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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산성일주 - 엉터리로 복원한 성문과 성벽들

이름없는풀뿌리 2015. 9. 15. 14:26
북한산 산성일주 - 엉터리로 복원한 성문과 성벽들
산과들  (Homepage) 2007-11-03 21:17:10, 조회 : 278, 추천 : 0

북한산 산성일주 - 엉터리로 복원한 성문과 성벽들 
 

산행지 북한산

산행일 2007.10.26.

           2007.10.29.

산행길 우이동버스종점-도선사주차광장-백운대-산성주능선-문수봉-의상능선-대서문-서암문-북문-북장대지-중성문-산성입구 

 

산행기 
 

북한산의 첫번째 봉우리인 인수봉(仁壽峰) 810m 인수암위 사진전망대에서

 

사면이 암석으로 되어 깎아 세운듯 서 있는데, 이 봉우리 동쪽의 한 봉우리가 혹처럼 붙어 있어 부아악(負兒嶽)이라고도 하였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온조의 형)와 온조(溫祚 백제시조 재위 BC18∼AD28)가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漢山, 지금의 서울)에 이른후 이곳 부아악에 올라가 살만한 땅을 살펴보았다고 한다.


 

북한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백운대(白雲臺 백운봉白雲峯) 836m 인수봉 남쪽봉에서

 

이성계(李成桂 조선 제1대왕 재위 1392∼1398)가 조선창업이전 이곳에 올라 “힌구름이 가운데 있다”고 하여 붙혀젔다고 한다.

 

백운대 정상에는 일제때의 독립운동가인 정재용(鄭在鎔1886.11.6~1976.12.31)선생이 3.1운동의 역사적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암각한 3.1운동암각문이 있다

 

백운대정상의 3.1운동암각문

 

백운대 3.1운동암각문(三一運動巖刻文) 향토유적 제32호  

백운대정상의 평평한 바위위에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을 사랑한다)이란 네글자를 새기고 그안에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은 기미년(己未年) 2월10일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하였으며 3월1일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자신이 독립선언만세(獨立宣言萬世)를 도창(導唱)했다는 내용의 한자69자가 해서체로 새겨져있다.

 

성벽이 이어지는 만경대(萬景臺 만경봉萬景峯 국망봉國望峰) 799m 백운대정상에서

 

무학(無學)대사(1327~1405 조선개국 직후 왕사를 지낸 조선의 승려)가 만경봉에 올라 나라일을 생각했다 하여 국망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의 세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 하늘로 치솟아 있으므로 삼각산이라고 불렀다 
 

북한산성(北漢山城) 사적 제162호

북한산성은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북한산군(北漢山郡, 남평양南平壤)이었는데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 재위 BC18∼AD28))이 차지하여, 온조왕 14년(B.C 5)에 토축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는 백제 제4대 개로왕(재위 128~166) 5년(132)에 쌓은 것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 394-491 광개토대왕의 아들)때인 475년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 12년(551년)에 신라의 영역이 되었고, 555년 10월 북

한산 비봉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고려시대에 중흥사지(重興寺址)부근에 중흥산성(重興山城)을 쌓았다

고려 제23대 고종(재위 1213∼1259) 19년(1232) 몽고의 제2차 침입때 이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다

고려말 제32대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이성계에 살해)때인 1388년 최영장군은 중흥성을 새로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중흥사지(重興寺址) 서쪽 봉우리인 장군봉(將軍峯 최공전지崔公戰址)은 이성계군과 전투한 곳으로 전하기도 한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병자호란(1636년∼1637년)후 조선 제19대 숙종(肅宗 재위1674∼1720) 37년(1711)에 백제시조 온조왕의 옛 토성터와 고려석성터를 기초로 석성으로 고처 쌓았다

축성당시의 체성(體城)의 길이 11.54Km이며 14개의 성문과 3개소의 장대, 행궁, 군창, 성랑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사찰14개, 우물99개소, 저수지26개소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의 전체둘레는 12.7㎞이며 체성(體城)의 길이는 8.4㎞이고 안의 면적은 6,611,600m²이다

북한산성은 한양을 직접 방비하는 도성(都城)이 아니라, 유사시에 왕이 도성에 있는 왕궁을 버리고 피난하는 행궁(行宮 별궁別宮)을 지키기 위한 성이었다. 
 

백제의 토성과 고려의 석성이 있었던 노적봉 716m 백운대 정상에서

 

우뚝 솟아있는 형상이 마치 노적가리(露積가리=한데에 수북히 쌓아둔 곡식의 더미)와 같기 때문에 노적봉이라고 한다.

