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조는 소서노, 아들 온조가 죽였다"
오마이뉴스 | 입력 2010.12.10 15:23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KBS1 드라마 < 근초고왕 > 에는 소서노 사당이 자주 등장한다. 신년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낼 때도, 왕실에 불상사가 있을 때도, 태자를 새로 세울 때도 소서노 사당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왕이나 왕후가 그곳을 찾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일정 정도는 역사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 삼국사기 > 권23~27 '백제본기'와 권32 '제사' 편에 따르면, 백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제사는 천지신명에 대한 제사, 다음은 동명왕에 대한 제사, 그 다음으로는 소서노에 대한 제사였다.
참고로 동명왕의 사당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고주몽)의 사당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1922년 중국 낙양(뤄양)에서 발견된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백제인들이 추모한 동명왕은 고구려 시조가 아닌 부여 시조였다. 백제의 뿌리가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 시조를 추모한 것이다.
백제인들은 천지신명·동명왕·소서노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미 백제 초기에 천지신명을 위한 제단과 동명왕·소서노를 위한 사당을 각각 세웠다. 이 외에도 여러 종류의 사당이 더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록상으로는 이 세 개가 가장 중요했다는 점이다.
그럼, 소위 '백제시조'인 온조왕의 사당은 어떻게 된 것인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조왕의 사당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긍익이 쓴 < 연려실기술 > 별집 권4에 따르면, 온조왕의 사당이 창건된 때는 조선 세조 11년(1465)이고,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나서 새로 신축한 때는 인조 14년 3월(1636.4.6~5.4)이었다.
여기서 좀 이상한 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모든 만물의 근원인 '천지신명'과 백제의 근원인 '부여 시조'에 대한 제사를 최상위와 차상위에 두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자리가 왜 소서노였을까? 정상적인 경우라면, 천지신명-부여시조-백제시조의 순서가 돼야 하지 않을까? 소위 '백제시조' 온조왕 대신에 소서노가 그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채호는 왜 소서노를 백제시조라고 했나
이에 관한 의문을 아주 명쾌하게 해결한 역사학자가 있다. 신채호가 바로 그이다. < 조선상고사 > 에서 그는 백제의 진짜 시조는 온조가 아니라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였다고 말했다. 온조가 백제시조라고 기록한 <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제본기는 고구려본기보다 더 심하게 조작되었다. 백 몇십 년의 삭감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리게 만들었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女)대왕으로 하남위례성에 도읍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비류·온조 두 아들이 분립하여, 그 하나는 미추홀(인천) 또 하나는 위례홀에 도읍하였으니, 그 후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다."
진짜 백제 시조인 소서노가 죽은 뒤에 온조가 즉위했다는 것이 신채호의 주장이다. 그의 말대로 소서노를 백제 시조라고 보면, 백제인들이 천지신명 및 부여 시조와 함께 소서노에 대한 제사를 중시한 이유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천지신명-부여시조-백제시조의 위계질서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소서노만 백제 시조로 거론되는 게 아니다. 소서노 외에도 온조의 형인 비류, 소서노의 전 남편인 구태(우태), 부여시조라고 하는 동명왕(도모) 등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온조가 백제시조'라는 명제는 그리 견고한 편이 아니다.
그럼, 신채호는 무슨 근거로 '백제 시조는 소서노'라고 말했을까? 신채호는 이미 고구려 건국과정에서부터 소서노가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그런 리더십이 백제 건국과정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고 본 것이다.
또 신채호는 <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 두 기록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다. '백제 건국 1년에 온조가 위례성(위례홀)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과 '소서노 사망 직후인 백제 건국 13년에 온조가 한산(漢山) 아래로 천도했다'는 기록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위례성은 오늘날의 경기도 하남, 한산은 경기도 광주에 해당한다. 하남과 광주가 분리된 것은 1989년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두 곳이 하나의 지역이었다. 고려 태조 이전에는 하남위례성이라 불렸고, 그 이후에는 광주라 불렸다. 위례성과 한산이 실질적으로 같은 지역이라는 데에서 신채호의 의심이 시작된 것이다.
'백제본기'에서 김부식은 온조가 위례성 주민들을 한산 아래로 옮겼다고 했다. 하지만, 위례성과 한산은 실질적으로 같은 지역이기 때문에 위의 두 기록은 결국 '온조가 백제 건국 1년에도 위례성에 도읍을 두고 백제 건국 13년에도 위례성에 도읍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라고 신채호는 말했다. "그러면 온조가 하남위례홀에서 하남위례홀로 천도하였다는 것이 되는데, 이 어찌 웃을 일이 아니냐?"라고 그는 말했다.
