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의 전략에 관한 분석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는 세계사에서 지난 1천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징기스칸을 꼽았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징기스칸이 단순한 정복자가 아님이 알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는 징기스칸이 참여한 주요 전투를 역사적 기록을 근거로 분석하여, 그가 천재적인 전술 및 전략가임과 동시에 현실에 적응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철저한 현실주의적인 인물임을 밝힌 내용으로 지면 관계상 4회로 연재한다.
서론
13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의 환경을 살펴보면 서양 국가들은 가톨릭 체제, 중동 국가들은 이슬람 체제 그리고 동양 국가들은 불교 및 유교 체제에서 안주하고 있을 때 몽골은 생존을 위해 부족간 투쟁이 극심했다. 징기스칸은 먼저 악전고투 끝에 몽골족을 통합하고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여세를 몰아 서하(西夏)를 다독거리고 금나라를 남쪽으로 몰고 오트라르 성주가 대상을 죽이고 물품을 약탈하자 이를 징계하기 위해 서정(西征)길에 올라 7년여에 걸쳐서 호라즘 왕국을 초토화하고 배반한 서하를 치는 중에 병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금나라를 정벌하는 전략을 알려주었고 그 뒤 그의 아들 오고타이와 투루이는 징기스칸의 전략을 따라 금나라를 점령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13세기 징기스칸이 몽골 기마병단을 이끌고 유라시아 대륙 동서남을 종횡무진 진격하여 저항하는 적을 단숨에 격퇴시킨 전략에 관해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당시 몽골은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글을 몰랐다. 따라서 징기스칸의 기록은 위 구르(Ug-urs), 중국,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의 역사 문서와 유럽인 여행자들의 기록에 드문드문 기재되어 있었다. 이렇게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징키스칸의 반대편 사람들이어서 징기스칸을 침략자로 보고 기록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잔인한 정복자로 기록에 남기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서하를 정벌하고 금나라 중도(中都 또는 燕京)를 점령하고, 호라즘 왕국을 정복하여 유사이래 영토가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한 몽골인의 저력은 무엇이며 이를 효과적으로 이끌었던 징기스칸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분석해 보기로 한다.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의 국제 환경
동아시아 지역 정세를 보면 중국에는 907년에 당(唐)나라가 망하고 오대(五代)를 거쳐서 960년에 송(宋)나라가 건국되었다. 만주 지역에는 916년에 거란족이 요(遼)를 건국하여 926년에 발해를 멸하고 중국의 연운 16주(燕雲16州)를 장악했다. 1115년 금(金)나라가 일어나 요를 멸하고 1127년에 북송(北宋)을 멸하였다. 그래서 송나라는 임안(臨安, 지금 南京)에 도읍하여 남송(南宋) 정권을 수립했다. 한반도에서는 918년 고려가 일어나 935년 신라를 통합했다. 중국 서쪽에는 1038년에 당구트족(黨項族)의 이원호(李元昊)가 서하(西夏)를 건국했다. 그래서 1150년 이후 고려, 금, 송, 그리고 서하가 서로 화친하면서 평화공존을 누리고 있었다. 이슬람 제국은 1031년에 코르도바의 우마이야조가 멸망하고, 바그다드의 압바스조는 분열되어 안정을 잃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고 1037년 셀즈크조가 일시 강성했으나 명재상 니삼(Nisam al-Maulk, ?-1092)이 암살된 후 갑자기 쇠약해졌다. 유럽에서 911년에서 987년 사이에 노르만족과 마자르족의 이동이 있어서 내부적으로 혼란이 있었고 외부적으로 이슬람(사라센) 제국의 침입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나 마자르족의 침입을 중지시킨 옷토 1세(Otto I, der Gorsse, 재위 936-973)가 신성 로마제국을 세워 서유럽을 일부를 통일하여 로마 교황과 더불어 유럽을 통치하여 카톨릭 체제하에 중세 봉권제도로 안주하고 있었다. 