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56)뜨거운 감자, 원자력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2. 13:00
뜨거운 감자, 원자력 ①
2004년 온 나라와 국제사회가 원자폭탄, 원자력 그리고 방사능으로 시끌벅적했다.

한국정부가 안전조치협정에 따라 IAEA에 신고해야 할 활동 즉 우라늄 변환과 농축, 플루토늄 분리제조 등을 (과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뉴스의 초점이 되었었다. 특히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한국의 우라늄 분리실험 및 플루토늄 실험과 관련, 총 6건의 안전조치협정 위반 여부에 대해 ‘심각히 우려한다’는 의견을 표명하는 등 한국 과학자의 핵물질 실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한국 정부가 공개한 총 6건의 안전조치협정 위반 내용은 △2000년 1~2월 우라늄 0.2g분리 실험 △1982년 4~5월 플루토늄 수㎎ 추출실험 외에 △80년대 천연우라늄을 전환해 150㎏의 금속우라늄 생산 △천연우라늄을 금속우라늄으로 전환하는 시설 3곳 △금속우라늄 150㎏→134㎏ 변동에 대한 신고누락 △플루토늄 실험당시 핵연료 등 재처리 여부 표기 누락 등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 핵개발만큼 국제사회의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난제는 없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핵문제를 빌미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켰으며 이란과 핵개발 문제로 다투고 있으며 원자폭탄을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북한의 핵문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과학기술부는 ‘당시 천연우라늄의 국제가격이 너무 비싸 핵연료 국산화 차원에서 0.02퍼센트의 우라늄을 함유한 수입 인광석에서 천연우라늄을 추출하는 연구가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금속우라늄을 부가적으로 생산하게 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시험관 속의 태풍`일 수 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전망을 다소간 혼란스럽게 한다며 각종 언론들이 다투어서 원자폭탄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이에 대해 정부관계자들도 IAEA로서는 다른 나라와의 공정성 시비를 우려해 한국의 과거 실험에 대해 당연히 우려를 표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지만 ‘핵물질이 무기개발과 관련한 심각한 양에 이르지 않고 우리 정부가 자발적으로 사찰에 임해왔으며 향후 엄정한 사찰을 받겠다고 공개 표명해왔기 때문에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반성문을 제출했음을 인정했다.

한국의 반성문은 2004년 12월, IAEA로부터 인정받아 한국의 과거 핵물질 실험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의장 성명 채택으로 이 문제를 사실상 종결짓는 결실을 얻었다. 과거 핵물질 실험이 무기 개발 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 차원임을 인정한 것이다. 또 한국이 보여준 국제사회와의 협력 의지 및 평화적 핵 이용 4개항 원칙 발표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동안의 국제적 물의를 말끔히 털어 내는 다행스러운 결정이라는 평가였다

여하튼 플루토늄, 우라늄, 원자폭탄이 근래 세계의 화두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산업자원부는 원전수거물관리시설(원전센터) 부지를 중‧저준위와 고준위(사용후 연료)로 나눠 분산 선정키로 방침을 정하고 오는 2008년까지 중‧저준위 폐기장을 우선 건립키로 확정했다.

중‧저준위 폐기물은 원전 종사자들의 작업복과 장비 등 방사능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폐기물을 말하는데, 압축된 뒤 콘크리트로 굳혀 드럼통 속에 보관한다. 반면에 고준위 폐기물에 해당하는 ‘사용후연료’의 경우 중‧저준위 폐기물 처리장에 임시 저장하는 방식을 백지화하고 이를 시민단체와 국회, 정부가 함께 공론화를 통해 논의키로 했다.

산업자원부는 "앞으로 '사용후연료' 관련시설을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 부지에 건설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동안 시민단체 및 지역주민들이 제기해온 우려도 해소됐다"고 발표했다.

물론 중‧저준위 폐기장 부지선정을 위한 신규절차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지역주민, 시민사회단체, 학계, 관계 전문가 등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투명한 절차를 마련함과 동시에, 주민수용성 제고 및 갈등해소를 위한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해 나가겠다고 설명했다.

국회에서도 2005년 3월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시설의유치지역지원에관한득별법'을 통과시켜 정부는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시설을 유치한 지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보장했다.

여하튼 우리에게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인 방사능, 원자폭탄, 원자력발전소, 방사능폐기물들은 생겨날 때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 대중이 그 실체에 대해 단편적이나마 알게 되었고, 이들 단어만 들어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들이 갖고 있는 부작용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거부반응과 노이로제를 불러일으키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단점만큼이나 그 효용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12월 초, 필자는 한국과학저술인협회의 일원으로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영광원자력발전소를 견학하고 원자력발전에 대한 강연회에도 참석했다.

주최 측인 한국원자력문화재단에서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원들을 초청한 이유는 보다 객관적으로 원자력에 대한 이해를 갖고 글을 써달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필자는 국정브리핑에서 '과학으로 푸는 우리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기획연재를 하고 있는데 ‘원자력’을 유산이라는 주제로 다룰 수 있느냐는 지적에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원래 유산이란 우리의 근거지 안에 있는 유‧무형의 자산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들 유‧무형의 자산을 인간이 꼭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산천에 인간의 작품이 아닌 공룡의 발자국이나 천연기념물과 같은 것이 유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논리가 성립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독도나 백두산, 한라산이 유산 속에 포함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2003년의 경우 우리나라의 총 수입액은 1,788억 달러인데 이중 에너지 수입액은 384억 달러로 총수입의 21.4퍼센트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이 많은 양의 에너지를 수입해야 하는 것은 2003년 에너지 총소비량이 2억1,517만 TOE인데 이중 자체조달은 3.1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 96.9퍼센트를 해외에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자원빈국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실례지만 바로 한국이 자원빈국이라는 것도 우리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유산이라는 틀에서 에너지를 다루고 그 규범 안에서 원자력을 다루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자력 하면 ‘핵’이라는 말 한 마디로 요약되는데 이것들의 단점이 워낙 부각되다보니 그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조차 기피하는 것도 사실이다. 핵은 인간에게 선인가, 악인가? 그 선악의 정도는 어떠한가? 이것들이 지구상에 생겨난 과정은 어떠한가. 한국을 시끄럽게 만들면서 근래의 화두가 된 이들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을 포함하여 3회에 걸쳐 설명한다.

뢴트겐 사진.
<세상을 놀라게 한 X선>

현대문명이 만든 단어 중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방사능'이다. 국내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물론 재처리 시설을 설치한다고 할 때마다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도 '방사능'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방사능이 인간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작 1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1895년 11월 8일 뢴트겐은 산란된 형광이 유리관의 벽면에서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해 검고 두꺼운 종이로 크룩스관을 덮었다. 뢴트겐은 실험실의 불을 끄고 크룩스관의 전원을 켰다. 동시에 가까이에 두었던 백금시안화바륨을 바른 스크린이 도깨비불처럼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크룩스관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책을 두거나 스크린을 더 멀리 놓아도 여전히 방전 때마다 형광이 관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뢴트겐이 관찰하려고 했던 음극선은 아니었다. 음극선의 위력은 책을 관통할 만큼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무언가가 크룩스관에서 나와서 1미터 이상의 공기를 통과하여 형광 스크린을 빛나게 한 것이다. 뢴트겐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방사선을 X선이라고 불렀다.

