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 유해의 미스터리
지난번 도미나카 공화국을 여행했을 때, 콜럼버스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콜롬버스 등대 Faro A Colon'에 가 본적이 있습니다. 1992 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 주년을 맞아 콜럼버스가 그의 첫 항해 때 도미니카 공화국 땅에 들린 것을 기념하는 '처음 중의 처음 The First Of The Firsts'
이란 행사의 일환으로 지어진 기념관으로 오사마강 동편에 있습니다.
아직 항해술이 발달되지 못했던 때, 지중해의 지브로올터 해협이 스페인령이었던 시절, 스페인 사람들은 해협 끝 양쪽에 있는 "지브로올터 바위"와 헤라크레스의 기둥"을 동전에 새겨넣고 그것을 바다의 끝이라는 의미로 "No plus ultra 더 이상은 없다"라는 글귀를 표기했습니다. 이것은 이 두 곳이 지구의 끝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정 관념은 콜럼버스의 도전 정신에 의해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통해 속속 여러 대륙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스페인 왕국은 동전의 표기를 "Plus ultra 더 이상도 있다" 라고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탐험하는 동안 자신이 데리고 왔던 최초의 식민자들이 그와 그의 동생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발목에 쇠고랑이 채워진 채 선창에 감급되어 스페인으로 돌아왔습니다. 훗날 그는 이 쇠고랑을 방안에 매달아 놓고 인간의 배은망덕의 상징의 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 때 페르디난도 왕과 이세벨 여왕이 그를 구출해 주긴 하였으나 재등용은 하지않아서, 그는 결국 1506년 55세의 나이로 스페인 중북부의 작은 도시 발라돌리드에서 가난에 허덕이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남겨 둔 것은 발목에 찼던 최고랑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그의 업적이 인정을 받게 되고 그의 유해는 그가 평소에 원했던대로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 도밍고로 옮겨 경건히 이장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발견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탐험을 통해서 "더 이상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인간사에도 여전히 우리 생각하던 것보다 "더 이상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습니다. 이것은 미스터리 중에서 미스터리입니다.
또한 한 가지의 미스터리는 콜럼버스의 유해는 과연 어디에 묻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 주당국과 중미 중부의 도미니카 공화국 수도인 산토 도밍고 시당국은 콜럼버스의 유해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다며 이를 둘러싸고 500년간 이어진 `미스터리 사건'에서 한발짝도 양보하지 않고 있습니다.
콜럼버스는 1506년 5월 20일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숨졌습니다. 그는 당초 미주대륙에 묻히기를 바랬으나 맘에 드는 교회가 없어, 바야돌리드의 수도원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숨진 지 3년 후 그의 유해는 세비야 주내 라 카르투하 섬의 카르투시안 수도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1537년 콜럼버스의 아들 디에고의 미망인인 마리아 데 로하스이 톨레도가 남편의 뼈와 그의 아버지의 유해를 산토 도밍고의 대성당으로 보내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이렇게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옮겨진 콜럼버스의 유해는 스페인이 이스파니올라섬을 프랑스에 넘겨주던 1795년까지 산토 도밍고의 성당에 머무르게 되는데,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유해 만큼은 외국인 손에 둘 수 없다고 결정, 새로 지어진 성당의 주제단 뒤에 있는 부분을 파고 콜럼버스의 유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굴해 쿠바 아바나의 성당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했고 콜럼비스의 유해는 다시 세비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도미니카 공화국측은 1877년 콜럼버스의 유해가 있던 산토 도밍고의 성당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뛰어나고 훌륭한 남성: 크리스토발 콜론 경"이라고 적힌 박스를 발견했습니다. 납으로 된 이 박스는 13개의 큰 뼈 조각과 28개의 작은 뼈 조각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에 도미니카측은 이것이 콜럼버스의 진짜 유해이고, 스페인은 1795년 당시 다른 유해를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단은 지난 19세기 말부터 스페인 남부 세비야의 대성당에 안치돼 온 유해의 DNA를 콜럼버스의 형제 디에고 콜럼버스의 후손 DNA와 대조하는 작업을 한 후 "두 유골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절대적으로 일치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조사단은 콜럼버스의 유해 가운데 다른 일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묻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들의 발표는 콜럼버스의 500주기를 하루 앞두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산토 도밍고에 있는 콜럼버스 등대 기념관의 후안 바우티스타 미에세스 관장은 "콜럼버스의 유해가 도미니카를 떠난 일이 없다"면서 스페인 조사단의 발표를 일축했습니다.
이에 대해 2002년부터 유해 DNA 대조작업을 벌여온 스페인의 역사학자 마르시알 카스트로는 지난 몇 해동안 기념관에 안치된 유해와 디에고 콜럼버스의 DNA를 비교하기 위해 유해를 공개할 것을 요구해 왔으나 거부당했다면서 "이제 도미니카의 유해를 조사할 필요가 더욱 커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스페인 연구진이 세비야의 유해가 콜럼버스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도미니카의 유해가 콜럼버스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콜럼버스의 유해는 여러 번 옮겨졌으며 산토 도밍고의 묘지에도 일부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느 쪽의 말이 맞은 것인지? 이 또한 "더 이상도 있다"는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위의 사진들은 "콜롬버스 등대"
성 바오르 6세가 도미니카 방문 때 탔던 오푼 카
콜럼버스 무덤 앞에서
박물관 안에 있는 한국 관에서
박물관 주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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