특히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Ⅱ, 재위 1088-1099)는 클레르몽(Clermont)에서 십자군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1099년에서 1270년에 걸쳐서 7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중동에서 벌어졌으나 이것은 못사는 유럽인들이 잘사는 이슬람 지역을 약탈하려는 전쟁으로 변모했다. 13세기경 세계 정세를 요약하면 동서양에서 강력한 국가는 없었고 큰 나라들은 가톨릭, 이슬람, 유교 및 불교 체제하에서 현실에 안주하여 쇄락하고 있었다.이렇게 동서양에서 분열과 불안한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 몽골은 부족간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부르치군족인 예스게이는 메르키트족으로부터 호에른을 납치해서 결혼하였다. 이때 에스게이에게는 베테르와 벨구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호에른은 테무진(후에 징기스칸), 카사르, 테무게(후에 오토치킨)를 낳았다. 징기스칸이 9살 되는 해에 아버지는 타타르인에게 살해되었다. 징기스칸의 이복형 벡테르와 베구테이가 그와 친동생 카사르가 잡은 물고기를 빼앗고 다음에 다시 잡은 새를 빼앗아 가자 활 잘 사는 동생 카사르와 합세하여 이복형 벡테르를 죽여 버렸다. 징기스칸 가족은 타이추드족 습격을 받아 징기스칸이 포로가 되었으나 소르칸 시라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또한 담황색 거새마 8마리를 도둑맞자, 친구 보올추의 도움을 받아 도둑을 추격하여 찾았다. 징기스칸의 부인 보르테는 메르키트족에 납치 당했으나 징기스칸은 의붓아버지 케레이트왕 토오릴 옹칸과 의형제 자무카의 도움으로 다시 보르테를 찾았다. 그래서 맏아들 주치는 누구 아들인지 분명치 않았다. 징기스칸이 생존을 위해 동지를 모으고 징기스칸 어머니는 어린 고아들을 양아들로 키웠다. 징기스칸의 세력이 커지자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는 다른 종족의 힘을 빌리어 징기스칸을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한때 의붓아버지 토오릴 옹칸도 징기스칸의 반대편에 섰다가 죽음을 당했다.
서기 1197년 메르키트(Merki, 蔑里吉)족과 싸워 이기고, 서기 1199년에 나이만(Naiman, 乃蠻)족과 싸워 승리했다. 서기 1201년에 타이츠우드(泰赤鳥)족을 정벌했으나 죽을 고비를 제르메의 도움으로 살았다. 1202년에 타타르족 그리고 서기 1203년에 케레이트(Kereyid, 克烈)족을 정복하여 동몽고의 패권을 장악했다. 부족전쟁을 하는 동안 징기스칸의 어머니 호에른은 타이추드족 전쟁 고아 쿠쿠추, 메르키드족의 고아 쿠추, 타타르족의 고아 시키 쿠두크, 그리고 주루킨족의 고아 보로콜을 양자로 삼아 우수한 장군으로 길러 징키스칸을 도우도록 했다. 징기스칸도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유리안족(순록부족)에서 수부타이, 아룰라드족에서 보올추, 바룰다스족에서 쿠빌라이와 쿠두스 형제 그리고 타이추드족에서 제베 등 타부족의 용사들을 등용하여 전력을 강화했다. 다시 징기스칸은 1204년에 나이만족과 1205년에 메르키트족을 완전히 정복하여 서몽골의 패권도 장악하여 몽골을 통일하고 서기 1206년에 가장 위대한(몽골말로 징) 최고의 인물(몽골말로 기스) 뜻을 합쳐 징기스칸(칸은 몽골말로 군주, 왕을 뜻한다)으로 즉위하였다. 징기스칸은 광활한 사막과 초원 지대에서 부족간의 싸움을 하면서 사전에 정찰조를 통해 적정을 살피고 조심스런 야간 행군을 하여 적의 배후를 급습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포위 전술을 구사하여 적을 철저히 격파하는 전투 경험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적 지역의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하여 활용하는 능력을 터득하였다. 요약하면 13세기에 서양은 가톨릭 체제, 중동은 이슬람 체제 그리고 동양은 유교 및 불교 체제에서 안주하고 있을 때 몽골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부족간 투쟁이 극심했다. 징기스칸은 이러한 모든 악조건을 이기고 성장하였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배반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고, 탈취하거나 도둑질하는 짓은 철저히 응징했다. 그는 금나라가 조공을 강요하자 금나라를 치고 호라즘국이 대상을 약탈하고 사신을 죽이자 서정(西征)을 했고 서하왕이 배반하자 서하를 쳐서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면 먼저 징기스칸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배경부터 토의해 보기로 한다.