그는 X선이 통과하는 길에 사진 건판을 놓고 자신의 아내를 설득하여 손을 그 사이에 놓도록 하였다. 건판을 현상한 그는 예상대로 손가락뼈가 똑똑히 나타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뼈 둘레의 근육의 모습은 희미하게 나타났다. 역사상 처음으로 산 사람의 뼈가 사진으로 찍힌 것이었다.

뢴트겐은 X선을 발견한 후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협회에 자신의 발견을 '신종 방사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보냈다. 그의 논문을 접수한 협회는 논문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협회기관지에 게재하도록 서둘렀고 다음해인 1896년 1월 23일 뢴트겐이 구두로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전 세계의 학자들이 그의 발견 내용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이후 단 1년 동안에 X선에 관한 논문이 1,000종, 단행본은 50권 가량이 출판되었고, 1897년에는 뢴트겐협회가 결성되었다. 그 해 11월 5일 뢴트겐협회에서 톰프슨(Elihu Thompson)이 발표한 내용은 이 당시의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견의 역사상 이것만큼 즉각적이고 널리 과학적 응용된 전례는 없다.”

그러나 뢴트겐이 사람을 해부하지 않은 채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보았다는 소문은 대중과 공공매체에서 많은 두려움과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뉴저지 주의 한 정치가는 오페라 극장의 쌍안경에 X선 사용을 금하는 법안을 제출할 정도로 X선이 개인의 사생활에 종식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널리 퍼졌다. 런던의 란제리 제조업체는 ‘X선이 통과하지 않음을 보증하는 속옷’을 광고했다.

탄환을 찾아내다, 1896년 2월 컬럼비아 대학의 푸핀 교수가 X선을 사용하여 손에 박힌 산탄(까만 점)의 위치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었고 곧 X선의 유용성이 나타났다. 뉴햄프셔 주의 한 병원에서 X선으로 골절을 진단하는 데 사용했고 베를린의 어느 의사는 손가락에 꽂힌 유리 파편을 X선으로 찾아냈다. 리버풀의 의사는 X선으로 소년의 머리에 박힌 탄환을 확인했고 맨체스터의 교수는 총 맞은 여자의 두부를 촬영했다.

이후 X선이 응용된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X선이 갖고 있는 과학과 의학에서의 잠재력을 파악한 노벨상위원회에서 1901년 제1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뢴트겐을 선정한 것은 최초의 수상자라는 명예에 걸맞은 것이었다.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세계의 과학자들은 모두 놀라면서 그 현상을 재현하려고 했다. 파리에 있는 에콜 폴리테크닉의 물리학 교수였던 앙리 베크렐(1852∼1908)이 자발적으로 물질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을 발견했고 퀴리 부부가 우라늄보다 400배나 방사능이 강한 새로운 물질인 폴로늄과 200만 배 더 강한 라듐을 발견했다.

베크렐과 퀴리 부부에 의해 방사성 물질이 발견됨으로써 ‘원자야말로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이며 어떤 방법으로도 쪼갤 수 없다'는 당시 과학자들의 믿음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들이 발견한 방사선은 극히 미세한 물질입자를 포함하고 있고 그것은 원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자보다도 더 작은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리 퀴리는 우라늄에 의한 방사선은 그것의 화학적 반응과 관계없는 우라늄 원자의 성질이라고 믿었다. 또한 방사능의 강도가 방사능 시료인 우라늄 양에 관계있음도 확인했다. 방사능 물질에서 나온 방사선은 X선보다 투과성이 더 크고 에너지도 더 컸다. 이 방사선은 나중에 감마선으로 밝혀졌다. 마리 퀴리는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을 비롯하여 폴로늄이 이상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방사성(방사능)'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X선을 포함한 방사선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뢴트겐과 베크렐이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방사 분야에서 마리 퀴리가 더욱 중요시 생각되는 것은 그녀가 ‘방사능’이란 단어를 제창한 것은 물론 방사선의 원리에 대해 이론적인 토대를 세웠기 때문이다.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마리 퀴리가 방사능이라는 이상한 성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발표하자 학자들은 과거부터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한 미소세계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단점만큼 효용성이 큰 핵 (1)-(3)」, www.sciencetimes.co.kr(한국과학문화재단), 2004.10.4-10.18)>을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에서는 원자폭탄이 개발되는 과정만 간략하게 설명한다.

큐리 부부의 사진.


<인공적인 방사능 물질 창조 가능>

페르미는 중성자와 충돌할 원자핵 사이에 어떤 물질을 두면 중성자의 충돌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속도가 감속된 중성자가 원자핵을 지날 때 원자핵은 그 중성자를 잡아당겨 충돌할 수 있게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속도를 늦춘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인공 방사능 물질의 방사능은 더욱 커지게 된다는 점이다. 페르미는 이 연구로 193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때 한 명의 독일 과학자가 페르미의 연구에 주목했다. 바로 오토 한(Otto Han)이다. 원자핵은 분열해서 안정된 원소가 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두 원자핵이 결합해서 안정된 핵이 되려는 경향도 있다. 작은 원자핵이 결합해서 더 안정된 큰 원자핵으로 변해 가는 것을 핵융합이라 하고, 큰 원자핵이 분열해서 작고 안정된 원자핵으로 변환되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한다. 이때는 대개 반응에 참가하는 물질과 생성물질의 질량 사이에 차이가 나게 되는데 이 차이에 해당하는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되어 방출되는 것이다.

오토 한은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에 바륨을 첨가한 후 분리시키면 바륨이 방사능을 띤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핵이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이론이다.

곧바로 많은 물리학자들이 한의 이론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고 핵이 쪼개질 수 있다는 증거가 수없이 발견되었다. 이제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들이 꿈에 그리던 원소를 변환시킬 모든 준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학자들은 핵분열 시에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실제로 1그램의 우라늄이 분열하면서 방출하는 에너지는 3.2톤의 석탄, 267리터의 석유, 21톤의 TNT가 내뿜는 에너지와 비슷하다. 더구나 각 단계의 반응이 일어나는 시간 간격이 겨우 50조 분의 1초밖에 되지 않으므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기 때문에 핵분열에 의한 반응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노벨상 시상식장에서 펄벅 여사와 함께 앉은 페르미, 페르미는 중성자와 충돌할 원자핵 사이에 어떤 물질을 두면 중성자의 충돌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을 사실을 발견했고 이것이 원자력을 산업에 이용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원자핵들은 어느 정도 안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이러한 핵반응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핵분열반응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중성자로 핵을 때려야 하고, 핵융합반응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입자를 큰 속도로 가열하여 충돌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라늄의 연속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거대한 실험 장비와 예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구에서는 이런 때에 항상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 해결책을 제시한다. 변수는 역시 전쟁이었다. 오토 한은 자신이 발견한 결과를 스웨덴에 있던 리이저 마이트너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녀는 보어의 공동 연구자이던 오토 프리시와 상의하였다. 프리시는 마침 미국으로 출발하려던 보어에게 한이 발견한 핵분열에 대한 실험을 설명했다.

