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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괴지도의 비밀[주간조선 03/8/7]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8. 15:00

 

 

한반도 괴지도의 비밀

 

우연히 접하게 된 구한말의 괴지도. 간도는 물론 만주 ~ 연해주 ~ 흑룡강성까지 조선의 영역으로 표기한 이 지도의 정체는?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가려졌던 한반도 국경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주간조선 2003.08.07. 1765호

 프롤로그

구한말 괴지도의 존재를 처음 알게된 것은 지난 7월 11일. 고종의 증손자이자 의친왕의 손자인 이초남씨의 입을 통해서였다. ‘마지막 황실’에 관해 이야기하던 이씨가 화제를 바꿔 “궁궐서 나온 지도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이경길 숙부(작고·의친왕의 여덟째 아들)로부터 한 장의 지도를 건네받았다”며 “(숙부께서) 돌아가시기 전, 내 손을 꼭 잡고 지도를 넘겨주면서 ‘소중히 보관하라’고 당부하셨다”고 말했다.

이초남씨는 이 지도에 관해 “북으로 만주와 길림성 일대는 물론 연해주와 흑룡강성 일부까지 조선 영역으로 표시한 귀중한 자료”라며 “이것은 만주 일대가 우리 땅이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도가 학계에 공개된 것이냐”는 질문에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 대흥안령 산맥서 본 만주벌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뉴스’였다. 물론 이 한 장의 지도가 ‘만주는 우리 땅’이란 물증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한반도 이남에 국한돼 있던 우리의 국토관을 만주 이북으로 넓힐 수 있는 ‘단초’는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의욕이 생겼다. 하지만 이 한 장의 ‘괴지도’로 인해 조선말~구한말에 얽힌 국사 공부를 다시 하게 될 줄은, 그 때까지만 해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괴지도’와의 만남

이초남씨를 두 번째로 만난 날은 장마 직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16일이었다. 이씨는 지도에 관해 “교황청에서 파견된 선교사가 조선에 교구를 세운 뒤, 그 내역을 바티칸으로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구를 표시하다보니 지도를 그리게 된 것이고, 지도를 그리다보니 조선의 영토를 표시하게 됐을 것”이라며 “이후 파견된 또 다른 선교사가 원본을 사필(寫筆)해 황실에 갔다 줬다”고 말했다. 이씨는 “따라서 지도 원본은 바티칸에 보관돼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의 필사본”이라고 주장했다.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은 이씨 증언의 사실 여부였다. 설사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 사실과 역사적 진실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문제는 또 있었다. 원본을 작성했다는 선교사의 ‘그림’을 100%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었다. 전문가의 감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먼저 문제의 지도를 확인해야 했다. “지도를 보고싶다”고 말하자 이초남씨는 “사본을 복사해 주겠다”고 했다. ‘먼저 실물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씨는 “지도를 보관해둔 장소가 경기도 용인”이라며 “시간이 촉박하면 또 다른 사본을 갖고 있는 사람과 만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시 지도를 사필해 온 선교사가 사본을 여러 장 갖고 왔다고 합니다. 황실을 통해 제게 전달된 것도 그 중 하나지요. 또 다른 한 장은 이종진 박사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박사는 치과의사이면서 동시에 ‘해외 한민족 연구소’ 이사로 있는 아마추어 사학자이자 지도 수집가입니다.”

야릇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그의 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종진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이초남씨도 자리를 함께 했다. 7월 18일 밤이었다.