노적봉에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 재위 BC18∼AD28)이 14년(B.C 5)에 쌓은 토축산성이 있었다.(또는 백제 제4대 개로왕5년(132)에 축성한 성이라고도 한다)

고려말 제32대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이성계에 살해) 13년(1387)에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최영장군이 노적봉을 중심으로 중흥동에 석성을 고쳐쌓고 군대를 주둔시킨 중흥석성(重興石城)이 여기에 있었다

노적봉 남서쪽능선으로 중흥사지(重興寺址)서쪽의 봉우리인 장군봉(將軍峯 용학사 뒷봉우리)은 고려말의 충신 최영(崔瑩 1316-1388)장군이 이곳에서 이성계 몰래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당시의 쿠데타세력인 이성계군과 전투한 곳으로 전하기도 한다. 
 

의상(의상봉義湘峰 미륵봉彌勒峰 502m)능선 백운대 정상에서

 

미륵봉아래 의상대(義相臺)에서 의상(義湘 625~702 신라시대의 승려)대사가 참선수도 하였다하여 의상봉으로 불린다 

 

 

원효(원효봉元曉峰 505m)능선 백운대 정상에서

 

원효봉의 원효대(元曉臺)에서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신라시대의 승려)가 참선수도 하였다하여 원효봉으로 불린다

 

*백운대 중턱의 복원했다는 성벽 위에서

 

성벽 밑에서


가장 잘못 복원한 엉터리 성벽이다

 

 

북한지(北漢誌)등 고문헌에 의하면 축성은 평지는 고축(높이14尺 약400cm)으로, 위로 올라 갈수록 반축, 반반축, 지세가 험하여 천연성벽인 지역은 지축여장만 축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비에 유리한 자연적인 지형조건을 적절히 살려서 평지에서는 높게 쌓고 산지의 높은 지역으로 오르면서 점점 낮게 쌓고, 정상 주위에는 여장만 설치하고, 급경사나 정상에 암반이 있으면 암반을 그랭이질(바위표면 형태에 맞춤)을 하여 성벽을 쌓았고, 자연암반을 그대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성곽을 쌓지 않기도 하였다. 전체의 1/3에 달하는 구간은 성벽을 쌓을 수 없어 암반 자체가 성곽 구실을 하고 있다.

성벽은 각 성문의 정면부위나 후면부위는 큰돌로 정교하게 쌓았지만 성문이 아닌 일반 성벽은 폭이 3자(尺 약90cm)정도로 두줄로 쌓았으며 적이 공격해 오는 방향인 외부쪽은 수직으로 돌을 쌓았고 성 내부쪽은 흙을 채워 경사면을 만들어 오르내리기 쉬워서 전투를 하기 편하게 만들고 또 적이 대포를 쏘아서 성벽을 폭파시키려 할 경우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쌓았다. 또 성벽위에는 여장과 총안을 설치하였다

북한산의 정상인 백운대 바로 밑은 높고 지형이 험하여 당초에는 지축여장만 쌓은 곳으로 추측된다.

새로 복원했다는 성벽은 높이가 260cm로 너무 높고 안쪽에 경사면도 없어서 성벽위를 오를 수도 없고 성벽의 넓이는 위쪽의 폭이 230cm 밑쪽의 폭은 무려 400cm로 원래 성벽넓이의 4.5배가 되며 성벽위에 여장과 총안도 없다.

또 아래부분은 자연의 바위를 이용해 쌓았는데 그 바위가 적 방향에 비스듬하게 경사진 바위이고 안쪽은 수직이어서 적이 이 바위를 이용해 쉽게 성벽위로 올라 오도록 되어 있고 아군은 성벽을 오르내릴수 없는 적을 위한 성을 쌓았다.

 

북한산성은 사적 제162호인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로 후세에 물려주어야 하며, 문화재 복원은 원형보존이 제일 중요한데 이 성벽은 너무 엉터리로 복원한 국민의 아까운 혈세만 낭비한 돌무덤이다

큰 문제점은 현장학습으로 배우는 사람에게 이런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고, 아름다운 백운대의 자연경관을 파괴한 것이다.

 

백운대성벽은 이곳과 지형이 비슷한 의상봉 남쪽비탈 바위면의 지측여장성벽처럼 나즈막하게 지축여장만 쌓았을 것이다

 

이곳과 비슷한 지형인 의상봉 서쪽비탈바위면의 지축여장과 총안 성벽밖밑에서

 

 

성벽위 밑에서

 

성벽안 위에서 지축여장과 총안

 

용암문 남쪽능선에 축성한 일반적인 성벽

 

좌측은 적이 공격해 오는 성외부쪽으로 수직으로 쌓았고, 중앙이 성벽으로 성폭이 약90cm로 두줄로 쌓았으며, 우측은 안쪽으로 흙을 경사지게 채워 오르내리기 쉬워서 전투를 하기 편하게 만들고 또 적이 대포를 쏘아서 성벽을 폭파시키려 할 경우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쌓았다. (성폭은 보통90cm로 아무리 넓으러진 것이라도 120cm를 넘는곳은 없다) 또 성벽위에는 여장과 총안을 설치하였다.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 백운동암문 현재현판은 위문) 높이690m

앞에서

 

뒤에서

 

암문내부(역광보정)

 

북한산성의 14개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문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 안부에 있다

암문은 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대문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매우 작다.  

