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과학적인東亞史

(1)일본 천황가의 근원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2. 09:47

 

연재에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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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나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에 흥분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연구자가 적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적다. 홍원탁 교수는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20년 이상 연구해 왔다. 많은 외국 사이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일본, 중국의 관점에서만 기술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이 연재는 간단한 국문 요약과 함께 영어로 제공된다. 원문은 순영어로만 된 PDF로 제공된다. 이 연재에서 사용된
참고 문헌은 PDF문서 에 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 [인터뷰] 한일고대사..동아시아 역사, 모두 왜곡됐다 2004년 12월 14일

 

 

 

'고대 한일관계: 쿠다라(百濟) 야마토(倭)' (1)[홍원탁 교수의 역사산책]


(1) 야마토 왕국의 창건 시점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야마토 왕국이 4세기 말경의 오오진(應神)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712년에 완성된 고사기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에 의하면, 오오진은 야마토 왕국의 15대 왕이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오오진은 서기 390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년) 교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오오진 이전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토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쯔다가 첫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시조 진무 이후 신공 왕후의 남편이라는 추우아이 왕까지의 (즉 2대부터 14대 왕까지의) 13명의 왕들은, 단지 죽은 다음에 만들어서 부여된 시호(和風諡號)로만 기록이 되어 있다. 그 명칭들을 검토 해 보면, 전혀 각자의 고유성이 없다. 반면, 15대 왕이라는 오오진 부터는, 각기 왕자 때부터 실제로 사용된 특유한 이름을 그대로 왕의 시호로 기록했다. 오오진의 왕자 때 이름은 “호무다”이고 (和風)시호도 “호무다”이다. 진무나 오오진이라는 중국식 명칭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원본에 기록된 명칭들이 아니라, 8세기 후반에 새삼 중국식(漢風)으로 만들어 부친 시호들이다.


쯔다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14대 왕이라고 하는) 추우아이 까지의 왕위 승계 형식을 보면, 단 한번의예외도 없이,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대 중국왕조의 전통인) 부자간의 왕위 승계란, 7세기 후반 텐지 왕 이후에도 제대로 확립이 안 되었던 것이다. 오오진 이후 텐지 이전의 왕위 승계는 대부분 부자간이 아니라 (투르코-몽골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제간의 승계이었다. 이와 같은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쯔다는 오오진 이전의 왕들에 대한 기록은 모두 허구라고 주장했다. 나는 야마토 왕국이 오오진(호무다)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쯔다가 제시하는 근거에 추가해서) 네 가지 더 제시하려 한다.


첫 번째의 추가 근거. 쯔다는 오오진 이전의 왕위승계가 모두 부자간의 승계라는 특이점에 의혹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왕위승계가 아주 “평화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오진 이후를 보자. 오오진에서 닌토쿠로 승계될 때, 한바탕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닌토쿠에서 리츄우-한제이 형제로 승계되어가는 과정에서도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한제이에서 닌교오로 승계될 때, 유혈극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닌교오에서 안코오-유략쿠 형제로 승계되는 과정에서도, 또 한바탕 골육상쟁의 유혈극이 있었다.


유략쿠-세이네이 에서 켄조오-닌켄 형제로 승계될 때에도, 또 닌켄-부레츠 에서 케이타이로 승계될 때에도,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형제간의 왕위승계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왕위승계가 항상 순탄치 못했다는 점이, 오오진 이후의 고사기-일본서기 기록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 준다.


두 번째의 추가 근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14대 왕이라는 추우아이 가 죽었다는 해로부터 15대 왕이라는 오오진의 즉위까지 장장 71년에 달하는 공백 기간을, 자타가 공인하는 가공의 존재인 신공 왕후가, 섭정을 하며 채우고 있다. 따라서 오오진(호무다)부터가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이 더욱 합리적으로 보인다.

