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럽 휩쓴 '훈족'은 한민족 | ||||||||||||||||||||||||||||||||||||||||||||||||||||||||||||||||||||||||||||||||||||||||||
흉노족중 서진한 건 훈족, 동진한 건 한민족 | ||||||||||||||||||||||||||||||||||||||||||||||||||||||||||||||||||||||||||||||||||||||||||
현대과학문명은 유럽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는 유럽이 아니었다. 기원전 500년경부터 그리스에 이어 로마가 득세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로마가 유럽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기간에 몇몇 아시아 민족이 유럽에 진출하긴 했으나 로마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로마를 멸망케 만든 직접적인 요인은 아시아 민족인 훈족(Huns)이었다. 서기 375년, 기마민족인 훈족(Huns)이 볼가 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동고트를 공격하자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고 서고트는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 안으로 들어가 살게 된 지 100여년 후인 476년, 결국 서 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다. 이후 게르만족이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의 각 지역으로 갈라지면서 유럽에는 새 국경이 그어졌고 이때 성립된 국경은 대부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서유럽에서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켰으며 현재의 독일, 벨기에, 프랑스 및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는 등 당시 세계 최강의 로마제국을 풍전등화와 같은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훈족은 한민족 중에서도 가야 신라와 친연성(親緣性)이 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적 주장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도 많지만, “무슨 얼토당토한 소리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훈족이란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생소할 뿐 더러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서기 4~5세기경 한반도에 살고 있던 한민족이 어떻게 유럽을 공격할 수 있었겠느냐는 이유에서다. 특히 국수주의적 발상으로 훈족을 한민족의 선조라고 무리하게 끌어들이고 있다는 비평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훈족이 한민족의 일파라는 역사적 주장이 곧 한민족이 유럽을 직접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훈족은 흉노(匈奴, 북방 기마민족을 통칭한다)의 한 분파로,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약 600년간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과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했다. 이때 흉노에 속해있던 한민족의 원류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西遷)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한 부류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까지 진출하여(東遷) 현재의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흉노란 중국 북방에서 처음 유목민 국가를 건설한 제국의 명칭이지,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 한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는 동호(東胡, 예맥조선을 뜻하며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 적었다)를 격파하는 등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슈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에 이르렀다. 이 당시 흉노의 영토는 중국의 거의 3배에 달할 만큼 대제국이다.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 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골 반점은 꼬리뼈 높이 엉덩이에 나타나는 색소 변색으로 유전학적으로 몽골계통의 민족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이다. 몽골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훈족은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 예맥각궁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훈족이 예맥각궁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말해준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용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관습적인 공통점도 발견되고 있다. 훈족의 골상이 편두(偏頭, cranial deformation 일명 납작머리)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의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었고, 머리 둘레에 고랑 같은 주름이 팼으며,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편두라고 알아냈다. 편두는 중국인과는 구별되는. 동이(東夷)족 사이에 매우 오랬동안 성행했던 풍습으로 볼 수 있는데 가야국이 창립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으며 신라의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로 추정된다('기획연재' 「금관이 풀어낸 편두 습속」(2004.02.21) 참조). 주목할 만한 점은 훈족에게선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흉노의 특수 부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 지역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대·소형 동복이 발견된다. 유목부족장들에게 바쳐진 동복은 정화의식(Purification rite)에서 고기를 제물로 바칠 때 쓰는 동제용기로 대형 화분처럼 생겼다.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동복은 가야 등의 원류가 북방 기마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국보 91호) 토기에도 말 잔등에 동복을 싣고 다니는 모습이 발견된다. 게다가 기마인물상의 주인공들도 모두 편두이다. 또한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한민족의 금관 등 머리 장식 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형상(出字形 장식)과 녹각형상(鹿角形 장식)이 많다. 이는 북방에게도 나타나는 풍습으로 북방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정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북방 기마민족의 대표적인 무덤인 적석목곽분이 유독 가야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다. 적석목곽분이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고 시체와 부장품들을 안치한 후에 위에는 상당히 많은 돌로 둘레를 쌓고(護石)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드는 것을 말하며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중국, 일본에는 없는 무덤이다. 적석목곽분은 경주 시내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황남동의 대릉원(大陵園)이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왔으면 틀림없이 이곳을 둘러보았을 것이다.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하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 23기의 고분들로 공원이 조성돼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의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목곽 위에 얹어놓은 형태가 발견되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입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들을 숭배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서천(西遷)한 훈족, 동천(東遷)한 한민족〉 그렇다면 고대 한민족의 원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훈족과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인으로 갈라서게 됐을까. 이는 진시황제 때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흥망성쇠와 연계된다.
