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니케아 종교회의때 인간이 성경을 만들었다는데요?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9. 10:20

 니케아 종교회의때 인간이 성경을 만들었다는데요?

amoayhwh (2004-05-15 23:49 작성, 2004-05-15 23:56 수정) 이의제기 | 신고하기
질문자 평 
내용있는 충실한 답변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 글은 참고만 하세요^^**

greatfamous 님은 상당히 중요한 정보를 올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를 배척하는 한가지 이유가 그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는 그 사실에 비추어 성경을 직접 조사해 보니까 성경에도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배고픈 사람에게는 못먹는 것도 먹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삼위일체에 굶주린 그 배도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성경의 그렇지 않은 내용들이 다 삼위일체로 보인 것입니다.

아니, 아예 없는 삼위일체 구절을 신약에 그리스어로 작문해서 만들어 넣을 정도로 심하게 삼위일체에 중독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고의적으로 정치/종교가 합체된 배도한 기독교에 의해서 가려져왔던 사실입니다.

greatfamous 님이 올리신 내용을 보면 삼위일체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사상이 어떻게 기독교의 중심교리가 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들도 꼼꼼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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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표시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와같이 '아타나시우스 신경'(The Athannasian Creed)에 의하면, '성부(the Father)도 하느님이시고, 성자(the Son)도 하느님이시고, 성신(the Holy Spirit)도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세 하느님(three Gods)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느님(one God)이 계신다. 이 삼위일체에서 위들은 각기 영원하고 각기 동등하시다: 모두가 똑같이 창조되지 않았고 똑같이 전능하시다."
ㅡ[카톨릭 백과사전 (The Catholic Encyclopedia) ]

■[정교회 기독교 믿음 (Our Orthodox Christian Faith) ]이라는 책에서, 그리스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느님은 삼위일체시다. 아버지는 전적으로 하느님(God)이시다. 아들도 전적으로 하느님(God)이시다. 성령도 전적으로 하느님(God)이시다."

ㅡ>그리스 정교회에서 "삼위일체를 기독교의 근본 교리"라고 하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느님(God:전능한 하느님 여호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와같이, 삼위일체는 "세 위 속에 있는 한 하느님"(one God in three Persons)으로 여겨진다. 각기 시작이 없고, 각기 영원히 존재해 온 것이다.




2.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이 있는가?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4세기까지 교회 신학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얻지 못했다."
ㅡ [성경 도해 사전 (The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

■"삼위일체는 직접적인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다."
ㅡ [신 카톨릭 백과사전 (New Catholic Encyclopedia) ]




3. 구약 39권(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히브리어 성경에 삼위일체 교리가 들어 있지 않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본다."
ㅡ [종교 백과사전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

■"성 삼위일체 교리는 구약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ㅡ [신 카톨릭 백과사전 (New Catholic Encyclopedia) ]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Edmund Fortman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구약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일체 신에 대해서 암시도 하지 않는다....어떤 성경 필자도 신위(Godhead) 속의 삼위일체가 있다고 넌지시라도 생각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구약에서 삼위일체의 암시나 예시나 가려진 표시들을 찾는 것은 성경 필자들의 말과 의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ㅡ [ 삼위일체 하느님 (The Triune God) ]

ㅡ>그러므로 구약성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전혀 없다.




4. 신약 27권(그리스어 성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이 있는가?

■"신학자들은 신약도 삼위일체의 분명한 교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ㅡ [종교 백과사전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Edmund Fortman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필자들은 어떤 공식적인 혹은 공식화된 삼위일체 교리도, 한 하느님 안에 3개의 동등한 신적 인격체가 있다는 어떤 분명한 가르침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ㅡ [ 삼위일체 하느님 (The Triune God) ]

■"삼위일체라는 말도, 삼위일체의 어떤 분명한 교리도 신약에 나타나지 않는다."
ㅡ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The New Encyclopedia Britannica) ]

■"신약과 관련해서는 그 안에 실제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없다."
ㅡ [간추린 기독교 교리사 (A Short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 Bernhard Lohse 저.

