狄傳)"고 하기도 하고 "거란은 본래 선비족(『五代會要』29 契丹)."이라고 합니다. 『구오대사』에 따르면, "거란의 땅은 본래 선비의 옛 땅이었다(『舊五代史』137 契丹)."고 합니다.
  
  거란은 쥬신의 전통 그대로 태양을 숭배하여 매월 초하루 아침[朔(초하루)旦(아침)]이면 동쪽으로 향하고 태양에게 절을 하여 태양을 숭배하는 마음을 견고히 했다고 합니다(『新五代史』「四夷附錄」契丹條). 뿐만 아니라 거란은 쥬신들 가운데 샤먼 신앙이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쥬신에게 있어서 샤먼은 정치적인 군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단군왕검(檀君王儉)도 종교수장(단군 : 샤먼)과 정치적 군장(왕검)을 함께 나타내는 말이지요.『요사(遼史)』에 따르면, 요나라의 태조는 "천명을 받은 군주는 마땅히 하늘을 섬기고 신을 경배한다(受命之君 當事天敬神 :「耶律倍傳」)"라고 하여 샤마니즘을 아예 국교(國敎)로 숭상합니다[島田正郞, 『遼朝官制の硏究』(1979) 321쪽].
  
  거란(契丹)은 무엇보다도 거란 자체가 바로 '쇠'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契丹'으로 쓰고 글단, 또는 글안·거란 등으로 읽으시니까 그것이 '쇠'라는 사실을 모르죠. 契는 중국 발음으로 바로 '쇠(xiè)'입니다. 놀랐죠?
  
  알타이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1921~1990 : 서울대 교수)은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거란(契丹)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쇠[빈철(賓鐵)]도, 금나라의 쇠[金]도 다같이 '새 아침'의 새[新]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몽고(蒙古 : 몽골)란 이름이 의미하는 은(銀)도 쇠의 일종이다(박시인『알타이 신화』232쪽)."
  
  즉 몽골도 역시 쥬신의 기본적인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쇠, 또는 금을 숭상하는 알타이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단 말이죠.
  
  거란은 부족들 가운데 큰 것을 대하씨(大賀氏)라고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8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의 우두머리를 대인(大人)이라고 불렀는데 항상 한 사람을 대인으로 추대하여 기고(旗鼓)를 세워 8부를 통솔하게 하는데 그 기간이 오래 되거나 나라에 재앙이나 역병이 돌아 목축이 쇠퇴해지면 이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원래 약속이 그러했기 때문에 아무 탈 없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新五代史』72 契丹)."고 합니다. 이것은 쥬신의 일반적인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부여·고구려·신라·몽골·금 등 대부분의 쥬신의 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러나 야루아버지(耶律阿保機 : 야율아보기)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여 마침내 군주가 되었고, 더 이상 여러 부족이 교대하는 관행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국왕을 칭하게 되었고(『舊五代史』137 契丹), 이로써 강력한 고대 정복국가로 탈바꿈합니다.
  
  이 점은 쥬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란이 부족을 통합하고 그것을 통해 1인 군주지배체제에 들어서면서 강력한 고대국가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정벌에 나서서 중국을 경영하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의 모범답안처럼 쥬신들이 답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다만 거란이 너무 중국화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소멸되는데 만주쥬신이나 몽골쥬신들은 한족(漢族)과 동화되지 않으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만주쥬신과 몽골쥬신은 민족적 정체성을 견고히 유지합니다만, 최근 만주쥬신은 모택동(1949) 이후 정체성이 지속적으로 소멸되고 있습니다.
  
  거란은 야루덕광(耶律德光) 시기에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합니다. 야루덕광은 후진(後晋)의 고조인 석경당(石敬瑭)을 책봉하여 후진의 황제로 삼았습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 따르면, "야루덕광은 진성(晋城) 남쪽에 단을 쌓고 석경당을 세워 황제로 삼고 의관을 스스로 벗어 입혀주면서 책봉하여 말하기를 '아들 진왕아, 나는 이처럼 너를 아들로 여길 것이니 너 역시 나를 아비처럼 생각하라'고 하였다(『新五代史』72 契丹)." 라고 합니다. 즉 거란은 한족(漢族)의 후진(後晋)과 부자지국(父子之國)의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舊五代史』48 唐書 末帝紀). 다시 말해서 한족의 국가인 후진의 황제가 거란의 황제에 의해 책봉되었고 이들은 서로 부자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진은 석경당이 죽고 출제(出帝)가 즉위하자 더 이상 거란에 대하여 칭신(稱臣 : 신하를 칭함)을 거부합니다. 거란의 황제들이 어쩌면 너무 순진했던 것이죠. 거란 황제 야루덕광은 여러 번 이를 나무랐지만 한족의 황제는 도무지 반응도 없어 944년 후진을 공격하고 후진의 황제를 부의후(負義侯)에 봉하고 진국을 고쳐 대요국(大遼國)으로 합니다(『新五代史』72 契丹).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이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역사에 이와 같이 철저히 한족화한 나라들은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르네 그루쎄(René Grousset)가 말하듯이 "중국과 페르시아 문화는 비록 정복되었지만 도리어 거칠고 야만적인 승리자들을 압도하고 도취시키고 잠에 빠뜨려 소멸시켜 버렸다. 정복된 지 50년만 지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과 같은 생활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René Grousset,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사계절 : 1998). 33쪽]."라는 것입니다. 거란이나 북위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거란이 원(元)나라 이후 돌연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한 민족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을까.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거란족 실종에 관한 의문" 등으로 호들갑스럽게 이야기되는 식은 아닙니다. 거란이 멸망했다고 그 동호계 주민들이 다 증발하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그 지배층이 지나치게 한화하여 그 계승자들이 없으므로 역사 속에 사라진 듯이 보이지요.
  
  최근 중국학계는 DNA 분석기법을 동원해서 거란의 핏줄은 "중국 동북 지방의 소수 민족인 다얼(達爾)족에 의해 상당부분 계승되고 있다(『중앙일보』 2004.8.5)"고 밝혔습니다. 이들 다얼족이 거론된 이유는 거란이 웅거했던 네이멍구(內蒙古) 초원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한국 언론도 거란의 실체를 확인하는 "과학적 증명"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그들은 다얼족의 시조 설화는 "거란의 한 군대가 이 땅에 와서 지역 방어를 위한 성을 쌓은 뒤 선조가 됐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중국인들이 거란을 아예 다른 민족으로 보려고 하다 보니 나타난 결과지요. 아니면 상식(常識)이 없는 것이지요.
  
  거란족이 멸망하면서 거란 민족 모두가 어디로 도망을 갔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늘로 날아갔든가 땅으로 꺼졌습니까? 중국이나 한국이나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으니 그 민족의 실체를 볼 수 없는 것이죠. 거란은 다만 지배층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고수하여 중국 문화에 흡수되어버린 것이고 그 일반 국민들은 그저 쥬신으로 그 지역에 그대로 살고 있다가 금나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몽골의 백성이 되기도 한 것이죠. 쉽게 말해서 다시 부족(部族) 상태로 회귀한 것일 뿐이죠.
  
  거란은 부족 상태로 금나라는 물론 원나라 때에도 일정한 지역을 독립적으로 지배한 흔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요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금나라는 요나라 거란의 백성들이 반심(叛心)을 가지지 않도록 여진족 2가구가 거란 1가구를 함께 살도록 했다거나(『元史』149 耶律留哥傳), 거란인 9만 명이 고려의 강동에 침입하여 웅거했다거나(『元史』208 高麗) 耶律留哥傳), 거란인들을 때로 단속하고(『元史』11 世祖紀) 요동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농기구를 지원하는(『元史』16 世祖本紀) 등의 기록들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1300년대 이후 역사책에서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들어오듯이 하늘로 날아갔거나 땅으로 꺼진 것이 아니라 몽골과 융합하여 하나가 되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없지요.
  
  몽골이 거란을 경멸하고 중국조차도 거란으로 부르는 것은 같은 민족이면서 한족화(漢族化)하면서 같은 민족을 짐승취급을 하는 데에 대한 분노의 표현입니다. 원나라가 일본을 싫어한 것도 중국과 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가 일본과 가까워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 침공의 원인이 됩니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일본은 비밀리에 고려와 내통하고, 개국이래로 늘 중국과 교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교류를 하기 위한 사신을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 장차 사해를 하나의 집으로 만들려하나 이렇게 서로 즐겁게 통교를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나의 집안이 되겠는가?(日本密邇高麗, 開國以來, 時通中國, 至於朕躬, 而無一乘之使以通和好. 尙恐王國知之未審, 故特遣使持書布告朕心, 冀自今以往, 通問結好, 以相親睦. 且聖人以四海爲家, 不相通好, 豈一家之理哉?以至用兵 :『元史』卷6 本紀第6 世祖)"라고 합니다.
  
  『원사(元史)』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동부나 북부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모르는 여진인이나 거란인들은 모두 몽골인들과 똑같이 대우하고 한나라 땅에 태어나 자란 여진인들은 중국인(한족 : 漢族)과 같이 대우한다(『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중국에서 자라서 중국어를 말하고 중국인과 동화된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하지만 여진이나 거란인들은 몽골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동안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라면 이상한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몽골 - 여진 - 거란 등이 각기 다른 종족처럼 분명히 배웠거든요.
  
  그런데 위의 기록이나 그 동안의 논의를 보면 몽골·여진·거란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만 기준이 되는 것은 한족화(漢族化)하여 쥬신의 특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4) 또 하나의 『고려사(高麗史)』, 『원사(元史)』
  
  다음의 그림을 봅시다. 이 그림은 세계적인 대제국 몽골제국의 직할령을 표시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습 회사의 그림을 알기 쉽게 우리말로 재구성한 그림입니다.
  
