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과 금속활자 ① | |||||||||||||||||||||||||||||||||||||||||||||||||||||||||||||||||||||||||||
1967년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는 도서관 소장품 중에서 불경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 책은 원래 고려 말기의 고승 경한(景閑)이 역대의 여러 부처와 조사(祖師)의 게송, 법어 등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으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며, 경한이 입적한 지 3년 뒤인 우왕 3년(1377) 7월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초간본이 간행된 것이다. 그 후 구한말 주한 프랑스 공사인 콜렝 드 플랑시(Colin de Plancy)에 의해 반출되어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책에 씌어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찍어낸 최초의 성경책보다 그 시기를 73년이나 앞당길 수 있기 때문에 박병선 박사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병선 박사는 그 뒤 3년간의 고증을 거쳐 불조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보다 앞선다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책의 역사 종합전람회'에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출품했다. 이 일은 세계의 출판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곧바로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가 발명되었다는 것이 공인됐으며 우여곡절 끝에 2001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세계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기록유산을 가장 적절한 기술을 통해 보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전 세계적인 인식과 보존의 필요성을 증진하며, 기록유산 사업 진흥 및 신기술의 응용을 통해 가능한 많은 대중이 기록유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인류가 함께 보호하는 기록물’들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기록유산에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등재되어 있는데 유네스코가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등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쇄문화의 전파와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친 기록유산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현재 프랑스에 단 한 권만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 희귀성 또한 크게 고려되었다. 아울러 불조직지심체요절과 구텐베르크 성서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서양의 금속활자본으로 인류의 기록 문화를 혁신적으로 바꾼 최대의 유산이다. 유네스코는 유네스코 기록유산 자문회의의 세계 기억사업 정신에 입각해 등재 권고했다.’ <최고의 금속활자본 탄생> 불조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마지막 장에 “선광 7년 정사 7월 청주목 외 흥덕사 주자인시”라고 찍혀 있다. 여기서 주자(鑄字)란 금속을 녹여 부은 활자라는 뜻으로 금속활자를 말한다. 이 기록은 1377년 7월 청주목 교외에 있는 흥덕사에서 주조한 활자로 인쇄하여 돌린다는 말이 된다. 둘째,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각 장을 세로 11줄로 고정시키고 한 줄에 대략 18자를 배열했는데, 행렬이 들쭉날쭉하고 삐뚤어져 있다. 그 중 어떤 글자는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고 아예 거꾸로 된 것도 있다. 또 인쇄된 글자의 먹 묻음이 고르지 않고 농담(濃淡)의 차이가 심하다. 어떤 글자는 시커멓게 찍혔는가 하면 획의 일부가 찍혀지지 않은 글자도 있다. 이런 현상은 목판본에서는 극히 드물지만 활자본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실제로 인쇄된 책이 말끔하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목판본과 활자본을 구별하는 열쇠가 된다. 목판본에서는 줄이 삐뚤어지거나 글자가 거꾸로 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활자의 배열과 먹의 농도 분석 등 과학적인 조사에 의해 이 불경을 식자하여 인쇄했음이 증명됐다. 즉 금속활자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특히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중요성은 책 말미에 흥덕사에서 인쇄했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적혀 있어 한국에서 제작된 것이라면 모두 중국인들이 만들어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학자들의 억지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찬자인 백운화상의 호는 백운(白雲)이며 법명은 경한(景閑)이다. 고려 충렬왕 24년(1289)에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출생하여, 공민왕 23년(1374)에 여주의 취암사(鷲巖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했다. 화상은 어려서 출가하여 불학(佛學)을 익히고 수도하는 데에만 전념하였고 후에 중국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의 석옥청공(石屋淸珙)화상으로부터 직접 심법(心法)을 전수 받았으며, 인도의 지공(指空) 화상에서도 직접 법(法)을 물어 도(道)를 깨달았다. 귀국한 뒤에는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1301∼1382)나 혜근 나옹화상(惠勤懶翁和尙, 1320∼1376)과 더불어 대선사(大禪師)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주된 내용은 '경덕전등록' '선문염송집' 등의 사전부(史傳部)의 여러 불서(佛書)를 섭렵하고 역대의 여러 불조사(諸佛祖師)의 게(偈), 송(頌), 찬(讚), 가(歌), 명(銘), 서(書), 법어(法語), 문답(問答) 중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것만을 초록(抄錄)하여 찬술(撰述)한 것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는 수신오도(修身悟道)의 명귀에서 채록한 것으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直視)하면,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학승(學僧)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학습서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흥덕사(興德寺)의 창건 연대와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청주시 운천동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북과 청동불발(靑銅佛鉢)에 ‘西原府 興德寺(서원부 흥덕사;서원은 신라 때 청주의 이름)’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운천동 일대가 바로 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흥덕사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옛 흥덕사지였던 청주시 운천동 866번지 일대는 현재 사적지 제315호로 지정되어 있고 40,990㎡의 부지에 80㎡의 금당이 복원되었으며,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개관되어 있다. <판정승을 거둔 불조직지심체요절> 원래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가 발명된 것은 불조직지심체요절보다 훨씬 빨랐다. 기록에 의하면 가장 먼저 금속 활자로 인쇄된 서적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다. 