몽골족의 군사적 생활 습성
사기(史記)의 흉노 열전(匈奴列傳)에 보면 “흉노(匈奴)의 풍습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유즙(乳汁)을 마시며 그 가죽을 입으며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계절에 따라 이동한다. 군신관계(君臣關係)가 간이하고 아버지가 죽으면 그 계모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그 처를 아내로 삼는다. 그래서 절대로 가계가 단절되는 일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춥고 건조한 지방에 살아서 전염병도 없어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게 되면 먹을 것이 부족하여 타지역으로 약탈하게 되고, 그 규모가 커지면 남쪽 중국을 압박하거나 서족 중앙아시아로 이동하게 된다. 징기스칸 시대에 몽골족은 인구가 최대로 팽창하여 부족간에 살기 위한 쟁탈전이 치열했으며 부족간 투쟁으로 남자들은 전투 경험을 쌓게 되었다. 험난한 투쟁에서 살아남은 전사(戰士)들이 징기스칸 아래 통일되었을 때 군정(軍政)이 일치(一致)하는 강력한 군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기본(Gibbon)은 그의 저서 「로마제국 흥망사」에서 고대 스키타이와 타타르(匈奴族)민족은 음식, 주거 및 평소 생활 면에서 장군들의 자질을 저절로 길러 왔다고 지적하였다. 가축만이 유일한 양식으로 진격시 가축 무리와 동행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식량은 증식되고 미개한 초원을 지나게 됨으로써 풍부한 풀을 가축에게 먹일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말고기를 먹고 도살한 가축은 훈제 또는 천일 건조시켜 장기 보존 식품을 만들고 치즈를 환약처럼 만들어 휴대하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물과 같이 먹는다. 그래서 곡물류를 운반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변질될 염려도 없으며 곡물류를 운반할 인력과 마력도 필요 없다. 이들은 워낙 인내심이 강하여 아주 빈약한 식사로 수십일 간 견뎌내며 사기가 떨어지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아와 포식을 교대로 하는 습성이 되었고, 더구나 극단적인 두 가지 식사 습성을 별로 고통 없이 견뎌낸다.