 
대몽골 제국과 고려. ⓒ김운회  

  아마 이 그림은 여러분이 항상 보아오던 지도일 겁니다. 무심코 지나쳐서 이 지도의 본질을 못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세계 모든 나라가 몽골의 깃발 아래에 있는데 유독 고려(高麗)만이 남아있습니다. 세상은 오직 몽골과 고려만이 있는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에 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일본과 베트남·인디아는 정벌하기가 힘들어서 못했겠지만 몽골 제국의 수도(首都) 바로 옆에 있는 땅을 직할령(직속령)으로 두지 않고 자치국으로 두었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마 고교 역사부도였다면 여러분들은 으레 한국역사부도이니 한국만 따로 빼놓았겠지 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세계적인 학습회사의 그림들을 번역하고 알기 쉽게 재구성하여 붙여놓았습니다.
  
  이상하죠? 왜 바로 자기의 수도 코앞에 있는 나라를 세계를 제패했던 무력을 가진 원나라가 그대로 두었을까요? 이제 그 의문을 한번 풀어봅시다.
  
  역사를 꼼꼼히 보면, 세계를 무력으로 짓밟은 원나라가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몽골이 전쟁을 거쳐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몽골의 통치자들은 사신을 죽이거나 자기들에게 대항한 군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는데 고려처럼 부마국으로 삼고 국체(國體)를 유지시켜준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일부를 보면, 1224년 원나라는 저고여(扎古雅) 등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도중에 그만 살해되고 맙니다. 그 후 원나라 태종 3년(1231) 살리타이(薩里台, 또는 撒禮塔)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합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이 동생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元史』208 高麗傳). 같은 경우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는 초토화(焦土化)시킨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원나라 황제의 사신을 죽인다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그 시간 이후 잿더미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살됨을 의미하는데 말입니다. 몽골은 항복하면 평화롭게 받아주지만 반항하거나 대항하면 철저히 보복하고 응징하는 특성을 가진 나라지요). 이 부분을 현재 한국의 고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고려는 오랜 항쟁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 맞는 것으로 바뀌었다[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88쪽]."
  
  이상한 일이죠. 몽골 쥬신들이 반도쥬신에 대한 매우 강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나라 조정은 역대 고려왕에게 공주를 출가시켜 원나라 황실과의 혈통적인 결합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원나라 세조는 당시 만주쥬신(여진)들이 고려 땅을 침범하는 일이 있자 이를 엄금하도록 조치하고 관(官)으로 하여금 고려 국민을 보호하게 하고 파사부(婆娑府)에 명하여 군대를 둔전하게 하여 압록강 서부지역을 지키게 합니다(乙未, 禁女直侵軼高麗國民, 其使臣往還, 官爲護送. 命婆娑府屯田軍移駐鴨綠江之西, 以防海道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여러분도 시간이 나면 『원사(元史)』를 한번 보십시오. 이상하리만큼 『원사』에는 고려(高麗)에 대한 기록이 유난히 많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다른 어떤 사서보다도 고려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원나라는 마치 고려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와는 국교(國交)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원사(元史)』에는 신년 새해부터 고려에 대한 기사가 줄줄이 엮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와 관련해서는 조유(詔諭 : 황제가 친히 타일러 말하다), 위무(慰撫 : 위로하여 달래다), 조사(詔賜 : 황제가 친히 내리다) 등의 말들이 따라 다닙니다. 그리고 고려왕이 내조하면 원나라 황제는 우조답지(優詔答之 : 황제가 친히 넉넉하게 이에 보답함)합니다.
  
  『원사』의 세조기(世祖紀)에서는 고려왕이 황제를 속인 죄를 범하여 이를 책망하지만 달력을 보내주었고(詔責高麗欺慢之罪 又詔賜高麗王□曆), 고려왕이 황제의 조서에 대해 답이 없자 사신을 보내어 이를 나무라는(以高麗不答詔書, 詰其使者) 장면들이 나옵니다. 원나라의 세조는 고려의 군신들이 내조하자 "고려와 원나라는 군신의 관계라 할지라도 짐이 느끼는 기쁨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高麗君臣, 感戴來朝, 義雖君臣, 而歡若父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조는 중국과 친한 일본으로부터 고려를 떼어내도록 하는데 만전을 기울입니다. 마치 고려가 딴 곳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지를 시새움하는 듯합니다. 전 세계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세계의 주인 원나라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려운 광경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고려왕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 직접 약을 보내기도 합니다(高麗使還, 以王□病, 詔和藥賜之 : 『元史』卷6 本紀第6 世祖三). 뿐만 아니라 고려의 술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세금을 면해주기도 합니다(免高麗酒課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칸). ⓒ김운회

  제가 보기엔 동아시아의 역사상 (고구려 이후) 원나라 때만큼 반도쥬신이 요동에서 활개를 친 예는 없었을 것입니다. 심양왕(瀋陽王) 제도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원사(元史)』에 나타난 고려 부분을 정리해보려다가 포기했습니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나타나는 고려에 대한 기록 때문에 그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지요. 지나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사』를 보면 세상엔 단 두 나라만 존재하는 듯합니다. 원(元)나라와 고려(高麗), 단 두 나라 말입니다.
  
  마치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반도부여(백제)사의 다른 한 편이라면 『원사(元史)』는 고려사의 다른 한편으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시시콜콜한 고려의 내외 이야기들이 대부분 수록되어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몽골과 고려의 관계는 마치 남녀간의 사랑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몽골은 지속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려고 하고 고려는 피하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몽골은 한족(漢族)과 가까운 것은 다 싫어하는데 유독 고려(高麗)만이 예외였습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습니다. 『원사(元史)』를 보시죠.
  
  "천하를 가진 자 가운데 한(漢)나라·수(隋)나라·당나라·송나라 등이 강성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원나라에 미치지는 못한다. 한나라는 북적(北狄)에게 시달렸고 수나라는 동이(東夷)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서융(西戎)으로 인하여 환란을 겪었고 송나라의 걱정은 항상 서북(西北)에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는 삭막(朔漠)에서 일어나 서역을 병합하고 서하(西夏)를 평정하였다. 여진을 멸하고 고려를 신속(臣屬)시켰고 남송을 평정하여 천하가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 고려는 동번(東藩)이 되어 신하의 예를 공손하게 취하니 이전에는 볼 수가 없었던 일이다(『元史』57 地理志)."
  
  그리고 1270년 고려의 원종이 원나라에 내조(來朝)했을 때, 원나라 황제는 "경(卿)은 내조를 늦게 했으니 제왕(諸王 : 칭기즈칸의 종친)들보다 반열(班列)이 낮게 되었습니다. 경은 이런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元史』7 世祖紀)."라고 합니다. 즉 조금이라도 일찍 원나라에 내조(來朝)를 했다면 원나라 종친들보다도 더 높거나 같은 지위를 줄 수 있는데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거의 천년 동안 몽골의 나쁜 점만 들추어내어 가르쳐왔습니다. 몽골에 대해 공식적으로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면 '야만족'과 같은 놈이라고 매도당해 왔습니다. 새끼 중국인들이 천년 이상을 한국에서 권력을 잡았다는 얘긴가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한국의 새끼중국인들은 고려가 몽골의 속국(屬國)인 점만 강조합니다. 이런 점을 천년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비판 없이 지내왔다는 것이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한국에는 아마 제대로 된 학문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군요. 한족(漢族)과 중국(中國)을 찬양하면 그것은 학문이고, 그 이외의 것을 제대로 보려면 모두 오랑캐로 매도합니다. 그러니 쥬신의 역사가 수천 년 동안 감춰질 수밖에요.
  
  한국과 일본의 새끼중국인들에게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원나라 때 도대체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몇 군데 있습니까?
  
  험준한 산악·먼 바다·밀림 등 몽골이 이르지 못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몽골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국체를 유지한 나라는 고려(高麗)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원사(元史)』를 보면 온통 고려 이야기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제 왜 그런지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왜 몽골인들이 반도쥬신을 이렇게 끔찍하게 대해주었는지 말입니다. 몽골 군대가 갈 수 있는 정복 가능한 땅에서 몽골의 직속령(直屬領)이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바로 고려입니다.
  
  이것을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려의 끈질긴 항쟁의 결과[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87쪽]"라고 하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되지요. 세계를 굴복시키고 복종하지 않은 나라를 온통 잿더미로 만든 나라에게 남송(南宋)의 10분의 1도 안 될 국력(國力)을 가지고 끈질긴 저항으로 직속령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요. 그것도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 현재의 베이징)의 바로 코앞에 있는 국가(고려)가 말입니다.
  
  아무리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식이면 안 되죠. 한국 학생들이 창의성이 없고 비판력이 부족한 이유도 다 이런 교육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앵무새처럼 반복합니다.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 참고서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암기했다가 자기의 느낌인양 말합니다. 한마디로 철저히 유리(羑里)에 갇히게 만드는 것이죠.
  
  제 경험으로는 서울대학생들이 가장 비판력이 없고 맹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직 공부만 하여 학교 우등생으로만 자란 아이들이 대학교 들어와서 논리 정연한 다른 이데올로기를 접하면 그 곳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합디다. 1981년 대학별 본고사(本考査)가 폐지된 이후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980년대부터 오랫동안 서울대학교 학생운동 세력이 말도 안 되는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요즘 많이 떠드는 386(30대로 80년대 대학생활을 하면서 현재 사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도 사실은 신문과 방송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당시 실제로 고뇌(苦惱)하고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을 열심히 했던 분들은 소위 말하는 386처럼 출세를 한 것도 아니지만 하나같이 소박하게 사회에 깊이 들어가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려고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싸구려 저널리즘'에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가장 정확히 보는 사람이 가장 올바른 해답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왜곡(歷史歪曲)은 중국(中國)이 가장 심각한 수준이고 그 다음이 바로 일본(日本)과 한국(韓國)입니다. 모든 것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합니다. 그것도 새끼 중국인의 근성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말입니다.
  