■"신약은 발전된 삼위일체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성경에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일한 실체라는 분명한 선언이 없다."
ㅡ [신약 신학 신 국제 사전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의 E. Washburn Hopkins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에수와 바울(Paul)은 삼위일체를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ㅡ [종교의 기원과 발전 (Origin and Evolution of Religion) ]

■역사가 Arthur Weigall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삼위일체의) 그러한 현상을 언급하신 적이 없고, 신약 어디에도 삼위일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개념은 우리 주님이 사망하신 지 300년 후에 교회에 의해서 채택되었을 뿐이다."
ㅡ [우리 기독교의 이교 요소/신앙 (The Paganism in Our Christianity) ]

ㅡ> 따라서, 구약의 39권 뿐만 아니라 신약의 27권의 정전(canon)에도 삼위일체의 가르침이 없다.




5. 그러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떠한가?

■"원시 기독교는 그 이후의 여러 신경들(Creeds)에서 다듬어진 것과 같은 삼위일체의
명백한 교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ㅡ [신약 신학 신 국제 사전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음에는 삼위일체 개념을 자신들의 신념(faith)에 응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그들의 정성을 바쳤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을 인정은 하였으나 이 셋이 실제적인 삼위일체로서 완전히 같고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ㅡ [우리 기독교의 이교 요소/신앙 (The Paganism in Our Christianity) ]

■"처음에는 기독교 믿음이 삼위일체가 아니었다. 사도 시대와 사도 이후 시대에도 그러하였다. 그것은 신약과 다른 초기 기독교 기록들에서 반영된 것과 같다."
ㅡ [종교와 윤리 백과사전 (Encyclopedia of Religion and Ethics) ]

■" '세 인격체로 된 한 하느님'이라는 공식 선언은 확고히 확립되지 않았는데, 기원 4세기 전에는 기독교의 삶과 신앙 고백에 온전히 동화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 가운데서도 그러한 사고 방식이나 관점으로 먼거리에서 접근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ㅡ [신 카톨릭 백과사전 (New Catholic Encyclopedia) ]




6. 니케아 이전의 교부들(Ante-Nicene Fathers)은 무엇을 가르쳤는가?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교부들은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초기 여러세기 동안 지도적인 종교 교사들로서 인정받았다.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 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기원 165년 경에 사망한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는 인간 이전의 예수(prehuman Jesus)를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과는 다른" 창조된 천사(a created angel)라고 불렀다. 그는 예수가 하느님보다 열등해서 "창조주가 그에게 하거나 말하도록 의도하신 것을 빼고는 어떤 것도 결코 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기원 200년 경에 사망한 '이레나이우스'(Irenaeus)는 인간 이전의 예수가 하느님과는 별개의(separate:따로따로인) 존재이며 하느님보다 열등하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가 "한분의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느님"과 같지 않음을 설명해 주었는데, 그 하느님은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최고이신 분으로 그 분 외에는 어떤 다른이도 없다"고 말했다.

■"기원 215년 경에 사망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는 인간 이전 존재의 예수를 '하나의 창조물/피조물'(a creature)이라고 불렀으나 하느님은 "창조되지 않으신, 불멸이신, 유일하신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말하기를 아들은 "유일하신 전능자 아버지 바로 다음(next to)"이지만 하느님과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기원 230년 경에 사망한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는 하느님의 최고성을 가르쳤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버지는 아들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더 크시기 때문이다; 낳은 자는 태어난 자와 다르기 때문이다; 보낸 자는 보냄을 받은 자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있기 전으로 하느님께서 홀로 계셨다."

■기원 235년 경에 사망한 '히폴리투스'(Hippolytus)는 말하기를, 하느님은 "한 하느님이시자 처음이신 유일하신 분,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자 주인이신데, 그 분과 연배가 같은(co-eval)자가 전혀 없었고... 그분은 홀로 한분이신분; (창조된 인간 이전 예수와 같이) 이전에 존재하지 않은 존재를 뜻대로 존재하게 하신 분이다" 라고 하였다.

■기원 250년 경에 사망한 '오리게네스'(Origen)는 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은 2개의 실체...본질적으로 2개의 실체이다", "아버지와 비교해서 (그 아들은) 아주 작은 빛이다" 라고 하였다.

ㅡ> 역사적인 증거를 요약하면서 Alvan Lamson은 [기원 3세기의 교회 (The Church of the First Three Centuries)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위일체라는 현대의 대중적인 교리는 '유스티누스'의 말 속에서 어떠한 지지도 이끌어 내지 못한다.
이러한 견해는 니케아 이전의 모든 교부들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탄생 이후 300년 동안의 모든 기독교 저작자들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기독교 저작자들)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등하다'거나 '수적으로 단 한개의 본체'라거나 '하나로 된 셋'(Three in one)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데, 지금의 삼위일체론자들(Trinitarians)이 인정하는 어떤 의미로도 말하지 않는다."

