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연(燕)과 예맥 조선(濊貊朝鮮): 연 나라를 통한 철기문화의 전파
The Ancient Yan and the Ye-maek Chosun
사기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r.1049-43 BC)이 소공을 북연(北燕)의 통치자로 봉했고, 또 기자를 그 이웃인 조선의 통치자로 봉했다. 사마천(145-90 BC)은 붓으로 몇 글자 적어, 고대 한족 왕실 종친들을 선비족과 예맥-퉁구스의 영역으로 보이는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의 시조로 만든 것이다. 한긴, 북연 말고 남연 이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고 사기는 주석을 달았다. 연나라는 7패(七覇) 중 가장 작고 약한 나라였는데, 소왕(昭王, 311-279 BC) 때에 와서 동북방향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장성(長城)을 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군사력이 최고에 달했다는 바로 이시기에, 소왕은 수도를 계성(薊城)의 남서쪽에 위치한 [즉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동북방향과는 정반대 쪽인] 무양(武陽)으로 옮겼다. 소위 「연 장성」이었다는 요서의 유적지에서 발굴되어 나오는 유물들을 보면, 모두 한족(漢族) 문화와는 관련이 없고, 하가점상층과 오르도스 청동문화에 속한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이들을 동호(선비)족의 유적이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사기에 기록된 「장성」이란 두 글자를 근거로, 흙벽돌과 돌로 만든 방벽, 초소, 봉화대, 협곡을 가로막는 돌담과 웅덩이 등으로 구성된,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 형태의 유적을 보고 사학자들이 (BC 299년 이전에 축조된) 「연 장성」의 흔적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유적도 없는 동과 서로 장성이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하며 멋대로 장성의 위치를 그려댄다. BC 400년경에 연나라를 통해 중국의 철기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졌다.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고조선과 연나라 사이의 충돌 기록과 「상투를 틀고 호복(胡服)을 입은」위만이라는 연나라 사람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들을 보면 예맥-퉁구스족과 선비-동호족 간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고대의 연(燕)과 예맥 조선(濊貊朝鮮)
연 나라를 통한 철기문화의 전파
홍원탁 (서울대 교수)
만주의 원시 선비-퉁구스 종족: 선비계, 예맥계, 말갈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바이칼호 주변에 정착했던 원시 투르코-몽골족의 일부가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만주 땅에 들어와 원시 선비-퉁구스가 되었고, 또 그들 중 일부는 좀더 따뜻하고 습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 한반도는 만주의 중심부가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형상으로, 동쪽으로는 높은 산맥들이 줄이어 서있고 서쪽으로는 평야들이 이어져 있다.
한반도를 포함하는 범-만주 권역(圈域)은, 유사한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며 밀접한 역사를 함께한 “선비-퉁구스”계통 종족들의 민족사학적 범주로서, 동아시아 역사체계 안에서 3대 핵심 권역의 하나를 구성해 왔다. 1 원시 알타이 계통 언어들을 사용하는 선비-퉁구스 역사공동체는 신석기 홍산문화와, 고인돌, 비파형-세형 동검,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등의 전통을 공유한다. 한반도는 민족사학적 존재로서뿐만 아니라, 실제 지정학적 현실로도 만주대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부 만주의 요서(遼西) 초원지대는, 선비와 그 후예인 거란족을 포함하는 소위 옛 동호(東胡)의 본고장이다. 흔히 “목초지대의 늑대들”로 불리는 이들 선비계(鮮卑系) 집단은 몽골고원 유목민과 유사한 생활을 하였다. 소흥안령 산맥으로부터 장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는, 숙신-읍루의 후예이며, 후에 만주족의 핵심이 되는 말갈-여진 퉁구스의 본향이다. 흔히 “삼림의 호랑이”로 불리는 이들 말갈계(靺鞨系) 집단은 사냥과 채집에 크게 의존하면서 작은 밭 조각들을 모아 농사를 지었다.
송화강-요하 유역의 중부 만주평원(소위 동북평원)과 훈강(渾江, 佟佳江)-압록강 -대동강 일대의 산악지대는, 바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인들을 포함하는 예맥-퉁구스의 본고장이다. 이들은 주로 수수를 심고 가축을 기르면서, 강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여 단백질을 보충했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에 의하면 요동의 신락(新樂)유적지에서 발견된 수수는 기원전 5000년 경의 것이다. 2 한반도 남부는 쌀 농사를 짓는 예맥계 분파 집단의 본고장이었으며, 이들은 중국의 사서에서 총괄적으로 진(辰), 한(韓), 혹은 삼한으로 불렸던 원시 정치적 실체를 구성했다. 영어로 “Korea Proper”라는 표현은 중부만주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예맥-퉁구스의 본고장을 지칭하는 민족사학적 범주로서의 한국을 의미한다. 소위 만주유역(Manchurian Basin)과 한반도를 합친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홍산문화의 후예: 빗살-민무늬 토기, 비파형-세형 동검, 고인돌 등의 전통
중부만주-한반도 지역에서의 빗살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다.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 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형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Barnes(1993: 109)는 말한다. 후기 신석기를 상징하는 새로운 형식의 민 무늬 토기는 기원전 2000년경에 중부만주-한반도 전 지역에서 나타난다. 요녕성과 흑룡강성의 많은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들은 기타 만주지역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민 무늬토기와 유사하다. 3 신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토기에서 볼 수 있는 만주유역과 한반도 사이의 유사성은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도 민 무늬토기, 고인돌, 청동검 등의 형태로 지속된다. 4 고인돌은 예맥 지배층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며, 만주유역과 한반도의 “동이” 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인돌 축조 관행은 기원전 300년경에 사라졌다. 5