  물론 역사를 어느 정도는 자국중심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너무 지나치니까 문제지요. 사실을 호도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비싼 대가를 치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좀 사실을 바로 볼 때도 되었습니다. 자신이 없는 나라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나라 안에서만 "자기가 최고"라고 떠듭니다. 왜냐고요? 힘도 없고 형편없이 못사는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다릅니다. 뉴욕(New York)의 브로드웨이에도 한국 기업들의 광고판이 붙어있고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한국제품이 즐비합니다.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몇 손가락에 들어가는 세계적인 무역대국입니다. 톰크루즈 같은 세계적인 스타도 자기 영화를 광고하기 위해 한국에 오고 욘사마(배용준)와 같은 세계적 스타도 있습니다. 월드컵도 4강이 아닙니까? 첨단 과학문명의 꽃인 인터넷 인프라스트럭처와 정보통신산업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합니다. 이젠 좀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갑시다. 몽골이 이토록 고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허물을 덮어두려고 한 것은 제가 보기엔 몽골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정체성 때문입니다. 한국인들과 몽골을 하나로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의 부리야트족들은 바이칼 일대를 코리(Khori : 고구려족, 또는 구리족, 또는 고리국의 구성원)족의 발원지로서 보고 있으며 이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재승 선생에 따르면 이런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적인 전설이라고 하지요. 이들은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칸(Khan)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부분은 그 방향에 차이가 다소 있습니다. 즉 제가 보기엔 흑룡강에서 오난강쪽으로 이동해갔을 것입니다.
  
  이 같은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한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서 한국 생활을 경험했던 몽골 쥬신들이 한국인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고 저질의 한국인들이 몽골에서 저지르는 많은 사기 사건들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한국인들의 행태들이 우리들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합니다.
  
  원나라 때 고려 습속이 세계의 중심지인 원나라의 서울에서 크게 풍미하여 고려의'한류열풍'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당시의 '한류열풍'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세계의 지배자들이 고려 한류(韓流)에 열광하여 고려양(高麗樣)·고려풍(高麗風)이란 말이 기록될 정도이니 말입니다. 오늘날 한류 열풍이 미국의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 영국의 런던 등에는 없질 않습니까? 그리고 몽골 제국은 당시 유럽과 중근동의 각종 문물은 물론 세계 모든 나라의 문화를 접해본 사람들이 아닙니까?
  
  몽골의 민족정체성과 관련하여 지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몽골은 부여·고구려의 원류인 바로 고리족(코리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여러 번 지적했지만 한번만 더 보고 지나갑시다.
  
  『몽골비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주목할 만합니다. 알탄 칸(금나라의 황제)이 타타르가 자신에 복종하지 않자 칭기즈칸에 협력을 요청하고 칭기즈칸이 타타르를 정벌합니다. 이 때 칭기즈칸이 받은 칭호가 '자오드 코리(札兀忽里)'입니다(『몽골비사』134절).
  
  여기서 말하는 자오드는 족장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코리족의 족장이라는 말이죠. 이 코리는 바로 고리·고리국·구리(고구리·고구려) 등을 의미하는 것이죠. 칭기즈칸은 이 호칭에 대해 대체로 만족스러워했다고 합니다. 당시 칭기즈칸은 자오드(札兀) 이상의 제후인 '제후타오(招討) 코리'를 요청하였으나 금의 승상 옹깅이 그것은 대금황제에게 결정하도록 요청해보겠다고 하면서 떠났다고 합니다.
  
  몽골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는 고구려는 기원적으로 몽골과 유사성을 가진 민족으로 단언합니다. 부여·고구려의 시조의 어머님인 유화부인은 중세 몽골에서 버드나무꽃(Uda-Checheg)으로 다시 복원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후금의 삼신할머니인 포도마마(佛多媽媽)는 다름 아닌 버드나무(Uda)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몽골계나 부여·고구려·금(만주) 민족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 흑룡강 중상류 일대에서 무성한 가지를 자랑하는 나무는 버드나무밖에는 없다는 것이죠[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칭기즈칸은 분명히 코리족의 족장이었으며 금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성장해왔고 후일 세계정복을 하는 과정에서 남으로 이동하여 금나라를 병합합니다. 그리고 금나라와 힘을 합해 중국경영에 나섭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먼 후일 청 태조가 북으로 몽골의 주요부족을 통일하고 그들과 함께 다시 남으로 내려가 중국경영에 나섰다는 것이죠. 방향만 다를 뿐 결국은 유사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요.
  
  (5) 오해하고 싶은 중국인
  
  중국인들은 과거 흉노나 몽골을 매우 더럽고 천한 민족으로 생각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부터 명나라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북방의 유목민들은 용모는 물론이고 성생활(性生活)도 지저분하고 의식주도 형편없는 똥고양이, 또는 시끄러운 머슴 같은 족속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예절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기(史記)』의 「흉노열전」은 흉노가 얼마나 더럽고 한심하고 흉포한지를 말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책 같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몽골은 노인을 매우 공경하는 예절바른 사회인데, 한족(漢族)들은 몽골을 포함한 모든 쥬신(諸申)들을 마치 예절이 없는 짐승 같은 사회로 묘사합니다. 말씀 드린 대로 한족들이 쥬신들에 대해 이 같은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사마천의 『사기』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지요.
  
  "(흉노는) 젊은 아이들은(壯者) 살지고 맛좋은 것을 먹고 늙은이들은 그 나머지를 먹는다. 씩씩하고 건장한 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늙고 병든 것을 천하게 생각한다(壯者食肥美 老者食其餘 貴壯健 賤老弱 : 司馬遷, 『史記』「匈奴列傳」)"
  
  바로 이 구절이 일반적으로 흉노와 쥬신들을 천하게 보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된 구절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구절이 한족(漢族)들이 만든 사서(史書)들에 묘사된 쥬신과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의심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몽골과 꼬우리족은 족보를 매우 중시하는 민족으로 몽골 속담에 "7대 조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숲 속의 원숭이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쥬신을 마치 조상과 예의도 모르는 오랑캐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쥬신에 대해 무지한지를 보여줍니다.
  
  세계에서 가장 족보를 중시하는 백성들이 쥬신입니다. 그리고 그 쥬신 가운데서도 가장 족보를 중시하는 백성이 한국이지요. 한국의 보학(譜學 : 족보학)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것도 조상을 중시하는 쥬신의 전통 때문입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족보를 중시하는데다가 중국에서 유입된 유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몽골은 결혼의 경우에도 족외혼이 엄격하게 시행됩니다. 몽골에서는 "모르도흐"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말 타고 떠난다."라는 뜻입니다. 즉 엄격하게 족외혼이 시행되었으므로 딸은 한번 시집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말의 "시집가다"라는 의미와 거의 유사하죠.
  
  쥬신이 예의를 중시한다는 것은 말에도 잘 나타나있습니다. 대부분의 쥬신어(한국어·일본어·몽골어·만주어)들은 존대법이 고도로 발달해 있습니다(오히려 이 때문에 디지털 사회에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중국어에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존대법이 없지요. 다만 몇 개의 단어로, 또는 그 사람의 직위 등으로 존칭을 표현할 뿐입니다.
  
  쥬신이 예절을 중시하는 예들은 매우 많습니다. 몽골의 예를 들면 음주나 흡연에 대한 연장자의 예의규범은 아주 엄격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나 일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몽골의 경우 만약 연장자 앞에서 흡연을 할 경우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듣고 연회나 결혼 등 특별한 사유로 인하여 청년이 연장자와 함께 동석해야만 하는 경우 그는 연장자의 허락을 받아 비로소 술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젊은이들이 술집에서 싸우는 일 가운데 대부분이 "너, 왜 반말하니?"하는 식의 예절문제 때문일 겁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일본이나 한국에는 선배들에게 '줄 방망이(선배들로부터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는 것)'를 맞는 일은 흔한 일이었죠. 한국이나 일본이나 연장자를 존중하는 관습이 남아서 때로는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흔히 논쟁이나 말싸움이 벌어지다가 안 되면, "야, 너 몇 살이야? 네가 내게 그럴 수 있어?" 라는 엉뚱한 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참으로 한국적인, 아니 쥬신적인 풍경이지요. 물론 이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몽골 쥬신의 이동식 가옥인 겔도 여기저기 아무나 함께 자고 들어가고 앉고 하는 듯이 보이지만 나이에 따라 다 순서가 있고 위계가 엄격합니다.
  
  『몽골비사』에도 조상이나 연장자들을 숭배하거나 존중하는 기록이 많이 나오고 『황금사(黃金史)』에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안락한 생활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평안한 생활을 누리게 해 준다"라는 오고타이 칸의 치세 목표까지 기록되어있지요.
  
  『고려사(高麗史)』에는 "칭기즈칸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정말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적다면 하늘은 반드시 이를 알 것이다(成吉思嘗 人苟小有孝心 天必知之)."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쥬신의 사회가 사마천이 말하는 귀장천노(貴壯賤老)가 아니라 노인이나 연장자를 대단히 공경하는 사회임을 문헌적으로 입증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 몽골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6) 슐랭에서 설렁탕까지
  
  몽골과 한국, 그리고 일본 참으로 멀리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은 유목민, 한국과 일본은 농경민인데 아무리 쥬신족이라 해도 음식문화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농경민과 유목민의 음식문화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데도 공통성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역사적으로 몽골과 한국은 음식을 조리할 때 탕을 위주로 한 조리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름 튀김을 위주로 하는 중국이나 바비큐를 위주로 하는 돌궐, 또는 유럽인들과는 많이 다르지요. 이러한 음식 문화의 유사성 때문에 원나라 때에는 고려의 음식들이 유행하기도 했지요. 갈비를 먹을 때 끝까지 벗겨먹는 것도 두 민족만의 특징입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한국 음식은 어떤 의미에서 유목민인 쥬신의 음식이 농경민족으로 변화되었을 때의 변형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독특하지요. 원나라 당시 몽골 쥬신들이 반도쥬신(고려) 음식을 보았을 때 그 느낌이 어떠했을까요? 무엇인가 공통적이고 비슷한데 그 재료가 좀 달라져서 새롭게 어우러진 느낌이니 얼마나 음식궁합이 맞았겠습니까?
  
  고려의 상추쌈을 먹어본 원나라 시인 양윤부(楊允浮)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이성우, 『韓國食生活의 歷史』(修學社 : 1996) 58쪽 참고].
  
  "해당화는 꽃이 붉어 아름답고 살구는 노랗게 익어 보기 좋구나,
  더 좋은 것은 고려의 상추,
  마고(麻姑) 향기보다 그윽하네."
  
