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과학적인東亞史

(10)2원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북위(北魏,) 출현의 예고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2. 10:02
 
2원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북위(北魏,) 출현의 예고
Commencing the Dual System: the Yan Kingdom of Mu-rong Xianbei

 

4세기 5호16국 시대에 모용외와 그 후계자들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정주 (漢族) 농민을 다스리는 관료적 행정조직과 (鮮卑族) 유목민을 다스리는 부족적 군사조직을 분리한 2원적(二元的) 통치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웠다. 요서 초원지대는 부족 전통에 따라 군사적으로 조직을 하고, 요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도시민들은 중국식으로 문관이 다스리는 2원제도를 운용했다 북위, 요, 금, 원, 청 등 후대의 모든 이민족 정복왕조들은 모용선비(慕容鮮卑)족이 창안한 2원제도를 개선 발전시켜 중국 대륙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모용선비 전연은, 359년에 중원을 점령한 후, 특이하게 빠른 속도로 중국화 되었다. 360년, 150만 명의 한족(漢族) 오합지졸을 징집해 남쪽의 동진(東晉)과 서쪽의 전진(前秦)을 정복하려 했다 370년, 전연은 부견(符堅)에 의해 멸망되었다. 하지만 전연은 365년에 낙양을 점령했었고, 단기간이나마 북중국 일대를 점령하여, 본격적 정복왕조인 북위(北魏, 386-534) 출현의 전조가 되었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인 만주 유목민-삼림족들이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과 자신들 고유의 군사적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심장부를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 Xianbei Tomb Paintings (of Former Yan) excavated in 1982 at the Zhao-yang 袁台子 朝陽 area, across the Daling River, Liao-xi
2원(二元)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정복왕조(北魏,) 출현의 예고

홍원탁(서울대 교수)

홍산문화 (紅山, 4,000-3,000 BC) 이후의 남만주 문화의 발전과정은, 특히 상나라에 앞섰던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 2,000-1,500 BC)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분명한 연속성을 유지하였다. 소위 주 무왕이 소공(召公)에게 기원전 1027년에 봉해주었다는 북연(北燕)은 전국시대(403-221 BC)에 와서야 비로서 중국왕조 역사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민족, 언어, 문화 등의 측면에서 볼 때, (북)연이 기원전 311년경에 정복을 했다는 란하(灤河), 대능하 (大凌河) 주변의 요서지역은 원래 중국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목민적 성격이 강한 청동기 하가점 상층문화(1100-300 BC)는 하북지역의 연 왕국(1027-222 BC)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홍산문화를 공유하면서 알타이 계통 언어를 사용했던 원시 선비-예맥족들이 바로 요서지역 전체의 주 구성원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연은 기원전 222년에 진 시황제에게 정복되었다. 그런데 사기를 보면, 묵돌이 기원전 209년경 흉노부족을 통일하고 선우가 될 무렵, 선비족의 세력이 전성기에 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비족은 바로 이 신흥 흉노 제국에 복속되고 만다.

선비족들은 2세기 중, 단석괴(檀石槐, 156-81)의 영도 하에, 짧은 기간이나마 하나의 제국을 이룩했었다. 이 단명의 선비제국은 몽골고원의 흉노 세력을 일시적으로 대체했었다 그 후, 한 동안 약세 이었다가, 한족 왕조들이 쇠퇴함에 따라, 4세기에 모용선비 연(前燕, 349-70; 後燕, 384-408; 西燕, 385-94; 南燕, 398-410) 왕국들을 세울 수 있었고, 5세기에 와서는 최초의 북중국 정복왕조인 탁발선비 북위(386-534)를 세우게 되었다.

   
▲ Xianbei Tomb Painting excavated at the Zhao-yang area
후한의 쇠망은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된다 188년에 영제(靈帝)가 죽은 후, 한의 통치자들은 지방 군벌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요동은 190년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公孫度, 公孫康)에 의해 점거되었는데, 이들은 196-220년 기간 중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연(燕)왕이라 자칭하던 공손연(公孫淵)는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원정군에 의해 239년에 살해당하였다. 중국의 삼국시대(三國, 220-265) 기간 중에는 선비의 작은 부족장들이 위 조정과 개별적으로 흥정을 하면서 변경의 많은 지역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위 조정은 국경 밖의 유목민에게는 후한 보조금을 주면서 국경무역을 허락하였고, 국경 안의 부족들에 대해서는 간접지배 정책을 유지하였다. 단명의 서진(西晉, 265-316) 역시 위의 정책을 답습하였다.

