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스크랩] 거란의 역사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5:41

거란(契丹)

거란족은 알타이어계의 몽골어족에 속하는 종족으로 우문선비의 일파이고, 고막해(庫莫奚)와 원류가 같은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란의 이름은 [위서]에 처음 나타난다. 4세기경에 거란은 고막해와 분리되어 독립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거란족은 지금의 서랍목륜하인 황수 유역과 용성(요녕 조양)의 북쪽에 주로 거주하였다.

남북조시기에 거란은 8부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통일된 부락연맹체를 이루지 못하였다. 479년에 고구려와 유연이 지두우를 분할하려고 연합을 하자 거란은 이를 두려워해서 북위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유연과 고구려의 강력한 공격의 여파는 고막해에 이르러 고막해마저 북위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였다.

수나라 말기에 거란은 대하씨를 수령으로 하는 부락연맹을 형성하였고, 고구려, 당나라와 돌궐에 3중 등거리외교를 구사하며 생존을 이어갔다.

당태종 시기(627-649)에 거란족의 수령인 굴가는 돌궐에서 벗어나 당나라에 귀부하였다. 648년에 당나라는 거란지역에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대하씨 수령인 굴가를 송막도독에 임명하고 이씨(李氏)를 사성하였다.

730년경에 이르러 대하씨가 주도한 거란연맹은 무너지고 요련씨가 대신하게 되었다. 945년에 이르러 저오가한은 연맹장에서 한걸음 나아가 스스로 가한에 올랐으며 당나라는 그에게 여전히 송막도독의 직함을 잇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거란은 중흥의 길에 접어 들었으며, 요련씨 부락연맹은 9가한을 이어 역사상 요련9장(長)의 시대를 열어갔다. 그중에서 질랄부는 요련8부를 형성하여 거란부족을 통괄하였다.

901년에 질랄부의 야율아보기는 실위, 우궐, 해족을 정복하고, 발해와 요서, 요동을 놓고 20년 전쟁에 돌입하였다.
902년 야율아보기는 40만의 군대로 하동, 대북을 공략하여 9개 군현을 정복하였고, 905년에 이르러 후당을 공격하여 북중국 지역을 대부분 공략하였다. 907년에 이르러 야울아보기는 거란국을 세우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916년에 이르러 야율아보기는 황제를 칭하고 스스로를 천황제라 불렀으며 년호는 신책(神冊)으로 정하였다.

건국후 태조 야율아보기는 남쪽으로 대, 하북을 공격하고, 서쪽으로 돌궐, 토혼, 당항, 사타, 저복을 어지럽혔으며, 926년에는 동쪽으로 진출하여 발해국을 멸망시l고 그 지역에 꼭두각시 정부인 동란국(東丹國)을 세웠다. 이해 야율아보기는 부여부에서 사망하였다.

936년에 태종 야율덕광은 석경당의 지원 요청을 받아 후당을 공략하여 멸망시키고 석경당을 후진의 황제로 옹립하였으며, 출전의 대가로 연운16주를 할양받았다.
943년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후진을 공격하였으며, 946년에는 후진을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이미 중국 북부지방의 역사를 주도하는 중심국가로 성장하였다. 이듬해 거란은 나라 이름을 요(遼)로 바꾸었다. 거란의 국가제도를 바꾸어 북원과 남원 이리근을 대왕으로 격상시키고 3경제도를 두었다.

세종 야율완은 950년에 남정의 길에 올라 후한을 공격하였으며, 이듬해는 후주를 공격하였다. 이해 9월에 세종 야율완은 태정왕의 모반으로 살해되고, 태종의 큰 아들인 야율경이 목종으로 즉위하였다.
목종 야율경은 귀족들의 모반을 진압하고, 사타족이 세운 북한(北漢)을 도와 북주와 뒤이어 일어난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969년에 목종이 시종엑 살해를 당하자 야율현이 경종으로 즉위하였다.
경종 야율현은 974년 송나라의 화의 요청을 받아 수교를 했으나 다시 북한의 요청으로 송나라를 공격하여 여러차례 승리하였다. 또한 979년에는 백마령, 사하 지역에서 송군을 격파하였다.
성종 야율융서는 12살에 즉위하였기에 승천황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성종은 국호를 다시 거란으로 바꾸고 고려와 송나라에 대한 군사행동을 시작하였다.

1004년에 거란군은 당흥, 수성 등지에서 송군을 격파하였고, 송나라는 단주에서 거란과 맹약을 맺었다. 이른바 단연지맹(澶淵之盟)이었다. 이로써 거란과 송나라는 120여년동안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거란은 성종 시기에 달단, 오고, 적열부의 군사를 이용하여 서쪽으로 회골(回鶻), 동쪽으로 고려를 침공하였으며 거란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그의 어머니인 소탁은 거란이 낳은 여걸이다. 어린 성종의 수렴청정을 맡아 직접 전쟁에 참가하고 대신회의를 주재하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성종 년간에 거란은 관리제도를 정돈하고 법률을 수정하였으며, 세제개혁을 단행하여 동북아 최강국의 시대를 열었다.

1013년에 성종이 죽고나서 뒤를 이은 흥종 야율종직은 황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1034년에 친정을 시작하여 송나라, 서하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조복부는 속국으로 거느렸다. 1044년, 1049년, 1050년 3차례에 걸쳐 서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서하를 번국으로 삼았다. 1055년에 흥종이 죽고 도종 야율홍기가 임금이 되었다. 도종은 부세를 균등하게 하고 무기를 수리하고 농상을 장려하였으며 도적을 금지하였다. 1063년에 황태숙(皇太叔) 야율중원이 행궁을 침입하여 도종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권신 야율을신이 권력을 농단하고 선의황후와 태자 준을 살해하였다. 이를 따라 조복(阻卜), 적열(敵烈), 달리저(達里底), 발사모(拔思母), 다찰랄(茶扎剌), 매리급부(梅里急部)등이 거란의 연맹체에서 이탈하였다.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던 북방기마연맹국가인 거란의 앞날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1101년에 도종의 손자인 야율연희가 임금이 되었다. 요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천조제이다. 이때 거란연맹에 속하였던 여러 부족과 인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특히 오고(烏古), 적열(敵烈), 달단(韃靼)의 이반과 거란 귀족의 내란은 거란의 역사운명을 더욱 빨리 재촉하였다. 1115년에 거란의 속국으로 억눌렸던 여진족의 아구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웠다. 천조제는 몇차례 친정을 단행했으나 누차 패하고 국토의 반을 잃었다.

1116년에서 1122년 사이에 금나라 군대는 요나라의 5경을 공략하였고 천조제는 지금의 내몽골 살랍제 서북쪽에 위치한 협산(夾山)으로 도망하였다가 1125년에 지금의 산서성 응현인 응주에서 금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해빈왕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어 살다가 죽었고 요나라는 망하였다.

 

 

거란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세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에는 거란인들이 만주 지방에 정착한 시대이다. 제 2기는 그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요(遼) 나라를 세워 947년 부터 1125년 까지 중국을 통치한 시기이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에 잔존한 거란인들의 일부가 서부지방으로 이동하여 카라키타이(Karakitay) 제국을 세웠는데, 이 제국은 몽골 제국이 발흥하기 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제 2기인 거란족의 중국 통치 시대에 대해 자세히 다룰 필요가 없다고 본다.

 

 거란이란 이름은 AD 5세기 초부터 등장한다. 북위 왕조는 오늘날 열하(熱河) 지방인 당시의 제홀(Jehol) 지방, 즉 시라무렌 강과 흥안(興安 Khinghan)嶺 산맥에 군집해 있던 거란족들과 정규적인 접촉을 갖고 있었다. 5세기 말엽에 거란족들은 중국의 북방 변경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되어 돌궐제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697년에 돌궐 카간 모초(Mo-ch'o)는 거란인들을 격퇴했다. 거란족의 이름은 오르콘 비문에서 돌궐제국에 귀속된 피정복민들의 긴 명단 가운데 나타난다.

 

 거란 문화는 정신적인 면에서나 물질적인 면에서 스텝 유목민들의 문화와 크게 다르다. 부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설화는 매우 특이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내는데  그 내용이 다른 알타이계 부족들의 기원 설화와는 크게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 초기 통치자들 중에서 두개골 형상의 신비스러운 한 통치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텐트에서 펠트 밑에 숨어 있었다.  이 두개골은 의식이 행해지는 때에만 사람의 모습으로 텐트에서 나오는데, 의식이 끝나면 두개골은 다시 텐트로 돌아가서 원래 형태로 변하곤 했다. 은둔처에 숨어 지내는 또 하나의 신비스런 통치자의 머리는 멧돼지의 머리였다.

 

 돼지, 소, 그리고 개들이 거란족의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는 쉽게 분간할 수 없는 다양한 계층과 이인종(異人種)의 혼합체적인 성격을 지닌 진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거란족의 사회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 사회 구조 안에서 다양한 인종 그룹들이 다양한 기능적 임무를 담당했다는 것은 가히 짐작되는 일이다.  야금술 같은 몇몇 특수한 공업은 이러한 분야에 특별히 종사해 왔던 부족들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지배 계급 거란족들의 주된 역할은 여러 다른 부족들의 잠재적인 경제력을 잘 조합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었다. 중국의 북부 지역을 정복하여 그 곳에 "중국 왕조"를 세운 거란족은 결코 미문명화된 미개인의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란 정권의 잠재적인 가능성은 야율(耶律) 부족 출신  아보기(阿保機 AD 872-926))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줄기 햇살에 의해 잉태된 아보기는 세살 짜리 아이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네걸음을 걸었다한다. 그는 네달 후에 똑바로 걷기 시작했으며 한 돐이 되었을 때는 말을하며 장래의 일을 예언하였다한다. 이리하여, 그는 일찍부터 조상대대로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가진 천부적인 지도자로 공히 인정되었다.

 

 관습에 의해 부족연합체인 거란의 추장은 각 부족장들 가운데 3년 임기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보기는 한번 추장으로 추대된 후에 추장직을 양도하지 않고 9년을 집권했다. 마침내, 권력 이양의 압력을 받자 그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철광석과 소금이 산출되며 농업이 가능한 오늘날 차하르(察哈爾 Chahar)省 지역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일종의 유배를 당해 후진에 처해 있었음에도, 아보기는 다른 거란계 부족들과 계속적인 접촉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경제력을 지렛대로하여 906년에 8개 부족을 통합하고 독보적인 추장이되는데 성공했다.

 

 태조(太祖)가 된 아보기는 20년 동안 내부 세력을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문자를 채택하게된 것은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국제 관계에서  키르기즈인들에 대한 원정은 또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924년에 몽골리아에서 우이구르인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던 키르기즈인들의 세력을 무찔렀던 것이다. 아보기는 키르기즈인들을 격퇴한 후에 중국 서부 튀르키스탄에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던 우이구르인들에게 그들의 본토인 몽골리아에 다시 나라를 재건할 것을 제의했었다. 비록 우이구르인들이 아보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거란인들과 우이구르인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게 계속 이루어졌으며, 거란 문화에 대한 우이구르인들의 영향은 지대했다.  이러한 문화적인 영향은 멜론 재배 기술로부터 우이구르 문자의 부분적 채택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하다.

 

 아보기는 926년 고려(高麗) 원정에서 사망하였다. 태종(太宗, 927-947)으로 잘 알려진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는 거란제국의 세력을 더욱 더 확장시켰으며 중국북부 주요 행로들을 장악했다. 947년에 거란인들은 제국의 이름을 요(遼)로 바꾸었는데, 그 이름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그들의 본토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이름이었다.

 

 거란은 제국의 기반을 닦아 가면서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1010년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고, 뒤이어 1014과 1018년에 또다시 도전하였다. 그러나, 매번 실패로 끝났는데, 특히 마지막 전쟁에서 고려의 강감찬 장군의 귀주(龜州)대첩으로 인해 거란은 크게 패하였다. 거란은 전통치 기간을 통해서 속민(屬民)이었던 여진족과 중국화된 발해인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029년에는 발해(渤海)가 주동이 되어 고려인과 함께 거란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이 시도는 아직 시기상조였으므로 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1114년에 거란 통치 영역 안에 있는 여진족이 북쪽 변경 밖의 여진족과 합세하여 거란제국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지막 거란 왕은 1125년, 퉁구스계 여진족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퇴위당했다. 이러한 불행이 있기 바로 전에 왕실 요인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도망하여 중국 문서에 서요(西遼)라고 알려진 새로운 거란제국을 설립하였다. 야율대석을 추종하는 자들은 자신들을 검은 거란족(Black Khitans)이라는 의미로 카라키타이(Karakitai)라고 불렀다 . 여기서 이름의 마지막 음절이 차이가 나는 것은 튀르크 방언의 특이성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족할만한 설명은 불가능하나, Khitan과 Kitai가 동일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카라키타이의 역사는 풀리지 않는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문서나 이슬람 문서에서 나타난 단서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야율대석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역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매우 신중하게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숨길 수 있는 도로들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거란인들 -더 정확히 카라키타이인들은 - 서쪽을 향해 행진하면서 두개의 루트를 따라갔다. 하나는 투르판(Turfan) 지역의 우이구르인들의 땅을 통과해 갔는데, 그 곳에서 그들은 우이구르인들로부터 친근한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더 서쪽으로 행진했는데 그는 그 곳에서 카쉬가르(Kashgar)의 통치자에 의해 접근이 금지된 길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 곳으로부터 천산산맥의 북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가게 되었는데, 이 길은 카라키타이인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이 후에 그들은 튀르크계 카라한조로부터 도읍 발라사군(Balasagun)을 탈취하여 그곳을 그들의 새로운 왕조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국가 지도자였던 야율대석은 "우주적인 왕"이라는 뜻으로 구르 칸(Gur Khan)이라는 왕명을 사용했으며, 그의 긴 통치기간(1124-1143) 동안에 카라키타이 제국의 세력을 서부 트란속시나(Transoxiana)까지 확장했다. 전성기에는 제국의 영토가 서부 중국 국경으로부터 아랄해에 이르렀으며 남부 시베리아의 일부도 카라키타이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역사적 물증들이 있다. 수적으로 적은 거란인들은 거대한 전체 제국을 그들이 직접 관할하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지방 장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족들을 통괄하도록 하였으며 그들의 통치권을 허락하는 대신 그들은 구르 칸에게 조공을 바쳤다.

 

 카라키타이 제국은 1211년 징기스칸의 봉신(封臣)이며 나이만(Naiman)의 통치자인 큐츠류그(Küchlüg)에게 제국의 절반 가량을 정복당하고, 콰레즘의 무함메드 칸에게 제국의 서부지역을 빼앗김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거란인들의 제국은 단지 2세기 반 동안 밖에 지속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처음에는 중국 북부가, 후에는 전 중국이 거란족의 이름으로 서구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의 러시아어명은 지금도 Kitay이며, 영어명은 Cathay이다. 이 영어명은 르네상스 시대에 중국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13세기 전반부부터 줄곧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명칭이다.

 

 거란족의 운명은 참으로 괄목할만하다. 몽골어를 사용하는 만주지방출신 소수그룹이 2세기동안 중국 북부를 정복하였으며 마침내 세력권에서 밀려날 때 조차도 내륙아시아에 튀르크어와 이란어 사용 부족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유목민 제국을 창립하여 통치할만한 정치적 생명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퉁구스계어를 사용하는 만주 동부 지방의 여진족의 역사는 거란족의 역사와 많은 점에서 일치점을 보여준다. 산림의 사냥꾼들인 여진족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제국을 세움으로써 중국 영토의 큰 부분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여진족의 금조(金朝 1122-1234)는 몽골족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러나, 거란족과는 달리 패배 후에 그들의 새로운 제국을 다시 형성시키지 못했다.

 

 여진족의 문화와 그리고 여진족과 거란족 사이에 존재했던 복합적인 관계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두 민족의 문화에서 사냥은 경제적인 면과 종교 예식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진족들은 거란족에게 수사슴의 울음 소리를 흉내내는 전문 사냥꾼들과 독수리들을 주었는데, 이 독수리들은 후에 거란족에 의해서 종교적 성격을 띤 야생 거위 사냥에 사용되었다. 수사슴 사냥은 여가를 즐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종교적 행사이기도 했는데, 거란족들의 종교 의식에 여진족들이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일이  선호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여진족들은 거란인들의 손아귀에서 때만되면 반복되는 굴욕적인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여진족들의 마지막 봉기는 요나라 법정에서 여진족 부족장 아골타(阿骨打)에게 가해진 치욕적인 행태로 인해 발발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나라를 세운 뒤, 중국인들을 통치하는 어려운 임무에 직면한 여진족은 그들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들 고유의 문자를 개발했으며, 그들의 언어가 살아남게 하기 위한 조처들을 취하고 지방의 인구들이 혼합되는 것을 방지했다. 그러나 이인종(異人種)의 융합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몽골인들이 금조(金朝)를 멸망시켰는데, 이 때에 금조는,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겠으나, 이미 중국화되어 있었다.

