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동양은 광개토태왕, 서양은 아틸라가 패자였다 | |||||||||||||||||||||||||||||||||||||||||||||||||||||||||||||||||||||||||||
훈족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Attila, 395∼453)’이다. 아틸라는 로마를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하는 칙령을 내린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는 395년에 훈족 최고의 지도자인 루가 왕의 조카로 태어났다. 아틸라라는 이름은 고트어의‘아빠’라는 말에서 유래하는데 학자들은 아틸라가 생전에 한번도 듣지 못한 말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훈족은 서로마로부터 돈을 받고 용병으로 게르만족을 견제하는데 투입하였으므로 훈족과 로마의 유대는 돈독했다. 아틸라가 서로마 궁전에서 자라게 된 연유로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생활했다. 434년 큰 삼촌인 루가 왕이 사망하자 전통에 따라 형인 블레다와 아틸라 형제가 왕이 되었다. 새로운 훈족의 지배자가 된 블레다와 아틸라는 자신들의 힘을 대내외로 천명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 동로마였다. 435년 블레다와 아틸라는 동로마가 훈족에게 보내야 하는 공물의 납기일을 번번이 어기는 것을 빌미로 삼아 동로마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로마가 동 서로 분리된 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 내정이 정비되지 않았던 동로마는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훈족과 재빨리 평화협정(블레다와 아틸라는 로마 사절단에게 말을 탄 채 회담을 하자고 요청하여 동로마는 순순히 응했다)을 맺고 훈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했다. 동로마와의 평화협정으로 전력에 여유가 생겼을 때 마침 부르군트족(현재의 독일 지역)의 군터 왕이 벨기에 지역을 침공하자 이를 공격하여 부르군트족을 완전히 궤멸시켰고 군터 왕도 전사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이 민담으로 전해졌고 수백 년 후 『니베룽겐의 노래』로 나타났으며 바그너가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를 작곡하였다. ■ 서로마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요구한 아틸라 445년경 블레다가 갑자기 사망하자 아틸라가 훈족의 단일 지배자로 등장했는데 이때 아틸라를 국제적 전쟁에 뛰어들게 한 여인이 등장했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가 바로 그 여인.
서로마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451년,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메츠, 랭스, 오를레앙 등에 이르는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서로마 중심지까지 진격하자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이자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훈족과 적대관계에 있는 게르만족들을 규합해 대항했다. 양 진영은 트르와(파리 동남쪽 약 210킬로미터) 근처의 완만한 평원인 마우리아쿰에서 대치했다. 아틸라 측에는 동고트족이 합류했고 아에티우스 진영에는 서고트족이 합류했으며 프랑크, 부르군트, 갈리아계의 켈트족이 합류했다. ‘살롱 대전투’라고 명명된 이 전투를 1849년 런던 대학의 에드워드 크리지 교수는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로 꼽았다. 살롱 대전투에서 양측의 전사자는 최소 15만 명에서 50만 명, 아틸라군에서만 16만∼30만 명에 달할 정도의 대규모 사상자가 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망자 숫자는 16만∼17만 명으로 추측한다. 특이한 것은 이 전투에서 포로는 없었고 소수의 부상자만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 전투가 철저한 살육전으로 임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살롱 대전투는 쌍방간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지만 결과는 무승부였다. 아틸라가 모든 전선에서 공격을 했지만 아에티우스의 로마 연합군은 아틸라를 효과적으로 방어했고 결국 아틸라는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전투에서 아틸라가 승리했다면 오늘날 유럽인들은 아틸라와 그의 후손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을 것으로 단정하여 말한다. 아틸라는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근거지인 판노니아(현재 헝가리 지역)로 후퇴했다. ■ 로마의 점령은 언제나 가능 아틸라가 프랑스 원정을 통해 별 성과 없이 판노니아로 철수한 것으로 생각한 서로마는 당분간 훈족으로부터의 걱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해인 452년, 아틸라는 또다시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갈리아 지역(현재의 프랑스)이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였다. 아틸라는 출정하기 전에 판노니아에서 자신의 군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로마와의 살롱 대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로마와 같이 조직적이고 전투 장비 확보에 주력을 두어 장병들의 사기를 높였다. 아틸라는 초전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아퀼레이아(Aquileia)를 점령하여 철저하게 파괴한 후, 파두, 베로네, 피비, 베르가모, 밀라노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싹쓸이했다. 아퀼레이아가 점령되자 훈족의 공격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해안지역에 모였으며, 그들은 ‘베니에티암(나도 여기에 왔다 Veni etiam)’이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이 말한 베니에티암이 현재의 베네치아(Venezia)이다. 서로마가 아틸라에게 파죽지세로 격파되면서 위협을 받아 서로마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지자, 서로마의 황제 발렌티니우스 3세는 라벤나에서 로마시로 달아났다. 아틸라는 로마제국의 구수도였던 밀라노의 구황궁에 거처를 정한 후 로마의 지배자임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밀라노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이탈리아 반도 중심부로 진격하기 시작했는데 포강에 이르렀을 때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말라리아가 아틸라의 군대를 공격했던 것이다.