만주 유역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00년경에 시작된다. 6 Barnes(1993: 162)는 “한반도에서의 청동기시대 그 자체는 만주 유역으로부터 요녕식 (비파형) 동검이 진입 해 오는 것으로 정의된다”고 말한다. 요녕식 동검은, 한족들이 만든 청동검과는 달리, 칼의 날과 자루가 각기 따로 주조된다. Nelson(1993: 133)은 “요녕식 동검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청동으로 단검, 화살촉, 거울(銅鏡), 낚시 고리, 도끼 등을 만들던 거푸집과 종, (동물형상) 혁대고리, 단추, 마구류(馬具類), 마차의 장식품 등 기타 청동제품들이 한반도 전역의 민 무늬토기 유적지에서 출토된다. 7 한반도에서 풍부하게 발견되는 동검과 동경의 유래는 하가점 상층 문화(1100-300 BC)로 추적된다. 8
한반도 서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쌀은 기원전 2400-2100년경의 것으로 측정된다. 9 중국 남부에서 쌀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황해를 건너 한반도의 남부에서 생태학적으로 비슷한 틈새를 발견하고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름철에 북동쪽으로 부는 계절풍을 타면, 양자강 하구로부터 한반도의 남서부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다. 10
연(燕) 나라와 연 장성(長城)의 성격
▲ A.2.3. Location of“the Long Wall built by Yan”(Di Cosmo, 2002, p. 141)
11. Chi-feng; 12. Jian-ping;
13. Fu-xin; and 14. Karachin Banner
사기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r.1049-43)이 자신의 이복 동생인 소공을 (북)연의 통치자로 봉했고, 또 (상나라 마지막 왕의 친척인) 기자를 연나라 이웃인 조선의 통치자로 봉했다. 사마천은 붓으로 몇 글자 적어, 고대 한족 왕실 종친들을 전통적으로 동호와 예맥-퉁구스의 영역으로 보이는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의 시조로 만든 것이다. 사기에는 성왕(成王, 1042-36 BC) 때, 소공이 섬서(陝과 그 서쪽, 혹은 섬의 서쪽)를 다스리고, 주공이 그 동쪽을 다스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기는 또, 소공에게 봉해주었다는 북연(燕) 말고 남연 이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11
전국시대에 편찬된 관자(管子)를 보면, 제(齊)의 환공(桓公 685-43 BC)에 대한 기록에서 조선이 등장하며, 전한(前漢)때 쓰여진 사마천(145-90 BC)의 사기에는 연 나라에 대한 기록 속에 부여와 고조선이 함께 나타난다. 후한서(後漢書)는 예(濊), 옥저(沃沮), 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있다고 말한다. 12
주(周, 1122 혹은 1027-256 BC) 조정이 쇠망의 길로 접어들어 기원전 403년경부터는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위략(魏略, 東夷傳 三韓전에 인용)에 의하면, 주 왕실이 쇠약해지자 연의 지배자가 [기원전 323년에]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자 기자의 후손인 조선의 지배자도 스스로 왕이라 칭했고, 이들 두 나라는 서로 전쟁 직전까지 갔다. 결국 기원전 300년경에 조선과 연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연은 진개(秦開, BC 311-297년에 활약)를 시켜 조선을 공격했다. 13
사기 흉노전을 보면 진개라는 이름의 장수가 동호에 인질로 잡혀가 있을 때 동호족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으나, 연나라로 돌아온 후, 동호를 급습하여 1천리 밖으로 쫓아냈다 한다. 사기는 이어, 당시 연이 영토를 크게 넓혀 오늘날의 난하(灤河) 주변에 요서와 요동군을 포함하여 5개의 군을 설치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말한다. 14
사기에 의하면 처음에 연나라가 쌓고, 후에 진나라가 다시 쌓은 장성이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하지만 12세기에 제작된 지리도를 보면 오늘날의 난하를 옛날에는 요수(遼水)라 불렀고, 오늘날의 요하는 소요수라 불렀다. 따라서 사기의 요동은 난하의 동쪽을 의미했었을 것이다. 15 즉, 연이 설치했다는 요동군과 요서군은 오늘날의 난하 좌우에 위치했고, 상곡, 어양, 우북평 군들은 오늘날의 하북성에 위치했을 것이다.
Karachin Banner로부터 Fu-xin에 이르기까지, 흙벽돌과 돌로 만든 방벽, 초소, 크고 작은 요새, 봉화대, 협곡을 가로막는 돌담, 웅덩이 등으로 구성된,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 형태의 유적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연 장성”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별로 남아있는 유적도 없는 동과 서로 “연 장성”이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하며 장성의 위치를 멋대로 그려댄다. 이제 Di Cosmo (2002: 148-50, 157)가 요약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그 자신의 해석을 빼고) 소개한다.
소위 “연 장성”을 따라가며, 높은 지대에 돌로 지어진 몇 개의 요새와 원형 거주지 유적에서 고고학자들이 하가점 상층문화 유물들을 발견했다. 이 요새화된 방어선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모두 한족 문화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고고학자들은 그곳 거주자가 동호족이었다고 믿는다. 적봉 부근에서 발굴된 유물들도 모두 하가점 상층과 오르도스 청동문화에 속한다. 16 이들 주변 전 지역의 거주자들은 모두 한족이 아니라 유목민들 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위 장성(長城)이라는 존재는, 유목민과 농민을 분리시키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동 자체를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킬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 장벽들은 대부분 비(非)농경지역을 방위하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외계인들이 전통적으로 거주하던 지역 속에, 새삼스럽게 살게 된 한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 장벽들이 만들어 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아직도 그 장벽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실제로 보호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과 유사한 이 유적들을 보고 (기원전 299년 이전에 축조된) “연 장성”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순전히 사기에 기록된 “장성”이란 두 글자뿐이다.