 

 

 

이건 야율아보기와 요나라

 

중국 요(遼;거란)나라 초대 황제(916∼926). 이름은 억(億), 자는 아보기. 거란 질랄부(迭剌部) 출신. 901년 거란 요련부(遙輦部)의 흔덕근(痕德菫)이 칸[可汗]이 되자 그 밑에서 질랄부 이리근(夷離菫;추장)이 되어 902년 허둥[河東;지금의 山西省 중남부]·대북지방(代北地方;지금의 山西省 북부)을 침략하여 많은 한인(漢人)을 영토 내로 강제이주시켜 시라무룬강[西拉木倫江]과 랴오허강[遼河]의 합류점 부근에 용화주(龍化州)를 설치하고 살게 하였다. 거란족은 8부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8부의 장에서 선출된 사람이 칸이 되었는데, 그는 칸위[汗位;왕위] 교체제를 종신제로 고치고 여러 부를 통합하여 907년 칸에 즉위하고 중국식으로 황제라 하였다(제 1 차 즉위). 이어 군주권 강화에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916년 용화주에서 대성대명천황제(大聖大明天皇帝)에 즉위했다(제 2 차 즉위). 그 해 7월 당항(黨項)·토욕혼(吐谷渾)·사타(沙陀) 등 여러 부를 정복하고 장성(長城)을 넘어 화북(華北)에 침입하여 울주(蔚州;지금의 河北省 蔚縣)·신주(新州;지금의 河北省 承鹿縣) 등을 공격하고 서남면초토사(西南面招討司)를 규주(지금의 河北省 懷來縣)에 설치하였다. 921년 대군을 거느리고 단(檀;지금의 河北省 密雲縣)·순(頂;지금의 河北省 順義縣)·안원군(安遠軍) 등 허베이[河北]에 있는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의 주민들을 거란 각지로 옮겨 본래 살던 곳과 같은 주현명(州縣名)을 설정하여 살게 하였으며 농경 및 기타 생산에 종사하게 하여 거란의 재정적 기반을 다졌다. 924년 6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요골(堯骨;뒤의 태종)과 함께 서쪽 여러 부족을 정복하였는데, 아보기는 고회골성을 거쳐 포류해(蒲類海)까지 원정하였고 요골의 군대는 오르도스의 토욕혼부·당항부에 원정하였다. 925년 12월 발해(渤海) 원정에 나서 926년 1월 발해 부여부(扶餘府;지금의 吉林省 農安縣)와 수도 홀한성(忽汗城;지금의 黑龍江省 寧安縣)을 함락시켜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 뒤 그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옛 수도를 천복성(天福城)이라 고치고 아들 야율배(耶律倍)를 왕으로 봉하고 귀국하는 도중 부여부에서 죽었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요(遼)

중국의 왕조(916~1125). 정복왕조의 하나이다. 창시자는 동호계(東胡系) 유목민인 거란족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이다. 거란족은 4세기 이후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江)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6~9세기경, 수(隋)·당(唐)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발전하였는데, 9세기 말 당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점차 발흥(勃興)하였다. 질라부(迭刺部)의 실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야율아보기는 무공을 세워 기반을 구축하고 이주시킨 한인(韓人)의 협력을 얻어 거란제부(契丹諸部)의 통합에 성공하여, 군장(君長)이 되었다가 916년에 즉위하여 중국식으로 황제라 칭하고 본거지였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遼寧省 巴林左旗)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가 곧 요의 태조(太祖)이다. 태조시대에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제부족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고, 동쪽으로는 발해(渤海)를 멸망시켜 만주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제2대 태종(太宗)은 중국 경략에 힘써, 후당(後唐)의 장군 석경당(石敬d)을 도와 후진(後晉)을 세우게 하였고, 그 보상으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아 국호를 요라 하였다(946).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으로 진출하여 후진을 멸망시키고, 대량(大梁:河南省 開封)으로 진출하였으나 한지(漢地) 지배에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제3대 세종(世宗), 제4대 목종(穆宗), 제5대 경종(景宗) 때에는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계속되어 남방진출은 어려웠으나, 제6대 성종(聖宗), 제7대 흥종(興宗), 제8대 도종(道宗)의 3대 약 100년간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성종 때 가장 강성해져서 성종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유리한 조건으로 송과 화의를 맺었다(淵의 盟約). 이후 요는 송으로부터 획득한 세폐(歲幣)로 재정이 풍요해졌고, 송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문화상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편 동만주의 여진(女眞), 닝샤[寧夏] 지역의 탕구트(후의 西夏) 등을 복속시켜, 그 세력은 중앙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 방면으로까지 미쳤다. 흥종 때에는 송과 서하와의 분쟁을 틈타 조약을 유리하게 개정하는 등 탁월한 솜씨를 보였으나, 성종이 국력 충실을 꾀하여 중국 체제를 많이 받아들인 결과, 국수적인 보수파(保守派)와 혁신파(革新派)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 흥종·도종 때에는 양파의 파쟁과 종실(宗室) 내부의 세력쟁탈이 결부되어 때때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이에 동부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완옌부[完顔部]가 점차 강대해져, 1115년 그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독립하여 제위에 올라(太宗)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요의 토벌군은 번번히 패퇴를 거듭하였으므로 요는 금과의 화친을 고려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하여 금은 일찍부터 연운 16주 회복을 꾀한 송의 요청에 따라 대요협공조약(對遼挾攻條約)을 맺었으므로 요는 갑자기 곤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帝)는 연경(燕京:北京)과 다퉁[大同], 그리고 서쪽의 협산(夾山:內蒙古 自治區)으로 도망가 금군의 추격을 피했으나, 25년 여도곡(余睹谷:山西省 朔縣下)에서 사로잡혀, 요는 멸망하였다. 이때 제실(帝室)의 일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요(西遼)를 건국하였다.

 

 

 

거란족은 아마도 몽골족과 그리 멀지 않은 종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5-6세기경에는 몽골고원 일대에 거주했는데요, 고구려와 돌궐, 그리고 북주와 수나라가 치열하게 상쟁을 벌인데에는 요하 상류 유역에 거주하던 거란족의 향배가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즉, 고구려와 돌궐, 중국의 왕조가 마주치는 부근에 거주하는 거란족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이들 강국들이 치열하게 쟁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쟁투는 결국 고구려와 수왕조간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고구려 멸망 후 발해가 건국되는데 있어서도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대걸걸중상, 대조영 등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들이 탈출하면서 발해가 건국되지요.
 
당나라 멸망기 5대10국의 혼란기에 거란족은 후당의 건국을 도와주고 그 댓가로 연운16주를 할양받습니다. 연운16주를 배경으로 야율아보기 칸이라는 탁월한 영웅이 나타나 거란족 최초의 정복왕조인 요나라를 세웁니다. 요 왕조는 발해를 멸망시킨데 이어 송, 고려 등과 실력을 겨루며 화북지역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유목왕조로서 농경민족을 지배하는 이원적 지배구조(유목민과 농경민)를 창시하는데 거란족이 창시한 이 제도는 훗날 금나라와 몽골의 원나라에까지 승계되는 탁월한 제도입니다.
 
요 왕조는 서기 1115년에 아골타의 지도 아래 일어선 여진족의 금나라에 밀리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1125년에 금에 의하여 멸망당하는데, 세계 역사상 피지배 민족의 봉기 후 10년만에 지배왕조가 멸망당하는 보기 드문 기록이라고 합니다.
 
근데 요 왕조는 멸망당해도 거란족은 없어지지 않고 금 왕조 치하에서 금 왕조의 중견 관리자로서 위치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고 지휘관은 여진족이라 해도 허리에는 거란족들이 많이 있었다더군요. 이런 거란족들은 몽골군의 금나라 침입시 몽골군의 편을 들고 그 결과 당시 군사강국인 금나라가 몽골군에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보고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요나라 멸망시 왕족인 야율대석(엘뤼타시)이 이끄는 일군의 거란 왕족과 장수들은 거란의 유족을 거느리고 몽골고원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중앙아시아에 이르러 카라한 왕조를 침공해서 멸망시킵니다. 세계사에서도 이슬람 왕조가 비이슬람 왕조(불교의 거란족)에 멸망당한 최초의 기록이며, 이슬람 왕조에도 상당히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왕조가 서요인데 서양사에서는 카라키타이(러시아어로 블랙차이나 라는 뜻이랍니다)라고 합니다. 서요는 약 80년간 중앙아시아의 강국으로 행세하는데, 중간에 지배층이 바뀌면서 몽골의 침입때에는 서요는 이미 거란족 왕조가 아닌 크리스트교왕조로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금나라의 중간층을 이루던 거란족과 서요를 지배하던 거란족들은 몽골군의 침입시 대부분 몽골군에 협조하여 쉽사리 몽골과 일체가 됩니다. 그래서 몽골 시대 중간관리층에는 거란족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몽골보다 앞서서 중원대륙과 중앙아시아, 높은 수준의 문명을 이루던 민족을 지배한 그 경험과 관리기술이 어디 가겠습니까? 칭기즈칸의 핵심참모였던 야율초재가 거란족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지요.

 

 

 

중고등학교 국사책에는 발해인의 구성이 지배층인 고구려계와
피지배층인 말갈계로 되어 있다고 써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관련 기록에는 말갈병을 동원했다는 말은 있어도
고구려가 말갈족을 피지배민족으로 통치하면서 그들을 부려먹었다(?)는
말은 없더군요. 
전 말갈이라는 명칭이 동예,옥저 같은 일종의 지역적 부족명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신라 초기에 말갈이 공격해 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아도
말갈이 만주에 사는 이민족이라면 멀리 경상도에 있는 신라를 공격할수는
없으니 대략 지금의 한반도 동부해안에 거주하던 반농반목의 부족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죠. 
말갈족의 중요성은 그들이 후일 여진족이라 불리며 금나라를 세우고
(이것도 금이 아니라 김이라 읽어야하지 않을가하는..중국어로는 금,김 구분이
안갑니다)
 
 
 
만주족이라 불릴때는 후금국(청나라)를 세우죠. 
청나라는 삼전도에서 조선을 굴복시켰으면서도 속국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거의 속국이나 다름없지만은 중국-명-처럼 완전히 직접 통치하지도 않죠.
명나라의 전영역과 조선의 영역을 비교하면,또한 청나라 수도인 북경과 조선의
거리를 생각하면 조선을 완전히 직접 통치해도 이상할게 없는데 말이죠)  
야사에 따르면 삼전도에서 청의 태종이 조선의 인조에게,
[같은 조상을 가진 형제국이면서 어찌하여 중국인들 편을 들었느냐]고
꾸짖었다는 말도 있더군요. 
후금의 창건주인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왜구놈들을 무찌르겠사오니 3만의 원군을 보낼것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했다는 말도 있구요. 
금의 건국자인 아골타는 고려인 김함보의 후예라는 말도 있으니(금사에 기록된)
여진족,혹은 만주족이라 불리던 야인들이(왜인과 대비되는 멸시적인 명칭)
고려나 조선을 같은 조상을 가진 형제국 내지 부모국으로 여겼다고 볼수도 있겠군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말갈족의 정의는 확실히 내려져야 합니다. 
고구려의 주민들이 신라보다 당에 더 많이 끌려갔고 발해는 당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의 주장과 고구려를 선말갈, 금,청의 여진족을 후말갈이라 칭하는 일본의
주장에 반격하여 고구려,발해사를 우리역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도 말갈의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 깊이있게 생각해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수십년전만해도 중국은 청의 역사를 중국사에서 제외했었습니다.
그러던것이 어느새 청사=중국사가 되었고 고구려사=중국사로,
징기스칸=중화족의 영웅으로 만들어버리는군요(내몽고의 주민이 몽골공화국의
인구보다 훨씬 많습니다.) 
말갈족이 우리민족과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으로 밝혀진다면,
대금국,대청국의 역사는(중국식 표현) 우리 사촌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55개 소수민족의 이탈을 막기위해 억지논리를 펼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더러운 암투를 막기 위해서도 꼭 알아야만 할 말갈족,그들은 누구일까요? 
질문자가 선택한 답변 
고구려인입니다 
 
ksghumen1 (2005-07-08 19:38 작성)  이의제기 | 신고  
 질문자 평  
고구려의 세력팽창 과정에
말갈의 몇 부족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간접통치를 받게됩니다.
그 후로 그 말갈부족들은 오랫동안 고구려 세력권 아래 있다보니
자신들도 고구려인이라는 생각을 갖게되고, 고구려인으로써의 자부심을 갖게됩니다.
또한 고구려는 말갈족만의 특수 부대를 만들 정도로
말갈을 믿게(?)됩니다.
물론 특수부대는 일부 말갈족만 되었지만요.
이렇게 말갈족은 고구려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지내면서,
고구려가 외세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전쟁에 참가하여 고구려의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대표적인 활동사례가 당 태종의 침략 때 입니다
당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왔을때,
말갈족 특수부대의 활약으로 당은 쉽게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 태종은 말갈족의 지원을 줄이기 위해
포로가 된 말갈족 수천여명을 생매장시켰습니다.
결국 당 태종의 침략은 실패했지만요.
또 한가지 예로는 고구려 유민들과 발해를 세울때에
목숨을 걸고 당의 세력을 몰아 내는데에
협조를 했습니다.
만약 고구려인이 아니었으면 무엇하러 목숨바쳐 싸웠겠습니까?
이렇듯 말갈족은 고구려인들과 힘을 합쳐 목숨을 바쳐가며
고구려를 위해 싸우는,
명백한 '고구려인'이었습니다. 

답변자가 추가한 정보   
내용출처 : 내머리속의 지우개.  
질문자가 선택한 답변 
re: 말갈족은 고구려사람인가 이민족인가  
caos999 (2005-07-10 00:30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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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 평  
이민족으로 봐야 합니다. 발해 성립시에도 많은 인원을 차지 했습니다만 발해 멸망후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전혀 별개로 행동합니다. 즉 단순히 피지배층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말갈족이 같은 동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면 (즉 고구려나 발해 지배층에게)  발해가 그렇게 단기간에  멸망하지는 않죠.
 
답변들 
re: 말갈족은 고구려사람인가 이민족인가  
junsunmi1109 (2005-07-08 18:20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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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중국 동북 지방에 살전 유목민족으로 일정하게 정해진 곳에 살던 민족이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방목생활로 영위하여 살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건국했을 때 말갈족을 정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외 다른 역사서를 보면 말갈족이 고구려에게 오랫동안 지배를 받았다고 쓰여 있지요.
특히 고구려가 수와 당이 사울 때 이들 말갈족은 용병으로 참전해 고구려를 도운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아 말갈족이 고구려에게 오랫동안 지배 받으면서 어느정도 고구려인으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세히 구분짓기가 참 애매하군요  
re: 말갈족은 고구려사람인가 이민족인가  
khoya123 (2005-07-08 18:55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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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은 고구려군에게 점령당한 거란족과 비슷한 유목민족으로 한동안의 전쟁으로 국내성(현재의 집안)이나 평양성으로 흘러들어 오게됩니다. 그 말갈족은 정복전쟁을 치를때
대부분이 용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말갈족는 거의고구려에 흡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없어지고  발해가 새워질때 그의 주축(여기서 주축은  고구려유민을 뺀 나머지)이 되었슴으로 말갈족은 고구려 사람입니다 

내용출처 : 나의 머리  
re: 말갈족은 고구려사람인가 이민족인가 
gucci410 (2005-07-14 15:0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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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민족이란 개념부터 정해야 할것 같네요....
민족이란 뭘가요?
같은 핏줄에 말과글,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봐야 할가요?
아니면 이중에 한가지라도 공유를 하면 민족으로 봐야 할가요
이것에 따라 이민족으로 볼수도 잇구 같은 민족으로 볼수가 있겟죠
좁은 의미의 민족으로 보면 한반도내지 남한만 같은 민족으로 봐야 겠지요
넓은 의미로 보자면 충분히 같은 계열로 볼 수 있구요
민족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민족이 될수 있구,다른 민족으로
볼수도 있겠네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제와서 같은민족으로는 하기에는 그렇구
동이계열중 한갈레로 형제국 비숫한 개념으로 봐야 하지 않을가요
터키 같은 경우에는 고구려 개국 시조설화와 같은 내용이 실린 비석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우리 민족으로 보기에는 어렵겠죠 물론 터키보다는 말갈족이 우리와 좀더 비슷하겟지만요.
청태조의 성과이름이 애신각라이구 풀이하자면 신라를 생각하자 뭐 그런 뜻이던구요
그리고 청이 망하구 나서 황제족들은 모두 성을 김씨로 바꿨다고 하네요.......ㅎㅎ 
(출처 : '말갈족은 고구려사람인가 이민족인가' - 네이버 지식iN)
 
 
 
 
걸걸중상(조영의 아버지)은 고구려의 유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름이 걸걸중상 일까요?
사실은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이름도 원래는
고주몽이 아니라 주몽이였다고 합니다.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성을 "고"로 부르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걸걸중상은 말갈족의 우두머리 걸사비우와 손잡고
1만의 군사로 나라를 세우려 하였지만
당군에게 대패하고 맙니다.
이 싸움에서 걸사비우는 죽고 걸걸중상은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육순(60)이 넘은 걸걸중상은 병에 걸려 죽음을
직전에 놓았습니다.
걸걸중상은 아들  조영을 불러 자기가 죽거든 모든일을
조영이 맡으라 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습니다.
698년, 고구려 부흥군은 뒤쫓아온 당나라 군사를 천문령에서 무찔렀습니다.
조영은 동모산으로 옮겨 가 나라를 세운다음 왕이 되니,
이분이 바로 진나라의 제 1대왕 고왕입니다.
조영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차차 고구려의 옛땅을 되 찾았습니다.
국력은 강대해져서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713년 12월, 조영(고왕)은 나라 이름을 "발해"로 고치고, 왕이 된 지 20년 만인 71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큰아들 무예가 그 뒤를 이어받아 임금이 되니, 이분이 바로 발해의 제2대왕인
무왕입니다.
 
조영은 진나라를 세울때 자기 성을 "대"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 지금의 대조영이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것 입니다.
 
737년, 무왕의 아들 흠무는...
발해의 제3대 임금인 문왕이 되었습니다.
문왕은 도읍을 상경 용천부로 옮기고 발해를 강대국으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으로 유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4대부터 애왕초기까지 한점도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 발해의 멸망을 볼까요?
한때 중국 대륙 까지 그 세력을 뻗친 발해는 애왕 때인 926년, 거란족에게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고왕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은 걸걸중상이 아니라 대중상, 대걸중상
이었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아버지의 성을 따서 성을 짓는 것이 없었습니다.
대표로 김유신을 뽑아보겠습니다.
김유신의 둘째아들은 누구일까요?
예. 원술입니다.
여러분들은 원술하면 삼국지의 원소의 동생 원술이라고 생각 하시겠지만 원 술과 원술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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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조영의 아버지를 걸걸중상이 아닌 대걸중상이라 한 이유.
걸걸중상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역사책이 아닌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역사책이 아닌 만큼 인명에 대해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대조영의 아버지 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들과 아버지에 성이 같아야 된다는 것도 작용하여 걸걸중상을 대걸중상으로 바꾸어 부른 듯 싶습니다.
 