 
확대되는 의문

 
▲ 흑룡강성 일대까지 조선의 영역으로 표기한 문제의 괴지도

문제의 괴지도 이름은 ‘조선말의 한국지도’였다.<사진1> 이 지도에는 ‘주후(主後;서기) 1824년 9월 9일(순조 24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이란 부제가 붙어있었다. 이종진 박사는 길이 80㎝ 가량의 지도를 실물크기로 복사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도는 만주뿐 아니라 연해주까지 조선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영역이 사실은 이렇게 광대한 것이었어요. 일제에 의해 우리 역사의 진실이 상당부분 가려져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를 보세요.” 이 박사는 지도 오른쪽에 붙어있는 해설을 가리켰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地圖는 VATICAN 政廳이 韓國에 있어서의 敎區의 管轄領域을 표시한 地圖이다. 本地圖는 PARIS에서 Societe des Mission Etrangeres가 發行한 Catholicism en Coree에 揭載하였던 實物大複寫?인 것이다.(1924)… 중략… VATICAN 政廳은 이 地域이 歷史的으로 長久한 기간 韓國民族이 居住해 왔으며 大韓帝國의 領土임이 명백하므로 朝鮮敎區로 대건교구·서울교구·원산교구(間島 吉林 CHIAMUSS KYUNGHUN 等地) 延吉 牧丹江北端은 하바로프스크(HABAROVSK) 接境까지 東界는 우스리江까지 西北界는 숭그리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東京韓國硏究院國境資料地圖K 1?) 明知大學校 出版部 複寫解說”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조선의 영토가 이러했다는 사실을 适ㅗ杉募?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지요.” 이 박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기자, 연해주 이북~흑룡강성 일대까지 조선의 영역으로 표기한 지도는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박사는 액자에 보관된 또 하나의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 보세요. 교황청 지도하고 같죠? 이 지도는 아까 지도보다 100여년 전인 1700년대에 제작된 것입니다. 이 지도도 흑룡강성 일대까지 조선의 땅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 <사진2>18세기 영국서 제작한 아시아전도.흑룡강성 일대를 조선에 포함시켰다.<사진3>1769년 프랑스에서 제작한 아시아지도.압록~두만강 이북의 간도 일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그렸다.<사진4>러시아에서 1854년에 제작한 아시아전도.만주 일부를 조선의 땅으로 표기했다.

이 박사가 보여준 지도<사진2>는 영문으로 된 고지도였다. 오른쪽 위에 별도의 명칭 없이 ‘Asia, T. Jeffery, Sculp’라고 적혀 있었다. T. Jeffery라는 사람이 작성한 아시아 지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위쪽 구석엔 170 degrees East Long from London이라 쓰여 있었다. ‘런던 동쪽 170도’라는 표기로 미뤄 영국서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도는 이 박사의 말처럼 지금의 흑룡강성 일대를 조선의 영역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동해를 ‘Sea of Coree’라 적은 점이었다. 이것은 당시 해양강국 영국서 이 바다를 ‘일본해(Sea of Japan)’가 아닌 ‘동해’로 불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게 원본입니까? 어디서 구하신 거죠?” 이 박사에게 물었다.

“영국 고물상을 통해 구한 것입니다. 입수 과정을 상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아주 귀중한 자료예요. 이 지도는 당시 서양 사람들도 만주 일대가 조선 땅이란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어때요? 흥미진진하죠?”

그랬다.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개운치가 않았다. 이초남씨나 이종진 박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역사책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된다. 현재의 한반도 영토는 조선 세종 때 ‘4군6진’을 개척하면서 경계가 이뤄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세종 이후 다시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는 기록은 나와있지 않다. 만주 일대가 조선의 땅이었다면 왕실은 마땅히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관리를 임명해 이 지역을 다스렸어야 한다. 하지만 조선이 만주 일대에 관리를 보낸 기록은 “1813년 어윤중을 서북경락사로 삼아 백두산 정계비를 조사하게 했다”는 것과 “1902년 이범윤을 관리사로 임명해 간도로 파견했다”는 것 정도다. 게다가 이범윤의 파견 목적은 영토 통치가 아니라 간도지방의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나타난 2장의 지도는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복잡했다. 우선 해야할 일은 ‘사실’을 밝히는 일이었다. 서둘러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간도’의 주인