  꼬우리족이나 몽골족들은 소의 갈비를 구워서 뜯어먹거나 소와 같은 가축의 뼈를 푹 삶아서 그 물에 소금과 파를 넣어서 간편한 식사를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슐렝'이라고 하는데 설렁탕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겠지요. 『몽골비사』에 보면 고대 몽골인들이 슐렝(sulen)으로 아침식사를 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몽골비사』229절). 조선 영조(1724~1776) 때 간행된 몽골 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공탕(空湯)'이라고 적고 '슈루'라고 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한국이 원조(元朝) 같았던 곰탕이나 설렁탕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아시겠죠.
  
  어떤 분은 몽골시대의 풍습이 남았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중국은 1백년 이상 직접 지배를 받았는데도 왜 설렁탕을 먹지 않습니까?
  
  관련 전문가에 따르면, 조선 시대 요리서의 기본인 『산림경제』(1715)의 요리편의 고기 요리는 60%가 원나라 초기의 가정백과사전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서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고기요리법은 80~90%가 굽는 요리라는 것이지요(이성우, 앞의 책, 61쪽).
  
  이것은 과거 수천 년 전의 맥적(貊炙)의 전통을 이은 것이지요. 적(炙)이란 한국인들이 즐겨먹는 것으로 미리 조미하여(『儀禮』) 꼬챙이에 꽂아서 불 위에 굽는 것(『禮記』)이라고 합니다. 한족(漢族)들은 미리 조미하지 않고 굽거나 삶아서 조미료에 무쳐먹는 데 반하여 예맥은 미리 조미하여 구어서 먹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같습니다. 전문가에 의하면 상하기 쉬운 고기는 부추나 마늘로 조미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이성우, 앞의 책 24쪽).
  
  그런데 반도쥬신은 오랫동안 농경생활을 하다 보니 '고기 잡는 법'도 다 잊어 먹어버린 모양입니다. 고려시대 때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의 말이 걸작입니다(이성우, 앞의 책, 60쪽 참고).
  
  "고려에 와보니 사신을 대접한답시고 양이나 돼지를 도살하는데 네 다리를 묶고 불 위에 내던지고, 만일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때려죽인다. 이러니 뱃속의 창자가 온통 갈라져 오물이 흘러나와, 이 고기로 요리한 음식에 고약한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몽골 제국 시대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살법이 고려에 많이 전수된 것으로 보입니다.
  
  몽골인들이 즐겨먹는 전통요리인 랍샤는 신기하게도 우리의 칼국수와 제작과정이나 맛이 거의 동일합니다. 그리고 몽골인들은 파나 야생마늘과 같이 다른 민족들, 특히 한족(漢族)들이 피하는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몽골의 경우 중국과는 달리 남녀의 역할 구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요리를 포함한 부엌의 일이나 가사 일은 철저히 여성의 몫입니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몽골 남성들이 매우 게으른 것으로 보이지만 대가축의 방목(放牧)이나 야생짐승들로부터, 또는 외부 침입자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거나 수렵의 일이 남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가사(家事)를 돌볼 틈이 없지요. 몽골의 남자들은 밖에서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겔(이동식 가옥)에서는 그냥 쉬고 있는 것뿐이지요. 외부인들이 볼 때는 아내가 열심히 일하는데 그저 가만히 빈둥거리는 남자만 보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유풍은 한국이나 일본에 그대로 남아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미 오래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사회로 정착해온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이 같은 유풍이 남아서 남녀간의 역할분담에 대한 갈등이 심화되고 있지요. 즉 현재의 한국 사회는 돌볼 가축이 없는 상태인데도 남녀의 역할은 변함이 없어 (맞벌이 부부라도) 여성의 가사분담이 매우 심한 고통이 되고 있죠. 특히 극단적인 경우 명절날에 여자들만 일을 하여 한국 여성들은 심각한 정도의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린다는 보고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같은 형태의 농경민족인 중국인들은 남자들도 요리를 즐길 뿐만 아니라 요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德目)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모든 것은 중국인 흉내를 내면서 어찌 이 부분만은 안 따라하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가사(家事)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라 이런 점에서만은 비쥬신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한(恨)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어차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자살율(自殺率)도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일본도 마찬가지지요). '한(恨)'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일종의 쥬신이 가진 '집단 무의식'으로 '집단 우울증'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쥬신은 어떤 지역에 있든지 유목생활에서 오는 어떤 집단 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단한 유목생활과 떨어져 살아가야 하니 외롭고 쓸쓸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울증 같은 것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사람을 보는 게 더없이 반갑고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따뜻함을 나누려 하지요. 반면 전형적인 농경민인 중국인의 경우에는 사람의 살이 맞닿는 것을 싫어합니다.
  
  한국의 한(恨)과 몽골 쥬신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염세사상(厭世思想)은 일맥상통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오고타이칸의 언행입니다. 오고타이칸은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寡婦)들을 위해 재물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오고타이칸은 "재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돈은 무엇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사라지는 존재인 것을 …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 다만 인간의 기억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고타이칸은 만호장 가운데 재물을 모으는 자가 있자 훈시하여 말합니다.
  
  "그대는 물질의 진가를 구분하는 눈이 없군 그래. 사람은 멋있게 살고 멋있게 죽어야 하는 것이오. 그대는 그대의 재산이 그대의 죽음으로부터 그대를 지켜줄 것으로 보는가?"
  
  당시 몽골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기 때문에 오고타이칸의 훈시는 불교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몽골의 고유사상으로 봐야겠지요.
  
  몽골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한자어(漢字語)나 한문(漢文) 표현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몽골에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 문화를 숭상하는 전통이 없지요. 그래서 몽골어는 한문을 가공하여 배우고 쓰기에 편리하게 만든 일본어와도 다릅니다.
  
  그러나 몽골어는 기본적으로 어순이 우리말이나 일본어와 같고 문법관계를 조사와 어미로 나타내는 것도 우리말과 동일하고 관계대명사·관사·부정관사·성(性)과 수(數)의 일치가 없는 것도 우리말과 같습니다. 몽골어는 성조의 강세가 없지요. 이 또한 한국어와 같은 것이죠. 몽골 사람들은 120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거의 7백여 년을 전통 몽골문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문자는 우리말과 같이 실제 생활에 나타나는 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발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키릴문자에 두 글자를 첨가하여 오늘날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몽골의 나이 관념은 우리와 흡사합니다. 우리나라는 '한국 나이'라는 이상한 나이 개념이 있죠? 그런데 이런 한국 나이 개념이 몽골과 똑같다는 거죠. 몽골은 여자가 임신하는 순간부터 태아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간주합니다(천손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몽골인의 나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사람들보다 한 살이 많게 됩니다. 중국과는 다르지요. 아이를 기를 때는 실이나 천으로 천막의 기둥과 기둥을 묶어서 흔들거리는 장치(요람)에다가 둡니다.
  
  의복 생활에 있어서도 몽골은 한국과 유사한 측면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몽골은 외투도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 없어서 매우 간편합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말 타기에 편하게 만든 것이죠. 여자의 치마도 주름을 잡아서 둘러 입는데 이것은 한족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중국인과는 달리 주름치마를 즐겨 입죠.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상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접촉을 싫어하는 중국인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몽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이것은 쥬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몽골은 설날이면) 서로 껴안고 인사를 나눈다."라고 말합니다.
  
  이 점은 만주 쥬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주 쥬신의 인사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만나면 머리를 숙여 인사합니다. 이것은 요즘 한국인들이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둘째, 친구나 연인을 만났을 때 반드시 얼굴을 껴안고 얼굴을 맞댑니다(李民寏『建州見聞錄』). 이것을 포견례(抱見禮 : 허리를 끌어안고 서로 좋아하는 것)라고 하지요. 셋째, 부녀자가 집안에서 서로 만나면 무릎을 꿇어 앉아 오른 손가락을 눈썹 끝에 갖다 댑니다(李民寏『建州見聞錄』).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이 가운데 만주쥬신의 가장 보편적인 전통 인사법은 바로 포견례(抱見禮)라고 합니다(『世宗實錄』59 15年 2月).
  
  이 포견례는 요즘 한국에서는 많이 사라진 감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손님들이 오면 버선발로 나가 손을 잡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고 부둥켜 안고 하면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일을 집안에서 흔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10~20년 전만 해도 우리의 가구들을 보면 작은 가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붙박이 농경민들에게는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죠. 즉 우리는 오래전에 농경생활을 시작했는데도 이동이 쉬운 작은 가구들이 많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이죠. 이 또한 유목민의 생활습관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에이 설마,"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요즘 한국을 보세요. 아파트문화가 고도화되었는데도 한국인들은 아직도 맹목적으로 가구(家具)들을 들고 다닙니다. 그래서 30층, 또는 그 이상이나 되는 아파트도 이사할 때 무거운 가구를 올린다고 아슬아슬한 광경이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합리적인 사람이라 가구를 없애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집안사람들도 설득을 못하고 있습니다. 농경을 한 지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별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몽골인들은 우리와 같이 손님을 잘 접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마 쥬신족들은 이방인(異邦人)을 가장 환영하는 민족일 겁니다. 이것은 외롭고 고단한 유목생활에서 오는 전통이겠지요. 어느 곳을 가든지 여행객들은 큰 대접과 환영을 받지요. 몽골은 이방인들이나 여행객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언제든지 우유를 주어 여행에 따른 피로를 식혀주지요.
  
  이 점과 관련해서 저는 한국에서는 확실히 경험했습니다. 저는 1980년대 초 대학 다닐 때 돈 한 푼 없이 한국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때 느낀 것은 우리나라는 참으로 인심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환영을 받았습니다. 생긴 몰골은 오랜 여행으로 '상거지'였는데도 음식이나 잠자리는 어느 때나 다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마을을 찾아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입니다. 당시의 여행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혀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관찰해본 결과 도시화(都市化)나 자본주의화가 느리게 진행된 곳일수록 예외 없이 인심이 좋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이 달라집디다. 요즘 대학생들은 무전여행을 하면 안 됩니다. 굶어죽기 알맞지요. 그런 점을 보면 한국은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제가 일일이 경험한 것이라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불과 20년 전만해도 한국은 무전여행이 가능한 나라였습니다. 언젠가 세월이 조금 흐른 뒤 미국인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가 제가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놀이는 씨름입니다. 우리나라도 30~40년 전까지는 가장 일반적인 놀이였죠. 씨름은 흉노나 고구려의 벽화에도 등장하는 북방고유의 무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씨름은 북방 기마병들이 육탄전을 벌일 때 쓰는 무술입니다. 일본의 스모나 한국의 씨름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죠. 몽골어에서 '쉬룬'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뜻은 "격한, 포악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쉬룬(몽골) - 씨름(한국) - 스모(일본) 등의 변화 과정 속에서 씨름은 다소 변형되어 정착합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129쪽].
  
