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家의 성공과 저주
오늘, 11월22일(미국시간), 은 존 F. 케네디(JFK) 대통령이 세상을 뜬지 42주년 되는 날이다. 그동안 그의 죽음에 대하여 무수한 추측이 있었지만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워런 커미셔너(Warren Commissioner) 발표를 그대로 믿는가 하면 영화 "JFK"의 내용을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워런 커미셔너는 국가의 비극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 위해 리 하비 오스월드(Leee Harvey Oswald)가 독단적으로 암살한 것으로 말하며 사실 확대를 경계하고 있고, “JFK" 영화를 제작한 올리버 스톤은 미국 정부 내의 극우주의자들이 대통령을 암살하고 전쟁을 계획적이며 주기적으로 획책해 국방산업체를 살리려는 목적과 함께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이루기 위해 대통령을 죽였다는 주장을 한다.
난 지난 십수년간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책을 읽어본 결과 JFK의 진짜 암살범은 리 하비 오스월드가 죽인 것도 아니고, 또 CIA가 주도해서 대통령을 암살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CIA가 어느 정도 암살 음모를 알고 방조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FBI도 이런 낌세 눈치 챘지만 방조한 증거가 여기저기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올리버 스톤은 대통령을 바로 ‘미국 정부’가 죽였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우선 미국 정보망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미국내는 FBI가 전담한다. 국외의 정보망은 외형적으로 CIA가 전담한다. 물론 NSC도 하며 육군, 해군, 공군 등등의 기관에서 따로 정보를 수집한다. 이런 이유로 미국내에서 CIA가 정치인이나 연예인에 대한 도청을 하면 FBI가 영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가만두지 않는다. 때문에 CIA가 미국내에서 첩보와 도청활동을 하여 국가전복의 음모를 폈다는 올리버 스톤의 소설적 "JFK" 영화 내용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대통령 암살범이 오스월드가 아닌 다른 조직체가 개입이라는 것이다. 난 이런 측면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노력했는데, 그 암살의 주범은 다름 아닌 케네디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 공신 중의 하나인 ‘마피아’ 라는 사실이다.
A. 마피아의 케네디 대통령 암살 계획과 실행
마피아가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주도했다는 내용은 오래 전 몇몇 책과 언론사를 통해서 밝혀진 바 있다. 이미 이런 주장을 심각하게 제기한 책은 24년 전 G. Robert Blakey and Richard N. Billings가 저술한 ”Fatal Hour" 책에도 나온다. 1993년도엔 John H. Davis가 “Kennedy Contract" 책을 통해 모든 사실을 더 자세하고 콘사이스하게 말한 바 있다. 다른 책을 통해 ”마피아“가 JFK를 암살했다는 내용이 있지만 이들 두 책이 정황에 맞는 가장 신빙성 있는 주장을 했고, 특히 ”The Kennedy Contract"은 비교적 늦게 나온 책이라 모든 내용을 명료하고 짜임세 있는 책 내용을 구성하여 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할 수밖에 없는 일을 저질렀고, 또 왜 그들(마피아)의 총탄에 세상을 뜰 수밖에 없었는가를 리얼하게 묘사하는 바 있어 책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중심으로 “케네디家의 성공과 저주” 라는 제목의 짧은 글로 케네디 대통령 암살 42주년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11-13년 전에 읽으며 그었던 밑줄을 다시 읽었답니다
마침 지난 10월 초 시카고의 마피아 보스 샘 지앙카나 후손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바로 마피아 보스 ‘샘 지앙카나’가 주도하여 암살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새로 출간된 책을 통해서 자세히 밝힐 것으로 말한 바 있어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JFK의 암살범은 “마피아”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게 대세로 보이고 있다.
B. 케네디의 계약 파기가 부른 결과
이 의문에 대해서 “인과응보”를 생각해 봤다. 케네디 가의 부(富) 축적은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조셉 P. 케네디의 상상할 수 없는 비윤리적 방법으로 축재로 이룰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범죄 집단 ‘마피아’를 끌어들여 부와 명성을 동시에 쌓은 내력 세상은 다 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오르자 케네디 대통령 아버지 죠셉 P.케네디는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F. 케네디(RFK)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해야한다는 천명(?)을 내려 로버트 케네디가 법무무 장관에 오르자마자 CIA와 군부의 도움으로 피그만(Bay of Pigs) 침공 작전으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대통령 제거작업에 들어감과 동시에 범죄조직 마피아 소탕작전에 돌입했다.
피그만 침공은 실패하여 114명의 전사자를 내고 약 1,100여명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이를 수행한 조직은 ‘마피아’도 끼었다. 이를 계기로 로버트 케네디는 카스트로 암살 계획에 들어가는데 이 또한 “마피아”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이때 시카고 마피아 보스 ‘샘 지앙카나’와 타 구역 보스 ‘쟈니 로살리’가 깊이 개입한다. 또 마피아와 음으로 양으로 관련이 깊은 노조협회장 ‘지미 호파’도 개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마피아를 케네디 행정부가 이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손은 로버트 케네디 지휘 하의 법무부는 마피아의 완전 무력화를 꾀한다. 즉 마피아를 이용할 대로 이용하여 이용가치가 끝나면 마피아도 없앤다는 계획이었는데, 이 양다리 전략이 훗날 케네디家의 최악의 저주를 불렀던 일으켰던 계기가 될 줄 케네디 형제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쿠바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
마피아가 정부의 일에 개입되기 시작한 때는 케네디의 전 행정부였던 아이젠하워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왜 마피아의 개입이 시작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내 추측으로는 아마 카스트로가 혁명으로 쿠바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기 전 쿠바 내의 카지노 비즈니스에 마피아가 깊이 개입되었던 것을 이용하여 미국정부가 쉽게 카스트로 정부를 재전복시키려는 음모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즉 공산정권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시키면 마피아의 마약과 카지노 이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미국정부의 언질이 있어서 마피아가 개입하여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을 시도했을 가능서이 높다는 말이다.
