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 읽는 성경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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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음과 같은 분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첫째,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만 일삼는 비종교인 및 타 종교인들 둘째, 성경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실천하기를 원하는 깨어있는 신앙인들 셋째, 성경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허락치 않는 열렬한 성경 추종자들
이러한 분들께 이 글은 성경을 제대로 알고 비난할 수 있도록, 성경을 제대로 알고 신앙할 수 있도록, 성경을 제대로 알고 추종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을 허심탄회하게 읽으십시오
그런 후에도 자신이 고수해 온 관념이 옳다 여겨지고 추호의 부족함도 없다고 느껴지신다면, 그런 분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 당당하게 자신의 관념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기존의 관념에 혹시라도 회의가 드시는 분들은 그 문제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 바로잡으신 후에, 과감히 관념의 벽을 헐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타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이 여러분께 드리는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당부드리건대, 부디 중도에서 성급하게 자신의 감성에 굴복해, 이 글을 팽개치는 나약한 패배자나 낙오자는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참 진리에의 열정을 안고, 부단한 정진을 통해, 항상 꿋꿋한 승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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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성서(창세기)의 형성과 경전의 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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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료층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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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적 사료층]은 창세기중 '1장∼2장 3절'까지의 기록으로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가 된 후에 나타난 제사학파들에 의해 쓰여진 사료층이며, 창세기 '2장 4절∼3장' 끝까지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이 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3장까지는 두 개의 사료층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셈입니다. |
2> 혼합구성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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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내용은 문헌으로 기록되지 못하고 구전으로만 전승되어 오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기간의 전승으로 인해 상당 부분이 변질되기에 이르렀고,
또한 사료들(이 외에도 에로히스트 사료층과 신명기적 사료층이 존재함)간의
내용상 이질성이 컸기 때문에 어느 사료를 정설로 삼아야 할지 결정이 불가능해 져 결국 두 사료층을 함께 혼합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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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절충적 해석과 민족신의 개념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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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 사료층은 같은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이 판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는 실로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사료층의 가치를 모두 인정한다는 전제하에 아래와 같은 절충적 해석을 내려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먼저 엘로힘신이 천지창조를 시작하여 창조를 끝마친 다음에 다시 야훼신이 부분적으로 창조의 능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엘로힘신은 곧 전체우주를 창조한 신이며 야훼신은 다시 부분적인 세계를 창조한 제2의 신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재미있는 상황을 설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신에도 천지(宇宙)를 창조한 우주 절대신이 있으며, 특정 민족의 시원신화(始原神話)에 등장하는 민족 고유의 민족신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천조대신', 중국의 '반고', 그리스의 '제우스', 인도의 '3신(크리슈나, 비슈니, 쉬바)'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조 3신인 '환인, 환웅, 단군'이 이 후자에 해당될 수 있고,
현재 기독교에서 우주의 유일한 절대신으로 추앙받는 '야훼(여호와)' 역시 이스라엘의 민족신(地方神)이라고 해석을 내리면 자연스럽게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
4> 신교와 구교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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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은 70인에 의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BC 3C중엽부터 조국을 떠나 흩어져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를 다시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하여 이 번역문이 구교(카톨릭)의 경전이 되었고, 또한 조국 팔레스타인을 떠나지 않고 살던 유태인들이 사용하고 있던 히브리 경전은 오늘날 신교(개신교)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구약은 그 내용이 대부분 동일하지만 구교의 구약은 소위 가경이라고 부르는 [에스라 Ⅰ], [솔로몬의 지혜], [세 소년의 노래] 등이 신교의 구약에 더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교에서는 이들 가경의 내용이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여 가경의 삽입을 일체 거부함에 따라 신, 구교간의 분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
2. 신약성서의 형성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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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의 훼손된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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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유심히 보신 분들은 장과 절만 존재하고 그 내용이 삭제된 구절들을 발견하고는 한 번쯤 의아하게 여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구절들은 총 8곳으로 아래에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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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에 근거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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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해서 성령의 감화로 쓰여진 성경에 이런 황당한 문제가 발생했는지, 신약성서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과정을 되짚어 봄으로써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간략히 정리해 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서는 AD 4C-10C 사이에 쓰여진 복사물들이 편집된 것이며 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복사물의 수는 1500여종에 이르지만 내용이 같은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본중 1844년에 시나이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되어 시나이 사본이라 불리는 복사물은 발견 당시 무려 16000여 곳이나 수정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면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초창기 기독교는 200년동안 구약성서 외의 다른 성서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 점차 교파간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조정할 목적으로 후에 신약성서로 인정받게 될 성서가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3) 16000여곳이나 수정된 시나이 사본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 신약성서가 완성되기까지 교파간의 다툼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으며 성서가 겪은 수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4) 우여곡절 끝에 일차적 완성을 본 신약성서는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AD 325년 1차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318명의 주교들이 "예수는 하나님이다"라는 교리를 채택하게 됩니다.