문제는 오토 한이 독일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가 나치에 협조하여 핵폭탄 개발에 발 벗고 나선다면 세계는 온통 나치의 치하로 들어갈 것으로 과학자들은 예상했다. 물론 후일담이지만 오토 한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는커녕 오히려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여 태업 아닌 태업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추후에 밝혀졌다.

여하튼 오토 한의 의도를 모르는 과학자들은 나치에 의해 원자폭탄이 개발된다는 것을 가장 큰 악몽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핵분야 과학자들에게 무분별한 논문발표를 자제해 줄 것을 호소했다.

결국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에 망명 중이던 평화주의자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우라늄의 붕괴가 지닌 잠재력을 지적하면서 나치에 앞서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1939년 8월 2일자인데 그 편지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된 것은 10월 11일이었고 그 동안에 유럽에서는 우려하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마침내 미국은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요구하는 대로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하였다는 것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러나 이관수 박사는 일반적으로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약간 다르다고 지적했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계기로 설치한 우라늄위원회(Uranium Committee)는 딱 두 번 모임을 가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독일보다 빨리 원자폭탄을 만들라>

엄밀한 의미에서 원자폭탄을 만드는 계획은 페르미가 성공한 원자핵분열 제어를 대규모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계획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뉴멕시코 사막 로스앨러모스에 건설된 원자탄 연구소에서 진행되었다. 오펜하이머(John Robert Oppenheimer)가 소장인 이 연구소에서 진행된 원자탄 개발 프로젝트가 바로 유명한 ‘맨해튼 계획'이다.

맨해튼 계획을 실무적으로 총괄 주도한 사람은 전기공학자 베너버 부시(V. Bush)였다. 부시는 전미국방개발위원회(NDRC)의 초대 의장이었는데 1941년에 신설된 대통령직속 과학연구개발국(OSRD)의 장으로서 미국의 전쟁연구개발 체제를 총괄하고 있었다. 부시의 주도아래 1941년 11월 원자폭탄 개발 방향이 제시되었는데 마침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자 10일 후에 당시 부통령 월러스가 참석한 회의에서 부시가 제안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이 승인되었다.

원자폭탄 개발 계획이 승인되자 ‘맨해튼 계획'은 실무책임자로서 육군성의 그로브즈 장군이 지휘했다. 극도의 기밀 유지를 위해 각 개인들의 이름이 사라졌다. 가슴에 붙은 배지 번호가 이름을 대신했는데 오펜하이머 소장의 번호는 ‘47'이었다. 주소도 암호로 사용했다. 로스앨러모스라는 지명은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국에서 사라졌다. 우편물은 모두 한 곳에 모아졌고 전부 개봉되었다. 전화가 도청되는 것은 물론 모두 녹음되었다. 비밀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실제로 원자폭탄 개발이 성공한 이후에도 자신들이 원폭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직원들도 있었다.

원자폭탄 개발에 가장 앞장 선 나라는 영국이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는 전격작전으로 폴란드를 침공했고 1940년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이어서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나치가 벨기에를 점령하자 영국은 벨기에령 콩고가 나치의 수중으로 들어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당시에 벨기에령 콩고에서 상당량의 우라늄이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토 프리시와 루돌프 파이얼스는 핵폭탄의 제작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즉 순수 우라늄235에는 충분히 빠른 연쇄반응이 존재하며 우라늄235를 분리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안했다.

오크리지의 우라늄농축공장.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오토 프리시 등이 원자폭탄을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자 영국은 재빨리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모드위원회(Maud Committee)를 신설했다.

이 당시의 상황을 이관수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41년 7월에 비밀리에 발간된 영국의 모드위원회(MAUD, 보어가 영국에 보낸 전보에 MAUD양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영국 물리학자들은 이 전문은 암호로 독일이 원폭을 개발하고 있다는 내용이라고 착각했으므로 모드위원회를 붙였다)에서는 10킬로그램 정도의 우라늄 235가 있으면 원폭을 제조하는데 충분하며 원폭을 항공기에서 투하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특히 원폭을 제작하는데 약 2년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모드위원회의 결론은 원폭 제작을 진행 중인 독일이 먼저 원폭을 제작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독일 공군의 폭격 범위에 들어 있는데다 영국에서 원폭제조에 필요한 설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미국에 모드위원회 보고서를 넘겼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독일이 오토 한과 또 다른 과학자에 의해 미국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한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이다. 그는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친 연구에서 이미 원자로와 원자폭탄의 기본적인 차이를 이해하고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갖고 있었다.

1941년 10월에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점령 하에 있던 코펜하겐을 방문하여 미국으로 탈출하기 직전의 스승인 보어를 만났다. 나치의 엄중한 감시 때문에 두 사람은 은밀하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지만 하이젠베르크는 핵반응에 대해 언급하면서 원자로의 윤곽을 설명했다. 특히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에게 전시에 물리학자가 우라늄 관련 연구를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 당시 비밀리에 미국의 연구에 관여하고 있었던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질문을 독일이 원폭에 대해 많은 진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보어로부터 하이젠베르크의 질문을 전해들은 원자폭탄 관련자들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들 역시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 만나서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에 관해 질문했다는 자체를 독일에서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어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오토 한과 같이 독일에서 원자폭탄을 제조하려는 계획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추후에 그는 원자폭탄 제조에 대한 아이디어를 히틀러에게 말하지도 않았음이 밝혀졌다. 오히려 독일의 항복 이후에 연합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억류 상태에 있던 그는 일본이 미국에서 투하한 원자폭탄 때문에 항복했다는 것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쟁이 끝나자 1948년에 '카이저빌헬름연구소'를 해체하고 '막스플랑크연구소'를 창설하여 그 소장이 되었다. 독일은 전쟁의 참패에 따라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운 면이 많았는데도 계속 과학 분야에서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창설한 막스플랑크연구소 때문이라는 것이 설도 있다.

<원자폭탄 투하>

우라늄은 지각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원소로 1톤의 암석에서 평균 2그램 정도 얻을 수 있다. 우라늄238은 일정량 이상의 에너지를 가진 중성자에 의해서만 분열을 일으키는데 우라늄235는 간단한 열중성자에 의해서도 분열된다. 그러나 자연계에 존재하는 우라늄을 정제하면 99.3퍼센트가 우라늄238이고 0.7퍼센트만이 우라늄235이다. 따라서 천연 우라늄에서 핵폭탄을 제조하는 데 충분한 우라늄238을 분리하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도 전쟁이라는 특수성이 작용했다. 우라늄238을 얻기 위해 평화시였다면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폐기되었을 기체 분사식이란 방법이 채택되었다. 이 방법은 우라늄의 혼합물을 원심 분리기에 넣고 회전시키면 우라늄238보다 1.3퍼센트 정도 가벼운 우라늄235가 분리되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기체 분사식의 첫 번째 문제는 우라늄을 기체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 우라늄을 6개의 불소와 화합시키는 ‘6불화우라늄'이라는 휘발성 액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 화합물에서도 우라늄235를 가진 것이 우라늄238을 가진 것보다 1.3퍼센트 정도 가볍기 때문에 기체 분사에 의해 충분히 분리될 수 있다.

