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은 축성의 달인이었다 | |||||||||||||||||||||||||||||||||||||||||||||||||||||||||||||||||||||||||||
방어와 공격 기본을 산성에 두고 곳곳에 건설 | |||||||||||||||||||||||||||||||||||||||||||||||||||||||||||||||||||||||||||
국사를 배운 사람은 중국과 고구려의 항쟁 중에 일어났던 살수대첩(612)과 안시성 혈전(645)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외적과 전투할 때는 거의 전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성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고구려의 방어와 공격의 기본을 도처에 건설한 산성에 두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으로 거의 전 기간을 통해 일찍부터 국토를 지키면서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국경선 부근에 여러 겹의 방어용 성을 쌓았고 수도로 접근하는 통로에 차단용 성을 두었다. 또한 이런 전략 요충지가 격파되었을 경우 수도 보호하기 위해 서울을 평지성(平地城, 평화시)과 산성(山城, 전쟁시)으로 이원화하는 이른바 도성체제(都城體制)를 확립했다. 고구려를 '축성(築城)의 역사'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당 태종도 고구려는 산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쉽게 정벌할 수 없었음을 인정할 정도로 고구려는 견고한 산성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의 산성체제를 북한에서는 요하 일대에 구축된 전연방어성(기본방어성)을 축으로하고 수도(집안)에 이르는 중간지역(태자하 상류와 소자하 일대)에 중심방어성(중간방어성)과 수도 방어성을 위한 수도방어성으로 나뉘어진 3중 구조로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수도를 향하는 길목에 여러 방어성을 조성하는 수비책은 국초의 오녀산성(졸본성: 홀승골성)과 하고성을 비롯하여, 국내성과 환도산성, 평양 천도 후의 대성산성과 안학궁 등으로 이어진다. 고구려 산성의 숫자는 학자에 따라 달라지나 요령성에서만도 120여기로 추산하며 길림성이나 한반도에 남아 있는 것을 합하면 대체로 200여기로 추정한다. 이는 고구려가 고분과 함께 돌의 문화를 이룬 국가로서 결국 고구려의 성장과 문화는 돌을 통해 이루었음을 나타낸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국가들이 치수(治水)에 의한 대규모 인력동원으로 성장한 것처럼 고구려는 치석(治石)을 통한 많은 인력동원에서 나라를 이룩하고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지형에 알맞는 산성 축조〉 산성은 지형에 따라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고로봉식'으로 이는 고리짝같이 4면 주위가 높은 산등으로 둘러막히고 가운데가 오묵하게 생긴 지형이며 둘째, '산봉식'으로 마늘밑둥 모양으로 높은 산. 넓은 대지가 있고 그 둘레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룬 지형이며 셋째, '사모봉'형으로 사모(고대 관리들이 쓰던 모자의 한가지) 모양으로 뒤에 산이 가로막히고 앞은 평지로 되어 있어 그 등성이와 평지에 걸쳐 성을 쌓은 형태이며 마지막으로 '마안봉식'으로 말안장 모양으로 산마루의 양쪽이 높고 중간이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것을 말한다.
외적과의 빈번한 싸움을 해야하는 고구려는 전쟁에서의 장병들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장기전에 대비한 고로봉식 산성을 위주로 건설했다. 고로봉식 산성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산 능선 또는 절벽을 따라 성벽을 쌓기 때문에 적이 쳐들어오기에는 불리하고 적을 방어하기에는 유리하다. 둘째로 성벽을 산 능선을 따라가면서 쌓기 때문에 겹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다. 셋째로 성 안은 묵묵한 골안을 이루었기 때문에 성 안에서는 쳐들어오는 적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으나 성밖에 있는 적들은 성 안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전투에서 전술상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으며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넷째로 풍부한 수원과 넓은 골짜기를 내부에 갖고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데다 또한 전투물자들을 비축할 수 있으므로 장기전에 대처할 수 있었다. 산성을 쌓을 때 지형이 고르지 않으므로 현지 지형 조건에 맞게 쌓았다. 지반이 좋고 나쁨에 따라 기초 공사를 달리했는데 특히 고로봉식 산성에서는 성벽이 골짜기를 통과하는 등 지반이 나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인공지반을 구축하여 성벽의 안전성을 높였다. 지반이 나쁜 경우 토압이 3N/제곱미터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보통지반의 토압인 10∼20N/제곱미터가 되도록 보강공사를 했다. 아주 지반이 연약한 경우 성벽이 통과할 구간의 하단부의 지반을 완전히 들어내고 거기에 직경 약 30센티미터, 길이 5∼6미터의 통나무를 1∼1.5미터 간격으로 놓았다. 그 위에 다시 이보다 더 굵은 직경이 약 50센티미터의 통나무를 마치 철길모양으로 약 4미터 간격으로 세로방향으로 놓았으며 그 위에 자갈과 모래, 흙을 넣고 다진 다음 돌로 성벽을 쌓아올렸으므로 축조할 때 공은 많이 들어가지만 매우 견고했다. 성벽은 기초 부분은 큰돌로 밑받침을 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았다. 사용된 돌의 크기는 가로, 세로는 20∼60센티미터. 높이는 15∼40센티미터 정도이다. 성벽 축조는 위에서 아래까지 직선이나 약간 경사지게 하였고 성벽하단부는 굽도리벽을 조성하여 경사지게 쌓았다. 이러한 굽도리를 조성한 계단식 기단부의 축성은 협곡이나 높은 성벽을 축조할 때 적용되었으며 백암성의 경우 높이가 4∼6미터나 된다.
