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 /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자료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8. 15:37
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
[조선일보 2005-02-10 17:18]    

조선·청의 국경…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드러나
백두산 부근 북 영토서 시작, 중 송화강 본류로 흘러
"간도지역 영유권은 한반도에" 우리측 주장 확인

[조선일보]

간도(間島)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을 일으켰던 토문강(土門江)의 실체를 본지 취재팀이 확인했다. 토문강은 현재도 백두산 천지 부근 북한 땅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흐르며, 천지로부터 동쪽으로 18㎞ 떨어진 ‘17호 국경비’에서 중국·북한 국경과 만난 뒤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송화강(松花江)과 합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토문강이 중국측의 주장처럼 현재의 두만강이 아니라, 별도로 존재하는 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토문강이 두만강과 별도로 실재하는 강이라면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 설정에 대해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한다’는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비의 문구는 그 의미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토문강 동쪽 동간도(東間島) 지역의 영유권은 한반도 쪽에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 주장이 재확인 되기 때문이다. 1909년 일제가 조선을 대신해서 청나라와 체결해 간도 땅을 넘겨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주장도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중국 길림성 도문시(圖們市)로부터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까지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진 도로는 2차선 비포장 길이다. 이 길로 접어들기 위해 화룡(和龍)에서 남평진(南坪鎭)으로 향하는 도중 무장한 중국군이 차를 세운다.

“탈북자를 찾아내려는 겁니다. 저 사람들 요즘 독이 바싹 올라 있단 말입니다.”

현지 안내인이 목소리를 낮춰 설명한다. 서쪽으로 차를 몰아 광평(廣坪)의 군부대를 지난 뒤부턴 마을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턴 백두산 기슭이다. 이 길과 만나는 네 줄기의 하천은 모두 오도백하(五道百河)로 흐르는 물줄기다. 그 중 세 번째 강줄기는 북한 쪽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다.


‘기점으로부터 301㎞’라고 씌어진 작은 표지석을 지나자 얼마 안 가 그 세 번째 ‘강’이 보인다. 폭 15~20m 정도의 이 강줄기는 물이 말라 바닥이 훤히 드러나 있다. 강바닥 돌들 위로는 얼어붙은 눈이 단단히 덮여 있다. 강줄기를 따라 약 3㎞를 걸어 올라갔다. 강줄기는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 속에서 점점 경사가 급해진다. “더 들어가면 자칫 국경을 넘어갈 수가 있소! 그만 돌아가오.” 안내인의 목소리다. 앞쪽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하나 보인다. 언덕으로 이어진 길을 200m 정도 걸어가니 정상에 초소가 하나 있다. 창문으로는 김이 뿜어 나온다. 중국군의 초소겠거니 생각하고 그 앞까지 걸어간 순간, 갑자기 초소에서 외투를 입은 군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온다. 북한 군인이다.

이쪽을 본 북한 군인은 눈을 크게 뜨더니 순간적으로 어깨에 맨 총에 손을 댄다. 그도 무척 놀란 표정이다. ‘이미 국경을 넘어선 건 아닐까’란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초소 왼쪽에 붉은 색으로 글씨가 씌어진 비석이 있다. ‘中國 17’. 백두산 천지 남쪽으로부터 두만강 상류까지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표시한 21개의 국경비 중 열일곱 번째 비석이다. 비석 앞에서 동서 방향으로 이어진 좁은 길은 중국군과 북한군이 공동으로 순찰하는 ‘순라길’이다. 국경까지 온 것이다.

여차하면 총을 겨눌 기세인 북한 군인을 뒤로 하고 오른쪽 강줄기로 향한다. 계속 가면 백두산 천지까지 이어진다는 순라길과 강이 만나는 곳에 작은 나무다리가 있다. 강 폭은 약 5~6m 정도. 물이 말라 있었고 숲에 가려 시야도 좁았지만, 상류는 바로 앞 북한 땅 깊숙한 곳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조금만 더 상류로 올라가면 백두산 정계비로부터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토퇴(土堆)와 석퇴(石堆)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이곳 주변에서 20년 동안 산림감시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국인 A씨는 “북한쪽으로부터 물줄기가 나오는 하천은 이 근처에서 이곳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겨울엔 건천이지만 봄부터 8~9월까지는 물이 흐른다고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천지 동남쪽의 분수령은 토문강의 강원(江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토문강의 흐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청나라측은 국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토퇴·석퇴를 쌓을 것을 조선측에 주문했다. 바로 이 토퇴·석퇴가 이어져 있던 강이 바로 토문강이었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 결과 양측이 작성한 지도에서 토퇴·석퇴가 있었던 강은 현재의 중국 지도에는 ‘오도백하(五道白河)’로 표시돼 있다. 간도협약 직후인 1909년 일제 통감부가 작성한 지도 역시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명기하고 있다.