ㅡ> 이와같이 성경과 역사적 증거 모두 다 삼위일체가 성경 시대에 그리고 그 이후 여러 세기(수백년) 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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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는 카톨릭의 전성시대와 함께 그들이 사용하는 라틴어 불가타역이 거의 성경 원문만큼의 신뢰를 얻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성경 그리스어 원문을 오히려 라틴어 불가타역에 맞추려는 시도까지 있었던 것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인본주의자(자유주의 학자)들의 선구자로서, 유명한 스페인 학자인 '안또니오 데 네브리하'(Antonio de Nebrija)는 스페인의 '알깔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 대학교의 3개국어(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대조 성경에 실릴 [불가타] 본문을 개정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가 히에로니무스(제롬)의 불가타역 성경을 공인된 유일한 역본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스페인의 학자 '네브리하'는 라틴어 불가타역 성경을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원문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존재하던 불가타역 성경 라틴어 사본들에 끼어든 분명한 오류들을 수정하고자 했습니다.

네브리하는 불가타역 성경과 원어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불일치한 점들이라도 해결하기 위해서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Jimenez de Cisneros)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우리 종교의 꺼져 버린 두 횃불, 즉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라는 횃불을 다시 밝히도록 하십시오. 이 일에 자신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도록 하십시오. "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의 라틴어 사본들 사이에 상이점이 발견될 겯우에는 언제나 그리스어 사본들과 비교를 해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여러 라틴어 사본들 사이에 또는 라틴어 사본들과 그리스어 사본들 사이에 불일치한 점이 있을 경우에는 언제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믿을 만한 히브리어 원전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번역본을 회당에서 사용하는 것(히브리어 본문)과 동방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그리스어 본문) 사이에 두었다. 이것은 로마 교회 즉 라틴 교회를 나타내는 예수의 양편에 도둑들이 매달려 있었던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네브리하가 라틴어 불가타역을 성경 원어 본문과 일치하게 수정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네브리하는 결함이 있는 개정판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보다는 그 작업을 그만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알깔라 데 에나레스'의 3개국어 대조성경은 성서원어로 된 정련된 본문을 만드는데 있어서 분명히 큰 진전을 이룬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학문보다는 전통이 더 큰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편집자들은 불가타역 성경을 대단히 존중해서 몇몇 경우에는 라틴어 번역문을 그리스어 원문에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 원문을 라틴어 번역문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신약의 그리스어 원문을 수정해야 한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한 가지 예를 '콤마 요한네움'(comma Johanneum)이라고 알려진 한 위조된 유명한 문구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문구는 신약의 요한1서 5장 7절인데,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하늘에 아버지와 말씀과 성신이 계시니, 이 셋은 하나이니라."

이 문구는 어떤 초기 그리스어 사본에도 들어있지 않으며 요한이 편지를 쓴 지 몇세기가 지난 후에 삼위일체 논쟁이 격렬했을 때 언젠가 삽입된 것 같습니다.

그 문구는 불가타역의 가장 오래된 라틴어 사본들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어 학자 '에라스무스(Erasmus)는 위조된 이 삽입 문구를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에서 빼버렸습니다.

대조성경의 편집자들은 수 세기 동안 전통적인 불가타역 본문의 일부였던 그 문구를 빼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위조된 부분을 라틴어 본문에 그대로 두었으며 그 부분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그리스어 본문에 삽입하므로 두 난을 일치시키기로 하였습니다.
답변들
re: 니케아 종교회의때 인간이 성경을 만들었다는데요
tnflwlqhd (2004-05-14 18:27 작성) 이의제기 | 신고하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니 성경은 성경으로 성경대로 믿어야합니다. 다른 곳에 마음 두지 마세요.어떤것을 참고하란 말은 없답니다.^^
종교회의란 게 원래 그런 겁니다..
greatfamous (2004-05-14 21:11 작성) 이의제기 | 신고하기
1. 제1차 종교회의


니케아에서의 제1차 범 종교회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소집.