285년에 모용선비 부족장이 된 모용외(慕容廆, r.285-333)는 곧바로 부여를 공격했다. 286년에는 (기원전108년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복 한 이래 한족들이 정착한) 요하 유역의 농경지대를 공격했다. 요하 유역은 중국이 통일되면 한족 제국에 흡수 통합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무정부상태의 혼란기에는 제일 먼저 중원의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지역이었다. 2 하긴 중국대륙의 한족 통치자들 역시 동북 변경지대를 그리 중시하지 않았고,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었다.

291-305년 기간 중, 중국대륙 전역에 내란이 일어났다. 위와 서진의 볼모정책 덕분에 중국 황실 내에서 성장하고 중국화된 새로운 유형의 흉노족 지도자가 선우가 되어, 311년에 낙양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사로잡아 서진을 유린했다. 3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자 진 황족의 일부는 남쪽으로 달아나, 317년에 양자강을 장벽으로 삼아 건강(建康, 지금의 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동진을 세웠다. 5세기에 게르만족에 의해 황폐화된 로마를 콘스탄티노플이 대신하였던 것처럼, 남경은 589년까지 장안과 낙양의 역할을 대신했다. 
  

   
▲ Former Yan Art Objects from the Zhaoyang-Beipiao area: (top) gilt-bronze saddle plates; (second) gold hat ornaments with disk pendants; (third) gilt-bronze horse ornament; and (bottom) bronze deer-shaped object Watt, et al. (2004: 124, 130)
Ledyard(1983: 331)는 “317년”을 중국 역사상,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하나의 분기점으로 이해한다. 중국 대륙의 주요 부분이, 아니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한족이 아닌 이민족에 의해 점령된 역사적 전환점이 바로 317년 이라고 생각한다.

흉노족이 북중국에 처음으로 세운 전조(前趙, 304-329)는 너무 중국식이었기 때문에 몽골 초원지대의 토박이 흉노 부족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고 내분의 씨앗을 키웠다. 반대로, 두 번째 조나라(319-349)는 지나치게 흉노식이였기 때문에 중국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마지막 흉노왕의 아들은 후궁 하나를 식탁에서 구울 정도로 극악무도했다 한다. 4

당시 만주의 선비족은 더 이상 순수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상당기간 요하 유역을 점령하여 농민과 도시민을 지배해왔었다. 선비족은, 요서 초원지대는 부족 전통에 따라 군사적으로 조직을 해 다스리고, 요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도시민들은 중국식 문민 관료제도로 다스리는 2원(二元)적 통치조직을 운용했다 문민 관료는 절대로 부족들로 구성된 군대의 지휘관이 되지 못하였다 Barfield(1989: 97-99, 106)에 의하면, 모용 선비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5호16국 시대(304-439)에 (정주 농경지역에 대한) 관료적 행정조직과 (목초지 유목민을 상대로 하는) 부족적 군사조직을 분리한 2원적 통치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운 것이다.

모용 선비족은 그들 자신의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이전에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 국경 안에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살았었다. 모용외는 국가를 세워 기초를 다질 때, (모용씨의 국가를 한 개의 중화제국으로 발전시켜 보려는 의도를 가진) 수많은 중국 관리들과 학자들의 조언과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한족 자신의 사마씨 황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흉노의 지배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수 많은 중국 관료들이, 당시와 같은 정치적인 혼란기에, 요동 땅의 작은 나라에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모용씨 측에 가담했다. 그들은, 중국식으로 교육을 받은 모용선비 지배자를 통치자로 모시면서, 이상적인 중국식 조정을 조직하고, 모용씨의 국가를 점차 서쪽으로 또 남쪽으로 확장 해 나가도록 도왔다. 5 모용외는, 중국식 행정규율과 정부 운영 조직을 도입하고, 자신의 군대에 훌륭한 무기와 갑옷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다. 6