육락현(陸洛現)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대표는 “많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토퇴·석퇴가 있는 토문강 발원지는 현재 북한 영토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토문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어떤 지점에서 땅 밑으로 복류하고 다시 땅 위로 흘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기록과 들어맞는 것은 ‘17호 국경비’ 옆의 하천이다.


(백두산=특별취재팀)





현재 백두산에 대한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자료 

 









 

[퍼온자료]

 

● 지세소고(地勢小考)

 

백두산은 압록, 두만, 송화 세 강의 발원이다. 백두산 천지는 이기적으로 백두산에 내린 물을 가둬 놓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달문을 통해 흘려 보낸 물이 송화강이 되는 외에도 가볍고 구멍 투성이의 화산석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스며 맑은

물을 더 맑게 걸러 바깥 쪽 군데군데에서 용출시켜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본류 또는 지류가 된다.


백두산 가는 길의 휴게소에서 구한 길림성지도를 훑어보더라도 송화강쪽에 다섯 개의 백하(白河), 세 개의

송강하(松江河), 조자하(槽子河), 제자하(梯子河), 만강(漫江), 금강(錦江)등 이름 있는 하천만 해도 열 두개나 된다.

또 중국 쪽에서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일도도하(一道淘河)로부터 십구도도하(十九道淘河)까지 열아홉 개나

되니 가히 천지가 베푸는 그 폭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은 남쪽 한반도와 북쪽 만주지방에 전혀 다른 형상의 지세를 꾸민다. 남악북야(南岳北野)다.


북쪽은 천지를 둘러싼 영봉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산봉우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동측에 2185m봉, 2058m봉과

서측에 2305m봉, 2222m봉이 지형도에 표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천문봉 꼭대기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산이라 할만한 봉우리는 보이지 않고 한없이 내려가는 경사면에 천지가 흘려보낸 물길과 가히 수해(樹海)라 할 수

있는 밀림이 펼쳐질 뿐이다.

몇 리나 내려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끝자락에서부터는 또 끝없는 벌판과 구릉이 펼쳐져 산다운 산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백두산 남쪽은 그야말로 산. 산. 산이다. 백두산 장군봉(2,750m)을 떠나 대연지봉(2,360m)과

간백산(2,164m)을 거쳐 소백산(2174m)까지의 백두대간에만 해도 해발 2,000m가 넘는 거봉들이 열 한 개나

줄을 서고, 대연지봉에서 동쪽으로 벋은 소위 장백산맥에도 2,000m가 넘는 봉우리가 세 개나 있으며,

제비봉(2,572m)에서 압록강 서편을 따라 남하한 무명의 산줄기는 압록강 지류에 의하여 단명하지만 여기에도

2,000m 이상 봉우리가 네 개나 있다.

그 외에도 삼기봉(2,740m)동쪽으로 벋은 줄기에 두 개. 백두대간이 대연지봉에 이르기 전 2,383m에서 동쪽으로

벋은 줄기에 두 개 등 백두산 남쪽 지근거리에 2,000m이상의 거봉들이 무려 스물 두개나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다.


백두산이 꾸며 놓은 주변의 지세는 남악북야(南岳北野)란 말이 아주 적절한 것 같다.


● 산명소고(山名小考)


백두산은 산 이름도 무려 여덟 개나 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두산은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白山), 태백(太白), 장백(長白), 백두(白頭),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등으로 불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도태, 태백이라 불렀고, 금(金)대에 백산, 장백이라 했고, 고려 광종 10년에 처음으로

백두산이라 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우리는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르고, 중국 쪽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 부른다.


백두산의 이름을 '불함(不咸)'이라 한 것은 '속마음을 감추고 함부로 내 보이지 않는 산'이란 뜻이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최근 중국의 1인자 강택민 주석이 두 번이나 찾았으나 그 얼굴을 들어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어느 무명시인이

여섯 번을 찾았어도 한 번도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푸념 어린 시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는

대목에서 이 이름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백산(白山)'은 '밝은산' 즉 '밝산'을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생긴 이름인데 '높고 큰 밝산'이란 뜻으로 '태백(太白)'

또는 '장백(長白)'이라 부른 것이다.

한자 '長'자는 어른, 長者를 말한다.