원자폭탄을 만들 정도의 많은 양을 모으려면 6불화우라늄 증기가 높은 기압 아래서 수천 개의 구멍이 나 있는 장애물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런 시설을 갖추려면 엄청난 예산과 인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전쟁에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미국으로 하여금 20억 달러를 들여 공장을 세우게 한 것이다. 이때 6불화우라늄의 용기로서 극비리에 개발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비밀이 해제되자마자 일반 가정에 판매되어 호평리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 있다. 현재 가정주부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주방기기 중에 하나인  ‘달라붙지 않는 프라이팬’에 사용되는 테플론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라늄235를 다량 확보하는 것이 워낙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과학자들은 우라늄235가 아닌 또 다른 핵분열의 원료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플루토늄239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로마로 신화의 무대를 옮기면 넵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바로 이 넵튠에서 넵투늄(1940년 5월 버클리대학의 에드윈 맥밀런과 에이블슨이 발견)이라는 원소의 이름이 비롯된다. 천연 상태의 우라늄239에 중성자가 하나 흡수될 때, 우라늄은 넵투늄239로 변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이 넵투늄이 며칠 지나면 구조가 바뀌어서 또 다른 물질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하데스는 지옥의 신으로 로마 신화에서는 플루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플루토에서 플루토늄(1941년2월 버클리대학의 시보그와 세그레가 발견)을 유추해 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라늄238을 핵변환시켜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은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공할 위력을 갖고 있다는 뜻에서 ‘지옥의 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여하튼 일본의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플루토늄239로 만들어진 것이다.

‘맨해튼 계획' 팀은 1945년 핵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우라늄235와 플루토늄239를 정제하였다. 그들은 로스앨러모스(우라늄 농축 및 관련 연구는 테네시 주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에서 담당)로부터 300킬로미터 떨어진 뉴멕시코 주 앨러모고도 트리니티사이트에서 원폭 1개를 실험했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의 일이었다. 이때의 폭발 장면을 목격한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 실험이 성공하자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30초, 서태평양 티니안섬 기지를 출발한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히로시마 상공 9,600미터 지점에서 원자폭탄을 투하, 인구 30만 명의 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에놀라 게이'는 B29 조종사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에서 딴 이름이고, 지름 71센티미터, 길이 3.05미터, 무게 4톤의 원폭 1호는 ‘리틀 보이(little boy)'로 불렸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과는 달리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만든 것이다.



공습경보가 한 차례 지나가고 시민들이 막 일상으로 돌아가던 때, 원자폭탄이 도시를 강타하자 오렌지 빛 섬광과 엄청난 불덩이가 치솟으며 도시의 60퍼센트가 파괴됐고 폭심지(爆心地)로부터 반경 500미터 이내의 모든 생명체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첫 번째 원자폭탄은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며 8월 9일 나가사키에 플루토늄239로 만든 두 번째 원자폭탄 ‘뚱뚱한 사람(fat man)'을 떨어뜨렸다. 두 개의 원자폭탄이 가진 위력은 TNT 3만 5천 톤과 맞먹는다. 일본의 선택은 항복뿐이었다.

자료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히로시마에서 최소 10만 명이 사망했으며 건물 7만 채가 반파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도 1945년 말까지 7만 명이 사망하게 만들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된 배경으로 당시의 국제 정세를 무시할 수 없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군 측에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의 일본 참전 기한은 석 달 후인 1945년 8월 8일로 정해졌다. 미국 정부는 이때 이미 전쟁이 종료되면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과의 대립을 예상하고 있었다. 종전 후 국제사회에서 우세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미국만의 힘으로 일본이 항복하도록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원자폭탄 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시보오그(Glenn Seaborg)는 원자탄의 사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6월, 일본 참관인이 참석한 가운데 원자탄의 효력을 보여주어 일본 본토에 이 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항복하게 해야 한다는 건의안이 제시되었다. 이 건의안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으나 다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내막은 잘 모르나 결국 투르먼 대통령이 일본에 폭탄을 사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중략) 나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당시 나를 괴롭힌 것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번째 폭탄이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히로시마 투하 후 어째서 일본의 반응을 좀 더 지켜보지 않았는가 궁금하다. 나는 히로시마 폭탄으로 결국 일본이 실상을 알아 항복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원자폭탄이라는 괴물이 결론적으로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것을 막아주었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원자폭탄의 엄청난 파괴력에 놀란 학자들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히틀러와 같은 적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핵폭탄 제조에 참여한 학자들은 심한 동요를 일으켰으며 핵폭탄이 갖고 올 파장을 우려하여 더 이상의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때 원자탄 개발과 관련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사망하기 5개월 전인 1954년 11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원자탄 제조를 추천하는 편지에 서명했을 때 나는 일생에 한 가지 큰 실수를 했다. 그러나 독일인이 만들려고 할 것이라는 위험성의 점에서 어떤 정당성이 있었다.”고 표현하였다.

반면에 원자폭탄이라는 괴물이 태어나자 환영한 학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에 사용되어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데 이용되기도 했지만 도로나 교량 건설, 광산 등에서 평화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핵도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원폭의 폭발력이 다이너마이트보다 더 위력적이므로 댐과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건설 계획에 광범위하게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구의 건설, 해협을 파는 것, 암석 파괴 등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소박한 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마리 퀴리가 명명한 ‘방사능'이다. (계속) 04/3/19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뜨거운 감자, 원자력 ②
<원자폭탄을 산업에 이용>
방사능이라는 복병 때문에 애물단지가 될지도 모를 원자력의 산업화에 물꼬를 튼 것은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학자들이 물이나 용융된 금속을 냉각재로 사용하여 원자로를 제어하기만 하면 전기 생산이나 난방을 위해 많은 열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자 잠수함용 동력원으로 원자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했다.

잠수항속시간(거리)은 잠수함의 중요한 성능이다. 석유연료를 사용할 경우에는 연료보급을 빈번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연료의 연소에는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해면으로 떠올라 공기를 공급해야 하므로 잠수항속거리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원자로를 동력원으로 하면 1년 이상 연료교환이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연료의 연소에 산소가 필요 없기 때문에 잠수시간이 비약적으로 증가된다. 가압경수로를 탑재한 세계 최초의 원자력잠수함인 노틸러스 호가 1954년 1월에 진수하여 1955년 1월 17일 항해 시험에 성공했다.

원자력잠수함이 성공적으로 개발되자 상업용 발전에 원자력을 이용하려는 계획이 급속도로 추진된다. 군비확장경쟁과 원자력의 군사이용에 따르는 반발을 누그러뜨리는데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펜실바니아 주 쉬핑포트에서 1957년 12월 미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상업운전에 성공하였다.

세계 최초의 원자력잠수함 노틸러스호, 잠수함은 원자력을 산업화에 이용한 최초의 개발품이다.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의 최소 크기를 임계 크기라고 하고, 이때의 질량을 임계 질량이라고 한다. 만약 핵분열이 가능한 물질의 질량이 임계 질량 이상이 되면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다. 원자폭탄은 핵분열 물질을 임계 질량이 되지 않는 두 개의 덩어리로 배치한 다음 어느 순간 그 둘을 갑자기 합쳐 임계 질량을 넘도록 하는 것이며, 이 과정을 조절하여 전기 발전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자력 발전소이다.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의 기본 개념은 모두 비슷하다. 모든 발전소는 터빈에 연결되어 있는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만들어낸다. 이때 터빈을 돌리는 동력으로 물을 이용하면 수력발전소가 되고 화력을 이용하면 화력발전소, 원자력을 이용하면 원자력발전소가 된다.