2. 발해의 지배 계층, 피지배 계층의 구별.
발해의 경우 여러가지 기록을 통해 족장은 고구려인, 그 밑에 사람들은 말갈인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다만 소수의 말갈인들은 정계에 진출 여러방면으로 활동했다는 증거 또한 있습니다.(EX : 이알기몽, 이진몽)
(출처 : '고구려를 계승한 해동성국 발해를 건국한 고왕 대조영의 아버지에 대해서' - 네이버 지식iN)
 
 
 
 

중앙아시아 역사개관

서론

중앙아시아의 역사의 흐름

가. 흉노제국
라. 연연
다. 돌궐제국
라. 과도기의 제국들
마. 우이구르제국(오르콘제국)
바. 거란제국(遼나라)과 여진제국(金나라)
사. 셀축제국
아. 튀르크족의 이슬람화
자. 몽골제국
차. 몽골 세력의 종말과 그 이후

서 론
지금까지 중앙아시아는 국제정치 혹은 지역학 연구에서 그리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소외된 혹은 잊혀진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해서 여러가지 부정확한 개념들이 우리 가운데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자세한 중앙아시아 연구를 시도함에 있어서 어려움 중의 하나는 8세기 초 이전까지 이 지역의 거주민들에 의한 기록문서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후 돌궐제국에서 문자가 발명되어 쓰여진 이후로 유목 민족들은 비로소 역사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언어로 기록된 오르콘 비문의 사료들은 극히 제한적이지만 8세기 이후의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과 중국 관계 등 당시 지역 상황에 대해 비교적 광범위한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8세기 이전의 중앙아시아 상황에 대해서는 이 지역 주민이었던 유목 민족들이 자체 기록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유목 민족 제국과의 분쟁 혹은 교류가 비교적 빈번했던 인접 국가들, 특히 중국이나 비잔틴제국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심각한 문제점을 제기시키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정착 국가들에 의해 기록된 사료가 이들 유목민족 국가들에 대한 극심한 편견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목민족에 의해 항상 위협을 당해왔던 정착국가들이 그러한 편파적인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곳에 대한 정보 내지는 연구가 건실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의 중앙아시아는 오늘날 이란 북방과 외즈벡키스탄,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즈스탄, 카작키스탄, 타직키스탄, 튀르크메니스탄, 몽골, 중국 서부 중심도시 신강성등을 포함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스텝)지대를 중심으로 동부 유럽으로부터 만주에 이르는 과거 유목민족들이 활동하며 주거하던 광활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의 영토는 대단히 넓으며 유사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데, 한냉 건조하며 심한 일교차를 나타내는 기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단위의 주거지 발달이나 많은 인구 증가가 어려웠다.
이들의 인구밀도는 낮았고, 주로 수렵과 목축을 하며 말을 사용하고 궁술과 기마술에 능했으며, 기마술을 이용한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과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이점을 가지고 유목민족들은 정착국가들과의 전쟁을 수행했었으므로 스텝 유목민족 세력이 강성할 때, 정착국가들은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한편, 유목 민족들의 군사력은 군대의 규모에 의해 그 싸움 능력이 좌우되지 않았다. 비록 이들은 수적으로 적을지라도 뛰어난 기마전술과 이에 따른 민첩한 기동력으로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곤 했다. 중국은 진(秦)나라 이전부터 북방 알타이계 유목민족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아왔지만 스텝 세력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번번히 실패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인종은 대체로 몽골로이드 인종이며, 언어적으로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알타이어족은 튀르크족(突厥族)을 중심으로 몽골족, 만주족, 퉁구스족, 한(韓)족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거주민들의 대부분은 튀르크족을 비롯하여 알타이어를사용하는 종족들이며, 간혹 우랄어, 인도-유럽어 등을 사용하는 부족들도 살고 있었다.
스텝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각기 자기들의 인종적인 특성을 유지하며, 군집(群集)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각각은 독립적인 정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중 한 부족이 여러 부족의 공동체적인 이익이나 혹은 정치적 이유로 다른 부족 국가들을 정복 통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유목민족 제국을 이루곤 했다. 그리고 보통 각 제국의 명칭은 우세한 한 지배층의 부족명을 따라 불렀는데, 이러한 패턴은 여러 시대를 거쳐 공통된 역사 현상으로 반복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 제국사는 거의 모두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며 반복되어 왔다. 즉 어느 한 부족에서 지도력과 군사전략적인 지휘력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와 다른 부족장들의 인준을 받고 부족 연합체 제국 전체를 지휘하게 된다.
이러한 부족 연합은 군사적인 힘이 강한 한 부족이 다른 부족들을 반강제적으로 통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다른 제 3의 세력에 대항하여 거대한 세력을 이루기 위해서 카리스마적인 한 리더를 중심으로 해 자율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부족 연합은 대개는 경제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즉, 연합된 부족 연합은 다른 제 3의 국가를- 대개는 정착민족 국가를- 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침략하며, 이러한 목적의 전쟁에서 획득한 탈취물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대개의 유목민족 제국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이루기보다는 카리스마적인 리더를 중심으로 부족장들의 협의체 형식으로 통치되었다. 중국은 유목민족 제국의 이러한 약점, 즉 경제적 이해관계를 통한 연합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물질로 지도자들을 회유하고 이간질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러한 북방정책은 대체로 좋은 결실을 맺곤 하였다.
한편, 유목민족 제국에서 부족장들의 추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사망할 경우, 제국은 급속도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유목민족 제국들이 대개 2세대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유목민족의 부족장들은 계승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전체를 통괄할 영향력있는 지도자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제국내의 부족간에 갈등이 발생하여 내분이 일어나거나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마비될 때 제국은 분열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정치적 공백기는 다른 제국이 발흥할 때까지, 즉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가 출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시 영향력 있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는 주변의 다른 부족장들의 인준을 받아 새로운 제국을 탄생시키곤 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역사의 흐름

가. 흉노제국(匈奴帝國)

흉노제국의 창립자는 투멘(頭曼; Tumen)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여러 유목 부족 집단들을 통합한 후에 선우(單宇 : Shan-yu)라는 공식적인 관직명을 가짐으로써 흉노제국을 출범시켰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항해 쿠테타를 일으킴으로써 정권을 탈취한 투멘의 아들 묵돌(冒頓: Motun)은 당시의 유목부족 국가들 중에 최강 세력인 동호국(東湖國)과 월지국(月氏國)을 제압하고 명실공히 중국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그 후에 묵돌은 중국을 위협하여 중국과 불평등 화친조약을 맺고 수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스텝 국가의 형성기는 중국 역사상 제 1차 전성기였던 한조(漢朝 206BC - 220AD)와 한조가 멸망한 후의 혼란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으며, 이 때에 스텝 지대를 다스린 세력은 흉노제국이었다. 흉노제국은 스텝 지대에서 일어난 최초의 국가조직은 아니었으나, 흉노제국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학자들은 근래에 흉노를 실질적인 최초의 스텝 제국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경에 출현하여 오늘날의 중국 북방에 거주하면서 부족 국가를 이루어 한나라 이전에도 연(燕)나라와 진(秦)나라를 크게 위협하곤 했었다. 이로 인해서 이 시기에 만리장성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흉노는 튀르크, 몽골, 만주-퉁구스, 한족(韓族) 등 소위 알타이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 연합체로서 지도층은 알타이어의 하나인 튀르크어의 한 방언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이미 중국에 한조(漢朝)가 건설되기 이전에 스텝을 석권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제국의 통치 영역은 오르콘, 셀렝가 강 유역과 외튀켄(
Ötüken) 평원과 오르도스 지방이었다. 이 당시 스텝의 서쪽, 즉 아무다르야 강과 시르다르야 강 유역과 카스피해 지역에는 스키타이민족이 활동하고 있었다. 흉노족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들의 적대국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편견이 내재되어 있다. 흉노는 연, 진, 한나라가 계속되는 동안 이들 중국 왕조들에게 있어 무척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중국은 이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마침내 중국은 가능하면 이들을 건드리지 않고, 유화정책을 쓰면서 분열과 분리정책을 함께 써나가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정책은 이 후로 중국의 전통적인 북방정책의 기본이 되어왔다.
기원전 1세기에 흉노족 지도층 내부에서 형과 아우의 세력 다툼이 벌어졌는데, 한조(漢朝)가 이에 개입하여 이들을 이간질시키면서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흉노 제국이 약화된 상태에서 후한(後漢)의 광무제는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를 회복할 목적으로 흉노를 대대적으로 정벌했는데, 이로 인해 흉노는 급속히 쇠퇴하였고, 155년 다른 중앙아시아의 민족이며 몽골계로 추정되는 선비(鮮卑)족과 연합한 중국 후한에 의해 멸망하였다. 흉노제국이 멸망한 후 스텝 지역에는 혼란과 정치적인 불안정 시기가 시작되어 5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중국 역사 기록에 의해 분열시대 - AD 2세기부터 6세기말 - 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남흉노의 후세들로 추측되는 부족들이 수 개의 왕조를 세웠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왕조는 거의 없다.
흉노제국이 붕괴된 후 약 2세기가 지나서 유럽에 돌풍을 몰고온 훈족(Huns)은 바로 이 흉노제국의 후예들로서 중국의 중앙아시아 정벌 후에 서북쪽으로 이동한 집단일 개연성이 많다. 학자들이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군사 전술, 문화의 유사성, 그리고 흉노와 훈 두 이름의 유사성 등에 기인한다. 흉노(匈奴)라는 이름은 우리가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원시 알타이어(Proto Altaic) 흉(hyung)과 중국어 노(奴)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훈(Hun) 혹은 흉(Hyung)족을 경멸시하여 부르는 것으로 중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어(造語)이다. 즉, 흉노인들은 자신들을 흉(hyung) 혹은 훈(hun)이라 불렀으나, 중국인들이 경멸조로 이 말에 '노예'를 의미하는 노(奴)를 첨가시킨 것이다1).
한편, 흉노의 쇠망으로 인해 생긴 정치적 공백은 어떠한 스텝 세력에 의해서도 메워지지 못했는데, 당시 구체적인 흉노제국의 영향력과 정도는 사료의 불충분으로 인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흉노사람들은 유목 국가 조직을 발전시켰으며 수 세기후에 등장한 튀르크족(돌궐족)이 세운 돌궐제국은 흉노제국의 군사와 국가 조직 형태를 답습하여 세워졌다.

나. 연연

북흉노 제국(155 A.D)을 멸망시키는데 있어 중국과 함께 일조를 담당했던 몽골계 선비족(鮮卑族)은 몽골리아 지역에서 흉노의 대체 세력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며, 흉노 이후에 몽골리아는 약 2세기 반 동안 권력의 진공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A.D.400년경이 되어서야 강력한 새로운 유목 민족 제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연(柔然)이라고도 불리우는 연연(Juan-juan)이다. 그들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그것은 자료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중국 사료들에서 나타난 연연에 관련된 내용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연연은 타브카치(Tabgach) 즉, 북위(386-534)2)의 창립자인 탁발규(拓跋珪 386-409)의 치세 기간 동안 역사 무대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사륜(社崙)이라는 지휘관이 나타나 한북(漢北 Karashar) 지방에서 소왕국을 건설하고 있던 고차(高車)를 멸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에까지 세력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중국에 이웃한 이 새 강력한 제국의 기원에 대한 고찰은 활발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그들에 관한 진부한 계통학은 서로 일치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연연은 흉노족과 연관이 있다고 하며, 반면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동쪽 미개인들인 동호(東湖)의 후손들이라고도 한다.
위(魏)왕조의 연대기에 의하면, 연연은 277년에 위왕조 자신들의상에 의해 포로로 잡힌 노예들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정치적 목적의 허풍과 과장이 다분히 첨가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연연이라는 이름은 다소 경멸적인 별명인 것같다. 최소한 철자법만 보더라도 그 글자들의 특성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연의 생활 양식은 다른 유목민족들의 양식과 흡사했다. "그들은 물과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텐트에서 거주한다"는 것 등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연연이 변발을 했었다는 것도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연연과 당시 북중국의 통치 국가 북위(北魏)와의 관계는, 중국의 변방에 자리잡은 유목 민족들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공격과 이에 대한 보복 공격,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과 침략 관계로 일관해 왔다. 여러 차례 북위는 공격의 주도권을 쥐고 연연의 영토 깊숙히 침입했었다. 북위의 천자 세조(世祖) 태무(太武 423-452)의 통치 기간 때인 438년과 443년에, 북위 즉, 타브가치 군대는 연연의 군대와 싸우려고 고비 사막을 가로 질러 갔으나 전투를 시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연연의 군대는 도주했으며, 많은 북위 군사들이 황량한 사막의 불모지에서 사멸했기 때문이다.
북위는 429년 이후에 오손(烏孫), 고차(高車) 등 소왕국들과 동맹 관계를 맺어 연연과 싸웠다. 448년 열반(悅般)과의 동맹은 연연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북위와 열반 동맹군의 공격으로 연연의 통치자 달단(Ta-tan 414-429)이 사망하게 되나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연연을 패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북위 왕조는 수동적으로 연연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 성벽을 건설하게 되었다. 북위는 연연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534년, 연연에 앞서 패망하고 말았다.
한편, 연연에 복속되어 철공업에 종사하던 돌궐족들이 6세기 초에 연연으로부터 독립을 기도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초기에는 북위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돌궐의 세력이 점증되자, 돌궐의 부족장이었던 토문(土門)이라고도 불리는 부민(Bumin)은 연연에게 공주와 혼인하기를 요청했는데 '대장장이' 출신이라는 이유로 거절 당하고 말았다. 이것을 핑계 삼아 552년 부민은 북위의 계승자 서위(西魏 535-554)의 도움을 받아 연연에 공격을 감행해서 그들을 퇴패시켰다. 연연의 통치자 아아궈이는 자살하게 되고, 곧이어 연연은 내부분열로 패망하게 되었다. 555년 돌궐은 연연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3000명을 참수형에 처했다. 이로서 연연이라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3).

다. 돌궐제국(突厥帝國)

돌궐족은 스텝의 여러 민족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 기록을 남긴 민족이다4). 몽골의 오르콘(Orkhon)강 유역에서 발견된 튀르크어 비문(碑文)은 돌궐제국과 당시 상황에 대한 여러가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여 준다. 이 비문에는 돌궐제국을 쾩튀르크(K
öktü
rk) 제국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 비문을 통해 우리는 돌궐(튀르크)족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스텝의 유목 민족으로서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비문을 통해서 당시의 중앙아시아 역사에 대한 중국의 사료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돌궐이 스텝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에 독립된 2개의 돌궐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을 해석하여 볼 때, 돌궐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돌궐족 자신들과 스텝의 서쪽 국가들에 의해 쓰여진 튀르크(T
ürk)라는 말의 뜻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1072년 중세 튀르크 학자 카쉬가르 마흐무드가 그의 사전에 '강력하다'라고 기록하면서부터이다. 이 후로 많은 역사 학자들이 마흐무드(Mahmud)의 이 근거없는 민간어원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말에 A. Vambery는 이 말의 동사 türe-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튀르크 언어학자들은 Vambery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한편, 중국과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은 튀르크족을 돌궐(突厥)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중국인이 소위 북방 오랑캐인 튀르크족을 경멸하는 뜻으로 만들어낸 조어(造語)로서 튀르크(Türk)와는 별개의 말이다. 돌궐의 뜻은 "사나운 말 같은 큘(Kül)부족"이라는 뜻이다. 즉, 이 말은 돌궐족의 초기 부족명이 궐(厥), 즉 큘(kü
l)임을 암시하고 있다.
돌궐제국을 이룬 튀르크족은 흉노의 일파로 보여지며,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
Ö
tken) 산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족을 튀르크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그들이 알타이 산록에 거주하였고, 알타이산이 투구처럼 생겨 그와 같은 의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나 이것은 당시의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근거없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이 부족의 원래 직업은 철공이었으며, 처음에는 연연의 복속국이었으나, 후에는 같은 알타이계 족속인 연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은 스텝민족 사상 처음으로 취락을 건설함으로써 초원지대의 도시 건설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 돌궐제국의 성립(成立)
돌궐제국의 성립 역시 스텝제국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지도력있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돌궐제국은 부민(Bumin) 혹은 투멘(Tumen) 이라고 불리우는 고대 튀르크족 지도자에 의해 AD 545년경 건설되었는데, 그는 552년 서위(西魏)와 연합하여 연연을 멸망시킴으로 스텝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553년 부민이 사망한 후에 아들 무칸(Muqan)과 동생 이스테미(Istemi)가 동부 스텝과 서부 스텝을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다. 동돌궐의 지배자는 전체 돌궐제국을 대표하는데 그의 왕호는 카간(Kagan)이며, 서돌궐은 형식상 동돌궐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서돌궐의 통치자 관직명은 제 2의 통치자의 뜻으로 야부그(Yabgu)였다.
한편, 돌궐은 초기에 중국 사회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우며 침략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축척했다. 그러나 583년 통일된 수(髓)나라와의 충돌에서 패배하게 되고, 이미 내부분열로 인해 동서로 나뉘어져 있던 돌궐은 수나라에 의해 이용당하기 시작하였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실패함으로써 나라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 시기를 이용하여 돌궐이 잠깐 부흥하였으나, 곧이어 등장한 당(唐)나라에 의해 반 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683년에 이르러 쿠툴루그 일테리쉬(Kutlug Ilterish)에 의해 돌궐제국은 당나라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제 2의 돌궐제국, 즉 후돌궐을 세웠다. 돌궐비문에 나타난 빌게카간, 큘테킨 등은 바로 이 후돌궐의 집권자들이다. 일테리쉬는 독립 후 10년만에 동부 스텝을 장악하고 제국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스텝 지역의 반복되는 역사에서 보여지듯이 돌궐의 통치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아 각종 유목민족 부족들의 세력 쟁탈전의 전장으로 변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742년에 바스밀(Basmil)부족이 우이구르, 카를룩 부족과 세력을 합하여 어린 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Tengri)를 제거함으로써 돌궐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났다. 그 후 바스밀과 카를룩, 그리고 우이구르 사이의 세력 다툼에서 우이구르의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함으로 우이구르(Uygur)제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나) 돌궐제국의 구조(構造)
돌궐제국은 체계적인 정치기구를 갖추어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조직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왕에 해당하는 카간(Kagan)은 세습제였지만, 임명제도가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부족들간의 싸움이 잦았고, 카간은 절대군주이긴 하였지만 중요한 결정은 혼자서 내릴 수 없었다. 군사조직은 다른 스텝 제국과 유사했으며, 그들의 전술은 급습이었다. 그들의 군사력은 카간의 지도력에 의해 그 세기가 좌우되었다. 유목민족 사회는 모계사회와 부계사회가 교체하며 존재했는데, 이는 유목집단이 흥왕할 때는 부계가 세력을 잡았고 쇠퇴기에는 모계가 세력을 잡았던데 기인한다. 이 사회의 가장 작은 공동체단위는 장(帳)이었고, 장이 모여 성(姓)을 형성했으며 성이 모여 한 부족을 이루었다. 부족을 이루는 데는 그 부족이 소유하는 토지와 군사력이 필수였다. 한 공동체 혹은 국가가 형성되려면 이러한 여러 부족이 연합해야 했었다.