  오늘날 몽골씨름의 원형은 일반적으로 요(遼 : 거란)의 씨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1931년 요나라 동경(東京遺址)에서 팔각형 백색 도관(陶罐)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의 8면에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요. 그리고 이 씨름은 요나라를 이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금(金)나라 때는 주류민족이었던 만주쥬신(여진)은 물론 피지배층이었던 한족(漢族)들도 씨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씨름이 일종의 전투무술이었기 때문에 한족들이 씨름에 몰두하는 것을 금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우려합니다. 그리고 전투무술의 비결들이 알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겠죠. 그래서 금나라의 장종(章宗 : 1189~1208)은 '여진인들만 씨름을 하라'는 칙령을 반포하여 중국에서는 씨름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금나라에서 씨름은 현재의 태권도와 같은 국기(國技)였던 것이죠[장장식,『몽골민속기행』(서울 : 자우출판, 2002) 311쪽]. 그 후 이 씨름의 전통은 몽골이 계승하게 되지요.
  
  결국 거란 - 금 - 몽골 쥬신족에게 있어서 씨름은 오늘날의 씨름과 같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전투무술을 포함한 상무적인 무술로 생각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법도 포함되겠지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금나라의 장종이 한족들이 씨름을 하는 것을 금할 까닭이 없지요.
  
  그런데 요나라의 씨름도 결국 그 근원에는 고구려의 수박(手搏)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다소 특이합니다. 고구려 벽화에서는 서로 엉켜서 하는 씨름 장면도 있고 마치 두 사람이 태권도 대련을 하듯이 거리를 두고서 손바닥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벽화에는 게임의 내용이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죠. 그래서 지금의 씨름과는 조금 다른 것이죠. 그리고 이 무술이 고구려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에 "충청도 은진현에 매년 7월 15일 인근의 사람들이 모여 수박을 즐기고 승부를 다투었다(忠淸道恩津縣界每歲七月十五日 傍近兩道居民聚爲手搏戱以 爭勝負 : 『新東國與地勝覽』卷34)"는 기록이 보입니다.
  
  고구려의 멸망(668)·발해의 멸망(926)·통일신라의 멸망(935) 등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의 유민(遺民)이 발생하고 이들이 이 같은 맨손무술, 또는 씨름을 확산시켰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발해·요(遼 : 거란)·금(金)·몽골·후금 등과 한반도(고려)의 씨름이 동시에 발전하였겠죠. 그렇다면 씨름은 쥬신 전역에 걸쳐서 독특하게 현지에 맞게 적용되고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신체적 접촉을 싫어하는 중국은 소림무술(少林武術)과 같은 권법(拳法)으로 발전했겠고, 쥬신족들은 서로 엉켜서 하는 유도(柔道)나 레슬링·씨름 쪽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몽골과 우리 사이에 놓여진 많은 쥬신적인 요소들을 보았습니다. 몽골은 어떤 의미에서 오래 전에 우리가 떠나온 고향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긴 세월 동안 변화하지 않으면서 고향을 묵묵히 지켜온 그들에게 저는 경의를 표합니다. 비록 그 동안 우리가 중화의 그늘과 늪에 빠져 그들을 형제로 대하지 못했지만 이젠 그들과 함께 새로운 디지털 시대를 열어가는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김운회/동양대 교수

 

 

 

 

칭기스칸을 낳은 동몽골의 푸른 호수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우리는 왜 싸웠는가.
우리는 왜 같은 핏줄끼리 칼과 활을 겨누어야 했는가.
내 아버지는 왜 독살당해야 했고
내 어머니는 왜 납치되어야 했으며
나는 왜 이복형을 살해해야 했고
내 아내는 왜 적장에게 끌려가 강간당하고 그의 아들을 낳아야 했는가.
나는 왜 적장을 죽이고 그 조카딸을 며느리로 삼아야 했는가.
나는 왜 적장을 죽이고 고아가 된 그 아들을 의형제로 삼아
경호 실장으로 데리고 있어야 했는가.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운명이 그렇게 결정해 주었는가.
아니면 우리 몽골 유목민들만이 유별나게 잔인한 체질이어서 그랬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하늘에 맹세코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한 데 있다.
바깥세상을 보면 드넓은 초원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곳에서 가축들을 배불리 먹이고 그 가축들을 잡아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아비규환의 내전을 수십 년 동안 벌릴 이유가 없었다.


이제 모두가 하나가 된 만큼 지옥 같았던 과거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바깥세상으로 나가자.
서로에게 겨누었던 칼과 활과 말머리를 바깥세상으로 돌리자.
그리하여 누구나 몽골고원만한 초지를 갖게 되고 가축을 배불리 먹이면
우리는 싸워야할 이유가 없다.


그 길만이 내 아버지가 독살되고
어머니가 납치됐으며 이복형이 살해되고
아내가 강간당한 한을 푸는 길이다. 나뿐이 아니다.


그대들도 마찬가지다.
당신들이 미망인이 된 이후,
전장에서 부상당해 장애자가 된 이후,
가족들이 노예로 끌려가거나 주린 배를 움켜쥐다 못해
흙과 자갈을 먹다가 죽어간 그 한을 푸는 길이다.

그 길만이
우리의 후손들을 전쟁의 공포, 가난의 공포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는 길이다.

자, 나와 내 아들들을 비롯한 내 가족들이 앞장서서 길을 열 것이다.
그리고 과실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것이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다시는 지긋지긋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고원 밖으로 나서자.

수천년을 유목민과 함께 흐르는 몽골의 강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00년 전, 1206년에 태무진이 몽골세계제국의 출범을 선포하고 대양과도 같은 칸, 가장 포용력이 넓은 칸이란 뜻의 칭기스칸으로 취임하면서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연설문이다. 물론 이 연설은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몽골의 학자들에게 자문과 검증을 받아서 임의로 작성한 것이다. 이점 오해가 없기를 거듭 바란다.


올해가 칭기스칸의 제국 탄생 800주년이라 그의 연설문을 써 본 것인데, 이는 몽골과 칭기스칸에 관한 기초 정보를 가진 사람들에게나 읽을 만한 글일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쓴 글'이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당혹스런 오해 때문이다.

8년 전, [밀레니엄맨]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그 책 안에 '칭기스칸의 편지'라는 글을 써 실었다. 당시는 대한민국에 IMF 한파가 몰아친 시대였다. 정리해고, 명예퇴직을 당해 길거리에 내쫓긴 사람들에게, 그런 부모들 앞에서 차마 슬퍼할 수도 없었던 그들의 아들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 밀레니엄맨이란 책, 특히 '칭기스칸의 편지'는 신문기자로서 또 몽골 연구가로서 할 수 있는 나의 충정이었다. 그래서 편지는 '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짧은 편지글이 진짜 칭기스칸이 쓴 편지로 오해되어 실리곤 한다. 칭기스칸이 남긴 말이라는 등, 칭기스칸의 충고라는 등의 이름으로 변해 한 포털사이트에만도 2000여개가 넘는 블로그에 이 글이 실려 있다. 특히 요즘은 칭기스칸과 몽골 유목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보니 새로 출간되는 책들에서도 그 글을 머리말로, 또는 광고 문구로 버젓이 쓰고 있다. 그 사람들이야 진짜 칭기스칸이 보낸 편지인줄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편지가 '한국의 젊은이들아!'로 시작되기 때문에 칭기스칸이 아니라 내가 쓴 줄 뻔히 알면서도(고려를 침공한 것은 그의 아들 어거데이칸 시절이며, 800년 전의 칭기스칸이 800년 후의 한국에서 IMF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을 리가 없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베꼈을 것이다. 무지 탓이든 약삭빠르고 후안무치한 상혼 탓이든 저작권 소송을 제기할 생각이 아직은 없지만, 나로선 참 쑥스럽고도 어이없는 일이다. 심지어 한 학교 선배는 나에게 “자네는 칭기스칸 연구자니까 이 글 좀 읽어봐라”면서 내가 쓴 글을 이메일로 보내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어쨌든 칭기스칸이 보낸 편지(?)의 전문을 소개하면 이렇다. [밀레니엄맨 칭기스칸]에 실린 내용이고, 내가 쓴 편지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어려서는 이복형제와 싸우면서 자랐고, 커서는 사촌과 육촌의 배신 속에서 두려워했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땅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비린내, 마른 나무마다 누린내만 났다. 천신만고 끝에 부족장이 된 뒤에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적진을 누비면서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나는 먹을 것을 훔치고 빼앗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유일한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는 데서 자랐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 데 동원한 몽골인은 병사로는 고작 10만, 백성으로는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내가 말을 타고 달리기에 세상이 너무 좁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결코 내가 큰 것은 아니었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약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글이라고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고, 지혜로는 안다 자모카를 당할 수 없었으며, 힘으로는 내 동생 카사르한테도 졌다. 그 대신 나는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고,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나는 힘이 없기 때문에 평생 친구와 동지들을 많이 사귀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나를 위해 비가 오는 들판에서 밤새도록 비를 막아주고, 나를 위해 끼니를 굶었다. 나도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고, 그들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
나는 내 동지와 처자식들이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빛나는 보석으로 치장하고, 진귀한 음식을 실컷 먹는 것을 꿈꾸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린 끝에 그 꿈을 이루었다. 아니, 그 꿈을 향해 달렸을 뿐이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땡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적에게 포위되어 빗발치는 화살을 칼로 쳐내며, 어떤 것은 미처 막지 못해 내 부하들이 대신 몸으로 맞으면서 탈출한 적도 있었다. 나는 전쟁을 할 때면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극도의 절망감과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납치됐을 때도, 아내가 남의 자식을 낳았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숨죽이는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나는 전쟁에 져서 내 자식과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져 돌아오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더 큰 복수를 결심했다. 군사 1백 명으로 적군 1만 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죽기도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흘러가 버린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 나갔다.