따라서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을 두었다는 두 기사는 실질적으로 동일 사건에 관한 것이며, 온조의 위례성 천도는 그의 왕위 등극과 함께 백제 건국 13년에 발생했다는 게 신채호의 판단이다. 온조가 천도를 선포한 백제 건국 13년 이전에는 소서노가 백제의 왕이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 온조와 비류가 분열되면서 온조가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따라서 '백제 건국 1년에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라는 기록은 잘못되었다는 게 신채호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 삼국사기 > '백제본기' 중에서 백제 건국 13년 5월 이전의 사건은 '초대 소서노 여왕' 재위기 동안의 사건이고 그 이후의 사건은 '제2대 온조왕' 재위기 동안의 사건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가 그런 결론을 도출한 것은,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과정에서부터 정치적 리더십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서노가 죽은 직후에 온조가 수도를 옮기는 정치적 결단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초대여왕 소서노, 아들 쿠데타로 목숨 잃어"
사실 신채호의 주장은 아직까지는 '추정'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채호가 제시한 논거 외에도 '소서노 여왕설(說)'에 무게를 실어주는 추가적인 증거들을 우리는 < 백제본기 >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소서노의 사망이 정변 수준의 중대 사건이었다는 사실이다. 소서노가 죽은 지 3개월 뒤에 온조가 천도를 단행한 사실에서 그런 분위기를 포착할 수 있다. < 백제본기 > 에 따르면, 온조는 '소서노의 죽음으로 인해 정세가 불안정해졌다'면서 천도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만약 소서노가 단순히 왕의 어머니에 불과했다면, 그의 죽음이 과연 천도의 원인이 될 수 있었을까? 소서노가 여왕이었고 그가 정치적인 이유로 죽었다고 하면, 그가 죽은 직후에 온조가 수도를 옮긴 사실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둘째, 소서노와 온조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점은 온조가 어머니의 사당을 뒤늦게 지은 사실로부터 추론된다. 소서노가 죽자마자 곧바로 천도한 사실은, 온조가 사태변화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천도 직후에 어머니의 사당을 세웠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는 천도 2년 뒤에 자신의 궁궐을 새로 지으면서도 어머니의 사당은 짓지 않았다. 온조가 소서노의 사당을 세운 것은 자신의 궁궐을 새로 지은 지 2년 뒤의 일이었다. 소서노 사후 4년 만에 사당을 지어준 것이다.
정상적인 모자 관계였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소서노가 죽기 전에 소서노와 온조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모자간에 권력투쟁이 있었고 그 와중에 소서노가 죽었으며 양측의 갈등이 봉합된 뒤에 온조가 어머니의 사당을 세웠다고 보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린다.
셋째, 소서노 사망 직전에 백제 수도에서 희한한 상징조작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백제본기'에는 소서노가 사망한 달에 "(백제) 수도에서 할머니가 남자로 변"(王都老?化爲男)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할머니가 남자로 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상징조작으로부터 시작하여 '할머니가 남자로 변한다'는 소문이 널리 확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할머니(소서노)와 남자(온조) 사이에서 벌어진 정치투쟁의 결과로 온조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상징조작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 사이에서 '할머니=왕'이라는 이미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이 시조인 나라라면 '할머니=왕'의 이미지도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훗날 동성왕 23년 1월(501.2.4~3.4)에도 '할머니가 여우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해 겨울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동성왕이 시해되었다는 < 백제본기 > 기록을 보면, 백제인들 사이에서는 '할머니'란 표현이 왕을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머니가 사내로 변한 뒤에 소서노가 죽었다는 기록이나 할머니가 여우로 변한 뒤에 동성왕이 시해를 당했다는 기록을 볼 때, '할머니의 기이한 변신'은 왕의 갑작스러운 시해를 가리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우리는 소서노가 단순히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소서노가 죽자마자 온조가 천도를 단행하고, 온조가 자기 궁궐은 새로 지으면서도 어머니의 사당은 한참 후에 지은 것은, 초대 임금인 소서노가 온조의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소서노가 시조라면, 그는 왜 여왕으로 기록되지 못했나
신채호가 < 조선상고사 > 에서 제시한 논거와 이 글에서 추가적으로 제시한 논거들을 종합해보면, 백제시조가 온조가 아니라 실은 소서노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물론 아직 확정적으로는 말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근거들이 소서노 여왕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소서노가 실제로 여왕이었다면, 왜 그런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을까? 사실, 김부식의 < 삼국사기 > 에 이것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점은 < 삼국사기 > '열전'의 목차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열전이란 것은 일종의 위인전이다. 이 열전을 읽다 보면, 김부식이 가장 높게 평가하는 여인상(像)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김부식이 고구려·백제·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다고 선정한 여인은 효녀 지은과 설씨 여인이다. 효녀 지은은 결혼도 포기한 채 남의 집 종살이를 하면서 홀어머니를 모신 여인이고, 설씨는 전쟁터에 나간 약혼자를 무려 6년간이나 '고무신 꺾어 신지 않고' 기다려준 여인이다. 물론 이들도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이 여인들이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여성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 여인들을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꼽는 김부식의 눈에는, 여성으로서 백제를 세운 소서노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어떻게든 소서노의 건국 사실을 은폐하고 싶지 않았을까.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되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 고구려·백제의 건국연도를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로 조작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백제시조를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꿔치기하는 일쯤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김부식 정도의 대담한 인물이라면, 할머니를 남자로 바꾸는 '성전환 수술'을 위해 얼마든지 집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시조는 남성인 온조가 아니라 여성인 소서노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최초의 여왕' 하면 흔히 신라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백제에서 최초의 여왕이 나왔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김부식에 의해 조작된 '신라 중심, 남성 중심'의 거짓 역사를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소서노 여왕설을 좀 더 진지하게 고증해볼 필요가 있다.