고려는 1234년 몽골이 침입하자 수도를 강화로 옮겨 외침에 대항하고 있을 때, 무신 정권의 제일인자인 중서령 최이가 1239년에 주자(鑄字)본, 즉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목판으로 복각한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이가 당시 전란으로 어지러워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목판으로 새겨 다량 보급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원래 주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이미 천도 이전에 수도 개경에서 찍어 낸 것으로 보이며, 최이가 이를 목판으로 다시 새긴 것을 보면 강화도로 피난할 때 미처 그 주자본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거나 찍은 지가 오래 되어 찾지 못한 것으로 추정한다. 금속활자로 발간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고려의 천도 이전에 이미 개경에서 금속활자의 발명이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해 주는 실증적인 사례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규보(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을 보면,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고금상정례문'(50권)을 금속활자로 28부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금상정례문은 고려 인종 때 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하여 50권으로 펴낸 국가의 전례서(典禮書)다. 이규보가 당시 실권자인 최이를 대신하여 쓴 이 문집의 발문을 보면 고금상정례문 50권이 세월이 지나면서 책장이 떨어지고 글자가 결실되어 주자로 재인쇄한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최이가 진양공에 책봉된 해가 1234년이고 이규보는 1241년에 사망했으므로 그사이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가 몽고와 전쟁을 계속하면서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긴 게 1232년이므로 이 책은 금속활자를 강화도로 옮겨 인쇄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규보의 글을 보면 주자의 사용이 그때가 처음이 아니라 상당히 오래 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금속활자가 12세기 이전에 발명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1102년부터 고려에서 고주법(鼓鑄法)으로 엽전을 주조했으므로 금속활자를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는 견해이다. 고주법은 ‘동철을 불리기 위하여 부채질로 불을 벌겋게 일으키는 것’이다. 글자가 있는 엽전을 주조해낼 수 있다면 활자도 당연히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으로 여러 정황상 많은 학자들이 이 시기에 금속활자가 만들어졌다는 데 동조한다. 그러나 어느 유물이든 세계 최초임을 인정받으려면 고난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불조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정받자 중국 학계에서는 북경도서관에 소장된 '어시책(御試策)'이 보다 오래된 동(銅)활자본이라고 주장했다. 어시책은 1315∼1333년에 실시된 원나라 과거에 합격한 진사들이 쓴 답안지 13편을 수록한 것으로 인쇄 시기는 1341∼1345년이 된다. 이 주장에 의하면 불조직지심체요절보다 32∼36년 앞선 것이 된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인쇄한 나라가 어디인가에 대한 설전은 이처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우리의 판정승으로 일단락되었다.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일본의 미쓰비시 그룹 정가당(靜嘉堂) 문고에 소장된 어시책의 원본을 확인한 결과 금속활자로 간행된 것이 아니라 1341년 6월에 중국 강서성의 유인초(劉仁初) 등에 의해 편찬된 목판본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일본도 '세계대백과사전'에 ‘12세기 말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세계 최고의 활판 인쇄이다’라고 인정했다. 한편 구텐베르크의 전문가인 존 맨은 그의 저서 '구텐베르크의 혁명, The Gutenberg revolution'에서 1234년 고려에서 편찬된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찍은 세계 최초의 인쇄라고 적었다. <한국의 보물이 프랑스로 가게 된 연유> 불조직지심체요절은 약 50〜100권을 인쇄해서 사찰과 불교계 인사들에게 배포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하권으로 나뉘어져 출간됐는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까지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콜렝 드 플랑시에 의해 프랑스에 건너갔다. 이 단원은 라경준 박사의 글을 주로 인용한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1개월 간 점거했던 강화성에서 철수하면서 관아에 불을 지르고 대량의 서적과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때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되었다. 프랑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서구 열강 중 가장 늦게 조선과 국교를 맺는데 콜렝 드 프랑시가 1888년 초대 한국 주재 대리공사로 임명되어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의 도자기와 고서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서기관으로 부임해 온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d)에게 서지 목록을 만들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에 체류하는 3년 동안 많은 양의 책을 수집해 프랑스로 보내기도 했다. 그 후 5년간 일본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파견되어 1896년부터 10년 간 총영사 겸 서울 주재 공사로 한국에 체류했다. 그는 고서적에 관심을 갖고 수집에 열중했는데 이때 그가 수집한 책이 바로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1책이다. 물론 그가 언제, 어떻게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손에 넣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모리스 쿠랑이 부임한 1894년부터 1896년 사이에 간행한 '한국서지'에는 불조직지심체요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드 플랑시가 제2차로 부임했을 때 입수한 것으로 추정한다. 드 플랑시는 임기를 마치면서 그 동안 수집했던 고서와 도자기들을 프랑스로 가지고 갔고 불조직지심체요절은 1911년 경매장에서 골동품 수집가인 베벨(Vebel)이 180프랑에 구입했다. 그 후 베벨의 유언에 따라 1950년 파리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단독 금고에 보관되고 있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하권은 3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 장은 없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고 있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998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신청을 했다. 그러나 불조직지심체요절은 199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최된 ‘제4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도 못했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한국에서 간행되기는 했지만, 보관은 프랑스에서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원산지와 소유국이 다르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 프랑스와 공동신청을 권유했는데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외규장각도서 반환 문제가 주된 이유였다. 