흉노는 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기간에 걸쳐 혈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57년에 동과 서로 양분되어 서로 전쟁을 벌인다. 서흉노의 선우(흉노의 왕으로 '하늘의 아들'을 뜻함)인 질지가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 너머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도착한다. 이것이 흉노의 제1차 서천(西遷)이다. 질지는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웠다. 서유럽은 이때를 흉노 제국 출현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중국에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세가 불리함을 느낀 남흉노는 48년 고비사막 이남의 8개 집단을 이끌고 광무제(기원전 6년∼기원후 57년)를 찾아가 투항했다. 광무제는 투항한 남흉노에게 아예 내몽골 영토를 주어 투항하지 않은 북흉노를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73년에 이르러 한나라는 남흉노와 연합해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패배의 고배를 든 북흉노는 북쪽 막북(漠北)으로 이동하는데, 이것이 흉노의 제2차 서천이다. 북흉노는 서역제국을 장악한 후 그 세력을 규합하면서 한나라와의 대결을 꾀한다. 그러나 한나라는 화제(和帝, 89∼105) 원년인 89년에도 남흉노를 규합하여 북흉노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치명상을 입고 사분오열된 북흉노는 대부분 동호(東胡)에서 분리된 선비(鮮卑)에게 예속되었다. 그러나 일부 흉노는 천산산맥 북쪽으로 계속 서진하여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발하시호와 아랄해 사이의 강거(康居) 땅에 이르렀다. 이것이 흉노의 제3차 서천이다. 흉노와 훈족을 연결시키는 또 다른 연결 고리는 한나라 왕조가 붕괴될 무렵에 등장하는 남흉노이다. 304년 당시 산서의 태원에 자리잡고 있던 유연(劉淵 ?∼310)은 진(晉)나라 혜제에 의해 남흉노의 왕으로 책봉된다. 그러나 유연은 과거 선조 중에 한나라의 공주가 있었음을 근거로 자신이 한나라의 후예라고 내세우며 스스로 황제로 칭했다. 그는 308년 태원에서 북한(北漢 前趙)을 세운다. 318년 석륵(石勒 274∼333)은 전조(前趙)를 폐하고 후조(後趙)로 알려진 새로운 흉노국가를 세웠고 349년 석민(石閔)이 후조(後趙)의 정권을 잡았다. 석민은 350년 흉노에게 원한이 많은 한인(漢人)들을 부추겨 대대적인 흉노 토벌에 나서도록 한 뒤 무려 20여만의 흉노가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흉노로서 이것이 결정적인 패배였다. 중국에 동화된 흉노와 유목생활을 하던 흉노가 연합했음에도 패배하자, 살아남은 흉노들은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흉노의 4차 서천으로, 이들은 이미 1∼3차에 걸쳐 서천했던 흉노와 합류(또는 압박)한다. 설상가상으로 370년경부터 혹독한 한파가 엄습하자, 흉노는 보다 서쪽으로의 이동을 단행, 375년에 서유럽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학자들은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 자체가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특히 금관가야는 흉노가 직접 한반도에 들어와 세웠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대 흉노 속에 포함됐던 한민족의 일파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다른 일파가 동천(東遷)하여 가야 등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백산학보』(제66호, 2003년 8월)), 「고대유럽 호령한 수장 아틸라는 한민족」(『신동아』 2003년 11월호), 「몽골족이 게르만족의 세상으로」(『월간조선』 2003년 11월호)와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백산자료원)을 참조하기 바란다. 04/3/2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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