세 번째의 추가 근거. 712년에 고사기가 편찬 완료되자, 야마토 조정은 즉시 전국에 명을 내려, 각 지방의 현황과 옛부터 전해오는 온갖 이야기 등을 기록해 올리도록 했다. 이들 기록들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편찬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들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리마 풍토기는, 713-715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 하리마 풍토기를 보면, 독자로 하여금 호무다가 야마토 왕국의 시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수많은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호무다는 수없이 순행과 사냥을 하고, 수많은 지명들이 호무다의 사소한 언행들과 연관 지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다른 왕들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이 없다.


네 번째의 추가 근거.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모든 왕들 중에 유독 진부와 오오진(호부다)만이 규우슈우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진무는 천손 니니기가 하늘에서 내려운 후에, 또 오오진은 모친(신공왕후)이 한국으로부터 배를 타고 와서 큐우슈우에 상륙한 직후에 각기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오오진이 야마토 왕국의 시조이며 토착세력이 이니라고 믿게하는 기록들이다.



일본 천황가의 근원(1)

- '고대 한일관계: 쿠다라(百濟) 야마토(倭)' [홍원탁 교수의 역사산책] 


그렇다면 390년경에 야마토 왕조를 세운 일본 천황가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야마토 왜(倭)'는 어떻게 창건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내용의 해답이 있다. 우선 '일본인'이란 이 세상의 어느 민족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고유한 민족'인데, 야마토 일본이라는 나라는, '수천 년에 걸친, 점진적인 정치적 사회적 발전단계'를 거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순수한 토착 지배세력'인 천황가 선조들의 노력으로, 야마토 지역을 본거지로 해서 성립된,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얘기다.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은,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이 모범답안을 다양한 형태로 포장해서 일본 국민에게 제공을 해오고 있다. 수요가 공급을 창조한다는 고전적 경제 법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북중국-내몽골 지역의 기마 유목민족 전문가인 동경대학 교수 에가미(江上波夫: 1906-2002)의 기마민족설은, 아주 이례적으로, 야마토 왕국의 근원을,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 민족에 의한 정복에서 찾으려했다.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대략 4세기말을 전환점으로 해서 새삼 발견되는, 말과 관련된 다양한 고분 발굴 물이다. 하지만 에가미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일본 국민에게 주는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그 기마 정복민족의 정체를 최대한 애매모호하게 또 신비하게 만들었다. 즉, 구체성을 제거함으로서 자신의 학설에 대한 일본 대중의 거부감을 최소화 하려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나라에서 말을 타고 건너온 왕자와 그 일행에 의해 야마토 왕국이 창건되었다면 오히려 낭만과 신비감이 극대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기마(騎馬)민족설이란 바로 '천황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귀에 익은 (고사기-일본서기) 얘기에다, '말을 타고' 내려왔다는 수식어를 하나 더 추가한 꼴이었다.


에가미 교수가 1948년 이래 끊임없이 주장해 온 이 기마 민족설은, 수많은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아주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야마토 왕국이 대륙에서 도래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정복 왕조라면, 과연 그 도래인 집단은 누구였을까?


컬럼비아 대학교수인 레드야드(Ledyard)에 의해 1975년에 수정된 기마민족설은, 에가미가 말하는 그 기마 정복자들의 근원에 대한 일차적인 구체화 작업이었다.


레드야드의 '수정판 기마민족설'에 의하면, 4세기 후반에, 만주 땅의 기마 민족인 부여 사람들이, 조국의 멸망의 슬픔을 뒤로하고 한반도를 쳐 내려오면서, 백제지역을 지나 곧바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고분 발굴물의 성격이 크게 바뀐다는 시기와도 시대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이 된다.


레드야드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서기 346년에 부여가 망하게 되었다는 기록과,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조에서 발견되는 (대략 350-380년 기간에 해당하는) 종잡을 수 없는 기록들이다.


레드야드 말대로, 만약 이 부여 사람들이 한반도를 종횡무진으로 쳐 내려오는 길에, 한국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 말 뒤에 묶어 끌고 일본열도에 건너와서, 산같이 큰 천황 묘들을 만드는데 부려먹었다면, 현대 일본 사람들의 기분도 아주 크게 상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애당초 부여라는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천황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나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것이다.