Fairbank(1992: 111-2)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중국적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목민적인 2원제도는 4세기부터 남만주 지역에서 출현하는데, 후대 몽골족과 만주족 정복왕조를 거치면서 거대한 제국 전체를 장악하고 지키는 통치체제로 완성되었다. 덕으로 다스린다는 유교적 신화가 있지만, 왕조의 출발 자체가 바로 군사력에 의한 것이고, 황제 중심의 전제적 체제는 지배자가 반란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을 가졌을 때만 존속이 가능 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왕조가 확립되면 관료체제는 결국 문관에 의해 운영되게 마련이다. 유교 전통으로 훈련 받은 문관이 군사전문가로 변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개중에는 유능한 무관이 나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군사기술은 유목 정복자들의 주 특기였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인 만주 유목민들이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과 자신들 고유의 군사적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심장부를 점령하고 지배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식 국가조직은 왕의 형제들을 봉토를 받는 친왕(親王)의 신분으로 만들어, 높은 지위를 즐기며 살게 한다. 실제로 중국 왕조의 친왕들이 흔히 봉토의 수입을 가지고 한가롭고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했으나, 모용씨 왕의 형제나 아들들은 정부 내의 가장 중요한 직책을 부여 받았고, 모두가 다 군대의 장군으로 봉직했다. 전연(前燕)이 성취한 정복들의 거의 대부분이 왕의 형제나 삼촌들의 탁월한 전략과 지도력 덕분이었다. 7

모용외와 그 후계자들은 느슨한 연맹체 형태의 부족 집단을 이원적 통치체제의 국가로 변모시켰다. 15세에 족장이 된 모용외는 일직이 농업과 관료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국식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모용황(慕容皝, r.333-49)은 337년에 스스로 연(燕)왕이라 칭하면서, 유목민과 농경민 모두를 지배하였다. 8 연은 전국시대에 중국대륙 동북방에 있었던 왕조의 이름이었다. 모용 선비는 오늘날의 북경을 포함하는 하북성의 북부지역까지 강역을 확장하였다. Schreiber(1949-55: 378)에 의하면, 모용 선비족이 최초에 점거한 지역이 고대 연나라 영토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연이라는 이름이 부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모용선비가 352년에 중원을 정복하자, 모용씨 조정의 한족 관료들이 제일 먼저 모용준(r.349-60)에게 황제라 칭할 것을 권했다 황제의 조정 형태가 되면 한족 관리들 자신이 좀더 높은 칭호의 직위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권유를 한 것이다. 9 모용준이 360년에 죽자, 유능한 동생인 각(恪) 대신에 11세의 어린애인 위(暐, 360-70)가 제위에 올랐다. 중국화 현상이 너무 빨랐고, 결과적으로 전연 역시 빠르게 해체될 수 밖에 없었다. [후대의 정복왕조들이 중국화를 경계하게 된 반면교사 역할을 한 것이다.]

일찍이 모용준은 서부와 남부 전투에서 승리를 하자 남쪽의 한족왕조 진(東晉)과 서쪽 부견의 진(前秦)을 정복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359년 초, 모용준은 자신이 당시에 정복한 모든 주와 군에 명을 내려 군 복무가 가능한 한족(漢族) 장정에 대한 현황을 조사한 다음, 각 가구에 남자 한 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장정들은 모두 징집하도록 명령했다. 모용준은 150만 명의 보병 대군을 자신의 지휘하에 확보할 계획이었다. 10

당시 전연 정부의 부패상이 얼마나 절망적 이었는가는 대신 신소(申紹)의 상소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상소문의 일부는 새로 징집된 군대에 관련된 내용이다: “과거 우리 궁사와 기병들의 용맹은 진(秦)과 진(晉)나라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했었다. 우리 (鮮卑) 병사들은 언제나 구름같이 몰려들고 질풍같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즘 (징집된 漢族) 병사들은 약속된 시간에 모이지도 않고, 전투에는 쓸모가 없는 것일까? 지방 관리들이 가난하고 약한자들에게 제일 먼저 군역과 조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전장과 노역에 끌려 나가는 자나 집에 남아있는 자나 모두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 고통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모두 도망을 치고, 농사와 양잠을 돌보는 자가 없게 된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우려는 의지다.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병사가 전투에 실제 참가하지 안을 때에는 평상시의 생업을 계속할 수 있게 허용되어야 한다” 11