(다) 돌궐제국의 대외관계(對外關係)
돌궐의 대외 관계는 과거의 스텝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주로 충돌과 전쟁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쟁들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비단길에 대한 지배 문제와 많은 관련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앙 아시아를 지배하는 민족은 중국과 비쟌틴제국과의 교역로를 지배했었다. 이때까지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 무역이 페르시아계 소그드인(Sogdian)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소그드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 스텝을 장악한 제국에게 이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보호를 받아왔었다.
557년에 돌궐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공하여 그 동안 페르시아에 위협적이었던 아프카니스탄 지방의 에프탈리테(Hephtalites)를 붕괴시키고 그 영토을 동부 킨강산맥에서 부터 트란속시아나 지경까지 넓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장악한 돌궐제국은 페르시아와의 무역 협정을 추진했으나 이에 실패하자 곧 이어 567년에 소그드인 비단업자 마니아크(maniakh)를 단장으로 비잔틴제국에 외교사절단을 보냄으로 이 때 돌궐과 비잔틴이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오랫동안 페르시아가 이 교역을 장악해 왔었는데 돌궐제국이 등장하여 소그드 상인들을 지배하게 되자 페르시아와 돌궐제국은 불편한 적대관계가 계속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돌궐이 중국에서 산 비단을 페르시아에게 팔고 페르시아가 다시 비잔틴에게 파는 형식이 구상되었으나, 이러한 구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돌궐은 비잔틴과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직접 무역은 돌궐제국과 비잔틴제국간의 외교관계의 증진으로 발달했는데, 돌궐과 비쟌틴의 우호관계는 특히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쟌틴으로서는 동서에서 페르시아를 위협한다는 의미에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했던 것이다. 아바르인에 대한 기득권 문제로 비잔틴과 돌궐이 한때 긴장하기도 했으나 비교적 돌궐과 비잔틴의 관계는 무난히 계속되었다.
돌궐과 비잔틴의 호의적인 관계는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잔틴제국으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돌궐과 비쟌틴과의 관계는 군사적 동맹관계로 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흑해 북부와 루마니아 지방에 있던 아바르(Avar)를 중간에 두고 돌궐과 비잔틴이 장기적으로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은 기독교화하기 시작한 아바르를 자신들의 복속국으로 취급했으나, 돌궐은 전통적으로 아바르인들이 돌궐의 속민(屬民)임을 주장하며 나왔다. 학자들은 월지국, 연연, 에프탈리테, 아바르가 인종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하면, 이들 국가들의 구성원이 대부분 인도-유럽계통의 토하르족(Tocharian)이라 추정되고 있는데, 그러나 이들 국가의 지배층은 알타이계 부족일 가능성이 많다.
한편, 돌궐제국의 중국과의 무역은 중국에게 말을 주고 비단을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러한 무역에서 중국은 그렇게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돌궐이 그들의 물건을 가져다가 강제로 떠맡기듯이 하는 억지 무역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돌궐과의 충돌을 원치 않은 중국은 대부분 그 요구에 응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은 자신이 대국이라는 의식 속에서 돌궐이 가져온 물건을 조공으로 여겨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비단길을 장악한 돌궐과 생산국인 중국과의 이러한 불균등한 무역 관계와 무역에 대한 양국의 개념 차이는 결국 양국 사이에 무력 충돌을 야기시켰다. 즉, 물량이 많은 중국은 돌궐이 무역품으로 가져오는 것이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조공으로 생각해서 답례하는 형식으로 무역을 행했었는데, 돌궐은 순수한 무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개념의 차이는 돌궐이 더욱 더 불균등한 무역을 강요하자 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라) 이슬람교의 침투(浸透)와 탈라스 국제전(國際戰)
돌궐제국이 건설되던 당시에는 애니미즘적인 샤마니즘이 신앙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나,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 사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7세기 초에는 서돌궐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동돌궐도 비록 원로였던 톤유쿡(Tonyukuk)이 불교가 국민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 즉 스텝의 기질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불교를 반대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비교적 성행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경우 네스토리안 교도들에 의해 경교라고 불리우는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식간에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아랍인들은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를 이슬람화시킨 후5), 중앙아시아 스텝의 서쪽과 경계를 같이 하게 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을 증대하기 시작했다. 아랍 이슬람인들은 처음부터 전쟁을 통한 중앙아시아 지배나 혹은 포교를 목적으로 직접 포교자를 파송하지는 않았으며, 이슬람화된 페르시아계 무역 상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까지 타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전파는 한 지역을 무력으로 복속시키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방법이었다.
8세기 중엽에 가서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아랍 이슬람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어 기존세력인 돌궐, 티베트, 당나라 등과 함께 아랍 이슬람 움마야드왕조도 세력 경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움마야드왕조의 페르시아 지역 통치자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Qutaiba ibn-Muslim)은 서돌궐의 여러 부족을 점령하며 박트리아, 부하라, 사마르칸드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때 돌궐은 제국 내부의 분열로 아랍의 침입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스텝의 서쪽 트란속시아나 사람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아랍제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이 시도되고 있을 때, 당나라에서는 713년 현종이 즉위하여 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티베트제국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팽창주의정책을 쓰고 있었다. 말하자면 돌궐제국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주변의 세 제국이 팽창하려는 야욕을 품게된 것이다. 곧이어 734년 스텝제국 돌궐은 붕괴되고 그 뒤를 이어 튀르크계인 우이구르인이 스텝의 동쪽에 세력을 장악하여 우이구르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747년 당나라는 고구려 출신인 고선지장군의 지휘하에 파미르고원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여기에서 티베트를 크게 물리쳤다. 750년 중국의 타쉬켄트 원정때의 잔인한 약탈행위는 그 지역 서부 튀르크인들로 하여금 압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원조 요청을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랍 이슬람 압바스 군대는 중국과 사이가 좋지않은 티베트, 돌궐계 카를룩(Karluk)과 연합하게 되었고,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좋은 튀르크계 우이구르제국과 연합하여 751년 여름 7월에 이들 동맹군과 중국-우이구르 연합군이 중앙아시아 타쉬켄트(Tashkent) 부근 탈라스(Talas)강 유역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아랍-티베트-카를룩 동맹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심장부인 튀르키스탄(T
ü
rkistan)은 1세기 동안 티베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스텝 서부 트란속시아나는 압바스 왕조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탈라스강의 전투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때부터 트란속시아나에서의 중국의 영향이 그치게 된 것이다. 또 이슬람교가 튀르크족의 군소국가들과 부족들에게 전해져 중앙아시아에 튀르크계 이슬람세계가 형성되고 역사 속에서 팽창하여 오늘날 거대한 이슬람세력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로인해 그 후 튀르크 민족은 두 개의 상이한 지역으로 구분되어 각각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서튀르크족은 이슬람의 영농정착국가로 변화하였고 후에 셀추크(Selchuk)제국을 건설하여 중동과 페르시아의 이슬람 보호자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동튀르크와 중부튀르크는 스텝 전통을 유지하며 불교를 믿다가 후에 몽골이 등장하여 세계를 정복할 때 그 근거지가 되었다.

라. 과도기(過渡期)의 제국들

돌궐제국(突厥帝國)의 멸망은 갑작스럽게 도래하였다. 돌궐의 마지막 카간이 사망하고 수 년후에 튀르크 부족인 우이구르(Uugur)족이 같은 튀르크계인 카를룩과 키르기즈와 함께 연합하여 745년 돌궐의 지배층을 물리치고 새로운 제국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상징적이나마 존재해 있던 튀르크 부족들간의 통일 형태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 후 대규모의 부족연합체들은 자체의 독립제국을 수립하여 중동지방과 러시아의 스텝지대로 진출하였고, 우이구르만이 중앙아시아의 중심지역에 남게 되었다. 돌궐제국의 종말 후, 중앙아시아의 스텝은 장기간 여러 튀르크 부족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혼란기를 가지게 되었고, 그 과도기의 끝에 몽골제국이 등장하여 스텝지대는 몽골족의 지배하에 다시 통일되게 된다.
이러한 과도기(800-1200 AD)에 중앙아시아에 수립된 주요한 튀르크계 국가들은 우이구르와 셀축(Selchuk), 페르시아계 국가로는 콰레즘샤(Kwarezm-shah)를 들 수 있다. 이들 국가들 이외에도 카라카니드(Karakanids)라 불리우는 카라한조, 가즈나비드(Ghaznavids)라고 불리우는 가즈나조, 카를룩(Karluk) 등과 같은 튀르크계 제국들이 있었고, 이들 제국들은 이 시기 중앙아시아에 이슬람을 완전히 정착시킨 국가들이었다. 과거 돌궐제국까지는 모든 스텝 민족들이 유목민족이었으나, 스텝의 중부에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이룬 우이구르가 최초로 정착민족화되었으며, 이후에 스텝서부지역에서 세워진 이슬람제국 셀축과 콰레즘샤도 모두 정착민족으로 변모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중국 북방에 세워진 대표적인 비튀르크계 국가들로서 만주-퉁구스계 여진과 몽골계 거란 등이 있다. 여기서는 이 시기에 일어난 국가들 중에서 우이구르(오르콘제국), 거란(요), 여진(금), 셀축제국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마. 우이구르제국(오르콘제국)

우이구르(Uygur)족은 당나라 때에 회골이라 불리웠으며, 송, 원나라 때에는 오외아(畏吾兒)라 불리웠다. 돌궐제국 시대에 우이구르 부족은 독립된 독자적인 부족 집단을 이루고 셀렝가 강 유역에서 거주해 왔다. 원래 유목민족이었던 이들은 튀르크계 부족으로서, 중국과 우호적이며 돌궐제국과는 적대적이었던 퇼뢰스(T
ölö
s) 부족 연맹에 속해 있었다.
돌궐의 마지막 카간이 사망하고 수 년후에 튀르크의 일종인 우이구르(Uygur)족이 745년 돌궐의 지배층을 물리치고 경쟁 부족 세력을 제압하여 새로운 제국을 수립하였다. 우이구르제국의 건설자는 쿠틀루그 빌게 카간(Kutlug Bilge Kagan: 骨力裵羅)으로 알려져있고, 오르콘(Orkhon)강 유역의 중앙스텝을 지배하였다. 쿠틀루그 빌게가 건설한 제국은 흔히 오르콘제국이라 불리우며, 우이구르민족이 세운 수 개의 제국들의 효시가 되었다. 돌궐이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 감에 따라 당나라는 628년에 우이구르 집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여 친근관계를 강화하였다. 우이구르는 당시 부족장을 에르킨(Erkin)이라 칭했다.
우이구르족은 도쿠즈오우즈라 불리는 9개의 부족 집단을 형성하여 제국을 설립하였기 때문에 중국 등 주변 국가들에게 10개 부족을 의미하는 말로 온오구르(Onogur)라 불리기도 하였다. 친중국계 우이구르 부족의 집권으로 당시 상징적이나마 존재해 있던 튀르크 부족들간의 통일 형태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 후 민족 의식과 전통이 강한 대부분의 돌궐계 부족 연합체들은 각각 집단을 구성하여 서부스텝과 러시아의 스텝지대로 진출하였고, 우이구르만이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 남게 되었다.
한편, 우이구르제국이 중국과 선린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중국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이구르제국과 중국의 관계는 대체로 평등관계에 있었으며, 도리어 중국 조정이 어려울 때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우이구르제국이 도와주는 입장에 있었다. 당나라 천보(天寶)시대 때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발하여 당조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을때, 757년, 우이구르군이 수도 장안까지 진군하여 당조를 구해주기도 하였다. 745년부터 840년 까지 백년가까이 존속한 우이구르제국은 실질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서 동서의 교역을 통제하는 제국이었다. 오르콘제국은 840년 키르기즈(Kyrgyz)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1세기동안 동부 및 중남부 스텝지대를 지배하였다.
우이구르제국의 수도는 카라발가순(Kara Balgasun)이었으며 사회구조는 유목사회와 영농 정착사회의 특징을 혼합한 형태였다. 이 제국은 759년부터 779년까지 최극성기를 가졌는데, 이 때의 우이구르 판도는 알타이산맥으로부터 바이칼호에까지 이르렀다.
우이구르는 중국의 對중앙아시아 민족교섭사에 있어서 독특한 관계를 수립하였다. 즉 유목민족의 배경을 가진 우이구르와 중국이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 하다. 두 제국이 이같이 우호관계를 가지게된 근본적인 이유는 우이구르는 경제적인 필요를 중국에 의존해야 했고, 중국으로서는 우이구르의 군사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중국은 당나라 말기였으며, 군사력이 미비한 관계로 북방 스텝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우이구르로 하여금 중앙스텝을 지배하도록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중국과 선린관계를 유지한 우이구르가 한 군사적 행동은 주로 티베트에 대한 것이었다. 우이구르는 감수협곡을 침입하여 중국과의 교역을 단절시키려는 티베트제국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해 822년 이후에는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즉, 원주민과 소수 인도유럽계 부족들을 압도하여 튀르크계 부족들이 실크로드 요충지에 침투 정착하게 되어, 튀르크계 언어와 문화가 그 지역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스텝의 서부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지역에는 AD 4세기때부터 페르시아계의 소그드인(Sogdian)들이 살면서 비단길의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통하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우이구르와 교역상의 이유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점차로 우이구르에 흡수되어 튀르크족화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그드인들은 우이구르인들에게 마니교(Manicheism)를 전해 주었다6). 762년 우이구르 카간 뵈귀(B
ögü
)는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마니교는 우이구르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목민족 최초로 집단적으로 정착민 종교를 갖게되면서 우이구르인들의 정착화는 가속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우이구르인들은 선대의 고지(故地)인 산악지대로부터 정착을 위해 스텝의 평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 우이구르인들의 관개농법을 이용한 영농기술이나 뛰어난 프레스코벽화의 기법은 소그드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우이구르인들은 정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스텝 민족의 특성을 많이 잃게 되었고 결국 군사력도 약해지게 되었다. 우이구르인들은 마니교 이외에도 불교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러한 정착민 종교들이 육식을 금하게 하고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등 우이구르인들의 세계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약화된 우이구르는 840년, 알타이산맥 북부 스텝에 할거하던 전통적 유목민족이었던 키르기즈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키르기즈는 우이구르 침략에 성공할 정도로 강력한 부족 연맹이었으나 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 대부분의 유목민족 집단이 그러했듯이, 전통적인 유목민족으로서 도시건설과 정착화를 통한 국가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키르기즈 승리의 특기할만한 역사적 의의는 중앙스텝지대를 정착화된 우이구르인들의 영향으로부터 차단했다는 데 있다. 패망한 우이구르족은 유목민족으로 되돌아가지 않았고, 키르기즈에 흡수되지도 않았다. 우이구르족의 오르콘 제국은 여러 개의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각각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몇몇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를룩과 대치했고, 몇몇은 중국으로 대피해 감주지방의 최서부 지역에 정착하여, 9세기 중엽에는 감주국, 사주국, 고주국 등 소왕국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중국은 당시 당의 쇠퇴기였고, 티베트 역시 붕괴되어 이들 우이구르 공국들의 존속에 위협을 주지는 않았다. 중국은 당에서 송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으나, 우이구르 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며 교역 관계도 지속되었다.
한편, 이 교역을 방해하는 부족이 있었으니, 바로 티베트계 탕구트였다. 중국과 우이구르 부족들간의 교역에 대한 탕구트의 방해는 초기에는 약탈 행위로 시작하여 10세기말엽에는 전면적인 침략으로 발전되었다. 이 당시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는 탕구트(Tangut)와 거란(Khitan: 契丹) 등이 지배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는데, 11세기초에 탕구트는 지배권을 확보하고 몽골에 의해 정복당하기까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우이구르제국의 문화는 정착문화와 유목문화의 혼합(synthesis)으로서 다이나믹하면서 적응성이 강했다. 이러한 우이구르 문화는 후에 그 지역에 형성되었던 튀르크-몽골 사회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우이구르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마니교는 우이구르족의 도시화와 정착화를 이루게 하였을 뿐만아니라, 문자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우이구르인들은 스텝 민족사상 최초로 문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 마니문자는 후에 몽골제국의 초기 문헌기록을 담당하였다. 우이구르 문명의 최극성기는 오르콘제국 멸망 이후 우이구르인들이 불교를 신봉했을 때였다. 이들은 이 때에 불교의 영향아래서 프레스코벽화를 발전시켰다. 우이구르 왕국들이 중국과 이란 문화권의 교차점에 위치했던 까닭에 우이구르의 미술과 건축은 두 문화의 성격이 혼합된 독특한 양상을 나타내었다.
우이구르에 관한 당시의 경제, 사회 생활의 기록을 보면 스텝 제국의 여성들이 영농 정착 국가의 여성들보다 월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렸음이 나타난다. 또한 우이구르의 제도는 각 직책과 임무가 선대 돌궐보다 잘 규정되고 발전된 형태를 가졌었다. 우이구르 문명은 확실히 스텝 지역에서 이례적이었으며, 뒤에 오는 튀르크-몽골 사회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정치적 야망과 스텝 유목민족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정착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문자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바. 거란제국(遼나라)과 여진제국(金나라)

