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바이블이 탄생하게 된 것일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의문을 가지는 순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기도 힘들 뿐 아니라 한글개역판의 경우 온통 한자 고어투로 쓰여 있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기도 힘들다. 정말 인내심이 대단하여 해설까지 곁들여진 더 두꺼운 성경을 몇 번씩 정독해야 이런 저런 의문이 생길텐데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은 10%를 넘기 힘들다. 그리고 의문이 생겨서 자꾸 질문을 하는 사람을 성직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혜보다도 믿음을 더 중요시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에 있는 예수의 말씀은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어도 목회자들이 말하는 것은 마치 예수의 말씀인 양 순진하게 믿고 따르고 있다. 과연 예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목회자들이 말하는 대로 신앙해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살펴 보기로 한다.
먼저 바이블의 형성과정을 살펴 보자.
1. 구약성서의 형성사
구약성서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고 현재 한일신학대학교 객원교수로 있는 박창환 교수의 <성경의 형성사>의 내용을 요약, 소개하고자 한다.
《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 100A.D)는 구약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며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기록된 것이고 그 내용 자료의 거룩한 성격 때문에 세속적 문헌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그것을 다치기만 해도 손이 부정을 타고, 단어 하나도 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함락 후 30년이 되는 해에 에스라가 기도의 응답으로 구약성서를 40일간에 걸쳐서 다섯 명의 조수에게 불러 주어 받아쓰게 했다는 것이다. 즉, 에스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약 전체를 암송하여 불러 주었다는 것이다. 구약경전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2세기 그리스도인에게까지 번졌고, 에스라 때에 구약 정경이 단번에 다 완성됐다는 설은 계속 유대교와 기독교에 유행되고, 개신교에서도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이런 설을 부인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 돼서, 곧 느헤미야 시대에, 국가적 분열이 생겨서 사마리아인들이 따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사마리안인들은 구약의 첫 다섯 권, 곧 5경만을 성서로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이 분열하던 시대에 경전으로 간주되던 것이 5경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에 다른 책들도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졌다면 사마리아인들이 5경만을 경전으로 가지고 나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히브리어)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율법서 5권(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예언서 8권(전기예언서 -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열왕기 후기예언서 - 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12소선지), 성문서 11권(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솔로몬의 아가, 룻기, 예레미야의 애가, 에스더,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다니엘)의 도합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개신교도들이 사용하는 성서(39권)의 구약 부분은, '70인역'(LXX,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과 거기에 근거한 라틴어역 불가타(Vulgata)의 배열순서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기원후 90년에 얌니아(Jamnia)회의에서 유대인학자들이 39권으로 된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결정하고 선포했을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대인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구약성서에다가 외경까지 다 넣어 가지고 그것이 정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의 헬라어 번역 구약성서(70인역)는 배열을 다르게 했다. 첫 부분인 율법서를 제외하고는, 순서를 많이 바꾸어 버렸다. 유대인은 율법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성서라면 우선 율법을 생각하게끔 되었었다. 율법은 온통 그리고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것이고, 따라서 율법의 한 글자라도 모세 자신이 창안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죄를 받는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율법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것은 하나의 합성문서이고 오랫동안 자라고 발전되어서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증거는 율법서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신명기 34장는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을 말하고 있고, 5경에 여러 번 블레셋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지만(창21:34, 26:14-18, 출13:17) 실은 기원전 1200년 경(모세의 출애굽시대는 기원전 1300-1200년경)까지는 그들이 팔레스틴에 나타나지 않았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정설이다. 그러므로 모세 시대보다 훨씬 이후에 된 부분들을 5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뿐 아니라 5경에는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묘사하는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창조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브엘세바가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맺은 계약에서, 또하나는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창 21:31 , 26:33). 또 벧엘이란 이름의 기원도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환상을 보는 이야기에, 또 하나는 야곱이 몇 해 후에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의 사건에 나타난다(창28:19, 35:15). 하갈이 추방되는 이야기도 둘이 있는데, 하나는 그녀가 이스마엘을 낳기 전에 추방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이 커서 소년이 되었을 때에 추방되는 이야기이다(창16:6이하, 21:9이하) 창조설화도 역시 뚜렷하게 다른 두 가지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는 세상 만물과 동물까지 창조된 후에 남자와 여자로 사람이 창조된다. 그러나 2장에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다음에 동물,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가 창조된다. 홍수에 대한 기사도 두 가지다. 하나는 노아가 모든 짐승을 한 쌍씩 방주 속에 넣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창6:19), 또 하나는 정결한 동물은 일곱씩, 부정한 동물은 한 쌍씩 넣으라고 명령을 받는다(창 7:2). 이와 같이 이야기가 중복된 것은 5경을 오늘의 형태로 작성한 사람들(편집자들)이 그 사건들에 대한 두 가지 기사들을 앞에 놓고 그 자료들을 정직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취급하는 의미에서 그 두 가지를 다 나열한 것이라고 보인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5경은 유대인의 전통적 견해처럼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아쓴 책이 아니라는 것과, 따라서 5경은 하나 이상의 문서의 편집으로 형성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러 문서들(J문서-야훼이스트 사료층, E문서-엘로히스트 사료층, D-신명기 사료층, H문서-Holiness Code, P문서-제사적 사료층 등) 중에서 P문서를 골격으로 하여 다른 부분들이 거기에 맞추어졌다고 본다. 이리하여 기원전 400년경에 창세기,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이렇게 다섯 권이 제일 먼저 성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그리고 구약성서의 둘째 부분인 예언서는 기원전 2세기 초에 성서로 채택되었으며 성문서가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성서로 채택되기까지에는 역시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성문서는 우선 일반 백성이 널리 알고 읽던 인기 있는 책들이었다. 율법이나 예언서처럼 전체적으로 또는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성서 정경에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 백성들의 일반 종교문학으로 간주되어 전해 오다가, 익명의 책들이어서 그 저작자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다윗, 솔로몬, 에스라 등)이 쓴 책으로 돌려 정경에 넣었다. 이렇게 전승된 성서들이 정경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주후 90년 경얌니야에서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구약성서의 책들이 최종적으로 낙착되어 그 수가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서의 그것과 꼭 같은 것으로 결정된 것이다. 》
이상이 개신교의 구약 39권의 형성사이며, 천주교의 구약은 이와 달리 46권으로 되어 있다
☞ 구약성서의 여러 가지 사료들
학자들은 구약성서의 5권(토라, 흔히 모세 5경이라고 한다.)이 다음의 여러 갈래의 구두전승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 야훼계(J문서) : 창세기에서 하느님을 야훼(Yahweh)라 부르는 전승. 신을 인격화하여 표현. * 엘로힘계(E문서) : 하느님을 엘로힘(Elohim)이라고 부르고 있는 전승. 신을 인격화하지 않음. 야훼계는 교리에 밝지 못하지만 엘로힘계는 교리에 밝은 사람들이 수집한 것임. * 신명계(D문서) : 주로 신명기에 수집된 법률과 관습을 담고 있음. * 제관계(P문서) : 제사장들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레위기의 나머지 제사법과 5경의 나머지 역사 부분들을 포함함.
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신약 성서] |
2004/0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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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여러 저자에 의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기록된 책들이 오래고 또 복잡한 역사를 통해서 집성되어 이루어졌다. 신약성서 역시 고스란히 하늘에서 기록되어 사람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고, 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불러 주어 기록하게 하신 것도 아니다.
교회는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도 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발전하여 나갔다. 신약 정경이 곧 나타나지 않은 것은 여러 원인이 있는데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는 사도 교회가 종말적 기대를 강하게 가졌다는 데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고 새 세계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긴 앞날을 계획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요구될 뿐이었다. 문서로 된 정경이 있어야겠다는 욕구가 생기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그들이 기대가 수정되고, 급박한 하나님 나라 실현의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은 영구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운동 같은 것은 생각할 여기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복음이 구두로 전달되던 시대가 적어도 30년 이상 흘렀다.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도 그 저술 연대를 기원후 60년 이전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고 보면, 구전시대가 한 세대 이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 크고 작은 많은 복음서들이 나돌아 다니고 교회에 혼잡을 조성하였었는데 어떻게 해서 4복음서만이 남아 승자의 관을 쓰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교회가 어째서 네 개의 복음을 그냥 가지고 있었을까? 그 수를 줄이거나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는가? 서로 약간씩 다른 네 개의 복음서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곤란을 가져다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가 각각 다르다. 요한복음서는 성전을 정화한 사건을 예수 생애의 초기에 두었고, 반면에 다른 세 복음서는 그 말기에 두었다.
첫 세 복음서는 예수가 유월절 후에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기술하였는데, 요한복음서에는 유월절 전에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기록했다. 예수님의 부활설화도 복음서마다 차이점을 지닌다. 이런 것들을 아는 교회가 네 개의 복음서를 하나로 만들어 조화시켜 보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을까? 기원후 180년경에 타시안(Tatian)이라는 사람이 소위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4복음서를 종합한 것이었다. 얼마 동안 이것이 매우 영향이 매우 컸고, 4복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고, 얼마 후에는 그 책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공동서신이 한 그룹으로 모인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었고 그 과정은 퍽 느렸다. 2세기말까지도 베드로 전서와 요한1서만이 보편적으로 수락되었을 정도이다. 계시록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고 인정되었다. 1세기 때에는 비단 요한 계시록만이 아니라 헤르마스의 목자와 베드로 계시록도 널리 사용되고, 상당히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2세기 후반경에 이르러서는 이 묵시서들이 인기를 많이 잃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마지막이 임박했다고 하는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요한 계시록만이 교회의 광범한 인정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일부의 반대를 받아왔다. 그리하여 이 책이 정경으로 채택되어 상당히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는 200년 이상이나 싸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실상 그 싸움은 그 후까지 계속되었고, 현대 교회에서도 그 책을 정경에 완전히 넣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말이 떠돌고 있다.