섭정 모용각은 367년에 죽었다. 어린 황제는 정사에 관심이 없었다. 모용선비는 365년에 낙양을 점령했었으나, 370년에 부견에게 정복된다. 진서 편찬자들에 의하면, 연나라 말기에 병사들이 부패한 조정에 너무나도 실망을 했었기 때문에, 모용평(慕容評)이 [아무리 훌륭한 지휘관이었더라도] 죽기로 공격을 해오는 부견의 군대를 격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12

Schreiber (1956: 125)는, “모용씨가 중국화 되자 한족 고위 관료들뿐만 아니라 남조(南朝)까지 모용씨를 존경을 했다”고 말한다. 얼마나 비꼬는 찬사인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중국: 황금시대의 여명 - 200년부터 750년까지”라는 주제로 (2004. 10. 12. - 2005. 1. 23.) 전시회를 열었는데, 오늘날 요녕성의 서부에 위치한 조양(朝陽)과 북표(北票) 지역에서 발굴되고 모용 선비 고유의 유물로 확인된 상당수의 청동기와 금동제품들이 전시되었다 전시 내용을 책자로 펴낸 Watt(2004: XIX)등은 모용 선비의 예술품에 나타난 전형적인 도안 형태들을 얼마 후에 중국대륙의 북위와 한반도의 신라 예술품에서 다시 보게 된다고 말한다.

   
▲ Tomb Paintings of Farming unearthed at the (top) Zhao-yang area; (middle) Jiayu-guan 酒泉嘉峪關 area, Gan-su; and (bottom) 高台酪駝城 area, Gan-su.
조양에서 발굴된 한 쌍의 말 안장에 새겨진 (새와 다른 동물들을 품은 6각형들의) 투과형 문양은 모용 선비 고유의 기법인데, 후에 북위로 전파된다. Watt(2004: 125)등은, 이 문양이 같은 시대에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왕국의 한국사람들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사실 이런 문양들은 신라에서만 채택된 것이 아니라, 가야에서도, 또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열도의 야마토 왕국에서도 채택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양식과 문양에 아주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유물들이 선비족의 유적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370년, 선비족의 연나라는 부견(苻堅)의 전진(前秦, 351-394)에 의해 정복된다 부견을 흔히 탕구트(티벳)족 출신이라 하지만, 돌궐-몽골 계통의 지배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중국 전체의 새로운 주인이 된 부견은, 동진(東晋, 317-420)을 정복하려고 남쪽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였지만, 383년의 비수(肥水)전투 패배로, 전진 왕조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탁발이란 이름의 선비족은 그들 본거지인 성락(盛樂)으로부터 병주(幷州)로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북위를 세운 탁발규(拓拔珪)는 398년에 만리장성을 넘어 산서성 북쪽으로 쳐들어와 평성(平城, 오늘날의 大同)에 수도를 정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9 (2005. 2. 19)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BIBLIOGRAPHY
http://www.EastAsianHistory.pe.kr
http://www.WontackHong.pe.kr

[각주]

1. Guo (1995b: 148-9, 179) 참조.

2. Barfield (1989: 105)

3. Barfield (1989: 99)

4. Grousset (1970: 58)

5. Schreiber (1949-55: 374-5, 424) 참조. 모용외는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가령(家令)들을 제정했는데, 그 중 하나는: “농업은 국가의 근본이므로 농업의 진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晉書 卷一百八 載記 第八 慕容廆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 廆…言曰 稼穡者 國之本也 不可以不急

6. Schreiber (1949-55: 401) 참조.

7. Schreiber (1956: 121-2) 참조. 모용황은 자신의 부친이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을 대한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대했다. 그는 황태자를 앞장 세우지 않았고, 유능한 왕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어느 왕자이든 높이 존경했다. 모용황은, 한족 관료들이 맹렬히 반대를 안 했다면, 태자 준(儁)을 제쳐놓고 수(垂)에게 제위를 승계시킬 생각까지 했었다. 당시 모용준은 42세에 제위를 승계했다

8. Barfield (1989: 109-111) 와 Gerhardt Schreiber, “The history of former Yen dynasty,” Monumenta Serica, Vol. 14 (1949-55: 374-480) and Vol.15 (1956: 1-141) 참조. 모용외가 아들에게 훌륭한 중국식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모용황은 중국 고전에 능통했고, 중국의 전통적 교육방법을 존중하게 되었다. Schreiber가 李昉 (925-96)의 太平御覽에서 인용.