청주시에서는 다행하게도 2001년 ‘제5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회의’를 유치했고 불조직지심체요절은 2001년 6월 청주에서 열린 제5차 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목판 인쇄물의 대명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인쇄기술은 세계적으로 목판, 목활자 인쇄를 걸쳐 금속활자 인쇄로 발전하였다. 이는 금속활자가 목판과 목활자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목판인쇄에서도 세계 최고의 자료를 갖고 있다. 목판인쇄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책판을 만드는 데 적합한 재질의 나무를 선택하여 베어내서 바닷물에 넣어 진을 빼고 판각하기 쉽게 결을 삭히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지역에 따라 바닷물 대신 민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바닷물에서 건져낸 목재는 적당한 크기와 두께로 자른 후 응달에서 건조시켜 나무가 뒤틀리는 것 등을 막는다. 목판을 만들기에 충분해 진 나무는 대패질로 반질하게 만든 후 새기고자하는 책의 본문을 쓴 종이를 나무판에 뒤집어 붙인 후 한자 한자 각필하여 목판을 완성한다. 이 목판 위에 인쇄용 잉크를 칠하고 종이를 덮어 인쇄하면 된다.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우리나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이다. 불국사 석가탑의 제2층 탑신부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04∼751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로 52센티미터, 세로 6.7센티미터 가량 되는 닥나무로 만든 종이를 12장 이어 찍은 약 7미터 정도 되는 두루마리 형식의 인쇄물인데, 각 행마다 일곱에서 아홉 자씩의 문자를 목판으로 인쇄했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목판 인쇄물로 알려진 것은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이 중국의 돈황에서 발견한 '금강반야바라밀경'(금강경)으로 발행 시기는 868년이며 왕개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인쇄한 것이다. 이 인쇄물에 비하면 석가탑에서 나온 목판 인쇄물은 120년 이상 앞선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도 776년에 인쇄하였다는 '백만탑다라니'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보다 최소한 20년이 늦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일본의 백만탑다라니에 비해 제작 연대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뛰어나다. 먼저 백만탑다라니는 목판에 문자를 새겨 날인한 것이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판목 전체에 글자를 새기고 종이를 얹어 인쇄한 본격적인 의미의 목판 인쇄이다. 또 백만탑다라니는 작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인쇄한 두루마리이며 조각기술 또한 정교하여 어느 목판 인쇄보다 아름답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보다 앞섰다는 것이 확인되자 1996년 12월 중국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낙양에서 인쇄된 뒤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중국 측은 그 근거로 690∼704년에 재위한 당나라 측천무후가 만든 한자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나타난 점을 들었다. 우리 학자들은 이에 대해 즉시 반론을 폈다. 박지선 교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종이가 신라 닥종이로 8세기 초의 중국 종이와 차이가 있음을 밝혔고, 김성수 교수는 경주 구황리 3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외함(舍利外函)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함께 안치했다’라고 새긴 글씨와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권미제(卷尾題 :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적은 글) 글씨에 필적 감정을 의뢰한 결과 동일한 사람이 썼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한편 박상국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704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되어 신라로 들어왔으며 석가탑의 다라니경은 751년 석가탑 건립을 계기로 간행했던 목판본이라고 주장했다. 불경 번역에 관한 내용을 담은 '개원석교록'에 의할 경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704년 인도 승려가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는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함 명문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붓으로 옮겨 적은 다라니경이 706년에 신라에 들어와 유통된 후 석가탑에 안치하기 위해 목판으로 인쇄했다고 발표했다. 중국학자들이 702년경에 중국에서 간행했다는 억지를 물리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 자료로 의미가 있다. 여하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어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인쇄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데에는 유물 도굴단이 큰 역할을 했다. 수사 기록에 의하면 네 명의 도굴단이 밤중에 불국사로 숨어들어가 탑의 옥개석을 들어내다가 체포되었는데 이때 그 속에 보관되어 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본으로 인정하더라도 우리나라가 목판 인쇄술을 처음으로 창안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천혜봉 교수는 동양 인쇄문화의 발달사적인 시각과 중국과의 문화 교섭사를 고려할 때 우리나라가 목판 인쇄술의 원조라는 주장에는 이견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현재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술에 의해 간행된 증거물이라 하여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목판 인쇄를 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주장 역시 우리 유산을 보다 객관적이고 정당하게 평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라경준 박사는 700년 경 중국에서 목판 인쇄가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목판 인쇄는 판을 만드는 데 노력이 많이 들고 오직 한 종류의 책만 찍을 수 있다는 결점을 갖고 있다. 더구나 부피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보관이 어려우며 잘못 보관하면 썩거나 닳고 부서진다. 그래서 목판 인쇄를 대체할 새로운 인쇄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북송의 필승(畢昇)은 11세기 중엽에 찰흙을 빚어 ‘교니활자’ 또는 ‘도활자’라는 것을 만들어 인쇄를 시도했다. 진흙활자는 흙에 아교를 섞어 다진 다음 그것을 깎아서 글자를 새기고 불에 구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목판을 대체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활자의 재료가 흙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활자의 내구성은 물론 판을 짤 때 쓰는 점착성 물질을 송진과 종이 태운 재를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응고력이 약해 인쇄 도중에 활자가 자주 움직이고 떨어져 실제 인쇄에 적용하는 데는 불편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필승이 흙활자로 인쇄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아무리 활자를 잘 만들었다 해도 흙으로 인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무활자가 등장한다. 