교회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신약성서 목록인 무라토리 정경목록(AD170)에는 현재의 신약 27서 중에서 베드로 전,후서 , 야고보서, 요한3서, 히브리서가 빠져 있다. 베드로 전서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어려운 투쟁을 거쳐서 정경으로 채택된 것이다.
유세비우스(270~340)는 정경을 호모레고메나(Homolegomena)-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진 책,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일부의 반대가 있었던 책, 노타(Nota)-가짜책의 세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 후서, 요한2·3서를 안티레고메나에 분류했고, 요한 계시록은 호모레고메나에 분류했지만 노타에 넣어야 된다고 자기의 의견을 덧붙였다.
논란의 대상의 되었던 책들이 가졌던 문제점은 사도 저작성의 문제, 즉 그 책들의 저작자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정경에 넣기 위해서 히브리서는 바울의 저술로, 야고보서를 주의 동생에게, 유다서를 예수님의 또 다른 동생에게, 베드로 후서를 베드로에게, 요한2,3서를 요한에게 돌려 그 사도의 이름을 빌렸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키릴(AD315~386)은 신약성서의 강의목록에서 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책을 소개하였고, AD367년에 와서야 아타나시우스가 지금의 신약성서와 똑같은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 신약성서 27권을 393년에 힙포 레기우스에서, 397년에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각각 정식 채택하였고 어거스틴도 이 정경을 지지하였다. 그것이 마침내 제롬의 라틴어 번역(Vulgata)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신약 27권 중에서 베드로후서, 요한2,3서, 유다서, 계시록을 제외한 정경이 5세기 초에 수리아 말로 번역, 발표되어 표준성서의 구실을 하였는데 그 성서를 페쉬타(Peshitta)라고 부른다. 동방 수리아교회는 지금까지도 계속 22권짜리 신약성서를 사용하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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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3.서로 다른 정경] |
2004/0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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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는 몇 권일까? 천주교(46권)와 개신교(39권)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주해 살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보다도 당시 국제어인 그리스(희랍)어가 더 익숙했다. 그래서 기원 전 3세기 중엽에 그리스어에 정통한 72인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는데, 100여 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를 '칠십인역'(셉튜어진트 희랍어판)이라 하며, '알렉산드리아 정경'(Alexandrian Canon)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정경 39권(제1경전) 외에도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 상,하권 일곱권과 다니엘서 일부(3,24~90;13~14장), 에스델서 일부(10,4~16,24)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제2경전 혹은, 외경이라 한다.
앞에서 언급한 '얌니야 회의'에서 유대인 랍비들이 결정한 것은 결국 이들 제2경전들은 정경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이들을 정경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전통의 입장에서는 제2경전들은 정경 밖의 책, 즉 외경이 되는 것이다.
'얌니야 회의' 이후부터 구약성경의 정경은 두 가지 전승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본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서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외경들을 제외시키는 '히브리어 구약성서' 전승과 외경들을 포함시키는 '희랍어 구약성서' 전승이다.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희랍어로 번역된 '희랍어 구약성서'를 읽었다. 즉 기독교회는 구약성서에 있어서 '희랍어 구약성서' 전통을 채택한 것이고, 이것은 로마 카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 의해 계속해서 유지되어 내려왔다. 즉 로마 카톨릭교회는 '희랍어 구약성서' 전승을 받아들여 온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정경전승은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루터는 정경문제에 관해서 히브리어 구약성서 전승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제2경전들을 외경으로서 정경의 범위에서 제외시켰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Protestant Church)에서는 외경을 제외한 39권의 책만을 구약의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트렌트 종교회의(Trent Council, 1545-1563)가 소집되었고, 정경문제에 대해 제2경전들 중에서 몇 권을 정경에서 제외한 외에는 종래의 '희랍어 구약성서'의 기본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구약성서는 개신교회보다 7권의 책이 더 많은 구약성경을 사용해 오고 있다.
개신교는 외경을 일체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 반해 천주교는 구약외경들 중에서 7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의 성서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도합 66권이나 천주교의 성서는 구약 46권과 신약 27권으로 도합 73권인 것이다. 외경을 넣느냐 빼느냐의 차이는 결국 교리의 차이로까지 이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지금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한글개역판 성경, 공동번역판 등의 신약성서에 인용된 거의 대부분의 인용문은 '70인역'이라고 주(注)가 달려 있어 70인역에서 인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70인역에는 외경이 포함되어 있으니 개신교에서 외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고 본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언제라도 외경을 빠뜨린 적도 없으며 더구나 집회서 같은 것은 교회의 전도에 아주 널리 쓰인 경전이라는 것이다. 개신교의 구약성경(39권)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정한 것일 뿐이고 기독교 전통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천주교회에서는 예수시대, 사도시대, 교부시대를 통해서 지금까지 그리스어로 된 칠십인역[제1경전(정경 39권)과 제2경전(외경 7권과 다니엘서 일부, 에스델서 일부) 46권을 모두 성서로 인정해 왔다. 특히 가장 오래된 성서 사본인 쿰란동굴의 구약성서 사본도 칠십인역과 일치하며, 예수님과 사도들이 구약성서를 인용할 때 칠십인역에서 300구절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다음의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다.
마태 6,14 / 집회 28,2 마르코 6,15 / 집회 48,9~10
루가 13,27 / 1마카 3,6 루가 24,4 / 2마카 3,26
요한 3,12 / 지혜 9,16 로마 1,20~32 / 지혜 13,10~19 1베드 1,6~7 / 지혜 3,5~7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일체의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 외경의 어느 책도 스스로 영감 받았음을 주장하지 않는다 2) 유다인들이 정경으로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다. 3) 외경의 많은 책들이 역사적, 지리적, 연대기적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4) 외경의 많은 책이 성경 말씀과 모순이 된다 등등이다. 이러한 외경들로 인해 개신교와 다른 교리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1) 연옥: 마카베오하서 12장 39-45절 2) 구제(즉 자선 행위)에 의한 구원: 집회서 3장 30절 이외에도 자살을 인정한다든지(마카베오하서 14장 43-46절), 비참한 노예제도를 인정한다든지 (집회서 33장 24-28절), 윤회(솔로몬의 지혜서 8장 19,20절)를 인정하는 구절들이 있으며,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몰래 죽이거나 마술을 통해 신비주의를 행하는 것 등을 인정하는 구절들이 있어, 우리 개신교인들이 믿는 성경과 상치된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개신교 정경만 가지고도 그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말씀들, 비과학적인 내용들, 노예제도와 윤회를 인정하는 말씀구절 등은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언급해 나갈 것이다.
에라스무스(Erasmus)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후서, 요한2,3서, 유다서, 계시록 등이 옛날부터 계속 의심을 받아왔다고 지적하였으나 그는 충성된 로마 카톨릭교회 교인으로서 자기 주장을 고집하려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며,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상기시킨 7권의 이의서(異議書) 중에서 넷만을 문제 삼았다.
히브리서에 대해서는 배교자(背敎者)들에게 두 번째 사죄를 허락지 않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야고보서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보다 행위를 더 고조하는 것같이 보인다고 비난하였고, 유다서는 베드로 후서에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증언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계시록은 애매하여 그리스도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 책들을 자기의 번역에서 신약성서의 맨 끝에 두었다. 먼저 그가 완전히 수락한 23권을 열거하고 그 번호를 적어 넣었으며, 다음에 약간 여백을 남겨 놓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에 오는 책들은 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임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 열등함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번호도 붙여놓지 않았으니 결국 일군(一群)의 신약 외경과도 같은 취급을 한 셈이다.
정경과 외경의 구분은 여호와신이 한 것도, 예수가 한 것도 아니다.사람들,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주교는 구약에 7권의 정경을 추가한 데 반해 동방수리아 교회는 오히려 신약에서 5권을 줄여서 정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경을 다르게 사용하는 이들은 서로를 각각 이단시하고 있다. 정경은 과연 몇 권이 되야 맞는 것일까? |
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4.성서의 사본과 역본들의 문제] |
2004/0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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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서의 사본과 역본들의 문제
성서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5,000개가 넘는 필사본들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필사본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문제, 수많은 사본들의 취사선택의 문제 등등......