5) 이어 AD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2차 종교회의에서는 "신은 성부, 성자, 성신으로 존재한다."는 교리를 채택합니다.
6) 또 AD 431년 에페소스에서 열린 3차 종교회의에서는 "마리아를 하나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7) AD 451년 카르케돈에서 열린 4차 종교회의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데 대한 성경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8) 이러한 지속적 수정에도 불구하고 몇몇 성서상의 쟁점들은 계속 남아 있게 되어 16C까지 완성되었던 장과 절중 8곳을 훼손시켜 버리고 "없음" 또는 "X"표로 표시하는 수난을 성서는 겪어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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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내용상의 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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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가 겪은 우여곡절을 대변해 주는 또하나의 좋은 실례가 바로 복음서들간의 내용상 차이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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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야훼(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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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우리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민족신이라는 가정을 통해 창세기의 모순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좀더 심도 있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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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 구절을 통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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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호와에 대해 언급한 성경의 몇몇 구절들을 통해 약간의 힌트를 얻어 보고자 합니다.
1) 사무엘상 5:8-9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찌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하고...
2) 출애굽기 7:4-5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찌라.
3) 출애굽기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4) 레위기 18: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5) 민수기 15:41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6) 민수기 16:40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외인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7) 신명기 8: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쫓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다.
이처럼 구약성서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여호와의 모습은 관용과 사랑의 절대자보다는 전쟁과 질투의 신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자기 민족(이스라엘)에게는 자비와 사랑의 신으로, 타민족에게는 복수, 전쟁, 질투의 신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구약성서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기록하고 있는 숱한 전쟁과 무수한 살육은 이에 대한 또 하나의 단적인 증거입니다.
또 기독교가 로마를 제패한 이래 야훼신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야훼신의 품성을 닮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랍제국과 총부리를 겨누고 일촉측발의 위기속에서 3차 대전의 위험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민족신이었기에 일어난 일이며, 그런 까닭에 여호와는 다른 민족신에 대한 숭배에는 질투로 또 이스라엘의 수호를 위해선 복수와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2> 성경상의 상황 분석을 통한 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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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인의 하소연과 야훼의 보장
아벨을 죽이고 야훼로부터 추방을 당한 카인은 야훼에게 이방인이 자기를 죽일까 두렵노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러자 야훼는 "너는 야훼의 사람이라는 증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네가 살해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창세기 4:15)"고 대답하며 카인을 안심시킵니다.
그러나 결국 카인은 이방인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카인을 살해한 '야훼신의 권위가 통용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 대답은 바로 야훼신이 유대민족만의 민족신이라는 것으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2) 예수가 전한 하나님은 다른 분
예수는 이전의 기독교가 지닌 민족 종교로서의 성격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가 원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우주 주재자)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었지, 일개 민족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어디를 뒤져보아도 예수가 절대자를 '하나님' 또는 '아버지'라고 불렀지, 한 번도 '야훼(여호와)'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입증하는 좋은 예입니다. |
4. 예수의 신성(예수 ≠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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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존 교리상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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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독교의 교리에서는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신의 3위 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중 성자가 인간으로 화육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의 길을 걷다가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 하나님의 지위로 원상 회복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교리는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AD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2차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인데, 여기서는 과연 이 결정안이 충분한 타당성을 가진 주장인지 심도있게 재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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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말씀을 통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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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인가? 이를 먼저 성경구절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통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태복음 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 요한복음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3) 요한복음 8:42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 마가복음 13:32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예수)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5) 요한복음 7:28-29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6) 마태복음 24:36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예수)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7) 누가복음 24:49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라.