알타이계 부족 거란족(契丹族)과 여진족(女眞族)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부족은 만주에서 시작했으며, 수목(樹木) 문화를 대표했고, 둘 다 중국을 정복했는데, 바로 이 중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은 스텝 유목민들 중에서 유일하게 몽골인들이 자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진족과 거란족의 문화가 서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언어가 서로 다른 언어군(言語群)에 속한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일이다. 거란어는 현존하는 문서들을 통해서 보는 바로는 몽골어이거나 아니면 몽골어에 아주 가까운 방언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여진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퉁구스계 언어에 속한다.
거란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세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에는 거란인들이 만주 지방에 정착한 시대이다. 제 2기는 그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요(遼) 나라를 세워 947년 부터 1125년 까지 중국을 통치한 시기이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에 잔존한 거란인들의 일부가 서부지방으로 이동하여 카라키타이(Karakitay) 제국을 세웠는데, 이 제국은 몽골 제국이 발흥하기 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제 2기인 거란족의 중국 통치 시대에 대해 자세히 다룰 필요가 없다고 본다.
거란이란 이름은 AD 5세기 초부터 등장한다. 북위 왕조는 오늘날 열하(熱河) 지방인 당시의 제홀(Jehol) 지방, 즉 시라무렌 강과 흥안(興安 Khinghan)嶺 산맥에 군집해 있던 거란족들과 정규적인 접촉을 갖고 있었다. 5세기 말엽에 거란족들은 중국의 북방 변경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되어 돌궐제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697년에 돌궐 카간 모초(Mo-ch'o)는 거란인들을 격퇴했다. 거란족의 이름은 오르콘 비문에서 돌궐제국에 귀속된 피정복민들의 긴 명단 가운데 나타난다.
거란 문화는 정신적인 면에서나 물질적인 면에서 스텝 유목민들의 문화와 크게 다르다. 부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설화는 매우 특이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내는데 그 내용이 다른 알타이계 부족들의 기원 설화와는 크게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 초기 통치자들 중에서 두개골 형상의 신비스러운 한 통치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텐트에서 펠트 밑에 숨어 있었다. 이 두개골은 의식이 행해지는 때에만 사람의 모습으로 텐트에서 나오는데, 의식이 끝나면 두개골은 다시 텐트로 돌아가서 원래 형태로 변하곤 했다. 은둔처에 숨어 지내는 또 하나의 신비스런 통치자의 머리는 멧돼지의 머리였다.
돼지, 소, 그리고 개들이 거란족의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는 쉽게 분간할 수 없는 다양한 계층과 이인종(異人種)의 혼합체적인 성격을 지닌 진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거란족의 사회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 사회 구조 안에서 다양한 인종 그룹들이 다양한 기능적 임무를 담당했다는 것은 가히 짐작되는 일이다. 야금술 같은 몇몇 특수한 공업은 이러한 분야에 특별히 종사해 왔던 부족들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지배 계급 거란족들의 주된 역할은 여러 다른 부족들의 잠재적인 경제력을 잘 조합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었다. 중국의 북부 지역을 정복하여 그 곳에 "중국 왕조"를 세운 거란족은 결코 미문명화된 미개인의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란 정권의 잠재적인 가능성은 야율(耶律) 부족 출신 아보기(阿保機 AD 872-926))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줄기 햇살에 의해 잉태된 아보기는 세 살 짜리 아이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네 걸음을 걸었다 한다. 그는 네 달 후에 똑바로 걷기 시작했으며 한 돐이 되었을 때는 말을 하며 장래의 일을 예언하였다한다. 이리하여, 그는 일찍부터 조상대대로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가진 천부적인 지도자로 공히 인정되었다.
관습에 의해 부족연합체인 거란의 추장은 각 부족장들 가운데 3년 임기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보기는 한번 추장으로 추대된 후에 추장직을 양도하지 않고 9년을 집권했다. 마침내, 권력 이양의 압력을 받자 그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철광석과 소금이 산출되며 농업이 가능한 오늘날 차하르(察哈爾 Chahar)省 지역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일종의 유배를 당해 후진에 처해 있었음에도, 아보기는 다른 거란계 부족들과 계속적인 접촉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경제력을 지렛대로하여 906년에 8개 부족을 통합하고 독보적인 추장이되는데 성공했다.
태조(太祖)가 된 아보기는 20년 동안 내부 세력을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문자를 채택하게 된 것은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국제 관계에서 키르기즈인들에 대한 원정은 또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924년에 몽골리아에서 우이구르인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던 키르기즈인들의 세력을 무찔렀던 것이다. 아보기는 키르기즈인들을 격퇴한 후에 중국 서부 튀르키스탄에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던 우이구르인들에게 그들의 본토인 몽골리아에 다시 나라를 재건할 것을 제의했었다. 비록 우이구르인들이 아보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거란인들과 우이구르인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게 계속 이루어졌으며, 거란 문화에 대한 우이구르인들의 영향은 지대했다. 이러한 문화적인 영향은 멜론 재배 기술로부터 우이구르 문자의 부분적 채택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하다.
아보기는 926년 고려(高麗) 원정에서 사망하였다. 태종(太宗, 927-947)으로 잘 알려진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는 거란제국의 세력을 더욱 더 확장시켰으며 중국북부 주요 행로들을 장악했다. 947년에 거란인들은 제국의 이름을 요(遼)로 바꾸었는데, 그 이름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그들의 본토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이름이었다.
거란은 제국의 기반을 닦아 가면서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1010년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고, 뒤이어 1014과 1018년에 또다시 도전하였다. 그러나, 매번 실패로 끝났는데, 특히 마지막 전쟁에서 고려의 강감찬 장군의 귀주(龜州)대첩으로 인해 거란은 크게 패하였다. 거란은 전통치 기간을 통해서 속민(屬民)이었던 여진족과 중국화된 발해인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029년에는 발해(渤海)가 주동이 되어 고려인과 함께 거란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이 시도는 아직 시기상조였으므로 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1114년에 거란 통치 영역 안에 있는 여진족이 북쪽 변경 밖의 여진족과 합세하여 거란제국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지막 거란 왕은 1125년, 퉁구스계 여진족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퇴위 당했다. 이러한 불행이 있기 바로 전에 왕실 요인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도망하여 중국 문서에 서요(西遼)라고 알려진 새로운 거란제국을 설립하였다. 야율대석을 추종하는 자들은 자신들을 검은 거란족(Black Khitans)이라는 의미로 카라키타이(Karakitai)라고 불렀다. 여기서 이름의 마지막 음절이 차이가 나는 것은 튀르크 방언의 특이성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족할만한 설명은 불가능하나, Khitan과 Kitai가 동일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카라키타이의 역사는 풀리지 않는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문서나 이슬람 문서에서 나타난 단서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야율대석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역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매우 신중하게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숨길 수 있는 도로들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거란인들 -더 정확히 카라키타이인들은 - 서쪽을 향해 행진하면서 두개의 루트를 따라갔다. 하나는 투르판(Turfan) 지역의 우이구르인들의 땅을 통과해 갔는데, 그 곳에서 그들은 우이구르인들로부터 친근한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더 서쪽으로 행진했는데 그는 그 곳에서 카쉬가르(Kashgar)의 통치자에 의해 접근이 금지된 길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 곳으로부터 천산산맥의 북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가게 되었는데, 이 길은 카라키타이인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이 후에 그들은 튀르크계 카라한조로부터 도읍 발라사군(Balasagun)을 탈취하여 그곳을 그들의 새로운 왕조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국가 지도자였던 야율대석은 "우주적인 왕"이라는 뜻으로 구르 칸(Gur Khan)이라는 왕명을 사용했으며, 그의 긴 통치기간(1124-1143) 동안에 카라키타이 제국의 세력을 서부 트란속시나(Transoxiana)까지 확장했다. 전성기에는 제국의 영토가 서부 중국 국경으로부터 아랄해에 이르렀으며 남부 시베리아의 일부도 카라키타이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역사적 물증들이 있다. 수적으로 적은 거란인들은 거대한 전체 제국을 그들이 직접 관할하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지방 장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족들을 통괄하도록 하였으며 그들의 통치권을 허락하는 대신 그들은 구르 칸에게 조공을 바쳤다.
카라키타이 제국은 1211년 징기스칸의 봉신(封臣)이며 나이만(Naiman)의 통치자인 큐츠류그(K
üchlü
g)에게 제국의 절반 가량을 정복당하고, 콰레즘의 무함메드 칸에게 제국의 서부지역을 빼앗김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거란인들의 제국은 단지 2세기 반 동안 밖에 지속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처음에는 중국 북부가, 후에는 전 중국이 거란족의 이름으로 서구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의 러시아어명은 지금도 Kitay이며, 영어명은 Cathay이다. 이 영어명은 르네상스 시대에 중국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13세기 전반부부터 줄곧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명칭이다.
거란족의 운명은 참으로 괄목할만하다. 몽골어를 사용하는 만주지방출신 소수그룹이 2세기동안 중국 북부를 정복하였으며 마침내 세력권에서 밀려날 때 조차도 내륙아시아에 튀르크어와 이란어 사용 부족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유목민 제국을 창립하여 통치할만한 정치적 생명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퉁구스계어를 사용하는 만주 동부 지방의 여진족의 역사는 거란족의 역사와 많은 점에서 일치점을 보여준다. 산림의 사냥꾼들인 여진족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제국을 세움으로써 중국 영토의 큰 부분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여진족의 금조(金朝 1122-1234)는 몽골족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러나, 거란족과는 달리 패배 후에 그들의 새로운 제국을 다시 형성시키지 못했다.
여진족의 문화와 그리고 여진족과 거란족 사이에 존재했던 복합적인 관계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두 민족의 문화에서 사냥은 경제적인 면과 종교 예식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진족들은 거란족에게 수사슴의 울음 소리를 흉내내는 전문 사냥꾼들과 독수리들을 주었는데, 이 독수리들은 후에 거란족에 의해서 종교적 성격을 띤 야생 거위 사냥에 사용되었다. 수사슴 사냥은 여가를 즐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종교적 행사이기도 했는데, 거란족들의 종교 의식에 여진족들이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일이 선호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여진족들은 거란인들의 손아귀에서 때만되면 반복되는 굴욕적인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여진족들의 마지막 봉기는 요나라 법정에서 여진족 부족장 아골타(阿骨打)에게 가해진 치욕적인 행태로 인해 발발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나라를 세운 뒤, 중국인들을 통치하는 어려운 임무에 직면한 여진족은 그들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들 고유의 문자를 개발했으며, 그들의 언어가 살아남게 하기 위한 조처들을 취하고 지방의 인구들이 혼합되는 것을 방지했다. 그러나 이인종(異人種)의 융합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몽골인들이 금조(金朝)를 멸망시켰는데, 이 때에 금조는,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겠으나, 이미 중국화되어 있었다.

사. 셀축제국

셀축제국은 튀르크계 오우즈 부족7)의 장군 셀축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나이가 들어 무슬림이 된 셀축은 960년경에 시르다르야강 서쪽의 상업도시인 젠트(Jent)에 정착하여 자신의 그룹을 형성해 나갔다. 셀축그룹은 점차 발전하여서 오우즈 부족 통치자 야브구(Yabgu)의 통치권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가면서 독립부족으로서 정치 군사적인 힘을 키워나갔다. 당시에 서부 스텝 트란속시아나에서는 페르시아계 이슬람왕조 사만조8)(Saman 887-999)와 튀르크계 이슬람왕조 카라한조(Karahan 840-1212)9)가 대립하고 있었다. 셀축은 사만조를 도와서 카라한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데, 이 때 승리의 댓가로 사만조는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지역은 셀축족에게 넘겨주게 됨으로써 셀축제국의 터전이 마련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후에 사만조, 카라한조, 가즈나조10)등 이슬람 왕조들간의 계속되는 전쟁에 밀려 셀축인들은 시르다르야 젠트 지역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들은 호라산, 콰레즘,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지역등으로 분산되어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에 셀축의 손자들이며 셀축제국의 실제적인 창립자 투우룰(Tugrul)과 차으르(Chagry)에 의해서 셀축집단은 재통합되게 되었다. 셀축인들은 아프카니스탄 펜잡 지방을 중심으로 성립된 가즈나朝가 내분으로 약화된 틈을 타서 메르브와 니샤푸르(Nisapur)를 장악해 니샤푸르를 수도로 정하고 투우룰을 술탄(Sultan)으로 추대하여 셀축제국을 탄생시켰다. 셀축제국은 1040년 가즈나조를 붕괴시키고, 더욱 확장하여 레이(Rey)와 이스파한(Isfahan) 지역을 석권함으로 명실공히 튀르크계 이슬람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셀축인들은 압바스 이슬람 왕조의 요청으로 1055년에 압바스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 진군하여 무너져가는 압바스왕조를 구해주게 됨으로써 이슬람왕조의 보호자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는 셀축제국 술탄 투우룰에게 '東西의 대왕(大王)'이라는 왕호를 하사하여 이슬람의 최대 세력임을 공포하였다.
투우룰 술탄에 이어 셀축제국의 왕이 된 알프아르슬란(Alp Arslan)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이락, 이란을 넘어 소아시아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진입은 비잔틴제국과의 충돌을 낳게 하였는데, 두 제국 사이의 첫 충돌이 1054년에 시작되어 이후에 수년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두 제국간의 결정적인 대접전은 1071년 터어키 동부 반(Van) 호수 근처 말라즈기르트(Malazgirt)에서 발발하였다. 셀축군은 술탄 알프아르슬란이 직접 지휘하였으며, 비잔틴군은 디오게네스 황제가 진두지휘하였다. 당시 2십만명의 비잔틴군에는 프랑크, 노르만 용병들이 대거 합세하였다. 셀축군은 5만명밖에 되지않았지만, 이 전쟁에서 셀축군은 유목민족 전술인 매복과 기습작전을 통해서 비잔틴군을 격퇴하고 비잔틴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그 후 협상 끝에 비잔틴 황제는 풀려났다.
셀축제국과 비잔틴제국 사이에 발발한 말라즈기르트(Malazgirt) 전쟁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이 전쟁으로 소아시아에 진출한 튀르크족들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소아시아의 주인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한편, 말라즈기르트 전쟁 후에 비잔틴은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등을 통해서 소아시아 탈환과 제국 수호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셀축제국에 이어 소아시아에서 설립된 튀르크계 오스만제국 술탄 메흐멛 2세에 의해서 1453년 유럽의 수도 콘스탄틴노풀이 점령되고 마침내 비잔틴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11).
셀축제국의 술탄 알프아르슬란은 얼마 후에 카라한조와의 전쟁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멜릭샤흐(Melikshah)가 술탄이 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영토를 관할해야 했던 셀축은 말기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고, 쇠약해진 셀축의 국경 수비는 아랍과 쿠르드인들을 용병으로 모집하여 수행해야만 하게 되었다. 멜릭샤흐 이후에 제국은 계속되는 십자군 전쟁과 내부 분열등으로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시리아, 키르만, 호라산 등 4분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157년 셀축제국의 본거지인 호라산(Horasan) 지역은 몽골계 카라키타이인들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싸우던 술탄 산자르(Sanjar)가 전쟁에서 사망함으로 호라산 셀축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나고 말았다. 한편, 소아시아에 진출한 튀르크계 집단은 아나톨리아 셀축제국(Anatolia Selchuk)의 지배하에 계속 발전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수차례 치루게 되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셀축제국은 1243년에 소아시아에 진출한 몽골제국의 군대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다. 소아시아는 그 후 에게지방 부르사(Bursa)를 근거로 발전한 오스만 튀르크제국(1299-1921)에 의해 튀르크인들의 통치 지역으로 다시 회복되었다.