1) 필사과정에서의 문제
《 옛날에 이 필사본들은 만드는 방법은 흔히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한 개인이 한 자 한 자 옮겨 써서 만드는 법인데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알파벳에는 유사한 글자들이 여럿 있어서 아주 성실한 사사일지라도 종종 혼동을 일으켜서 잘못 옮겨 쓰는 일이 생기곤 하였고 더구나 옛날에는 원어 성서에서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할 때 여러 가지 종류의 과오를 일으켰던 것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한 사람은 읽어 주고 여러 서사들이 받아쓰기하는 방식으로 단 번에 서사의 수만큼 많은 사본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서사들이 그 문서내용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자연히 잘못 듣고 쓰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경우 등에는 많은 착오가 생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후대 헬라어에서는 '우리'라는 말과 '너희'라는 말의 발음이 거의 구별할 수 없으리 만큼 같았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서신들에서 사본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본래 어떤 인칭이 사용되었는지 결정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 때로는 이러한 차이가 고의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데 마태복음의 가장 오랜 사본에는 주기도문(마 6:6~13)이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데 후대 사본에는 그 끝에 의식(儀式)에 사용하기 알맞은 송영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두 마디 송영이 되었지만, 후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세 마디 송영이 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 의식의 발전과정을 통해 약간의 고의적 첨삭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금욕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서 사본이 변하는 경우도 생겼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9:29에 본래는 "기도하지 않고는 이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고 되었던 것이 후에 금욕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기도하고 금식하지 않고는...."으로 변하였으며, 사도행전 10:30과 고린도 전서 7:5 등도 그러한 예다. 또 때로는 필사자가 다른 책에 있는 병행 구절들과 조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보충 삽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골로새서 1:14은 "우리는 그의 아들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인데, 후대의 어떤 사본에는 에베소서 1장 7절과 조화시키기 위해서 '그의 피로'라는 말을 첨가했다.
이와 같이 실수로, 또는 고의로 사본에 많은 변화가 생기고 차이가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내용이 바뀌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원문 비평학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에 의하여 오늘 우리는 성서 원본에 거의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여기까지가 신학대학 교수가 말한 내용이다. "근본적으로 내용이 바뀌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지금 성서원본에 거의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뒤에서 좀 더 솔직한 신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필사과정에서 너무나 오류와 변개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성서의 사본들
현재까지 구약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마소라 원문(the Hebrew Masoretic Text) : 10세기 말
1) 벤 하임 편집본 --> BHK1(Biblia Hebraica Kittel1,1906)
BHK2(1912)
벤 하임이 편집했던 본문은 어떤 한 히브리어 사본만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입수 가능한 모든 사본을 참조하여 만든 절충 본문으로, 대부분 14-16세기에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후대의 사본들이다.
2) 벤 아세르 편집본 --> BHK3(1937),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1977)
BHK3 와 BHS는 레닌그라드 사본(B19a 또는 "L")을 기초로 해서 편집되었는데, 그것은 레닌그라드 사본이 완전한 히브리어 성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이라는 점과, 그것이 10세기에 인정받았던 벤 아세르 본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BHK3 와 BHS는 대부분의 현대 영어성경의 번역의 기초가 되고 있는데, BHK1 이나 BHK2 에 비교해 볼 때 20,000에서 30,000 군데 차이가 있다. 현재는 히브리 대학에서 레닌그라드 사본보다 그 이전인 A.D. 9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알렙포 사본에 근거한 히브리어 성경인 HUB를 발간하고 있는 중이다. KJV, ASV, RSV 등이 초기 맛소라 본문을 사용했으며, NEB, NASV, GNB, NIV 등은 BHK3을 사용했고 NKJV는 BHS를 사용했다.
▷ 쿰란의 사해문서(BC1~AD1세기)
이 고대 사본은 194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구약의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책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사본이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나님의 아들' 등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활해 세계를 구원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는 인내와 인간성과 형제애, 자선과 빈곤을 가르치며 새로운 계율과 정의와 세례, 그리고 성찬(聖餐)을 만든다. 동굴에서 발견된 비밀사본의 이 사람이 누구냐고 퀴즈에 낸다면 거의 모두 '예수'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해사본'에 적혀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오직 '구세주'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고민하는 사람을 구원해주는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사람을 예수라고 단정한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 구세주가 예수보다 1백50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리스찬이 믿는 예수는 오직 단 한사람의 인물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그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설교된 것을 예수가 되풀이한 것이란 말인가?
구약 삼경(三經: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의 완전한 정본은 오늘날까지도 유동적이다. 금세기만 해도 영국에서 긴스버그의 히브리성경(1894, 1908, 1926)이 마소라텍스트에 의거하여 고대 수사본들을 정밀히 대조하여 새로 나왔고, 또 독일의 구약학자 키텔과 카아레에 의한 『비브라이카 헤브라이카』(1906, 1912)가 있다. 현존하는 최고사본(最高寫本)보다 일 천년이나 앞선 사해두루마리가 1947년에 다시 발굴됨으로써 70년대에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팀들이 새로운 성경을 준비중에 있었다.
다음은 신약의 사본들이다
▷ 시나이 사본(4세기경) 구약이 199개, 신약 147.5개의 양피지에 기록되어 있는 헬라어 성서 사본이며, 신약 성경 본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물 중 하나이다. 이 사본에서 마가복음은 16:8절에서 끝나고 요한복음 7:52-8:11의 간음한 여자의 기사는 빠져 있다.
▷ 바티칸 사본(4세기초) 외경의 므낫세 기도서, 마카베오서를 제외한 희랍어 성경 전체를 수록하였으나 현재는 상당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 알렉산드리아 사본(5세기초) 원래는 외경을 포함한 희랍어 성경 전체를 담고 있었으나 현재는 구약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신약도 일부가 빠져 있다. 구약은 2명, 신약은 3명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 워싱톤 사본(4세기말~5세기초), 에프라임 사본(5세기초), 베자 사본(5, 6세기) 등등
19세기 이래 많은 성서 사본들이 발견되고 성서원문 비평학의 발달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현대 비평판 헬라어 신약 성서"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바흐(1812), 라흐만(1851), 트레겔레스(1872), 티쉔돌프(1874),웨스트코트와 홀트(1881), 네슬(Nestle)판 헬라어 성경(1-26판, 1898-1979)
3) 고대 역본(譯本)
▷ 셉츄아진트(Septuagint, 70인역, 구약 헬라어[그리스어] 번역본 )
셉츄아진트는 기원전 280년 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헬라어를 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서로 '70인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셉츄아진트와 마소라텍스트는 체제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마소라 텍스트는 토라, 네비임, 케투빔의 삼경(三經)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반하여 셉츄아진트는 율법, 역사, 시, 예언의 네 부분으로 나뉘고 많은 외경(外經)들이 사이사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쓴 구약은 희랍어 번역본인 셉츄아진트(Septuagint,70인역,알렉산드리아 번역판)이며 지금 신약에 인용되고 있는 구약의 구절들도 모두 셉츄아진트에서 온 것이다.
70인역 구약성서(LXX)와 유대교 성서(타낙)가 따르고 있는 마소라텍스트(MT)는 서로 다른 독법(讀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두 성서의 원본이 다르거나 필사과정에서 수정 및 삭제 혹은 보충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 것이다
▷ 탈굼(Targum, 아람어 번역본): 기원전
▷ 페쉬타(Peshitta, 시리아 번역본): 2세기에 신약의 일부 번역, 4세기에 신약 22권 번역, 6세기에 27권 전체 번역
▷ 라틴 벌케이트(Latin Vulgate, 라틴어 번역본): 4세기말 제롬이 번역한,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 성서. 이 성서가 1,000년이나 내려오면서 그 내용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수정되고 첨가되면서 복잡한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13세기에 스테판 랑튼이 이 라틴 번역에다 장(章)을 구분해 놓았고 많은 교정을 붙였고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 때의 장 구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 성서는 그 사본이 약 8,000개나 된다고 하며, 그것들을 모두 대조하여 제롬의 원 벌게이트 성서를 찾아내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역시 원본이 없는 상태이고 또 그 내용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수정되고 첨가된 것이라는 말이다.
4) 서로 다른 텍스트(사본)와 번역본들
다음의 도표는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말씀보존학회'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것이며, 제목은 <한글KJV성경>對<개역한글판성경>,대조표 이다. 원래는 "㉮보존된 성경: 하나님께서 기록 --> 최조의 원문 ⓐ히브리 맛소라 원문 ㉯변개된 성경 : 사탄이 변개 --> 바빌론-그리스-로마의 신비종교---> ⒜오리겐" 과 같이 적혀있었으나 필자가 중립의 입장에서 다루기 위해 " ㉮KJV,한글킹제임스 성경 ㉯ NIV ,개역한글판성경"라고 고쳐서 사용하고자 한다.
