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 첨단과학 무기 사용해 가능 | |||||||||||||||||||||||||||||||||||||||||||||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인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당시 권율 장군은 정병 2300명과 승병 및 농민군을 지휘하여 왜적 3만 명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연약한 부녀자들이 덧치마에 돌을 날라 투석전을 가능케 하여 조선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병이 몰려와 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했을 때 아낙네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싸움을 지원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돌을 던지는 것만으로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3만 명을 격퇴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행주산성 대첩의 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우선 권율 장군이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가며 슬기롭고 용감하게 군을 지휘해 적의 공격에 대처했으며, 군 관 민 및 부녀자가 모두 혼연 일체가 되어 한강에 배수진을 치고 목숨을 걸고 적에 대항해 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조총으로 무장된 왜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조선군이 과학적으로 설계된 신기전, 총통기, 비진천뢰 등 첨단 화약 무기를 보유하여 이들의 화력으로 왜군을 압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고려시대에 로켓 발사 우리나라에서는 화약무기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 『삼국유사』에는 661년의 북한산성 전투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북한산성의 군사들이 구원병이 오지 않음을 원망하는데… 성부산에서 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쓰니 큰 독처럼 생긴 광휘가 갑자기 생겨나 이것이 단 위로 떠올라 별이 되어 북쪽으로 날아갔다. 적이 공격하려고 할 때 갑자기 광휘가 남쪽 하늘에서 날아와 벼락이 되어 30여 개의 포석들을 쳐부수니 적의 활, 화살, 창, 칼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기록에 나오는 '광휘'는 신라군이 쏜 것인데 우선 그 뜻으로 보아 눈부시게 밝은 불빛을 내는 무기이다. '신술'은 당시 '신기한 기술'이란 화약무기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신술을 쓰니 큰 독처럼 생긴 광휘가 생겼다"는 표현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광휘는 현대의 로켓과 같은 분사추진 무기로서 흑색 추진 화약가스의 불을 뒤로 뿜으면서 날아가는 모양이 똑같다고 보는 것이고, 둘째는 흑색 화약을 포에 재어 발화하였을 때 포신이 짧아 화약이 포신 안에서 다 타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서도 계속 연소되므로 불길과 함께 독처럼 생긴 탄이 날아갔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것이든 이 기록이 전하는 광휘는 흑색 화약을 쓴 화약무기가 틀림없다는 말이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화약무기는 더더욱 발전했다. 이 중에서 무기로서 큰 역할을 한 것은 화전(火箭)과 주화이다. 화전은 화살에 달린 화약통에 불을 붙인 다음 이를 적에게 날리는 것이고 주화는 화살 통에 넣을 수 있는 화살의 일종으로 발사하면 불빛과 연기를 내면서 날라 간다. 화전과 주화는 추진 화약에 의한 분사추진식 화살로서 추진 원리는 지금의 로켓과 같다. 주화는 최무선이 활약한 우왕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는 약통 밑에 뚫린 구멍의 크기까지 정해두고 있는데 소(小)주화의 경우 구멍의 크기는 1푼 3리(약 4밀리미터). ‘리’라는 단위는 0.31밀리미터로 대단히 정밀한 수치이다. 이렇게 구멍 크기를 정밀하게 지시한 것은 구멍의 크기가 성능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구멍이 너무 크면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너무 작으면 통이 폭발한다. 주화는 주로 병사 개인이 말 위에서 사용하기 편리하기 때문에 대나무 통이나 화살 통에 넣고 다녔다. 