晉書 卷一百八 載記第八 慕容廆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晉書 卷一百九  載記第九 慕容皝 … 尙經學魏書 列傳 慕容廆 ..父涉歸..遷邑遼東…死 廆代領部落 ..死 子元眞代痲自稱燕王 置官如魏武輔漢故事 …征高麗[341] 大破之…子儁統任…建國十五年[352] ..置百官

9. 그러자 모용준은 한족 관습을 흉내 내, “우리 본향이 사막과 목초지이며 우리는 본래 야만인이었다”고 말하며 한족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다가, 353년 1월에 “나는 중국 백성들의 권유로 부덕하나마 제위에 오른다”며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Schreiber (1956: 31-35) 참조.

10. Schreiber (1956: 54-5) 참조. 360년 정월, 모용준이 병석에 누어있을 당시, 359년 겨울까지 지연되었던 새로운 군대의 징집이 본격적으로 집행되고 있었다. 모든 주와 군으로부터 징집된 장정들이 수도로 집결하면서, 작당한 도둑떼가 들끓었고, 산적들이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습격을 하여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晉書 卷一百十 載記第十 慕容儁 儁于是復圖入寇 兼欲經略 關西 乃令州郡校閱見丁 精覆隱 漏率戶留一丁 餘悉發之欲使步 卒一百五十萬 期明年大集 將進 臨洛陽 爲三方節度 武邑劉貴 上書極諫 陳百姓凋弊 召兵非法 恐 人不堪命 有土崩之禍... 乃 改爲三五占兵… 是時兵集 鄴城 盜賊互起 每夜攻劫 晨昏 斷行

11. 晉書 卷一百十一 載記第十 慕容暐 其尙書左丞申紹上疏曰 …弓馬之勁 秦晉所憚 雲騎風馳 國之常也 而比赴敵後機 兵不速 濟者何也 … 遂致奔亡 ... 退離 蠶農之要 兵豈在多 貴於用命 宜嚴制軍科 務先饒復 習兵敎戰 使偏伍有常 從戎之外 足營私業 Schreiber (1956: 82-6) 참조

12. Schreiber (1956: 128) 참조

 

Commencing the Dual System:
the Yan Kingdom of
Mu-rong Xianbei

Portending the advent of conquest dynasty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There is a clear continuity from the Hong-shan culture (c. 4,000-3,000 BC) to the later cultural stages of Southern Manchuria, notably the Lower Xiajia-dian culture (c. 2,000-1,500 BC).1 The (Northern) Yan kingdom, alledgedly enfeoffed to Shao-gong in 1027 BC, does not come into clear view in Chinese dynastic history until the Warring States period (403-221 BC). Ethnically, linguistically and culturally, the Liao-xi area around the Luan-Daling River basins, alledgedly conquered by the Yan in 311 BC, would not have contained any Han Chinese element. The nomadic bronze culture of Upper Xiajia-dian (1100-300 BC) was contemporaneous with the Shao-gong’s Yan kingdom (1027-222 BC) in Hebei. The ethnic foundation of the entire Liao-xi area must have incorporated proto-Xianbei-Yemaek elements in its ethnic composition that may well be connected with the Hong-shan culture. The Yan was conquered by Qin Shi-huang-di in 222 BC. According to the Shi-ji, the power of Xianbei seems to have reached its peak at the time Mao-dun became Shan-yu in 209 BC. The Xianbei were subjugated by the newly emerging Xiong-nu empire.

The Xianbei people had established a short-lived empire in the second century under the leadership of Tan Shi-Huai (156-81) which temporarily replaced the Xiong-nu rule in Mongolia, and then created the fourth-century (Murong Xianbei) Yan kingdoms in the aftermath of the demise of the Han Chinese empires, culminating in the formation of the fifth-century (Tuoba Xianbei) Northern Wei dynasty.