㉮KJV(영어),한글 킹제임스 성경 ⓐ히브리 맛소라 원문(Hebrew Massoretic Text) ⓑ코이네 헬라어 표준원문(Koine Greek Textus Receptus) ⓒ구 시리아 역본(The Old Syriac, A.D.120) ⓓ구 라틴 역본(Old Latin, A.D.150) ⓔ이태리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157-A.D.180) ⓕ골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177-A.D.200) ⓖ켈트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300) ⓗ발칸과 독일 지역에서 사용한 성경(A.D.400) ⓘ비잔틴 제국 기간 동안 희랍 교회들에서 사용한 성경(A.D.312-1453) ⓙ헬라어 표준원문(Textus Receptus) ⓚ에라스무스 성경(1522), ⓛ콜리네우스 성경(1534), ⓜ스테파누스 성경(1550), ⓝ베자 성경(1604), ⓞ엘지버 성경(1633) ⓟ틴데일 성경(1525) ⓠ루터 성경(1543) ⓡ킹 제임스 성경(Authorized King James Bible, 1611) ⓢ새성경 사복음서(1998) 새성경 1판(신약, 1990) 새성경 2판(신약, 1990) 새성경 3판(한영판 신약, 1991) 새성경 4판(신약, 1992) ⓣ한글 킹 제임스 성경(신구약 합본, 1994) ⓤ한영대역 한글 킹 제임스 성경(1995)
㉯ NIV(영어), 한글 개역판, ⒜오리겐(A.D.184-254)의 헥사플라(Hexapla)제 5란-70인역(LXX, Septuagint) ⒝유세비우스의 50권의 복사본 ⒞바티칸사본(Vaticanus, A.D.350), ⒟시내사본(Sinaiticus,A.D.350) : "외경"포함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 A.D.415) ⒡예수회의 림즈 듀웨이 성경(Rheims Douay, 1582) 여러 비평가들이 편집한 헬라어 성경들 ⒢그리스바흐(1812), ⒣라흐만(1851), ⒤트레겔레스(1872),⒥ 티쉔돌프(1874)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헬라어 성경(1881) ⒧영어 개역본(RV, 1884) ⒨네슬(Nestle)판 헬라어 성경(1-26판, 1898-1979)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ies)의 헬라어 성경 1,2,3판(1966-1975) ⒪개역표준역본(RSV, 1952), ⒫여호와의 증인 - 신세계역본(NWT, 1957) ⒬새미국표준역본(NASV, 1959), ⒭새개역표준역본(NRSV, 1970) ⒮새국제표준역본(NIV, 1978), ⒯뉴킹제임스역본(NKJV, 1982)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56) - 첨가와 삭제가 임의로 이루어짐 ⒱공동번역 성서(1977)⒲현대인의 성경(1986) ⒳현대어 성경(1991) ⒴표준새번역(1993)
㉮성경을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한국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의 절대다수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을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성경과 ㉯성경은 그 텍스트를 서로 달리함에 따라 무려 30,000군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루터와 칼빈이 읽던 성경과 지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읽는 ㉯성경이 30,000군데가 다르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대본으로 ㉮성경은 벤 하임 마소라 원문(봄 베르그 편집본)을 사용한 데 반해 ㉯성경은 벤 아세르 맛소라 원문을 기초로 한 키텔의 히브리어성경(BHK3)과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스튜트가르텐시아"(BHS) 외에 70인역(LXX), 시리아 역본(페쉬타), 사해 사본, 사마리아 오경, 소수의 히브리어 필사본들, 아퀼라 역본, 심마쿠스 역본, 테오도티안 역본, 벌게이트(라틴어 역본), 탈굼, 제롬의 적스타 헤브라이카(Juxta Hebraica) 등의 원문을 혼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대본으로 ㉮성경은 전통원문(다수필사본, 비잔틴 원문, 시리아 원문)을 대표하는 헬라어 공인 원문<표준원문, Textus Receptus>를 사용한 데 반해 ㉯성경은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헬라어성경, 네슬&알랜드의 헬라어성경 등의 현대 비평판 성서를 주로 사용하였다.
㉮성경을 주장하는 측은 ㉯성경의 대본으로 사용된 70인역을 엉터리 번역판이고 변개된 의역판이라고 혹평하고 있으며 또 현대 비평판 성서에 대해서도 표준원문을 5,600군데 이상 변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대본으로 사용된 ⓚ에라스무스 성경에 대해 박창환 교수는 에라스무스가 참고한 사본들 중에는 10세기 이전 것이 하나도 없었고 계시록을 위해서는 12세기 사본 하나만을 사용하였고, 마지막 장이 없어진 사본이었던 까닭에 거기에 있어야 할 여섯 절은 라틴 벌게이트에서 거꾸로 헬라어로 번역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너무도 서둘러서 출판하였고 아주 후대의 열등한 사본들을 자료로 했기 때문에 헬라어 신약성서의 공인 원문(Textus Receptus)의 조상이 되기에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고 에라스무스 자신도 고백하였다고 한다. 사실 그는 계시록의 마지막 여섯 절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벌게이트를 기초로 해서 헬라어 본문으로 고쳐 놓은 것이라 한다. 박창환 교수는 오히려 최초의 한글번역성서는 공인원문을 대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잘못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며 성서 원문 비평학의 발달에 따라 최신 비평판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되는 새번역 성서들은 원본에 가까운 원문을 대본으로 삼은 번역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결론은 서로가 서로의 대본들을 부정확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박창환 교수의 말 중에 "원본에 가까운 원문을 대본으로 삼은 번역"이라는 구절에 대해서이다. 여기서 "원본"은 신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가 말한 '아람어'에서 희랍어(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말한다. 물론 이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5000개가 넘는 사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람어 --> 희랍어 --> 영어의 번역과정에서 아람어는 예수의 목소리와 함께 증발해 버렸고 무수히 많은 희랍어 번역사본들 중에서 심혈을 기울여 예수가 말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원문을 추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평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거의 원본(희랍어)에 가까운 희랍어 원문이 만들어진 것이 소위 현대 비평판 헬라어(희랍어) 성경이고 그 헬라어 성경의 원문을 대본으로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본도 문제가 있지만 또 번역의 과정에서 얼마나 본래의 뜻이 왜곡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가 말한 메시지가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론 '하나님의 감동' 운운하는 것이겠지만 현재의 성서번역에 수많은 오류가 발생하고 이 번역판은 못 믿겠으니 새로운 번역판을 만들자는 식으로 해서 발행된 새로운 번역판은 미국만 해도 100여 종류가 넘는다. 그리고 번역의 오류뿐 아니라 복음서끼리 서로 모순이 발생하는 것으로 볼 때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증거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성경 구절을 임의로 삭제했다는 확실한 증거도 있다.
5) 삭제 당한 성경 구절
개역 한글판(1956), 공동번역 성서(1977), 현대인의 성경(1986), 현대어 성경(1991), 표준새번역(1993) 등의 성경에는 "없음"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구절이 13군데나 있는데 이 구절들이 한글 킹제임스성경에는 그대로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일곱 개의 구절은 예수가 직접 말한 내용인데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는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고 말하였지만 무려 일곱 군데나 삭제를 당한 것이다.
지금 "없음"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구절은 다음과 같으며, 이 중에서 [ ]안의 구절들은 예수가 직접 말한 구절이다.
마태복음 [17:21], [18:11], [23:14]
마가복음 [9:44], [9:46], [11:26] 15:28
누가복음 [17:36] 23:17
사도행전 8:37 15:34 28:29
로마서 16:24
이런 구절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성경이 전달되는 과정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믿음과 맞지 않기 때문에 고의로 삭제해 버렸다고 한다.
한글개역판 등의 성경과 한글킹제임스 성경은 서로 다른 텍스트를 기반으로 번역한 까닭에 많은 부분에서 서로 상이한 구절들이 많고 결국에는 교리까지 완전히 틀려지게 되어 버린다. 따라서 '한글개역판' '공동번역판'등의 성경을 고집하는 기득권 세력은 한글 '킹제임스'성경(1994)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킹제임스'성경측은 '한글개역판' 등의 성경을 사탄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누가 옳을까? 어차피 '원전'이 없는 까닭에 이 번역판이 옳니 저 번역판이 옳니 하며 싸울 수밖에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일 것이니 중세시대 천주교의 종교재판이나 장로교의 창시자 칼뱅(Jean Calvin)이 그와 교리를 다르게 주장하던 세르베투스 등을 모조리 처형한 것처럼 교리를 다르게 주장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앨 수 없는 작금에 와서는 그 시시비비를 가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
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5. 성서 번역의 문제] |
2004/0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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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서 번역의 문제 Bible은 원전이 없는 번역판이 존재할 뿐이며 이 번역판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다음은 「번역의 이론과 실제」(나이다&타버 共著, 김용옥譯)의 내용 중 몇 가지만을 발췌한 내용이다.
▷ 단어라는 것은 단순한 의미의 점이 아니며 의미의 면이다. 따라서 다른 언어체계에 있어서 상응하는 단어들의 의미론적 면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문의 한 단어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수신자언어에 합당한 단어를 선택하는 일은 고정된 축어적 일치성 즉 한 단어를 사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보다는 그 문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보디"(몸)을 뜻하는 희랍어 단어 "소마"(soma)가 개역표준판(RSV)과 새영어성서(NEB), 그리고 오늘영어판(TEV)에서 번역된 몇 개의 용례를 들어보면 일목요연하게 설명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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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V |
NEB |
TEV |
마태 6:25 |
몸 |
몸 |
몸 |
마가 5:29 |
몸 |
그녀자신 |
그녀 자신 |
누가 17:37 |
몸 |
시체 |
죽은 몸 |
로마 12:1 |
몸 |
너희 바로 그자신 |
너희 자신 |
골로 2:11 |
(육체의) 몸 |
천한성품 |
(죄스러운) 몸 |
▷ 축어적 직역이 과연 완전히 정당한가? 그러한 직역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거나 곡해되지는 않는가?(많은 경우에 부자연스러운 동시에 곡해된다) 맥락적 일관성과 축어적 일관성의 대조는 희랍어 단어 사르크스(sarks, 축어적으로는 "flesh"[살])의 몇 용례의 번역을 대조해보면 명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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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V |
NEB |
TEV |
누가 24:39 |
살 |
살 |
살 |
고후 7:5 |
살 |
피로한 몸 |
우리 |
로마 11:14 |
살 |
나 자신의 종족의 사람들 |
나 자신의 종족의 백성 |
사도 2:17 |
살 |
모두 |
사람 |
로마 8:3 |
살 |
천한 성품 |
사람의 성품 |
고후 10:13 |
살 |
연약한 사람 |
세속적 |
고전 1:26 |
살살 |
인간의 기준 |
인간적 관심 |
▷ 누가가 기록한 산상수훈에는 그냥 "가난한 자"로 되어 있지만,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로 되어 있다. 누가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지칭하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마태는 그것을 정신적 문맥에 집어 넣고 있다.