알고 보니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   

 

 

 

한국의 국제표기는 Korea, 몽골은 왜 솔롱고스라 부를까?

 

일반적인 한국을 지칭하는 단어는 다들 알다시피 유럽과 영어권에서는 코리아(Korea)이다. 프랑스는 Corée, 이탈이아와 스페인은 Corea, 포르투갈은 Coreia로 쓰는데 표기법의 차이일 뿐 다르지 않다.

 

일부 주장에 의하면 원래 한국의 영어표기는 Corea인데 일본이 합병하면서 Japan보다 순서가 앞에 오는 것을 꺼려서 강제로 Korea로 바꾸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 호흥하고 또 의도적으로 Corea라고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국가의 표기를 강제로 바꾼다고 유럽각국들이 거기 호흥해서 일시에 바꾸었다고 보기 힘들다.

 

더 정확한 설명은 이렇다. 예외는 있지만 영어권 국가중 라틴어의 직계후손격인 프랑스를 위시한 로망스계열은 첫 문자를 ‘C’로 그 외 유럽언어들은 ‘K’로 쓴다. ‘C’로 사용할 경우 발음이 [k] [s] [ts]등으로 나는데 반해 ‘K’로 사용할 경우 거의 [k]로만 사용된다. 따라서 로마자표기 언어중에서 한국을  K-로 표기하는 국가가 C-로 표기하는 국가에 비해 월등하게 많다. 즉 언어적 관행과 발음상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 Korea가 되었다고 하는게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역시 예외는 있지만 아시아권에서는 한국 혹은 남한을 자국의 표기법에 따라서 소리나는 대로 부른다. 중국이 한궉, 일본이 강곡꾸, 베트남에서는 한꾸옥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런데 몽골은 유독 한국을 솔롱고스(Solongos/Солонгос)라고 부른다.

 

솔롱고스? 몽골어 사전에는 나오는 뜻은 이렇다.

 

[한몽몽한사전, 울란바토르대학교저]

* Солонго(솔롱고) : 1.무지개  2.스펙트럼, 분광 

* Солонгоc(솔롱고스) : 한국

 

솔롱고스로 불리우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에 대해 4가지 정도의 가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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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지개

솔롱고는 무지개라는 뜻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솔롱고스는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들은 원나라시절 고려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왕비로 데려 오면서 왕이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불렀다는 구전이 있다. 그때의 원나라 왕은 혜종이었고 왕비가 된 고려여인은 기황후인데 실제로 후에 그녀의 몽골이름이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이었으니 근거가 없지는 않다.

 

2. 색동저고리

역시 원나라시절 수 많은 고려여인이 공녀로 차출되어 몽골로 보내졌다. 공식기록으로는 원나라 황실로 입적한 수가 150여명이지만 전쟁기간을 포함해 100여년간 개별적으로 끌려간 여인의 수는 수십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아름다운 여인들이 색동옷을 입고 등장하는 바람에 무지개의 나라라고 불렀다. 척박한 환경에서 고기만 먹던 그들에게 동일한 북방계통의 고려여인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3.신라/서라벌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신라 혹은 서라벌은 한국을 지칭하는 대표적 단어였으며, 중세 여진족과 그 후대 만주족이 신라시대 이후 한국을 솔고(Solgo) 솔호(Solho)라고 불렀다. 이런 호칭을 몽골이 받아들여서 솔롱고가 되었다.

 

4.솔론족

무지개와 색동저고리는 동화적 상상일 뿐이다. 징기스칸시절 누런족제비란 뜻의 솔론(Solon)족이라고 있었는데 이들을 솔롱고스라 불렀다. 족제비는 내몽골 중동부 및 동부지역, 한국, 몽골, 시베리아 일대에 서식하는데, 이런 이유로 솔론족은 몽골의 동쪽부터 만주지역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호칭으로 불렸다.

 

다른 이름으로 이들을 메르키트(Merkits)족이라고도 한다. 사학자들은 징기스칸의 아버지가 메르키트족 여인 후엘룬을 약탈하였고 후에 징기스칸을 낳았는데 이미 임신중이라는 정황으로 인해 징기스칸을 메르키트의 후손으로 거의 단정하고 있다. 메르키트는 발해유민국 흑수말갈족을 일컬으며 따라서 징기스칸의 혈통은 당시의 솔롱고스족이 된다.

 

이후 메르키트족의 보복으로 징기스칸의 아내 부르테를 뺃기고 되찾는 후 그들을 아예 섬멸하였고 그 왕족의 아내와 딸을 차지하였다. 왕비는 아들에게 주었고 그는 딸을 헌납받았는데 이 여인이 몽골의 전설적 미인이라고 하는 훌란공주이다.

 

세상에!! 약탈해서 어미를 아들에게 주고 자기는 딸을 취한다? 이런 야만족들.

 

어쨌든 훌란공주는 솔롱고스공주라고 기록되었고 솔롱고스는 당시 발해 혹은 발해유민국을 의미하였다.

 

발해를 계승한 것으로 여긴 고려가 솔롱고스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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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솔롱고스로 불리게 되었느냐하는 것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몽골인이나 몽골을 약간 아는 한국사람들의 술자리 주전부리일 뿐이지만 필자는 얼마전까지 색동저고리 가설을 거의 믿었었다. 이렇게 정리를 해보니 모두가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어 보이긴 하다.

 

 

 

 

"한국인 갓난아기 97%가 '몽고반점' 있다" 

대표적인 몽고점의 모습.

 

 

 
"한국인 갓난아기 97%가 '몽고반점' 있다"

제일병원 분석, 같은 몽골계 중·일보다 월등히 많아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한국인 갓난아이의 97.1%에서 몽고반점으로 불리는 '몽고점(Mongolian spot)'이 관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과 중국에서 몽고점을 갖고 태어난 갓난아기의 비율보다 10% 포인트 이상 높은 수치다. 몽고점은 갓난아기의 엉덩이나 등, 손 등에 멍든 것처럼 퍼렇게 보이는 얼룩점으로, 보통 7살 이전에 없어진다.

관동대의대 제일병원 소아청소년과 신손문 교수팀은 2012~2013년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출생한 신생아 1천96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같이 분석됐다고 29일 밝혔다. 의료진에 따르면 몽고점은 조사 대상 신생아의 97.1%에서 관찰됐다. 발생위치는 엉덩이 및 몸통 부분이 97.3%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 팔(1%), 다리(0.8%), 가슴과 등(0.7%), 머리와 목(0.2%) 등의 순이었다.

눈길을 끄는 건 우리나라 갓난아기의 몽고점 발생률이 같은 몽골계인 일본이나 중국보다 크게 높았다는 점이다. 인종별 몽고점 발생률은 일본 81.5%, 중국 86.3%, 미국 인디언 62.2%, 서양인 6.2%였다. 갓난아기들에게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경계가 불투명하면서 연한 핑크빛의 반점으로 나타나는 '연어반'이었다. 혈관종의 하나인 연어반은 조사 대상 신생아의 30.8%에서 관찰됐는데, 위치는 뒤통수(62.8%), 눈꺼풀(34.9%), 이마(15.2%) 등의 순서로 많았다.

이밖에 얼굴과 몸에 빨갛게 발진이 일어나면서 태열과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는 '신생아 중독성 홍반'은 출생 후 48시간 이내에 10.2%에서 관찰됐다.
이 홍반은 성별에 따른 차이는 없었지만, 미숙아(4.2%)보다 만삭아(10.7%)에서 발생률이 높았다.

신손문 교수는 "한국의 신생아에게 몽고반점이 많은 것은 유전적 요인이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면서 "하지만 몽고반점 발생률이 높다고 해서 우리가 더 순수한 몽고 혈통이라고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결과를 담은 논문은 대한신생아학회지 최근호에 발표됐다. bio@yna.co.kr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

[역사탐험] 한 古代史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글 | 주몽예 북방민족사학자·법률학 박사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
  칭기즈 칸(1162~1227년)이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조금 지난 1260년경 페르시아 사가(史家) 주바이니(Ata^-Malek Juvayni·1226~1283)는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史書)를 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세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 칸(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2004)》이라는 책에서 칭기즈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칭기즈 칸의 선조는 누구일까?
 
  12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를 보면, 칭기즈 칸에서 위로 10대(代)를 올라가면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그녀에서 다시 10대를 더 올라가면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우리는 이 부르테 치노가 당연히 몽골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칭기즈 칸과 그의 조상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는 책 이름을 《몽골사》나 《칭기즈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이라는 말을 붙여 《몽골비(秘)사》라고 한다. 왜일까? 바로 칭기즈 칸 선조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칭기즈 칸 관련 역사책들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놀랍게도 칭기즈 칸의 직계 시조는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이다. 칭기즈 칸은 그의 19대손(代孫)이다.
 
  칭기즈 칸이 ‘칸(=왕=황제)’이 되기 전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이다. 이 이름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는 대조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의 옛 소리인 ‘텡기즈 콘(Тenggizkon=팅기즈 칸=팅궤트 칸)’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예이자, 발해국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한 것이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종족 이름으로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몽골’이라는 말은 ‘말갈(靺鞨)’, 곧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에서 나온 것이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
 
《집사》를 지은 라시드 웃딘의 동상.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기반을 잡은 일칸국(Il Khanate·지금의 이란 및 이라크 지역에 있던 몽골제국의 칸국 중 하나-편집자 주)의 재상(宰相)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은 1310년경 《집사(集史)》라는 역사책을 지었다. ‘모든 튀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고 하는 이 책은 ‘튀르크와 모골(몽골의 튀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의 4대 칸이었던 울룩벡(Ulugh Beg·1394~1449)이 집필한 《사국사(Tarixi arba’ ulus)》에는 ‘에르게네 콘’을 ‘아르카나 콘(Arkanak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몽골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집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 《집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필자 주)에 다른 튀르크 종족들과 적대와 대립을 벌여,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두 가족은 적(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콘이었다.
 