타타르인의 주거는 빠오라는 타원형의 조그만 천막을 치고 살면서 주변 초지대에 가축을 방목한다. 그래서 주변 지역의 풀을 다 먹게 되면 새로운 초지를 찾아 이동하기 때문에 군단대형(軍團形態)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항상 막사 주변에서 가족, 동료, 부족들이 모여 생활하고 여름에는 강을 따라 북상하고 겨울에는 남하하여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산기슭에 막사를 설치하고 산다. 그래서 토지보다 막사 그 자체가 고국이며, 부족 그 자체가 민족인 것이다. 길고 긴 행군중에 고난을 같이 하므로 친숙해지고 공동 의식이 싹트고 단결심이 공고해진다. 더구나 타민족의 약탈에 불안해하며 끝없이 경계하고 타부족이 약탈하기 위해 침입하면 모두 나아가 이를 격퇴함으로써 독립성, 강인성, 단결, 응집력이 저절로 생겨 부족이 하나의 전투군단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유목민의 생활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타고 가축을 돌보며 사냥을 즐기기 때문에 전혀 낙마를 모르고 명기수로 성장하게 된다. 사냥이 중요한 오락의 하나이므로 강궁을 사용하여 활을 쏘면 목표물을 거의 명중시킨다. 수렵 대회는 흉노족의 흥미 있고 중요한 경기 대회이다. 수렵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십리나 되는 원형진을 치고 이 울타리 안에 있는 짐승을 남김없이 쫓아서 사면을 포위하고 투창과 화살로써 사냥을 한다. 사냥은 며칠씩 계속되며 사냥감을 좇아 산을 오르고 계곡을 통과하고 강을 건넌다. 이때 지휘관의 손짓에 의해 좌우로 이동하면서 사냥감을 포위한다. 따라서 넓은 광야에서 지형, 거리, 이동시간에 대한 감각이 투철해진다. 이러한 수렵 대회는 곧 대기마군단의 훈련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몽골군의 군사조직, 무기 및 전술
몽골군 조직
사기(史記)의 흉노열전(匈奴列傳)에는 흉노의 군조직(軍組織)은 임금인 선우(單于)아래 24인의 군단장(軍團長)을 두고 그 아래 천인대장(天人隊長), 백인대장(百人隊長) 그리고 십인대장(十人隊長)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징기스칸은 선우시대(單于時代)의 십진법식 군조직(十進法式 軍組織)을 더욱 발전시켜 기마병단(騎馬兵團)과 비슷한 만명으로 구성되는 독립 부대를 구성하여 만호(萬戶, 萬人隊, tuman)라 불렀으며 3개 만호가 하나의 군 또는 군단을 구성하여 전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만호 예하에 천호(千戶, 天人隊)를 두고 10개 천인대(千人隊)가 모여 만호(tuman)가 되고 10개 백호(百戶, 百人隊)가 모여 천호(千人隊)를 구성하고 10개 십호(十戶, 人隊)가 모여 백호(百人隊)를 형성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3대 만호가 하나의 전투 군단을 형성하도록 하는 아주 현대적인 군 조직을 하여 전투시 3개 만호가 중앙과 좌우익에서 서로 협조하여 적의 주 전투력(主戰鬪力)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몽골군 무기
전형적인 몽골군은 40%가 중기마병(重騎馬兵)이며 이들은 가죽으로 무장하고 머리에 투구를 쓰고 창을 잡고 있으며 주로 충격 행동을 하는데 사용되었다. 몽골군의 60%는 경기마병(輕騎馬兵)으로 이들은 활, 던지는 창, 그리고 올가미 밧줄을 지니고 있었으며 두 개의 전통(戰筒)을 지니고 다녔으며 뒤에 화살 운반 차량이 뒤따랐다. 경기마병(輕騎馬兵)은 정찰, 수색을 하고 중기마병(重騎馬兵)을 지원하고 소탕 작전과 추격 작전을 수행하였다. 몽골군이 장거리를 기동할 때는 예비말을 하나 이상 갖고 번갈아 탔으며 경기마병(輕騎馬兵)들은 모두 아라비아식 언월도(偃月刀)나 전투용 도끼(전부:戰斧)를 지니고 전투하였다. 몽골군의 무기는 주로 활, 갈고리가 달린 철퇴 그리고 칼과 창을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활쏘기가 매우 익숙하였다. 특히 말로 하여금 조로몰이 뛰기를 가르쳐서 달리면서 말 위에서 정확하게 활을 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벼운 동물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어서 기동력이 뛰어났다.
몽골군 습성
몽골군은 전투에 임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고,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며 성질이 매우 험하고 잔인했다. 보급이 끊어져 어려움을 당하면 말젖을 먹고 때때로 사냥한 들짐승을 먹으며 보통 1개월쯤 견딘다. 남자는 이틀낮 이틀밤(二日二夜)을 말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견디며 말이 풀을 먹는 동안 잠잘 수 있도록 훈련이 잘되어 있다. 급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10일쯤 불도 피우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고 강행군할 수 있다. 그동안 그들은 자기가 타는 말의 피를 빨아먹는다. 말의 정맥을 끊어 그 피를 마시는 것이다. 18필의 숫말과 암말을 가지고 다니면서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꾸어 타고 달린다.