원자력을 이용한 발전소도 그 원리만 놓고 보면 크게 복잡할 게 없다. 일반적인 화력발전소는 보일러에다 석탄 또는 석유 등의 화석 연료를 태워서 얻은 열로 물을 끓인다. 거기서 나온 수증기를 가지고 터빈을 돌리고, 이 터빈이 다시 발전기를 돌림으로써 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원자력발전소는 불을 때는 것이 아니라 핵분열을 할 때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물을 끓인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원자로가 화력발전의 보일러 역할을 담당한다. 원자로는 우라늄이 핵분열하면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하도록 만들어진 우라늄 전용보일러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원자력발전소의 핵심 요소 중에서 감속재, 냉각재, 반사재 및 차폐제로 다양하게 두루 활용되는 것이 바로 물이다. 물은 열용량이 크고, 냉각재를 순환시키는데 필요한 펌프의 동력이 적게 들며, 질량이 작아서 감속 작용이 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값이 싸다.

원자로에서는 물이 100도에서 끓어 버리면 곤란하다. 그 정도 온도로는 급수를 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청난 압력을 걸어 주면 100도가 넘어가도 물은 수증기로 변하지 않고 계속 액체로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보통 물(경수)에 100배 이상으로 압력을 가하여 끓지 않도록 만든 원전을 ‘가압경수로' 원자력발전소라고 부른다. 한편 보통의 수소보다 두 배가 무거운 중수소와 산소가 결합한 중수를 감속재와 냉각재로 사용하는 발전소를 ‘가압중수로' 원자력 발전소라고 한다.

경수형 원자로는 자연 상태에서 채취한 천연 우라늄의 농도를 3∼4퍼센트 정도로 높인 저농축 우라늄235를 사용해야 하지만 그 대신 냉각재와 감속재로 경수를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비해 중수로는 우라늄235가 0.7퍼센트 포함되어 있는 천연 우라늄을 그냥 원료로 쓸 수 있으며 연료를 교체하기 위해 원자로의 가동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중수를 사용해야 하므로 가격이 매우 비싸다.

그래서 대부분의 원자력발전소는 경수형 원자로로 건설되며 한국의 경우도 경수형 원자로가 주력을 이루고 있다. KEDO의 주도하에 북한 신포시에 건설하던 신포원전도 물론 경수형이라고 ‘한국형원자력발전소’를 계획했던 이병룡 박사는 설명했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는 경수를 사용하지 않고 중수를 사용하므로 중수로라고 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자료에 의하면 2004년 1월 말 현재 31개 국가에서 총 4백42기의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고 있으며(현재 27기가 건설 중) 설비용량은 3억6천3백82만 킬로와트이다. 원자력발전은 전 세계 총발전량의 16퍼센트를 담당하고 있으며 미국은 1백4기, 프랑스는 59기, 일본이 54기를 가동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가압경수로형으로 고리원자력발전소에서 4기, 영광원자력발전소에서 6기, 울진원자력발전소에서 5기(6호기는 2005년 6월 상업운전 예정) 총 15기가 운전되고 있으며 가압중수로형으로 월성원자력발전소에서 4기를 가동하여 총 19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운용하고 있다. 총 19기의 원자력 발전소에서의 출력은 1,585만 킬로와트로 한국의 총 발전량 중에서 40퍼센트를 담당하고 있다.

<최악의 원전사고는 검증되었다>

어느 기계도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많이 있다. 원자력발전소도 예외는 아니다.

1986년 4월 구소련의 체르노빌(Chernobyl)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했다. 체르노빌 원전단지는 지리적으로는 우크라이나공화국 수도 키에프 북방 90킬로미터, 벨라루스공화국과의 접경지역으로서, 곡창 우크라이나 평원 중앙부에 흑해로 흘러드는 드네프르강의 지류인 프리피야트 강변에 위치한다.

체르노빌원전에서의 폭발사고는 발전소의 비상대책을 점검하기 위한 실험도중에 일어났다. 원래는 소외전원 상실 후 디젤발전기에 의한 비상전원 공급개시까지 걸리는 시간동안 충분한 전력을 제공할 수 있는 가를 실험할 계획이었다.

실험 계획에 의하면 열출력 1000MW 정도로 운전하다 원자로를 정지하고 계획된 실험이 실시되어야 했다. 그런데 운전원의 운전미숙으로 인해 냉각수의 유량이 증가하여 증기압이 감소했는데 운전원은 저증기압 신호에 의한 원자로정지를 방지하기 위해 원자로 자동정지계통을 꺼버린 것이 결정적인 사고의 원인이었다.

체르노빌 당국은 발전소 직원, 소방대원, 긴급 작업자 등 다량 피폭 우려자 499명을 후송하여 검진한 결과 237명에게서 급성영향이 진단되었으며 이중 28명이 사망하는 등 기타 사망자 3명을 합하여 모두 31명이 사망하였다.

원전 사고에서 관련자들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것은 방사선에 인체가 노출되었을 때 치명적인 백혈병이 증가한다는 가설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소련 당국도 백혈병 증가에 촉각을 세우고 계속 추이하여 결과를 발표했다. 이재기 박사의 글을 이용한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전경, 1986년 구 소련의 체르노빌에서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나 방사능이 유출돼 몇 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370만 명의 오염지역 거주민과 초기 2년간 정화작업자 20만 명 중 각각 200명 정도의 백혈병 환자가 사고 후 10년 동안 증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실제 역학조사 결과는 기저 발병률에 머물렀다. 백혈병에 대한 역학조사는 체르노빌사고로 인한 방사선 피폭과 실제 백혈병 발생빈도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했다. 따라서 사고로 인한 백혈병의 증가는 인지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아동 갑상선암을 제외한 다른 암에서도 같다.’

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쓰리마일(Three mile)섬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에서도 원자로 내부가 파괴되어 원자로의 방사능물질이 누출된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의 원인은 원자로에 공급되던 냉각수의 급수계통 이상이었다. 또 1차 급수계통에 고장이 나면 보조 급수계통에서 냉각수를 공급하게 되어 있었으나 보조 밸브도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고가 일어난 후 5일 동안 발전소에서 방사능 물질을 계속 방출되어 주변을 오염시켰다. 사고가 일어나자 우선 임산부와 아이들에게 피난 권고가 내려지고 23개 학교가 폐쇄되었다. 또 인근 주민에 대해서도 긴급 대피명령이 내려졌으며 이 사고로 사고 지점에서 반경 80km 내에 거주하던 주민 200만 명이 이 방사능 물질에 노출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미국의 피츠버그대학 연구팀은 2000년 4월, 1979년에 발생한 드리마일 원전 사고 이후 1992년까지 13년 동안 인근 주민 3만 2천여 명을 대상으로 암 발생률을 조사한 결과 당시 유출된 방사능과 주민 암 발생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발표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체르노빌과 드리마일 원전의 사고는 역설적으로 최악의 원전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돌일 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로도 제시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들 사고를 참고삼아 보다 안정성을 강조하여 추후에 건설된 원전에서는 원전사고로 인한 부작용이 미미할 수밖에 없다.