KBS1 드라마 < 근초고왕 > 에는 소서노 사당이 자주 등장한다. 신년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낼 때도, 왕실에 불상사가 있을 때도, 태자를 새로 세울 때도 소서노 사당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왕이나 왕후가 그곳을 찾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일정 정도는 역사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 삼국사기 > 권23~27 '백제본기'와 권32 '제사' 편에 따르면, 백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제사는 천지신명에 대한 제사, 다음은 동명왕에 대한 제사, 그 다음으로는 소서노에 대한 제사였다.
참고로 동명왕의 사당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고주몽)의 사당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1922년 중국 낙양(뤄양)에서 발견된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백제인들이 추모한 동명왕은 고구려 시조가 아닌 부여 시조였다. 백제의 뿌리가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 시조를 추모한 것이다.
백제인들은 천지신명·동명왕·소서노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미 백제 초기에 천지신명을 위한 제단과 동명왕·소서노를 위한 사당을 각각 세웠다. 이 외에도 여러 종류의 사당이 더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록상으로는 이 세 개가 가장 중요했다는 점이다.
그럼, 소위 '백제시조'인 온조왕의 사당은 어떻게 된 것인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조왕의 사당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긍익이 쓴 < 연려실기술 > 별집 권4에 따르면, 온조왕의 사당이 창건된 때는 조선 세조 11년(1465)이고,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나서 새로 신축한 때는 인조 14년 3월(1636.4.6~5.4)이었다.
여기서 좀 이상한 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모든 만물의 근원인 '천지신명'과 백제의 근원인 '부여 시조'에 대한 제사를 최상위와 차상위에 두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자리가 왜 소서노였을까? 정상적인 경우라면, 천지신명-부여시조-백제시조의 순서가 돼야 하지 않을까? 소위 '백제시조' 온조왕 대신에 소서노가 그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채호는 왜 소서노를 백제시조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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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는 고구려본기보다 더 심하게 조작되었다. 백 몇십 년의 삭감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리게 만들었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女)대왕으로 하남위례성에 도읍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비류·온조 두 아들이 분립하여, 그 하나는 미추홀(인천) 또 하나는 위례홀에 도읍하였으니, 그 후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다."
진짜 백제 시조인 소서노가 죽은 뒤에 온조가 즉위했다는 것이 신채호의 주장이다. 그의 말대로 소서노를 백제 시조라고 보면, 백제인들이 천지신명 및 부여 시조와 함께 소서노에 대한 제사를 중시한 이유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천지신명-부여시조-백제시조의 위계질서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소서노만 백제 시조로 거론되는 게 아니다. 소서노 외에도 온조의 형인 비류, 소서노의 전 남편인 구태(우태), 부여시조라고 하는 동명왕(도모) 등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온조가 백제시조'라는 명제는 그리 견고한 편이 아니다.
그럼, 신채호는 무슨 근거로 '백제 시조는 소서노'라고 말했을까? 신채호는 이미 고구려 건국과정에서부터 소서노가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그런 리더십이 백제 건국과정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고 본 것이다.
