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은 첨단기술로 건설 | |||||||||||||||||||||||||||||||||||||||||||||||||||||||||||||||||||||||||||
정약용이 만든 중장비 거중기 등 새장비 사용 | |||||||||||||||||||||||||||||||||||||||||||||||||||||||||||||||||||||||||||
총 길이 5.7킬로미터, 면적 1.2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수원화성(1996년에 ‘사적3호 수원성곽’은 공식적으로 ‘사적3호 수원화성’으로 명명되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은 정조의 역작품이다. 정조의 통치 기간은 24년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치세는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대였다. 우선 17세기 초부터 노골화된 당파싸움은 17세기말 숙종 때 상대방을 철저히 제거하는 대립 방식으로 치닫다가 영조가 즉위하면서 각 정파가 서로 타협하는 탕평책을 써서 여러 정파들을 고루 기용하였다. 정조도 할아버지 영조를 이어 탕평책을 견지하면서 오만한 서울 양반 대신에 때묻지 않은 지방 선비들을 등용함으로써 조선시대를 피로 물들였던 당파싸움을 완전히 제거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확립했다. 또 경제는 농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상공업의 발달로 새로운 국가의 부가 축적되자 실학(實學)과 기술 혁신을 강조하는 북학(北學)을 포용하여 사상적인 탕평을 추구했다. 정조가 활발하게 내외적인 업적을 쌓아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에게는 한 가지 개인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그것은 불명예스럽게 뒤주 속에서 사망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였다. 1762년 영조(英祖) 38년 윤 5월 21일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한여름 뒤주 속에 갇힌 지 8일만에 죽었다. 당시 정조의 나이는 10세였다. 32년 후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통치 기간 내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과 추모 사업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명분으로 내세웠다. 즉위 13년에는 부친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서 수원 화산(花山)의 현륭원(顯隆院)으로 옮기고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 넓은 기슭으로 이전했다. 정조가 부친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것은 큰 뜻을 펴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했다. 첫째 충성스러운 신하, 둘째 군사력, 그리고 이들을 원만하게 다룰 수 있는 자금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수도인 서울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목적의 정치 공간을 아버지의 추모 사업과 연결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정조의 목적에 딱 알맞은 장소가 바로 수원부였다. 수원부는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인 데다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조는 수원부를 표면상 능침을 보호하는 도시인 동시에 자신이 은퇴하여 상왕(上王)이 되었을 때 내려와 머물게 될 곳임을 선언했다. 수원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추자 정조 17년(1793)에 수원부의 명칭을 화성으로 고치고 유수의 관직을 정2품으로 정했다. 이것은 수원부가 광주부와 함께 서울 다음의 대 도시라는 서열에 공식적으로 올랐다는 것을 뜻한다. <다목적 기능의 신도시> 한국 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수원화성이 다른 성곽과 차별되는 것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평산성(平山城) 형태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성곽은 전통적으로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했는데, 수원화성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따라서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보기 어려운 많은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어 망루는 물론 총안(銃眼), 즉 총구멍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다목적 용도로 건설되었다. 특히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의 장점만 살려서 축성되었으며, 한국 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책으로 중국과 일본의 축성술을 본뜨기도 했다. 거기에다 제반 시설물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효율적 방어가 가능하도록 배치했다. 팔달산 정상에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두었으며 맞은편 높은 곳에 외부와의 통신시설인 봉돈을 벽돌로 만들어 세웠다. 화성 남북단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동서단에는 창룡문과 화서문을 세우고 남서와 동북 방향 높은 지대에 각기 화양루와 동북각루를 세워 비상시 군사요충이 되도록 했다. 화성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도시 기반 시설로서 인근 지역과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의 신작로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팔달산 기슭의 행궁과 화성 유수부 앞에서 정면으로 용인 방면으로 이어지는 십자로로 된 도로가 건설되었다. 이 십자로 변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하여 상업도시로서의 화성의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물류경제와 국제무역의 새로운 중심지로서 부상시키는 데 혼심의 힘을 쏟은 것이다. 당초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다. 1796년 10월 단 34개월(중간의 6개월 정역(停役)을 감안하면 28개월)만에 낙성연을 치른 것이다.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목수 3035명, 미장이 295명, 석수 642명을 비롯해 기술자만 11만 820명이 동원됐으며 석재 18만 7600개에 벽돌만 69만 5000장이 들었다. 〈과학성이 돋보이는 축조기술〉 화성의 건축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丁若鏞)이다. 정조는 실학자 다산에게 '삼남의 요충이요, 서울의 보장지지(保障之地)로서 만세에 길이 의지할 만한 터'인 수원화성을 건설토록 한다.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왕실 서고인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 서적들을 섭렵하고 기존의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새로운 성곽을 설계했다.