당시에는 점착성 물질이 개발되지 않아 사용한 후 떼어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나뭇결의 조밀도 차이로 물에 젖으면 높고 낮음의 차이로 활자면이 고르지 않아 인쇄가 조잡하였다. 그러나 나무활자는 한번 판을 짜서 책을 찍은 후 다시 풀어서 필요할 때 다시 판을 짤 수 있다.을 조판할 때 나무활자는 갈라지거나 터지기 쉬운 결점이 있지만 그런대로 활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므로 적은 부수의 책을 여러 종류 찍을 때는 나무활자가 목판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나무활자는 고려시대에도 매우 넓게 보급되었는데 의천의 '석원사림' 250권이 목활자로 인쇄되어 1101∼1122년에 발간되었다. 이 목판본은 유럽보다 3백여 년 앞섰고 원나라의 양고가 만든 니활자, 왕정의 목활자보다도 백여 년 앞선 것이다. 나무활자는 그 편리성 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사용되었는데 조선 후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기간에도 양반 가문에서 개인 문집을 내거나 족보를 발간할 때 널리 쓰였다. 한편 중국에서도 목활자를 실용화했으나 그것은 한국보다 매우 늦은 시기에 도입되었다. 교니활자를 실용하려면 앞서 말한 문제들이 발생하므로 서적을 간행할 정도는 못되었는데 14세기 초 왕정에 의해 비로소 기술 개선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우선 평평한 판목을 만들고 거기에 인쇄에 적합한 목활자를 만들었다. 그는 또 ‘회전 활자대’라는 수많은 활자의 정리 도구를 만들어 식자에 편리하도록 정리했다. 이 방식으로 왕정은 1314년 무렵 6만여 자의 목활자를 만들어 지방의 소개서 100여 부를 인쇄했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금속활자가 개발되는데 금속활자가 발명된 직접적인 동기는 사회생활의 발전 때문이다. 고려의 경우 책의 수요가 많아졌는데, 이는 역으로 수많은 목활자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목활자는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활자가 닳거나 쪼개지므로 자연적으로 활자를 금속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계속) 05/4/22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세계기록유산,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과 금속활자 ② | ||||||||||||||||||||||||||||||||||||||||||||||||||||||||||||||||||||||||||||||||||||||||||
〈금속활자 발명의 필요충분조건〉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수요가 있다고 해서 금속활자가 발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속활자가 발명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금속 주조기술, 종이 생산과 인쇄용 잉크의 개발 등 관련 기술이 동시에 발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고려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우선 금속 주조기술은 고려 때에 한층 발달했다. 고려의 화폐 ‘해동통보’를 보면 모양이 바르고 글자가 뚜렷하며 고른데 화폐의 주조와 금속활자의 주조는 같은 기술이다. 고려에서 1097년에 화폐를 만드는 주전도감이 설치되었고, 해동통보는 1102년에 주조되었으므로 고려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기본 기술이 확립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엽전 주조 기술만 갖고 금속활자를 인쇄할 수는 없으므로 엽전이 금속활자를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여건 조성을 돕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라는 지적도 있다. 한편 종이에 관해서는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선진국이라는 것도 금속활자가 개발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원래 종이는 중국의 채륜이 서기 105년에 나무껍질, 마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하여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종이의 질은 우리나라가 우수했다. 질좋은 종이 생산·인쇄용 잉크가 뒷바침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종이의 명성은 조선으로까지 이어져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에 필수품으로 여겨졌다. 한지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중국인들은 이를 비단섬유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한지는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많이 강요되었다. 이 부분은 <「살아있는 종이 한지, 천년세월을 견디다」, 국정브리핑, 2004.12.19>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나 인쇄용 잉크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볼 때 목판이나 목활자 인쇄에 쓰는 잉크를 금속활자에 그대로 적용하면 인쇄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금속활자용 인쇄를 위해서는 종래의 잉크(먹) 성분 외에 기름 성분이 들어가야 한다. 여기에는 당시 고려의 먹이 세계적이었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먹은 그을음, 아교, 향료를 원료로 해서 만들어진다. 그을음은 소나무를 태운 송연과 기름을 태워 얻는 유연(기름이 불완전연소 할 때 생기는 탄소성분)두 가지를 사용하며, 아교는 그을음의 미립자를 서로 엉겨 붙게 하고 먹 형태를 고정시키며 종이에 배어들게 하는 구실을 한다. 향료는 아교 냄새를 없애기 위해 쓰인다. 고려의 먹 생산지로는 맹산, 영원, 순천, 단산(단양)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단산에서 나오는 먹은 그 빛이 까마귀처럼 새까맣고 질이 우수하여 ‘단산오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려는 송나라에 종이와 함께 먹도 많이 수출했다. 문종 34년(1080)에는 공무역으로 2천 폭의 종이와 4백 정의 먹을 수출하였으며 송나라 상인들이 고려에서 사간 물건 중에는 많은 백지와 송연목이 들어 있었다. 이렇듯 고려의 먹 제조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금속활자로 인쇄할 때의 잉크 문제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사실 중국에서는 14세기에도 잉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원나라 때에도 금속활자가 아닌 목활자로 인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술적 문제 외에 활자를 만드는 데도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활자를 주조할 때는 활자의 주형이 있어야 하고, 활자의 주형은 밀랍이나 나무에 글자를 새긴 활자의 모형을 이용하여 만든다. 합성밀랍을 구성하는 밀랍과 소나무 수지(樹脂)의 배합비율은 기후에 따라 다르다. 여름에는 형태가 변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겨울에는 반대로 너무 단단하지 않아야 한다. 여름에는 대략 30%, 겨울에는 20%의 합성수지를 배합시켜서 합성밀랍을 만든다. 또한 고인쇄술에서 목판의 재료는 주로 배나무, 대추나무, 박달나무, 감나무처럼 칼질하기 좋은 목재를 사용하지만, 활자의 목형으로는 매우 단단한 황양목(黃楊木)을 사용했다.