몽골군 식사
몽골군은 젖을 진하게 만들어 걸쭉한 풀처럼 만들어 군량으로 사용한다.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젖을 끓이면 크림이 위에 뜨는데 이것을 다른 그릇에 담아 버터를 만든다. 크림이 있으므로 젖은 굳지 않는다. 나머지는 햇빛에 말린다. 이것을 전투하러 갈 때 10파운드씩 지니고 적당한 양을 물과 함께 넣어 두면 말이 달릴 때 적당히 섞여서 죽같이 되는데 이것이 점심이다.
몽골군 작전 및 전술
몽골인은 전투시 절대로 적 가운데로 뛰어들어 혼전(混戰)하는 일이 없다. 말을 타고 적군 주위를 돌거나 한 측면에서 다른 측면으로 위치를 바꾸면서 활을 쏜다. 전형적인 몽골군의 전술은 기마병의 기동성을 최대로 활용하여 적의 측면을 돌아가서 배후에서 적을 공격하여 적을 일단 혼란시킨 다음에 포위 섬멸한다. 때로는 거짓 패하는 척하여 퇴각하면서 적을 몽골 진영 깊숙이 유인한 다음에 매복군으로 급습하여 섬멸한다. 또는 거짓으로 도주하다가 적이 따라오면 말 달리면서 뒤로 활을 쏘아 적이 맞아 쓰러지면 곧 반격하여 적을 포로로 한다. 각 기병대에는 짧은 창(槍)과 검을 가진 500명의 보병이 있어 도주할 때는 말 엉덩이에 타고 도주하다가 기병대가 다시 기습할 때면 말 엉덩이에 타고 있는 보병은 말 엉덩이에서 내려 적의 말을 찔러 죽여 기마병을 떨어뜨려 죽였다. 몽골 기마병단은 신호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있게 훈련되어 있어서 이합집산(離合集散), 퇴각공격(退却攻擊)을 자유자재로 하였다. 그래서 불리하면 흩어졌다가 서로 연락을 취하여 어느 순간에 빠른 기동성으로 병력을 집중시켜 순간 순간 한 지점에서 적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여 반드시 승리한다. 이러한 전법을 중국인들은 갈가마귀처럼 모였다고 별처럼 흩어진다고 하여 아병살성진(鴉兵撒星陳)이라 불렀다. 몽골군은 깃대를 뽑기 전에는 절대로 전장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재집결할 기회를 본다. 만약 적에게 잡혔을 때 절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몽골인은 첫 폭설이 올 때부터 잡초가 싹이 틀 때까지 주둔지에서 멀리 떠나 대규모 사냥을 하여 군사 훈련을 한다. 몽골군이 기동할 때는 3개군으로 나누어 중군(中軍), 좌군(左軍) 그리고 우군(右軍)이 거의 평행하게 전진하면서 서로 적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각군은 다시 중로(中路), 좌로(左路) 그리고 우로(右路)로 3개 제대로 병행하여 행군하거나 전투를 하면서 서로 측익을 엄호하면서 필요시 협력하도록 했다. 행군할 때 1개 부대는 2일 간 노정(路程)이 되는 앞에 세워 경계하게 하고 본대의 측면과 후면에 1개 부대씩을 두어 기습에 대비하게 한다. 중군(中軍)은 적 주력을 향하여 공격하고 좌군과 우군을 적의 주력에 참가할 수 있는 주변 부대를 소탕하는데 주력하고 이들이 소탕되면 적 주력으로 집중한다. 전투 형태는 주로 다섯 줄(5線)로 배치하며 첫 번째 두 줄은 중기마병(重騎馬兵)이 배치되고 다음 세 줄은 경기마병(輕騎馬兵)이 배치되었다. 여기에 배치되지 않은 경기마병(輕騎馬兵)은 5선 앞에서 수색과 정찰을 실시하였다. 특히 몽골군은 수색과 정찰을 철저히 수행하여 적의 주력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기마병에게 장애가 되는 지형을 사전에 철저히 분석하였다.