아. 튀르크족의 이슬람화

튀르크 민족의 일종인 카를룩(Karluk)족은 발카쉬湖의 동쪽 지방에 근거를 두고 유목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오르콘江 유역에서 우이구르부족과 함께 돌궐제국을 무너뜨렸으나 우이구르제국이 창건된 후 아마도 곧 우이구르부족과의 알력으로 인한 정권다툼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AD 751년 아랍인, 티베트인과 함께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군과 싸웠던 부족이다. 튀르크족으로서 흉노제국의 정통 후예처럼 여겨지는 카를룩은 중국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강했고 민족적인 강인한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친중국계 튀르크 민족인 우이구르와의 갈등 관계는 계속되었다.
우이구르(오르콘)제국이 스텝의 중앙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동안에는 카를룩의 활동범위는 비교적 제한되었다. 그러나 오르콘 멸망 후 카를룩은 서부스텝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카를룩은 키르기즈와 마찬가지로 대제국을 건설하려고 기도하지 않았고,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키르기즈 지역, 고대 페르가나(Ferghana)지방에 진출함으로써 튀르크 민족은 당시 이미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있었던 페르시아 세계와 접하게 되었다. 이때 티베트는 군사적으로 강성하여 타림분지로 진출하고 있었다.
8세기 말이었던 그 당시 서부스텝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의 지배권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힘이 약해진 아랍 압바스왕조에서 페르시아(이란인)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란계 사마니드왕조는 상인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카를룩에 이슬람의 전파를 시작하였으나, 10세기 중반 열렬한 이슬람 승려들의 포교와 동.서 카를룩의 전쟁이 이슬람화된 西카를룩의 승리로 끝나면서 대규모의 튀르크족들이 이슬람화되었다.
이란의 사만朝는 10세기의 전 기간을 통해 스텝으로부터 유목 튀르크계 부족들이 서부스텝 지역, 페르시아 및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왕조는 튀르크계 부족들을 이슬람화시킴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사만조는 튀르크계 신흥 이슬람 제국인 카라한조와 가즈나조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이리하여 이란 민족세계와 인접한 지역에 두 개의 튀르크 제국이 형성됨으로써 페르시아 제국내에 튀르크족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란 세계에 대한 튀르크족의 진입은 11세기 중엽, 셀축제국이 건국되면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가즈나朝는 사실상 스텝지대의 정치적 문제에 실질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고, 카라한조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전형적인 스텝제국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유목 돌궐제국의 전통을 답습하고 있었다. 카라한조의 이슬람화는 중앙아시아 튀르크족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튀르크계 셀축제국은 11세기에 와서 페르시아를 완전 통치하게 되었다. 지배층과 군대는 튀르크계로 형성되었으면서도 피지배 민족은 이란인들이었으며, 이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아랍문자로써 이란어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역사가들에 의해 이란계 제국으로 오해를 받았었다. 셀축제국에 의해 정복된 후 99년동안 페르시아는 튀르크족과 몽골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셀축 제국의 역사는 중동사는 물론 유럽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 시기에 일어난 십자군 원정은 성지를 점령하고 있었던 바로 이 셀축제국을 분쇄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반면에 이미 이슬람화되고 정착민족화 된 셀축제국의 역사는 중앙아시아 역사나 스텝의 역사와는 긴밀한 연관을 갖지 않았다.
이란세계 내에서 셀축 세력이 붕괴되고 있을 때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지역인 제국의 동부 변경지역은 구리드朝와 가즈나朝가 지배하고 있었다. 구리드국은 가즈나조의 영향으로 인해 11세기에 이슬람을 수용하게 되었고, 초기에는 가즈나조의 종주권을 인정하였지만 13세기에 와서 가즈나조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구리드국도 이슬람계 콰레즘 왕국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한편, 1110년 이란과 스텝이 접하는 변경지대에는 새로운 제국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이는 거란계 난민인 카라키타이(Kara Kitay)였다. 이들의 지배자는 비이슬람교도이면서도 모든 종교를 포용하였는데, 이 때 네스토리우스교(경교)를 포함하여 모든 소규모 종교들이 부활하였다. 이 카라키타이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페르시아의 셀축제국과 부딪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셀축제국은 패배하였고 이슬람국가에서 비이슬람적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라키타이도 몽골에 의해 밀려오던 나이만족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말았으며, 그들이 점유하던 땅은 콰레즘(Kwarezm)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콰레즘은 옥쿠스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에 건설된 왕국이었다. 콰레즘은 13세기 쿠틉이 다스리던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지만 이 제국도 결국 몽골제국의 거센 돌풍에 의해 1220년 순식간에 멸망 당하고 말았다

 

 잊혀진 초원의 제국

 