이처럼 성경의 많은 구절들에서 예수는 하나님과 자신을 상하의 관계로 분명하게 구분지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마지막 7)의 약속은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 당시 예수는 이미 인간의 육신을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아버지를 구분해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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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한복음 바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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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그는 자기의 땅에 왔으나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독생자니라"
이는 요한복음 1장 1-14절 내용 중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즉 이 요한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결론도 가능한데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크게 두 가지의 서술을 유심히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로 시작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기록한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와 같은 성경저자의 견해를 기록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 내용 중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방식의 서술이 종종 배치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한 문제가 아닐까요? 성경에서 예수는 결코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언급을 한 적이 없음을 상기해 주기 바라며, 최종적인 판단은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 드립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에서도 그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로 분류되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달리 연대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4복음서를 보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표현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요한복음은 저자의 무리한 주관 개입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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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사 종교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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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교와 이슬람교의 경전은 각각 '탈무드'와 '코란'입니다. 그런데 이 탈무드와 코란 역시 구약성서를 그 내용의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태교인이나 이슬람교인들 역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궁극적 신앙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하지만 구약성서를 동일하게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래 표에도 나와 있지만, 먼저 유태교에서는 "예수는 하나님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곧 하나님은 아니지만, 예언자로 볼 수는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재미있는 가정을 하나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만일 이스라엘이나 중동지방에서 태어났다면 물론 지금과 같이 하나님은 믿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열렬히 믿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요.
하지만 99% 이상이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그 사회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아니오! 예수는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을까요?
모르긴 해도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는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가능성이 몇 배는 더 컸을 것입니다.
5. 예수의 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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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서상의 기록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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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에서는 예수가 태어날 때까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가 14대요, 다윗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이주하는 중에 태어난 여고냐까지 14대요, 여고냐로부터 예수까지가 14대로서 도합 42대가 경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에서는 이와 같은 식으로 계산해 볼 때 도합 56대가 지나서야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서 보이는 조상들의 이름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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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택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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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복음서간의 차이에서 야기되는 성서의 권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차치하고, 과연 어느 족보가 더 큰 신빙성을 가지는 지를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족보를 표현하고 있는 기법을 통해 본다면 마태복음은 단정적, 선언적인 표현을 쓰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당시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의 단순 기록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족보상의 이름에서 중복이 없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다윗시대의 14대에 '예수'라는 이름이 나오고 여고냐 시대에는 '맛다디아'가 8대와 14대에 중복되고 '요셉'이 15대와 21대에 중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누가복음보다는 마태복음이 좀더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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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서의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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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이 족보가 함의하고 있는 숨은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기존의 입장과 문제제기 기존의 성경 해석에서는 예수는 직접 하나님의 영광(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 인간적 혈연의 개입은 완전히 배제해 왔습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의 조상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요셉과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지간에 불과할진대, 요셉의 족보를 이토록 꼬박꼬박 헤아려 가며 열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주장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성경 해석자들의 주관 개입 여부를 추정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에 대한 광적 믿음은 추종자들로 하여금 아전인수격 해석으로 몰아갈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의 권위에 근거한 재해석 기독교는 흔히 사도바울의 종교라고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바울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로 신약성서중 대부분의 내용이 바울의 편지나 가르침으로 엮어져 있다는 사실만 봐도 기독교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예수의 탄생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3-4절에서 바울은 "예수는 육신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왔고 영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 말에서 예수의 육신이 다윗의 혈통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예수가 잉태되는 과정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소상하게 그렸으며,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한 채 예수를 잉태하였다고 하였으니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굳이 '예수는 다윗의 혈통'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혈통'이라고만 주장한다면 '다윗의 혈통'을 이야기한 바울의 권위가 의심 스러워지니 신약성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바울의 가르침들을 신약에서 빼 버려야 할 것입니다.
또 반대로 바울이 말한 '다윗의 혈통'을 강조한다면 신약성서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예수의 잉태 과정을 몽땅 빼버려야 할 판이니 이 또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예수의 신성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 성경의 권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그다지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상식이라는 것을 무시하지만 않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 어머니의 양부모 사이에서 태어나며 온갖 짐승과 미물 심지어는 초목까지도 암수의 작용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양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성장해 어른이 되고 또 인생의 황혼기를 거쳐 결국 자연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때문이 아닌가요?