The fall of the Later Han dynasty started with the Yellow Turban rebellion of 184. After the death of Emperor Ling in 188, the Han ruler was the puppet of regional warlords. Liao-dong was occupied by the Gong-sun warlords from 190 until 238, who had established the Dai-fang commandery in the area south of Le-lang during 196-220. The Gong-sun ruler who proclaimed the King of Yan was killed by the (Cao Cao’s) Wei expeditionary force in 239.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220-265), small Xianbei tribes struck their own bargains with Wei, and laid claim to various frontier districts. The Wei dynasty maintained a policy of indirect rule over tribal peoples settled inside its borders, while providing generous subsidies and access to trade for those nomads living beyond its borders. The short-lived Western Jin dynasty (265-316) continued the Wei’s policies.

Murong Hui (r. 285-333) invaded Puyeo in 285, the very year he became the chieftain of the Murong Xianbei tribe and, in 286, launched an attack on the agricultural area of the Liao River basin that had been occupied by the Han Chinese after the Wu-di’s conquest of Old Chosun in 108 BC. When China was united, the Liao River basin could be incorporated into the empire, but in times of anarchy it was always the first Chinese provincial area to break away.2 Rulers in mainland China, after all, gave the northeastern frontier low priority and its inhabitants considerable autonomy.

Full-scale civil war raged in mainland China during 291-305. The Wei/Jin policy of keeping the Shan-yu as a hostage at court had produced a new type of sinified Xiong-nu leader able to overwhelm the Western Jin dynasty by capturing the Jin emperor at Luo-yang in 311.3 With the fall of Chang’an in 316, a member of the Jin imperial family fled south and, sheltered by the Yang-zi River, founded the Eastern Jin dynasty in 317 with its capital at Jian-kang (modern Nan-jing). Until 589, Nan-jing was to assume the role of Chang’an and Luo-yang, as Constantinople was to replace Rome, ruined by the Germanic barbarians in the fifth century.

Ledyard (1983: 331) notes: “The year 317 marks not only one of the most important social and political divisions in Chinese history, but also one in which a major part –better, the major part-- of China’s land is taken over by non-Chinese aliens.”

The first Xiong-nu Zhao dynasty (304-29) in North China created a Chinese-style state, which was unpopular among its tribal supporters from the Mongolian steppes and bred the seeds for internal revolt. The second Xiong-nu Zhao dynasty (319-49) was, on the other hand, unable to provide a competent government for its Chinese subjects.

The Manchurian Xianbei, by that time, were no longer purely nomadic. They had occupied the Liao River basin, ruling farmers and city people. They had imposed a dual system of tribally based military organizations on the Liao-xi steppe and a Chinese-style civil bureaucracy on the farmers and city dwellers of Liao River basin. Civil officials never acted as army commanders. According to Barfield (1989: 97-99, 106), the Murong Xianbei founded a state with this type of dual military-bureaucratic organization for the first time in East Asia during the era of Five Barbarians and Sixteen States (304-439).

The Murong Xianbei had lived inside the boundaries of China for several generations absorbing Chinese culture and customs before they started an independent state of their own. When Murong Hui laid the foundation of his state, he got advice and collaboration from many Chinese officials and scholars who purposely tried to develop Murong State into a Chinese Empire. Disgusted with their own Imperial House, the Si-ma family, and vehemently opposed to the rule of the Xiong-nu, many of the Chinese officials had joined the Murong, who had been able to keep order in their little state in Liao-dong during all this political turmoil. There they helped to organize a model Chinese court with a Chinese educated Murong ruler as head, and to expand the Murong state slowly to the south and the west.5 By introducing Chinese discipline and organization, and providing his soldiers with good weapons and armor, Hui did much to improve his army.6 

According to Fairbank (1992: 111-2), “this pattern of dual Sino-nomadic government was visible from the fourth century AD in southern Manchuria. It would reach its peak in the complete control that followed the Mongol and Manchu conquerors.” Regardless of the Confucian myth of government by virtue, the origin of dynasties was militarist and imperial autocracy could function only as long as the rulers commanded enough military might to destroy rebels. once a dynasty was established, however, their bureaucracies had to be civilian. Many Confucian-trained scholars had indeed specialized in military matters and some became surprisingly able generals. But the martial art was the specialty of nomadic invaders. It was only natural for the innovative Manchurian nomads to take over part of the Chinese domain and rule it, taking advantage of both their militaristic specialty and the efficiency of Chinese-style bureaucracy.