IV. 突厥•위구르(隋•唐)
1) 第1突厥帝國
1.突厥의 起源
突厥의 기원은 대다수의 중앙아시아 민족의 기원과 같이 신비와 전설로 싸여 있다. 돌궐의 전설은 중국의 사료에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돌궐의 선조는 투르크계의 일족으로 匈奴의 북방에 나라를 이루고 살았는데 어느 날 열살 된 한 소년만 발이 잘린 채 살아남고 모두 살륙되었다. 소년은 암이리에 의해 양육되었고 암이리는 소년의 아이를 잉태하였다. 그러나 다시 소년을 잡으로 오는 적들을 피해 암이리는 투르판Turfan의 어느 동굴로 도망가 열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소년들은 인간의 여자와 결혼하여 흩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阿史那Ashihan라는 성을 가지고 가계를 세웠는데 몇 세대 이후 돌궐족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알타이山을 지배하였고 그들 조상의 발생지인 동굴을 순례하였다고 기록되어진다. 돌궐의 근원에 관한 사실적인 역사를 밝혀 줄 만한 기록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돌궐이 처음으로 중국사료에 언급된 시기는 3세기 중이었다.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돌궐은 柔然에 예속된 부족 중의 하나였는데 그 부족은 공통의 언어를 갖는 민족집단 전체에게 그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6세기초 돌궐은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에 종사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기부터 돌궐은 세력을 확장하면서 돌궐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북몽골에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돌궐의 출현은 동아시아 세계는 물론 서아시아와 유럽의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6세기 중기에 돌궐의 군주 일릭카간과 그 아들 무칸카간은 2대에 걸쳐 북아시아 세계를 제패하던 柔然을 멸하고 고대 흉노에 비할 정도의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당시의 중국은 남북조시대의 말기로 北周와 北齊는 유연의 붕괴에서 돌궐의 진출로 이어지는 초원의 역사에 위협을 느꼈고 隋煬帝의 고구려 원정은 고구려, 돌궐의 연합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행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돌궐제국은 건국 30년만에 동서로 분열되었고 7세기 중기 이후 隋양제•唐태종의 적극적인 침략으로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면서 결국은 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돌궐이 문명을 이루었다고 하는 증거로 북아시아 유목민족 가운데는 처음으로 돌궐문자를 만들어 썼으며 당나라 현종때 만든 돌궐비문이 오르콘강가에서 발견되었다. 돌궐문자는 서아시아의 소그드문자를 변형한 것으로 한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표음문자이다. 이는 중국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돌궐이 문화적으로 서아시아 문화가 훌륭하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돌궐이 군사적으로 세력이 약한 중국문화를 배격한 것은 북방민족의 강한 민족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돌궐의 국가조직은 건국초부터 동•서돌궐로 나누어 카간과 야구브가 통치하고 있었다. 동돌궐이 宗家的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동돌궐 카간의 형제와 자손에게도 카간의 칭호를 주었다. 카간의 세습은 先카간의 유언과 부족장들의 찬성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돌궐의 汗位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카간의 아래에는 7대관과 다시 그 밑에 28등관이 직할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관직은 세습되었다. 그리고 서돌궐의 야구브은 수도를 天山山中에 두고 야구브 아래 다시 소카간을 두어 10부를 통치하게 하였다. 카간位에 대한 계승은 결국 서돌궐의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고 돌궐은 강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란으로 인한 세력 약화로 그 꽃을 크게 피우지 못했다.
2. 돌궐의 전성기
돌궐 제국의 성립은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높았던 일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552년 돌궐을 건국하여 Ilig Qaghan伊利可汗을 칭한 것은 阿史那氏의 土門Bumin이었다. 돌궐이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부민의 업적 때문이었다. 유연은 카간인 阿那壞와 그의 숙부인 바라문사이의 충돌로 인해 502년 내전이 벌어져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연은 북위의 원조를 받은 아나궤의 승리로 돌아가고 투르크계 부족들의 반항을 평정하는 일은 칸국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 아나궤의 몫이었다. 508년에 그런 부족의 하나였던 高車가 유연을 격파했으나 유연은 516년경에 고차의 왕을 죽이고 복속시켰다. 고차는 끊임없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521년 고차는 유연의 내분을 이용하여 다시 한 번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546년 직전 그들은 또다른 독립을 계획할 때 돌궐의 방해를 받았다. 돌궐은 고차와 같은 종족이었지만 유연의 카간 아나궤에게 그 계획을 알렸다. 대가로 돌궐의 지도자였던 부민은 유연의 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했지만 아나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부민은 같은 투르크계로 장안을 수도로 하고 있었던 서위와 연합하였다. 그들은 몽골계이며 숙적인 유연에게 보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맹을 반가워하였고 서위는 그 대가로 551년에 부민에게 공주를 주었다. 서위와 돌궐은 유연을 포위하고 난 이후 부민은 그들을 완전히 격파하고 아나궤를 자살하게 하였다. 이때 유연의 잔여세력은 중국의 변경으로 피난하였는데, 그곳에서 동위를 계승한 北齊가 그들을 변경의 수비병력으로 삼았다. 그 결과 부민은 초원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초원의 영토는 유연으로부터 돌궐로 넘어가고 부민은 카간이라는 칭호를 취하였다. 부민은 승리 직후 사망하였고 그가 죽자 그가 건설한 제국은 나뉘어 그의 자식과 동생에게 분할하였다. 그의 아들인 무칸은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 카간의 칭호를 물려받았고 이로써 동돌궐 칸국이 성립되었다. 동돌궐은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범위는 만주의 변경에서 만리장성과 투르판분지의 하미 오아시스까지를 지배하였다. 부민의 동생 이스테미(室點密)은 2인자란 뜻을 지닌 '야브구yabghu'라는 칭호를 갖고 서쪽 지방을 물려받아 서돌궐 칸국을 세웠다. 서돌궐 제국은 하미에서 아랄 해와 페르시아까지 뻗쳐 있었다.
돌궐의 국가 토대가 확립된 것은 Muqan Qaghan木汗可汗이었다. 572년까지 계속된 무칸의 집권시기에 돌궐제국은 동쪽과 서쪽으로 더 확장되었다. 무칸은 그의 제국을 중국의 접경까지 확대시켰고,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켰는데, 그중 하나가 거란이었다. 동돌궐이 560년에 거란을 격파하여 복속시켰다는 사실은 돌궐제국의 판도가 이제 거의 요동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북주도 돌궐의 세력을 무시하지 못하고 정중하게 무한의 딸에게 청혼했다. 돌궐은 北齊를 공격하여 진양을 완전히 약탈하였다. 무한이 572년에 사망하고 他鉢Tsapar가 제위에 올랐을 때 서돌궐의 이스테미는 원로정치인으로 카간의 칭호를 스스로 획득할 수 있었겠지만 타파르의 등극을 승인하였다. 타파르의 재위기간동안 돌궐의 압력은 중국 북방변경지역에 계속되었고 돌궐의 번영은 영원하는 듯 보였다.
3. 돌궐의 분열
?동돌궐의 발전
돌궐은 제국을 세운 지 2대만에 동서로 갈라져 발전하면서 큰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서돌궐은 이리하 지방에서 천산남로와 파미르서쪽을 점령하고, 동돌궐은 몽골지방을 차지하여 동으로는 만주와 한반도에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돌궐의 제국들은 전성기를 오래 구가하지 못하였다. 호쇼차이담 비문에서 찬양되었던 위대한 카간의 권위는 이후 위대한 능력이 결여된 후손들에 의해 계승하였다. 사실 돌궐의 최대의 적은 다른 돌궐이었다. 실제 돌궐의 힘을 파괴한 것은 오르콘 강가에 있는 동돌궐과 탈라스 강과 이식쿨에 있는 서돌궐사이의 경쟁이었다. 만주로부터 아랄해까지를 절반씩 나누어 지배한 두 돌궐제국이 만약 이스테미가 인정하였듯이 동돌궐이 우위를 보장하여 카간이라는 최고 군주의 칭호를 갖고 서돌궐은 이인자의 뜻을 지닌 야브구라는 칭호에 만족하면서 통일을 유지했다면 그들은 천하무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의 동생이자 계승자인 돌궐의 카간 타파르는 서돌궐의 충성을 받았던 동돌궐의 마지막 존재였다. 타파르의 全제위기간 동안 돌궐은 남쪽에 위치한 중국의 위협을 받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분열의 조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타파르가 사망한 581년은 중국이 수에 의해 통일된 해이다. 카간位를 두고 타파르의 아들인 안로Anlo와 조카 다로빈Talopin이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로는 즉위 즉시 다로빈의 아우 이스파라Ishpara에게 양위하고 안로는 제2카간이라는 칭호에 만족한 채 정치에서 물러났고 새 카간인 이스파라는 다로빈에게도 아파카간Apa Qaghan이라는 칭호를 주어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300여년만에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는 이제 시선을 북으로 돌려 돌궐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583년에 수는 이스파라의 돌궐군을 물리쳤다. 이스파라는 전쟁 도중 아파카간의 모반을 두려워하여 그의 근거지를 습격하여 파괴하였다. 아파카간은 도주하여 서돌궐의 야구브인 타르두에게 갔다. 동•서돌궐의 관계는 그로부터 다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스파라가 아파카간을 공격했던 것을 계기로 동돌궐제국 시대의 전성기는 종료하게 되었다고 볼수 있다. 동서간의 초기 전쟁에서 동돌궐은 패하여 수에 도피처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는 돌궐의 내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수는 동돌궐에 원조를 하여 돌궐의 전체 세력을 약화시키고 결국 중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인정하였다. 수의 목표는 양쪽 돌궐을 존속시키되, 동돌궐을 수의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약화된 상태로 유지시켜 수와 강력한 서돌궐 사이의 완충적인 구실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파라 사후, 동돌궐의 세력은 점차로 약화되어 동돌궐의 존속은 수의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夷利制夷 방법이 성공함에 따라 수는 종종 돌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돌궐의 불만세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카간 沙鉢略때는 서부의 타르두와 동부 지역의 거란으로부터 협공을 당하였다. 수는 타두르와의 연맹을 유보하고 오히려 타르두에 대항하는 동돌궐을 지원하였다. 내분에 휩싸인 동부는 더 이상 위협스런 존재가 아니었고 타르두에게 유리하게 돌궐이 통합하게 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동돌궐의 카간 都藍은 중국의 지원을 받던 또 다른 정적 突利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도람은 599년에 돌리를 몰아내었지만 수는 오히려 돌리를 환대하고 그들은 오르도스 지역의 변병으로 삼았다. 후에 당은 돌리를 이용하여 동돌궐을 견제하였다.
수양제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의 동돌궐의 지배자는 시비Shih-pi였다. 시비는 고구려 침략의 실패로 중국내부에 일어난 혼란을 틈타서 동돌궐은 과거의 세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행동을 취해 동돌궐의 찬란했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재획득하기 위한 계획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사실 양제는 고구려 원정으로 돌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고 시비의 공격은 어느정도 성공하였으나 615년의 공격은 이세민에 의해 격퇴되었다. 수•당 교체 이후에는 당의 중국에 대한 全지배권을 확대시키는 동안 동돌궐은 침체된 세력을 확장하고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계속하였으나 갑자기 시비가 사망하고 당의 적절한 외교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동돌궐의 붕괴
당태종은 처음에 당의 건국을 도와준 돌궐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초원 유목민들은 산서의 심장부로 쇄도해 들어왔고, 624년 태종이 즉위하던 해에 동돌궐의 새로운 카간 힐리Hsiehli는 중국의 내전으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부대를 이끌고 長安을 위협했다. 태종은 소수의 군사로 대담하게 행동하여 결국 힐리는 전통적인 희생양식을 치르고 화의를 체결하였다. 당은 돌궐의 무례한 자세와 당을 함부로 여겨 침략해 온 것을 기회로 이용하여 우호관계를 접고 적극적인 공세로 동돌궐을 격퇴시켜 그 지배하에 있던 서북지방의 유목민을 복속시켰다. 그리하여 태종은 서북방의 유목민으로부터 天可汗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태종은 힐리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힐리에게 반란을 일으킨 두 투르크 부족-철륵과 薛延陀-을 지원하였다. 전자는 타르바가타이 지역에 있었고, 후자는 홉도 근처에 있었다. 627년에는 동부 몽골리아 본토에서 태종은 카간의 정적인 돌리를 돕자 그가 힐리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당은 이를 방관하면서 은근히 반군을 원조하였는데 이렇게 힐리를 둘러싼 포위망을 구축한후 630년 李靖과 李世勣의 지휘하에 중국군대를 출정시켰다. 당군은 초원으로 침입하여 힐리와 충돌하여 그의 부족민은 궤산시켰고 이른 봄에는 힐리를 생포하였고 반군을 카간의 位에 앉혔다. 이 이후로 동돌궐의 세력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제 서돌궐이 중국과 접경하게 되었다. 동돌궐은 50년 가까이 중국에 복속하게 되었다. 태종의 승리이후 돌궐은 암흑시대가 되었다. 근반세기 동안 돌궐은 당에 의한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고 돌궐은 마지막 힘을 모아 679년에 阿史德Ashihte家의 영도하에 당을 침입하였다. 이 침략은 시기상조였고 충분히 준비되지 못하여 실패하였지만 돌궐재건의 자극을 주었다.
③서돌궐의 발전
이스테미의 아들인 타르두Tardu가 즉위함으로써 서돌궐의 야브구가 되었다. 타르두는 야심있는 인물로써 돌궐제국의 2인적인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서부의 경제권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자신의 군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582년과 584년 사이에 타르두는 동돌궐의 카간과 결별하고 스스로 카간을 칭하였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한의 위업을 회복하고자 했던 강력한 隋는 타르두의 반란에서 타르두를 지원했고 돌궐제국 둘로 분열되었다. 그후 수년간 동서의 두 돌궐간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양측은 각각 隋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隋문제는 어느 쪽도 후원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정세를 이용하여 오히려 돌궐 내분을 더욱 조장하였다. 동•서돌궐은 결코 다시 통합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서로가 최고의 적이었다. 도람이 죽자 타르두는 동부의 혼란을 다시 한 번 이용하여 그들을 복속시키고 몽골리아와 투르키스탄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여 돌궐족의 재통합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중국의 개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는 위협수단을 구사했다. 601년에는 隋의 수도인 長安을 위협했고, 602년에는 중국의 보호를 받으며 오르도스에 둔영을 치고 있던 돌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603년 중국의 간교로 인하여 서부부족의 하나인 쩉뢰스Tölös족이 갑자기 타르두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타르두도 자신의 영역안에서 세력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에 타르두 사후 서돌궐은 바로 분할되었다. 타르두의 손자인 Shekuie射?는 서쪽의 타쉬켄트를 포함하는 지역을 확보했고 處羅라는 이름의 반란 수령은 일리의 통치자가 되었다.
610년대 초에 동서돌궐의 형세는 호전되는 듯하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 북방민족의 중원침입 이후 한민족은 북방민족에 대해 수세적 저자세로 일관하여 왔다. 이러한 對북방관계는 양제에 의하여 적극적 공세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양제가 제위에 올라 일련의 대침략 전쟁을 고구려에 대하여 감행하였으나 무참히 실패하였고 이 원정의 실패와 또 양제 자신의 무절제한 지출로 隋의 기둥은 무너지게 되었다. 서돌궐은 중국의 내분이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려고 기도하였다.
④서돌궐의 붕괴
서돌궐은 사궤에 의해서 다시 재건되고 있었다. 알타이의 설연타를 복종시킨 이후 테케스 강과 율두스 상류에 거처를 두고 있었던 사궤는 알타이로부터 카스피해와 힌쿠시에 이르는 지역을 611년부터 618년까지 지배하였다. 그의 동생이자 야구브인 統葉護는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이미 동북쪽에 있던 철륵을 정복한 그는 서남쪽의 재배권을 재확인하고 부분적으로 타림분지에 대한 패권도 장악하였다. 중국의 구법승 현장이 여행 도중인 630년 초 토크막Tokmak에서 통엽호를 만났을 때 그의 세력은 최고 정점에 있었다. 당시 동돌궐을 격파하기 위해서 온힘을 쏟고 있던 태종은 통엽호를 동맹자로 대우하였다. 불교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통엽호는 토크막에 있는 아정에서 중국의 구법승을 환대하였다. 현장이 방문한 지 몇 달 뒤 이 강력한 서돌궐 제국은 붕괴되었다. 630년에 돌궐의 부족중의 하나인 카르룩Qarluqs에 의하여 통엽호는 피살되었고 태종은 이를 이용하여 서돌궐의 정치적인 세력을 제거하여 漢代의 속지였던 투르환지역을 점령하였다.
서돌궐은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그 이름은 중국어 전사로만 남아 있는데, 이식쿨호의 서부와 서남부에 있는 弩失畢과 그 호수의 동북부에 있었던 尉陸이다. 갈라진 민족이 언제나 그렇듯 이 두집단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싸움으로 서로를 약화시켰다. 카간 돌육-나라이름과 같음-은 이 두집단을 통합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651년에는 중국의 둔전이 설치되어 있던 하미지역을 대담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장군 郭孝恪이 古城과 우룸치 사이에 있는 보그도 울라Bogdo Ula근처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더구나 태종이 돌육에 대항하여 노실필 유목민들을 지원하자 進退維谷에 빠진 돌육은 박트리아로 도망가 그곳에서 사라졌다. 唐고종은 서부에 있는 돌궐에 노력을 집중했다. 돌육의 카간 賀魯는 잠시였지만 노실필 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서부의 汗國을 부활시켰고 곧바로 중국의 종주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은 중국의 정책에 잘 따르던 婆閏을 카간으로 하면서 항가이 산맥의 주변에서 유목하던 위구르계 투르크인들과 연합했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657년에 唐의 蘇定方은 서북으로 출정하여 하로를 이식쿨호의 서쪽에 있는 추 강가에서 격파하였고 타쉬켄트로 도망갔지만 타쉬켄트인들은 하로를 잡아 唐으로 보냈다. 이로써 서돌궐도 중국의 지배권에 속하게 되었다.
2) 第2突厥帝國(682-743)
1. 엘테리쉬 카간Elterish Qaghan
고종의 치세 후반기에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665년부터 서돌궐의 두집단-노실필과 돌육-은 중국에서 임명한 카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회복하였다. 다음으로는 티베트인들이 타림분지로 밀려들어와 안서사진이라 불리는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다. 게다가 태종에 의해서 멸망된 동돌궐이 쿠틀룩 엘테리쉬Qutlug Elterish의 지휘하에 부흥한 것이다. 동돌궐은 항가이산맥지역과 오르콘 상류의 전통적인 핵심지역에서 재건되었다. 683년에 쿠틀룩은 토뉴쿡Tonyuquq의 협조를 받아 제국 부흥에 따른 계획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탁월한 정치가였던 토뉴쿡은 한때 산서성 북부근처에 있는 雲州에 변경지역에서 唐의 행정관리직을 세습했던 가문 출신으로 태종이래 멸망된 많은 돌궐의 지배층처럼 토뉴쿡도 중국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쿠틀룩이 투르크의 독립을 이룩했을 때 톤유쿡은 그와 합류하여 최고의 참모가 되었다. 682년이후 쿠틀룩과 토뉴쿡은 唐의 서북변지방을 해마다 약탈하였으나 685년에는 唐軍에게 패하여 결국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4년동안 전쟁을 감행한 끝에 돌궐은 唐의 종주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쿠틀룩의 침략은 돌궐제국 재건의 서막을 연결하게 되었다. 위대한 쿠틀룩 엘테리쉬는 호쇼 차이담 비문에서 엘테리쉬카간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재건된 돌궐제국을 흔히 제2돌궐제국시대라고 부른다. 엘테리쉬와 토뉴쿡이 승리를 획득한 후에도 초원의 분위기는 약 2세기전 최초의 카간 부민이 당면했던 것들보다 어려웠다. 그때는 초원을 제패한 세력은 오직 돌궐족이었고 반발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엘테리쉬는 돌궐을 계속 지배하려는 唐과 대적해야 했고, 쩉뢰스Tölös, 투르가쉬Turgash등과 같은 돌궐부족연맹들과도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91년 엘테리쉬가 사망할 즈음에는 재건된 돌궐제국은 동부초원지대에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2. 카파간 카간 Qapaghan Qaghan(691-716)
唐은 고종의 죽음으로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후는 산서와 하북의 변경지역을 거의 매년 약탈하는 쿠틀룩의 동돌궐에 대하여 성공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무후는 투르크족의 하나인 투르가쉬를 지원하여 그를 측면에서 공격하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투르가쉬의 수장인 烏質勒은 엘테리쉬에게 패하여 그의 종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테리쉬는 691년에 사망하였는데 쿠틀룩 엘테리쉬의 아우이며 계승자이었던 默?에 의해 돌궐제국은 더욱 번성하였다. 그는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온 군주로서 오르콘 비문들에서 카파간카간Qapaghan Qaghan으로 불린 인물이다. 711년경에 카파간은 서돌궐로 하여금 자신을 카간으로 승인하게 하는 돌궐제국의 가장 중요한 소득을 성취하였다. 그는 측천무후를 상대로 唐을 수호하는 척 하면서 唐의 영역에 대한 약탈을 계속했다. 694년에 그는 영하 근처의 靈州를 약탈하였고 698년에는 북경 서쪽지역을 약탈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唐과 일시적인 연맹을 결성해 요서와 열하에 있는 몽골계 유목민인 거란을 쳤다. 李수장은 카파간의 동맹자가 되었는데 얼마 후 그가 죽자 거란인들은 李의 아들을 몰아내고 돌궐과의 동맹을 깼다. 카파간은 추방당한 그 사람을 다시 앉히기 위하여 唐과 연합하여 唐의 비단, 쌀, 무기 등의 원조하에 거란은 붕괴시켰다. 무후는 카파간이 자신을 영속적으로 지지할 것으로 믿었으나 카파간은 영주에 대한 약탈을 재개하였다. 약탈이 있을 때마다 카파간은 수많은 포로와 엄청난 전리품을 갖고 몽골리아로 돌아왔다. 게다가 카파간은 동쪽으로는 케룰렌 상류의 바이르쿠Bayirqu사람들을 정복하고 북쪽으로는 예니세이 상류의 키르기즈인들을 격파하였다.
카파간은 699년에 서쪽으로 일시적이나마 서돌궐의 두 집단인 돌육과 노실필을 복속시켜 가공할 만한 통합을 이루었고 550년의 돌궐대제국이 거의 완전하게 재건되었다. 투르가쉬의 수장인 오질륵의 아들인 沙葛은 저항을 시도하여 카파간에 대항하여 서돌궐을 규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패하여 카파간에게 살해됨으로써 711년에 카파간은 돌궐족의 유일한 카간이 되었다. 카파간의 영광도 잠시, 카파간은 늙어갔고 돌궐족은 그의 잔인함과 독재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군소부족의 수령들이 당에 충성을 바쳤고 케룰렌 상류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결국 그들을 격파하고 귀환 도중 죽었다.
3. 퀼 테긴Kül-tegin과 벨게 카간Bilge Qaghan(716-734)
그러나 카파간이 갑작스럽게 죽고난 후, 카파칸의 죽음은 돌궐족 내부의 심각한 혼란으로 이어졌다. 생전시의 카파간을 적대시하던 내부 세력들이 많았으니 카간位의 계승권을 두고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였다. 그 위기는 엘테리쉬의 아들인 퀼테긴Kül-tegin에 의하여 극복될 수 있었다. 카파간의 조카인 퀼테긴은 정변을 일으켜 카파칸의 아들을 죽이고 그의 가족과 참모들도 죽였다. 오직 형의 장인이며 부왕때의 현명한 참모였던 70세의 원로정치인 토뉴쿡만이 살아남았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퀼테긴은 제위에 오르지 않고, 그의 형인 默棘連을 새로운 카간으로 즉위시켰다. 그는 현명한 제왕이라 불리는 빌게 카간Bilge Qaghan으로 716년부터 734년까지 초원을 통치했다. 한편 카파간의 죽음과 퀼테긴의 정변을 틈타 유목민들이 돌궐제국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퀼테긴과 빌게는 질서를 회복하고 그들을 다시 복속시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 이런 끊임없는 전투속에서 동돌궐은 서돌궐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다.
퀼테긴과 빌게의 집정 아래에서 돌궐제국 전역은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강화•구축시키려는 노력이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돌궐비문에 나타나 있다. 더욱 빌게 카간의 계획중에는 유목민족인 돌궐족의 정착화를 증가시키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구축을 명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빌게는 唐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토뉴쿡은 현종의 시대에 열리던 절대전성기의 唐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했고 중국을 공격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하였다. 토뉴쿡의 조언으로 빌게카간은 중국과 평화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현종이 거절하고 거란과 연합하여 돌궐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토뉴쿡의 예상대로 거란과 중국이 공격 시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여 결국은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카간에 대한 잠재적인 불만과 그의 對중국정책에 대한 반대로 최후의 정치적 위기가 왔다. 731년에 퀼테긴이 사망하고 수년 후에 빌게는 그의 신하에 의하여 독살되었다. 빌게의 죽음은 돌궐제국의 실질적인 종말이었다. 빌게의 오르콘 비문과 돌궐문자가 입증하는 그들의 문화, 그리고 비교적 부드러운 성격을 지녔던 빌게 덕택으로 734년 빌게가 신하에게 독살 당했을 때 동돌궐은 위대한 문명의 본류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으나 결국 카간의 죽음으로 지속적인 분란과 붕괴가 초래되었다.
4. 돌궐의 멸망
빌게 카간이 사망하자마자 형식적으로 지속되어온 돌궐족의 통합양상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빌게의 뒤를 이어 두 카간의 즉위하였으나 별로 중요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첫 번 카간은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고 뒤를 이어 동생 텡리카간Tengri Qaghan이 幼兒로서 즉위하였다. 따라서 텡리의 모친이 섭정을 하게 되니 다수의 돌궐족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텡리는 그의 관리였던 동부의 샤드Shad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돌궐의 全영토는 각종 부족들을 지배하려는 세력다툼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샤드는 이후 오즈미쉬 카간Ozmish Qaghan이라는 이름으로 카간임을 자청하였다. 오즈미쉬는 바로 세부족의 반란에 직면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며 동돌궐의 남은 카간 씨족들은 743년에 당으로 피난하였다. 이제 초원의 제국을 누가 차지하느냐만이 문제였다. 이 분쟁의 최후 승리자는 위구르Uighur족이었다. 위구르가 카를룩의 도움을 받아 성공하였고 위구르의 칸은 오르콘 상류에 있는 제국의 근거지에서 쿠틀룩 빌게Qutlugh Bilge라는 호칭으로 카간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등극은 당시에는 강력한 당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당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지배영역은 바이칼 호까지 뻗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즉위한 다음 해 죽었으나 그의 제국은 100여년간 그대로 존속하였다.
3) 위구르의 오르콘帝國
1. 위구르의 성립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위구르족은 匈奴족의 먼 후예이고 직접적인 조상은 쩉뢰스 부족연맹인 구성철륵부 가운데 回骨部에 속하던 일개 부족이었다. 쩉뢰스 부족연맹이 7세기 초에 와해됨으로써 위구르는 셀렝강가 상류지역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다. 629년은 위구르족의 조공사신이 내조한 사실을 최초로 기록된 해이다. 위구르는 당시 제1돌궐제국시기에 내부에서 계속되던 분열을 조심스럽게 이용하며 641년경에는 이미 동부초원지대의 상당한 부분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파간카간이 활동하던 8세기초에는 다시 돌궐의 지배하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위구르는 빌게카간이 사망한 후에 발생한 돌궐의 멸망적 조짐이 뚜렷한 혼란기에 위구르를 중심으로 베스밀Besmil과 카를룩Qarlug 두 돌궐부족이 연맹을 결성하여 돌궐제국의 잔존세력을 분쇄할 수 있었다. 돌궐의 멸망과 당의 내분을 틈타 위구르는 정식으로 744년에 나라를 세웠다. 돌궐에서 위구르로의 패권이동은 사실상 초원에 그다지 커다란 변화를 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초원의 패자가 단지 유연에서 돌궐로, 돌궐에서 위구르로 바뀐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위구르의 수장이며 위구르제국의 건설자는 骨力表羅K'olipeilo이었으며 그의 위호는 쿠틀룩 빌게 퀼 카간Qutluq Bilge Kül Qaghan으로 744년부터 747년까지 재위하였다. 그가 건설한 위구르 제국은 흔히 오르콘 제국이라 불려지며, 위구르족이 세운 수개의 국가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중 몇몇은 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오르콘 제국은 840년에 키르기즈Qirghiz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거의 1세기를 동부 및 중남부 초원을 지배하였다. 위구르는 늘 중국의 위험한 이웃으로 여겨졌던 돌궐과는 대조적으로 처음에는 상당히 충성스러운 추종자였고, 그 뒤에는 유용한 동맹자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때로 부담스럽긴 했지만 唐의 귀중한 보호자였다. 위구르가 초원을 지배하던 때는 위구르를 능가할 부족이 없었다. 게다가 唐에서는 과거 태종이나 고종 등과 같이 정복에 사활을 거는 황제도 없고 錦上添花격으로 安史의 난이 일어나 唐은 위구르에 대처할 만할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위구르의 군사적 원조를 바랬다. 위구르는 안사의 난때 군대를 파견하여 唐왕조를 도와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이후 그 세력을 중국으로 확대하였다. 위구르의 카간은 안사의 난을 진압해주는 댓가로 황실 공주를 얻게 되었다. 광할한 초원에서 도착한 위구르 군대는 그곳에서 唐軍과 연합하여 洛陽을 반란군으로부터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唐숙종은 위구르의 카간에게 감사의 표시로 칭호를 잔뜩 주고 그들이 떠나기 전에 매년 2만 단의 비단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후 위구르는 唐에 경제적 도움을 요구하고 조공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워 나갔으며 정치•사회적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唐의 내전은 가라앉지 않았고 다른 반란세력이 또다시 唐을 위협하였다. 登里牟羽라고 알려진 새로운 위구르 카간은 반란군의 사신에 의해 처음에는 반란군과 연합작전을 벌여 궁지에 빠진 唐의 어려움을 이용하려 생각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도중에 기민한 唐의 사신이 모우카간의 마음을 바꾸게 하여 그는 唐과의 동맹으로 선회하였고 762년에 위구르는 황제를 위해서 반란군으로부터 洛陽을 수복해 주었다. 그러나 위구르는 원조의 대가로 長安과 洛陽 두 도시를 완전히 약탈하였고 그 곳에 위구르인을 거주시킬 것을 唐에 강요하였다. 당시 唐의 조정은 위구르의 약탈을 무력으로 방지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고 위구르의 거주 문제는 모우카간에게 다량의 선물을 증여한 후 회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쇠망의 길을 걷고 있던 唐은 계속 위구르의 군사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위구르는 중국 내에서는 唐을 원조하였지만 형식적으로 중국의 관할 아래 있던 오아시스國의 독립운동에도 응원하기도 하였다. 모우카간은 763년이 되어서야 초원으로 되돌아갔다.
2. 위구르의 발전
위구르는 그 이전의 유목국가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위구르의 수도는 당시 오르두 발릭Ordu Baligh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현재의 카라발가순Qara-Balghasun이 있었으며 그 사회구조는 유목사회와 영농정착사회의 특징들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카라발가순은 오르콘 상류로 과거 흉노의 선우와 돌궐의 카간들의 거처가 있었고, 후일 칭기스칸 일족의 카라코룸이 생기게 된 곳 근처였다. 위구르는 수도와 군사적 요충지, 그리고 무역로의 요지에 도성을 세우고 이곳을 중심으로 유목도시문화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도시 문화는 농경민족과 농경민의 기술자 집단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만든 취락의 발전형태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유목민족의 사회구조가 그들의 발전의 한계점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며, 결국 위구르를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정복왕조가 출현하게 된 역사적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위구르는 도성을 건설하고 이곳에 중국인, 소그드Sogdian人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중국과 서아시아 문화가 흘러들어 왔다.
특히 모우카간의 재위기간에 최극성에 달하였다. 그는 중국의 宰相, 平章事, 尙書, 刺史 등의 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군신의 차별을 엄격히 하여 국가체제를 점차로 중국풍의 군주독재적인 관료체제로 전환하였다. 당시 위구르의 판도는 알타이산맥으로부터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위구르는 중국과 독특한 관계를 가져 중국의 對중앙아시아 민족교섭史에서 달리 유레가 없는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한 관계는 위구르가 당과의 교역이 절대로 필요했고, 또 당의 군사력이 미약하였던 이유로 더욱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위구르는 상업활동에 뛰어나 동서 교통로를 이용하여 중계무역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위구르와 소그드는 교역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 때문에 쉽사리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다. 최소한 4세기부터 소그드는 漢代 장건이 개척한 비단길을 통한 중계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소그드인들은 장안을 포함하여 아시아의 여러 중요도시에서 도매상권을 가지고 있었다. 위그르는 소그드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상당한 영향을 입었다.
위구르는 문화적으로 초원 역사상 처음으로 유목민족의 샤머니즘이 아닌 마니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위구르인들이 소그드인들의 중계로 이란의 죵교 마니교를 받아들였던 사실이다. 이 종교로 개종한 것은 모우카간이 唐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난 후에 옛 수도 洛陽에 머무르고 있던 762-763년간에 일어났던 것이 분명하며 그들의 정신적인 면에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모우카간은 마니교 선교사들과 접촉을 하게 되어 그의 제국으로 돌아갈 때 선교사들을 데리고 갔고 마니교로 개종하게 된 것이다. 마니교는 위구르의 국교가 되었고 모우카간은 마니교의 승려와 소그드인, 그리고 중국인을 그들의 정치 문화의 고문으로 받아들였다.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인 慕寐가 마니교의 제사장으로 위구르의 영토 안에 주재하게 되었다. 카간의 보호를 받는 마니교 사제들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그 당시 唐의 기록도 "위구르는 항상 마니교도와 나라일을 상의했다"라고 적고 있다. 고도로 조직된 종교를 신봉하게 됨으로써 위구르민족의 정착화는 가속화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위구르 인구는 선대의 故地인 산악지대로부터 평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위구르인들은 유목민족으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 또한 9세기에는 룬문자Runic script와 같은 불편한 돌궐문자를 대신하여 소그드문자를 변용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위구르는 페르시아에서 마니교를 들여오면서 소그드문자도 차용했는데 이 소그드 문자는 시리아문자에서 기원한 것으로 위구르는 그것을 변형시켜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다. 위구르제국내에서 발전된 문화와 생활양식은 초원에서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3. 위구르의 쇠퇴
위구르는 모우카간이외에 더이상 위대한 카간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이점은 돌궐과 대비되는 것인데 모우카간시대에 위구르는 가장 전성기가 되었고 모우카간 사망후 그들은 분열과 멸망의 길을 걸었다. 위구르는 모우카간의 사망과 더불어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오르콘제국의 정치적인 혼란의 첫 번째 위기는 모우카간의 사촌이며 재상이었던 바가 타르칸Bagha Tarqan이 모우를 암살하고 스스로 카간位에 등극함으로써 발생하였다. 바가 타르칸은 780년에 唐으로부터 정식적인 승인을 얻었다. 오르콘 제국의 혼란은 외부적인 이유들로 더욱 악화되었다.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의 신지인 외튀켄지방을 버리고 투르환Turfan지방의 정착민족들로 둘러싸인 지역의 도시로 이주하여 정주하면서 그지역에 다른 부족들이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유목민족의 정주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로 위구르의 군사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또한 위구르의 군력 준비의 쇠퇴를 가져 온 또 다른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안사의 난 이후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唐의 군사력이 허약하였던 것이다. 832년의 오르콘제국 내부의 혼란한 정세는 초원에 할거하며 약탈행위로써 富를 축적하는 전통적인 유목민 습성을 버리지 않은 다른 부족들이 침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840년이 되어서는 그들의 수도 카라발가순이 함락되고 카간이 살해되어 초원의 제일인자 오르콘제국은 여전히 유목적이고 야만적인 상태로 남아있었던 예니세이 강상류에 살던 키르기즈人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키르기즈는 돌궐민족의 일종으로 그 이전 역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은 바로 위구르에 의하여 외튀켄지방에 정착이 허용된 부족이었다. 그러나 키르기즈는 위구르 멸망에 성공하긴 했지만 위구르를 대체하는 새로운 강력한 부족연맹이나 제국을 건설하지 못했다. 키르키즈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위구르를 약탈한 후 카라발가순의 주변의 오르콘 강 상류에 있던 위구르를 대체하기 위해 이주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위구르에 의해 정주화가 이루어진 초원을 다시 유목과 야만으로 되돌려 놓았다. 키르기즈는 920년까지 그 지방의 지배자로 남아 있다가 몽골계 거란에게 패하여 다시 북쪽의 예니세이 초원으로 밀려나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계속하였다. 키르기즈의 위구르 멸망의 주된 역사적 의의는 초원을 위구르인들의 영향 즉, 정착민족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차단시켜 버린 것이다. 초원은 징기스칸이 나타나 몽골제국을 세우는 12세기 중엽까지 또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다른 위구르족은 초원의 제국을 상실하고 타림북부의 오아시스 지역에 정착했다. 오르콘 제국은 여러개의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각각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몇몇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룩과 대치하게 되었고, 몇몇은 중국으로 도피하여 甘肅지방의 최서부지역에 정착하였다. 그중에서 사릭 위구르Sarigh Uighur는 서부 甘肅에 860년경에 정착해 1028년 탕구트에게 정복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10세기에 돈황에서 불교를 신봉하며 번영을 누렸던 위구르는 재빨리 마니교를 포기하고 그 지역의 불교로 개종하였다. 위구르는 알타이와 오르콘의 지역의 투르크-몽골계의 국가에게 '문명의 고사'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12세기의 나이만과 13세기의 칭기스칸의 국가에게 위구르는 書記와 관직과 문자를 제공하였다. 9세기 중기에 이르러 위구르가 멸망한 후 북아시아세계에는 유목국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위구르제국이 초원의 마지막 유목제국이었던 것이다.

