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은 투르크 아닌 몽골계 | |||||||||||||||||||||||||||||||||||||||||||||||||||||||||||||||||||||||||||
자존심 상한 유럽이 동방 아닌 유럽계로 설정 | |||||||||||||||||||||||||||||||||||||||||||||||||||||||||||||||||||||||||||
사상 최고의 기마군단으로 서유럽을 초토화시키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케 한 훈족이 한민족의 일파라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외이기는 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고대사를 규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왜 한국인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훈족이 우리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훈족이 누구냐는 연구가 서양에서조차 300여 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이며 둘째는 훈족을 흉노 중에서도 몽골계가 아니라 투르크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투르크계와 몽골계는 유사한 면이 있으면서도 차이점이 많기 때문에 한국 학자들로서는 민족이 다른 투르크의 역사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고대 유럽 휩쓴 ‘훈족’은 한민족(2004.03.02), 사상 최강의 훈족(2004.04.19), 5세기 동양은 광개토태왕, 서양은 아틸라가 패자였다(2004.04.23) 참조). 〈서양인들의 자존심이 걸린 훈족의 원류〉 훈이 흉노에서 연유했다는 것은 1750년대에 프랑스의 드 기네(Joseph de Guignes, 1721∼1800)가 처음으로 제시하였지만 처음부터 정설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훈족이 누구냐는 것은 아시아 및 유럽 고대사의 이해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훈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럽인들은 아전인수격으로 훈족을 해석했다. 훈족의 기원을 놓고 아시아 흉노계를 비롯해서 몽골계, 투르트-몽골 혼합계, 투르크-몽골-만족 혼합계, 피노 우그리아계, 게르만계, 카프카스(코카서스)계 등 매우 다양하게 논쟁을 벌였지만 훈족을 연구하기 시작한 초창기의 유럽 학자들은 훈족을 흉노가 아니라 유럽계 유목민 즉 서양인으로 설정했다. 유럽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유목민은 ‘스키타이’라 불리는 유목민들이다. 스키타이는 기원전 7세기부터 러시아 대평원의 패권을 장악했던 기마민족으로 앗시리아의 에사르하돈(Esarhaddon, 기원전 681∼669년 재위) 연대기에 처음 나타난다. 앗시리아인들은 그들을 아쉬쿠즈(Ashkux 또는 Ashkuzai),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들은 사카(Saka)라고 불렀으며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이(Skythai 또는 Skythes)라고 불렀다. 그러나 스키타이들은 스스로를 스콜로텐(Skoloten) 혹은 슈크(Shk)라고 불렀으며 이란인 계통으로 추정된다(밀러는 남부 러시아의 스키타이 비문들을 분석하면서 지역에 따라 적게는 10퍼센트에서 많게는 60퍼센트까지, 다양한 이란적 요소가 발견된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유목민답게 주위 민족들과 수많은 전쟁을 벌렸는데 학살과 약탈을 당연시했던 고대인들의 기준으로도 야만족이라고 비난받았다. 실제로 훈족과 칭기스칸의 몽골족이 공격적인데다가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행동으로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잔인함에 관한 한은 스키타이가 이들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한다. 스키타이족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현재 알려진 지식의 상당부분은 헤로도투스(Herodotus, 기원전 484?∼ 기원전 425?)와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n, 기원전 64∼ 기원후 21?)이 남긴 17권의 『지리서』의 증언에 의지한다. 헤로도투스는 『역사』에서 스키타이 전사들의 야만스런 풍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스키타이 전사는 최초로 죽인 적의 피를 마신다. 또한 전투에서 살해한 적병의 머리는 모두 잘라 앞으로 가져온다. 전사들은 그 목의 수에 따라 전리품을 나누어 받으며 머리가 없으면 분배를 받지 못한다. 1년에 1명의 적도 죽이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수치이며 부족회의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적의 목은 스키타이 전사의 무공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처리를 했다. 두개골의 눈썹 아랫부분을 톱으로 잘라내고 나머지 부분을 깨끗이 소제한 후 소의 생가죽을 입힌 다음, 안쪽에 금을 입히고 술잔으로 사용한다. 중요한 손님이 오면 이들 두개골을 보이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또한 머리의 양쪽 귀를 중심으로 둥글게 자른 다음 머리를 흔들어 두개골에서 두피(頭皮)를 떼어 낸다. 소의 늑골을 사용해서 가죽에서 살점을 떼어 내고 손으로 주물러 부드럽게 하면 손수건이 된다. 손수건을 말 고삐줄에 매달아 과시하는데 현대인이 볼 때 엽기적인 행동이지만, 스키타이 인들에게는 손수건을 많이 갖고 있는 자가 가장 훌륭한 용사로 간주되었다. 심지어는 머리 가죽을 여러 장 이어 맞추어 외투, 어깨망토, 방석 등을 만들었다. 이런 물건을 직접 사용해 본 헤로도투스는 살가죽이 희고 광택이 난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스키타이가 유럽 문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야만성 때문에 현재의 유럽이 존속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스키타이가 아니었다면 동방에 있는 더 큰 공포, 즉 중앙아시아로부터 주기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유목민들로부터 유럽을 구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여 그들의 야만성이 동방의 아시아인들로부터 서방을 지켜주는 방파제 구실을 했으므로 유럽의 학자들은 훈족을 스키타이의 후예나 그들의 방계로 간주했다.