  …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이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서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서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을 해서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키얀에 소속된 지파가 그 풀무들을 불었다고 한다. 네쿠즈라고 알려진 종족과 그 지파인 우량카트 종족도 마찬가지로 불었다고 한다.〉 (《김호동 역주의 라시드 웃딘의 집사 부족지》, 파주, 2005, 252~256쪽)
 
몽골, 타타르, 튀르크

 
 
칭기즈 칸은 스스로 자신의 종족을 ‘몽골’이라고 일컬었다. 원래는 칭기즈 칸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것이었지만, 후일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튀르크·페르시아 등에는 ‘모골’, 인도에는 ‘무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타타르(韃靼)’는 칭기즈 칸의 몽골 종족과 대립하다가 칭기즈 칸에게 정복된 종족 중 하나였지만, 중동이나 서방세계에는 몽골족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이후에는 몽골족을 ‘달단’이라고 칭했다.
 
  ‘튀르크(突厥)’는 6세기 이후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족으로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튀르크로 알려졌다. 후일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등이 중동 지역의 패자(覇者)가 됐다. 중동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튀르크족은 물론 몽골족과 타타르족을 통틀어서 ‘튀르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생존자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한편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래전 옛날 엘 콘(El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ibn Faridun)은 타타르 칸(Totor Khoni)인 세빈치 칸(Sevinchkhon)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
 
  엘 콘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엘 콘의 아들 카욘(Kayon)과 엘 콘의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그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 콘(《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사》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의하면, 이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집사》가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 칸의 선조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Kiyot)씨가 칭기즈 칸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사》가 칭기즈 칸의 직계 선조로 거명한 카욘의 아버지 엘 콘은 《튀르크의 계보》(17세기 히바 칸국·Xiva xonligi·의 아불가지 바하디르 칸이 지은 역사책) 등 다른 사서들에서는 일 한(Il Ha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 콘(일 한)과 그의 아들 ‘카욘/키얀(Kiyan)’은 과연 누구인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 일 한은 바로 일하이다. 일 한과 일하는 같은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 기록을 통해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 한이 대야발의 아들 일하라는 것은 그의 아들 키얀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야트’는 ‘클(大)’씨라는 뜻
 
  그렇다면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키야트(《사국사》의 ‘키요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키요트씨는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놀랍게도 바로 ‘걸(乞)’씨의 옛 소리(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면 ‘khiot/qiot’인데, 《집사》 등이 말하는 ‘키야트’와 정확히 일치한다. ‘걸’씨는 우리말 ‘크다’에서 나온 ‘클’씨를 음차(音借)한 것이고, ‘대(大)’씨는 그 뜻(의미)을 따른 한자를 성으로 삼은 것으로,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乞乞仲相)이었지만, 대조영은 왕조를 세우면서 ‘대’씨를 자신의 성으로 삼았는데, ‘걸’이나 ‘대’는 모두 ‘크다’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명칭은 ‘걸씨(乞氏)’, 곧 ‘클씨(大氏)’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키얀의 성씨도 ‘키요트’씨, 곧 ‘걸씨’, 달리 ‘클씨’라는 얘기가 된다.
 
  라시드의 《집사》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쓰면 ‘산골 물 간(澗)’이다. 키얀을 한자로 표기하면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 된다.
 
  《사국사》에서 ‘카욘’과 함께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다고 한 ‘엘 콘의 양자 누쿠즈(《집사》의 ‘네쿠즈(Nequz)’, 《튀르크의 계보》 등의 ‘니쿠즈(Nikuz)’)는 누구일까? 그는 발해 제2대 왕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 도리행(都利幸)의 아들인 ‘님금’이다.
 
  《사국사》에서는 누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이라고 했다. ‘다를라킨’은 곧 무왕(武王)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을 의미한다. 《송본광운》 등을 참조하면 ‘도리행’의 8~9세기경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幸, 行)’은 ‘항’으로도 읽는데(‘行列’의 경우), ‘항’의 8~9세기경의 발음은 ‘캉(khang)’이었다.
 
  몽골/퉁구스어나 북방 중국어에는 발음을 하면서 ‘r(ㄹ)’ 발음을 집어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중삽입(語中揷入) 소리라고 한다. 도리캉에 ‘r(ㄹ)’ 소리가 들어가면 ‘도리-ㄹ-캉’이 되는데, ‘다를라킨’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누쿠즈(니쿠즈/네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일컬은 것은, 네쿠즈의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6세기에 나온 《시바니의 서(書)(Shibani-name)》라는 책이다. 이 사서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샤이바니 왕가는 칭기즈 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네쿠즈를 ‘데르리긴 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데르리긴 한’은 곧 ‘다를라킨 한’이다(‘한’과 ‘칸’은 같은 의미이다).
 
  《집사》를 보면 〈…‘링쿰(lı⁻ngqu⁻m)’이란 말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의 평민들은 ‘링쿰’이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운운하는 기록이 나온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이라는 의미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에미르(Emir)’라고도 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텡기즈 콘’ 대야발
 
  여기서 보듯 바로 키타이어 ‘링쿰’은 ‘군주(임금)’라는 의미다.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의미했지만, 원나라 때는 양쯔강 이북 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키타이에서 나왔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 ‘한인(漢人)’ 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쯔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 곧 ‘남인(南人) 지역’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원나라 때 ‘키타이’에는 거란은 물론, 고려, 여진, 발해가 포함된다. 따라서 《집사》에서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말일 수도 있지만, 고려, 여진, 발해어일 수도 있다.
 
  ‘엘 콘의 양자 네쿠즈’는 바로 발해 무왕(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 한)의 아들이다. 그는 《사국사》에는 기록되었으나, 동방사서와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님금’이다.
 
  그러면 《사국사》가 일 한(엘 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 콘(Tengizkhon)은 누구인가?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이라는 의미다. 《송본광운》에 따르면 ‘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 칸’이다. 이것이 ‘팅기즈 칸/텡기즈 콘’으로 바뀐 것이다.
 
  즉위 전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진국왕’과 유사한 ‘진국공’이라는 칭호도 썼다.
 
  《사국사》는 일 한(엘 콘, 일하)의 아버지가 텡기즈 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텡기즈 콘은 ‘진국왕(진국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필자는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동방사서(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는 대야발을 발해 반안군왕(盤安郡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사서들, 《대씨대동보》 등을 종합해 보면,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 텡기즈 콘은 대야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집사》에서 ‘튀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으로, 《사국사》가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이라고 기록한 전쟁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바로 발해 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선조인 키얀과 네쿠즈가 아르카나 콘으로 숨어들어 갔다.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발해 大씨는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발해를 세운 대조영.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靺鞨), 곧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營州·랴오닝성 조양·朝陽)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걸(대)조영은 이때를 틈타 동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조상의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에서 말골과 구려(고구려) 백성을 규합하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우리가 흔히 ‘발해’라고 하는 ‘진국(震國) 고려(高麗)’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이다. 다만 이들은 고구려 왕실의 서자(庶孼·서얼)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그와 유사한 의미의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과 《당문습유(唐文拾遺)》 권 43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을 보자. 이 기록들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高句麗殘孽=대조영)이 무리로 모여(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년(현종의 개원 13년), 곧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대문예의 망명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 부분을 《사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 콘 통치 시에 그의 둘째 아들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와 튀르키스탄(Turkistan) 땅으로 떠났다. 그는…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며 살지 않고, 튀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실은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튀르키스탄’은 당시의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내몽골·당나라 때 만주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편집자 주)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년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禮)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발해-唐 전쟁
 
《집사》에 실린 몽골족의 전쟁 모습.
  그로부터 4년5개월이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이,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년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년(무왕 15년)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이 이를 기록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가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은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문예가 쳐들어오자 무예는 발해군을 몸소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유명한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 부근의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공격했다. 이때 오늘날 당나라 장액(張掖·장쑤성) 출신 오승자(烏承玼)가 요로(要路)를 막고 큰 돌들을 깨어 ‘400리’의 석성(石城)을 구축(構築)했다.
 
  이 때문에 발해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고, 발해군의 진격으로 흩어졌던 당나라 백성들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승자가 구축했다는 석성의 규모로 보아 당나라 군사는 기록상의 ‘1만명’이 아니라, 발해 남쪽 국경으로 출동한 신라군 10만보다 몇 배나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사상자도 매우 컸을 것이다. 이 싸움의 자세한 경과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이때 《자치통감》 및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10만명은 당시로 보아 대단한 수의 병력이므로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앞서 본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대무예는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로 옮겼다. 현주는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북고성촌(北古城村)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년(무왕 19년, 개원 25년) 무예가 세상을 떠났다. 당에서 죽은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 흠무(欽茂)가 뒤를 이었다.
 