성문은 평거문(平据門 네모진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인방(引枋)과 천정에 장대석(長大石)을 설치하였다. 문짝을 다는 돌쩌귀구멍(문짝구멍)이 위부분 평장대석 양끝과 아래부분 양끝에 각각 파여져 있고, 문짝 뒷면에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군목 홈(빗장구멍)도 측벽좌우에 각각 파여져 있다. 복원하면서 아래부분 출구중앙에 문짝고정석을 없애고 바닥에 잘 다듬은 각석이 아닌 잡석을 깔았다(보국문 청수동암문 참고). 문짝과 빗장이 없다. 암문의 문짝과 빗장도 한 두군데는 복원해 놓았으면 좋겠다.

 

본 암문은 고문헌에는 백운봉암문(白雲暗門) 또는 암문(暗門)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위문이란 이름은 일제때 “일본에서 과거 궁성의 성문을 지키는 관서의 명칭인 위문”의 위문이라는 이름을 지도에 표기한것을 고치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위문이라는 왜색명칭은 당장 본래의 백운봉암문으로 고쳐 달아야 한다

백운대 정상에는 일제때 독립운동사인 3.1운동암각문이 있고, 백운대 안부에는 일제때 일본이 작명한 왜색이름의 암문 있다니---

 

*용암문(원래명칭은 용암봉암문龍巖峰暗門이다) 580m

앞에서

 

뒤에서

 

문후면 위에 돌을 직선으로 길쭉하게 짤라서 오려놓았다. 좌우 끝부분을 수직으로 잘랐다

 

바닥에 잡석을 깔았다. 문짝과 빗장이 없다. 보수를 하면서 원형을 완전히 훼손 시켜버렸다.

 

만경대와 용암봉사이 바위능선의 성랑터와 지축여장의 총안


북한산성의 성랑터 가운데 가장높은 곳에 있는 성랑터이다

주변에 성랑에 쓰였던 토기조각이 널려있고 옆의 지축여장에는 총안이 설치되어 있다

 

성랑(城廊 성루城樓 망루) 성곽을 지키는 일반 병사들의 초소이자 숙소인 작은 건물.

성문의 주변이나 성벽이 돌출된 곳, 그리고 성벽 봉우리에 있는 지역 등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두 143개소가 설치되었고, 성내의 행궁, 창고, 삼군문의 유영지에 설치되었다는데, 한 두개는 복원해 놓았으면 좋을텐데

 

 

 

 

*반룡봉(서성西城 곡성曲城이라고도 한다) 정상과 치(雉)  550m 동장대와 용암문사이

반룡봉 정상

 

북한산성의 경우 지형의 굴곡이 심하고 험난하여 별도로 치를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성벽의 형태상 치의 기능을 하였던 곳이 10여개소 있는데, 북문에서 시구문 사이에 2개소, 시구문에서 수구문 사이에 1개소, 부왕동암문에서 청수동암문 사이에 1개소, 대남문에서 대성문 사이에 1개소, 대성문에서 보국문 사이에 1개소, 보국문에서 대동문 사이에 1개소, 대동문에서 동장대 사이에 1개소, 동장대에서 용암문 사이에 2개소 등이다.

이중 반용봉에 있는 치는 가장 높은곳에 자리하며 가장 규모가 크다. 


*시단봉의 동장대(東將臺 장수의 지휘소 겸 망루) 561m

 

 북한산성에는 동, 남, 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봉성암(奉聖庵)뒤의 시단봉(柴丹峰)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쪽의 상원봉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의 기린봉에 북장대(北將臺) 등 3개의 장대가 있다.

이중 최고 지휘관이 머무르는 가장 중요한 장대는 동장대이며, 행궁을 비롯한 성의 안팎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다.

 

동장대에서 의상능선

 

*대동문(大東門 소동문小東門), 540m

앞에서

 

뒤에서

 

내부(역광보정)

  

문루 동쪽에서

 

성문은 홍예문(반원형半圓形)과 문루로 되어 있다. 인방과 천정은 장대석(長大石)을 설치하였다. 성문의 문짝은 두꺼운 목재 판문을 달고, 겉에 철엽(鐵葉)을 붙였다. 문짝을 다는 돌쩌귀구멍(문짝구멍)이 출구천정 윗부분의 보장대석 양끝과 아래부분 양끝에 각각 파여져 있다. 문짝 뒷면에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군목홈(빗장구멍)이 측벽 좌우에 각각 파여져 있다. 측벽 좌우 빗장구멍의 깊이가 서로 다르다. 빗장구멍이 정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장방형 장군목(빗장)도 있다.