그런데 굳이 예수라고 해서 이 하나님의 섭리를 거슬러야만 한다는 주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 섭리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요?
먼저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해 영적 존재인 예수를 세상에 내 보내려고 하셨지만, 우선은 인간의 육신을 입히기 위해서 예수를 잉태할 수 있는 육신의 부모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받은 부모가 요셉과 마리아였던 셈이지요.
이 논리는 기독교 역시 영과 육이 분리된 형태로 인간을 규정하고 있기에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이 이야기한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란 표현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기술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 '다윗의 혈통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라는 표현도 상반(相反)이 아닌 상보(相補)의 관계로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3) 여전히 남는 문제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한 채 예수를 잉태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커다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두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교파간의 갈등으로 인해 성경의 형성과정에서 발생한 성경 자체의 왜곡이라는 문제와, 또 하나는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의 상식이 결여된 맹신에서 비롯된 해석과정상의 왜곡이라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성경이 요령 부득이하게 난해한 경전이 되어 버린 데에는 후자의 왜곡에 힘입은 바가 지대함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4) 티어링 박사의 견해 지난 1992년 9월 호주 시드니 대학의 신학교수인 바버라 티어링 박사가 [인간예수]라는 책을 영국에서 출간,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아래는 그 책의 내용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티어링 박사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기존 신앙에 대해서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녀는 4 복음서에 마리아가 동정녀로 예수를 낳았다는 내용은 없으며 이는 마리아와 요셉이 속한 엣세네파(바리세파의 한 계파로 금욕적인 율법을 지킨 청빈한 단체)의 결혼생활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엣세네파에서는 결혼전 여러해 동안 약혼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정식 결혼 상태에 들어가 아이를 낳은 뒤에는 남자가 다시 금욕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혼 상태에서 임신한 마리아는 엣세네의 율법상으로는 동정녀이지만 현대적 개념으로는 처녀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또 티어링 박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예수가 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6. 잃어버린 예수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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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비범한 기질을 나타내기 시작한 12세때부터 30세까지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 별이 뜨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 오는 등의 요란한 묘사를 생각해 볼 때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짐작컨대, 이 연유도 앞에서 언급한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에서 교파간의 이해득실로 빚어진 우여곡절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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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병궁 복음서를 통해 본 예수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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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궁(寶甁宮) 복음서}는 미래 '보병궁 시대'의 복음서라는 뜻이며, 이에 반해 구약·신약은 과거 '금우궁 및 쌍어궁 시대'의 복음서라는 말입니다.
이 보병궁 복음서는 '리바이 도우링'목사(1844-1911)가 천상 영계의 기록인 {아카샤(Akasha) - 우주심(宇宙心) 기록}을 계시받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서의 가장 큰 특징은 신약성서의 4대 공관복음서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빠져 있는 예수님의 12세부터 30세까지의 성장과정과 구도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예수께서 전하신 '가르침의 진수'를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이 보병궁 복음서를 통해 잃어버린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인도 오릿사주의 왕족인 '라반나'는 이스라엘의 제례에 참석하러 왔다가 예수의 총명함을 보고 예수에게 인도의 수학을 주선해 주게 됩니다.
2) '라반나'의 권유로 예수는 이스라엘을 떠나 인도 쟈간나스의 한 절에 들어가 4년간 수행을 하며 [베다]경전과 [마니]법전을 공부합니다.
3) 이 수행을 마친 예수는 의술을 배우기 위해 당시 인도에서 명성이 가장 높은 '우도카라'라는 의사의 제자로 입문합니다.
4) 예수는 의술을 배우며 유대의 [시편]과 [아베스타]경전을 읽고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익히게 됩니다.
5) 당시 예수는 평등사상에 심취했는데 결국 인도에서는 <카스트>라는 그들의 신분제도를 혼란시킨다 하여 예수를 논죄하기에 이릅니다.
6) 생명의 위협을 느낀 예수는 '라마나스'의 도움으로 인도에서 네팔로 피신하게 되고 그곳에서는 '비자빠찌'라고 하는 성자와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7) 네팔을 떠난 예수는 티벳으로 가서 당시 요동 최고의 성자인 '멘구스테'를 만나 티벳에 비장되어 있는 수많은 경전을 섭렵합니다.