속셈은 한창 번창중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업고 로마제국을 굳혀놓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가 318명의 주교들을 선발, 소집했던 배후에는 이빨을 드러낸 파워폴리틱스(Power Politics)에서였고, 종교야 어찌되건 관심밖의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던 주교들도 짐작 못한 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①회의를 사회했고 ②내 뜻은 바로 교회의 법률이라는 성명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를 <세계의 주교>격으로 영입시켜 속세의 왕으로서 교리에 관한 투표에 참가시켰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이니 뭐니 전혀 아는 바 없었다. 그는 미트라의 태양숭배를 받들었었고 기독교세상이 된 뒤에도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미트라神의 초상을 조각,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써놓고 있다.

희랍에 옛날부터 있어 오는 비잔틴에 자기 이름을 붙여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고쳤는가 하면, 여기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했을 때에도 역시 기독교적인 겸허따위는 오불관언,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노예를 폐지하려는 생각은 커녕 오히려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럼, 이 폭군은 교회정책의 어떤 결정에 참여했던 것일까?

당시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하는 아타나시우스의 설과 신은 오직 하나뿐이므로 그리스도는 신을 닮아 있을 뿐이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의 설이 대립되어 있었다. 이것이 많은 사제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파급되어 대립이 심각해지자,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 고문관인 오시우스를 보내어 진상을 조사케 했다. 오시우스는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라고 했다. 그는 만일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허물어지고 믿음에 혼돈이 생겨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당시는 유럽, 이집트, 서남아시아의 전지역에 퍼져있던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그 대신 기독교가 국교(313)화된 시점이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절대적인 힘을 빌리지 않고는 로마제국을 강력하게 통치할 수 없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속적, 정치적 속셈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회의를 주도하고 토론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대부분은 극단의 양 견해를 피하고 중간자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도록 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해 아버지격이 되는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결의케 했다. 결국 단 두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참석자가 아타나시우스에게 표를 던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니케아회의의 결정이 신의 감화에 의한 것이라고 자랑했고,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본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를 섬기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세례를 받은, 신학적 논리에는 어두운 인물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영향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신앙의 의식이나 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미트라 신앙이 기독교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따로 후술할 것임)

그러나 그 후 황제의 입법으로서 손질을 한, 이 변경은 교회의 핵심<도그마>가 되어 버렸다.

비기독교인인 콘스탄티누스는 또 그 이상의 공적도 교회에 기여했다. 예수의 무덤을 사상 처음 발견하여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그해에 그는 근친 몇몇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들 그리스프스, 처 파우스타를 끓는 열탕 속에 처넣어 죽였고, 장인 마키시미안을 체포하여 자결시켰다.

<니케아의 신앙 선언>을 주재하여 회의를 끝낸 뒤, 318명 주교들의 합의야말로 하느님의 결정이라는 것을 기독교 교단에 회람을 돌린 인물은 대주교격인 황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르메니아, 그리이스, 러시아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받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2. 제2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2차 종교회의를 소집한 주역은 교회가 대제(大帝)의 칭호를 봉헌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이 황제는 도덕적 소질에 있어서 콘스탄티누스황제에 뒤지지 않았다. 역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들볶는 악취미가 있어 하류층 백성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담케 하고 중세관리들에게는 고문을 예사로 자행시켰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권한으로 만약 누가 빈민들을 숨겨주거나 했을 경우,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시키기도 했었던 폭군이었다.

경건한 종교회의가 있은 지 10년 뒤, 즉 기원 390년에는 데사로니카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민 7천명을 참살시키기도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때는 기독교에서 <할렐루야>라는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의 기도가 도입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테오도시오스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미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대제>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그는 암브로시우스로 하여금 타종교의 성소(聖所)들을 모조리 파괴시켜 버리게 하였다.

이 소행은 실제로 이단심문(異端審問)의 시조라고 불러 주어야 마땅한 처사였다.

그럼 콘스탄티노플의 제2차 종교회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 났던 것일까?