'개마(蓋馬)'는 '까마득하게 높은 산' 뜻의 한자 표기이며, '도태(徒太)'는 '무리 중에서 우뚝 뛰어난 큰 산' 뜻이다.


'백두(白頭)'는 '흰머리'란 뜻인데 이번에 서백두에 올라보고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여러 개의 봉우리와 산등성이에

적설이 없는 여름에도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덮인 화산재가 마치 하얗게 쉰 흰머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은 조선 영조 때 학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에는 '청나라 사람들의

기록에는 이 산을 「장백산은 곧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我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적고, 역자(譯者)의

해설에 「가이민상견아린이라 함은 여진족의 주어인데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그곳 백성이나 장사꾼이 노래하는

굳센 우리 이웃 산'이란 뜻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정확한 뜻은 여진족의 말을 연구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여진족 사람들도 백두산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이름인 것 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 수목소고(樹木小考)--- 자작나무, 전나무, 잎갈나무, 마가목, 사스레나무, 소나무,


만병초 

백두산 길목의 마지막 마을 이도백하(二道白河)부터는 장백폭포 쪽이나 서백두산 쪽을 막론하고 길이 가르는 틈새만

있을 뿐 양 옆은 하늘을 찌르는 쭉쭉 뻗은 원시림의 나무들이 시야를 가린다.


백두산 원시림에 들어서는가 싶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영화 ‘닥터지바고’를 말하게 한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깔리고 여인의 하얀 종아리처럼 미끈하게 벋은 자작나무 숲길에 두 연인을 실은 마차가 달리는

풍경! 숲 속의 귀족, 숲속의 가인(佳人), 나무의 여왕 등 온갖 찬사가 붙은 자작나무다.


자작나무가 집단 군무(群舞)로서 시선을 끈다면 독불장군처럼 거구(巨軀)로서 으시대는 나무가 젓나무다.

고개를 쳐들어도 차창으로는 그 끝을 볼 수가 없게 높다.

젓나무는 촘촘한 상록 침엽의 가지 위에 하얀 솜을 얹은 크리스마스 트리 처럼 한 품으로 겨울에 더 뽐내는 나무다.


"여기는 젓나무가 한데 몰려 있다" 싶어서 눈을 부비고 자세히 보면 그것은 전나무가 아니다.

우리 시골에서 많이 보던 낯익은 낙엽송(일본잎갈나무)을 생각케 하는 우리 토종의 잎갈나무(또는 이깔나무)다


키 큰 자작나무와 젓나무, 잎갈나무 덩치들 속에서 숨도 크게 못 쉬는 듯 쪼그리고 앉은 작은 키의 마가목, 신통하게도

작고 새빨간 열매 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해발 고도가 점점 높아져 수목한계선(해발1800-2000m)에 가까워지면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자작나무가 더

극성을 부리는 듯 온 산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래쪽에서 보아온 미끈한 자작나무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키도 작거니와 줄기와 가지가

쫌스럽게 오그라지고 구불구불하다. 기온이 낮은 곳이니까 제대로 크지 못했거니 하고 그냥 넘어가지만 사실은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사스레나무다.


우리나라 산이면 으레 주종을 이루는 소나무가 백두산에서는 귀한 편이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소나무는 그 줄기가

붉은 색을 띄고 미끈하게 하늘로 치솟은 미인송(美人松), 적송(赤松)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민족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소나무다.

연길로 돌아오는 길가에 선 소나무가 ‘미인송’이란 칭호를 얻게 된 전설을 가이드가 들려주었고, 용정 비암산의

일송정 푸른 솔은 없었지만 함께 불렀던 ‘선구자’ 노래 가사에도 소나무가 나온다.


서백두산을 오르는 중에 나무인지 풀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게 땅에 딱 달라붙은 활엽 관목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이것이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상록의 만병초라는 나무다. 그것도 다른 곳에서는 보기가 더욱 힘든 꽃이 노란

노랑만병초다.


● 역사소고(歷史小考) -백두산정계비와 한-중 국경이 정해진 경위-


숙종 38년(서기 1712년)에 청태조가 오라(烏喇: 현 길림성지역)총관 목극등(穆克登)을 조선에 보내서 백두산

주변의 국경을 분명히 하자고 하여 접반사 박권(朴權), 군관 이의복(李義復), 역관 김응헌(金應 )을 함께 보내어

백두산에 올라 물길을 살펴보고 동남방 약 4Km, 해발 2,200m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는데 이것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다.


이 비문에 이르기를,


'대청(大淸) 오라총관 목극등은 변방의 경계를 조사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요,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51년 5월 15일. 필 첩식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군관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 이라 새겼다.