C. 케네디家의 마피아에 대한 배은망덕(?)
이들의 계획은 다 수포로 돌아갔다. “피그만 침공” 실패가 실패의 정점이었다. 수포로 돌아가니 마피아의 케네디 정부에 대한 원망이 들었고, 그 원망 감을 감추지 못하니 케네디 정부의 탄생에 대한 수훈을 생각하며 음으로 케네디 형제들과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까지 은근슬쩍 협박하는 발언을 토로한 것 같다. 즉 ‘너희들이 정권을 잡은 것은 바로 우리 “마피아”의 공이 있어서 가능했는데, 우리를 이렇게 푸대접할 수 있나’라는 생각 아래 케네디家의 비리를 폭로로 다 된 밥상에 재를 뿌릴 수 있다는 행동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케네디 형제는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범죄 집단 소탕을 선언한다. “마피아”가 주 타깃이 되었다. 이에 각 구역의 마피아 보스들은 격노하게 되었고, 마피아 보스 지앙카나(Giancana), 마셀로(Marcello), 트라피칸테(Trafficante), 그리고 호파(Hoffa) 등이 의기투합하여 케네디 제거작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92년1월14일 New York Post는 흥미 있는 기사를 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제안은 지미 호파(Jimmy Hoffa)에 의해 이뤄졌고, 그의 부탁을 받았던 사람들은 미남부 마피아 보스였던 ‘트라피칸테’와 ‘마셀로’였다는 것. 이런 사실이 밝혀진 것은 프랭크 로가로(Frank Rogano)라는 변호사에 의해 밝혀졌는데, 프랭크 로가노는 트래피칸테의 고문변호사로 27년간 일한 바 있고, 또 지미 호파의 변호사로서도 15년간 일한 바 있다. 때문에 그의 주장은 매우 신빙성 있는 주장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의 주장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음모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면 로가노 변호사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은 알지 못했고 오직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만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암살 사건 수십 년이 지난 오늘 날에 와서 모든 사건을 재구성해서 보면 마피아가 케네디 형제들로부터 받은 따돌림과 무시함이 모든 마피아 구역 두목들이 의기투합하게 만들었고, 그 과정에 '샘 지앙카나'가 거사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D. 美정보부가 이미 알고 있었던 대통령 암살 계획
이런 일 미중앙정보국 CIA도 이런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증거가 나오고 있다. 그 첫째 이유가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제거하기 위해 CIA는 마피아와 함께 일하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정보수집의 달인인 CIA가 그런 낌세를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된다. 때문에 마피아 보스들이 케네디 대통령 제거작업을 몰랐다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FBI 역시 이들의 움직임을 몰랐다 말할 수 없다. FBI는 이들을 항시 감시하는 체제로 일상 일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특히 FBI 후버 국장은 이들의 동태를 잘 알아야 대통령과 맞장을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일급정보에 속하는 마피아 보스들의 동태상황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있었다.
E. 정보부의 암살계획 방조는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때문
그럼 왜 CIA와 FBI는 이들의 암살음모를 모른 척 하고 있었을까? 국가정보기관이 대통령 암살을 모른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직무유기에 공모자가 될 수 있는 엄청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대처하지 않았다는 것은 CIA와 FBI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그리 달갑지 않은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앞으로 더 언급할 것이지만,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당선된 캐톨릭 출신 대통령이다.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우선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백그라운드가 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캐톨릭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받았던 따돌림과 멸시는 상상 외로 컸다고 케네디 대통령 아버지 죠셉 P. 케네디는 곧잘 말한 바 있다. 아마 이런 점 유무형으로 CIA, FBI, 군부에서도 작용한 점이 없지 않아 있었고, 또 냉전으로 미소(美蘇)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에 미국의 국력으로 소련을 제압할 수 있는데 강하게 나가지 않고 나약함을 보이는 유연으로 대처함으로서 공산 카스트로 정권 제거작업이 실패로 끝났다고 믿는 군부의 입김으로 인하여 케네디의 내적 지지기반이 붕괴되었던 것 같다. 이에 CIA/FBI 방조 아래 마피아가 “힛맨(Hit Men)”으로 나섰으며, 그들이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 계획을 철저히 짜고 암살하고도 그 사건 자체가 ‘오스월드 단독범행’으로 굳혀질 수 있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할 말이 너무 많다. 1970년대 노조의 우상 ‘지미 호파’도 개입되었고, 또 그 자신도 쥐도 새로 모르게 결국 암살되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일이 벌어져 별의별 추측을 다 낳게 한 일도 있다. 어떤 루머는 그의 시체는 뉴저지의 ‘자이언스 구장’ 스탠드의 시멘트에 뭉개져 묻혀있다는 말도 있다.
F. 너무 많이 알고 가벼운 입놀림으로 개죽음 자초한 ‘호파’
실제 인물 "지미 호파" (좌), 영화 "Hoffa" (우)
그럼 ‘왜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개입한 지미 호파도 암살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내 생각엔 아마 마피아 권력다툼에서 하지 않아야할 말을 지미 호파가 말했던 것 같다. 즉 케네디 대통령 암살 건을 들고 나와 타 구역의 마피아 보스들의 심기를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물론 영화 “Hoffa"에서는 그런 내용 없다. 다른 측면의 암투를 놓고 지미 호파가 제거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난 말한다. 지미 호파의 죽음은 결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G. "케네디 다이너스티”의 주역 죠셉 P. 케네디
미국의 근대 정치사(政治史)는 케네디家의 독점 무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케네디가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 최고의 정점은 JFK(John F. Kennedy)가 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부터 시작됐고, 지금도 그 영향력 무시 못 한다. 특히 민주당 내에서 더더욱 그렇다.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조셉 P. 케네디(Joseph Patrick Kennedy)의 야망과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약 아버지의 야망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케네디가 명성은 애초 생길 수도 없었고 케네디가의 전설은 만들어질 수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 아니다. 즉 케네디 가의 미국 정치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전설은 아버지 조셉 P. 케네디가 있어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단언을 쉽게 내릴 수 있다.
케네디 다이너스티를 건설한 "Joseph P. Kennedy"
그러나 이 말은 또 만약 아버지 조셉 케네디의 과도(?)한 정치 야망이 없었으면 아들들의 재앙도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케 한다. 정치를 했기 때문에 정적(政敵)을 만들었고, 정적은 자신들의 생명과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차례로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정치했다고 죽음을 불러 일으켰다는 결론이 내릴 수 있다는 말이 되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지 않다. 이유는 현존의 정치인들이 죽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의 정치인의 길을 잘 걷고 있는 사실을 보면 정치한다고 목숨까지 잃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H. 마피아로 연계된 케네디 여성편력
그러나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만들어진 과정,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한 집착, 또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힘쓴 범죄 집단 마피아와 연계를 같이한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헐리우드 수퍼스타의 연루 된 과정을 보면 케네디 대통령의 정적(政敵)은 동서 냉전의 이데올로기나 방산업체에 관련된 이권에 얽힌 내용이 아닌 단순한 정치적 정적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만든다.
미국의 1960년대 당대 최고 가 수 프랭크 시나트라는 그동안 “마피아”와의 연계되어 있다는 소문이 그가 죽는 날까지 끊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외형상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수와 영화인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그가 가는 곳곳엔 인파가 줄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성공 배경엔 ‘마피아’의 입김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풍문을 그에 대하여 약간의 관심있는 세인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그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게 문제로 나타난다. 하지만 풍문을 떠나 그의 행적을 보면 그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순이-우디 앨런의 밀애” 비슷한 제목의 글을 통하여 밝힐 예정입니다. 우디 앨런의 부인 미아 패로의 전 남편이 프랭크 시나트라 였는데,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때 더 자세히 밝힐 수 있게 됩니다.)