The Chinese organization of state provided for the emperor’s brothers a position of pre-eminence by making them feudal princes. While the feudal princes of the Chinese dynasties often used the income of their feudal domains for a life of leisure and luxury, the Murong princes assumed the most important government positions. Moreover, every one of them served as general in the army. Yan owed almost all of its conquests to the able leadership and strategy of the rulers’ brothers and uncles.7

The transformation of the Murong Xianbei from a tribal group to a dual state was the work of Murong Hui and his successors. Hui became a tribal leader at the age of fifteen but had the opportunity to receive a Chinese education that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agriculture and bureaucracy. Murong Huang (r.333-49), Hui’s successor, proclaimed himself King of Yan in 337, becoming a ruler of both nomads and farmers.8 Schreiber (1949-55: 378) notes that this name suggested itself because the state of the Murong Xianbei at its beginning covered almost the same territory as the ancient Yan. The Murong Xianbei extended into northern Hebei Province including present-day Beijing.

The Murong Xianbei conquered Central China in 352. The Chinese officials at Murong’s court were the first to urge Murong Jun (r.349-60) to proclaim himself emperor. They wanted an Imperial Court so that they could advance to the high positions which only such a court offered. 9 When Jun died in 360, instead of Murong Ke 恪, the capable younger brother of Jun, an eleven year old child ascended the throne (Wei 暐, r.360-70). Sinicization was rapid, and so was the disintegration of Former Yan.

After his successes in the west and in the south, Murong Jun began to consider final campaigns against the Jin, the Han Chinese dynasty in the South, and against the Empire of Fu Jian in the West. At the beginning of the year 359, he gave orders to the provinces and districts to make survey of all Han Chinese men fit for military service. Every family was allowed to keep one of those men; all the others had to be enlisted. He intended to have at his command an army of one million five hundred thousand foot soldiers.10

How hopelessly corrupt the government was can best be seen in a memorial presented by Shen Shao. A portion of it says about the new army: “The strength of our bowmen and cavalry [was] feared by Qin and Jin. Our [Xianbei] soldiers have always been noted for flocking by the colors like clouds and rushing against the enemy like the wind; yet why is it that recently they [the new Han Chinese soldiers] are often tardy in arriving at the appointed time or ineffective in combat? … The local officials, when assessing labor and taxes, always … put the poor and weak in first place. The ones who go to war and labor and the ones who are left behind are in distress and without any means to support themselves. … the result is that they become fugitives, and thereby … leave undone the important work of agriculture and sericulture. What is of prime importance with soldiers is not their number, but their willingness to give their lives. one ought to train the soldiers and teach them the art of war. When the soldiers are not actually on a campaign, they should be allowed to follow the occupation they have in private life.” 11

Murong Ke, the regent, died in 367. The young Emperor did not care for the government. The Murong Xianbei had captured Luo-yang in 365, only to be conquered in 370 by Fu Jian. The authors of the Jin-shu “state that at the end Murong Ping’s soldiers were so disappointed with the corrupt government in Yan that it was impossible for Ping to repulse the death-defying army of Fu Jian with them.” 12

Schreiber (1956: 125) notes: “As soon as the Murong became sinicized they gained the respect of the local high officials and even of the Court in the South.” What a cynical compliment!

The exhibition “China: Dawn of a Golden Age, 200-750 AD,” held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October 12, 2004 – January 23, 2005) includes a group of bronze and gilt-bronze objects, all from the area of present-day Zhao-yang and Bei-piao in western Liao-ning Province that can be identified as specific to the Murong Xianbei. Watt, et al. (2004: XIX) states that: “the typical design on Murong Xianbei artifacts would later be seen in the arts of the Northern Wei in China and the Silla kingdom in Korea.”

The openwork pattern on a pair of saddle plates excavated at Zhao-yang (composed of hexagons enclosing animals and birds) is believed to be unique to the Murong Xianbei and would later be transmitted to the Northern Wei. Watt, et al. (2004: 125) contends that, “at about the same time, the pattern was adopted by Koreans of the Silla kingdom, in the southeast quarter of the peninsula.” The pattern was indeed adopted not only by the Silla, but also by the Kaya, and by the Yamato people with some time lag. The Koreans are very familiar with these sorts of patterns and designs, and are rather shocked by their excavation at the Xianbei sites.