이 비문에는 조선측의 접반사(接伴使) 박권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박권은 고령을 핑계로 백두산에 오르지

않고 군관과 역관만 딸려 보냈기 때문이라니 이 중대한 나라 일을 이렇게 소홀히 취급했던 것이다.


후대에도 이 비문의 핵심인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륵석위기)'

중에서 '東爲土門(동위토문)'은 토문강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되어 왔다. 즉 토문강(土門江)을 조선측은 송화강의

원류인 오도백하(五道白河)라 해석 했고, 청나라측은 두만강(豆滿江)이라고 해석했다.


고종17년(서기1880) 청나라는 돌연 '토문(土門)'은 '두만강(豆滿江)을 뜻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고,

융희3년(서기1909년)에 만주 침략의 야욕을 품은 일본이 북경에서 청과 회담하고 두만강이 한-청국경이라고

임의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서 두만강 북쪽 간도 전역이 만주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그 후 만주사변 때 이 비는 일본에 의하여 슬그머니 제거되었다 한다.


 ▶ 2005년 8월 26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토문강 =/= 두만강' 中공식문서 발견'


64년 中.朝 국경의정서에 '별개로 구분'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별도의 강이라고 기록한 중국 정부의 공식 문서가 처음

발견되었다. 1712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에서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정한 '토문강'에 대해 중국은 '두만강과

같은 강'이라고 줄곧 주장해 왔다.


  박선영(朴宣 삼수변에令) 포항공대 교수는 25일 "1964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어진 '중조(中朝) 변계의정서'를

이번에 찾았다"고 밝혔다.

1962년 10월 12일 김일성-저우언라이(周恩來)가 서명한 '조-중 변계조약'에 따라 국경을 확정한 이 비밀문서에는

중국측 천이(陳毅)와 북한측 박성철(朴成哲)의 이름이 들어있다.


  의정서는 당시 새로 설정된 압록강에서 두반강까지의 북한-중국 국경을 설명하며 ▲제9호와 10호 국경비를

연결하는 국경선 사이로 흑석구(黑石溝)가 지나가고 ▲그 위치는 9호비 동쪽 1229m 지점이며 ▲'흑석구'는

곧 '토문강'이라 명시하고 있다.


  본지 확인결과 흑석구는 현재 중국측 지도에 묵석구(墨石溝)로 표기돼 있으며, 백두산 부근에서 시작돼

북한-중국 국경을 지나 송화강의 지류인 오도백하(五道白河)와 만난다. 유석재기자


  ▶ 토문江은 두만강 아니다

  2005년 8월 26일자 동아 일보에 게재된 "토문江은 두만강 아니다. 60년대 中문서 확인. 포항공대 박영선교수---

'간도는 중국땅' 억지 드러나"(추가)


  백두산정계비에 조선과 청의 경계선으로 언급된 토문(土門)강이 그간 중국이 주장해 온 대로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松花)강 지류임을 중국 정부가 인정한 1960년대 공식 외교 문서가 확인됐다.


  포항공대 박선영(朴宣怜-중국 근현대사) 교수는 "북한과 중국이 1964년 3월 공동으로 작성한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 의정서 사본에서 토문강과 두반강이 분명히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조중변계조약은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비밀리에 체결한 것으로 알려진 국경조약. 이 조약엔 토문강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2년 뒤인 1964년 조약의 내용을 자세히 밝히는 의정서를 작성하면서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등의 국경에 관한 내용을 추가했다.


  박교수는 "의정서에 기록된 국경 팻말의 위치를 살펴보면 이 팻말들이 헤이스허(黑石河)를 지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 지명 옆에 토문강이라고 병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헤이스허가 바로 토문강임을 인정한 것"이라면서

"지도상으로 보면 헤이스허는 쑹화강의 지류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이 세운 백두산정계비에는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토문강이 쑹화강 지류라면 과거 간도로 불리던 만주지역은 물론 연해주 일부에 대해 한국의 영토로 귀속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박교수는 "중국 스스로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르다는 것을 외교문서에서 인정했다는 사실은 30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간도분쟁을 푸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이광표 기자


  ▶ 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

  2005년 2월 10일 조선일보 발행 月刊山 백두산특별취재팀의‘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조선·청의 국경…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드러나---', '백두산 부근

북 영토서 시작, 중 송화강 본류로 흘러---', '간도지역 영유권은 한반도에" 우리측 주장 확인---', 등의

흥분된 부제가 붙어있다. 그 내용을 전재한다.