한때 헐리우드 연예계의 대부로 불렸던 "프랭크 시나트라"
케네디 형제들은 ‘프랭크 시나트라’를 영향력 있는 인물로 생각하여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했다. 사실 프랭크 시나트라는 그의 챠밍한 남성적 매너로 수많은 인파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인물이다. 그는 훗날 케네디 대통령이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이 ”섹시함“이 듬뿍 가미된 여자라는 것을 케네디 대통령 입맛에 맞는 여성을 제공하여 프랭크 시나트라는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영향력은 더 커져 1960년대 헐리우드 연예계에서 대부(大父) 급에 가까운 인물로 오른 사람이 된다.
I. 케네디 대통령 아버지의 성공 가도
그럼 왜 케네디 대통령이 사회적으로 명망의 대상에 들지 않은 헐리우드 여배우들을 그렇게 좋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그 이유는 아버지 죠셉 P. 케네디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죠셉 케네디는 1888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이리쉬 후손으로써 캐톨릭 집안 자손이다.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종교적으로 우선 청교도(protestant)가 되어야 하는데 캐톨릭이라 자라면서 종교적 차별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그는 말 수완이 좋아 파퓰러 했고 그런 후광으로 하버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부는 당시 보통 수준인 C와 D 학점을 주로 받았다.
성적이 어떻든 간에 일단 ‘하버드’ 간판만 달면 그래도 사회적으로 알아줄 수 있는 인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올라가면 갈수록 더더욱 높은 차별의 장벽을 느낄 수 있었다. 즉 청교도 주류 사회는 케네디 가를 “졸부”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도 죠셉 P. 케네디는 그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약재로 “돈”이 최고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케네디는 더더욱 돈 벌기로 성공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는데, 그 꿈은 약관 25세에 은행을 거머쥐는 프레시덴트가 되는 계기로 자신을 차별한 사람들을 서서히 따돌리는 기회로 이용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여인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다 당시 보스턴 시장의 딸 Rose Fitgerald와 결혼하는 행운까지 잡는다.
J. 케네디 아버지의 영화제작과 헐리우드 스타와의 바람기
하이소사이티의 주멤버로 오른 죠셉 케네디는 이때부터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들에게 시선을 끊이지 않고 보내기 시작한다. 비록 결혼했지만 아직 젊고, 돈 많고, 거기에 잘 생긴 외모가 뒷받침하니 여자들은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보스턴 여자들은 젊잖게 잘 생겼는지 몰라도 그리 섹시한 맛은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 그렇듯이 섹시함과 브레인은 반비례한다. 보스턴 여자들도 예외 아니었다. 자연히 죠셉 케네디의 눈길은 섹시한 여인들이 많은 헐리우드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배운 것은 별로 없는 여자들이 대부분인 곳이지만 섹시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이 바로 헐리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헐리우드 여자를 단순히 명성과 돈으로 직접 접근할 수 없었다. 신분의 벽이 자리 잡고 있어서다. 격식과 수준 차이가 나는 여자에게 돈만 갖고 접근한다는 것도 보스턴 신사(?)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안 죠셉 P. 케네디는 영화제작을 이유로 여인들에게 접근하는 기발한 방법을 썼다. 영화제작자의 명함을 들고 나서면 섹시한 여배우들이 자연이 자기 옆으로 다가올 것으로 계산한 것이다. 죠셉 케네디의 헐리우드 여자 헌팅은 이렇게 이뤄졌고 유혹의 가든 입성에 성공한다.
K. 1920년대의 ‘마를린 몬로’였던 “글로리아 스완슨”과의 염문
1926년, 마침 부인과의 관계가 좀 소원해짐을 이유로 하여 죠셉 케네디는 서부 로스앤젤레스로 몸을 옮긴다. 이사 후 친구에게 “This place is a gold mine."이라는 말로 금광을 찾았다고 자랑하기까지 이르고, 1920년대 당시 최고의 헐리우드 섹시 스타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된다. 글로리아 스완슨은 죠셉 케네디 부인 로즈와 완전히 달랐다. 부인은 거의 해마다 애를 낳아(자녀 아홉 명) ‘여인’으로서의 섹시함을 찾을 수 없었다. 반면 스완슨은 몸매에 있어서 섹시했다. 거기에 당시에 여자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진보적 섹스관으로 침실에서 죠셉 케네디를 완전히 사로잡으니 ‘이게 회춘이로구나....’하는 생각으로 부인을 더 등한시 하게 만든다. 죠셉 케네디는 바람피우는 도에 있어서도 이렇게 자기의 부와 명성에 걸맞게 피웠다.
1920년대의 "마를린 몬로"로 불리던 Gloria Swanson, JFK 아버지 죠셉 P. 케네디와 열애를 했다
이때 죠셉 케네디가 피운 바람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훗날 플레이보이의 거장 휴 헤프너 보다 더한 ‘끼’를 발휘했을 정도라는 풍문이 그의 여성 편력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상상하고도 남게 만든다.
케네디의 한 친구는 그의 여성 편력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He consumed them(women) like food." 여자를 음식 먹어 치우듯 대했다는 말이다. 죠셉 P. 케네디가 이 정도로 여자를 탐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최고의 사업과 자식 농사로 성공을 거두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데, 이게 저주 함정의 덫이 될 줄은 꿈에도 꾸지 못한다.