밀랍에 글자를 새긴 활자의 원형에 주형토(鑄型土)를 입혀 주형을 만들고 소성(燒成)한 후에 녹은 청동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방식을 ‘밀랍주조법(lost-wax casting)’라 부르고, 나무에 글자를 새긴 활자의 원형을 모래에 찍어 주형을 만들고 녹은 청동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방식을 ‘주물사주조법(green sand mould casting)’라 부른다. 주물사주조법을 ‘해포연니주형(海蒲軟泥鑄型)’ 방식이라고도 부르는데 해포연니는 열을 잘 분산시키고 기포를 흡수하는 장점을 갖고 있어 1밀리미터도 안 되는 가는 획도 깨끗하고 매끄럽게 제작할 수 있다. 글자모양 고르지 못한 '불조직지심체요절' 천혜봉 교수는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서지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본문의 활자는 중간 자와 작은 자의 2종이 만들어졌는데, 크기와 글자모양이 가지런하지 못하고 동일한 활자에 같은 모양의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활자를 만든 솜씨에 차이가 있으며 그중에는 글자 획에 칼자국의 흔적이 예리하게 나타난 글자도 있다. 이는 부족한 활자를 손쉽게 나무로 만들어 보충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둘째, 행렬이 곧바르지 않고 글자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것도 빈번히 나타난다. 또한 글자의 먹색에 진하고 희미한 차이가 심하게 나타난다. 셋째 인판(印版)의 네 모퉁이와 계선(界線)을 고착시킨 고정틀을 두 개 마련하여 번갈아 사용했다. 판의 반쪽은 11줄이지만 각 줄의 글자 수는 18〜20자로 1, 2자의 드나듦이 생긴다. 따라서 옆 줄이 맞지 않고 심한 경우에는 위아래 글자가 서로 엇물린 것도 있다. 학자들은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글자의 모양이 같은 판편에서는 다른 반면에 다른 판면에서는 같은 모양의 글자가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밀랍주조법의 서지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보아 밀랍주조법으로 주조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흥덕사자는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조잡한데 이것은 사찰 재래의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인식한다. 〈중단 없는 활자 개발〉 활자에 관한 한 선진국인 고려는 국제적으로 고금의 귀중한 서적들이 많은 나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책들을 수출했다. 송나라는 1091년 한 해에 120여 종 약 5000권의 희귀한 책을 고려에 주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연히 동시대 다른 국가보다 학문의 수준도 높았다. 서긍은 고려 서당교육의 발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거리와 마을에는 경관과 글방들이 두셋씩 보이며 백성들의 자제들,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나이가 들면 동무들과 함께 절간으로 가서 공부한다. 아주 어린아이들도 마을 선생에게서 배운다. 아, 훌륭하다. 고려인들은 글을 모르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영국의 J. 가레는 “우리 조상이 단 한 사람의 초서(14세기 영국의 문학자)를 갖고 있을 때 고려에는 문학자 대군이 있었으며 고려인들은 책을 숭상했다”고 적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의 해군장교 주베르는 “이곳에서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고백했을 정도이다. 인쇄 발전에 의한 서적의 보급은 992년에 국자감(성균관)을 탄생시켰다. 국자감에는 국자학, 대학, 사문학 등을 포함한 6개 학과가 있었는데 학생 정원은 각각 300명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전체 학생이 6천 명이 될 때도 있었다. 1109년에는 무관을 양성하는 학과도 설립되었다. 국자감은 잘 알려진 대로 세계 최초의 대학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랜 대학은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으로 창립 연도가 1119년경이며 프랑스의 파리 대학은 1150년경,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도 1209년경에 설립되었으니, 이들 대학보다 최소한 150년에서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 서적 인쇄의 시기가 훨씬 앞섰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태종 때 활자주조술 획기적 개선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보다 획기적으로 발전한다. 태종 3년(1403)에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널리 책을 읽어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바로잡아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의 바다 건너에 있어 중국 서적이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판목은 부서지기 쉽고 노동력이 많이 들며 많은 서적을 인쇄하는 것이 어렵다. 이제부터 동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고 널리 보급시키면 그 이득이 많을 것이다.”라는 어명을 받들어 활자 제작 및 출판 인쇄 기관으로 주자소가 설치되었다. 주자소는 설치되자마자 수개월에 걸쳐 금속활자를 주조했는데 이 활자가 유명한 계미자(癸未字)이다. 계미자본과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비교해보면 활자 주조술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불조직지심체요절』의 활자 제작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정제된 밀랍의 한쪽 면에 글자를 새기고, 도가니나 질그릇 만드는 찰흙을 잘 섞어 반죽한 것으로 덮어 씌워 주형을 만든 다음 구웠다. 이 주형에 쇳물을 붓고, 식으면 활자를 꺼내어 잘 다듬는데 이 방식은 주형을 구울 때 밀랍으로 만든 어미자가 녹아 없어지기 때문에 같은 글자의 활자라도 같은 모양이 나오지 않아 책으로 찍어낸 면의 글자들이 고르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반면에 계미자본에서는 바탕 글자를 쓰고 새겨서 부어내는 과정과 방법이 개량되어 활자가 비교적 고르고 동일한 글자의 모양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계미자 역시 글자체가 크고 거칠며 활자 아래의 끝이 뾰족하여 밀납 바탕에 활자를 꽃아 판을 짜야만 책장을 찍을 수 있었다. 인쇄과정에서 몇 장을 찍으면 활자가 흐트러져 인쇄를 멈추고, 활자를 바로잡기 위해 인판에 밀납을 수시로 녹여 붓고 식힌 다음 다시 인쇄해야 했으므로 인쇄량이 하루에 불과 몇 장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한 것이 세종 4년(1422)에 만들어진 경자자(庚子字)로 이천이 남급, 김익정, 정초 등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이다. 경자자는 계미자에 비해 글자가 작고 정교하며 조판용 동판과 활자를 평평하고 바르게 만들었다. 경자자에 이르러 인쇄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우선 조판 방법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금속활자로 판을 짜서 책을 찍는 방법에는 고착식과 조립식이 있다. 초기에는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거칠어, 밀랍과 같은 점착성 물질에 활자를 붙게 하여 인쇄하는 고착식을 사용했다. 이 경우는 네 모퉁이가 고정된 틀의 위ㆍ아래 변에 계선까지 붙인 인판틀을 마련하고 바닥에 밀랍을 깐 다음 그 위에 활자를 배열했다. 그 후 열을 가하여 밀랍을 녹이고, 위에서 판판한 철판으로 균등하게 눌러 활자 면을 평평하게 하여 식힌 다음 인쇄했다. 계미자는 끝을 송곳처럼 뾰족하게 개량하여 밀랍 속에 박아 움직이지 않게 했다. 갑인자는 활자 네 면을 판판하고 바르게 만들고, 인판틀도 판판하고 튼튼하게 잘 만들었기 때문에 판이 큰데도 불구하고 밀랍을 전혀 쓰지 않고 빈틈을 대나무나 파지 등으로 메우면서 조립식으로 판을 짜는데 성공했다. 물론 고착식과 조립식이 병용되어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밀랍은 참기름과 같은 반건성유와 피마자 기름과 같은 불건성유를 배합, 굳지 않게 하여 열을 전혀 가하지 않고 활자를 밀착시크는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천혜봉 교수는 설명했다. 인쇄할 때 밀랍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작업 능률도 크게 올랐다. 계미자는 하루 인출능력이 여러 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경자자는 이십여 장으로 늘어났다. 이후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갑인자를 개발했는데 이 부분은 <「이천(李蓚)은 다빈치에 비견되는 한국의 천재」, 국정브리핑, 2004.9.24>에서 설명했으므로 상술하지 않는다. 