우리말 성경의 문제를 살펴 보자. 신학자 나채운씨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한글 개역판 성경에는 문법이 틀리거나 말이 잘 통하지 않거나 부적당한 말이 많아 고쳐야 할 곳이 대략 10,0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수많은 번역서적 중 가장 엉터리 번역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한개'(한글개역판)와 '공번'(공동번역판)의 문장을 한 번 비교해 보자. 고린도후서 3:10 +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한개) + 과연 지금의 이 영광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이 영광에 비긴다면 과거의 그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공번)
▷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한개)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공번)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TEV) 한글개역판을 보면 남에게서 비판받지 않기 위해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글개역판의 번역은 철저한 오역(誤譯)이다. 마7:1의 한글개역판 문장을 읽고 오해하지 않을 자는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공동번역판의 번역조차 TEV만큼 선명하게 되어 있지는 못하다.
▷ "하늘 나라"는 장소일까? 아니면 사건일까?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그래도 번역의 사소한 문제라고도 보아 줄 수 있으나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련된 번역은 아주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의 이론과 실제」의 저자 나이다(Nida) 박사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는 "장소"라는 의미로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표현은 너무도 자주 사람들에게 오해되어 왔다. '나라'(kingdom)가 명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 반성 없이 그것은 '대상'을 지시해야만 한다고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장소'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실상 그것의 제일차적인 지시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the rule of God)을 지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이러한 문제는 '하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구문에 오면 더욱 첨예화된다. 이 경우는 "하늘"이 "하나님"의 대용어(代用語,substitute)로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말에 대한 유대인들의 금기적 습관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하늘"은 보통 일종의 장소술어(place term)로 간주된다. 이 결과 나타나는 경향은 이 구를 "하늘에 있는 나라"(the kingdom which is in heaven)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이것은 명백히 착오적인 것이다."
그리고 도올 김용옥 선생은 여기에 역주(譯註)를 달았는데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나이다가 말하고 있는 문제는 번역의 문제 혹은 해석의 문제가 신앙의 근본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신학적 문제를 본질적으로 제기한다는 좋은 실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이다의 발언의 입장은 현금 우리 나라의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광분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도들에게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우리 나라의 부흥적 성격을 가지는 대부분의 교회는 묵시사상을 팔아서 장사를 하고 있다. 인류역사상 이러한 묵시운동(apocalyptic movement)은 지속적인 것이며, 그중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로 '여호와의 증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티켓이 이제 거의 다 팔렸다고 주장한다. 몇 자리 안 남았으니 빨리 사라는 것이다. 만원사례가 육박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늘나라는 완전히 하늘에 붕 떠 있는 나라이며,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다.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부흥목사가 돈벌어 먹는 것도 이 마지막 티켓을 남발하여 팔아먹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천국이 그 따위 '곳'이라면 람보를 보러 극장에 암표를 사서 들어가듯이 암표라도 사서 들어가겠다. 만원사례 걱정없다! 하늘나라는 대상, 즉 장소가 아니라 행위이며 사건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신화적 은유(mythical metaphor)이다. 이 세계를 버리고 하늘에 붕 떠있는 나라로 도망쳐 들어가려고 하지말고 이 세계에서 나라를 행위하라! 무지한 동포들이여~." 영어성서(RV) 번역위원인 웨스트 콧(Westcott)도 "천국은 장소(place)가 아니라 상태(state)"라고 말했는데 다음의 『바이블』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 신자(信者)에게는 무덤, 불신자(不信者)에게는 지옥으로 번역? 다음의 내용은 인하대 정동수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리스어 '하데스'(Hades)라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이 단어는 "죽은 자가 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죽은 자의 몸이 가는 곳을 의미할 때는 '무덤'(Grave)으로, 믿지 않고 죽은 자의 혼이 가는 곳을 의미할 때는 '지옥'(Hell)으로 번역됩니다. 이 특정한 단어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 모두 11번 쓰였으며, [킹제임스 성경]은 그 중 10번을 '지옥'(Hell)으로 그리고 나머지 1번은 '무덤'(Grave)으로 번역했습니다."
소위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번역은 이렇게 하는 것인가? 기독교인들은 성서 번역도 영감을 받아서 한다고들 운운하는데 참으로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한글개역판 성서의 엉터리번역을 보면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소리는 얼마나 주관적이고 자의적으로 내뱉는 소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출판된 영어성경 번역본의 수는 완역된 것이 135개이고 신약만 번역된 것이 293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영감을 받아서 번역을 한 것이 맘에 안 들어 자꾸만 개정을 하거나 새로운 번역판을 내고 있단 말인가?
▷ 영어성서 번역자들이 성서를 바라보는 태도 그러면 과연 영어성서를 번역한 번역위원들은 성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다음은 성서의 영어번역(RV,ASV,NASV,RSV,NRSV,NIV)에 참가했던 번역위원들의 교리적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정석광씨의 석사학위 논문 <현대 영어성경 번역본의 신학적 입장 및 번역위원에 관한 연구>를 참조하였음)
중요 교리 |
번역 위원 |
성경의 무오성 혹은 영감성을 믿지 않음 |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Vance Smith(RV) George A. Buttrick (NCC-RV)Edgor J. Goodspeed(RSV) Clarence T. Craig (RSV) Frederick C. Grant (RSV) James Moffatt (RSV) Julius A. Brewer (RSV) |
예수의 처녀탄생을 믿지 않음 |
Harry Emersion Fosdick (NCC-RSV) |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믿지 않음 |
F. J. A. Hort (RV) Vance Smith (RV) Henry Sloane Coflin(NCC-RSV) Harry Emersion Fosdick(NCC-RSV) Edgor J. Goodspeed (RSV) |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음 |
B. F. Westcott (RV) Edgor J. Goodspeed (RSV) Clarence T. Craig (RSV) |
예수의 육체적 재림을 믿지 않음 |
B. F. Westcott (RV) Vance Smith (RV) Clarence T. Craig (RSV)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음 |
B. F. Westcott (RV) Vance Smith (RV) Edgor J. Goodspeed (RSV) Henry F. Cadbury (RSV) |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함 |
Vance Smith (RV) |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믿지 않음 |
B. F. Westcott (RV) Edgor J. Goodspeed (RSV) Henry F. Cadbury (RSV) Walter Rusell Bowie (RSV) Fleming James (RSV) |
문자적 의미의 천국을 믿지 않음 |
B. F. Westcott (RV) |
문자적 의미의 지옥을 믿지 않음 |
F. J. A. Hort (RV) |
마귀의 인격성을 부인하거나 존재여부를 의심 |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Edgor J. Goodspeed (RSV) |
침례 중생을 믿음 |
F. J. A. Hort (RV) |
오직 믿음이 아닌 다른 방법에 의한 구원 인정 |
James Moffatt (RSV) |
진화론을 인정함 |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
이들 번역위원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두 사람만 살펴보자.
⊙ 웨스트콧 (Brooke Foss Westcott, 1825-1901) 웨스트콧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오늘날 어느 누구도 창세기의 첫 세 장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를 제공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눈을 뜨고 그것을 읽는 사람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세 장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모세나 다윗도 시적 인물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성경 안에 있는 기적들에 대한 입장은 다음의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나는 기적 이야기 같은 것은 읽은 적이 없으나 직관적으로 그런 것은 일어날 성싶지 않은 일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그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발견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천국을 글자 그대로의 장소가 아니라 단지 어떤 상태로 믿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천국은 장소(place)가 아니라 상태(state)이다". "천국은 우리 안에 놓여 있다. 그리고 생각, 회상, 동경을 위하여 조용한 휴식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거룩한 상태(즉 천국)를 계속해서 신선하게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습관적으로 그것을 숨쉴 수 있다". "우리는 인내, 확고한 결심, 믿음, 그리고 노력을 통해 우리 주변의 천국 즉 우리의 지상생활의 영광을 희망하는 바이다". 그는 성경이 오류 없는 책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호르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성경 전체를 뒤덮고 있는 성경의 무오류라는 단어를 부인하오".
웨스트콧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속죄의 효능은 그분의 죽음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모든 삶"에 기초해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의 신성을 부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자(the Son of man)를 반드시 '그리스도'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었다. 성경은 예수가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한 적이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결코 직접적으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 호르트 (Fenton John Anthony Hort, 1828-1892) 그는 웨스트콧과 마찬가지로 성경이 오류가 없는 책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는 "만일 당신의 협조를 얻기 위해 신약성경의 절대적 무오류성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유감스럽게도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난 당신이 성경의 절대 무오류성을 지지하는 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소."라고 말했다. 호르트는 성경 사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원문들"은 국부본(Local Text)과 일치하며, 이 국부본은 4세기에 안티오크에 있는 시리아교회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바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보편적 본문(Universal Text)이라고 했고, 이러한 보편적 본문이 교회의 공회에 의해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을 거부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공의가 각 개인의 죄에 의한 고통 없이 어떻게 만족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는 대속의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ution)는 비도덕적이며 유물론적인 위조품"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호르트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가르침들을 이단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기까지 고통 당하셨다는 것보다 더 성경적이지 못한 것은 없다. 정말로 그것은 거의 보편적인 이단의 한 측면인 것이다". 그는 또한 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지불을 하나님보다는 사탄이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사탄에게 지불된 속죄 값이라는 그 원시적인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혐오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속죄 값에 대한 교리가 변호되어질 수 있는 다른 형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것도 아버지에게 지불된 속죄 값의 개념보다는 낫다".