주화를 쏠 때는 초석지(礎石紙, 질산칼륨을 묻힌 종이)로 만든 불씨를 가지고 다니다가 주화의 약선에 불을 붙인 뒤, 대나무 통에 주화를 넣는다. 말을 타고 가다가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거나 적에게 쫓길 때 발사했다. 활처럼 힘을 들여 당기는 무기가 아니기 때문에 병사들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주화를 발사하면 적들은 그 소리와 모습에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 주화는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지 않아도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위협하는 데도 효과가 있었다. 〈KBS 역사스페셜팀〉에서 고려시대에 만든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복원하여 실험한 결과 주화의 사정거리는 250∼280미터였다. 원거리의 적을 공격하는 화살의 사정거리는 100∼150미터로 주화는 화살에 비해 사정거리를 획기적으로 연장한 무기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화전의 비행거리는 1천3백 보로 되어 있다. 1보는 보통 1.5미터에 해당하므로 대략 1천950미터로 화전의 설계도에 의한 탄도 계산 결과와 완전히 일치한다. 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흑색 화약을 추진체로 하는 분사추진식 화전이 최소한 1123년경부터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로켓은 아시아에서 발명되어 11∼13세기에 아라비아인 또는 몽고인에 의하여 에스파냐에 전해져 1249년에 그곳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랍의 알하산 알람마하에 의해 1285∼1295년 사이에 씌어진 『병기와 기마 전추에 대한 책』에는 "연소하며 스스로 날아가는 달걀"이라고 기록했다. 그 책에는 납작한 냄비 2개를 포개놓고 그 가운데 2개의 큰 로켓을 장치했으며 양쪽에 꼬리 같은 막대를 2개 부착한 것으로 구조를 설명했다. 한편 로켓이라는 이름은 1379년 이탈리아의 카이오자 성에서 벌어진 베네치아와 제네바 사이의 전투에서 제네바 군대가 '로케타(rocchetta)'를 사용했다는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주화와 화전은 더욱 발전하여 임진왜란 때 그 위력을 발휘하는 신기전(神機箭)으로 발전한다. 신기전은 주화에 폭탄이라 할 수 있는 발화통을 연결한 것이다. 약통 앞에 화약을 넣은 발화통을 장착한 뒤 심지에 불을 붙으면 화약의 힘으로 날아간다. 신기전에는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세 가지가 있다. 소신기전은 약통과 외통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발사하면 추진체인 약통이 먼저 분사추진력을 내고 그 다음에 외통이 분사추진력을 내면서 2단 로켓처럼 비행한다. 중신기전은 약통, 외통 및 소발화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발사되면 약통이 먼저 분사추진력을 내고 외통, 소발화가 각각 순차적으로 분사추진력을 내는 형식이다. 대신기전은 약통, 외통, 지화 및 소발화 네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발화하면 약통, 외통, 지화, 소발화가 순차적으로 분사추진력을 내도록 했다. 신기전은 전쟁에서 목표를 태우는 무기로 쓰이기도 하며 '기화'라고 하여 불, 연기, 소리 등 신호의 수단으로 쓰였다. 화살은 대나무를 사용했으며 화살대 앞부분에 약통이 달려 있다. 약통은 종이로 만들었으며 대신기전의 총길이는 5,588밀리미터, 소신기전은 1,152밀리미터였다. 중신기전을 복원하여 1992년에 발사 실험을 했는데 비행거리가 200∼250미터였다. 대신기전은 사정거리가 1.5킬로미터에서 2킬로미터나 되므로 주로 압록강 하구의 의주성에서 압록강 건너에 있는 오랑캐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신기전의 위력은 대단했는데 그것은 약통 앞부분에 발화통이 부착되어 있어 목표물에 도착할 즈음 폭발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다른 화기와 달리 비행 중에 불과 연기를 분출하며 큰 소리를 내는데다가 목표물을 향해 비행한 뒤 스스로 폭발할 수 있었으므로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대형 화전은 성을 방어할 때나 해전에서 체적이 크고 불이 잘 붙지 않는 목표물을 태우기 위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분사추진무기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인도의 하이더 알리 왕자가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그가 만든 나무로 만든 분사추진무기는 길이가 약 3미터 되는 참대 막대기에 직경과 길이가 각각 5.1센티미터, 20센티미터인 원통형의 철제 화약통이 붙어 있는 형태였다. 