유럽학자들의 이러한 예단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훈족이 서진하는 과정에서 맞부닥친 민족으로 유명한 사르마타이족(Sarmatians)이 있었는데 이들은 스키타이를 격파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키타이를 이은 사르마타이족은 훈족의 주류가 아니라 훈족에 예속된 유목부족 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훈족이 서방으로 진격하는 동안에 많은 민족들이 훈족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 훈족의 지배 하에 들어간 민족 중에는 사르마타이족뿐만 아니라 게르만족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는 스키리족(Skirians), 게피다이족(Gepids), 콰디족(Quadi), 헤룰리족(Heruli) 등이 특히 유명한데 그 중 스키리족은 한때 남부 러시아에 살던 민족으로 훈족의 주력 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차츰 흉노와 훈에 대한 사료가 축적되고 유물들이 곳곳에서 발굴되면서 훈족이 흉노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자 유럽인들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훈족이 유럽인이 아니라면 아시아계통의 야만족에게 유럽이 정복당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훈족이 흉노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자료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리스 학자 스트라보(Strabo, 기원전 63?∼기원후 23?)는 훈의 위치를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동쪽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역사학자 플리니우스(Plinius, 125년 사망)는 훈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흉노와 같다. 1세기 후반의 지리학자 오로시우스(Orosius)나 2세기 중엽의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Polemais)가 작성한 지도에 훈의 거주지역으로 표시된 지점들이 중국의 자료에 보이는 흉노의 지역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더욱이 355년∼365년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사이에 존재하던 알란(Alan)이 외적에 의해 침공당했을 때, 중국의 위서(魏書)에는 흉노에 의한 침공사실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당시 라틴학자 마르셀리누스(Marcellinus)는 침공의 주인공을 훈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동서의 자료가 흉노와 훈으로 묘사한 또 다른 예는 북위(北魏)의 고종(高宗, 452∼465)에게 보내진 소그드어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북한(北漢)을 세운 유연이 평양(平陽)에서 황제를 칭하고, 그 아들 유총이 서진(西晉, 266∼316)의 수도 낙양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소그드 상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낙양을 공략한 흉노를 훈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훈족이 투르크 계라면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아〉 외형적으로 볼 때 유럽인과 한국인을 포함한 몽골계는 확연히 구별된다. 동양계인 몽골로이드와 유럽인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형태학적 차이로 눈 부위를 지적하는데 몽골로이드는 코뼈가 낮은 데 비해 유럽인의 코뼈는 현저히 융기되어 있다. 또 유럽인의 윗 턱 부분은 그다지 돌출해 있지 않은데 비해 몽골로이드 윗턱은 치아와 더불어 돌출해 있다. 그런데 훈족이 유럽계 서양 유목민이 아니고 흉노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유럽 학자들은 훈족이 서양인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절묘한 대안을 내놓았다. 훈족이 흉노이기는 하지만 몽골-투르크계 중에서 투르크계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투르크족을 몽골로이드 계통에서 분리하여 백인 계통으로 분류한다. 즉 그들은 흰색 피부, 짙게 빛나는 눈동자, 둥근 얼굴, 강건하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단두(短頭, Brachycephaly) 백인종으로, 4대 백인종 그룹 중 유로피드 투라니드(Europid Turanid)계통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훈족이 흉노계 투르크계라면 몽골계 흉노가 서양을 지배했다는 문제점을 피해갈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투르크인은 한자로는 돌궐(突厥)로 표기되며 서융(西戎)에 속한다. 6세기 중엽에는 몽골계 유목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토문카간(土門可汗)이 초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초반에 몽골 초원과 북부 중국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반면, 중앙 아시아와 중동지역 이슬람 세계 내에서 패권을 장악하며 11세기경부터 아랍 계열의 칼리프를 무력화하고 술탄의 명칭을 계승하였다. 