L. 영화 제작자로도 부를 축적
아무튼 죠셉 P. 케네디는 글로리아 스완슨을 통해서 영화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글로리아 스완슨은 이미 이혼을 몇 번 했던 터라 남자를 통한 처세술 또한 경지에 다다른 실력을 발휘하여 죠셉 케네디의 사업에 수훈을 세운다. 그녀는 연예계 경력과 재능을 백분 발휘하여 저비용 영화를 제작하는 데 큰 몫을 하고, 그 결과 이미 거대한 부를 축적해 놓은 죠셉 케네디에게 더 큰 부의 선물을 선사한다. 이를 계기로 죠셉 P. 케네디는 훗날 아들들을 미국 정치사에 있어서의 ‘케네디 왕조’를 건설하는 데 적지 않은 힘이 된다. 그리고 그 ‘파워’는 바로 헐리우드에서 나오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는 신화를 낳게도 만들었고, 클린턴 전 대통령이 케네디의 영향으로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게 한 주된 동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미 세인이 잘 알다시피 죠셉 P. 케네디의 아들 “존 F. 케네디”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헐리우드 여왕으로 불렸던 ‘마릴린 몬로’를 접수하여 틈만 나면 둘은 정욕을 불태웠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마릴린 몬로 만 아니라 1960년도 라스베가스에서 프랭크 시나트라를 통해 소개받은 “쥬디스 캠블”이라는 여인과도 정을 통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나중에 또 프랭크 시나트라를 통해 시카고의 마피아 보스 샘 지앙카나에게 소개되어 이상한 삼각관계로 변한다. 항시 마피아 보스를 도청하고 있었던 FBI 후버 국장은 이런 사실을 대통령에게 알려 후버 국장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이용한다. 그리고 그 여자와의 단절을 요구한다. 결국 존 F. 케네디는 후버 국장의 경고를 받아들여 쥬디스 캠블과 헤어진다. 이 헤어짐은 자연히 존 F. 케네디와 프랭크 시나트라 사이도 멀게 만들게 되어 둘 사이는 결별의 막을 내린다. 바로 이때부터 케네디는 마피아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고 “범죄 집단과의 싸움”이라는 미명하에 마피아의 뿌리를 뽑겠다는 칼을 뽑게 되는 데 바로 이게 또 케네디家 저주의 시초의 일부분이 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M. 캐네디家의 애초 富 축적 과정과 원죄의 씨앗
JFK의 할아버지, 즉 죠셉 P. 케네디의 아버지 패트릭 케네디는 일찍이 술 도매로 부를 축적했다. 술로 축적한 돈으로 죠셉 P. 케네디는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었고 (물론 말도 잘하고 똑똑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버드에서 배운 지식으로 세계의 은행 사에 있어서 가장 어린 나이인 25살에 은행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었던 터라 1920년1월16일 ‘밀주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죠셉 P. 케네디는 밀주 수입을 통하여 돈을 떼돈을 벌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죠셉 P. 케네디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는다. 지하에서의 밀주 거래는 범죄 조직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데 죠셉 P. 케네디는 범죄 조직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그는 문제없이 많은 돈의 축적이 가능했다.
이렇게 돈을 많이 버는 과정에서 죠셉 P. 케네디는 주식시장에서도 ‘마이다스 터치’의 괴력을 발휘하는 일을 벌였다. 1920년대 말에는 미국의 주식시장에 이상함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 되어 미국을 약 10년간의 암흑기로 몰고 들어갔다.
미국 대공황기의 처절함을 잘 묘사한 영화, 1940년 작, "Grapes of Wrath"
당시 죠셉 P. 케네디는 곧 주식시장의 법의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사이더 거래(insider trading)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것도 단독적 일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과 부를 이용한 언론플레이를 통해서다. 즉 어떤 회사의 주식이 크게 올릴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고, 그 후 개미투자자들이 그 주식을 사겠다고 몰려 주식 값이 최고치로 올라가면 자기 주식은 금방 내다 팔아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방법을 썼다. 다시 말해 ‘치고 쏙 빠지는 전법’을 구사한 것이다. 1929년10월29일 월스트릿의 주가는 결국 폭락하고 미국은 장기 경제 침체로 국민은 고통받는다.
당시 죠셉 P. 케네디가 쓴 주가 조작 방법은 불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돈 버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니 연방정부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불법으로 만들 수 있는 과정에 들어가려는 조짐을 보인다.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죠셉 P. 케네디는 인사이더 트레이딩이 불법이 되기 전에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동원하여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데 성공한다. 이때 쌓은 부는 훗날 둘째 아들이 대통령이 될 즈음엔 미국의 12대 부자로 등극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N. 미국의 중심축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바로 그 때를 기하여 미국의 파워 축이 뉴욕의 월스트릿에서 워싱턴 D.C.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를 안 이상 더 이상 죠셉 P. 케네디는 뉴욕에서의 활동은 삼가기에 이른다. 그는 부 축적의 본거지를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서서히 옮기기 시작했고 워싱턴을 근거지로 권력의 맛에 깊이 빠져들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미국이 고립주의의 정책을 펼 때는 월스트릿에서 돈 많은 자들이 가장 파워가 셌다. 하지만 미국이 세계의 정치상황을 받아들이고 세계적 리더 국가로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워싱턴에서의 정치적 권력을 가진 자들이 미국은 물론 세계까지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죠셉 P. 케네디는 정치적 연줄을 잡는데 급급한다. 정치입문은 단독이 아닌 연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해서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
1932년, 죠셉 P. 케네디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FDR)를 차기 대통령 감으로 지목하고 그를 지지한다. 그리하여 그동안 축적한 돈을 루즈벨트에서 투자한다. 시간도 정치자금 모금에 투자하여 케네디는 20만 달러를 거두어들인다. 지금의 2천만 달러에 가까운 가치의 돈이다. 루즈벨트는 이런 종류의 도움에 힘입어 대통령에 오른다.
그렇지만 루즈벨트는 케네디를 신임하지 않았다.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각료 자리를 끝내 만들어 주지 않았다. 이에 죠셉 케네디는 2년 간 속 탄다. 루즈벨트는 도움이 필요하면 케네디의 도움은 받았지만 케네디를 각료로 임명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당시 정치관이었다. 하지만 결국 월스트릿트에 “증권거래위원회(SEC)"를 만들어 죠셉 P. 케네디를 의장으로 임명한다. 지금은 그 자리 대통령이 좌우지 할 수 없는 자리면서도 좀 괜찮은 자리로 보일지 몰라도, 당시엔 한직에 불과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은 겉치레라도 케네디의 대선에 대한 노고를 보답할 수 있었던 자리에 불과했다. 케네디로서는 별로 맘에도 없는 자리를 받아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던 일화로 기억되지만 주어진 자리에서의 임무를 충실히 행한다.
O. 루즈벨트를 대통령으로 당선케 한 공의 대가
죠셉 P. 케네디는 바로 자신이 경험한 노하우로 어떻게 하면 월스트릿에서 엄청난 부를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터였다. 때문에 그게 뉴딜 정책에 연관된 개혁에 유용하게 쓸 수 있게 된다. 죠셉 케네디는 필요한 부분에 개혁의 매스를 가하여 월스트릿을 올바른 경제중심지로 거듭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한다. 다시 말해 IT시대에 해커 범죄자의 노하우를 감방에 썩히지 않고 그들의 노하우를 이용해 다른 해커를 잡는데 유용하게 쓴 일과 유사한 예로 표현할 수 있다.
1932년도엔 또 케네디가의 제일 막내 “테드 케네디”가 탄생하면서 아홉 명의 자녀를 둔다. 케네디는 이때 이미 첫째 아들 죠셉 케네디 주니어(Joseph Kennedy, Jr.)를 미래의 미국 대통령 감으로 점찍어놓고 있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들들에 대한 엘리트 교육에 손대기 시작한다. 특히 아들들에게는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를 시키고 스포츠 활동에고 많은 돈을 들여 전천후 형의 전인교육에 힘을 쏟는다.