가장 먼저 답을 준 사람은 “이 지도를 본 적 있다”는 동국대학 역사교육과의 임영정 교수였다. 임 교수는 “7~8년 전 이종진 박사를 만난 기억이 난다”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이 간도로 이주해 간 것은 1600년대부터입니다. 그 시기엔 영토관념이 희박해서 국경이란 것이 무의미 했었어요. 그러다 일본이 1909년(순종 3년) 9월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간도일대를 만주국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그 전에는 간도를 조선 땅으로 간주하고 있었어요. 이런 사실은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사다(朝田)란 일본인이 쓴 ‘간도 파출소 기요’란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고, 일제 때 일본 정보부나 일본 육군이 작성한 지도들도 북간도를 조선 영역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재미학자 유영박씨가 쓴 ‘녹둔도 연구’란 논문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녹둔도는 조선말까지 ‘경흥지방’에 속해 있던 두만강 하구의 섬으로 여진을 견제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홍수가 잦아지면서 토사가 쌓여 연해주와 연륙되자 영유권 문제가 발생했다. 1860년 청과 러시아는 당사자인 조선을 배제한 채 북경조약을 체결, 녹둔도를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켜버렸다.

하지만 임 교수는 문제의 ‘괴지도’에 관해서는 명쾌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흑룡강성 일부까지 조선의 영역으로 표시한 지도는 흔하지 않다”면서도 “(문제의 지도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의 답변을 구해야 했다. 지도 전문가인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교육연구관에게서 ‘괴지도’의 감정을 들은 것은 다음날인 7월 22일이었다. 이상태 교육연구관은 “당시 간도 지역은 주인없는 땅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국 입장에서 간도는 변방에 있는 척박한 땅으로, 일종의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땅이었지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 전까진 사람들의 의식상 만주를 조선의 땅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이 시기까지는 대부분의 지도가 만주를 조선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간도가 조선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두산 정계비(定界碑)란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경계비를 말한다. 이?계기로 조선과 청은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동쪽으로는 토문강(西爲鴨綠, 東爲土門)을 경계로 삼게 된다. 170년이 지난 1881년(고종 18년) 청은 간도개척에 착수했다. 조선은 1883년 어윤중·김우식을 보내 정계비를 조사한 뒤, 이중하·조창식 등을 보내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청은 “동쪽 경계로 삼은 ‘토문(土門)’은 두만(豆滿)강을 말한다”고 주장해 해결을 보지 못했다. 백두산 정계비는 만주사변 때 일제가 철거해 버렸다.

 
쏟아지는 기록들

“그런데 이 지도는 약간 이상하네요.” 이 연구관이 말을 이었다.

“조선 교구를 그렸다는 이 지도<사진1> 말이에요. 이것이 쓰여있는 대로 1824년에 나왔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에 교구가 세워진 것은 1830년대 일이거든요. 서울·원산 교구 등으로 나뉜 것은 1900년대 일이고요. 이 지도에는 경도와 위도가 표시돼 있는데, 경·위도가 나온 조선 지도는 1910년대에 등장합니다. 오른쪽 주해에 보면 이 지도에 대해 ‘파리 외방정교회(Societe des Mission Etrangeres)가 발행한 한국의 가톨릭(Catholicism en Coree)에 게재된 것’이라 설명하고, 괄호 안에 1924년이라 써 놨는데요. 1924년 지도라면 설명이 되지만, 1824년 것이라면 잘못된 겁니다.”

이 연구관은 말을 이었다. “국정홍보처가 영국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과 공동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조선의 영역을 압록·두만강 이북까지 그린 지도 37점이 대량 발견됐다는 사실이 보도(1999년 6월 26일)돼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만주가 우리 땅이란 의식은 ‘동국여지승람’ 전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양성지, 노사신 등의 학자는 ‘우리 국토가 (삼천리가 아니라) 만리(萬里)’라고 했고, 서거정은 고려 영토에 관해 ‘동북방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고구려 지역을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윤관이 두만강 건너 700리 선춘령에 9성을 쌓고, 그곳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비석을 세웠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있습니다. 만주를 우리 영역으로 그린 지도도 여러가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국보 248호인 ‘조선 방역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지도는 왜 당시의 영토를 한반도에 국한해서 그리고 있는 겁니까?”
“지도는 그리는 목적(교통지도, 등고선지도 등)에 따라 약간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그리는 지도라면 마땅히 당시 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그려야 하죠. 저도 그 점이 안타깝습니다.”