3개군은 원활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잠(jam, yam, 또는 잠치)이라는 역전(驛傳)제도를 만들어 예비말을 갖은 말탄 전령이 하루 150내지 250킬로를 달려 인접 부대 소식 및 정보를 전파한다. 뒤에 몽골은 이 제도를 역마제도(驛馬制度)로 확대하여 통치 지역에 사용하였다. 마르코 폴로는 역마제도를 얌브(yamb)라고 기록하여 각 역에 언제나 400필의 좋은 말을 상비하고 있다가, 사자(使者)나 사절(使節)이 여기서 지친 말을 두고 새로운 말을 타고 가도록 하였으며, 원(元)니라 천역에 역사가 1만개, 역마(驛馬)가 24만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각 역사에는 황제의 급사(急使)가 있어서 한 역까지 가면 다른 급사가 서류를 받아 계속 달리므로 아무리 멀어도 2일낮 2일밤 이내 황제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고 했다.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첩자 또는 척후를 먼저 보내 공격 대상 지역에 정보를 획득하게 하거나 거주민, 상인, 여행자 등과 같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오게 하여 사전에 정보를 충분히 획득한 후에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작전을 논의하고 공격로를 선정한다. 대도시를 공격할 때는 정찰대를 먼저 보내 동향을 파악하고 포위 공격을 하고 그 지역 포로들을 동원하여 헤자를 메꾸게하고 투석기등 공성장비를 운반하도록 하여 공성을 돕도록 한다. 공성장비는 주로 중국인 및 이슬람인 기술자에 의해 제작되었고 수공법(水攻法)은 중국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개방된 제국 팍스 몽골리카
당시 몽골은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글을 몰랐다. 따라서 징기스칸의 기록은 위 구르(Ug-urs), 중국,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의 역사 문서와 유럽인 여행자들의 기록에 드문드문 기재되어 있었다. 이렇게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징키스칸의 반대편 사람들이어서 징기스칸을 침략자로 보고 기록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잔인한 정복자로 기록에 남기고 있다.
유라시아대륙 북방 초원의 조그마한 부족 이름에 불과했던 몽골. 그러나 「푸른 이리와 늑대의 후손」인 테무진이 「바다의 왕」 칭기즈칸이 된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수천년간 응축돼왔던 기마민족의 힘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초원의 바람처럼 대륙을 휘몰아쳐 갔다.
『해가 뜨는 곳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하늘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정복하리라』
1245년에 교황의 친서를 들고 온 사절 프라노 카르피니에게 칭기즈칸의 손자 구유크칸이 답한 유명한 「세계정복선언」. 칭기즈칸의 세계정복은 그의 손자대까지 이어진다.
몽골군대가 이렇듯 세계를 제패하고 경영할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왔는가. 몽골군대의 기마병은 10만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적은 수로 현대 미국도 하기 힘든 중국과 중동―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윈윈(Win & Win)」전략을 수행한 것은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는 몽골의 군사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동에 편한 가벼운 그물갑옷, 도망가면서도 뒤로 화살을 쏘아대는 전술, 가족 가축과 함께 이동해 보급로가 따로 필요없는 전선 형성 등 독특한 전술운영을 했던 몽골군은 당시로서는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갖추었었다.
칭기즈칸 군대는 또 공포를 이용한 심리전과 정보전을 자주 활용하였다. 호레즘왕국의 변방 오트라르에서 몽골 상인들이 학살당했을 때 칭기즈칸은 『그들의 머리에 달려 있는 머리카락 숫자만큼 보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시도했던 사마르칸드 닛샤푸르 메르브 우르겐치 등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러한 무시무시한 학살의 소문은 다른 전투에서 적의 군사들로 하여금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게 만들었다.