투르크는 오스만 조에서 전성기를 맞아 1493년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대제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현재 터키 공화국의 모태가 되었다. ‘훈족’이란 용어는 원래의 훈족으로 불린 지배집단에 의해 지휘된 모든 부족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훈족 속에 상당수의 투르크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수긍이 가는 일이다. 또한 훈족이 서방으로 서천하면서 조우하는 민족을 정복하면서 많은 민족들이 훈족의 휘하에 들어갔다. 451년 살롱대전투가 벌어졌을 때 훈족의 주력부대는 훈족을 포함하여 훈족에 의해 정복당한 알란족과 동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 등 무려 45개 민족에 달하였다. 훈족에 유럽 계통으로 볼 수 있는 민족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중국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사마천은 흉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신체는 작지만 땅땅한 편이고, 머리는 아주 크고 둥글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콧구멍이 넓으며 콧수염이 아주 텁수룩하고 아울러 콧수염은 많지만 뺨에 난 뻣뻣한 털로 된 수염을 제외하고는 턱수염이 없다. 긴 귀에 구멍을 뚫어 둥근 모양의 귀고리를 달고 있다. 그들의 머리 모양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겨우 정수리에 있는 머리털만 남긴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불타듯이 강렬하며 눈은 찢어진 모양이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겉옷은 양쪽이 터져 있으며 그것을 묶은 허리띠의 끝을 앞으로 늘어뜨린다. 추위 때문에 소매는 손목에서 단단하게 묶는다. 짧은 털로 된 망토로 어깨를 덮고 털모자로 머리를 가린다. 신은 가죽으로 만들었고 넓은 바지에 허리띠를 단단하게 묶는다. 허리띠에는 활집을 왼쪽 넓적다리 앞으로 기울여 맨다. 화살통 역시 허리띠에 매되 등 뒤에 걸치고 활시위는 오른쪽을 향하도록 한다.’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눈동자가 불타듯이 강렬하고 눈이 찢어진 모양이라는 것은 동양인의 모습이다. 사마천의 흉노에 대한 설명은 외양만 놓고 볼 때 대부분의 한국인을 설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기록도 있다. 후월(後越)의 태자(太子) 손진(孫珍, 흉노)이 한(漢) 사람의 시중(侍中)인 최약(崔約)에게 안질(眼疾)의 치료법을 질문했을 때, 평소에 손진을 경멸하던 최약은 익중칙유(溺中則愈)라 답했다. 손진이 “눈을 어떻게 물에다 잠기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최약은 “당신의 눈은 움푹 들어가서 바로 물에 잠길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손진이 화가 나서 최약 부자(父子)를 주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흉노로 불린 손진은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았다는 것을 뜻하므로 중국인과도 구별되고 몽골인과도 외모가 구별된다. 흉노를 묘사하면서 사마천은 동양인, 최약은 서양인의 모습으로 적었는데 흉노가 수많은 부족들로 구성되었다고 추정한다면 흉노의 모습이 완연히 다른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광대한 영토를 영유하고 있는 흉노 제국 안에서 사마천이 설명한 동양인과 최약이 설명한 서방계 모습의 민족이 함께 공존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료를 보더라도 흉노에 동양계와 서양계가 혼재되어 있으므로 훈족이 어느계인지를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럽인들은 재빠르게 훈족은 투르크계라며 다음과 같은 증거를 제시했다. 우선 프랑스의 뻴리오는 중국어로 표현된 몇 가지 단어를 복원할 경우 이들 대다수는 투르크적이고 특히 그들의 정치적인 지배집단이 투르크에 속한다고 발표했다(국역판 {사기}에도 흉노족이 오늘날 핀란드와 헝가리 민족의 선조로서 원래 유럽 인종에 가까운 편이라고 적었다). 더불어 훈족의 왕가가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도 중요한 증거로 제시했다. 아틸라의 아버지 문주크는 구슬(Boncuk)이나 깃발(Bayrak)이라는 뜻이며 아틸라의 아들인 덴기지크(Dengizik)의 어원도 투르크어 계통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유프라테스 강 중류 시리아-이라크의 접경 지대에서 발굴된 3세기 중엽의 비문에서 훈족의 이름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이름도 투르크 식이었다. 몽골의 노인 울라(Noin Ula) 고분군 제25호에서 출토된 흉노의 인물 자수화도 투르크 계열로 추정하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 인물 자수화에서는 주인공이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빗고 있는데 이마가 넓으며 눈이 크고 짙은 콧수염을 갖고 있다. 