내가 1988년, 1994년 2003년에 출판한 저서들에서 주장한 것은, '4세기 후반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건너와 야마토 왕국을 세웠고, 천황족의 근원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것이다. 내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이다.


보완적인 성격의 근거는 신찬 성씨록, 속일본기, 풍토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 왕조의 정식 역사 책(정사) 등의 기록들과, 다양한 고고학적 물증들과,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등이다.

/홍원탁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입력 : 2003년 09월 25일)

 

 

일본 천황가의 근원(2)

 

- '고대 한일관계: 쿠다라(百濟) 야마토(倭)'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보면, 하타 씨족의 선조인 궁월군이, 오오진 16년[405년]에 120개 현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또 오오진 20년 조는, 야마토 아야 씨족의 조상인 아찌 오미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 왔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이들 하타 와 야마토 아야 두 씨족은, 백제의 부(部)제도를 본 따서, 야마토 조정의 재정출납 등 온갖 행정 기능을 맡아보게 되었고, 그 덕으로 야마토 왕실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815년에 완성된 신찬 성씨록에 의하면, 5세기 후반 유랴쿠 치세 때, 하타 씨족 사람 수가 (92개의 부를 구성하며) 총 18,670명에 달 했다고 한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아찌 오미가 [2대왕] 사자키 에게 청하여, 아야 사람들(漢人)을 위해 이마끼 고을(今來郡)을 세웠다고 한다. 이마키 고을은 후에 타케치(타카이치) 고을(高市郡)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야마토 왕국의 중심지역 이었다.


아스까 촌주(村主), 누카타 촌주, 쿠라쓰쿠리 촌주, 하리마 촌주, 아야 촌주, 이마끼 촌주 등이 그 아야 씨족의 후예들이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아야 씨족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타케치 고을이 너무 협소해져서, 셋쯔, 아후미, 하리마 등 각 지역으로 이들을 다시 분산 배치했다고 말한다.


속일본기는 타케치 고을이, 일찍이 아찌 사주가 데리고 온 17현 사람들로 넘쳐 나서, 다른 씨족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도 안 되었다고 기록을 했다.


일본서기 유랴쿠 7년[463년] 조를 보면, 안장을 만드는 사람,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비단을 짜는 사람 등이 그 해에 대거 '백제에서' 건너왔다. 이들 새로 도착한 기술자들을 오오진 때 이미 건너와 있던 (야마토 아야 씨족의)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새로 건너온 '이마끼' 아야(今來漢, 新漢)라 부르고, 기존 아야 씨족이 관할토록 했다.


동경대학 교수이었던 문화인류학자 이시다(石田英一郞: 1903-68년)는, 야마토 왕국이 한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수립된 것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것도 자유지만, 그렇게 되면 오오진 시대에 한반도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Ishida, 1974:85).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이 아주 가까운 친족 관계일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예컨대, 야마토 궁중에는 백제 왕족 가운데 누군가가 거의 항상 체류를 하고 있었다.


백제 아신왕(392-405년)의 태자인 전지는, 397년부터 405년까지, 오오진과 함께 야마토에 살았다. 그는 405년에 부왕이 서거하자 백제로 돌아와, 그 뒤를 이어 전지왕(405-420년)이 되었다. 백제 전지왕은 자신의 누이동생 신제도를 야마토에 보내, 오오진을 모시게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오오진의 아들 닌토쿠 치세 때의 기록을 보면, 백제 왕자 주군이 야마토 궁중에 와서, 매를 길들이고, 닌토쿠와 함께 매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백제 개로왕(455-475년) 때에는, 유랴쿠 왕에게 모니부인의 딸을 택해서 왕비 감으로 보내주었는데, 그녀가 부정한 짓을 해서 그만 화형을 당하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개로왕은 자신의 동생 곤지를 야마토 조정에 보내 유랴쿠 왕을 돕게 했다. 479년에 백제 삼근왕(477-479년)이 죽자, 이 곤지의 둘째 아들이 백제로 돌아와서 동성왕(479- 501년)이 되었다. 일본서기는 유랴쿠가, 백제로 떠나는 곤지의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505년, 무녕왕은 왕족 사아군을 보내 야마토 조정에서 일을 돕도록 했다. 597년 4월, 백제 위덕왕은 아좌 왕자를 보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의 아들 풍장이 631년에 건너 왔다고 기록했다.