호르트는 에덴동산의 실재를 부인한다. "나는 '에덴동산' 같은 곳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담의 타락도 영국의 시인이었던 콜러리지(Coleridge)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그의 후손들의 타락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글자 그대로의 영원한 "지옥"에 대해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옥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였다. 다음 글이 그 사실을 설명한다. "나는 모리스가 말로써 연옥을 부인했다는 것을 당신 마찬가지로 유감스럽게 여긴다... 회개의 힘은 현생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나는 불에 의해 깨끗하게 되는 연옥에서의 정화라는 개념이 성경이 내게 가르쳐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Divine chastisements)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기독교인들의 성서를 보는 잘못된 태도 왜 영어성서 번역자들은 성경의 무오성 혹은 영감성 등을 믿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성서를 보는 네 가지 태도를 알아야 문제가 풀리게 된다. (아래의 네 가지 태도에 대한 글은 인하대 정동수 교수의 글을 참조했음)
A) 자유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서 사람들이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창조와 이적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동정녀 탄생과 피의 속죄, 부활 등의 근본적인 믿음 자체도 수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닌 인류의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정도로 여긴 슈바이처나 도올 김용옥 등이 아마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성경을 단지 세상의 고대 문서와 같이, 또는 조금은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정도로 판단한다.
B) 신정통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문제를 제외한 역사적, 과학적 진술은 오류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구체적인 사실 진술에 있어서도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성경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판단의 절대기준이 되지 못하며,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
C) 보수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역사적, 과학적 사실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기록에 있어서도 절대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성경이 축자적으로, 즉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받아서 기록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초에 기록된 원본만이 온전한 성경이고 필사본이나 번역본은 온전한 성경일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어서 최초의 원본이 없어진 오늘날에는 처음과 같은 권위를 지닌 성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러 번역본들에는 삭제되고 첨가된 단어들과 구절들이 들어 있음은 물론 오역된 곳이 여러 곳 있다. 현재 사용되는 성경들을 비교해 보면 신구약 전체에서 각 성경들은 약 30,000군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개역 한글판 성경>과 <표준새번역>은 둘 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출간했지만 교리에 있어서 전혀 다르게 가르치는 차이를 많은 구절에서 드러내고 있으며, 똑같은 <개역 한글판 성경>에도 일반용과 침례교용이 다르게 되어 있다.
D) 극단적 보수주의에 속한 자들로서 현재의 성경 즉, 필사본이나 번역본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으로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온전한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네가지 태도 중에서 유럽이나 미국에는 A나 B와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위의 영어성서 번역자들도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C나 D와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데 그 원인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성서비판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구약성서의 형성사에 대한 박창환 교수나 박종수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 수 있듯이 성서에는 분명 똑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틀리게 얘기하는 부분들([2부] 바이블의 모순과 오류 참조)이 많이 있다. 이러한 이유는 여러 문서들(J문서-야훼이스트 사료층, E문서-엘로히스트 사료층, D-신명기 사료층, H문서-Holiness Code, P문서-제사적 사료층등)의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있다 보니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성서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의 여러 문서들(J문서, E문서, D문서, H문서, P문서 등)이 혼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성서를 보는 태도는 A나 B와 같은 태도가 오히려 정당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앞의 영어성서 번역자들이 성서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들은 신학대학에서 분명히 배우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들을 책에도 쓰고 있고 인터넷에도 올려 놓은 것이다. 학자들은 그래도 솔직한 편인 것이다. 그러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목사가 된 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알면서도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져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신도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 한 마디로 비양심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순진한(?) 신도들은 목사의 말만 믿고 성서에 있는 내용은 모두 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인데도 성경 내용하고 틀리니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가 일점일획도 안 틀린다는 미신을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자들이 일부에 불과하지만 우리 나라는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미신에 감염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목사의 얘기 외에는 눈도 감고 귀도 막는다. 가수 조영남(미국에서 목사 자격증 획득)이 최근에 쓴 책 <예수의 샅바를 잡다>에서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고 부활하고 승천했다는 얘기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라 승승장구로 승인되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왜 얘기했겠는가? 부시맨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대하는 태도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Bible을 대하는 태도는 마찬가지 아닌가? 한마디로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현대를 사는 부시맨의 후예들과 다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6. 기독교인들의 복음서 변조] |
2004/0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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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독교인들의 복음서 변조 기독교인들의 복음서 변조 내용 중에는 '경건한 사기' (Pious Fraud), '분서갱유' [注1] 등 형태가 다양한데 가필(interpolation)의 대표적인 예를 한 가지만 들어볼까 한다.[注2]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서에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동굴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 즉 16장 8절에서 끝을 맺고 있다. 그 뒤에 16장 9절부터 20절까지의 구절들은 나중에 첨가된 대목이다. 카톨릭 성경은 주석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수정을 본 것이 두 종류가 있는 데 짧은 것, 긴 것 두 개를 다 소개하며 고본에는 없었다고 색인 난에서 밝히고 있다. 신교의 성경에는 주로 긴 것을 쓰고 있는데 이 점을 주석 난에 "어떤 사본에는 9-20 절까지 없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첨가된 문구 중 논란이 많은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지상 명령 구절(16장 15절)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분명 이방인에게 선교하는 것을 금지하였었다. +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마태 10:5~7] +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노라..." [마태 15:24] 그리고 예수는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人子)가 오리라(마태 10:23)"고 하였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가 9:1)"고 하며 자신의 재림이 임박하였음을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신도들의 사고를 지배한 것은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기대'였었다고 앞에서도 얘기한 바 있다. 이렇게 급박하게 예수님이 재림할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땅 끝까지 선교하라고 한다?
어느 구절이 예수의 진짜 말씀일까?
예수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러면 예수의 승천후 사도들은 이를 실천했는가하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행전에 의하면, 예수가 구름에 가리워 승천한 후, 열 한 명의 제자들은 이 마지막 지상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땅 끝까지 선교하러 나가는 대신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열 한 명의 제자들은 예수의 이 마지막 지상 명령을 전혀 들은 적이 없는 것같이 행동했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이방인 "고넬리오"의 초청을 받고 거부감을 표한 것을 보라. 완강히 거절하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따리 환상을 통하여 이방 선교에 마지못해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0 장 참조) 나머지 제자들도 초반에는 베드로의 이방 선교를 비난한다. 올리브 산에서 동시에 예수의 지상 명령을 들은 사람들의 행동치고는 좀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지상 명령이 포함된 구절들이 4 세기경이 지나서야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후세 사람들에 의해 가필이 된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예수 사후 행동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구교 백과사전」의 내용도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 마지막 16:9-20 의 12절은 그 진위에 문제가 있다. 마가는 그 끝맺음에 3가지가 있는데 8절에서 끝나는 짧은 version, 9-20 절을 포함한 긴 version, 그리고 중간 길이의 version..... 이 셋 중 중간 길이의 것은 쉽게 제거되는 바 .... 아무도 이 중간 것을 진본으로 채택하지 않는다. ......... 긴 것과 짧은 것 중 어느 것이 진본인가 보면 .....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긴 것은 모든 고본에 없었다고 되어 있는바........ 모든 마가 고본이 8절에서 끝나고 있다고 이 역사가는 서술하고 있으며....... 성 '제롬'도 서술하기를 거의 모든 그리스 고본에 9-20절 구절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으며.......... 3 세기, 4 세기의 교부들도 이 구절에 대해 침묵하는 것으로 보아 동 구절을 모르고 있었던지, 또는 제외시킨 것으로 해석되어 진다...... "
결국 예수의 '이스라엘 백성만을 구원하러 왔다'고 한 말과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이 서로 모순된 까닭은 예수의 처음 생각과 나중 생각이 틀려진 것이라기보다는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을 후세 사람들이 가필하여 문서를 변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긴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는 계속 부도수표 처리되었고 결국 예수를 믿음으로서 이미 구원받았다는 식의 교회론이 등장하고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통적" 경전을 구분할 필요가 생기게 되어 기존의 수많은 사본들 중 정경과 외경을 구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필, 삭제, 분서갱유 등이 자행된 것이다.
이제 왜 모순된 두 종류의 말씀이 함께 Bible에 있는가 하는 것은, 원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대화하다가 불리하면 너무나 명백한 구절조차도 '비유'니 '상징'이니 운운하다가 결국 막판에 가서는 다음의 구절을 주로 인용한다. + 나아마 사람 소바르가 말을 받았다. ‥‥‥ 행여나 하느님께서 자네를 깨우치시려고 입을 열어 답변해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는가! ‥‥‥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더듬을 수라도 있단 말인가? 하늘보다도 높은 그것에 어떻게 미치며 저승보다도 깊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욥기 11:1~8]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말은 맞다. 하나님이 말씀을 안 하시면 알기 어렵다. 그러나 말씀을 하신 것이 Bible에 있고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다면 인간의 언어구조에 의해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Bible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쓰여진 말씀 그대로 명백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있고 아주 고차원적인 비유나 상징이어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가 인용하는 구절들의 거의 대부분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읽으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들이고, 그 해석 또한 다른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저서에서 주장했던 내용들이다. 이런 것들까지 네까짓게 인간인 주제에 감히 신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반박한다면 그들 스스로가 Bible의 존재를 쓸모 없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http://xbible.com.ne.kr
------------------------------------------------------------ [注1] * 경건한 사기 (Pious Fraud): 3-6 세기 교부들이 주로 통일된 교리의 확립과 교권의 유지를 위해, 편집을 한 행위. 예수의 입을 빌려 베드로를 초대 교황의 자리에 올려놓고 교황의 권위를 세운 행위 등등. 성경은 물론 기타 역사서("조세푸스"의 저술 등)에도 편리한 어귀를 첨가했으며, '경건한 사기'가 가장 성행하던 시절의 대표적 추기경이 "유세비우스"이다. * 분서 갱유: 교부들은 또한 불리한 문서들은 불경죄를 핑계 삼아 불 태워 버렸다. 분서를 면하여, 오랜 세월 숨어 있다가 최근에 발견된 문서들 중 하나인 나그함마디 문서 같은 것이다.