원래 자연석과 자연석을 접합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바위는 울퉁불퉁하게 생겼고 이가 벌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고르게 쌓으려면 자연석을 가공해야 한다. 그런데 그랭이 공법은 특정 바위를 생긴대로 놓아둔 채 바위의 형태에 따라 다듬어 가면서 맞추는 것이다. 이 공법은 우리나라 건축의 독특한 특성 중에 하나이다. 서양의 건물은 주춧돌과 기둥을 서로 견고하게 결색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주춧돌 위에 기둥을 간단하게 올려놓기만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건물은 지진과 같은 충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화재에 의해 건물이 소실되는 경우는 많지만 지진 등에 의해 피해를 보았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에 큰 지진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한국의 건물들 대부분이 충격에 강한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주춧돌을 아무리 유리와 같이 갈아 놓는다하더라도 기둥을 올려놓으면 유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기둥과 주춧돌 사이의 간격을 없애고 밀착시키기 위해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다. 주춧돌을 생긴 모습 그대로 두고 나무기둥 밑둥을 도려내어 밀착시킨 것이다. 그레질칼로 기둥을 다듬어 돌에 맞추면 돌의 요철에 따라 기둥이 톱니처럼 서로 맞물린 듯이 된다. 기둥과 주춧돌은 막중한 건물의 하중으로 인해 밀착되기 때문에 지진에 흔들렸다하더라도 기둥의 요철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들어서는 것이다. 신영훈은 1967년에 멕시코의 멕시코시에 건설한 한국정(韓國亭)이 멕시코에서 일어난 수많은 지진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없이 아직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그랭이 공법은 한국의 건축 특성으로 목조건축이 1천년을 끄떡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인데 산성을 쌓을 때도 바로 이런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1500년이 지난 현재도 많은 유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산성의 또 다른 특징은 전투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치성을 쌓았다는 점이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서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만 공격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벽에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쉽게 관측하는 등 전투력을 배양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을 치성(雉이라고도 함)이라고 한다. 백암성의 치는 5개이며 석대자산성에서는 10개나 된다.
성문을 철통같이 막는 옹성(甕城)도 고구려 산성의 자랑거리다. 성문에 적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에 성벽을 이중으로 쌓는 것을 말한다. 성문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관문일 뿐 아니라 전투할 때 적의 주요한 공격목표가 된다. 성문이 함락되면 성 자체가 함락된 것과 같으므로 성문을 보호하고 취약점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설치했다. 〈백제 신라도 고구려 축성 기술 도입〉 산성은 산성 자체를 보호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용도이므로 어느 정도의 필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우선 성문은 성의 정문으로서 출입고인 동시에 장엄한 외형을 나타낸다. 산성의 경우 성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은폐시키지만 평지성의 경우는 교통 요지에 둔다. 가장 높은 곳에 전체를 지휘하는 내성(아성)과 장대(성 안에서 안팎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를 설치했다. 주변과 연락하는 통신시설인 봉수대는 필수적이고 적군이 성벽을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밖으로 물줄기를 파서 도랑을 만든 해자를 설치한 곳도 많다. 특히 군사들이 장기간 머물수 있는 도 병영을 온돌로 만들었고 커다란 곡식과 무기 창고로 장기전에 대비토록 했다. 현재 실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대체로 2층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은 망루의 역할을 한다. 성문의 중요성은 적의 제일 중요한 공격목표인 동시에 최후 방어선이므로 당나라의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할 때 고구려군이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성문이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격군은 가능한 한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성문이 스스로 열리도록 하는 계책을 주로 사용했다. 이와 같이 견고하고 지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세워진 산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성 밖에 토산(假山)을 만들어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와 혈전을 벌였던 안시성(645)의 전투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강하종(江夏宗)은 군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 귀퉁이에다 돌산을 쌓고 성을 침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의 높이를 더하여 막았다. 당의 사졸이 분전하여 교전하기를 하루에 6∼7회, 충차(衝車)와 포차(抛車)로 성을 파괴하니 성 안에서는 목책(木柵)을 세워 빈 곳을 막았다.’ 고구려의 성곽은 산성이 중심이었지만 평지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지성은 주로 도성체제상의 산성에 대응되는 평화시의 성곽과 책성(柵城)으로 되어 있다. 평지성의 경우 대체로 정상적인 평지에 있고 왕성으로 국내성과 압압궁이 있다. 대표적인 평지성으로 하고성은 오녀산성이 험준한 절벽에 있으므로 그 보완적 의미가 있다. 고구려의 축성 기술은 고구려가 진출한 한반도 남쪽의 온달산성에서도 볼 수 있으며 신라와 백제에서도 도입했다. 백제와 신라는 처음에 거의 산봉식산성이었는데 백제의 경우 산봉식산성의 단점과 고로봉산성의 장점을 파악하고 이미 축조된 산봉식산성에 고구려의 고로봉식산성을 결합하여 이른바 ‘복합식 산성’을 건설했다.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면의 사산성,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견지산성, 경기도 화성시의 당성 등이 그런 예이다. 신라의 경우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고로봉식산성을 건설했는데 충북 보은군 삼년산성, 경기도 여주군 파사성(매초성) 등이다. 04/5/2 이종호(과학저술가) |
'11과학적인韓國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수원화성은 첨단기술로 건설 (0) | 2015.08.12 |
---|---|
(22)한국도 다이아몬드 나올 수 있다 (0) | 2015.08.12 |
(20)5세기 동양은 광개토태왕, 서양은 아틸라가 패자였다 (0) | 2015.08.12 |
(19)고인돌 (0) | 2015.08.12 |
(18)발효식품에 숨은 長壽 비밀 (0) | 2015.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