사실 방사능의 부작용에 관한 한 원자력발전소 측의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환경문제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이라고 볼 수 있는 뉴질랜드의 예를 케이스 로케트의 설명을 인용한다.

‘뉴질랜드의 흡연 인구는 약 320만 명으로 해마다 약 1000명이 폐암으로 사망하는데 이는 위험도로 볼 때 해마다 0.0033에 달한다. 미국에서도 하루에 한 갑 이상씩 담배를 피우는 2,200만 명의 애연가 중에서 75,000명이 죽는데 이는 위험도가 해마다 0.0034이며 일부 학자들은 담배 한 개피가 약 13분의 생명을 단축시킨다고 주장한다.

원자로 구조.


그런데 뉴질랜드에 사는 사람들은 해마다 약 17mSv(1 sieverts = 1J/kg, 방사능 측정단위로 단위 질량 당 흡수된 에너지의 량)의 방사선에 노출된다. 한 번에 90Sv의 방사선에 노출되면 인체는 치명적인 영향을 받으며 22Sv 정도의 방사선에 노출되면 심한 질병을 앓게 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평균적으로 17Sv의 방사선에 노출된 24,000명이 치료를 받았으며 이들 중 81명이 백혈병으로 사망했다(원자폭탄에 직접 노출되지 않는 경우에는 20명). 이 병은 방사선에 노출된 후 5년 간의 잠복기를 가지며 20년 간이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20년만 지나면 더 이상 위험이 없다고 판정).

그러므로 뉴질랜드인이 1년 간 평균적으로 17mSv의 방사선을 흡수하므로 20년 간 흡수한 총량은 0.34Sv이며 이를 개인적 위험도로 계산하면 0.0000056이 되어 흡연에 의한 위험도의 1/600이다. 만약 벽돌로 만든 집에서 살고 있다면 벽돌을 구성하고 있는 미량의 방사성 원소에 의해 매년 5mSv의 방사선을 더 많이 흡수하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집에 살 경우는 더 많은 방사선을 흡수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 핵발전소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방사능으로부터 큰 위험을 느끼지 않는 것은 발전소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의 양을 1mSv보다 작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는 매년 담배 한 개피를 피우는 위험도와 같은 수준이다.‘

한국인들은 방사능이라면 일단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연상하곤 한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가 바로 원자폭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핵폭탄이 터진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엄청난 방사능에 피폭된 것이 아니라면 방사능으로부터의 피해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원자력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원자력시설을 선호하는 외국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핵폐기물(수거물) 처리장이다.

원전폐기물이란 원자력의 이용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어느 기계를 작동하더라도 폐기물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동차의 경우 엔진오일을 정규적으로 교체해주어야 하며 성능이 좋은 보일러의 경우에도 재가 나오므로 정기적으로 청소해준다. 원자력 발전소도 이와 마찬가지이지만 원자력발전소의 속성상 폐기물에 방사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원자력발전소에서는 크게 두 가지 폐기물이 나온다. 하나는 작업복, 공구, 필터, 이온교환수지 같은 방사능 준위가 낮고 포함하고 있는 방사성물질의 반감기(방사능이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가 짧은 중‧저준위 원전폐기물이다. 다른 하나는 방사능 준위가 높고 플루토늄 등 반감기가 긴 동위원소를 포함하고 있는 사용후연료이다.

원전폐기물은 그 형태에 따라 기체, 액체, 고체의 세 가지로 나눈다. 기체폐기물은 일단 밀폐탱크에 저장한 후 방사능이 기준치 이하로 떨어지면 고성능 필터를 거쳐 대기로 내보낸다. 액체폐기물은 저장조에 모았다가 증발장치를 이용해 깨끗한 물과 찌꺼기로 분류한 후 물은 재사용하고 찌꺼기는 안정된 고화체로 만들어 철제드럼에 넣어 밀봉해 저장한다. 고체폐기물은 압축해 역시 철제드럼에 넣어 밀봉상태에서 저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고체폐기물을 어디에다 저장하느냐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원전수거물 영구처분장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원전폐기물은 발전소 내 임시 저장고 등에서 저장 관리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임시저장시설이 오는 2008년 단계적으로 포화상태에 이르므로 그 전에 영구대책을 마련하려는 과정에서 원전반대측과의 마찰이 발생한 것이다.

외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 1969년부터 25년간 방사능 폐기물 처분장이 운영되어 온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의 유명한 휴양지 셀부르 부근의 라망쉬 마을은 바닷가재로 유명하다(1994년 용량포화로 운영을 종료). 그러나 처분장이 운영되면서 관광객이 더 많아져서 바닷가재와 생선이 훨씬 더 잘 팔렸으며 주민들의 소득이 32퍼센트나 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지역은 젖소 목장으로도 유명한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우유는 전 프랑스에서 판매되고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휴양지 셀부르 항구, 프랑스의 유명한 휴양지 셀부르는 인근 라망쉬에 있는 핵재처리 시설을 프랑스의 대표적인 원자력 발전 관광지로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라망쉬에 이어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1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내륙 평지인 로브 처분장을 건설하여 현재 운용 중인데 주변의 마을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와 샴페인은 세계적인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스웨덴의 포스마크 처분장이 있는 발트해의 처분장 앞 바다에서는 가자미가 많이 잡힐 뿐만 아니라 물개의 낙원이기도 하다. 이곳 물개의 숫자 역시 지난 10년 사이에 42.5퍼센트나 증가했다는 통계가 있다.

원전 폐기물 처리에 있어 원전 측과 환경단체 등 반원전단체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은 양측에서 원전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원전 측에서는 원자력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크며, 반원전단체들이 제기하는 원전 운영 및 원전수거물 처리의 안전성도 현재의 기술로도 안전하게 운영, 관리할 수 있으며 향후 기술의 발달에 따라 원천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반핵 또는 환경 단체에서는 원전의 안전성이 확보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관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원전의 확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원전수거물은 인간을 비롯한 제반 환경에 치명적인데다가 사회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는 물질이임이라고 강조한다.

양측의 주장에 또 다른 이해 당사자인 일반 국민들도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것을 보면 원자력은 여하튼 문제점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예단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 지역이 원전 또는 원전수거물 부지로 선정되는 것에 대하여 대체로 부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도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정부가 이문제 해결을 위해 전혀 손을 놓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 문제가 아직까지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유연백 박사가 명쾌하게 설명했다.

원전폐기물 처리과정.


첫째는 과거에 원자력에 관한 한 전문가 중심의 일방적 결정으로 진행되는 등 민주적이고 투명한 절차가 확립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간의 추진 과정은 지역 주민이나 환경 단체 등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사전에 폭넓게 수렴하는 민주적 절차보다는 정부가 소수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공권력이나 행정력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원전 정책의 과정에서 주민 수용성이나 갈등 관리 등 인문·사회적 측면을 배려하고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즉, 지나치게 단기간 내 부지 선정을 추진함으로써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공권력에 의존하게 되는 문제를 반복하게 되었다.