8) 24세때 수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예수는 페르시아에 들러 자신이 태어날 때 찾아온 마기교 승려 '홀', '룬', '메루'의 3인의 동방박사와 재회합니다.
9) 집에 돌아온 예수는 오래지 않아 다시 아테네로 건너가 [아포로]라고 하는 성자와 대화를 나누며 희랍의 정신세계에 깊은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10) 25세가 된 예수는 이집트로 건너가 '형제단'이라는 성자들의 모임에 입회해 활동하며 최고의 칭호인 '그리스도'라고 하는 법명을 수여 받게 됩니다.
11) 30세가 된 예수는 비로소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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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마지막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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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면서 제자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한 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Eli Eli Lama Sabachthani :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로 번역되어 왔음) 라는 말 한마디를 크게 소리친 뒤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예수의 최후의 말씀은 티벳 라마불교의 진언(眞言)인 "엘리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 다라니" (Eli Eli Lama Sammach Sam Bori Daranii : '성자의 위대한 바른 지혜의 총지'라는 뜻) 로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극도로 탈진해 생사를 가늠하는 마지막 순간에 라마불교의 주문을 암송한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님의 인도·티벳의 구도 생활을 밝혀주는 결정적 증거의 하나입니다. 이 외에도 12세에서 30세까지의 예수의 행적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여러 문헌에 의해 역사적으로 고증되고 있습니다. |
7. 인류의 기원에 대한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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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서상의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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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의하면 최초에 태어난 인간은 '아담'과 '하와'로서 이 사람들은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에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함으로 해서 세상에는 아담, 하와 ,카인의 세 사람만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
2> 모순점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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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얘기는 나중에 후술되는 내용들과는 배치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예를 성경의 구체적 문구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야훼의 언약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을 알게 된 야훼신은 분노하여 카인을 그 지경에서 내쫒으려 하였습니다. 이 때 카인은 야훼신에게 통사정을 합니다.
"나를 이 지경(the face of the ground)에서 내 쫓으시면 나를 만나는 자(anyone)가 나를 죽일까 두렵나이다(창세기 4:14)"
이 말을 들은 야훼신은 카인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야훼의 증표(a mark)를 카인에게 주면서
"너는 야훼의 사람이라는 증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네가 살해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살해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7배나 더한 형벌을 받게 하리라"(창세기 4:15)
고 말씀으로 언약을 합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카인과 야훼신이 머리를 맞대고 카인의 죽음에 대해 걱정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카인은 물론 심지어는 야훼신조차도 이방인의 존재를 인정하며, 바로 그들로부터 카인이 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카인의 혼인과 죽음 또한 그 지경에서 쫓겨난 카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며 한 여자를 만나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창세기 4장 17절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카인은 안타깝게도 이방인들에게 살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카인의 아내는 대체 누구이며 과연 어디에서 왔단 말입니까?
그리고 카인을 죽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여기서 타민족의 존재는 더욱 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
3> 가장 합리적인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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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우리는 앞에서 민족과 민족신의 개념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그 개념을 도입하면 문제는 너무나 간단하게 풀리고 맙니다.
바로 카인은 어디까지나 야훼신에게서 갈라져 나온 유대 민족의 일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 밖에는 다른 민족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카인은 그 중 한 여인과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훼의 언약을 보장받은 카인이 죽은 것은 야훼의 권위가 통용되지 않는 다른 민족이 존재함을 보여 주며,
이를 통해 볼 때 그네들만의 독자적인 민족신(ex:아스돗 민족의 민족신 '다곤')이 존재할 가능성도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8. 인류 역사를 보는 성경과 과학의 상이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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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근거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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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이들은 인류의 역사를 6000년이라고 단정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아담'이 130세에 아들인 '셋'을 낳고, '셋'은 105세 때 '에노스'를 낳았으며, '에노스'는 92세 때 '게난'을 낳고 해서 '야곱'까지의 22대와, 또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41대의 족보, 그리고 예수의 탄생 즈음부터 사용한 서력기원을 전부 합산한 데서 결국 6000년이라는 기간이 도출된 것입니다. |
2> 과학의 입장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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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우리나라에서 4만년전의 5세 아이의 유골로 인정되는 화석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에 근거해 현대 과학은 인류의 역사를 몇 십만년에서 몇 백만년으로까지 추정하고 있으며,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시조는 지금부터 5만년 전에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과학에서 인류의 역사를 10000년이나 9000년쯤으로 잡고 있다면 그 정도의 오차는 문제제기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6000년과 50,000년이라는 차이는 타협의 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한 수치입니다. |
3> 종교가 인정한 과학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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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예수가 입고 있던 수의가 발견되어 이를 [성의(聖衣)]라 하며 온통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의는 정밀 측정 결과 예수의 수의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입증되자 그렇게 흥분하며 득의양양해 하던 광신도들조차도 입을 다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진위를 밝힌 것이 다름 아닌 바로 과학이었습니다. |
9. 원죄론에 대한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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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에 보면 야훼신이 인간을 창조하고는 그 태초의 인간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는 임의로 먹어도 좋으나 단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들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을 받고 인간들은 결국 선악의 열매를 따먹게 됩니다.