특이한 것은 안구는 검은색 실로, 동공은 남색 실로 수놓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몽골족은 동공이 검고 턱수염이 없으며 눈이 작은 반면에 투르크족은 동공이 남색이고 턱수염이 많으며 눈이 큰 것이 특징이므로 자수화의 인물은 투르크 계열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몽골의 고고학자 책 도이길소영은 주인공의 동공을 남색으로 수놓은 것은 검은 안구와 구별하기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눈빛이 예리하고 위엄이 있게 보이기 위한 일종의 미술기법이고, 몽골인의 콧수염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르는 사람도 있으므로 동공의 남색이나 콧수염의 유무로 몽골인 여부를 가리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유럽인들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1955∼1957년에 섬서성 장안현 예서향 객성장(客省庄) 양주고분군에서 발견된 흉노 고분의 동제 부조(浮彫)도 훈족이 투르크계라는 근거로 인용했다. 이 부조에서는 콧대가 높고 가랑이가 긴 바지를 입은 장발의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씨름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투르크인들은 눈이 깊고 코가 높으며 장발인데 반해 몽골인들은 코가 낮고 단발이므로 외형적인 특징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인 흉노가 투르크 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돌궐계와 몽골계는 장례방식이 다르다〉
우선 훈족이 유럽에 등장할 초창기부터 수세기 이내에 편찬된 유럽의 역사학자들의 사료에 나타나는 훈족의 모습은 투르크계가 아니라 몽골계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조시모스는 훈족을 일컬어 ‘형태 없는 돌덩이인 얼굴을 가졌다'면서 ‘피부색이 어둡고,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나 있고 코는 납작하고, 뺨에 상처가 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있고(눈이 작다는 뜻) 코가 납작하다’는 것은 동양인의 얼굴을 표현한 것임에 틀림없다.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도 이교도인 훈족에 대해 특히 심한 거부감을 보이면서 그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들은 혐오감을 준다. 이들은 낮은(모양이 없고 평평하게 자란) 코, 튀어나온 광대뼈, 얼굴에 있는 두 개의 눈은 눈꺼풀이 조그맣게 열려 있어 광선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그들의 꿰뚫어보는 눈은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 아폴리나리스가 설명한 훈족도 서양인의 얼굴이 아니라 동양인의 얼굴이 틀림없다. 유럽인들의 언어학에 의한 주장도 반론이 제기되었다. 일본의 시라토리 쿠라키치를 비롯한 동양계 학자들은 흉노의 언어적인 연구에 의하면 유럽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흉노는 투르크 계열이 아니라 몽골로 구분해야 한다고 단언해서 발표했다.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으로 유명한 웰스(Herbet George Wells, 1866∼1946)도 그의 저서 『웰스의 세계문화사』에서 훈족을 서방세계가 그 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역동적이며 유능한 황색민족 즉 유목 몽골계로 보았다. 유럽인들이 훈족을 투르크족으로 예단하게 된 이유는 동로마 황제가 훈의 지도자들에게 ‘투르크 왕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현재는 투르크가 특정 민족의 이름으로 굳어졌지만 고대 알타이어에서 ‘투르크(Turk)’는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은 훈족이 투르크계라고 주장한 프랑스의 뻴리오였다.
그러나 훈족이 투르크계가 아니라 몽골계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빙하는 자료 중에 하나는 두 민족간의 장례 방법이 완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흉노의 몽골계는 염을 한 뒤 입관하여 땅에 매장하는데 반하여 돌궐 등 투르크계는 화장한다. 그러므로 훈족의 서방 이동 경로에서 흉노의 무덤들이 발굴되는데 이들이 투르크계라면 인골이 발견될 수 없는데도 일괄적으로 무덤 속에서 인골들이 발견됨을 볼 때 훈족은 몽골계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아틸라의 장례식에도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아틸라가 몽골계임을 반증한다. 또한 말도 몽골계는 매장하지만 투르크계는 시신과 함께 화장한다. 이것은 훈족의 지배집단이 투르크계가 아니라 몽골계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몽골에서는 대칸의 장례시 금령마(金靈馬)라는 화려한 장식의 말을 순장한다. 특히 노욘산의 흉노 고분에서 수달피 수의(흑초피(黑貂皮))가 발견되자 흉노는 몽골계가 주류임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수달피 수의는 흉노를 비롯한 몽골계 북방민족의 전통적인 장례 습속이다. 04/7/3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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