셋째는 갈등 문제를 이성적 토론과 대화로써 해결해 나가지 못하고 대결 국면으로 치닫게 되는 사회적 성숙도가 높지 못하고, 이러한 국가적 갈등 문제를 풀어갈 제도적인 갈등관리 시스템도 확립되지 못하여 제도나 중재에 의한 해결을 원천적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이 문제를 풀지 못하는 원인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즉,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을 때 권위 있는 중재자나 조직을 갖지 못함으로써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어 극단적인 갈등과 투쟁 일변도로 치닫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나 영국, 스웨덴 등 소위 선진국인 경우 원자력발전소 건설이나 핵폐기물 처리장 때문에 한국처럼 문제점이 제기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불가사의라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선진국 중에서도 한국과 같이 에너지 자원이 빈약한 경우 원자력 발전소 등을 건설한다고 할 때 한국보다 더 큰 소란 사태가 일어났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한국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각 국 정부에서 에너지 사정은 물론 원자력에 대한 실상을 정확히 사전에 공개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데다가 국민들이 정부 정책의 투명성과 그들의 발표를 사실대로 믿기 때문이다. 더구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선진국의 경우 원자력에 관한 시설이 자기 지역에 들어서면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므로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설 유치를 위해 노력한다. 04/3/29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뜨거운 감자, 원자력 ③
<다시 등장하는 원자력발전>

필자와 만난 한국 정부의 원자력 담당 관계자는 원전에 관한 한 과거에 한국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많았지만 현재는 모든 것을 공개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피력했다. 적어도 원전에 관한 한 정부에서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필자에게 설명한 원전에 대한 총체적인 내용은 방대한 분량이 되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반핵지지자들이 가장 크게 지적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원전을 폐쇄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원전을 계속 건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핵문제에 관한 한 세계 각국과는 달리 거꾸로 나간다는 예로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도 작금에 변모된 세계 에너지 상황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스웨덴은 가동 중인 11기의 원전을 2010년까지 완전히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1990년대에 1기의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원전 폐쇄에 앞장섰으나 기존에 건설된 원전을 대체할 수단을 마련하지 못하자 원전을 폐기하려던 계획을 보류했다. 스위스도 2014년에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했지만 2004년 봄 국민투표를 통해 계속 운전하기로 결정했다. 네덜란드 역시 2002년 7월에 폐쇄결정을 번복했으며 핀란드는 오히려 2002년 5월 의회의 승인을 얻어 원자력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독일도 원전 운영기간을 32년으로 한정하고 신규 원전 건설을 제한하는 원자력법을 개정했으나 <독일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계가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중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전력 부족난을 해결하기 위해 오는 2020년까지 20기의 원전을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9기의 원자력발전소로 758만4000킬로와트를 생산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종합운동장 태양열수영장(우측 하단), 4500제곱미터의 집열판을 사용한 세계 최대의 경제성 있는 대체에너지 적용사례로 정부는 국내 에너지의 5퍼센트까지 대체에너지로 해결할 계획이다.


미국의 경우가 주목거리인데 미국은 1979년 드리마일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한 이래 새로운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104기의 원자력발전소의 이용률을 대폭 향상시키고 출력 증강과 수명을 연장하면서 무려 26기의 신규 발전소 건설에 맞먹는 효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원자력발전소를 새로 건설하지는 않지만 원자력 발전의 이용율은 과거보다 무려 25퍼센트나 더 높아진 것이다.

특히 미국의 에너지부(DOE)의 에이브러햄 장관은 2005년 1월, 원자력에너지가 오늘날 어떠한 다른 이용 가능한 에너지원도 제공할 수 없는 고유한 혜택 즉 원자력이 화석연료의 연소와 관련된 오염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원자력 없이 즉, 원자력에너지의 대규모 증가 없이는 우리가 세계의 증가하는 전력수요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없으며 더불어 오염 및 온실가스 배출 증가 없이 모든 전력을 절대로 생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미국은 2010년 말까지 원전 건설을 재개하기 위해 원자력발전 2010년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라고 발표했다. 에이브러햄 장관은 원자력발전 2010년에는 정부와 민간부문의 긴밀한 공동 협력 및 신규 원전의 투자에 대한 대규모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규제적 확실성을 증가시키는 데 중대한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일괄(one-step)' 인허가 절차 실증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미국이 원자력에 대한 정책을 변경시키려는 것은 25년이 넘게 원전건설을 중지한 결과로 금세기 초 캘리포니아에서 최악의 전기 공급 부족사태가 일어나자 대안은 원전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 성장의 원동력인 전기>

당초 많은 나라에서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근래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활용하거나 새로운 건설을 추진하는 것은 원자력발전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대체에너지를 개발하여 원자력발전을 대체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많은 학자들과 국가에서 연구하고 있지만 대체에너지(자기력·전기력·중력·태양력·파력·조력 등) 자체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에너지를 충당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예를 들어보자.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도 절대로 고갈되지 않는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기계를 돌리려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부호가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인쇄기를 단 한 대 만들고 파산하였다는 말을 듣고 당장 그 연구를 포기하였다. 태양이 있을 때 인쇄기는 그런대로 잘 작동되었다. 그러나 인쇄기를 가동시키는 데 공급하는 태양에너지의 밀도가 항상 충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산업용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 부호는 파산했다.

당시의 파산은 대부분 교도소에 수감되어 생애를 마감해야 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 연구를 위해 수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그야말로 비운의 과학자가 되었다. 썰렁한 이야기이지만 과거의 과학자들이 얼마나 불안한 환경에서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뉴턴의 우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도 절대로 고갈되지 않는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기계를 돌리려는 연구를 했지만 경제성 있는 분야를 찾지 못해 포기했다.


한국의 경우 대체로 맑은 날 하루 종일 2,500kcal/m2 정도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이 에너지는 태양이 가동되는 시간을 6시간 정도로 본다면 시간당 10ℓ의 물을 20도에서 60도 정도로 올려주는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당 400kcal의 에너지로 어느 규모의 기계를 움직일 수 있는지 계산해 보면 문제점을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에너지를 얻기 위하여 값비싼 태양열 집열기를 1제곱미터나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뉴턴과 같은 세계적인 석학이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기관을 만들려다가 포기했다는 것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학자들은 대체에너지의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대체에너지가 충분한 경제성을 얻을 수 있는 분야에 투입한다면 우리나라의 총 에너지의 5퍼센트는 담당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2004년 잠정치는 2.3퍼센트). 이 말은 역으로 나머지 95퍼센트는 다른 에너지원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에게 원자력에 관한 연구를 25년 이상 수행한 연구원이 솔직하게 이야기한 내용을 소개한다.

그는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수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학자들에 따라 평가는 다르겠지만). 가장 쉬운 예로 대형 산업체에서 필요한 전기를 적절하게 공급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이 과연 가능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의 지적은 더욱 날카로웠다. 근래 여름에 에어컨을 가동하기 위해 많은 전력이 소요되어 에너지를 절약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캠페인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절약을 위해 에어콘 가동을 전면 금지시킨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그의 말대로 에너지 절약의 가장 기본은 ‘추워도 참고 더워도 참으면 된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에어콘이 실생활로 들어온 현재 업소에서 에어콘을 가동하지 않으면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절약이 비교적 몸에 배어 있는 한국민이지만 이미 에어콘에 맛을 들인 한국민들에게 에어콘 작동을 중단시킨다는 것은 폭동을 감안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설명도 했다.