신학전문가들로부터 <산송장 회의(殘骸 會議)>라는 욕을 먹고 있는 이 모임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중차대한 신앙조항이 교회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삼위일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삼위일체설은 지금까지도 교회의 주식(主食)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3. 제3차 종교 회의


에페소스에서의 제3차 종교회의. 소집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와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3세였다. 두 황제 모두가 종교는 고사하고 정치마저도 아예 관심이 없었던 플레이보이들로서 회의에도 얼굴조차 제대로 내보이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 그는 도락에만 철저했던 무기력자로 방탕생활에 돈이 많이 들게 되다 보니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인정사정 없이 세금을 갈퀴질해 냈다. 권력욕에 탐닉되어 있던 음모덩어리인 누나 부르케리아에게 완전히 잡혀 휘둘려지고 있었던 것도 지당했던 일로서 그녀는 잠깐 섭정으로 앉기도 했었다.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비웃어댔지만 처녀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그녀는 종교에만은 열심이었던 관계로 성녀 품에 오르기에 이르렀고, 동생이 죽은 뒤 그 유능한 라이벌인 크류소프스를 살해하고서도 태연했던 그녀였다. 그리고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는 모친인 태후 프라키디아가 섭정을 맡았었고, 발렌티아누스는 권신인 아에티우스를 미워하여 살해하려다가 황후 에우독시아를 탐낸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었다.

그럼 에페소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 회의에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었다. 이것이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국법이 되었다. 순번(順番)식이 된 셈이다. 언제나 거기에는 성령이 따라 붙고 있었다.






4. 제4차 종교회의


칼케돈에서의 제4차 종교회의. 정식으로는 비잔틴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흑막은 역시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뒤, 마르키아누스를 남편으로 삼은 처녀(?) 부르케리아였다. 주교 축들보다도 자신의 목적을 잘 분별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신학자 에드알트 슈바르츠는 부르케리아가 각 교회의 의사에 반하여 압력적으로 종교회의를 소집, 자신 스스로 주도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럼 칼케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교황 레오1세는 <도그마 편지>에서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한 신조를 도입시켰다.

이 회의에서 예수라고 하는 인격 안에 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칼케돈 신조>라는 이름으로 이 이중성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칼케돈에서는 교리 통일의 호지(護持)가 교황의 개입에 의해 가능할 수 있게 확정되었다.

이에 로마 교황의 탄생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뒤에 전개될 기초가 여기에서 문서상으로 명시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바티칸은 빈말로라도 부르케리아가 음모를 꾸며 칼케돈의 종교회의를 열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다.







5. 제5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5차 종교회의. 주최자는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1세였다. 황제는 쟁쟁한 독재자의 처이며 공동 통치자인 테오도라가 시키는 대로 처신하였다.

테오도라는 서커스 매니저의 딸 출신이었다. 청색,녹색의 서커스당이 반기를 들었던 <니카의 난>때 옥좌자리를 되찾아 주면서 황제를 남편으로 소유해 버렸던 것이다. 이 공적이 있은 뒤부터 그녀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이교의 잔여세력들을 뿌리뽑아 없애 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쾌거야말로 종교회의의 높은 양반들이 이빨을 드러내면서 애걸했던 것이었다. 제5차 종교회의의 주교들은 이 처사에 대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종교회의에서 의도했던 것을 유스티아누스는 벌써 황제로서의 교서, 법률로 공포해 놓았던 것이다. 이 모임이 역사에서 <갈채 회의>로 규정짓고 있는 데에는 일말의 비웃음이 아니었다고만은 단언할 수 없다 하겠다.

유스티아누스는 교황 비기리우스(뒷날 교황의 무류성을 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가시로 보이는 배역)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 들였다.

비기리우스나 주교들이나 무두가 뒤에 가차없는 이단 소탕 법령때문에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는 황제의 파워폴리틱스적 관심에 꼬리를 치며 뒤따랐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도그머를 부인하는 자는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 죽음의 벌로 다스려졌고 세습권도 정지당했다. 로마 관리들은 큰무리로 떼지어 다니면서 이단자들을 색출해 내 끌어 모아다가는 유스티아누스의 어명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게 했었다.

비잔틴의 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페르시아, 반다르고트를 상대해서 유스티아누스의 전쟁사실을 기록했고, 또 유스티아누스의 소피아 교회의 건설사업까지도 문서로 남긴 인물이지만 동시에 유스티아누스와 그 처 테오도라를 비난하는 전단을 초안해 내기도 했었다. 유스티아누스를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던 프로코피우스는 그를 교만하고 성인인 체하고 방자하고 음험스럽고 잔인하고 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규정짓고 있기도 하다.

기독교 계통 사학자들은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을 대할 때 돌아 앉아 버리고 싶어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유스티아누스도 성인 품에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회의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졌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