동이전의 예전(濊傳)을 보면, 진나라 말기에 전국이 반란에 의해 혼란에 빠졌을 때(209 BC), 중국 동북부의 제, 조, 연 나라 사람들 수 만 명이 조선 땅으로 피난을 했는데, “상투를 틀고 호복(胡服)을 입은” 위만이라는 연나라 사람(206-195 BC)도 왔다고 말한다. 위만은 서쪽 변경에서 피난민들을 관장하는 업무를 위임 받고 있었는데 마침내는 조선의 왕위를 찬탈했다고 말한다. 동이전의 한전(韓傳)은, 위만에 의해 쫓겨난 조선왕이 남쪽으로 내려가 삼한 지역에 정착 해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고 말한다. 17
사기에 의하면, 옛 연나라는 7패(七覇) 중 가장 작고 약한 나라였는데, 소왕(昭王, 311-279 BC) 때에 와서 동북방향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소위 연나라의 무력이 최고에 달했다는 바로 이시기에, 소왕은 연 조정을 옛 수도 계성(薊城)의 “남서”쪽에 위치한 [즉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동북방향과는 정반대 쪽인] 이현(易縣) 부근의 무양(武陽)으로 옮겼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온갖 의구심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예컨대, (1) 사기에서 말하는 (北)연의 영토가 과연 오늘날의 하북성 이외 지역으로 확대된 적이 있었나? (2) 소위 연 장성이란 존재가 한족 연나라와 정말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가? (3) 사기에서 말하는 연 장성이라는 것이 진 시황제가 후에 축조한 만리장성과 똑 같은 장소에 위치해, 시황제가 장성을 쉽게 축조할 수 있게 해준 기반을 제공해 준 것이 아닌가? (4) 한족 (北)연과 함께 동호족의 (南)연이 존재하지 안았을까? (5) 기원전 311년 진개의 정복활동 이전에 난하 주변의 요서 지역을 과연 누가 점거하고 있었는가? (6) 진개의 정복활동 이후에 오늘날의 요녕성 대능하 주변의 지역을 누가 점거 했나? (7) 기원전 206-195년 기간 중에 등장하는 위만이라는 이름의 연나라 사람이 어째서 상투를 틀고 동호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가? 18
선비-동호족과 예맥-퉁구스족
중국에서는 두드려서 만든 저탄소 연철과, 주조된 고탄소 철이 모두 기원전 500년경부터 사용되었고, 중급의 탄소를 함유한 강철도 기원전 300년경 이후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철기문화는 철제 무기, 말 장식품, 말 재갈, 차축의 마개, 괭이, 보습, 낫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기원전 400년경에 옛 연나라를 통해 이들 철기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9 만주평원과 한반도에서 철제 도구와 함께 발견되는 유물들을 보면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칼날이 칼자루와 분리되어 주조된) 세형 동검과 스키토-사이베리안 양식의 짐승 모양을 한 혁대고리가 발견된다.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고조선과 옛 연나라 사이의 충돌 기록은, 몽골 유목민적인 선비-동호족과 중부만주-한반도의 예맥-퉁구스족 간에 매우 친밀한 관계, 즉 사이가 좋다는 이웃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싸우는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Barnes(1993: 152)는, 연나라가 비록 주나라 말기 전국 7웅(雄)들 중에서 가장 약하였지만, 발굴된 여러 개의 철 제조 유적을 보고 알 수 있듯이, 당시 가장 강했던 진(秦) 나라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철제품들을 생산했고, 동아시아 최초의 철 갑옷 또한 연나라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연나라가 기원전 400년경에 한반도의 철기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중국본토에 철기문화가 시작 된지 100년도 안되어 한반도에 철이 전파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20
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은 전한(前漢) 조정이 한강 이남에 위치한 진(辰, 후에 三韓) 나라 땅의 조그만 성읍국가들과 접촉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배영역과 세력이 커 있었다. 21 기원전 109년에 고조선의 왕은 (난하 동쪽의) 요동을 공격하여 한나라의 관료를 살해하였다. 당시, 고조선이 흉노와 동맹을 맺을 까 매우 걱정을 하고 있었던 한 무제(漢武帝, BC 141-87)는 그 해 가을에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일년 가까운 전투 끝에 고조선의 왕은 108년에 살해되었고, 무제는 네 개의 군을 설치하여 “흉노의 왼팔을 잘라버렸다.” 22 그로부터 30년이 못되어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지거나, 다른 위치로 멀리 밀려났다. 313년경, 한족들은 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과 (204-220년 기간 중에) 공손씨가 설치한 대방군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 1. Ebrey (1996: 87) | ||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1 (2005. 3. 5.)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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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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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민족사학(民族史學)은 인류학의 한 분파로, 언어-문화적 집단으로서의 각 민족의 기원, 분포, 특징, 등을 분석하며, 특히 고고학적 유물의 분석을 통한 문화발전 연구에 치중한다. 세계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현재 동아시아의 민족사학은 연구자 각 개인이 처한 정치환경 현실에 지배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특정 연구자의 민족사학을 추구하는 방법자체가 명백하게 묘한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족사학”은 “민족주의 역사관”의 약자가 아니며, 필자가 동아시아 역사를 민족사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2. 이 지역은 심양 주변과 그 북쪽 지역을 포함한다. Nelson (1993: 108)을 참조.
3. Nelson(1993: 113-6, 158, 161)을 참조. Xu Yu-lin(Nelson, 1995: 66, 79)은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가 요동의 음각 토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Nelson(1995: 10)에 의하면, 이와 유사한 토기들이 시베리아 연안과 한반도, 일본 등 동북아시아 전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그 제조-장식 기법이 만리장성 아래 중국 본토에서 발굴되는 토기와는 전혀 다르다.