轉. 結論
홀연히 나타나 고대 서아시아의 제국을 무너뜨린 뒤 갑자기 북방으로 돌아간 스키타이(B.C 6-3C), 게르만족을 밀어내면서 로마제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훈족(4C), 멀리 북방 바이칼호 근처에서 일어나 한세기도 지나기 전에 베이징과 바그다드, 키예프를 함락시켜 대제국을 이루었던 몽골(13-14C)…. 말을 타고 대평원을 가로지르며 한 시대를 호령했던 중앙아시아의 유목 기마민족들. 그러나 17세기 몽골 멸망을 끝으로 역사의 기억 뒤편으로 밀려났던 비운의 민족들, 흑룡강을 중심으로 중국의 동북이들, 이렇게 초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책을 읽고서이다. 고시베리아족과 스키타이, 서융, 적적, 흑수말갈, 동이, 예맥, 숙신, 읍루, 에벤키, 오로촌, 흑룡강, 바크하룬, 요하, 케룰런, 아무르, 실카, 하라무렌 등등...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고전적인 냄새가 나는 민족과 지명들이 가슴속에 와 닿았다. 이미 한자식 음역으로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에 더욱더 생소한 이런 단어가 하나하나 더욱 새로웠다. 그래서 짧은 지식으로나마 조금이라도 구체적 사실인지 구명하고 싶어서 논문의 주제로 이 범위를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느 정도 고전미가 없어진 南宋 이후의 유목민들, 아니 정복왕조라 해야 더욱 어울릴 거란이나 여진, 몽골 등의 국가에는 눈길이 덜 가게 되었다.
초원의 역사를 쓰면서 참으로 글의 중립을 지키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어느 나라의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침략이 정복이 될 수 있고, 아니면 정복이 침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면 그것은 정복으로 표현하였고 반대로 백제나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 침략 행위라 표현하였다. 그것은 김부식이 慶州 金씨로서 비록 신라는 멸망하였으나 신라의 정통성을 확립시키려는 중립성을 잃은 사가로서 그릇된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이 현재에 와서 삼국사기가 비판 받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상 여러 유목국가들이 초원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였지만 몽고 이전에는 유라시아대륙의 유목지역과 정착지역을 모두 동시에 지배할 수 있었던 국가는 없었다. 이러한 과업은 몽고의 부족연맹에게 주어졌었으니 몽고인은 칭기스칸의 영도하에 서로는 러시아의 평야지대로부터 동으로는 중국의 해안까지 북으로는 북극에 접하는 시베리아의 끝으로부터 남으로는 태양이 작열하는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인류역사상 가장 크고 비교적 장기간 유지 될 수 있었던 제국을 건설하였었다. 유목민족의 제국, 특히 몽고제국은 마치 우연히 건설된 혹은 신의 저주에 의하여 창조된 국가처럼 빈번히 언급되고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칭기스칸의 몽고제국의 기원은 저멀리 14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뿌리가 바로 흉노이고 과정이 돌궐과 위구르이고 전신이 거란의 遼와 여진의 金인 것이다. 논문의 범위를 유목국가로 한정해서 잡으면서 상당히 고민이 되었다. 유목국가를 잡기에 탁발선비는 초원의 아들로 어울리지만 그이후의 북위는 오히려 잠입왕조나 정복왕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목국가와 중국과의 관계가 남북대립체제였다면 북위 또한 南朝의 宋•齊•梁•陳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유목국가의 범주에 넣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기나긴 초원을 여행한 끝을 내야겠다. 처음 욕심으로는 우리 나라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던가 아니면 우리민족의 기원을 중국사와 연결하여 그들 눈에 비친 한민족의 역사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학계에 발표된 자료가 빈약하고 스스로 규명하기에는 역량이 너무 미약하여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서쪽으로 더 넓혔더니 그 동안 교과서에서 빠져있던 유목국가들이 있었다. 이제 막연했던 그 부분을 채워 넣었으니 사가로써 한 발을 내?은 느낌이다. 논문을 완성해 나가면서 결코 동아시아에는 중국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흉노, 탁발, 돌궐, 위구르등이 중국을 유린하고 중국의 문물을 천하게 여기며 오히려 서아시아의 문화를 더욱 흡수하였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은 단지 한국인이 알고 있는 중국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중국사를 대하면서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게 될 것 같다.

結. 參考文獻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Rene Grousset 1999 사계절
『유목민족제국사』 Luc Kwanten 1984 民音社
『중국의 역사3』 陳舜臣 1995 한길사
『동양사개론』 申採湜 1996 三英社
『중국통사•上』 傳樂成 1981 宇鍾社
『중국중세사』 宮崎市定 1996 新書院
「고대유목국가의 構适」 金浩東 1989 講座中國史2

*** 年表 ***
B.C. 221 秦始皇의 천하통일
206 漢건국(劉邦)
198 漢•匈奴 화친(60년간)
174 무특死•노상階位
129 漢•匈奴 1차 대립(~119)
108 朝鮮멸망
99 漢•匈奴 2차 대립(~90)
60 東•西 匈奴 분열
31 東匈奴의 稱臣(호한야선우)
A.D. 8 新건국(王莽)
25 後漢건국(유수)
48 南•北 匈奴 분열
88 北匈奴 붕괴
220 後漢 멸망
308 永嘉의 난(흉노선우 유연의 稱帝)
316 西晉 멸망
317 東晋 건국(史馬睿)
338 代 건국
370 代 멸망
398 魏 건국(拓跋珪)
402 柔然의 고차토벌(제국으로 발전)
都武帝의 柔然 정벌
425 太武帝의 柔然 정벌(~470)
439 北魏의 화북통일
502 柔然 내란
534 東•西魏 분열
550 北齊 건국(高洋)
557 北周 건국(宇文覺)
552 突厥건국(Bumin)
555 突厥의 柔然멸망
東•西 突厥분열
557 北周의 화북통일
581 隋 건국(楊堅)
隋文帝의 천하통일
618 唐 건국(李淵)
630 唐의 東突厥지배(~679)
657 唐의 西突厥지배(~665)
682 엘테리쉬카간 시대(~691)
691 카파간카간 시대(~716)
699 突厥의 대제국 완성(西突厥 복속)
711 카파간 突厥 유일한 카간이 됨
716 빌게카간 시대(~734)
743 突厥 멸망
744 위구르 건국(쿠틀룩 빌게 퀼 카간)
755 安史의 난
780 위구르 분열
840 위구르 멸망

 

위충현 [魏忠賢, 이진충, ? ~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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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보는역사 | 2007/06/25 (월)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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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발해(698∼926) 건국에는 고구려 유민의 부흥 의지가 큰 역할을 했다. 고구려가 668년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당으로 강제 이주 당하지 않으면 안 됐다. 주로 지방호족 세력이 이동의 중심에 있었는데, 고구려 출신으로서 당의 장수로 활약한 고선지(高仙芝)나 이정기(李正己) 장군, 그리고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大祚榮) 가문이 이때 이주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랴오둥(遼東)지역에서 고구려 세력은 그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안시성 등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이 있었는가 하면, 당에 압송됐던 보장왕이 677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 조선왕에 봉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고구려 부흥을 꾀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구려 유민들의 힘은 결국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도록 만들었다. 696년 5월 때마침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 등은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이주지인 영주(營州·랴오닝성 차오양·朝陽)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해 발해를 건국했다.

● 대조영은 고구려의 쑹화강 출신 장수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려시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구려 쑹화(松花)강 유역 출신의 장수였다. ‘구당서(舊唐書·945년)’는 대조영이 고구려계임을 말하고, 이를 보완한 ‘신당서(新唐書·1060년)’는 그가 쑹화강 출신임을 전한다. 그러면 대조영은 고구려의 후예였는가, 아니면 말갈족이었는가.

이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구당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 하고, ‘신당서’는 그가 말갈의 대표적 부족 중 하나인 속말(粟末)말갈인으로서 ‘고구려에 부속됐던 자’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대조영을 구당서를 원용해 고구려계로 보려는 한국학계와, 신당서를 중심으로 속말말갈계로 보려는 중국학계의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우리 학계는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요,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피지배층인 말갈도 다 같은 고구려인이라는 점에서 대조영의 말갈설이 지지되기도 한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근거는 종족적인 면에서 대조영을 비롯해 말갈로 불리는 대부분의 주민이 패망한 고구려인이었다는 점이 가장 크다. 다음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는 구당서의 기록이다. 문화적인 면에서 발해인은 고구려인이 사용하던 온돌을 썼고, 고구려 지배층의 석실 및 석관·석곽묘도 이용했다. 문화적으로 가장 변하지 않는 주거방식과 무덤양식에서 고구려를 계승했던 것이다.

● 자주국이었던 발해

중국이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었다고 내세우는 근거는 발해가 당나라의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발해는 당 문화 일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해는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에 있는 정효공주 묘의 묘지명을 통해 볼 때, 왕을 황상(皇上)이라 하여 황제를 자칭했다. 그리고 연호(年號)와 왕이 죽고 난 이후에 사용하는 시호(諡號)도 ‘사사로이’했다고 신당서는 전한다. 일부 국내외 학자들은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비로소 발해라고 하였다’는 신당서 기록을 근거로, 발해가 마치 당으로부터 국호를 하사받은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이 발해를 비칭(卑稱) 종족어인 ‘말갈’로 사사로이 부르다가, 양국간 관계가 개선되는 시점에서 공식 국호인 ‘발해’를 사용한 사실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당은 양국관계가 우호적이지 않던 발해 건국 초기엔 일방적으로 발해를 ‘발해국’이 아닌 ‘발해군’으로 깎아내려 규정했는가 하면, 발해국을 말갈국이라 국호마저 고쳐 불렀다.

또한 당의 주변국 역사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일반적 논리인 책봉과 조공에 관한 주장도 마찬가지다. 고대 동아시아사에서 책봉은 왕조 승인의 의미를 가지며, 조공 역시 관영(官營) 무역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는 인정하더라도, ‘지방정권’으로 여길 만한 근거는 빈약하다.

● 발해사를 둘러싼 주변 각국의 연구동향

발해는 그 영토가 지금의 중국 지린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랴오닝(遼寧)성 등 이른바 중국의 동북3성 지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지역에 걸쳐 있던 왕조였다. 각국의 발해사에 대한 견해가 각기 자국 중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이 발해인들이 남긴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기에 이를 둘러싼 역사분쟁은 더욱 치열하다.

중국이 동북3성 지역의 개발과 함께 역사적 명분을 확실히 해 두려는 노력을 기록상으로 허술한 발해사에서 시작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교과서는 이미 1980년대부터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인 말갈국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는 발해를 자주국가로 보면서도 그 종족은 중세 말갈왕조라고 하는가 하면, 일본은 만주국 시기까지 ‘발해 말갈설’을 유지하다가 1933년 시라토리 구라키지(白鳥庫吉)의 논문부터 ‘지배층=고구려 유민, 피지배층=말갈 설’을 따르고 있다.

남북한은 종래 일본의 연구 성과를 인정해 교과서에도 지배층만이 고구려인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남쪽의 필자와 북한학계를 중심으로 말갈로 불리는 피지배층도 대부분 고구려인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상식적으로 고구려인이 살던 곳이 대부분 발해가 되었는데 이들을 고구려와 다른 말갈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주된 논지다.
한규철 경성대 사학과 교수


▼말갈은 동북방 거주민 통칭▼

말갈의 실상은 중국 중심의 역사관과 왕조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할 때에야 바로 볼 수 있다.

말갈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북제서(北齊書·563년)부터 등장한다. 이때부터 말갈은 자칭 아닌 타칭의 종족명이었다. 말갈과 그 조상이라고 하는 숙신(肅愼), 읍루(읍婁), 물길(勿吉) 등도 자칭이 아니라 중국 왕조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이름이었다. 즉 당의 동북방 이민족을 통칭하는 종족명이자 고구려의 지방민을 낮추어 부르는 이름이었다.

말갈도 지역에 따라 일곱 갈래가 있는데, 백산말갈이란 백두산지역 주민이란 뜻이고, 속말말갈이란 쑹화강 지역 주민이란 뜻이다. 이들이 곧 발해 건국의 주체 세력이었다. 헤이룽(黑龍)강 지역의 흑수말갈은 고구려 주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들이야말로 진짜 말갈족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로 불리는 주민들이 살던 곳은 과거 옥저, 예, 맥, 부여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고구려의 영역이 된 곳이다.

고구려를 다민족국가로 언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국 초기였으며 후대에는 이들이 모두 고구려인으로 동화됐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발해인도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말갈로 불리는 많은 이들은 고구려인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