1936년도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또 힘을 쓴다. 이때 “I'm for Roosevelt"라는 책을 저술/출판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후한 점수 따기에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그의 속셈은 단순한 각료로 임명되는 것을 떠나 자신이 미합중국의 대통령 되는 것이었다. 이런 속셈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눈치를 챈다. 때문에 또 다시 각료로 임명되지 못한다. 루즈벨트의 케네디에 대한 견제구를 던진 것이다. 대신 U.S. Maritime Commissioner라는 직을 받는다. "해양수산청”의 청장 자리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직이라 죠셉 케네디의 마음은 이때도 편지 않았다.
이때 죠셉 P. 케네디는 자신도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938년 일이다. 여론조사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보니 대선 후보감 5위 순위에 오른 사실을 안다. 그동안 루즈벨트에게 도움을 줬던 케네디가 후보로 뛰면 불리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루즈벨트는 죠셉 케네디에게 대사(大使) 자리 중에 최고의 자리인 주영미국대사의 자리를 내준다.
P. "죠셉 P. 케네디," 연발의 말실수로 정치 야인이 되다
하지만 그 자리는 훗날 자신의 정치야망을 죽이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말실수를 계속 저지르는 일을 연발한다. 현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빈도의 말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정치야욕을 꺾는 결정적 실수의 말을 몇 번 했다. 첫째는 독일의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고, 또 만약 전쟁을 일으킨다 해도 미국과 영국은 전쟁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으로 유럽 전체를 집어삼킨다. 영국과 미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죠셉 P. 케네디는 미국은 전쟁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 한다. 둘째는 영국의 “민주주의”는 망했다는 말로 영국인의 자존심을 완전 상하게 만들었고, 셋째는 반유대인적 발언도 늘어놓았다. 이 말은 본래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한 말인데 신문에 크게 보도됨으로써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을 맺는다.
그리하여 장남 죠셉 케네디 주니어를 정치인으로 키우려는 야망을 들어낸다. 둘째 존 F. 케네디는 몸도 허약하고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다리가 짧았기 때문에 아버지 죠셉 P. 케네디는 둘째 아들 존 F. 케네디를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 그리 많지 않다고 느껴 첫째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 꿈은 허망하게 끝을 맺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미국이 독일을 대항하여 싸울 때 첫째 아들을 비행기 폭파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동생 존 F. 케네디가 태평양에서 일본 구축함에 경비경 PT-109을 들어 받쳤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 영웅이 되어 형도 그런 일로 영웅이 되고자 하는 영웅심에 비행기를 몰고 독일의 로켓 사이트의 폭격 임무를 자청해서 가다 비행기에 탑재된 고성능 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는다.
일본 구축함에 받쳐 16시간 동안 물속에서 죽을뻔 하다 구사일생으로 살고 동료 2명을 구하여 영웅이 된 JFK, 우측
Q. 정치야망은 둘째 아들(JFK)을 통해서
장손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자 죠셉 P. 케네디의 대권에 대한 야망은 자연이 둘째인 존 F. 케네디에게 돌린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을 위하여 대학 졸업 때 우선 책 출판을 주선한 바 있었다. “Why England Slept"라는 책이 그것이다. 훗날에 또 다른 책을 출판하도록 도왔다. 두 번 째 책은 1956년 ”Profiles In Courage"라는 책으로써 이 책은 출판 때 다른 사람이 써준 책이라는 소문 속에 순탄치 않은 출발을 했지만 베스트셀러가 되어 존 F. 케네디가 정치인으로서의 식견이 남다름은 인식케 해주는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는 최대의 무기가 되었다.
퓰리처상을 탄 JFK의 책, "Profiles in Courage", 이 책의 진짜 저자에 대해서 말이 많았던 책이다
이 책은 퓰리쳐 상을 타기도 하여 그 유명세를 생각 외로 컸다. 하지만 이 또한 아버지 죠셉 P. 케네디가 많은 돈을 써서 가능했다는 게 정재계 및 언론계의 중론이다. 지금은 예전과 같이 그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돈은 당시에 퓰리처상을 타게 만들 수 있는 마력을 지녔던 게 그때의 현실이었다. 물론 일반 사람들은 불가능했던 일이지만 이미 재력과 권력의 발을 넓힌 죠셉 케네디는 퓰리쳐상을 돈으로 탈 수 있게 만드는데 어렵지 않은 수완을 발휘할 수 있었다.
R. JFK의 정치 입문
존 F. 케네디의 첫 정치 입문은 1946년에 이뤄졌다. 그 때 하원의원으로 당선되고, 또 얼마 안가 상원의원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그가 첫 하원의원으로 당선 된 첫 해인 그의 국회의원 당선은 거의 “돈”으로 선거를 치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금전 선거였다. 한 예로 선거에 존 케네디와 ‘죠셉 루소’라는 이태리 계통 후보가 뛰는데 둘이 붙으면 존 케네디가 떨어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그 와중 갑자기 제3의 ‘죠셉 루소’라는 후보 한사람이 더 나타난다. 이 일로 이태리인들의 표는 두 동강이 난다. 결과는 존 F. 케네디의 당선이었다. 하원의원이 된 것이다. 이 일은 아버지 죠셉 P. 케네디가 뒤에서 벌인 획책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당시 제3의 ‘조셉 루소’ 후보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죠셉 P. 케네디가 현금으로 사람을 사서 제3의 후보로 나갈 수 있는 계책을 짜서 가능했다. 제3의 후보는 선거가 목적이 아니라 돈이 목적이기 때문에 후보로 등록하고 엄청난 돈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그렇게 해야만 아들 존 F. 케네디에게 득표가 유리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아버지 케네디에 의해서 행해진 책략이다.
S. 케네디의 대권 성공, 마피아의 도움으로
1960년도 대권은 치열했다. 닉슨의 노련미가 케네디를 능가하는 기세였다. 특히 역사상 처음 있었던 TV 토론에서는 케네디의 역부족이 점쳐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TV 토론에 나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는데 이때 하늘의 역사(?)가 일어났다. 본래 케네디는 몸이 허약했고, 또 2차 세계대전 때 PT-109이 일본군 구축함과 충돌 시 받은 상처로 항상 허리가 아팠는데 그 아픔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바로 그 즈음 케네디에게 기적의 약이 나왔다. “Cortisone"이라는 약이 케네디의 허리 통증을 완화하여 토론하는 날 아픔 없이 토론할 수 있었다. 반면 건강했던 닉슨은 무릎 통증으로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시청자는 의외로 케네디가 더 나은 대통령감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에 고무되어 아버지 죠셉 케네디는 막상막하의 대선 레이스를 뛰고 있는 아들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악마와 손을 다시 잡는다. 마피아에게 손을 다시 내민 것이다. 마피아는 범죄조직이지만 겉으로는 합법화된 기업체를 운영한다. 예를 들면 고철수집이나 건설업체, 쓰레기 수거, 혹은 식당을 운영하면서 남몰래 불법을 행한다. 때문에 FBI가 항시 도청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남몰래 불법을 행하는 데 웬만한 불법은 FBI도 눈감아 주는 게 당시 관례였다.