원죄론의 개념은 바로 여기서 근거한 것입니다. 태초의 인간들이 자신을 창조한 야훼의 분부를 거역하고 뱀(사탄)의 말을 믿고 따랐으므로 죄를 지은바 되었으며, 이 죄는 대대 손손 유전되게 되었으니 이 유전되는 죄가 바로 원죄(原罪)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논리가 너무나 억울하고 부당해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1> 원죄론의 성립과정과 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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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론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교리가 아닙니다. 그 과정에는 장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또 이면에는 시대적 요청으로 인한 절박한 필요성이 내재했습니다. 그러면 이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가 승천한 후 예수의 제자들 및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미처 글로 기록하지 못한 채 구약성서만을 가지고 복음전파에 나서게 됩니다.
2)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르고 결국 신약성서가 쓰여지게 되었으나 이때는 이미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진의와 의중이 많이 퇴락한 후였습니다.
3) 교파들간의 세력 싸움과 무리한 경전 편찬작업은 구약과 신약간의 무수한 괴리를 낳았으며, 결국 자가당착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많은 교리가 수정, 재생산되기에 이릅니다.
4)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타 교파와의 세력 싸움과 무리한 세력 확장은 점차로 난폭성과 잔학성을 띠게 되었고, 결국 이를 교리상으로 합리화할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었습니다.
5) 여기서 비로소 "인류의 조상이 야훼신의 뜻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므로 모든 인간은 야훼 하나님 앞에서는 명백한 죄인이다."라는 원죄론이 탄생하게 되어 종교의 인간에 대한 횡포가 정당화되기 시작합니다.
6) 확고한 교리상의 근거를 토대로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으며, 극단적으로는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진 죄인이기 때문에 부녀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이 살육당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살육을 정당화하는 교파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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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류의 수명으로 본 원죄론의 불합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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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이 죄를 범하면 그 죄의 영향이 몇 대 정도는 이어질 지 모르나 수십 대가 지난 후에는 점차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또한 아무리 원수지간이라 하더라도 몇십년 또는 몇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 그 원한이 희석이 되게 마련이지요.
결국 죄의 대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줄면 줄었지 늘어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순리에 대해서 역행하는 듯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단적인 예로 성경에 나타난 인류 조상의 수명을 통해 죄값의 대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아담의 10대 후손까지의 수명을 정리한 것입니다.
셋 : 912세 → 에노스 : 905세 → 게난 : 910세 → 마하랄렐 : 895세 → 야렛 : 962세 → 에녹 : 365세 → 므드셀라 : 969세 → 라멕 : 777세 → 노아 : 950세 → 셈 : 600세 ※6대손인 에녹의 수명이 유난히 짧은 것은 하나님의 기밀을 누설시켰다 하여 야훼신이 불 뿜는 마차로 데려갔기 때문임.
위 수치들로 계산해 보면 결국 아담으로부터 그 10대 후손들까지의 평균 수명은 824.5세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러면 이 수치를 오늘날 현대인의 수명과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그토록 대역죄를 범한 아담의 직계 후손들은 800세 이상의 생을 영위했으나, 영문도 모르는 채 태어나는 현대인들은 조상들의 죄값을 이어받아 기껏해야 70-80세의 수명 밖에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건 너무 불합리한 일이 아닐까요?
