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9)세계 해전사 바꾼 최무선의 화포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2. 11:18
세계 해전사 바꾼 최무선의 화포
유럽보다 200년앞서 함포로 왜선 500척 격침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던 임진왜란(일명 7년 전쟁)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이상한 점들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 정부의 무능과 일본에 대한 정보 부족이다. 명나라를 치러 간다는 명분으로 조선과 동맹을 맺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제의를 받고 소위 정탐꾼(통신사)을 공식적으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 야욕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찬반양론을 벌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수차례의 격론을 거친 후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같은 결론은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레토판해전. 함선에 화포를 장착한 기독교측은 화포에 무방비상태이던 오스만터키군을 단숨에 격파해 해상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허겁지겁 신의주까지 도망갔다. 다행히 명나라 원군 덕에 한숨 돌렸지만 명군 역시 일본군에게 참패한다. 지루한 평화 협상 끝에 일본은 결국 철수한다.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도 조정에서는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다가 정유재란을 맞는다. 이때도 조선군의 활약은 미비했다. 전쟁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다는 이순신장군의 수군과 일부 관군 및 의병들의 선전에 이어 적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일본군이 자진하여 완전히 철수했다는 것이 적절한 지적이다.

그리고 전쟁의 결말도 개운치 않다. 원래 전쟁이 끝나면 전쟁의 책임 소재를 규명하고 피해 보상책을 마련하는 것이 원칙인데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유린되고 수많은 한국인이 일본에 끌려갔지만 책임 추궁도 없었고 일본으로부터 아무런 피해 보상도 받지 못했다. 한마디로 조선은 피해만 입었고 실리는 모두 일본이 챙겼다. 일본이 조선에서 수많은 도공을 끌고 가 세계 최고의 도자기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필자의 시각은 임진왜란이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30년을 더 살았다면 조선 반도는 일본인들에게 완전히 예속되거나 병탄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선 정부의 능력과 당시 여건을 감안할 때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은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며 이 승리는 한·일간 무기의 성능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임진왜란 초기에는 일본인들이 조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이 고전했지만 대형 화기, 즉 대포나 자동발사화기에서는 일본보다 월등하게 우세했다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얕잡아보았던 조선군이 일본군이 상상하지도 못한 뛰어난 성능의 대포를 갖고 있음에 놀라 이를 복제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조선은 전쟁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대포와 같은 대형 화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함선에는 대형 화포들이 모두 장착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개전 초기에는 고전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전력을 되찾아 반격에 나섰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아군의 군선은 고작 12척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왜군을 대파할 수 있었던 것은 아군의 화포가 적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당파싸움이나 일삼던 조선에서 어떻게 그런 무기를 확보해놓고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정답은 놀랍게도 고려말에 이미 세계에서 최초로 함선에 화포를 장착하여 왜구를 격멸시키는 등 해전에 있어 어느 나라도 따라오지 못할 기술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 국산 화약 개발이 관건
고려시대에 왜구(倭寇)는 고종 10년(1223)에 처음으로 침입했으나 충열왕 때 원나라와 함께 일본 정벌에 참가함으로써 한동안 잠잠해진다. 그러나 충정왕 2년(1350)부터는 매년 침범하여 공민왕과 우왕을 거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극성을 벌였다. 고려말의 왜구는 침입횟수가 많은 것은 물론 그 규모가 매우 컸다. 많을 때는 200∼500척까지 떼지어 몰려들어 특정 해안지대는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입하여 그 피해가 막심했다.

군산에 있는 진포대첩비.
이때 일본은 남북조로 갈려 60여 년간(1322∼1392) 전쟁을 하고 있어 중앙정부의 위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자 일본 서부의 호족들이 곡식과 기타 필수품을 획득하기 위해 해적떼를 조직하여 마침 국방력이 약화된 고려를 조직적으로 침입했던 것이다. 왜구가 창궐한 원인 중에 하나는 고려 전략에도 기인한다. 고려는 왜구가 침입하면 일단 그들을 육지에 상륙시켜 놓고 요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육전(陸戰)위주의 전술을 견지했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자 공민왕은 육전에서 수전으로 전략을 바꾼다. 왜구들을 육지에 상륙시키지 않고 바다 위에서 그대로 격퇴하는 해전주의로 전술을 바꾸어 군선을 건조하고 수군을 조직했다.
이때 최무선이라는 걸출한 과학자이자 발명가가 등장한다. 최무선은 고려 말엽인 충숙왕 12년(1325∼1395) 경북 영주(현재의 영천)에서 광흥창사 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흥창이란 관리의 봉급을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최무선이 무관으로 임관했을 때 고려 조정은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화약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화약무기를 사용하는데 가장 관건인 화약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려 이전에는 한국에서 화약을 자체적으로 화약을 개발하여 사용했는데 고려 후기에는 화약 제조법을 잊어버려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개국한 명나라는 고려의 화약 공급 요청에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충분한 양을 공급하지 않았다.