마피아가 위의 비즈니스를 운영하였지만 그래도 그 중 가장 힘이 센 조직체는 노동단체였다. 팀스터(Teamsters)가 그중 하나다. 이 노동단체는 수백만의 노동자의 표를 움직인다. 때문에 죠셉 P. 케네디는 이들의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아들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 표를 얻기 위해서 마피아 보스들과 남모르는 뒷거래를 행했다. 이들과의 거래에서 얼마의 돈이 오갔는지 알 수 없다. 추측 건데 만일 아들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마피아가 도박 등등의 사업을 쉽게 할 수 있는 특혜를 봐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이들의 도움이 있어서였는지 존 F. 케네디는 그때까지만 해도 최근소 표차인 0.1% 득표로 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때 물론 가장 기뻤던 사람들은 케네디家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마피아도 케네디가 사람들 못지않게 기뻤다. 바로 자기들의 힘으로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그들은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런 기대를 했기 때문에 쿠바의 피그만 침공 때 도움을 줬고, 또 CIA와 함께 암살단도 조직해 피델 카스트로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계획도 짰던 것이다. 그런데 청천벽력의 뉴스가 날아왔다. 카스트로도 제거해야 하지만 동시에 마피아 범죄 조직의 뿌리도 뽑을 것이라는 로버트 F. 케네디 법무부 장관의 말을 듣고 배신감에 치를 떤다.
T. JFK의 목숨을 앗아간 ‘저주의 흉탄’
로버트 F. 케네디가 뿌리 뽑겠다는 범죄 조직의 제1 타깃은 두드러지게 드러난 노동단체인 “팀스터”였다. 회원수도 많고, 또 그에 걸맞게 회원으로부터 모은 기금이 대단했는데 그 기금을 ‘호파’가 횡령했다는 것 하나로 호파를 스리슬금 뒤흔들 으니 호파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로가노 변호사가 훗날 밝힌바와 같이 트래피칸테와 마셀로 마피아 보스에게 존 F. 케네디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직접 들었다는 말이 그의 노기가 어느 정도 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지앙카니, 마셀로, 트래피칸테 등등의 지하세계의 보스들이 존 F. 케네디의 배은망덕함을 성토하고 있었는데 최고의 노동자 회원수를 거느린 팀스터 보스 ‘호파’가 거금을 들고 청부살인을 부탁하니 이들의 대통령 암살에 대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청부살인을 부탁했던 "호파," 결국 자기도 1975년 여기서 증발된다
하지만 문제는 마피아가 들어나지 않고 제3의 인물, 혹은 제3의 국가가 개입한 것 같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인물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인물을 결국 찾는다. “리 하비 오스월드”가 적격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를 포섭하는데는 그리 쉽지 안핬다.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의 사람에게는 돈 몇 푼 쥐어주고 짜인 시나리오대로 하라고 시키는 순순히 응한다. 마침 그의 배경은 러시아까지 다녀오고 또 부인이 러시아인이라 그를 저격범으로 만들면 마피아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미국을 증오하고 공산주의를 동경하는 한 젊은 미치광이가 대통령을 죽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계획을 짠다.
1963년11월22일, 존 F. 케네디는 코넬리 주지사와 함께 오픈카를 타고 달라스 시내 퍼레이드를 한다. 이미 계획은 짜였다. 리 하비 오스월드는 짜인 저격 장소인 교과서 저장창고 층 근처에서 있었고, 동시에 길가에서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저격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에서 몇 명의 저적수가 망원장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몇 발이 존 F. 케네디의 머리를 관통하여 후두부 거의 3분의 1을 공중분해 시켜 그의 목숨을 끊었다.
1963년11월22일, 암살당하기 직전
당시 달라스 경찰은 부패의 온상으로 알려졌다. 돈만 쓰면 뭐든지 할 수 있었던 게 바로 달라스 경찰이었다. 이미 저격할 장소는 경찰의 손이 미칠 수 없게 만들어졌고, 또 그런 저격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 부패된 경찰은 저격이 이뤄진 곳은 가질 않고 다들 교과서 창고 문이 열린 곳으로 손짓하는 것을 보고 그 쪽으로 경찰력을 투입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하비 오스월드 나중에 체포되고, 또 경찰에 의해 이송되던 중 또 다른 ‘루비’라는 저격수가 ‘리 하비 오스월드’를 사살하여 살인자의 입을 막아 증거를 없애 존 F. 케네디의 암살은 결국 “Lee Harvey Oswald"로 기정사실화 되게 만들었다.
리 오스월드를 죽인 "잭 루비"
‘리 하비 오스월드’를 죽인 "잭 루비"는 훗날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할 말이 가장 많았던 사람일 것이다. 그가 만약 사실에 대한 입을 열었다면 그 역시 1970년대 쥐도 새로 모르게 죽은 ‘호파’와 같이 죽음을 당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그는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고 죽었다.
U. “로버트 F. 케네디”에게 뿜어 댄 또 하나의 ‘흉탄’
범죄 조직 소탕 작전은 로버트 F. 케네디가 주도했지만 그 실질적 파워는 존 F. 케네디로부터 나왔다. 때문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죽임으로써 로버트 F. 케네디를 법무부 장관직에서 자연히 해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린든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으로 오르면서 로버트 F. 케네디는 자연히 그의 영향력을 잃고 뒷전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대권 야망을 품고 형과 같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고자 대권 레이스에 뛰어든다. 그러다 1968년6월6일, 로스앤젤레스 엠바사더 호텔에서 유세하던 중 또 흉탄의 총에 맞고 절명한다. 로버트 F. 케네디의 나이 겨우 38살이었다.
1968년6월, 로스앤젤레스 '앰바사더'호텔에서 총맞고 절명한 로버트 F. 케네디
이 죽음은 만약 로버트 F.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마피아는 완전 와해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의해서 존 F. 케네디를 죽인 자들이 같은 일을 벌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1991년도 "JFK " 영화를 제작한 올리버 스톤은 여기에 대한 말은 하지 않고 존 F. 케네디의 죽음만 부각시켜 정부 내에서 그런 끔찍한 암살 극을 벌였다는 논리를 펴 그의 주장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은 감을 드러냈다.
로버트 F. 케네디가 죽은 엠바서도 호텔은 지금 고등학교로 개축중이다. 단일 고등학교로서는 세계에게 제일 비싼 곳이 될 것이라 한다. LA 교육통합구는 이 부지 구입/재건축을 위해 무려 4억달러 이상을 투입했고 10년 이상 법적문제를 풀기 위해 법정을 드나들었다. 한때 이 땅을 도널드 트럼프가 구입해 10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을 짓는다고 소란을 떤 적도 있었다. 이젠 코리아타운 중심에 위치한 엠바서더 호텔은 하이스쿨로 변하여 예전의 역사적 가치를 잃는 아쉬움을 보여주고 있다.