다산의 계획안은 5편으로 성설(城說),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성설은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 방식 등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적었으며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은 성벽에 설치하는 각종 시설에 대한 설명이다. 성설에선 다산이 애초 한 변이 약 1킬로미터(3600보)로 화성 둘레를 잡았지만 공사 진행 중에 확장이 불가피해 4600보가 됐다고 밝히고 있다. 수원화성과 같이 방대한 공사를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첨단 건설 기계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기중기와 같은 용도의 거중기이다. 수원화성을 건설하기 전에 정조는 정약용에게 『도서집성』과 1627년 야소회(耶蘇會) 선교사인 슈레크와 명나라의 왕징이 저술한 『기기도설』을 내려 화성 건설에 필요한 기중법을 연구하라고 했고 정약용은 이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건설 장비를 만들었다. 거중기의 유용성은 적은 힘으로 큰 물건을 들어올림으로써 인력을 절약할 수 있었고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직접 밧줄로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움직일 때 잘못하여 손에서 밧줄을 놓치는 경우 물건이 떨어져 파괴되거나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거중기는 이러한 위험을 예방할 수 있어 화성 건설에서는 작업능률을 4~5배로 높일 수 있었다. 화성 건설에는 모두 11대의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중앙 정부에서 샘플로 1대를 만들었고 수원 현지에서 이 샘플을 본 따 10대를 만들었다. 거중기의 역할은 대단하여 수원화성 건설 기간을 당초 예상한 10년에서 단 2년으로 줄여놓았다. 정조도 거중기의 유용성을 인정하여 ‘다행히 기중기를 이용하여 경비 4만 궤가 절약되었다’고 말했다. 거중기의 구조도와 원리는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히 나와 있음으로 이를 복원하는데도 큰 문제가 없었다. 거중기는 네 개의 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횡량(橫樑)을 얹었는데, 여기에 도르래가 달린 중간횡량을 연결했다. 밑에 있는 횡량은 중간횡량과 도르래에 감긴 밧줄로 연결되고, 밑 부분에는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쇠사슬을 걸게끔 되어있다. 이 횡량은 밧줄이 당겨지고 풀려짐에 따라 아래위로 이동하게 됨으로 여기에 달린 도르래는 움직도르래 작용을 한다. 다리의 옆에는 두 개의 소거를 붙였는데 여기에는 밧줄을 풀고 조이는 얼레축과 큰 도르래를 달았다. 소거는 밧줄을 푸는 것이 마치 누에고치를 켜는 것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중기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고정 도르래만 사용하지 않고 움직도르래를 도입하여 복합 도르래를 구성한 것이다. 고정 도르래의 경우 물건의 중량에 해당하는 힘을 주어야만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지만 움직도르래가 1개 있으면 절반의 힘만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다. 따라서 움직도르래가 여러 개 일수록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이 배가되는 것을 정약용이 이용한 것이다. 얼레축의 직경이 큰 도르래의 직경보다 작기 때문에 얼레를 거쳐서 큰 도르래를 휘감고 지나가는 밧줄을 원래보다 더 강해진 힘을 상부의 횡량에 달린 도르래에 전달해 준다. 이런 복합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주 무거운 석재도 손쉽게 들어올릴 수 있었다. 화성 건설에 사용된 거중기는 규모가 매우 큰 것은 아니다. 정약용은 화성 공사에서 규모가 매우 큰 돌이나 자재들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 맞도록 구조가 간단하면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거중기를 만들었다. 화성 건축에 사용된 거중기의 경우 7.2톤에 달하는 돌을 30명의 힘으로 들어올릴 수 있었음으로 장정 1명당 240킬로그램의 무게를 들어올린 셈이 된다. 그러나 정약용은 도르레 원리를 이용하면 훨씬 정교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중기를 제작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화성 건설에 사용된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 수십 톤에 이르는 물건도 들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화성의 성벽 역시 첨단 과학 지식을 도입하여 설계되었다. 성벽의 특징은 성벽과 여장(성의 담) 사이에 검은색 벽돌이 끼어 있다는 점이다. 생김새가 눈썹 같다고 해서 눈썹돌 또는 미석(楣石)이라고 부른다. 미석을 성벽과 여장 사이에 끼워놓은 이유는 선조들이 물질이 상태가 변화할 때 부피가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이 얼면 부피가 팽창한다는 것을 잘 안다. 만약에 성벽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든 채로 겨울을 지내다보면 물이 얼어 성벽이 쉽게 무너질 수가 있다. 그러나 미석을 끼워놓으면 비나 눈이 와도 물이 성벽으로 스며들어가지 않고 미석을 타고 바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화성의 과학성은 이뿐이 아니다. 성벽 전체 형태가 구불구불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성벽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아치를 만들면 더욱 견고하기 때문이다. 성벽의 허리를 잘록하게 쌓음으로써 돌과 돌 사이가 견고하게 맞물릴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성벽을 쉽게 타고 오를 수 없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이 완전한 아치 형태가 아니다. 재래식 기법에 익숙한 석공들이 정약용이 당초 의도한 설계 의도를 모르고 위로 가면서 돌을 밖으로 내밀어 쌓는다면 돌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성곽의 건물도 중요하지만 화성 건설의 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역시 큰 역할을 했다. 18세기,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수준의 도시 건설 공사 보고서를 남긴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 을묘원행〉 정조는 1795년에 뜻깊은 행사를 추진한다. 1795년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20년을 맞는 해이고 화성 신도시 건설이 준공을 앞둔 시점이었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1795년에 주갑(周甲)을,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해였다. 정조는 어머니인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르기로 한다.