4. 아시아에서 고인돌은 인도로부터 만주에 걸쳐 발견되는데, 만주유역-한반도 지역에서 10만개가 넘는 최고의 밀도를 보인다. Nelson(1993: 159, 163)은, 한국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숫자는 고인돌의 원산지가 한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하고 또, “영국 열도에서처럼, 예맥의 지배층들은 그들의 매장지를 가지고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북방형 고인돌은 빗살무늬 토기 말기에 출현했다. 거대한 돌기둥 위에 최고 300톤에 달하는 관석(冠石)을 올려놓아, 지상에 석관 모양의 방을 만들었다. 남방형 고인돌은 청동기 후반에 출현했는데, 마치 바둑판 모양 몇 개의 돌 위에 거대한 관석을 덮고, 지하에 석관이나 옹관을 묻었다. 매장품으로는 옥관 목걸이와 곡옥(曲玉) 등이 발굴된다. Nelson(1995: 16)은, 만주평원과 요동반도의 고인돌들이 그 축조방법과 발굴물의 내용 면에서 한반도의 고인돌과 밀접한 연관을 보인다고 말한다. Xu Yu-lin(Nelson, 1995: 80)은 신석기시대의 요동반도, 산동반도, 한반도가 상호간에 영향을 주면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한다. 산동반도 지역에서 고인돌을 만들던 동이족들은 한족에 의해 흡수 동화되었거나, 만주유역으로 밀려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5. Barnes (1993: 166) 참조.
6. Barnes (1993: 160-1) 참조.
7. Nelson (1993: 137-8) 참조.
8. Pai (2000: 200,203) 참조.
9. Nelson (1993: 147) 참조.
10. Kim (1986: 121) 참조.
11. 史記 卷三十四 燕召公世家第四 周武王之滅紂[1027 BC]封召公於北燕 宋忠曰 有南燕 故云北燕 其在成王時 召公爲三公 自陝以西 召公主之 自陝以東 周公主之
史記 卷三十八 宋微子世家第八 箕子者 紂親戚也 … 周武王伐紂克殷 …訪問箕子 … 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사기를 보면, 주나라 무왕이 소공(召公)에게 상나라 마지막 왕에 의해 투옥된 기자(箕子)를 석방 해 주라고 명한다. 史記 卷四 周本紀第四 武王… 命召公釋箕子之囚
12. 管子 卷二十三 輕重甲 第八十 桓公曰 四夷不服 … 管子對曰 …朝鮮不朝 ... [管仲, ?...645 BC]
史記 卷一百二十九 貨殖列傳 第六十九 夫燕亦勃碣之閒…東北邊胡 上谷至遼東…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貊]朝鮮…之利
後漢書 卷八十五 東夷列傳 濊 濊及沃沮句麗本皆朝鮮之地也
遼史 地理志二 東京遼陽府本 朝鮮之地
13. 위략은 280-289년 사이에 편찬되었는데, 280-297년 기간 중에 편찬된 동이전 내용의 약 40%가 위략을 인용 한 것이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요하에서 대동강에 이르는 지역에 위치했던 고조선의 기원은 적어도 옛 연나라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14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傳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BC 403?] 燕自尊爲王 [323 BC] 欲東略之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BC 311-297]…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BC 209-8]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 朝鮮與燕界於浿水
史記 卷第一百十 匈奴列傳 第五十 燕有賢將秦開 … 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而拒胡
15. 윤내현 (1986: 43-58) 참조.
史記 匈奴列傳 第五十 燕亦築長城…至襄平 韋昭云今遼東所理也
史記 卷八十八 蒙恬列傳第二十八 始皇 … 築長城 … 至遼東
조선과 연의 국경이라는 패수(浿水)는 난하, 대능하, 요하, 훈강,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중 하나로 추측된다. 심재훈(2002: 302)은 진시황의 천하통일 이후의 사람들도 대부분 난하와 대능하 계곡들을 조선의 영토로 간주했다고 말한다. 심재훈은 기원전 2세기에 편찬된 회남자(淮南子)의 “한(漢) 나라의 동쪽 끝인 갈석(碣石)산을 지나 조선을 통과한다”는 구절을 인용하고, 또 기원전 1세기에 편찬된 염철론(鹽鐵論)의 “연나라는 갈석산으로 막혀있다”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갈석산은 난하 하류 동쪽 창려현에 위치한다.
16. 고리형 손잡이가 있는 동검, 말 혹은 새를 주제로 하는 장식품, (방울)종 장식품, 단추, 귀걸이, 혁대 고리 등과 같은 청동제품들이 대량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중국본토 문화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7.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濊傳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魋結夷服 復來王之
韓傳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詣準降說準求居西界 收中國亡命 … 令守西邊 … 遂還攻準 準…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18. 곽대순(1995b: 178)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에 속하는 매장 유적이 북경의 류리허(琉璃河) 지역에서, 서주 초창기에 소공의 연나라 수도가 되었다는 장소에 해당하는 층 아래의, 상나라 보다 도 더 이른 층에서 발견되었다. 연이라는 글자는 당시에 이미 신탁 갑골에 새겨져 있었다. 사마천(c.145-86 BC)은 주 무왕(r.1049-43 BC)이 소공을 북연의 지배자로 봉해주었다고 기록했다. 사기는 당시에 남연 같은 존재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기원후 336-436 기간 중, 전연(337-70), 후연(384-408), 서연(384-94), 남연(398-410), 북연(409-36) 등 네 개의 연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나타났었다. 그런데, 요서에 위치한 북연의 지배자는 놀랍게도 한족이었고, 산동반도에 위치한 남연을 포함해서 나머지 3개의 연나라 지배자들은 모두 모용 선비족이었다.