세종 18년 세계 처음 연 활자 주조 조선시대에 인쇄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것은 활자의 개량 때문만이 아니다. 금속활자 재료 자체의 개발을 시도해 세종 18년(1436)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연으로 활자를 주조했다. 인쇄 공업에서 사용되는 인쇄활자의 재료는 기본적으로 연합금이다. 아연에 주석과 안티몬을 넣지만 주성분이 아연이므로 보통 연합금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아연을 활자 재료로 선택했다는 것은 당시 기술자들이 아연이 갖고 있는 특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아연은 용융점이 327.4도로 매우 낮고 점성이 작으므로 유동성이 좋고 주물하는 데 용이하다. 특히 먹이나 잉크가 표면에 잘 녹는 장점이 있다. 이 세계 최초의 연활자를 병진자라 부르며 이것으로 사정전훈의 '자치통감강목'을 인쇄했다. 병진자에서 주목 할 만한 점은 큰 활자는 아연으로 만들고 작은 활자는 동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연활자의 경우 큰 활자는 인쇄과정에서 생기는 높은 압력이나 기계적인 힘에 잘 견딜 수 있으나 작은 활자인 경우에는 변형이 쉽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434년 갑인자는 구리 84%, 아연 3~7%, 납 5%, 무쇠 0.1%로 그 강도가 미국 해군의 대포에 사용되는 금속에 필적하였으며 1455년의 을해자는 구리 79.45%, 아연 2.30%, 주석 13.20%, 납 1.66%, 철 1.88%이다. 1677년의 현종실록자는 구리 64.7%, 아연 3.1%, 주석 18.4%, 납 4.4%, 철 2.1%이며 한구자에서는 구리 79.8%, 아연 1.4%, 주석 10.6%, 납 2.1%, 철 2.0%로 바뀐다. 전통적인 한국 청동의 구리와 주석의 비율은 75 : 25, 80 : 20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아연을 사용했다는 것은 한국의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보여준다. 세계 학계에서는 연활자를 현대 인쇄활자의 시조로 보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가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연활자의 발명국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조선의 인쇄술은 15세기에 이미 세계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일본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금속활자와 인쇄본들을 철저히 약탈했다. 1593년에는 '고문효경'을, 1614년에는 '대장일람'을 인쇄했는데 이때 조선에서 약탈한 금속활자 20여 만 개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활자본에는 오자나 탈자가 별로 없고 인쇄가 정교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감탄하는데 그것은 조선 정부가 활자 인쇄에 상당한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에는 활자 인쇄에 관계되는 교서관 소속의 장인과 인원수를 규정했다. 그런데 감인관, 창준, 수장, 균자장은 한 권에 한 자의 착오가 있으면 30대의 곤장을 맞고, 한 자가 더 틀릴 때마다 한 등씩 더 벌을 받았다. 인출장은 한 권에 한 자가 먹이 진하거나 희미한 자가 있을 때 30대의 곤장을 맞고, 한 자가 더 할 때마다 벌이 한 등을 더했다. 교서관원은 다섯 자 이상 틀렸을 때 파직되고, 창준 이하의 장인들은 곤장을 때린 뒤 50일의 근무 일자를 깎는 벌칙이 적용되었다. 이러한 엄격한 규칙을 세워 활자 인쇄에 임했으므로 조선이 활자 인쇄에 관한 한 세계적 수준이 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종교개혁 견인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세계를 변모시킨 구텐베르크의 활자> 금속활자라면 자연스럽게 구텐베르크가 만들었다는 금속활자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유럽의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는 오늘날의 현대문명이 태어날 수 있게 만든 격동기의 시대였다. 유럽의 서부 변방에 속하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대서양으로 진출하여 세계로 향하는 항로를 열었고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는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이 변화를 새로운 차원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사건이 바로 독일에서 불기 시작한 종교 개혁이다. 그런데 동 시대에서는 세계사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종교개혁을 이끈 견인차가 독일의 작은 도시인 마인츠 시에서 태어났다. 바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개발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종교개혁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당시의 사회상과도 연결된다. 구텐베르크가 태어날 때인 중세시대의 화두는 단연코 면죄부(일명 천당표)였다. 면죄부(indulgence, 영어 단어의 뜻으로 ‘제멋대로 함, 방종, 탐닉’도 있음)는 면죄부의 빈 공간에 이름과 날짜를 적고 어떤 선행(자선, 단식, 기도, 면죄부의 구입)을 하면 특정한 시기, 예를 들면 3달이나 1년 동안에 저지른 특정한 죄를 용서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증서의 구실을 했다. 기독교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중세시대 인들에게 면죄부의 효과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사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면죄부를 구입하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곧바로 천당을 갈 수 있다는데 면죄부를 사지 않는 바보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면죄부 발부에도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소위 죄인들로부터 돈을 받고 면죄부를 발급하는데 그런 막중한 용도의 면죄부를를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교회에 내는 액수에 따라 면죄 기간도 달라지므로 많은 돈을 내는 사람들에게는 적게 돈을 내는 사람들 것과는 차별화된 소위 보다 잘 만들고 화려한 면죄부를 주어야 했다. 문제는 면죄부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면죄부를 손으로 일일이 필사하여 준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면죄부 판매가 어찌나 잘되는지 면죄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지 않으면 그야말로 폭동이 날 지경이었다. 구텐베르크는 면죄부를 획기적으로 빠른 시간에 만들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텐베르크의 아이디어를 들은 요하네스 푸스트라는 변호사는 구텐베르크에게 금속활자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었고 구텐베르크는 1450년 동시대의 학생들에게 필수품이라고도 볼 수 있는 28쪽의 라틴어 표준문법서인 '도나투스(문법론)'를 1450년에 출간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가 폭발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세계정세에도 기인한다. 동구라파 쪽에서는 명맥만 유지되고 있던 기독교도인 동로마제국과 회교도인 투르크와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키프로스 섬을 지배하고 있던 장 드 뤼지냥이 투르크의 침략을 우려하여 1450년에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용병들을 고용할 돈을 약속했다. 수요 급증 면죄부 금속활자로 대량 인쇄 그런데 교황이 지원하겠다는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교황은 특수한 경우 예를 들면 성전을 치루는 십자군들이 상당한 돈을 지불할 경우 평생의 모든 죄를 사해주는 완전 면죄부도 발행하고 있었다. 교황은 1451년 8월, 키프로스 왕인 장 드 뤼지냥에게 향후 3년 간 완전 면죄부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면죄부를 팔아 돈을 모아 용병을 사서 투르크의 침략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키프로스의 왕은 두 명의 사절을 파견하여 돈을 모집하게 했다. 