발렌티니우스 3세는 교황 레오 1세(Leo I)에게 아틸라와의 협상을 의뢰했다. 추후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레오 1세는 카톨릭 교회가 ‘위대한 교황’이란 칭호를 부여해 준 두 명의 교황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6세기의 그레고리우스 1세이다. 두 제국의 협상은 아틸라의 진영인 민시오에서 아틸라와 레오 1세가 말 위에 앉은 채 진행했는데(막사 안에서 아틸라가 비스듬이 양탄자 위에 앉은 채로 레오 1세를 맞이했다는 기록도 있음) 레오 1세는 놀랍게도 아틸라를 설득하여 서로마 공격을 중단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이루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당시의 장면을 르네상스의 3대 거장 중에 한 명인 라파엘로(Sanzio Raffaello)가 바티칸 궁의 보르지아 실 위층의 벽화에 그렸다. 아틸라는 훈족의 대군이 자신들의 근거지인 헝가리의 판노니아로 철수하는 대신에 그가 점령한 북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받았으므로(상당한 금도 받았다고 추정) 협상 자체는 아틸라의 승리였다고 볼 수 있다. 서로마의 함락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아틸라의 판단이었으므로 일단 철수하는 것이 그에게는 불만족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아틸라의 종말 즉 훈족의 종말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453년, 이탈리아 본토에서 철수한 다음 해 58세의 아틸라는 일디코 또는 힐디코로 불리며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크림힐트로 알려진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식을 올린 후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다.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들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그가 잠들자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학자들은 결혼식 날 과음해 질식사한 것으로 보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살해됐다고 추정한다. 아틸라가 단독으로 훈족을 다스린 기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아틸라는 동시대인들에게 실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틸라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틸라가 다른 정복자들과 달리 당대뿐만 아니라 그의 사망 후에도 어떤 군사지휘자보다 부하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다양한 민족 출신의 부족들이 아틸라 휘하의 군대에 들어가서 그에게 진정으로 충성을 바쳤다고 믿는다. 특히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아틸라 군에서 이탈한 병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훈족에 여러 민족들이 혼합되어 있었음에도 아틸라가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아틸라가 휘하에 있는 부족들을 다독거리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틸라의 탁월한 통솔력은 훈족이 서유럽을 공격할 때 어떻게 그런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도 해소시켜준다. 451년, 아틸라가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와 살롱에서 대제국의 운명을 걸고 혈투를 벌였을 때 판노니아의 본거지에서 발진한 장병 20여만 명 중 훈족만으로 구성된 군대는 고작 8000∼10,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아틸라가 훈족 자체의 병력보다 수십 배가 많은 병력을 수시로 동원했다는 것을 뜻하는데 학자들은 훈족이 다른 민족들을 원활히 동원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에게 일단 복속하는 민족은 ‘준(準) 훈족’으로 우대하여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훈족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동거동락해 온 투르크 계열은 물론 서아시아 각지의 민족들이 훈족에 귀부(귀화)하면 거의 대부분을 ‘준(準) 훈족’으로 우대하면서 이들 민족들을 '친구' 또는 '동반자'로 불렀다.
아틸라에 대해 역사가들이 보는 평가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우선 아틸라의 목적이 훈제국의 영토를 세계적으로 확장하려고 한 것이라면 그의 목표는 분명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틸라는 당대의 문명 세계인 로마를 정복하여 직접 통치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로마의 근거지인 이탈리아 본토 공격에 성공했음에도 레오 1세와의 협상에서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고 판단하자마자 근거지인 판노니아로 돌아갔다. 훈족들은 그들이 점령하거나 공격한 지점이 판노니아에서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겨울을 지내기 위해 판노니아로 돌아간 후 다음해에 다시 출병했다. 아틸라는 정복한 지역을 영구히 확보하려 하지 않았다. 훈족은 정복한 지역에서 자신들이 직접 경작하기 위해 농민들을 쫓아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기까지 했다. 도시에서도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당연히 정복지역의 국가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틸라의 세계 정복 야망에 우호적인 학자들은 아틸라가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했으면서도 제국을 장기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조직적인 행정체계를 도입하지 않은 이유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아틸라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로마 제국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을 것이 틀림없으며 그로 인해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아시아인으로 유럽을 침공하는데 성공한 인물로는 다리우스 1세, 아틸라, 칭기스칸을 꼽는다. 그러나 다리우스 1세는 발칸반도 일부에 침공했으나 스키타이의 반격에 곧바로 철수했으며, 칭기스칸의 손자 바투는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의 군대를 격파한 후 유럽으로 진공하기 직전에 원나라 태종(오고타이)이 사망하는 바람에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한다. 그러나 아틸라는 현재 유럽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는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의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하여 사실상 로마제국을 제치고 유럽의 패자가 되었다. 아틸라에 대한 전설이 계속 쌓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의 역사는 4∼5세기 경에 두 명의 걸출한 영웅을 탄생시켰다. 동양에서는 광개토태왕(375∼413)이 그 장본인이며 서양에서는 광개토태왕보다 20년 후에 태어난 아틸라(395∼453)이다. 아틸라는 광개토태왕보다 20년 늦게 태어나서 세계 역사상 3대 제국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 훈제국을 건설했고 아시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서유럽의 심장부를 점령했다. 서유럽의 문명사를 새로 쓰게 한 정복자 중의 정복자인 아틸라가 바로 한민족과 같은 부류였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 한민족은 없을 것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근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과학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훈족이 한민족과 같은 부류이며 아틸라가 서유럽을 점령한 사실(훈족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음)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의 이동로를 비롯한 각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토대로 한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04/4/23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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