19. Barnes (1993: 150) 참조. 여영시(余英時)는, 연나라와 고조선의 주민들 사이에 활발한 상업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연나라에서 주조한 화폐들이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Twitchet and Loewe (1986: 447) 참조.
20. Barnes (2001: 83-4) 참조. Nelson (1993: 174)은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것으로 보이는 소규모 용광로에서 생산된 철제품들이 북한강 유역의 철광석 매장지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또 남해안의 옛 가야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1-2 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원시적 형태의 제철 가마들이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21. 이기백 (1984: 17) 참조.
22. 漢書 卷六 武帝紀 第六 元封二年…朝鮮王攻殺遼東都尉 乃募天下死罪擊朝鮮 六月…秋 …遣樓船將軍…將應募罪人擊朝 鮮 三年…夏..朝鮮斬其王右渠降 以其地爲樂浪臨屯玄道眞番郡
漢書 卷七十三 韋賢傳 第四 十三 孝武皇帝愍中國罷勞 無安 寧之時...北攘凶奴降昆邪十萬之 衆 置五屬國 起朔方以奪其肥饒 之地 東伐朝鮮 起玄菟樂浪以斷 凶奴之左臂
The Ancient Yan
and the Ye-maek Chosun
the xianbei-donghu and the Ye-maek Tungus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The Proto-Xianbei-Tungus in Manchuria
The proto-Turko-Mongol populations, who had first settled around Transbaikalia across the Great Altai, dispersed further across the Greater Xing’an Range to become the proto-Xianbei-Tungus in Manchuria, and an offshoot of them tracked a warmer and moister climate down through the Korean peninsula to become the rice-cultivating farmers. The Korean peninsula is an extension of central Manchuria towards the sea, having a long strip of plains in the west flanked by high mountains in the east.
The greater Manchurian ethnohistorical sphere of the Xianbei-Tungus that includes the Korean peninsula has formed one of the three major sub-regions of East Asia, sharing intimate histories with strong cultural affinity.1 The proto-Altaic speech community of Xianbei-Tungus had shared the Neolithic Hong-shan culture, and also the tradition of dolmens, broad-and-narrow-bladed bronze daggers, and Chulmum-Mumun pottery. The Korean peninsula has been closely connected with Manchuria not only as an ethnohistorical entity but also as a physical reality.
The Liao-xi steppe in western Manchuria was the home of Dong-hu, including the Xianbei and their descendent Qidan tribes, who were the steppe wolves leading a life rather like that of Mongolic nomads. The forest region in eastern Manchuria, extending from the Lesser Xing’an Ranges down to the Changbai Mountain area, was the home of the Mohe-Ruzhen Tungus (who were the descendants of Sushen-Yilou and ancestors of the core Manchu tribes) who were the forest tigers leading a life of rather extensive hunting and gathering supplemented by patchy farming.
The central Manchurian plain around the upper Song-hua and Liao River basins (the Dong-bei Plain) as well as the mountainous areas around Hun (Dong-jia), Yalu and Tae-dong rivers were the home of the Ye-maek Tungus, including the people of Old Chosun, Puyeo, and Koguryeo, whose life involved millet farming and livestock breeding, with hunting and river fishing serving as additional means of subsistence. 2 The southern Korean peninsula was the home of rice-cultivating Ye-maek cousins who had established ancient political entities that were called collectively Chin, Han or Three Hans in the Chinese dynastic chronicles. In the ethnohistorical context, the ancient home of the Ye-maek Tungus, i.e., the central Manchurian basin and the Korean peninsula, may be defined as the “Korea proper.”
Incised-Plain Pottery, Bronze Daggers and Dolmen
The Neolithic period of Korea proper, characterized by the comb-patterned Chul-mun pottery, began c. 8000 BC. According to Barnes (1993: 109), “the Fuhe, Hong-shan and Xin-le shared a textured-pottery tradition more similar to the incised Chul-mun of the Korean peninsula than the Neolithic cultures of the China Mainland.” A new pottery style represented by the plain Mumun pottery began to appear in Korea proper c. 2000 BC, designating the late Neolithic. Pottery from many sites of Liao-ning and Heilong-jiang is similar to the plain Mumun pottery from other Manchurian sites and the Korean peninsula. 3
Similarities between the Manchurian basin and the Korean peninsula, observed in the Neolithic sites in the form of comb-patterned Chul-mun pottery, continue in the Bronze Age sites in the form of plain Mumun pottery, dolmen, and bronze daggers. Dolmen, the status symbol of Ye-maek ruling elites, characterizes the Dong-yi culture of the Manchurian basin and the Korean peninsula.4 The dolmen sites never yield iron, so dolmen-building is thought to have been discontinued by 300 BC (see Barnes, 1993, p. 166).
The Bronze Age began c. 1500 BC in the Manchurian basin and c. 1000 BC in the Korean peninsula (see Barnes, 1993: 160-1). According to Barnes (1993: 162), “the peninsular Bronze Age per se is defined by the intrusion of the [broad-bladed] Liao-ning dagger from the Manchurian Basin.” Unlike the Han Chinese bronze daggers, the blade of Liao-ning daggers was cast separately from the hilt. According to Nelson (1993: 133), “Liao-ning dagger is found abundantly in the Liao-dong peninsula and around Bohai Bay, as well as in Korea, but it is not found in China south of the Great Wall.” Molds for bronze daggers, arrowheads, (fine-lined) mirrors, fishhooks, and axes, and other bronze artifacts such as bells, (animal-shaped) belt buckles, buttons, horse trappings, and chariot ornaments have appeared in the plain Mumun pottery sites throughout the peninsula.5 The origins of the bronze dagger and the fine-lined mirror that are abundantly found in the Korean peninsula are traced to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of 1100-300 BC (see Pai, 2000, pp. 200, 203).
