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구(倭寇)가 가난한 어민이나 상인 출신이라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대단히 전문적인 무사 집단이었고, 마치 현대의 알 카에다와도 비슷한 테러 조직이었습니다.”
이영(李領) 한국방송대 교수(일본중세사 전공)가 최근 낸 단행본 ‘잊혀진 전쟁 왜구’(에피스테메 刊)는 왜구를 전문적으로 다룬 국내 최초의 연구서다. 우리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숱하게 출몰한 일본의 해적 집단’으로 알고 있는 왜구이지만 국내 학계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교수는 “왜구는 근본적으로 일본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에서는 잊혀진 반면, 가해자인 일본이 왜구 연구를 주도해 오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의 연구 결과는 우리 입장에선 상당히 뜻밖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 다카하시 기미아키(高橋公明) 등의 연구자들은 14~15세기 ‘전기(前期) 왜구’에 대해 “일본인·고려인·중국인 같은 다국적민으로 구성된 해적”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 교수는 “자기 조상들이 해적 행위를 했다는 것을 은폐하려는 심리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한국 사료에 대한 불신이 ‘국적과 민족의 틀을 넘어서 역사를 보자’는 당시 서양사학계의 풍조와 만난 결과”라고 말했다.
하지만 왜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화척·재인 같은 고려의 천민들이 ‘가짜 왜구’ 행세를 했다는 기록이 일본측 주장의 근거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사건에 불과했을 뿐이며 당시의 모든 정사(正史)와 문집이 왜구를 ‘왜인’이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일본 남북조 시대 중무장한 무사의 모습을 그린 삽화.
이 교수는 왜구를 ①1223~1265년의 ‘13세기 왜구’ ②1350~1391년의 ‘경인년 이후 왜구’ ③1392~1555년의 ‘조선시대 왜구’라는 세 시기별로 분류한다. 이중 ①과 ③은 창궐한 빈도가 낮은 반면 ②는 40년 동안 무려 591회의 침략 기록이 나온다. 왜 이 시기에 이렇게 왜구가 많았을까? 그것은 같은 시기 일본이 남북조시대의 전란기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큐슈 지방은 토호 세력인 쇼니 요리히사(少貳賴尙)와 이주한 무사 세력 사이의 군사적 갈등이 발생했고, 쇼니 휘하의 군사력이 군량미와 물자를 얻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 이들 ‘숙련 무사집단’이 바로 왜구의 실체였다는 것이다.
당시 왜구는 대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으로 구성된 복수의 집단이 연해 지방에 상륙한 뒤 내륙으로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약탈을 끝내고 토벌대가 도착하기 전에 철수했다. 왜구가 ‘삼면이 절벽으로 막힌 곳에서 칼과 긴 창을 고슴도치의 털처럼 겨누고 버텼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일본 남북조시대 사무라이들의 전술과 똑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고려 조정이 고작 어민과 상인으로 이뤄진 해적 집단도 막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이 교수는 “138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중장갑 기병들로 이뤄진 왜구를 상대로 결정적 타격을 입힌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며 “기록과 현장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손자병법’의 내용이 그대로 응용된 탁월한 전투였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 [잊혀진 전쟁 왜구] 펴낸 이영 방송대 교수를 조선일보 인터뷰실에서 만났다. /김보배 객원기자 iperr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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