[注1] 본 내용은 인터넷 홈페이지 <예수를 찾아서>(http://members.nbci.com / namoradana / jesus_html /home.htm ) 에서 참조하였다. 조셉 윌레스는, 기독교의 문서변조를 증명하기가 "예상 밖으로 쉬웠다"고 하였다. 문서변조의 증거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교부들 자신의 서술과 구교의 교회사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문서변조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위 사이트를 방문하거나 조셉 웰레스의 인터넷사이트 "기독교의 문서 변조" ( Forgery in Christianity)를 방문해 보시기 바란다. |
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7. 결론] |
2004/0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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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서의 원전(原典)에 대한 결론
▣ 원전(原典)은 없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복사본 성경이 있을 뿐이다.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말은 근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Bible의 원전(原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한 존재다. 그럼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모두가 기원 4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생겨난, 무수한 카피(copy-模寫本)들인 것이다. 5천 5백 종류를 헤아리는 모사본들은 역시 모사를 거듭한 모사본인데다가 내용 또한 똑같은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는 형편인 것이다.
<원전>이란 것들 중에는 모순이 드러나지 않는 페이지란 단 한 페이지도, 제대로 눈에 띄지 않는다. 손으로 베껴 쓸 때마다, 내용이 달리 파악되었고, 그때 그때의 요청에 의해서 고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의 <원전>에는 얼른 지적할 수 있는 틀린 부분이 얼마든지 나타난다. 가장 중요한 원전인 <시나이 사본>이 역시 바티칸 사본과 마찬가지로 기원후 4세기경에 씌어졌다는 것으로 1844년에 시나이의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시나이 사본>에는 수정된 곳이 1만 6천 군데나 된다. 이것은 <저자>들로 보여지는 7명의 교정자들의 손에 의한 것들로 세 번 수정되고 네 번째의 <원전>에 의해 바꿔진 대목도 허다하다. 히브리어 사전을 저술해 낸 일류 전문가 프리드리히 데리츄는 시나이 사본인 이 <원전> 속에 3천 군데나 베낄 때 잘못 쓴 대목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교회 장로들도 <원전>이 날조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비록 그 범인에 대한 견해만은 구구했었지만 벌써부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또 성경의 원전에 대해 삽입, 모독, 파기, 개량, 말소 등 이런 말들을 공공연히 입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원전>에 있어서의 날조에 대한 화제가 나오게 될 때 좋은 표정들을 짓지 않는다. 날조자들을 감싸고 나온다거나, 의식적인 변경이니 뭐니 늘어 놓으면서 이들은 신의 진리를 표현시키는 언어, 문장을 만들려는 관심 하에 그렇게 고쳤었다는 등으로 주장으로 버틴다.
날조라는 문제에 대해 쮜리히의 로버트케일 박사의 저서를 넘겨본다. "같은 대목을 고친 두 명의 수정자들은 각기 정반대의 뜻으로 돌려 놓은 경우도 있다. 이건 그가 소속되어 있는 교파의 독단적 교리 즉, 도그마 해석에 따라서 생긴 의도적 변개(變改)다. 하였든간에 산발적인 <교정>에 의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텍스트에 혼란이 일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제네바의 산 피엘 주교좌 성당에서 오랜 동안 성직을 맡고 있었던 쟌죠라 신부는 "성경이 전면적으로 영감에 의해 씌어졌고, 하나님이 직접 저술했다고 하는 테제(these)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로버트케일 박사는 그의 저서 『현대인의 종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이 애당초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 줄로 단정하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 옛날부터 존재했었다는 식으로 고지식하게 믿고 있다. 그들은 모르고 있다. 초기 기독교 겨레는 2백년 동안에 걸쳐 구약성서 이외에는 성경을 갖고 있지 못했었다는 것에 대해서 대개가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또 구약의 중요부분이 기독교 초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했었다는 사실(예수가 설교의 바탕으로 삼고 있던 이사야서도 기원 2, 3세기경에 마무리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신약>의 기술은 아주 천천히 씌어지기 시작했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이 신약문서를 성경으로 쳐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때와 더불어 이 문서를 신자 단체 내부에서 낭독하는 습관이 생겨났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까지도 그것을 성스러운 책이라 해서 구약과 같이 대우해 주려는 생각은 갖지 않았었다. 기독교 여러 종파들이 싸움질을 시작하기에 이르렀고 이것들을 서로 손잡게 만들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을 즈음에야 비로소 성서로 격상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그리스도 사후 2백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그 문서를 성서로 간주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즉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조작인 것이다. [백남철 편저<코즈믹바이블> 중에서]
▣ 바이블은 모두 필사본일 뿐이다.김용옥 교수의 바이블에 대한 고견을 들어보자.
"바이블(Bible)이란 파피루스, 페이퍼와 통하는 말로서 종이쪽, 문헌이란 뜻이다. 바이블의 구성은 편지와 전기(biography)밖에 없는데, 예수의 전기를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가정되는 네 사람이 쓴 것이 "복음서"이고 거기에 「사도행전」이라는 역사기록과 초기에 활약한 사람들의 편지가 더해진 것입니다. 그것들 역시 모두 필사본이며 사도 바울의 편지도 모두 필사본입니다. 예를들어 「에베소서」의 성립과정을 따로 든다면,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던 중 에베소라는 데에 가서 교회를 만든 다음 떠나가면서 이제는 너희들끼리 예수찬양하고 살아라 하고 떠나가겠죠. 그런데 바울이 거기에 있을 당시에는 교회가 잘 운영되었지만, 바울이 떠나고 한참 지나니까 개판이 되어 버릴 것이 아닙니까? 몇 달만에 만든 교회니 지금의 터키에 있는 에베소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나자렛에서 나서 예루살렘에서 죽은 예수라는 사람을 알게 뭐야?
그래서 에베소교회에서는 서로 내가 옳으니 니가 옳으니 쌈박질을 벌이게 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메신저가 헬레벌떡 바울이 있는 곳으로 뛰어 갑니다. 그러나 교통이 좋지 않은 당시에 바울이 다시 돌아가서 설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울은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탄의 꾀에 빠지지 마라........." 등등의 내용을 써서 그 메신저에게 건네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성경』 에 있는 「에베소서」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니, 「고린도 후서」니, 「로마서」니 전부 이런 식으로 성립이 된 거예요. 지금 어느 사람이 당시 바울이 직접 쓴 그 편지의 원본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떼돈을 벌테지만 어떤게 사본이고 어떤게 원본인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초기에는 사도들의 이름을 가장한 온갖 위조편지가 많았어요. 그런 편지들의 온갖 사본들을 모아서 A.D. 4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데에서 편찬한 것이 바로 『바이블』이에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293∼373)가 한 짓이죠. 그러므로 유실되지 않고 성경27편에 들어간 글들은 아주 재수가 좋은 것이죠."[ 김용옥 <도올선생 중용강의> 중에서 ]
▣ 성경은 원본자체가 번역본이다. 따라서 성경은 예수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도 없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설사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 해도 그것은 분명 인간의 말(언어)을 빌린 것입니다. 인간의 말인 이상, 그것은 인간의 말의 구조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기독교성서의 원본(지구상의 최초의 기록)은 희랍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희랍어로 적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희랍어 원본이야말로 예수님말씀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아닌가? 이것은 매우 무식한 사람의 질문입니다. 예수는 희랍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는 지금은 死語가 되어 버린 아람어라는 토착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원본(희랍어)도 예수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최초의 기록도 단지 예수님 말씀일 것이라고 떠도는 말들을 예수님이 죽은지 4∼50년 경 후에, 그것도 아람어에서 희랍어로 번역하여 적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혀 몰랐던 희랍어로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성서는 이러한 최초의 기록에서 수십차의 개정(가감)과 번역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엉터리 번역이 빚어낸 성서의 문제들은 싸구려 엉터리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의 번역판들이 빚어내는 문제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있는 성서에도 보통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글개역판이고 하나는 공동번역판입니다.
그런데 이 두 판의 성경이 똑같은 장 똑같은 절의 기술에 있어서, 문장의 표현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전혀 다를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게 맞습니까? 도대체 어느 쪽이 하나님 말씀입니까?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한 자 한 획도 어김없이 모두 절대적으로 하나님 말씀이라면 도대체 이 어찌된 일입니까? ........성경에는 예수의 말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도 없습니다. 그러한 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여러 나라 말 번역이 있을 뿐입니다. 원본자체가 번역본이니까요. " [김용옥 <고교생을 위한 철학강의> 중에서]
▣ 정경(正經)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경(正經)을 성립시켰다. 성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조작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지금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경 대 외경의 구분이 부재했었다. ........ 그들(초대교회의 신도)의 사고를 지배한 것은 파루시아 즉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기대였다. 사도바울 자신이 자기 생전에 예수가 호령을 치면서 천사들의 소리와 신의 나팔소리를 반주로 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고 확신했고 그 때는 이미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나고 자기를 포함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구름에 휩싸여 공중에서 예수를 맞이할 것이라고 믿었다(데전 5:16∼18).