설혹 그 죄의 개념이 누적의 성격을 띤다 하더라도, 근대에서 현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인류의 평균수명이 다시 늘어난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10. 축복받은 민족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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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종의 분지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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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는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이렇게 삼색인종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태초에 창조된 인간이 남녀 각 1명씩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이 삼색인종의 분화에 대한 원인과 과정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상된 것이 바로 노아의 이야기입니다. |
2> 노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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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술에 취해 발가벗고 자는 노아의 하체를 본 아들 함은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이를 들려주었습니다.
2) 두 형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 줍니다.
3) 잠에서 깬 노아는 이를 알고 노하여 "야벳은 셈의 집에 같이 기거할 수 있도록 허락하며,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셈과 야벳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 (창세기 9:20-27)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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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아의 일화에서 유도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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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나안은 노예의 운명으로 오늘날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빼앗긴 팔레스타인이 되어 이스라엘인의 노예신세가 되었으며
2) 잘못을 저지른 함은 아프리카인의 조상이 되어 흑인으로서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3) 또한 셈의 후손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 아시아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 한국인도 이 셈의 계통이라고 합니다.
4) 야벳의 후손은 백인의 조상으로 오늘날까지 축복받으며 잘 살고 있습니다. |
4> 오늘날의 진정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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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늘날의 현실도 과연 그 이야기와 부합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선민으로 축복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제대로 나라조차 건수하지 못하고 세계의 유랑민이 되었을 뿐 아니라, 히틀러 시대에는 수백만이 학살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동안 중동전쟁 등 무수한 전쟁을 치르면서 부녀자들까지 완전무장 상태로 항상 전쟁에 대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있어야 할 운명인 팔레스타인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팔레스타인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기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조직, 영토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과연 주인은 종으로부터 삶의 터전을 빼앗아 생존을 위협해도 되는 것인지, 또한 종은 감히 상전에게 총부리를 겨누어도 되는 것인지 그저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
5> 여전히 존재하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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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의 부합성 여부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문제제기의 소지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먼저 작게는 과연 아버지가 자식들을 저주해 그들의 미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윤리적인 부분도 있겠으나 이 또한 넘어가기로 하고)
성경에 따르면 노아는 의인이어서 야훼신과 함께 동행도 하고 홍수 심판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엄연한 피조물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개 피조물인 그가 수치스러움이라는 지극히 개인적 감정으로 뱉은 저주의 말이 인류의 운명을 판가름 지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부분 또한 성경에 대한 광적 의존이 빚은 무리스러운 해석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굳이 문제를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 것 없이 그저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지 않으니 모르겠다"라고 하면 문제는 너무도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
11. 예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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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만을 통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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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요한복음 14장 6절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예수가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단언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성구를 통해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결론이 그리 간단히 내려질 수 있는 것일까요?
2) 시대적 소산물로서의 성경 위 성구를 이해함에 있어 우리는 성경이 가지는 시대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던 당시는 전통적인 유태인의 종교적 관습이 완고하리만큼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예수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전파하기 위해 무엇보다 구시대의 관습을 깨뜨릴 필요를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방편으로 자신을 통한 새로운 거듭남을 강조하는 화두를 대중들에게 던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는 그 구시대의 인습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무지한 대중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를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신중히 걸러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3) 다시 생산되는 교리 성경 문구를 시대적 소산물로 직시하지 못하게 되면 간혹 억지스러운 교리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예수보다도 훨씬 이전에 세상을 다녀갔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은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논리가 그 대표적 예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일부 양심 있는 이들은 그들을 몽땅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안되었던지 "그들이 가는 세계가 따로 있다"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이 논리는 비단 위 세 인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 시대의 인류와 그 이후라도 예수의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숱한 여타 민족의 국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엄격성을 따지자면 그 도출되는 결론이 너무도 부당해 보이는 이러한 논리는 과연 얼마나 대중적 공감대를 가질 수 있을까요?
또 그네들이 가는 세계가 따로 있다는 언급은 성경의 어느 구절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불완전한 표현이었으며 그를 보완할 수 있을 정도의 예수님보다 위대한 인물이 존재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
2> 말대에서의 가르침 퇴색을 예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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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이미 2000년 전에 말대를 맞이하고 있는 현세에서는 그의 가르침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 누가복음 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나의 말하는 것은 왜 행하지 아니 하느냐.