Rice discovered in the western peninsula dates from 2400 and 2100 BC (see Nelson, 1993, p. 147). A group of southern Chinese who were cultivating rice perhaps crossed the Yellow Sea and found a similar ecological niche in the southern peninsula. By taking advantage of northeasterly winds, ships could sail in summer directly from the mouth of Yang-zi River toward the southwestern tip of the Korean peninsula.6
Yan and the so-called Yan long wall
According to the Shi-ji, King Wu (r. 1049-43 BC) of Western Zhou enfeoffed his half-brother, Shao-gong, as the ruler of (Northern) Yan, and also enfeoffed Kija (Ji-zi, a relative of the last king of Shang) as the ruler of Chosun, an eastern neighbor of Yan. With a few strokes, Si-ma Qian installed two ancient Han Chinese royal scions as founders of the states located in the traditional domain of both the Dong-hu and Ye-maek Tungus. The Shi-ji states that, during the reign of King Cheng (1042-1006 BC), the Lord of Zhou (regent. 1042-36 BC) ruled the east of Shaan, and the Duke of Shao the west of Shaan. Shi-ji notes that there must have been another Yan (called Southern Yan) that did not belong to the territory enfeoffed to Shao-gong.7
Chosun appears in the records on the ruler of Qi (685-43 BC) in the Guan-zi that was compiled during the Warring States Period.8 Puyeo and Chosun both appear in the Shi-ji records on (Old) Yan in the fourth century BC. The History of Later Han records that the area of Ye, Ok-jeo and Koguryeo originally belonged to the territory of Chosun.9
The Zhou court fell into complete decay and the Warring States period began in 403 BC. According to the Wei-Lüe (quoted in the Three Han section of Dongyi-zhuan), when the Zhou became weak, the ruler of Yan assumed the title of king [in 323 BC]; then the “Lord of Chosun, a scion of Ji-zi (Kija)” also declared himself king; and these two states were on the brink of fighting each other. The armed conflicts between Chosun and Yan at last occurred c. 300 BC: the Yan dispatched a general named Qin Kai (who was active during 311-297 BC) to invade Chosun. The Wei-Lüe was compiled between 280 and 289 AD by Yu Huan, and about 40 percent of Dongyi-zhuan consists of quotations from the Wei-Lüe.
According to the Xiong-nu section of Shi-ji, the general named Qin Kai had been taken as hostage to the Dong-hu, enjoyed the fullest confidence of them, but after returning to Yan, staged a surprise attact on the Dong-hu in 311 BC, just 90 years prior to Yan’s downfall in 222 BC, making the Dong-hu to retreat about a thousand li. The Shi-ji then notes that the Yan had established five provinces, including the Liao-xi and Liao-dong provinces, and constructed a Long Wall from Zao-yang to Xiang-ping.10
According to the Shi-ji, the walls built by the Yan and rebuilt by the Qin reached Laio-dong. As shown in the twelfth century map of Di Li Tu, however, the present-day Luan River was called the Liao River in old days, and the present-day Liao River was called the Lesser Liao River. Hence the “Liao-dong” in the Shi-ji must have implied the east of Luan River.11 That is, the Liao-xi and Liao-dong provinces established by the Yan must have been located around the modern-day Luan River, while the provinces of Shang-gu, Yu-yang, and Youbei-ping were located in northern Hebei.
Remains of a line of fortifications (built with stamped earth and stone), comprising of lookout posts, ramparts, ditches, small and large forts, beacon towers, and stone walls blocking mountain passes, were found running approximately from the Karachin Banner in the west to the Fu-xin district in the east. This line of fortifications is alleged to be the “Long Wall” constructed by the Yan. Many people imagine that the walls extend further to the west and east. The following are the archeological findings reported by Di Cosmo (2002: 148-50, 157), minus his own interpretation of these findings.
Several citadels and round habitations built in stone on high terrain were discovered along the line of the walls from where archeologists have recovered artifacts attributed to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2000-1500 BC). Both outside and inside this line of fortifications, the only cultural remains are “non-Chinese.” The archeologists believe that the original dwellers were Dong-hu. Archeological excavations in the proximity of the section of the wall near Chi-feng also reveal the presence of the Upper Xiajia-dian and the Ordos bronze cultures.12 It is obvious that the whole area was inhabited exclusively by non-Chinese, mostly pastoral people.
The wall was not built to separate nomad and farmer, but to establish a strong military presence to control the movement of people. The wall was mostly defending the non-agricultural territory. There is no evidence to support that the wall was protecting the Han Chinese settlements in areas traditionally inhabited by alien peoples engaged mainly in pastoral activities. We still do not know the precise function of the wall, and what it was actually defending.
The only basis of attributing this line of fortifications running from Karachin Banner to the Fu-xin to the work of the Yan (dating to no later than 299 BC) rests solely on the “Long Wall” mentioned in the Shi-zhi.