“언제부터 지금처럼 그리게 됐습니까?”

“우리나라에 근대적 개념의 지리부도가 들어온 것은 일제 때 일입니다. 값싸고 질좋은 지도책이 대량 유통되면서 재래식 전통지도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지요.”

 
‘괴지도’의 정체

괴지도를 갖고 있는 이종진 박사는 “조선말의 한국지도란 이름과 ‘주후(主後) 1824년 9월 9일(순조 24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이란 부제는 지도 입수 후 덧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지도는 1924년에 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지도의 진위 여부는 여전히 남은 숙제였다. 지도 전문가인 성신여대 양보경 교수에게 다시 감정을 의뢰했다.

“바티칸에서 작성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흑룡강성까지 한인이 이주해 있었다는 사실을 교황청에서 인정한 것이 됩니다. 조선의 영향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만주 일대가 조선의 행정구역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교구를 그린 지도가 국경을 바르게 표현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그렸다는 세계지도<사진2> 말이에요. 당시 서양 고지도는 국경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드물어요. 이 지도의 경우, 지금 상태로 봐서는 이 경계가 국경인지 하천인지 불분명합니다.”

‘조선말의 한국지도’에 해설을 붙인 것으로 돼 있는 명지대 출판부의 답변은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관련 자료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괴지도’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한국교회사연구소를 통해서였다. 지도를 검토한 연구소의 최기영 실장은 “이 지도는 1924년 파리 외방정교회가 영문·불문판으로 발행한 것”이라며 “한국의 가톨릭(Catholicism en Coree)이란 인쇄물에 별지로 들어가 있던 지도”라고 말했다. 최 실장은 “원본은 흑룡강성 부분이 지도 오른편에 별도로 붙어있었다”며 “이 사본은 누군가가 그것을 지리적 위치에 맞게 잘라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괴지도의 정체는 ‘유사복제품’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개운치 못한 것은 여전했다. 간도를 조선땅으로 그린 수많은 지도들, 국보인 조선방역도, 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의 기록들, 윤관이 쌓았다는 선춘령,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비석…. 이 유물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잃어버린 역사

문제는 1712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였다. 청을 세운 만주족은 자신들의 시조가 백두산에서 비롯됐다고 여겼다. 그들은 백두遠?장백산이라 부르며 신성시했고, 한족이 만주 일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른바 ‘봉금(封禁)정책’을 편 것이다. 하지만 이민족의 유입은 계속됐다. 농지 등과 관련된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712년(숙종 38년) 5월, 강희제는 국경을 명백히 하려는 목적으로 ‘오라총관’ 목극등을 파견했다. 오라(烏刺)란 만주 일대를 일컫던 당시 표현이다. 조선은 참판 박권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해 일을 처리하게 했다. 하지만 목극등은 “100리가 넘는 산길을 노인이 가기 어렵다”며 박권을 따돌린 채, 군관 이의복 등 조선의 하급관리만을 동행해 정계비를 세운다. 이때 새겨진 비문이 유명한 ‘서쪽은 압록을, 동쪽은 토문을 경계로 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 양측은 ‘토문’의 해석을 놓고 ‘두만강이냐,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냐’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송화강 지류로 국경이 설정될 경우, 만주 일대는 물론 흑룡강성 일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 한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논란을 거듭하던 한·중 국경문제에 끼어든 ‘이방인’은 일본이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이같은 사실은 외교부가 1996년 1월 15일 공개한 ‘외교문서 251건’에 포함된 ‘간도문제와 그 문제점’이란 비밀해제 문서를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이 보고서는 일본이 ‘간도지방이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전제로 정책을 폈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일본이 남만주 철도의 안봉선 개축문제로 이해가 대립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간도를 희생시켰음’을 확인해줬다.