  발해-당나라 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파악한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사국사》에서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 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 한이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과 누쿠즈(도리행 아들 님금)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갓 혼인한 그들의 아내들과 몇 명의 시종만 데리고 밤의 어스름을 틈타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고대(中古代) 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청말(淸末)의 역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하)·渤海國記(下)》에는 “당 현종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以南) 땅을 신라에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 전선에서는 발해가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발해가 상실한 이 땅은 바로 《요사(遼史)》가 전하는 ‘발해 서경(渤海 西京) 압록군(鴨綠軍=鴨綠郡)’ 이남 지역이다. 압록군은 바로 ‘대전쟁’에 패한 후 살아남은 키얀(乞澗)과 네쿠즈(님금)가 적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는 ‘모든 튀르크 종족과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아르카나 콘(Arkanakun=Arqanaqun·《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다.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몽골학자 빌렉트(L. Bilegt), 부랴트(몽골족 후예들이 세운 러시아의 공화국) 학자 조릭투예프(B. Zoriktuyev), 김호동 서울대 교수 등은 일반적으로 《집사》가 ‘아르카나 콘’으로 기록한 것을 ‘에르게네 쿤(Ergenekun)’으로 읽는다. 빌렉트는 그 땅을 ‘에르군 콘(Ergun Kun)’으로도 읽으면서, 러시아 측에 있는 ‘아무르강(흑룡강) 상류의 아르군(Argun’)’ 또는 ‘에르구네 물(Ergu’ne mo’r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집사》가 말하는 ‘아르카나 콘(Arqanaqun)’은 오늘날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 아르군(Argun’)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서경(渤海西京) 압록군(鴨綠軍)’으로 적힌 지역이다. 곧 말갈(발해) 구어(口語)로 ‘압록강(鴨綠江)나/네(의) 군(郡)’이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에 ‘아-ㅇ/ㅂ-로군’으로 소리 났을 ‘압록군(鴨綠軍/鴨綠郡)’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 보면, 이는 ‘아우로군(鴨綠郡)네(의) 군’ 또는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필자 등 몽골어·튀르크어 등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튀르크어화하면서 그 소리가 ‘아로간나 쿤’을 거쳐 ‘아르카나 콘’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그 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특히 《집사》와 《사국사》가 말한 그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일 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 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걸간), 그의 양자 네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
 
  또 종족 이름인 ‘모굴’은 말갈-발해어(靺鞨-渤海語) ‘몰골(馬忽)’, 곧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의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인 키얀(澗)과 무왕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인 ‘님금’이 발해-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그 ‘아르카나 콘’은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문어(文語)로는 《요사》의 ‘발해서경 압록군’이고 말갈 구어로는 바로 ‘압록강나/네(의) 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가 ‘에르게네 콘’ 계곡으로 들어간 뒤 세월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불어나, ‘키야트’와, 또 원래는 몽골이 아니었던, 우량카트(우리 사서의 吾良哈=오랑캐) 등 및 몇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왔다. 이어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사》가 말한 그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라는 인물이다. 《집사》는 그를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가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그는 타타르어 사서인 《칭기스의 서》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었다.
 
 
  今幸의 등장
 
  이 ‘황금의 칸’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금행(金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황금’이고, ‘행(幸)’은 앞에서 ‘도리행’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옛날 한자음은 ‘캉’, 즉 ‘칸(汗=군주)’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의 조상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이다. 19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은 ‘황금의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곧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라는 이야기이다.
 
  일부 우리 학자들은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을 잘못 이해해 이 금행의 아들 함보를 ‘신라인(新羅人) 김함보’로 보고 있다. 또 조선 시대 김세겸의 잘못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함보의 아버지 ‘금행’을 ‘신라인 김행’, 곧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은 칭기즈 칸과 그의 부인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우진의 선조가 된 《집사》의 ‘황금항아리(=황금의 칸=알툰 칸)’이고, 대야발의 4세손이다.
 
  《집사》에 의하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추를룩 메르겐(조선 말갈)’ ‘쿠바이시레(커가씨네=흘석렬·紇石烈)’, 그리고 ‘투스부다우(대씨부 대왕)’가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고려사》 ‘금행’의 세 아들, 곧 《금사》에 나오는 금 시조 삼형제, 곧 카고라이(阿古逎=아고래=고구려), 함보(=큰보=큰가), 그리고 보코리(보활리·保活里=무구리=고구려) 삼형제와 같은 인물들이다.
 
  두 그룹으로 대조되는 이들의 이름은 얼핏 보면 매우 낯선 이름들이지만, 두 가지는 다 위의 괄호 속 이름 풀이에서 보듯이, 우리말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추를룩 메르겐)와 말갈어(쿠바이시레), 그리고 한자(투스부다우)로 된 칭호이다.
 
 
  ‘황금항아리’의 失地 회복
 
金나라 태조 완안아골타.
  《집사》에 의하면, 이 황금항아리(=금행)의 일족은 그들의 8촌 형제인 발해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발해서경 압록강네 군’을 뛰쳐나왔다. 선왕이 90여 년 전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흑수말갈 등 북방 영토와 남국(南國)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황금항아리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때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모골(말갈) 종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골 종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급히 전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는 발해 남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것이 《집사》에 나오는 ‘콩그라트 종족의 에르게네 콘 대이탈-대장정’ 이야기이다.
 
  그 결과 황금항아리 일행은 신라와의 싸움에 이겨, 평주(平州), 곧 오늘날 황해도 평산 이남까지 회복했다. 어쩌면 경기도 개성은 물론,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황금항아리 금행은 그 공으로 평주에 눌러앉아 군왕(郡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집사》는 그를 ‘군주(왕)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예종 조 본문은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는 비밀코드로 그를 기록했다.
 
  《튀르크의 계보》에 의하면, 황금항아리(=금칸=금행)의 큰아들인 아고래(=카고라이=고구려)에게는 ‘콩그라트(Konkirat)’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집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이 이 종족 출신이다. ‘콩그라트’는 ‘큰고려씨’, 곧 ‘고구려씨’라는 말이다.
 
  황금항아리의 둘째 아들 함보는 당시의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다. 《금사》에서 함보가 여진 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가 완안부인(完顔部人) 혹은 완안부장(完顔部長)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의 생시에는 이른바 여진은 없었고, ‘발해’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보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코로(烏魯·오로=胡來·코라이=高麗·호래)이다. 이 코로의 6세대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 카고리다(阿骨打·아골타)이다. 이 가계는 《집사》가 말하는 예키라스 종족이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놀랍게도 이 종족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역라씨)’라고 기록했다. 이 가계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모든 몽골의 어머니’ 알란 고와
 
라시드 웃딘의 《집사》에서 묘사한 칭기즈 칸의 즉위식 장면. 칭기즈 칸은 그의 호칭을 통해 자신이 고구려-발해의 후예임을 드러냈다.
  함보의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야라(耶懶·오늘날 함흥)로 들어갔다. 이 보활리의 3대손이 바로 《집사》의 투스부다우의 3세손 코를라스다.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 종족’으로 불린다.
 
  ‘코를라스 종족’은 《원사(元史)》와 우리 사서가 말하는 ‘카라로스/합란로씨(合蘭路氏)’다. 청대(淸代)에 나온 《황조통지(皇朝通志)》는 이들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이 가계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고려나라씨 말갈)의 코리-투마드(고려-주몽) 부’라고 한다. 부랴트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의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이라고 한다.
 
  이 지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코를라스의 딸이자, 칭기즈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고와(함경도 阿蘭지방의 乞哥, 곧 걸씨 부인)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 태조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命)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놀라운 일이다. 고구려와 말갈의 발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커부려 칸=고구려 칸)’의 시대에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Il Milione)》에서 ‘칭기즈 칸’을 ‘친기 칸(Cinghi Kane)’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친구이 칸’이라고 발음하던 ‘진국왕(震國王=발해왕)’이라는 의미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쇠(터머르/데미르)를 다루는 대장장이’ 또는 ‘철인(鐵人)’이라고 해석한다. 이 이름에 대해 《원사》 ‘태조기(太祖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太祖)…의 휘(諱)는 테무진이고,성(姓)은 키얀씨(奇渥溫氏, 기옥온씨=키야트 칸씨)이고, 몽골부인(蒙古部人)이다. … 처음에 열조(烈祖·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부를 쳤을 적에 그 부장(部長) 테무진을 사로잡았다. … 열조는 … 이로 말미암아 사로잡은 테무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名之),그 뜻(志)은 무공(武功)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듯 ‘테무진’은 ‘위대한 무공(武功)의 신(神)’이라는 뜻인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라는 말이다.
 
 
  칭기즈 칸의 후예들
 
  테무진은 자기 시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없던 땅에서 태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 사가 모스투피 카즈비니(Mostufi Qazvini·1281~1349)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e Gojide)》가 말하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이름을 ‘몽골(=말갈)’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진국왕(=발해왕)’을 뜻하는 ‘칭기즈 칸’을 자신의 왕호로 택했다.
 
  결론적으로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늘날에도 남북한과 몽골공화국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출처 | 월간조선 2015년 6월호

 

 

 

 

풀뿌리 [이덕일 사랑] 몽골과 달단 이덕일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7.05.29 22:48 / 수정 : 2007.05.29 23:04 몽골인의 조상에 대해 중국 사서들은 서기 5~6세기 흑룡강 상류 액이고납하(額?古納河) 유역에 살던 실위인(室韋人)들이라고 적고 있다. ‘북사(北史)’ 실위(室韋)열전은 “실위국은 물길의 북쪽 천리에 있다”라고 기록했는데, 같은 책 물길열전은 “그 나라는 고구려 북쪽에 있는데 혹은 말갈(靺鞨·만주족)이라고도 한다”고 적고 있다. 고구려 영양왕이 재위 9년(598) 요하를 건너 수(隋)나라를 공격할 때 말갈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간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말갈은 고구려 제후국의 하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이, “실위국은 철(鐵)이 나지 않아 고구려에서 공급을 받았다”고 적고 있는 것처럼 몽골의 전신인 실위도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였다. 원나라 멸망 후 몽골은 대흥안령 서남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달단이라고 불리는데, 함경도에는 달단동이란 지명이 둘 있었다. 홍원(洪原)현 남쪽 30리의 달단동과 함흥 북쪽 50리의 달단동인데, 그만큼 몽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두 지역 모두 조선의 개국과 관련이 있다. 홍원 달단동은 공민왕 11년(1362) 이성계가 원(元)의 승상 나하추(納哈出)를 크게 패퇴시킨 곳이며, 함흥 달단동은 고려 원종 15년(1274) 경흥(慶興)에서 사망한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를 태종 10년(1410) 이장한 지역이다.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함경도에서 달단의 말을 매매했다고 전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몽골은 고대부터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몽골과 말갈, 그리고 우리는 중원의 한족(漢族)들이 동이(東夷)·동호(東胡)라고 불렀던 같은 민족이었다. 방한 중인 몽골 대통령 부인이 규장각에 소장 중인 역관들의 교재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등을 열람했다는 소식이다. 조선 순조 때 박사호(朴思浩)가 쓴 ‘심전고(心田稿)’에는 “달녀(몽골 여성)들이 한녀(漢女·한족 여성)들의 전족(纏足)을 비웃었다”는 구절이 있다. 조선이 중국에 사대하면서도 전족은 한사코 거부한 것도 이런 기마민족의 핏줄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07/05/30 17: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