온 백성의 이목이 집중될 회갑 행차는 화성의 지역 주민들을 선무하고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자신의 군대 장악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왕권마저 넘보는 구세력(노론 벽파)을 제압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보이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작게는 비명에 간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는 효성의 표현이지만, 크게 보면 20년 통치 기간 동안 자신이 쌓아 놓은 위업을 과시하고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정치 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거대한 정치적인 시위였다. 을묘원행을 위해 특별한 배다리도 건설했다. 서울에서 화성까지 행차하려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1700여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한강을 반드시 건너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원래 왕의 행차가 한강을 건널 때는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이 관례이지만, 그때마다 수백 척의 민간 배를 징발하는 데서 오는 민폐가 매우 컸다. 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 즉 주교(舟橋)를 건설한 것이다. 이 배다리는 매우 치밀하고 과학적이면서도 다리의 안정성과 미적 감각까지 꾀하였다. 큰배를 강심(江心)에 배치하고, 이를 축으로 작은 배들을 남북으로 배치함으로써 완만한 아치형을 이루게 한 것은 오늘날 사장교의 원리와 비슷하다. 특히 동원된 민간 선박에는 못을 박지 않도록 하는 등 세심한 연결 방법을 구사하였다. 또한 바닷물이 드나드는 한강 일대의 지리 조건을 정확하게 습득하고 조수간만에도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선창을 조교 형식으로 해결한 것은 현대인들이 보아도 놀라운 일이다.
조선시대 왕의 행차는 국가적인 행사였다. 을묘원행에서도 정조는 문묘와 현륭원 전배(展拜)는 물론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과거 시험, 양로연(養老宴), 활쏘기, 군사 훈련, 쌀 배급 등 다양한 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이 행사 때문에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정조는 제일 크게 경계했다. 특히 신하들이 행차를 빙자하여 백성들에게 물품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고 여러 차례 전교(傳敎)를 내렸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먼 지방의 진기한 음식을 구해 바치지 말고 음식도 사치하고 화려하게 차리지 말 것 2) 각 참(站)에 개인적으로 물품을 진상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3) 기생과 정재(呈才)를 각 도에서 뽑아 올리지 말고, 궁중에서 일하는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에서 선발할 것 4) 왕에게 올리는 진찬(進饌)은 10여 그릇을 넘지 않도록 할 것 5) 연회 음악은 간편하게 하고 악기도 서울과 화성에 있는 것을 사용할 것 6) 철이 가까우므로 회갑 잔치와 장병들을 위해 10마리 이상의 소를 잡지말고 진연(進宴)에 쇠고기를 쓰지 말 것 7) 수행원들이 하인들을 함부로 데리고 다니지 말 것 만약 이 법도를 어기는 자가 발견되면 처벌한다는 조항까지 덧붙였다. 정조가 화성에 머무는 동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만을 열었다면 아마도 그는 조선 여러 왕들 중에서 정조(正祖)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사실 회갑 잔치는 화성에서 치른 여섯 가지 행사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화성과 그 인근 주민의 선비와 무사, 노인, 결손 가정,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행사가 더 많았다. 실제로 행차 비용으로 10만 냥을 목표로 하였지만 포곡(逋穀), 모미(耗米), 이자 등의 수입으로 충당하고 국가의 공식적인 경비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았다. 당초의 예산 10만 냥 중에서도 2만 냥은 정리곡(整理穀)이라는 기금을 만들어 농민들의 농사 자금으로 대여하고 1만 냥은 제주도 빈민을 위해 썼으며, 1만 냥은 화성의 둔전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한마디로 행차 비용의 40%나 공익을 위해서 사용했다. 정조는 을묘원행이 시작될 때부터 원행이 끝난 후 이에 대한 기록의 편찬까지 일일이 챙겼다.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한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다. 이 책에는 첫 원행 논의가 나온 1793년 1월 19일부터 원행의 준비와 연습을 거쳐 1795년 3월 24일까지 진행된 관계 문서의 정리와 의궤의 편찬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궁중에서 사용되던 갖가지 음식, 옷, 그림, 조각, 기물, 용품뿐만 아니라 노래, 춤, 의식 등 당시의 궁중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므로 궁중 유산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한 후 경제적으로 발전시킬 계획도 착착 진행시켰다. 주로 유능한 상인을 유치하고 이들이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지원책을 마련하였고, 일반 주민에 대해서도 특별 조처로 통상적인 세금을 면제해주는 조처가 취해졌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튼튼한 도시 수원화성을 만드는 지원책을 계속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수원화성은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한낱 지방 도시로 주저앉는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정국은 급변하여 강경 보수세력인 노론(老論)의 벽파(僻派)가 대권을 쥐게 되고 혁신세력인 북학파가 된서리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화성은 정조의 눈물과 효심이 배어 있는 역사의 정거장으로만 남게 된다. 04/6/12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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