바그다드를 칠 때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기독교도를 이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술을 사용하는 등 직접 싸우지 않고 이기는 다양한 병법도 십분 활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력의 특성만으로는 몽골이 유라시아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근 1백50년간 경영한 사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몽골비사(秘史)는 칭기즈칸의 총신 야율초재(耶律楚材)도 「말(馬)로써 세상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드넓은 초원에서 정처없이 흩어져 살던 유목민들의 내부 힘을 한데 모아 폭발시켜 「팍스 몽골리카」(몽골 아래의 평화)를 이뤄낸 것은 칭기즈칸의 탁월한 지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칭기즈칸이 이전의 유수한 정복자와 달랐던 것은 모든 민족과 종교를 인정하는 개방적인 리더십을 갖춘 점이었다. 요즘 말로 「세계화」의 시각을 갖춘 리더십이었던 것.
둘째, 칭기즈칸의 「자유무역주의」정책은 파괴됐던 실크로드 도시를 다시 번성하게 했고 몽골제국에 엄청난 부의 축적을 가져왔다. 14세기 초의 원(元)제국과 베네치아공화국의 상인 보호에 대한 통상조약을 보면 「캐러밴(낙타대상)의 도난에 대해선 원이 변상한다. 세금은 일률적인 매상세 3.3%만 내고 관세는 물리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셋째, 칭기즈칸이 세운 「역참(驛站)제도」라는 독특한 통신망은 광대한 제국의 통치를 매우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역참제도는 대칸의 명령과 각종 정보가 빨리 전해질 수 있도록 40㎞마다 「참」이라는 역을 두고 숙박시설 식료 말을 구비해 놓은 것. 전령들은 릴레이식으로 하루에 5백㎞씩 주파, 카라코룸에서 유럽까지 보름이면 도착했다고 한다.
이 통신로는 20세기 초까지 가장 빠른 길이었고 그 후 유라시아 횡단철도가 건설되어 군사로 겸 통상로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데이가 죽은 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면서 몽골제국은 차츰 몇개의 한국(汗國)으로 분열되어갔다. 특히 1259년 일한국의 카잔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자 종교를 두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일한국에서는 기독교도들이 몰살당했고 쿠빌라이칸은 이슬람신도들을 탄압, 중국에서 추방해 버렸다.
종교에 관용하라던 칭기즈칸의 충고를 듣지 않은 몽골인들은 분열했고 잇단 경제 정치적인 갈등으로 결국은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다. 또 전쟁을 통해 건설된 몽골제국은 정복이 끝나고 전리품의 유입이 중지되자 정복된 정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고 말았다.
몽골은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세계에서 두번째의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2백50여년간 몽골인에게 지배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인들은 칭기즈칸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게 하는 등 민족주의를 철저히 탄압, 영웅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러나 구소련 붕괴 후 자주성을 되찾은 몽골은「칭기즈칸의 부활」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세우는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칭기즈칸의 신화」가 강요된 오랜 침묵을 깨고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지배와 역사적 의미
몽골제국이 출현하기 전에도 유라시아의 초원을 무대로 등장했던 여러 유목국가들이 있었지만 중동이나 유럽을 직접 침략했던 예는 그리 흔치 않다. 과거 스키타이인들이 중동으로 들어가 아시리아제국을 무너뜨렸고, 아틸라의 훈족이 센강을 건너 로마―고트 연합군을 대파하고 이탈리아로 들어가 로마를 포위한 일이 있었지만 그들이 그곳에 국가를 건설하지는 않았었다.
몽골인들의 정복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의 건설자인 칭기즈칸이 북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이 지역들을 자기 제국의 일부로 삼아 직접 지배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유목민의 아들이었고 그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초원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의 원정은 「정복」이 아니라 「응징」을 위해서 실행된 것이었다.