관건은 대량의 면죄부를 재빨리 만들어야만 용병을 살 수 있는 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였다. 1452년 5월 초, 쿠자누스 추기경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판매할 2000장의 면죄부를 준비하라고 했다. 이 당시 2000장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량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그들의 귀에 구텐베르크가 신속하게 면죄부를 찍을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가 만족할만하다는 것을 발견한 그들은 곧바로 구텐베르크에게 면죄부 발행을 주문했고 구텐베르크는 당시 자금난을 겪고 있던 차에 구세주를 만난 셈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동로마는 면죄부의 효과도 없이 1453년 5월에 투르크에게 함락됐다. 면죄부 판매에서 사업성을 확인한 구텐베르크는 면죄부보다 더 중요하고 많은 양의 인쇄가 요구되는 거대 시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성서의 출판이었다. 그러므로 구텐베르크는 많은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아름다운 성경을 만드는데 집착했다. 그것은 어떤 필경사도 따르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인쇄해야만 당시에 성경을 구입할 수 있는 왕이나 대주교에게 성서를 구매해달라고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구텐베르크가 180권의 성서를 찍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1454년에 그의 성서를 구입하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라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구텐베르크의 성공은 곧바로 전 유럽을 강타했고 금속활자가 발명된 지 불과 50년 만에 유럽 전역에 수백 군데의 인쇄소가 세워졌다. 이들은 모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성서를 찍기에도 바빴다. 구텐베르크 이전 유럽에서 서적은 지식권력의 상징이었다. 서적을 인쇄하기 이전의 책은 전부 필경사들이 필사작업을 거쳐 만들었기 때문에 서적은 매우 귀하고 책을 접하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로 한정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로 발간한 책이 등장하기 전 영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했다는 캔터베리대성당이 갖고 있는 책의 수는 2000권에 불과했고, 심지어 유명한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도서관 장서 수가 고작 300권이었음은 당시에 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중세시대를 그린 한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기 성에는 무려 20권의 책이 있다고 자랑할 정도로 책이 귀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1350년경 유럽에서 대학교가 각지에서 설립되자 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책이 필요했고 학생들도 책이 필요했다. 특히 부유한 귀족이나 상인들은 개인적인 예배에도 사제를 불러 집전케 했는데 이때 사제들은 가방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성경책이 필요했다. 갈수록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더욱 더 책의 수요는 늘어나기 시작했고 책을 만드는 업소는 황금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빠른 시간에 필사를 하다 보니 생산 속도가 느린 것은 물론 실수까지 나온다는 점이다. 실수는 필사를 할 때마다 점점 증가하여 나중에는 진리 자체를 침해할 수도 있었으므로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인간이 직접 책을 만드는 한 해결책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1300년경부터 목판 인쇄가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100년 후에는 동판을 이용한 삽화도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목판이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지만 목판인쇄는 필사보다 더 제작하기가 어려운데다 낡거나 부러지면 한 판 전체를 새로 깎아야만 했다. 그림을 위주로 한 동판인쇄를 사용한다 해도 난점은 해결되지 않았다. 책을 실수 없이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기법이야말로 당대의 사람들이 개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인쇄술이 폭발적으로 보급된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에도 있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마침 종교개혁이라는 주제가 불꽃같이 퍼져나가고 있었는데 종교개혁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주장을 일반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즉 홍보의 필요성이다. 인쇄기술 발달로 성서 보급 쉬워져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청이 속한 신부들이 타락했으므로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들은 성경을 읽어보면 가톨릭 신부들의 행태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타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성서를 볼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성서로 돌아가려면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정확한 내용을 들어야하는데 그들은 신부 등 교황청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가들은 그들이 개혁하려고 하는 교황청과 다른 생각을 전파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각 가정마다 성서를 한 권 정도는 비치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역으로 말한다면 종교개혁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개발하여 값싸게 성서를 보급하는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학자들의 지적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만 설명했는데 근래 학자들을 놀라게 할 주장이 제기 되었다. 유럽에서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사람은 구텐베르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시(市) 폴리테크닉 대학의 강사 브루노 파비안니는 이른바 '구텐베르크 성서(聖書)'가 금속 활자가 아닌 목판(木板)으로 인쇄된 것이라고 2004년 10월 주장했다. 파비안니는 그동안 수십 차례의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에 대해 독일 마인츠 시에 있는 구텐베르크 기념박물관 측에서는 펄쩍뛰며 구텐베르크 성서가 금속 활자로 인쇄된 것임은 명백하다고 반박했다. 벤츠 관장은 구텐베르크가 유럽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가라고 평가하는 근거는 현재 남아 전해지는 구텐베르크 성서를 보고 유추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성서를 관찰해보면 목판으로 스탬프 찍듯 한 것이 아니라 금속활자를 이용한 것임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도 구텐베르크에 대한 의문이 다소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불행하게도 구텐베르크가 당시에 사용했던 금속활자나 인쇄공장에 관한 문헌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 문명사에 획기적인 한 획을 그은 구텐베르크의 업적에 대한 논란은 차후 밝혀질 것으로 생각한다. 〈시대상에 충실했던 한국의 금속활자〉