야마토 지배씨족 1,182개의 조상을 기록하고 있는 신찬 성씨록을 보면, 마히또(眞人)가 황족 중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수도지역의 마히또 씨족들을 제1권 첫머리에 수록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록 내용을 검토해 보면, 모든 마히또 씨족을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간주 할 수 있다.


660년, 백제의 수도가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왜에서 돌아온 왕자 여풍장은 복신과 함께 주유성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당시 사이메이(655-661년) 여왕과 태자 텐지(662-671년)는, 큐우슈우 까지 나와서 백제 구원 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663년, 야마토 조정은 구원병 만 여명을 보냈는데, 이들 왜군은 백촌강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주유성은 당군에게 함락되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은 서로들 다음과 같이 말을 주고받았다: 주유가 함락 됐구나.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 곳을, 어찌 다시 찾아 가 볼 수 있을 것인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상권에 해당하는 신들의 시대 (신대) 기록을 읽어 보면, '일신(해의 신)'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나는 상권의 니니기와, 중권에서 등장하는 시조 이하레(진무)와 15대 왕 호무다(오오진), 이 세 명의 상이하게 기록된 존재가, 야마토 왕국의 실제 시조인 호무다 한 사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기록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즉,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야마토 왕국의 시조에 대한 설화적인 기록은 니니기 부분이 담당하고, 전투와 정복의 기록은 진무(이하레) 부분이 담당하고, 백제 사람들의 대규모 도래 기록은 오오진(호무다) 부분이 담당하고 있다.

 

 



야마토 왕국은 백제 사람들이 세웠다.

 

- 고대 한일 관계의 진실  (김영근 editor@upkorea.net)

홍원탁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국제무역론’을 강의 한다. 경제학자로써의 홍교수는 무역과 성장, 한국경제 성장모형과 그 문제점 등을 꾸준히 연구해 오고 있다. 그러나 지난 3월‘고대 한일관계사: 백제 왜’라는 책을 내 화제다. 홍교수의 고대한일관계사 연구는 1988년 영문판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in Early Period: Paekche and Yamato Wa”의 발간을 시작으로, 1994년 국문과 영문의 '백제와 야마토 일본의 기원(Paekche of Korea & the Origin of Yamato Japan)'을 비롯 이번이 세 번째 역작이다.경제학자이면서 왜 이토록 한일 역사관계에 집착하는가?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왜 야마토 왕국을 백제사람들이 세웠다고 믿는가?

'일본서기는 야마토 왕국이 기원전 660년에 수립되었다고 기록 하고 있지만 일본 사학자들도 이를 믿지 않는다. 15대 왕인 오진(應神)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서기 기록내용을 분석하면 오진(應神)은 390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동경대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대략 375년경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굴되지 않지만, 그 이후에는 말뼈, 말 안장, 말 등자, 말 재갈 등의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근거로,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왕국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했다. 컬럼비아 대학의 레드야드 교수는 348년에 부여가 멸망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에가미가 말하는 기마민족이 바로 부여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홍교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전편에 흐르는 기록 내용들을 근거로 에가미가 말하는 기마민족이 바로 백제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백제 왕족인 호무다(오오진)가 거느린 백제 사람들이, 백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일찍이 가야(변한) 사람들이 건너가 아이누-말라요폴리네시안 선주민들과 어울려 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야요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고구려-백제 계통의) 새로운 왕국을 세운 것이다. / 정리: 김영근 기자(업코리아 03/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