명나라로부터 충분한 양의 화약을 공급받지 못하자 고려 조정은 국내에서 화약 만드는 방법이 최상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최무선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최무선은 우선 과거에 화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염초에 반묘(유황)와 버드나무 숯(분탄)을 섞어 화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반묘와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염초를 만드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화약을 만들기 위해 부엌 아궁이의 재나 마루 밑의 흙을 물에 타서 끓이는 등 수 없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초보적으로 염초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성능을 개량하기 위해서는 염초의 제조법을 정확히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는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염초 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인 이원(李元)을 만나 그에게서 염초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그 후 실험을 거듭하여 화약의 기본 성분인 염초〔초석, 질산칼륨(KNO3)〕 만드는 방법을 숙지하여 반묘와 탄소를 합리적으로 배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오늘날 흑색 화약(유연화약)과 같은 것으로 질산칼륨 75퍼센트, 유황 10퍼센트, 목탄 15퍼센트를 화합하여 만든 화약을 말한다.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 화통 등을 만들어 실험해본 후 자신감을 얻자,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건의했다. 1377년 고려는 드디어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판서로 임명했으며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을 조직했다.

국방군사연구소 발행 ‘한국무기 발달사’에 의하면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17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했다. 그가 개발한 무기는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화전(火箭), 주화(走火), 유화(流火), 촉천화(觸天火), 천산(穿山), 오룡전(五龍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질려포( 藜砲), 철탄자(鐵彈子) 등이다.

■ 최무선 화포 사용한 해전, 유럽보다 200년 앞서
최무선의 화약 개발은 원래 왜구를 퇴치하기 위한 것으로 그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서 군함에 화포를 장착하여 적들의 배를 파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화약을 자체로 개발하고 화통도감의 판서가 되어 화약무기를 만들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데 그의 진가는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다.
1380년 우왕 6년에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 2만여 명이 500여 척의 배로 진포(현 군산)에 상륙하여 내륙을 휩쓸고 다녔다. 고려 조정은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최무선을 부원수로 삼아 전선 80여척을 동원 왜구를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진포대첩을 지휘하고 있는 최무선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왜구들은 주력이 이미 상륙하였고 선박들을 모두 연결하여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최무선의 화약무기로 무장한 고려 군함은 왜구의 선박에 포격을 퍼부었다. 이 당시 화포, 화통, 질려포 등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로켓무기인 주화, 유화, 촉천화 등이 전선 깊숙이 날라가 500여 척의 선단을 단 한 척도 남김없이 격멸했다.

최무선의 화약무기 공격으로 배를 모두 잃은 왜구 잔병은 충청도 옥천과 경상도 상주, 김천을 거쳐 남하하다가 전라도 남원에서 후에 조선왕조를 세우는 이성계에 의해 지리산 밑의 운봉(雲峰)에서 완전히 섬멸한다. 이 전투가 유명한 남원의 운봉 황산대첩이다.
우왕9년(1383)에 또 다시 왜구들이 120척의 배로 침입해 왔으나 정지 장군이 군함 47척으로 왜구의 선박 120척을 추격하여 남해 관음포에 이르러 화포로 왜구들이 갖고 있던 선박을 모두 격멸한다. 승기를 잡은 고려 조정은 왜구를 원천적으로 근절시키기 위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키로 하고 1389년에 박위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여 전선 100척을 동원하여 대마도 토벌에 나선다. 고려군은 30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왜구 소굴을 철저히 파괴하고 인질로 잡혀있던 고려 백성 100여명을 구출해서 귀국한다.

이 모든 전투가 최무선의 화약무기를 전선에 탑재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최무선이 고려 선박에 화포 장착이 용이했던 이유는 고려의 함선들인 과선(戈船), 대선(大船), 그것을 승계한 조선의 판옥선(板屋船)은 두 개의 용골을 나란히 깔아 이어서 선체를 만드는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기 때문이다. 평저선은 포 사격시 발생하는 반동에도 안정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후일 임진왜란이 발발된 후 일본이 화포를 장착한 조선의 함선의 위력에 놀라 조선 수군과 마찬가지로 화포를 설치하지만 용골이 하나뿐인 구조로 인하여 조선 수군에 비해 화포의 명중률이 현저하게 낮았다.

여하튼 최무선의 중요성은 진포 앞바다의 해전이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선박에 화포를 설치하여 정박 중인 적선을 완파했고 관음포에서는 바다에서 함포로 적선을 격침시키는 해전을 치루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해전을 벌인 것은 고려보다 무려 2백 년이나 늦은 1571년 10월 7일 아침,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의 연합 함대가 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레판토 해전이다.

학자들은 최무선의 화약 발명에 이은 군함에의 화포 도입이 조선 왕조를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다. 이성계가 최무선의 함대가 진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패잔병들을 운봉 황산에서 궤멸시키지 않았다면 고려인들의 신망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최무선의 해전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전환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왜구를 격퇴하기는커녕 패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도 최무선이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과학기술부가 2003년 1월,‘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할 선현 14인 중에 최무선을 최우선으로 선정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04/2/16 이종호(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