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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黑齒常之 수수께끼 / 許皇后의 故鄕碑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9. 09:56

[이규태 코너]黑齒常之 수수께끼

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인 백제명장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가 풀릴 것 같다.‘당서(唐書)’에 백제 서부인으로 돼 있는 이 비한국계 성(姓)의 장수가 중국과 베트남 경계지역인 광서성(廣西省)에 있었던 흑치국(黑齒國) 사람이거나 흑치국을 봉(封)함받은 백제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이 외교관 출신 소진철(蘇鎭轍) 교수가 ‘백산학보’에 실은 논문에서 밝혀졌다. 흑치국 수수께끼는 5세기 중국의 송나라 정사인‘송서(宋書)’의 백제 영토를 적은 대목에서 비롯된다. 중국 땅인 진평(晋平)군 진평현도 백제 영토였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5세기 후기의‘양서(梁書)’에는 진평이군(二郡)으로 나온다. 이 진평현의 위치를 알고자‘중국고금지명대사전’(商務印書館 刊)을 보니 송나라에서 설치한 현으로 광서(廣西)국경 지역에 있었다 했다. 그렇다면 백제가 베트남 접경지역의 중국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소 교수의 논문에서 그 접경지역의 도시인 옹녕현(邕寧縣) 옹녕시에 백제 이름이 붙은 길이며 관공서를 확인하고 이 진평현과 백제의 연결 고리로 추정했다.

지금도 소수민족인 장족(壯族)의 자치지역이 돼 있는 이 지방은 고대의 흑치국으로 주(周)나라 성왕 때 흰사슴과 흰말을 바쳤다는‘먼 서쪽 변방의 오랑캐’로 적고 있다. 빈랑이라는 열매를 씹어 이빨이 검어졌다 해서 흑치국으로 불린 환상의 이 지역이 백제의 식민지라는, 다른 연결 고리로 망국 백제를 수복하려던 명장 흑치상지가 이 식민지 출신이란 추정이다. 중국 문헌인‘만성통보(萬姓統譜)’에 중국성으로 흑치성이 있으며 그 성을 가진 사람으로 흑치상지가 올라 있다. 이로써 당서에 기록된 백제 서부인은 서부 백제사람이 아니라 백제 서쪽 먼 중국 식민지 사람이란 뜻일 수 있다. 백제멸망 후 중국에 들어가 주로 변방 흑치국 지역에서 티베트족이나 돌궐족 침입을 막아 큰 공을 세운 것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중국 땅의 백제 식민지라는 상상하기 너무 아스라한 역사적 명제를 우리 사학계는 떠맡았으며 이를 밝힘으로써 삼국시대 한국 프론티어십의 화려한 지평을 넓혔으면 한다. 이규태 kyotaelee@chosun.com 입력 : 2006.01.13 18:37 58'

 

[이규태 코너] 許皇后의 故鄕碑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씨의 고향은 인도 남동부 아요디아시(市)다. 그곳에 세워진 허황후비에 후손들인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일행이 해마다 참배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8년 김수로왕은 김해 앞바다에 표착한 아유타국의 여인 허황옥을 맞아 비(妃)로 삼았다는 것이 전부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아유타국이 어디이며 그 먼 타국에서 어떤 사연과 경로로 김해 앞바다까지 흘러왔는지를 살핀다는 것은 역사에로의 대탐험이 아닐 수 없다. 고고학자인 김병모(金秉模) 교수가 30년을 추적, 허황후의 뿌리를 찾아내어 그곳에 허황후 고향비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인도의 옛 지도를 살펴 아유타국이 인도 남동쪽 아요디아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아요디아국이 1세기에 북방 월지족(月氏族)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층은 쫓겨나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인 촉(蜀)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보았다.

허황후의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이라 쓰인 데서 허황후가 보주(普州)란 곳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추적한 끝에 보주가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임을 알아낸 것이다. 그곳에서 서기 48년 전해에 반란을 일으켜 다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는데 그 반란을 주모한 가성(家姓)이 허씨라는것도 후대 기록에서 확인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인도 소녀인 허황옥은 오빠와 더불어 장강(長江)을 타고 삼협(三峽)을 거쳐 황해로 나와 김해 앞바다에 이른 보트 피플이었던 것이다. 이 허황후의 이동 지역을 꿰는 문화의 공통분모로 김 교수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쌍어(雙魚)신앙을 들었다.

인도 아요디아의 사원이나 풍물에 쌍어가 흔한 것을 보았고 중국 보주에서도 확인했으며 김해 수로왕릉의 정문에도 이 천축문화인 쌍어가 새겨져 있다. 허황후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세웠다는 은하사(銀河寺)에서도 두 쌍의 쌍어를 찾아볼 수 있다. 언어학자로부터 가락이라는 말이 인도 고대어에서 물고기를 뜻한다는 것도 알아내어 이 허황후의 궤적을 문화적으로도 입증한 셈이다.

이 같은 역사궤적을 확인하는 연구결과가 한국유전체학회에 보고됐다. 곧 허황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왕족 유골에서 북방계가 아닌 인도의 남방계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역사 속으로의 궤적이나 유전질 탐험이 필요한 사항이 비일비재한데도 방치돼 있다는 것을 새삼 통감케 하는 장거가 아닐 수 없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입력 : 2006.01.20 19:01 58' / 수정 : 2006.01.20 19:07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