2)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 오직 내 가르침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
3) 마태복음 7:23 그 때에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할 것이며 내 말을 행치 않는 자들아 다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는 바로 지금의 (일부)기독교인들을 향해 하신 예수님의 일갈성입니다. 현재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자처한다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
12. 이성을 통한 성경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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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의 난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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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성경에 대해 논쟁이라도 일게 되면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니 이성으로 접근할 차원이 아니오" "신앙은 그저 믿는 것이지 따지는 것이 아니오" 라는 식의 힘빠지는 결론으로 못을 박아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세기 1:26)"하신 말씀에도 나와 있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함이 지당한 일입니다.
또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 자체가 곧 구원의 방편이 아니며 그 내용의 이해를 통한 실천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니, 인간은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이 많다면 이는 뭔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
2> 성령 감화를 통한 성경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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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밧모섬에 귀양갔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본 그대로 썼다고 하는 기록인데, 이 계시록은 그 의미를 터득하기가 심히 난해하다고 하여 묵시록(默示錄)이라고도 합니다.
흔히 이야기 하는 대로 이를 성령의 감화로 쓰여진 문장들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또다른 성령의 감화를 받은 신자라면 이를 능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기독교를 신앙하고 있는 사람과 또 이미 고인이 된 기독교 신앙인을 합한수는 수억에 달합니다.
그러면 그중 한사람이라도 성령의 감화를 받아 이 내용을 이해한 인물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당연하게도(아니면 의무감에서라도)자신이 성령의 감화로 이해한 내용을 설교나 매스컴을 통해 전달하는 것은 물론, 이를 쉽게 풀어써서 해설서라도 한 권쯤 펴낼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내용들에 대한 명쾌한 해설을 제시하는 이가 없으니 이는 어찌된 일인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아직까지 성령의 감화를 받은 이가 한 사람도 없단 말입니까? |
13. 자기 성찰을 당부드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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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고 그리스민족에게서 태어났다고 가정해 본다면, 지금쯤 사람들은 천지의 창조과정에 대해 설명하기를
"최초로 무한의 공간인 [카오스]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는 가슴이 넓은 대지(大地) [가이아]와 영혼을 부드럽게 하는 사람 [에로스]가 나타났고 이들로부터 어두움과 밤, 상공(上空)과 낯, 천공(天空)과 대양(大洋)이 탄생되었으며 그후에 5명의 남신(男神)과 6명의 여신(女神) 그리고 크로노스를 낳았다"
고 할 것입니다.
또 인류의 출현에 대해서는
"올림푸스의 신들은 먼저 황금의 종족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백은(白銀)의 종족, 청동(靑銅)의 종족, 영웅들, 마지막으로 철의 종족을 만들어 내었다"
고 하면서 이를 증거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는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하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도 영원히 존속될 수 있어야만 진리일 수 있는 것이지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된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진리일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진리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괴리에 대하여 그동안 "예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한다" "예수에 대해서는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자"고 결의하였고
"하나님은 왜 아버지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입막음을 위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기로 하자"고 결정하였음에도 성경에 대한 의문이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꼬리를 물게 되자,
기독교는 마침내 "성경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므로 성경에 대한 이해는 성령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전개하며 아예 입에다 자물쇠를 채워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모순과 괴리의 은폐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였던 것이지요.
과연 자신이 성경을 얼마나 제대로 아는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God)과 신(god)은 어떻게 다르고 하나님 또는 신은 영(sprit)과는 또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이에 답할 수 없다면 성신(holy god)과 성령(holy sprit)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역시 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창세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물(창세기 1:2)은 아직 천지를 창조하기도 전인데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 내용은 성경의 가장 서두에 있는 이야기인데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극단적으로는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를 모른다면 둘과 셋을 모름은 당연할 일일 뿐 아니라 마지막인 100은 더더욱 모를 것이고, 만일 하나를 아는 사람은 둘과 셋은 물론이고 100까지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물에 대해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정말 제대로 읽고나면 성경의 위대성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교파간의 이해득실로 무수한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 진실에 대한 순수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우리들에게 커다란 경종의 말씀들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경을 가슴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함께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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