중동과 러시아에 대한 몽골의 지배는 칭기즈칸 사후에 실현되었다. 그 배경에는 이 두 지역에서 전개된 상황과 몽골 내부의 사정이 있었다. 중동에서는 험준한 요새를 근거지로 삼는 소위 「암살자단」이 골칫거리로 등장했고, 러시아에서는 킵착, 불가르와 같은 유목민들의 활동이 몽골제국의 외곽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에 이러한 반몽골세력을 분쇄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한편 몽골의 군사귀족들도 가축만 풍성한 초원이나 칸의 직할지인 북중국과 중앙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영역을 정복하고 그 과실을 향유하기를 원했다.
결국 이러한 사정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정복이 추진되었고, 그것은 칭기즈칸의 경우와는 달리 「정복」과 「지배」로 이어졌던 것이다.
몽골군의 러시아 원정은 1235년에 단행되었다. 원정군은 모두 12만명에 이르렀다. 칭기즈칸의 장손 바투가 총사령관이자 우익군을 맡고 오고데이칸의 장자 구육이 좌익군을 담당하여 1236년부터 볼가강을 건너 작전이 시작되었다. 1237년 킵착과 불가르를 경략하고, 그 다음 해에는 모스크바를 비롯한 도시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1240년 수도 키예프를 잿더미로 만든 몽골연합군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들어갔다.
1241년 4월9일 저 유명한 리그니츠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몽골군에 맞섰던 2만명의 폴란드―게르만 연합군은 괴멸되고 말았다. 그해 겨울 몽골군은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크로아티아로 들어갔다. 헝가리 국왕은 이미 도망친 지 오래였고 이교도 몽골군에 대한 「십자군」의 소집을 외치는 교황 그레고리9세의 호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야말로 유럽의 기독교세계는 몽골군의 말발굽을 저지할 아무런 힘도 없었다.
이때 몽골군은 갑자기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몽골 초원에서 오고데이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몽골 장군들에게는 유럽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보다 누가 다음 칸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그들의 운명에 더 중요했기 때문에 한가롭게 기독교도들과 전투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투는 몽골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관계가 나쁜 구육이 칸에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남러시아 초원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고 이것이 킵착한국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이로부터 거의 3백년 동안 「타타르의 멍에」에 매여 살았고 그 상처는 지금도 러시아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중동 정복은 이보다 약 10년 뒤에 시작되었다. 쿠빌라이칸이 즉위한 뒤 자기 동생 훌레구를 보내 「암살자단」과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없애도록 한 것이다. 이슬람과 기독교 지도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암살자단도, 이미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칼리프의 바그다드도 몽골인들에게 그다지 힘든 상대가 아니었다. 훌레구의 군대는 1258년 1월29일 바그다드를 포위했고 2월10일 마지막 칼리프가 항복했다. 몽골인들은 칼리프를 교외의 벌판으로 끌고 가 카펫에 만 뒤 말발굽으로 짓밟아 죽였다.
칼리프는 아무리 유명무실했을지라도 기독교권의 교황과 같이 이슬람권의 단일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칼리프의 죽음과 칼리프체제의 소멸은 모슬렘들에게 커다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칼리프 대신 이교도 몽골인이 다스리는 일한국이 들어섰고 이로써 이슬람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들은 태평양에서 지중해, 시베리아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골인들이 파괴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더러 최초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도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서히 과거의 번영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여러 지역과 문명이 하나의 정치체제 안에서 통합되면서 경제적 문화적 교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동방에 대한 서구인들의 무지는 마르코 폴로의 글이 보여주듯이 보다 정확한 지식으로 대체되었고, 중앙아시아나 이탈리아 출신의 국제상인들은 초원과 사막과 바다를 누비면서 경제에 활력을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몽골제국이 인류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유라시아」라는 하나의 통합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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