그리고 이 미래사실이야말로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최대의 위로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울의 상징적, 은유적, 추상적 이해가 아니다. 예수의 재림이란 그러한 사실의 모습으로 이 시간 이 공간 속에서 현실화되어 일어난다고 확신했고, 후년에 그는 재림 전에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인간적 불안감을 표시하기도 했다(빌 1:20∼25)[류형기 <성서주해> Ⅳ:561]
......대체적으로 초대교인들은 최저한 AD150년경까지는 긴박한 파루시아의 기대 속에서 살았다. 즉 자기들이 살고 있는 현세는 단순한 준비과정에 불과했으므로 현세 속에서, 즉 역사 속에서 자기 이름을 남긴다든지 역사 속에서 무엇을 성취해 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경전이 일차적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물론 파루시아는 계속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그들이 기다리던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영화는 상연되지 않고 계속 연기공고만 나붙은 것이다. 이러한 지연 속에서 초기 기독교는 파루시아를 비종말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비종말화는 점차적으로 역사의식의 증대를 가져오고 그러한 역사의식은 교회론으로 종결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라는 조직으로서 이 세계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이다. 교회야말로 천국의 지상에 있어서의 역사적 표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론의 사상적 물줄기의 완성을 바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카톨릭 교회론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초대기독교 문헌의 정경화는 이러한 교회론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경을 성립시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의 "정통성"의 타당화를 위하여 "정통적" 경전을 구분해 내어야만 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여튼 A.D. 150년 경까지만 해도 예수사도나 기존경전의 인물이름을 빌어 무명으로 혹은 가명으로 경을 쓰는 일은 전혀 위작의 나쁜 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권장되었다. ........... 우리는 케리그마, 즉 예수의 수난,죽음,부활,승천의 보고, 그리고 그의 행위와 말의 수집이 원래 구전의 전통(oral tradition)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구전은 예수의 언어였던 아람어가 주축이었고 이 구전 자체가 희랍어로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희랍어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를 직접 경험한 사도들이 다 죽고 난 후에는 이 구전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게 된다.
복음서의 최초의 제작은 이러한 구전의 보존을 위하여 이루어졌고, 또 구전간의 상이에서 오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 파벌들이 자기들의 구전을 기록하게된다. 그리고 교회의 성립은 교회의 예배와 의례(liturgy)를 위한 기록의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제1세기 말경에는 상당수의 복음서들이 제작된다. 어떤 복음서들은 사도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 부활한 예수의 직언이라고 하여 그 권위의 우위성을 보장받으려고 하였고 이러한 복음서들은 사도들의 충실한 기록이라고 여겨진 복음서에 대해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에 대해서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여기는 복음서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 정통성의 근거는 사도 저작성(apostolicity)이었다.
이 사도저작성이라는 기준자체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애매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으로는 분쟁의 결정적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고 2세기에는 이미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알렉산드리아의 소아세아를 중심으로한 동방교회 사이에 정경의 기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심각히 대두되었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2세기 말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3세기의 오리겐(Origen), 4세기초의 유세비우스(Eusevius)등에 의한 신학적 논란을 거쳐 조정과정을 거치는데 당시에 널리 유행했던 히브리인 복음서(Gospel of the Hebrews), 애굽인 복음서(Gospel of the Egyptions), 바나바서(Letter of Barnabas), 12사도 교의서(Didache), 헤르마스의 목자서(Shepherd of Hermas), 바울행전(Acts of Paul),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 베드로 묵시록(Apocalypse of Peter), 요한행전(Acts of John), 그리고 도마복음서(Gospel of Thomas) 등등은 여러 분류방법에 의해 외전으로 탈락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오늘의 27서가 정경으로 규정된 것은 아리아니즘(Arianism)의 비판에 심혈을 기울였던 기독교정통성의 옹호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 의해서였다. 라틴교회는 제롬(Jerome)의 영향 하에 아타나시우스의 결정을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27서 형태는 4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의 권위가 일시에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동서방교회에서는 기존의 성경을 썼다. 예를 들면 4세기 중엽의 시나이티쿠스 코우덱스판본(Codex Sinaiticlus)은 바나바서와 헤르마스서를 정경에 포함시키고 있다 시리아의 교회에서는 타티안이 편집한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 5세기까지 쓰였고,....... 7세기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시리아에서는 27서짜리 경전이 쓰여지게 된다.
그 뒤로 1546년에 라틴 벌게이트(the Vulgate)가 인쇄되기까지 텍스트 그 자체는 계속 유동적었다. 마틴 루터는 경전성의 기준을 "사도성"과 "그리스도에게로 귀결되는 것"의 두 척도에 두었는데,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은 후자의 척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했으나 관습의 권위에 복종하여 이 네 편을 신약의 마지막에다가 포괄시켰다. 이러한 텍스트의 역사를 고찰해 볼 때 우리는 현존 텍스트 그 자체에 절대적 권위를 두고 일점일획이 모두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성찰되지 않은 통념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성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조작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김용옥 <절차탁마대기만성> 중에서]
▣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성경의 판본은 하나도 동일 한 것이 없다. 1,200년경에나 장의 구분이 생겨나고 1,550년경에나 절의 구분이 생겨난다. " 신약성경의 원저자의 원사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인용된 성구들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구절들과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국론>을 번역할 때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성경지식을 기준으로 해야 하며 우리의 성경지식으로 번역할 수 없다. 이와같이 성경이란 원래 제멋대로인 것이다. 오늘까지 존재하는 사본 중에서 신약 27서 전체를 보전하고 있는 판본은 50종에 불과하며,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판본은 하나도 동일 한 것이 없다. 그리고 고판본은 모두 액센트와 쉼표의 표기조차도 없는 글자의 나열에 불과하며, 1200년경에나 장의 구분이 생겨나고 1550년경에나 절의 구분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고판본의 해독에 있어서 많은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구두점 없는 한문 고전이 갖는 문제점과 대동소이하다." [ 김용옥 <절차탁마대기만성> 중에서]
▣ 성서(Bible)에 대한 결론성서는 다음과 같은 왜곡의 과정을 거쳤다. 신약성서에 대해 한 번 살펴 보자.
1) 1단계 왜곡(구전): 예수의 육성음(아람어)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증발했으며, 예수의 말씀이 구두로 전달되던 시대가 최소한 한 세대 (30년)이상 흐른 뒤 서서히 쓰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의 사람들이 기억력이 좋긴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일점일획의 왜곡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2) 2단계 왜곡(번역): 예수가 구사했던 언어(아람어)는 최초로 희랍어(그리스어)로 쓰여지기 시작한다. 즉 번역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번역에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왜곡이 따르기 마련이다. 가령 영어 번역판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 것은 이러한 왜곡을 적게 하려는 수많은 노력과 몸부림인 것이다.
3) 3단계 왜곡(필사): 이 희랍어로 쓰여진 것조차 원본은 없다. 모두 필사본일 뿐이다. 필사본들은 하나도 동일한 것이 없으며, 필사의 과정에서 왜곡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4) 4단계 왜곡(취사 선택): 1~3단계를 거쳐 만들어진 5,000종이 넘는 사본들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예수가 말한 바와 가까운가 하는 것을 원문비평을 통해서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또한 약간의 왜곡이 발생한다.
5) 5단계 왜곡(번역):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비평판 그리스어 성서를 대본으로 하여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또 왜곡이 일어난다.
6) 기타 왜곡: 고판본은 모두 액센트와 쉼표의 표기조차도 없는 글자의 나열에 불과하며 장과 절의 구분시 많은 오류 발생, 정경과 외경으로 분류하는 과정(예수 사후 200년 이상 지난 후에야 현재의 27서 형태를 갖춤) , 복음서 변조(수정,가감,삭제 편집) 등의 왜곡도 무시할 수 없다. 이상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혀 일점일획의 왜곡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 내지는 사기(詐欺)에 불과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힘이다. 그러나 과연 성서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져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걸까? 여기까지 글을 읽은 독자들은 누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것이다.
☞ 한마디로 바이블(bible)의 원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태어나 보지도 못했다. 원본이라는 것 자체가 번역본일 뿐 아니라 복사본이다. 바이블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었으며[注1], 그러한 결과로 모순과 오류투성이다.
교회라는 조직이 그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성경만을 정경(正經)이라고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의 말씀도 없다. 예수가 말했던 아람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에 의해 쓰여졌으며,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느니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엄청난 사기(詐欺)이다.
아직도 이러한 사기를 밑천으로 밥먹고 사는 한심한 성직자들이 우리 주변엔 많다. 괴팅겐 대학에서 신약을 강의하는 한스 코첼만 교수는 기독교가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은 비판적 성서 연구 결과가 알려져 있지 않은 덕분임을 자인한다. 10억의 그리스도인 중에서 신학 도서관을 기웃거려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심지어 삼위일체나 예수의 신성(神性)과 같은 중요한 교리조차도 몇 차례의 종교회의를 거쳐 찬반투표로 인간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 [注1] 성서의 현대어 번역에 참여했던 요하네스 레이만 박사의 말을 소개해 본다. "복음사가들은 해석가였지 전기가는 아니었다. 그 여러 세대 동안이 흐르다 보니 모호해져 버린 부분을 밝혀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명백했던 것마저도 흐려놓고 말았다.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 버렸다." [코즈믹바이블, p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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