영국의 콩그리브가 19세기 초에 만든 분사추진무기는 약통 길이 55센티미터, 직경이 11센티미터이며 안정막대를 포함하여 총 길이는 4.6미터로 사격거리는 2천4백 미터였음을 볼 때 조선에서 개발된 신기전이 얼마나 앞선 것인지 알 수 있다. ■ 전천후 자동무기 화차(火車) 이들 첨단 무기를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은 화차이다. 조선의 무기체계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화차는 부속품만 300개가 넘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는데 화차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에 처음 나온다. 이것은 1409년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처음 만든 것으로 화차란 여러 개의 통을 싣고 이 통으로부터 수십 개의 철령 전을 화약의 힘으로 쏠 수 있게 한 작은 수레인데 위력이 아주 강해 쉽게 적을 제압할 수 있다. 태종 때 처음 선보인 화차는 그 뒤 기록에서 보이지 않다가 그로부터 약 40년 뒤인 문종 1년(1451)에 문종에 의해 직접 창안된 ‘문종화차’로 출현한다. '문종실록’에는 왕의 지시로 화차가 제작됐다고 했는데 이 기록에 의한 화차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화차 위에 신기전기 혹은 총통기를 설치하고 백 개의 신기전을 놓거나 사전총통 50개를 놓고 이것을 차례로 점화하여 발사한다. 특히 1개의 사전총통에는 4발의 세전을 장전할 수 있으므로 모두 2백 발의 세전을 연발로 발사할 수 있었다. 화차의 이동이 가능한지 실험하기 위해 기록에 의거해 만든 화차를 광화문에서 서강까지 이동시켜본 결과 평탄한 곳에서는 두 명이 흙탕에서도 끌 수 있었고 땅에 돌이 있고 약간 높은 곳에서는 두 사람이 당기고 한 사람이 밀면 되었다. 도로 사정이 아주 나쁜 곳에서는 앞에 두 명, 뒤에 두 명이 있으면 되었다. 이와 같이 이동이 쉬운 화차는 평시에는 화물운반용으로 쓰이다가 전시에 화포 운반용으로 사용되었다. 화차는 총통 또는 신기전의 불심지를 서로 연결하여 한 개의 불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만으로 전체 화살을 연거푸 발사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자동화기였다. 문종화차에 사용한 수레의 길이는 2천311.7밀리미터, 폭은 734.7밀리미터이며 바퀴의 축은 차체로부터 588.2밀리미터 떨어진 아래에 설치되어 있고, 바퀴의 지름은 874.7밀리미터이다. 이는 중국의 화차에 사용되었던 수레와 비교하면 매우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즉 문종화차의 수레는 바퀴 축과 차체가 바퀴의 반지름 정도 떨어져서 설치되어 있다. 이럴 경우 화약무기에 가장 이상적인 발사각 45도를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실제 문종의 화차는 발사각 40도까지 가능했던 데 비해 중국 화차는 20도가 고작이었다.
화차는 문종 1년에 곧바로 제조되어 8월에 서울의 군기감에 50대, 평안도의 안주, 의주에 각각 20대, 삭주, 강계, 영변에 각각 15대, 함경도 경흥과 부령 등에 각각 6대가 설치되었다. 전국적으로는 총 350여 대였다. 추가로 9월에는 황해도의 4진에도 설치 되여 문종 1년 한 해 동안에만 7백여 대의 화차가 제작되었다. 화차는 외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이 무기는 성종 23년(1492) 북쪽의 오랑캐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특히 임진왜란 때는 그 진가가 아낌없이 드러났다. 1593년 2월 12일,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을 사수할 때 300대의 화차가 동원되어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왜군의 주무기는 조총, 조선군은 당시 보유하고 있는 화약무기를 모두 동원했다. 사전총통과 같은 개인용 무기는 병사가 적을 조준하여 쓰러뜨렸다. 종이로 만든 지화통도 사용했는데 이것은 적군이 접근할 때 던지는 일종의 수류탄이다. 그뿐 아니라 천자총통, 지자총통을 비롯한 원거리 공격용 화포도 동원되었다. 새벽에 시작된 행주산성 전투는 무려 12시간이나 치열한 접전으로 이어졌다. 왜군은 아홉 번째 공격을 끝으로 퇴각했다. 왜군 사상자만 1만여 명, 노획 무기 720점, 총대장 우키다는 화차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왜군에게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힌 행주산성 전투는 육상 전투에서 조선군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된 것으로도 더욱 중요하다. 04/3/29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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