V. 현존하는 “테드 M. 케네디”에게도 저주의 신이...
존 F. 케네디는 이미 대통령으로 올라 아버지 죠셉 P. 케네디의 소원성취를 해드렸다. 다음 타자로 로버트 F. 케네디가 또 대통령으로 오를 수 있었는데 그 또한 흉탄에 의해 저승사자가 됐다. 케네디 가의 제일 막내이자 대권 주자의 마지막 홉풀(hopeful)인 테드 M. 케네디도 가문의 후광으로 얼마든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 때가 1980년도였다. 레건이 공화당 대권 후보였고, 민주당에서는 카터가 재선을 위해 힘겹게 레건을 대적하고 있을 때 민주당 내에서는 케드 M. 케네디가 대권 후보로 나서야 레건을 이길 수 있다는 주장 하에 테드의 대권 후보로 나설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테드 M. 케네디는 나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챠페퀴딕 사건“으로 인하여 죽은 여인의 의문사가 언론에 재조명 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아버지 죠셉 케네디, 둘째형 존 케네디, 셋째형 로버트 케네디와 같이 테드 케네디도 여자를 매우 좋아했다. 때문에 항상 여인들이 그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여자와 색을 밝히던 중 1969년7월18일 Mary Jo Kopechne 이라는 여자와 보스턴 근교 마타스 빈야드(Martha's Vineyard)를 드라이브 했다. 드라이브 중 ”다이크(Dike)“ 다리에서 차가 전복되어 물속으로 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물에 빠졌지만 테드 케네디는 살고 여자는 죽는 일이 발생했다. 그랬는데도 테드 케네디는 파티에 돌아가 노는 데 다시 동참했고, 경찰에 사건을 보고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경찰이 여자를 물에서 건졌을 때는 여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Ted Kennedy
세인들은 이 사건을 어떤 의도와 사연이 있어서 여자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라 말한다. 만일 그게 단순한 사고였다면 테드 M. 케네디가 경찰에 보고하지 않고 그렇게 방치할 수 없었을 논리로 테드 M. 케네디를 공격하니 사실 테드 M. 케네디는 할 말을 잃고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한 논쟁을 피했다.
하지만 테드 M. 케네디가 대권에 도전하게 된다면 그 사건은 다시 들춰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테드 M. 케네디는 대권 도전을 포기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를 대는 사람들은 만일 테드 M. 케네디가 대권에 도전하면 그의 형들이 흉탄에 죽은 것과 같이 또 흉탄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염려 때문에 대권을 포기했다는 주장도 편다.
하지만 테드 M. 케네디에 대한 저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부인은 알코올중독으로 밤낮 술독에 빠져 살았고, 결국 이를 치유하지 못해 나중에 이혼한다.
테드 케네디의 사생황을 폭로했던 책. 마약, 알코올, 여자관계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또 테드 M. 케네디의 제일 측근이었던 리챠드 버크(Richard E. Burke)가 테드 상원의원과 결별하면서 1992년도에 “The Senator: My Ten Years With Ted Kennedy"라는 책을 출판한다. 저자는 테드 M. 케네디의 비서로 10년간 일했던 사람이다. 이 책은 테드 M. 케네디의 괴팍한 성도착증 및 마약 복용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그를 궁지로 몰고 간다.
W. 강간범으로 몰린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
1991년, 케네디家에 또 다른 저주가 든다. 죠셉 케네디의 딸이며 Stephen Edward Smith의 부인이 된 Jean Kennedy Smith의 부인의 아들 윌리엄이 강간범으로 몰려 미국은 물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때 또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말이 심각히 나돌기 시작했는데 훗날 2003년에 ‘에드워드 클라인’이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책을 저술하여 지난 케네디家가 지난 150년 간 어떤 저주를 어떻게 저주를 받았나 하는 이유를 밝힌 바 있다.
강간 기소로 '케네디'가를 긴장시켰던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 "진 케네디"의 아들
그래서 그런지 또 케네디家에 저주가 들어 바에서 만난 한 여인을 강간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이 일로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도 일을 뉴욕에서의 검사직을 그만 두고 사촌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동서분주했다.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그런 열정을 보였던 것은 만일 사촌이 강간범이 된다면 케네디家의 수치가 되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힘썼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 기각의 판결을 받았다.
당시 이 사건을 일반적 상식으로 본다면 분명 강간이 있었던 다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미국 최고의 강간범 전문변호사를 쓰고, 또 케네디 패밀리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기소가 기각되었다는 언론보도가 꽤 많이 있었던 지라 미국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으로 떠돌았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X.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경비행기 참사
1988년, 잡지 "People"은 Sexist Man Alive(최고의 섹시한 인물)“로 존 F. 케네디 주니어를 꼽았다. 잡지사에 따르면 그동안 출판된 잡지 중 존 F. Kennedy, Jr.를 커버 페이지로 한 잡지가 역사상 제일 많이 팔렸다고 한다. 그만큼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인기가 최고봉에 달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도 1999년 7월에 짧게 생을 마감한다.
1988년도 People Magazine에 의해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뽑혔던 존 F. 케네디 주니어, 죽은 후 Time 커버를 장식
그가 죽게 된 것은 경비행기를 기상이 좋지 않은 날씨에 조종하여 조종 미숙으로 방향감각을 잃어서 비행기를 추락시켰다 한다. 그의 비행기는 Piper사의 ‘사라토가’ 6인승 싱글엔진 이었는데, 그렇게 험악한 날씨엔 육안비행(VFR)이 아닌 계기비행(IFR)에 익숙해야 어느 정도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다. 존 F. 케네디가 조종사 자격증을 딴 때는 겨우 1년 전인 1998년도였다. 그렇게 짧은 경험으로 안개 속의 비행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또 그런 기상 상태에서 육안비행으로 이륙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비행과 다를 바 없다.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60년생으로 세상에 태어나 1999년도의 만 38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또 다시 “케네디家의 저주”가 일어났다는 말이 떠돌았고, 또 ‘다음 타자는 누구일까’ 하는 말도 많이 나돌았다.
보스턴 근교의 Martha's Vineyard는 내가 보스턴을 방문하는 항시 가는 곳인데, 그 해 케이프 코드(Cape Cod)를 가는 도중 난생 처음 길을 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길을 읽고 들어갔던 곳은 바로 Martha's Vineyard 였다. 난 당시 생각했다. 내가 왜 그곳으로 빠져 들어왔나 하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로 그곳이 Martha's Vineyard였고, 또 길을 잃고 그곳에 들어가지 전에 “John F. Kennedy, Jr.”가 꿈에 나타났던 생각이 들어 소스라치게 놀랐던 일이 있다.