그는 자신이 원자력 분야에 종사하지만 만약에 원자력 발전소를 폐기할 수 있는 다른 대안 즉 우리나라에서 현재 발전하고 있는 1,585만 킬로와트를 보다 경제적인 방법으로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을 지금 즉시 제시한다면 자신도 원자력발전을 굳이 고집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해결책을 도출해야>

뜨거운 감자인 원자력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찬‧반론자간에 골이 깊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필자가 영광원자력발전소를 견학하면서 영광원자력발전소의 경우만 해도 협력업체 직원을 포함하여 2,500여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를 4인 가족으로 계산한다면 1만여 명이 원자력발전소 주변에서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능 때문에 치명상을 입는다면 과연 원자력발전소 주변에서 생활할 수 있을까?

영광원자력발전소 전경.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한국인이고 그들도 자식들을 교육시키면서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한국인이 다른 나라보다 유별나다는 것은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교육열이다.

그러므로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비록 방사능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고 감수하겠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야 희생을 감수한다고 하지만 자식들까지 방사능의 영향을 받고 치명상을 입는다면 그 어느 누구도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기를 가동하고 있는 영광원자력발전소에만 1만 명이나 근무하고 있다는 것은 19기를 가동하고 있는 한국 전체로 볼 때 몇 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원자력발전소 주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것을 기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확신, 즉 방사능의 영향이 크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이들이 원자력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원자력에서 나오는 그 무엇이 자기 후손들에게는 영향이 없다고 믿고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꼬일 대로 꼬인 원자력이지만 그래도 해결책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천연자원이 거의 없다는 것은 사실이며 천연자원이 없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유산이라는 것은 서두에서 이야기했다. 우리나라에 에너지 자원이 없다는 것을 우리의 유산이라고 인정한다면 에너지 문제를 풀어야하는 당사자는 당연히 한국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정부 측에서 과거에는 어떻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현재 원자력에 관한 한, 눈 가리고 아웅하거나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적어도 원전에 관한 한 어느 대화나 토론장에 나가서 항상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천명한다.

그러한 상황이라면 반원전측에서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이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건설적인 대안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러 전문가들을 포함하여 관련 인사들이 참여하여 한국의 근본적인 에너지 문제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를 검토한다면 원자력폐기물을 포함한 대안은 생각보다 빨리 나올지 모른다.

더구나 다행한 것은 2004년 9월 정부와 반대 측이 대화 기구를 만들기로 합의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의 에너지 문제가 풀려지지 않을 실타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원자력문화재단>에서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원들을 초청하여 원자력에 대한 이해를 부탁한 것도 바로 이런 내용을 가감 없이 알려달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원자력의 선‧악은 인간이 활용하기 나름>

과학은 계속 발전한다. 그러므로 원전은 물론 핵폐기물 대안도 계속 진전되기 마련이다. 현재 핵폐기물 처리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방사능폐기물을 유리 속에 가두는 유리화 기술과 방사능 폐기물의 반감기를 줄이는 플라즈마 처리 기술 등이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나날이 발전하는 로켓 기술을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핵폐기물을 로켓에 실어 표면온도 6000도에 달하는 태양으로 발사하여 완전 소각시키는 것이다.

불타는 태양, 핵폐기물을 로켓에 실어 표면온도 6000도에 달하는 태양으로 발사해 완전 소각시키는 방법이 연구 중이다.


20세기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20세기로 들어오기 직전에 이루어진 두 가지의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 때문이다. 20세기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이 X선과 방사능의 발견에 기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원에서 X선 촬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X선은 극히 짧은 파장의 전자기 복사선으로 물체를 뚫고 지나가는 성질을 갖고 있다. 투과력이 우수하기 때문인데, 물체를 통과하는 중에 일부 흡수되기도 한다. 이런 성질을 이용하여 X선은 골절이나 부상자에게 박힌 파편이나 유리 조각, 또는 어린아이가 우연히 삼킨 물건 등을 찾아내는 데 사용된다. 비행기에 실리는 짐들을 조사하는 데도 이용되며 테러범이 휴대하고 있을지 모를 불법 무기를 색출하여 여행객들이 안전한 여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X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방사능은 백혈병을 포함한 암 종양의 치료에도 이용된다.

방사선치료는 질병의 치료에 방사선을 사용하는 것으로 X선, 감마선과 같은 파동 형태의 방사선, 또는 전자선, 양성자선과 같은 입자형태의 방사선을 이용하여 암과 같은 악성 질병의 성장을 지연시키거나 멈추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파괴시킨다. 방사선치료는 또한 양성종양이나, 내과적인 질병, 일부 피부질환 치료에도 이용된다. 서태석 박사는 암환자의 거의 60퍼센트가 방사선치료를 받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X선은 입체적인 인체가 평면으로 찍혀지기 때문에 병든 부분이 겹쳐져 나타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CT-스캐너이다. CT-스캐너(X선 단층촬영기) 역시 X선을 이용하지만 평면적인 X선 촬영과 달리 360도로 회전하면서 인체를 단면으로 나눠 촬영하기 때문에 몸속을 입체적으로 알 수 있다.

진단 중인 CT-스캐너, CT-스캐너는 X선을 이용하지만 평면적인 X선 촬영과 달리 360도로 회전하면서 인체를 단면으로 나눠 촬영하기 때문에 몸속을 입체적으로 알 수 있다. (정동병원 박영천 원장의 호의로 촬영)


CT-스캐너는 곧바로 천사의 선물이라는 말을 들으며 전 세계에 보급되었고 병원의 신뢰성 수준이 CT-스캐너가 확보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로 평가될 정도였다. CT-스캐너를 발명한 코맥과 하운스필드는 1979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한편 CT-스캐너는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만 보여줄 뿐 내부조직의 기능적인 상태나 생리학적인 상태를 보여줄 수 없었다. 이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 인체의 내부 모습을 해부하지 않고도 조사할 수 있게 된 것은 핵자기공명(NMR)법이며 보다 발전한 MRI(자기 공명 화상 장치, Magnetic Resonance Imaging) 장치가 개발됐다. MRI-CT가 등장하자 인체에의 활용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곧바로 뇌와 척수 질환을 비롯하여 심장 및 혈관질환, 폐, 간 등 장기는 물론 부인과 및 비뇨기계의 종양, 유방질환, 관절질환 등도 진단할 수 있게 되어 암의 경우 조기 발견이 쉬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MRI-CT는 CT-스캐너로 볼 수 없는 뇌나 척수 같은 신경계의 질병을 진단하는데 탁월한 성능을 보이지만 촬영시간이 길어 폐나 위처럼 움직이는 장기를 찍는 것이 어려운 단점이 있다. 그러므로 환자의 병명에 따라 방사능을 사용하는 CT-스캐너를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인 경우가 많으므로 CT-스캐너와 MRI-CT를 선별적으로 사용한다.

원자력의 선‧악은 인간이 활용하기 나름임을 알 수 있다.

04/4/2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