Fu Zhien of the Former Qin dynasty (351-394), as a new master of the whole of north China, mounted against the Eastern Jin (317-420) in the south a massive campaign which failed at the Battle of the Fei River in 383, a disaster from which the Former Qin was never to recover.

The Xianbei tribes known as the Tuoba began to penetrate into Bing-zhou from their base in Sheng-le. In 398, Tuoba Gui, the founder of the Northern Wei dynasty, crossed the Great Wall into northern Shan-xi and established his capital at Ping-cheng (present-day Datong).


BIBLIOGRAPHY

[각주]


1 See also Guo (1995b: 148-9, 179).
2 Barfield (1989: 105)

3 Barfield (1989: 99)


5 See Schreiber (1949-55: 374-5). Murong Hui had put down for his sons his principles 家令 of government --[one of them was] --“Agriculture is the root that nourishes the state; one must do everything to foster it.” (ibid: 424)
晉書 卷一百八 載記 第八 慕容 廆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 廆…言曰 稼穡者 國之本也 不可以不急

6 Schreiber (1949-55: 401)

7 Schreiber (1956: 121)
Huang himself showed the same attitude towards his sons as his father had shown towards him and his brothers. He did not put the crown prince in the first place but esteemed highly everyone of his sons who proved himself an able prince. He went so far that he wanted to make Murong Chui 垂 his crown prince and to set aside the lawful heir Murong Jun. only the vehement protest of the Chinese officials saved the throne for the latter. (Ibid: 122) Jun, who was then forty-two years old, ascended the throne.

8 See Barfield (1989: 109-111) and also Schreiber (1949-55: 426, 441). Owing to the good Chinese education which Hui had made available to his son, Huang was well versed in Chinese literature and had learned to esteem Chinese classical learning. Quotes (by Schreiber) from the Tai-ping yu-lan 太平御覽 compiled by Li Fang 李昉 (925-96).
晉書 卷一百九  載記第九 慕容皝 … 尙經學
魏書 列傳 慕容廆 ...父涉歸...遷邑遼東…死 廆代領部落 ...死 子元眞代痲自稱燕王 置官如魏武輔漢故事…征高麗[341] 大破之…子儁統任…建國十五年[352] ...置百官
9 Following the Chinese tradition, Jun pretended to refuse their request at first, saying that: “Our home originally was the desert and the steppe, and we were barbarians.” In 353, Jun proclaimed himself Emperor of China, saying that: “I have, urged by the Chinese people 爲中國所推, supplied the deficit and ascended the throne.”
See Schreiber (1956: 31-35; Tai-ping yu-lan, Zi-zhi-tong-jian 99).

10 See Schreiber (1956: 54-5).
When Jun was lying on his sickbed (in January 360), the recruiting of the new army, which had been postponed until that winter, was in full swing. From all the districts and feudal states of Yan the recruits flocked into the capital Ye. Organized robbery became rampant. Bandits raided from dusk till dawn and interrupted all communications. (Ibid: 58)
晉書 卷一百十 載記第十 慕容儁 儁于是復圖入寇 兼欲經略 關西 乃令州郡校閱見丁 精覆隱 漏率戶留一丁 餘悉發之欲使步 卒一百五十萬 期明年大集 將進 臨洛陽 爲三方節度 武邑劉貴 上書極諫 陳百姓凋弊 召兵非法 恐 人不堪命 有土崩之禍... 乃 改爲三五占兵… 是時兵集 鄴城 盜賊互起 每夜攻劫 晨昏 斷行

11 晉書 卷一百十一 載記第十 慕容暐 其尙書左丞申紹上疏曰 …弓馬之勁 秦晉所憚 雲騎風馳 國之常也 而比赴敵後機 兵不速 濟者何也 … 遂致奔亡 ... 退離 蠶農之要 兵豈在多 貴於用命 宜嚴制軍科 務先饒復 習兵敎戰 使偏伍有常 從戎之外 足營私業
See Schreiber (1956: 82-6).

12 See Schreiber (1956: 128).


http://www.WontackHong.pe.kr
http://www.EastAsianHistory.pe.kr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