‘간도협약의 법적 지위’를 연구하는 인천대학 노영돈 교수(국제법)는 “협약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한다. 노 교수는 “을사조약은 말 그대로 ‘보호조약’의 성격을 갖고 있다”며 “따라서 조선 국익에 저해되는 행위는 조약이 명시한 일제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간도협약은 조약 체결권자인 대한제국 황제의 비준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카이로·포츠담 선언, 샌프란시스코 조약 등을 통해 일제가 식민지에서 처리한 모든 조약이 무효화 됐습니다. 그런데 유독 간도협약 만큼은 예외로 있는 것이지요.”

노 교수는 “국제법 이론상 통상적으로 100년 이상 어떤 지역을 점유하면 점유지에 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준을 어느 시기로 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1909년 간도협약을 기준시점으로 삼을 경우, 2009년이 되면 간도의 영유권은 중국으로 영구히 넘어갈 가능성이 있게 된다. 6년이 채 남지 않은 것이다.

“언론이나 학계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 없습니다. 정부가 외교채널을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힘겹게 중국과 수교를 맺었는데 굳이 관계를 불편하게 할 것 있냐’면서 간도 문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노 교수는 “우리 정부는 역대로 역사나 주권, 영토에 관한 문제에 너무 무심했다”며 “중국은 간도에 관한 한국 내 연구상황을 정기적으로 파악,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국경문제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연구관도 “중국은 사회과학원 안에 ‘변방사문제연구소’를 설치, 한·중 국경문제를 심도있게 살피고 있다”며 “한반도 통일 후 생길 수 있는 영토분쟁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방사회복지회의 김득황 이사장은 “1906~1907년 일제 통감부의 사이토 중장이 간도를 답사, 그곳이 조선 땅임을 인정한 바 있다”며 “일제도 인정했던 조선의 영토를 후손인 우리가 외면해서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에필로그

1. 간도의 경제적 가치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조사된 것이 드물다. 막대한 삼림과 농토, 매장된 지하자원 등으로 가치를 추정할 뿐이다. 일부에서는 유전이나 가스전 등의 매장 가능성을 점치고 있기도 하다.

2. 간도에 관한 역사적 증거물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백두산 정계비는 일제가 1900년대에 철거했고, 윤관이 두만강 건너 700리에 세웠다는 ‘고려지경’도 사라지고 말았다. 언제 누가 훼손했는지,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9성의 위치에 관해서도 ‘두만강 이북까지 갔다’는 주장과 ‘함경도지역이었다’는 주장만 팽팽할 뿐, 정확한 사실(史實)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 <사진5>1850년 독일서 제작한 동아시아 전도,만주 일부를 조선영역으로그렸다.<사진6>프랑스에서 제작한 아시아지도,요동일대를 조선의 영역으로 표시하고 있다.<사진7>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이 1737년 제작한 조선왕국전도,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를 조선의 영역으로 그렸다.

3. 간도가 ‘우리 영역’임을 나타낸 지도는 1737년 프랑스 지리연구가 당빌(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 전도’<사진7>, 청나라가 8년의 측량을 거쳐 1716년에 완성한 ‘황여전람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한중삼국접양지도’, 규장각에 보관된 ‘천하총도오라지도 ’ 대한제국이 작성한 ‘대한신지지’, ‘서북피아만리지도’, 국보 248호인 ‘조선방역도’, 1769년 프랑스가 제작한 ‘아시아 지도’<사진3>, 1854년 러시아가 만든 ‘아시아 전도’<사진4>, 1850년 독일이 제작한 ‘동아시아 전도’<사진5>, 제작 연대 미상의 프랑스판 ‘아시아지도’ <사진6> 등이 다수가 남아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
bomb@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