The Ye section of Dongyi-zhuan states that, at the end of the Qin dynasty when the empire was plunged in chaos by rebellion (in 209 BC), tens of thousands of people started to flee from northeastern China (Qi, Zhao and Yan) to Chosun, and a Yan person named Wei-Man came (c. 206-195 BC) “with a topknot wearing barbarian clothes.” Wei-Man was entrusted with the custody of refugees in the western frontier district, but he eventually usurped the throne of Chosun. The Han section of Dongyi-zhuan records that the king of Chosun who was thrown out by Wei-Man fled south to the [Three] Han (old Chin) area and called himself the King of Han.13
According to the Shi-ji, the ancient Yan was the smallest and the weakest among the seven warring states, and it was during the reign of King Zhao (昭 311-279 BC) that the Yan had supposedly expanded its territory greatly toward northeast. And yet King Zhao somehow decided, supposedly at the peak of Yan’s military might, to remove his court to Wuyang 武陽 near Yixian 易縣 that was located in southwest of the old capital Jicheng 薊城. A host of questions may arise in one’s mind, such as: (1) Had the (Northern) Yan’s territory ever extended beyond the present-day Hebei province?; (2) Did the so-called “Yan Long Wall” have anything to do with the Han Chainese Yan?; (3) Wasn’t the “Long Wall” mentioned in the Shi-ji located at the exactly identical places where Qin Shi-huang-di later constructed the “Great Wall,” serving as its ready-made base?; (4) Wasn’t there a Dong-hu (Southern) Yan domain together with the Han Chinese (Northern) Yan?; (5) Who had been occupying the Liao-xi area around the Luan River prior to the Qin Kai’s exploits in 311 BC?; (6) Who did occupy the the Daling-he basin of the modern-day Liao-ning province after the Qin Kai’s exploits?; and (7) How could a “Yan” person named Wei-Man appear sometime in 206-195 BC wearing Dong-hu clothes complete with a topknot? 14
The Xianbei-Donghu and the Ye-maek Tungus
On the mainland China, both “low-carbon” wrought iron and “high-carbon” cast iron were present from 500 BC onwards, and “medium-carbon” steel was common after 300 BC. It is believed that the iron culture of China, in the form of iron weapons, horse trappings, bits, axle caps, hoes, plowshares, and sickles, was transmitted to Korea through Old Yan c. 400 BC.15 Artifacts found together with iron implements in Korea proper include the finely wrought bronze daggers (slender stabbing swords, the blade still being cast separately from the hilt) and the Scytho-Siberian style animal-shaped belt buckles.
The conflicts between Old Chosun and Old Yan that were formally recorded in the Chinese dynastic chronicles suggest a fairly intimate relationship (in the form of incessant warfare, as usual between any good neighbors) having been maintained between the Mongolic Xianbei and the Tungusic Ye-maek people of central Manchuria and Korean peninsula. According to Barnes (1993: 152), the Yan kingdom was the weakest of the seven major Late Zhou feudal states, and yet produced a greater abundance of iron artifacts than Qin, the strongest state, as manifested by the several iron foundries excavated: “The earliest-known iron armor is also from Yan, and this state has played a major role in initiating the Korean iron Age around 400 BC –only a century after iron production became a viable industry on the Mainland itself.” 16
Old Chosun had so grown in strength and domain as to interrupt, in the second century BC, the contact between the Former Han dynasty and the petty walled town states of Chin (the later period Three-Han) located south of the Han River in the Korean peninsula (see Lee, 1984, p. 17). In early 109 BC, the King of Chosun invaded Liao-dong [located in east of the Luan River] and killed a Han Chinese officer. Being seriously concerned about the possible alliance with the Xiong-nu, Han Wu-di (141-87 BC) launched an attack on Chosun in autumn. The King of Chosun was killed in summer of 108 BC, and Wu-di established four commanderies, thus “severing the left arm of the Xiong-nu.”17 Within three decades, however, only the Le-lang commdandery in the Tae-dong River basin remained (until about 313 AD, together with the Dai-fang Commandery that was established by the Gong-sun rulers some time between 204 and 220).
BC 108 represents the historical date of the Han Chinese debouchment into the lower basin of the Liao River and the northwestern coast of the Korean peninsula for the first time in East Asian history. After the fall of the Western Jin in 316 AD, the Han Chinese settlers who became isolated in the Liao River basin blended alternately with the Xianbei and the Tungus as advantage dictated. The formal Han Chinese rule of the Liao-dong area was repeated 352 years later during 668-755 under the Tang dynasty. Most of the time, however, the Liao-dong had been a land contested among the Xianbei-Qidan and Yemaek-Ruzhen Tungus peoples.
BIBLIOGRAPHY
[각주]
1 Ethnohistory is a branch of anthropology that analyzes the origin, distribution, and distinguishing characteristics of the races (pertaining to the speech or culture groups),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evelopment of cultures, through the analysis of archeological findings. Ethnohistory tends to respond to the current political environment in East Asia as elsewhere, imposing obvious and subtle constraints on the ways ethnohistory is pursued.
2 Definite evidence of millet (dated c. 5000 BC) is found at Xin-le sites (including the region around Shenyang and sites to the north) of Liao-dong.. See Nelson (1993: 108).
3 See Nelson (1993: 113-6, 158, 161). Xu Yu-lin (Nelson, 1995: 66, 79) sees the Chul-mun pottery of the Korean peninsula as closely related to the incised jars of Liao-dong. According to Nelson (1995: 10), closely related pottery is found throughout northeastern
Asia, including coastal Siberia, Korea, and Japan: “It differs in construction and decorative techniques from pottery further south in China.”
4 In Asia, dolmen is found from India to Manchuria, but the highest density (exceeding 100,000 units) is found in Korea proper.
According to Nelson, the number of dolmen in Korea suggests their indigenous origin as well as the possibility that the Ye-maek ruling elites tried “to mark their territory by means of their burial places, as occurred in the British Isles.” See Nelson (1993: 159, 163).