아마 그런 꿈에 길을 잃었던 일 때문에 훗날 JFK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그런 이유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Y. 글을 맺으며
존 F. 케네디의 여성편력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굉장했던 사람이다. 빌 클린턴의 바람기가 “세기적(世紀的)이라는 말을 듣는데 사실 내가 보기에는 존 F. 케네디가 더했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남편의 바람기를 다 덮어두어서 세상에 잘 밝혀지지 않아서 바람기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세상에 나타나서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변호사 생활을 했고 또 그 똑똑함이 만만치 않아 조그만 일도 크게 부풀려져 별로 아닌 것도 굉장한 사건으로 비취진 게 많다. 그래서 클린턴의 바람기는 ‘과히 세기의 난봉꾼이다’는 말을 듣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고 싶다.
케네디 대통령의 바람기 중 가장 잘 알려진 일화는 마릴린 몬로와의 관계다. 그런 가운데 범죄 집단인 마피아까지 개입하여 대통령 당선에 큰 힘이 되어줬고, 또 마피아와 연계된 프랭크 시나트라를 통해서도 여자(쥬디스 캠블)를 소개받고, 또 그런 여자가 마피아 보스와 통정하는 일까지 일어났으니 존 F. 케네디의 간은 일반 사람과 확실히 달랐다.
마릴린 몬로가 의문사로 죽었던 것은 내 생각에 마피아가 으름장으로 그녀를 죽였을 수 있다는 추측을 들게 한다. 그동안 케네디가 많은 바람을 피웠지만 그런 일로 여자를 살해한 일은 없다. 감히 꿈도 못꾸는 일인데, 마릴린 몬로가 죽을 당시 케네디 형제는 마를린 몬로와 밀애를 즐기면서 마피아 소탕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정도면 케네디 대통령의 바람기는 어는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의 바람기에 대해서 측근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물었다 한다. 왜 그렇게 바람을 피우냐고. 이 질문에 대한 존 F. 케네디의 답이 기발했다. “I don't know. I just can't help it." (나도 몰라요. 나도 왜 그러는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과연 그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말이다. 그의 아버지 조셉 P. 케네디도 헐리우드에서 영화제작하면서 엄청난 바람을 피웠다. 하지만 그런 바람기 문제된 일이 없다. 부인 로즈 여사가 남편의 바람기를 그냥 방치했다. 남편이 보기 싫으면 유럽으로 여행가 몇 달을 지냈다. 절대 바가지를 긁거나 싫은 소리 안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싫은 소리를 했다면 여자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문제 때문이었다 한다. 그런 부모들의 관계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존, 로버트, 테드 케네디는 여자를 탐했고 그 일로 "테드 케네디" '차페퀴딕 사건‘을 일으켜 대권의 야망까지 접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클린턴이 케네디와 달랐던 것은 빌 클린턴은 성욕의 충족을 위해서 하이 프로파일(high profile) 여성보다 로우 프로파일(low profile) 여성들을 주로 상대했다. 아마 그게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통신기술과 매스미디어가 발전하면서 조그마만 문제도 방송/언론이 크게 보도하면서 더 크게 불거져 클린턴은 못 말리는 “섹스매니엑”으로 변했다. 예전엔 미국 언론/방송도 남자의 “배꼽 밑의 일은 눈감아준다”는 불문율이 있었고 지켜 주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랬는데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의 언론/방송도 욕심부린다. 오히려 조그만 일도 크게 부풀려 큰 뉴스로 만든다. 마치 황우석 박사의 난자 기증 일을 MBC-TV의 PD 수첩이 시청률을 올리려 하는 태도와 같이 크게 부풀려 보도하여 클린턴의 바람기가 "세기적“으로 변한 것 같이 말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바람기, 그 바람기는 세상의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던 터라 한 여인을 놓고 마피아 보스와 삼각관계를 벌일 수 있는 정도로 발전시켰고, 또 그런 이유로 그들과 기(氣) 싸움에 말려들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마피아를 이용하여 쿠바의 카스트로까지 제거하겠다는 암살음모까지 폈던 상황에서 마피아 보스들과의 협력관계를 깨고 그들의 氣까지 뿌리부터 뽑겠다는 기상천외외한 방향전환으로 그의 목숨은 배신의 대가로 잃게 되었다는 게 “케네디家의 성공과 저주”에 대한 결론임을 말하고 글 줄인다.
한국 방문 때문에 블로깅을 오래 못했답니다
11월8일-11월19일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중국까지 들렸다 오려했는데 11월22일 “케네디家의 성공과 저주” 글을 올리겠다는 약속을 한 바 있어 중국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서울 청계천, 제주도, 부산, 남해안, 등등의 곳을 구경했지요. 부산은 해운대 극동호텔에 머물었고 웨스팅 호텔에 들렀는데 경비가 삼엄하게 시작되더군요. 좀 아쉬웠던 것은 APEC를 개최하면 좀 더 빨리 더 완벽하게 조경작업을 마칠 수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고 아직 미완성이어서 약간의 아쉬운 마음 금할 수 없었지요.
처음 한국 방문을 할 때 한국에서 글을 써서 올릴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시간이 허락지 않더군요. 며칠 더 머물고 싶었는데 약속한 글 때문에 19일 한국을 떴답니다. 미국에 돌아와 너무 피곤하여 이틀간 책도 못 읽고 글도 못쓰다 어제 부랴부랴 막 쓰기 시작하여 이제 다 썼답니다.
이번 한국방문은 의미가 다른 때와 달랐습니다. APEC이라는 국가적 대행사도 있었지만 묘한 꿈을 2번 꾸었답니다. 한번은 구미 박대통령 생가 가까운 숙소에서 꾸었고 (15일 새벽 5:02분), 또 한 번은 미국 서부의 천재지변에 대한 꿈을 꾸었네요. 이 꿈을 꾼 시각은 새벽 2:25분이라 안 맞았으면 합니다.
아산 현충사도 들렀고, 또 이순신 장군 묘가 있는 터도 따로 들렸답니다. 남해에서 전사하셨을 때 잠시 묻혔던 곳에도 들렸지요. 이번 이렇게 이순신 장군 묘를 갔던 이유는 1992년도 나 나름대로 알게된 임진왜란 당시의 사건(?) 때문에 갔었지요.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밝힐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글로 옮길 수 있을는지는 나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 지 확실치 않아 약속은 못합니다. 하지만 다른 내용의 글은 시간 나는 대로 올릴 것입니다.
'17[sr]역사,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민족만의 전승 비밀암호용어 (0) | 2015.08.18 |
---|---|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최신 全목록 (0) | 2015.08.18 |
거인족의 실상 / 기타 지구의 괴생명체들(믿거나 말거나) (0) | 2015.08.18 |
개방된 제국 팍스 몽골리카 (0) | 2015.08.18 |
칭기스칸 운구행렬 본 생물체는 모두 죽었다 (0) | 2015.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