구텐베르크의 폭발적인 보급과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한국인들이 다소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구텐베르크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인쇄술이 가장 먼저 발달하여 많은 책이 발간되고 또 외국에 수출되기도 했지만 정작 인쇄술의 주 목적인 정보화, 즉 문화 창달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지적 혁명과 문화적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적절히 이용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제일 먼저 지적되는 점은 당시 사용하던 글자인 한자가 알파벳이나 한글과는 달리 인쇄술의 덕을 크게 볼 수 없는 문자라는 것이다. 한자는 글자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모두 주조해 사용하기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간단하게 생각하여 26자 내외로 이루어진 라틴어 계열의 문자를 주조하기 위해서는 수십 개의 거푸집만 만들면 되지만 한자는 적어도 10만여 개의 거푸집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금속활자 책 수요 적어 빛 못봐 아울러 한자는 습득하기 어려운 문자이므로 일반 백성이 글을 익힐 수 없었다. 물론 세종 때 한글을 만들었지만 당시의 한글은 모든 국민 특히 지식인이 사용하는 글은 아니었다. 둘째는 책 발간의 목적이 국민을 계도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인쇄술을 발전시킨 근본 요인은 중요한 문서와 자료를 오래 보관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예를 들면 ‘다라니경’은 탑 속에 보관하기 위한 것이며, 대장경도 부처님의 말씀을 목판에 새겨 오래 간직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셋째는 대량의 금속활자는 만들어냈지만 실제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는 도구, 즉 인쇄 장치를 개발하는 데는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개발된 경자자의 경우 비로소 20여 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이처럼 활자를 활판에 고정시키는 프레스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인쇄 작업 자체를 기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요인이었다. 역으로 말하면 인쇄 작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활판에 활자를 고정시키는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금속활자가 우리나라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가장 큰 요인으로는 아무래도 책의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문이 많지 않았으므로 많은 책을 단시간 내에 찍어낼 필요성이 없었고 이것은 새로운 기술 개발에 대한 욕구를 잠재웠다. 반면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개발하자마자 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에 보다 빨리 책을 인쇄할 수 있는 인쇄기 개발에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어떤 발명품도 그것이 출현한 후 인간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어야만 그 효용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으면 곧바로 사장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금속활자는 우리의 자존심을 높이는 데는 큰 역할을 했지만 실제 인쇄물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역할은 다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금속활자가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발명되었다는 것만을 자랑할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보다 훨씬 후에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결국 현대와 같은 사회를 이룩해낸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비평 자체가 부당하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14~15세기에 해당하는 고려 말, 조선 초 우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지닌 사회적 배경과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던 유럽의 역사적 단계와는 판이하게 다르므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접근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금속활자를 이해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문중양 박사는 한국의 금속활자는 고려와 조선이라는 중세사회를 배경으로 등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지녔던 역사적 역할은 중세적이고 권위적인 지식의 몰락을 통한 근대사회의 도래와 자본주의적 서적의 간행과 대량 보급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중세 사회의 성숙한 유교문화를 꽃피우는 일이었다. 15세기 조선 정부는 중국에서 들여오는 서적의 대부분을 국가 정책적으로 대량 인쇄해 널리 보급했다. 중앙집권적 관료제 하에서 문민정치를 펼쳤던 중앙 정부와 관료들에게는 유교 지식으로 무장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므로 조선왕조는 민본적인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유교의 이념에 충실한 사대부들을 길러내는 교육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그 중심에 금속활자 인쇄술이 있었다. 중국 서적 인쇄 사대부 교육에 큰 역할 다시 말해서 15세기 중엽 근대화 과정에 있던 유럽 사회가 요구하던 역사적 역할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만족스럽게 해결해 주었던 것처럼, 한국의 금속활자도 고려와 조선왕조에서 나름대로 역사적 역할을 톡톡히 다 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금속활자의 인쇄가 서적의 자본주의적인 대량 생산과 유통을 낳지 않았다고 하여 한국인들의 정체성으로 몰아세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고려시대의 금속활자가 현물로 남아 있는 것은 매우 드물지만 1958년 고려 왕궁터인 만월대 권봉문 자리 서쪽으로 약 3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청동 활자가 발견됐다. 이 금속활자는 전(旃)자로 가로 12밀리미터, 세로 10밀리미터, 높이 8밀리미터이다. 개성의 무덤에서 출토된 또 다른 금속활자는 ‘복’자로 11밀리미터, 세로 10밀리미터이다. 활자의 주조방법이 미숙하여 활자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글자 획이 고르지 않으며 네 변의 길이가 앞뒤로 차이가 있어 관서에서 주조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주조한 것으로 천혜봉 교수는 추정했다. 활자의 뒷면이 타원형으로 움푹 파져 있는 것은 움푹 들어간 곳에 밀랍이 꽉 차서 굳어지면 인쇄 도중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의 소요량도 줄일 수 있다. 글자체는 충렬왕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송설체(松雪體) 계통이며 금속성분 분석에 의하면 구리 50.9, 아연 0.7, 주석 28.5, 납 10.2, 철 2.2 퍼센트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다른 활자들은 구리가 70〜87퍼센트, 주석이 4.0〜18.4 퍼센트인데 반하여 이 활자는 구리 50.9 퍼센트, 주석 성분이 28.5퍼센트로 특이하다. 이 활자의 금속 성분이 해동통보(海東通寶)와 유사하여 주조시기를 12세기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활자의 여러 가지 특징을 종합해 볼 때 고려 후기에 개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05/5/2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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