The northern-type dolmen, emerged in the late Chul-mun period, has huge slabs and capstone (weighing up to 300 tons), forming a cist-like chamber above ground, while the southern-type dolmen, emerged in the late Bronze Age, has a large capstone resting on several smaller stones at ground level with the burial in a stone cist or jar coffin in the ground underneath. Necklaces of tubular beads as well as comma-shaped beads appear in burials. According to Nelson (1995: 16), dolmens in the Manchurian plain and Liao-dong peninsula reveal “close connections with those in the Korean peninsula in contents as well as construction.”
Xu Yu-lin (Nelson, 1995: 80) contends that “the Liao-dong, Shan-dong, and Korean peninsulas have influences and close relationships among them in the Neolithic.” The Dong-yi, who built dolmens around the Shan-dong peninsular region, were either absorbed or pushed into the Manchurian basin by the Han Chinese.
5 See Nelson (1993: 137-8).
6 See Kim (1986: 121).
7 史記 卷三十四 燕召公世家第 四 周武王之滅紂 封召公於北燕 宋忠曰 有南燕 故云北燕 其在成王時 召公爲三公 自陝以西 召公主之 自陝以東 周公主之 陝者 蓋今弘農陝縣是也…
孝王二十七年 燕見秦且滅六國…燕王亡徙居遼東…秦拔遼東 …太史公曰… 燕迫蠻貉 內措齊晉 崎嶇彊國之閒 最爲弱小
史記 卷三十八 宋微子世家第八 箕子者 紂親戚也…周武王伐紂克殷…訪問箕子…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史記 卷四 周本紀 第四 武王… 命召公釋箕子之囚
8 管子 卷二十三 輕重甲 第八十 桓公曰 四夷不服…管子對曰…朝鮮不朝...[管仲,?...645 BC]
9 史記 卷一百二十九 貨殖列傳 第六十九 夫燕亦勃碣之閒…東北邊胡 上谷至遼東…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貊]朝鮮…之利
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 濊 濊及沃沮句麗本皆朝鮮之地也
遼史 地理志二 東京遼陽府本 朝鮮之地
10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傳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 燕自尊爲王 [323 BC] 欲東略之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到遼東 時朝鮮王否痲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BC 209-8]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朝鮮與燕界於浿水
The Pei River was recorded as the border between Yan and Chosun. Luan, Daling, Laio, Hun, Yalu, Cheong-cheon, and Tae-dong Rivers have been proposed by various scholars as plausible candidates for the Pei River. Shim (2002: 302) notes that “post-Qin people still considered the area in the Luan and Daling River valleys as Chosun.” Shim quotes Huai-nan-zi, which was written in the second century BC: “At the eastern end [of Han], beyond Jie-shi mountain, [we] pass through Chosun, a state of benevolent and great people.” Shim also quotes Yan-ti-lun, complied in the first century BC: “the state of Yan is said to have been blocked by Jie-shi Mountain.” The Jie-shi Mountain is located in Chang-li prefecture to the east of the lower Luan River.
史記 卷第一百十 匈奴列傳 第五十 燕有賢將秦開 爲質於 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 卻千餘里…燕亦築長城 自 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 遼西遼東郡而拒胡
11 See also Yoon (1986: 43-58).
史記 匈奴列傳 第五十 燕亦築長城…至襄平 韋昭云今遼東所理也
史記 卷八十八 蒙恬列傳第二十八 始皇 … 築長城 … 至遼東
12 The excavation of a large number of bronze objects, such as knives with ringed handles, horse- and bird-motif ornaments, bell ornaments, buttons, earrings, and belt hooks places this area in a cultural context that is fully outside the Central Plain sphere.
13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濊傳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魋結夷服 復來王之
韓傳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詣準降說準求居西界 收中國亡命 … 令守西邊 … 遂還攻準 準…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14 According to Guo (1995b: 178), burials of Lower Xiajia-dian culture were found at Liuli-he in Beijing at levels earlier than the Shang dynasty, beneath the level of the Early Western Zhou in what became the capital of the Shao-gong’s Yan State. The character for Yan had already existed in inscriptions on oracle bones. Sima Qian (c. 145-86 BC) wrote that King Wu enfeoffed Shao-gong as the ruler of Northern Yan. Shi-ji gives a note saying that there must be some other Yan, such as the Southern Yan. During a hundred year period of 336-436, there appeared four Yan states, namely, the Former Yan (337-70), the Later Yan (384-408), the Western Yan (384-94), the Southern Yan (398-410), and the Northern Yan (409-36). Surprisingly, the rulers of the Norther Yan, that was located in the Liao-xi area, were Han Chinese, while the rulers of all other Yan states including the Southern Yan that was located in the Shan-dong peninsula, were all the Murong Xianbei.
15 See Barnes (1993: 150).
Yu Ying-shih (Twitchet and Loewe, 1986: 447) states: “active commercial contacts were taking some of the inhabitants of Yan to Korea, where they left large quantities of coin cast in Yan’s mints.”
16 See Barnes (2001: 83-4). Nelson (1993: 174) notes that: “Iron artifacts were produced in small furnaces which have been found along the North Han River, dating to the third century BC or earlier. These sites are all near sources of iron.” From the old Kaya sites on the southern Korean coast, primitive iron-working furnaces have been found and dated to 1st and 2nd centuries BC.
17 漢書 卷六 武帝紀 第六 元封二年…朝鮮王攻殺遼東都尉 乃募天下死罪擊朝鮮 六月…秋 …遣樓船將軍…將應募罪人擊朝 鮮 三年…夏..朝鮮斬其王右渠降 以其地爲樂浪臨屯玄道眞番郡
漢書 卷七十三 韋賢傳 第四 十三 孝武皇帝愍中國罷勞 無安 寧之時...北攘凶奴降昆邪十萬之 衆 置五屬國 起朔方以奪其肥饒 之地 東伐朝鮮 起玄菟樂浪以斷 凶奴之左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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