  간도(間島)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을 일으켰던 토문강(土門江)의 실체를

본지 취재팀이 확인했다.

토문강은 현재도 백두산 천지 부근 북한 땅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흐르며, 천지로부터 동쪽으로 18㎞

떨어진 ‘17호 국경비’에서 중국·북한 국경과 만난 뒤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송화강(松花江)과 합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토문강이 중국측의 주장처럼 현재의 두만강이 아니라, 별도로 존재하는 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흐르는 토문강은 오도백하(五道白河)의 지류다. 나중에 송화강·

흑룡강과 합류한다. 토문강과 두만강은 서로 다른 강이다.


토문강의 위치 요도





토문강이 두만강과 별도로 실재하는 강이라면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 설정에 대해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한다’는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비의 문구는 그 의미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토문강 동쪽 동간도(東間島) 지역의 영유권은 한반도 쪽에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 주장이 재확인

되기 때문이다.

1909년 일제가 조선을 대신해서 청나라와 체결해 간도 땅을 넘겨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주장도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천지 동남쪽의 분수령은 토문강의 강원(江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토문강의 흐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청나라측은 국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토퇴·석퇴를 쌓을 것을 조선측에 주문했다. 바로 이 토퇴·석퇴가 이어져

있던 강이 바로 토문강이었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 결과 양측이 작성한 지도에서 토퇴·석퇴가 있었던 강은 현재의 중국

지도에는 ‘오도백하(五道白河)’로 표시돼 있다.

간도협약 직후인 1909년 일제 통감부가 작성한 지도 역시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명기하고 있다.


  육락현(陸洛現)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대표는 “많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토퇴·석퇴가 있는 토문강 발원지는

현재 북한 영토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토문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어떤 지점에서 땅 밑으로 복류하고 다시 땅 위로 흘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기록과 들어맞는 것은 ‘17호 국경비’ 옆의 하천이다.

신형식(申瀅植) 간도학회 회장은 “토문강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바로 그 하천”이라고 말했다.


▶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2006.9.9. 조선일보 이덕일 舍廊)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는 1709년 프랑스 선교사 레지 등에게 만주를 비롯해 전 중국 땅을 실측케 했다.

  이 때 측정 결과가 42장으로 구성된 당빌 신부의 '새 중국 지도'인데, 여기서 조-청(朝-淸) 국경은

압록-두만강 북쪽 수 백리로 표시된다.


  강희제가 1712년 오랄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낸 것은 이 때의 측량 결과대로 조-청 국경을

확정하라는 뜻이었다.

  조선은 우참찬 박권(朴權)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를 보냈다. 둘은 백두산을 90리쯤 오르다가

목극등이 나이가 많고 길이 험하니 내려가라고 말하자 (박권이) "저와 관찰사가 뒤처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숙종실록' 38년 5월 15일) 라며 내려갔다.


  그래서 역관 김지남(金指남) 경문(慶門) 부자가 대신 따라갔다.

이들 부자가 편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는 "백두산 경계를 정할 때에 공의 부자가 산꼭대기에 올라 손으로

가리켜 구획했는데, 웅대함이 밝고 곧았으므로 목극등이 다투지 못하고 공의 말대로 따랐다" 라고 전한다.


  이 때 세운 백두산 정계비의 '동쪽은 토문강[東爲土門]' 에서 토문은 송화강(松花江) 지류로서, 이에 따르면

현재의 화룡(和龍), 안도(安圖), 연길(延吉)과 그 동쪽은 조선 영토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두만강의 중국식 표기인 도문강(圖們江)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청나라 가경(嘉慶)

25년(1820)의 상황을 그린 중국 사회과학원의 '중국 역사지도 청(淸) 시기' 편은 송화강 서쪽 휘발하(揮發河)의

지류를 도문하(圖們河)로 표기했다.

  이에 따르면 통화(通化), 환인(桓仁), 집안(集安)까지도 조선령이라고 주장해야 할 판이다.


  최근 중국 국지전략연구기구의 '중국-조선 국경선 분쟁의 발단' 이란 논문은 변경 지식이 부족한 무관(武官)

출신 목극등이 조선 관원에 의지하여 국경선을 잘못 그었다고 주장했다.


  목극등은 레지의 측정결과보다 청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 박권을 따라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은 1992년 (한-중)수교 당시 한국이 백두산 천지와 연변 지구의 귀속문제를 제기했다고 전한다.

1992년 외교부가 김지남 부자라면, 중국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지금의 (한국)외교부는 상국(上國)의 한마디에

벌벌 떨던 박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