또 신채호는 <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 두 기록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다. '백제 건국 1년에 온조가 위례성(위례홀)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과 '소서노 사망 직후인 백제 건국 13년에 온조가 한산(漢山) 아래로 천도했다'는 기록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위례성은 오늘날의 경기도 하남, 한산은 경기도 광주에 해당한다. 하남과 광주가 분리된 것은 1989년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두 곳이 하나의 지역이었다. 고려 태조 이전에는 하남위례성이라 불렸고, 그 이후에는 광주라 불렸다. 위례성과 한산이 실질적으로 같은 지역이라는 데에서 신채호의 의심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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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을 두었다는 두 기사는 실질적으로 동일 사건에 관한 것이며, 온조의 위례성 천도는 그의 왕위 등극과 함께 백제 건국 13년에 발생했다는 게 신채호의 판단이다. 온조가 천도를 선포한 백제 건국 13년 이전에는 소서노가 백제의 왕이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 온조와 비류가 분열되면서 온조가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따라서 '백제 건국 1년에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라는 기록은 잘못되었다는 게 신채호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 삼국사기 > '백제본기' 중에서 백제 건국 13년 5월 이전의 사건은 '초대 소서노 여왕' 재위기 동안의 사건이고 그 이후의 사건은 '제2대 온조왕' 재위기 동안의 사건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가 그런 결론을 도출한 것은,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과정에서부터 정치적 리더십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서노가 죽은 직후에 온조가 수도를 옮기는 정치적 결단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초대여왕 소서노, 아들 쿠데타로 목숨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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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소서노가 단순히 왕의 어머니에 불과했다면, 그의 죽음이 과연 천도의 원인이 될 수 있었을까? 소서노가 여왕이었고 그가 정치적인 이유로 죽었다고 하면, 그가 죽은 직후에 온조가 수도를 옮긴 사실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둘째, 소서노와 온조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점은 온조가 어머니의 사당을 뒤늦게 지은 사실로부터 추론된다. 소서노가 죽자마자 곧바로 천도한 사실은, 온조가 사태변화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천도 직후에 어머니의 사당을 세웠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는 천도 2년 뒤에 자신의 궁궐을 새로 지으면서도 어머니의 사당은 짓지 않았다. 온조가 소서노의 사당을 세운 것은 자신의 궁궐을 새로 지은 지 2년 뒤의 일이었다. 소서노 사후 4년 만에 사당을 지어준 것이다.
정상적인 모자 관계였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소서노가 죽기 전에 소서노와 온조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모자간에 권력투쟁이 있었고 그 와중에 소서노가 죽었으며 양측의 갈등이 봉합된 뒤에 온조가 어머니의 사당을 세웠다고 보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린다.
셋째, 소서노 사망 직전에 백제 수도에서 희한한 상징조작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백제본기'에는 소서노가 사망한 달에 "(백제) 수도에서 할머니가 남자로 변"(王都老?化爲男)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할머니가 남자로 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상징조작으로부터 시작하여 '할머니가 남자로 변한다'는 소문이 널리 확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할머니(소서노)와 남자(온조) 사이에서 벌어진 정치투쟁의 결과로 온조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상징조작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 사이에서 '할머니=왕'이라는 이미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이 시조인 나라라면 '할머니=왕'의 이미지도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훗날 동성왕 23년 1월(501.2.4~3.4)에도 '할머니가 여우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해 겨울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동성왕이 시해되었다는 < 백제본기 > 기록을 보면, 백제인들 사이에서는 '할머니'란 표현이 왕을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머니가 사내로 변한 뒤에 소서노가 죽었다는 기록이나 할머니가 여우로 변한 뒤에 동성왕이 시해를 당했다는 기록을 볼 때, '할머니의 기이한 변신'은 왕의 갑작스러운 시해를 가리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우리는 소서노가 단순히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소서노가 죽자마자 온조가 천도를 단행하고, 온조가 자기 궁궐은 새로 지으면서도 어머니의 사당은 한참 후에 지은 것은, 초대 임금인 소서노가 온조의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소서노가 시조라면, 그는 왜 여왕으로 기록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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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가 실제로 여왕이었다면, 왜 그런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을까? 사실, 김부식의 < 삼국사기 > 에 이것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점은 < 삼국사기 > '열전'의 목차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열전이란 것은 일종의 위인전이다. 이 열전을 읽다 보면, 김부식이 가장 높게 평가하는 여인상(像)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김부식이 고구려·백제·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다고 선정한 여인은 효녀 지은과 설씨 여인이다. 효녀 지은은 결혼도 포기한 채 남의 집 종살이를 하면서 홀어머니를 모신 여인이고, 설씨는 전쟁터에 나간 약혼자를 무려 6년간이나 '고무신 꺾어 신지 않고' 기다려준 여인이다. 물론 이들도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이 여인들이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여성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 여인들을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꼽는 김부식의 눈에는, 여성으로서 백제를 세운 소서노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어떻게든 소서노의 건국 사실을 은폐하고 싶지 않았을까.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되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 고구려·백제의 건국연도를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로 조작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백제시조를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꿔치기하는 일쯤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김부식 정도의 대담한 인물이라면, 할머니를 남자로 바꾸는 '성전환 수술'을 위해 얼마든지 집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시조는 남성인 온조가 아니라 여성인 소서노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최초의 여왕' 하면 흔히 신라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백제에서 최초의 여왕이 나왔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김부식에 의해 조작된 '신라 중심, 남성 중심'의 거짓 역사를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소서노 여왕설을 좀 더 진지하게 고증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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