문루는 단층의 기와집 형태이다. 문루의 여장은 평여장이며, 총구는 근총안이 한 개씩 설치되어 있다.

복원하면서 앞뒤 홍예문위의 좌우에 석루조(石漏槽 배수구)를 설치하여야 하는데 설치하지 않았다.(대성문, 대서문, 중성문 참고). 천정의 틈새에 잡석을 깔았다. 아래부분 출구중앙에 문짝고정석이 없고, 바닥에 다듬은 각석이 아닌 잡석을 깔았다(대서문 참고)

현판은 대성문과 함께 숙종임금의 어필집자로 달았다.

석루조가 없는것이 아쉽지만 비교적 원형보존이 잘되어 있다.

 

성문 안쪽 동측벽면에 세겨진 암각문

 

신묘년 4월에 건설을 시작(시설始設)하여 9월에 건축을 마쳤(필축畢築)으며 관청의 감독관(축청감관築廳監官)은 이필신(李弼臣)등 4명이라고 암각되어있다

 

대동문 현판(확대사진)

 

*숙종어필집자(淑宗御筆 集字)  동장대는 조순 전서울시장이. 중성문은 신동영 전고양시장이 현판을 썼다. 그러나 숙종은 이러한 큰역사를 했으면서도 현판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숙종이 생전에 친필로 써놓은 문서에서  大자, 東자成자, 門자를 찾아 짜집기한 현판이다.

대동문(大東門 )과 대성문(大成門)의 글씨체가 똑같다 


*보국문(동암문東暗門), 567m

앞에서 

 

뒤에서

 

문전면 위에 이상한 형태의 여장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여장의 총안이 평총안(먼곳을 쏘는 구멍)으로 되어있다.(이곳은 성문밖 급경사지를 올라오는 적을 쏘게 구멍이 밑으로 뚤린 근총안이어야 한다) 

문후면 위에 이상한 형태의 돌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좌우끝부분을 수직으로 처리하였다 쉽고 간단하게 보수를 하였다. 문짝과 빗장이 없다. 문 윗부분을 보수하면서 원형을 완전히 잃었다. 

바닥은 원형인것 같으나 문짝고정석이 없다.문짝과 빗장도 없다. 

 

출입구 서쪽벽면에 새겨진 암각문

 

축성구간, 착공일자,  완공일자, 공사책임자, 석수의 이름등이 암각되어 있는 것일텐데 심하게 훼손되어 읽을수가 없다.

 

*대성문 625m

 

앞에서

 

내부(역광보정)

 

대성문은 성문중 가장 큰 규모의 대문이다.

대궐이 있는 도성에서 북한산성 안에 있는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 경리청 및 행궁으로 들어가기에 가장 가깝고 비상시에는 임금님이 쉽게 행궁으로 대피할 수 있는 문이며 장수들도 업무차 수시로 들어다녀야 하는 문이기에 대문으로 축조했을 것이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되어있다

천정을 장대석이 아닌 목재를 깔고 단청을 했다(대동문 참고)

목재판문(문짝)에 철옆이 없다(대동문 참고)

출구천정을 보장대석이 아닌 목재를 깔고 문짝구멍(돌저귀구멍)을 팠다.(대동문 참고)

빗장의 양끝을 다듬지 않아 빗장구멍에 끼울수가 없다(대동문 참고)

보수를 쉽게 하기 위하여 석재가 아닌 목재를 사용하여 원형을 훼손하였다.

정면과 후면 모두 홍예문 상부 좌우에 석루조(石漏槽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바닥에 잡석을 깔았다(대서문 참고)

현판은 대동문과 함께 숙종임금의 어필집자로 달았다.

 

성문밖 서쪽벽면에 새겨진 암각문

 

석수는 김선운이고 금위영의 장수 장태홍이 성벽축조를 감독을 하였다는 내용이 암각되어 있다

 

*대남문(소남문小南門), 663m

앞에서 

 

내부(역광보정)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되어있다.

출구천정의 문을 다는 부분은 보장대석으로 해야 하는데 평장대석에 돌저귀구멍을 팠다.(대동문 참고)

천정의 양쪽 틈새를 잡석으로 메웠다.

석루조(石漏槽 배수구)를 설치하지 안았다.(대서문 대성문 중성문 참고)

빗장이 없다.(대동문 참고) 바닥에 잡석을 깔았다 .

 

*국기봉 정상

 

국기봉에서 정상

 

국기봉에서 문수봉

 

국기봉에서 비봉능선

 

국기봉에서 보현봉

 

*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 694m

 

앞에서

 

뒤에서(역광보정)

 

문안 인방돌위에 반원형돌을 중앙부에 놓고 좌우로 물구배돌을 쌓았다. 원래 원형대로인지 복원한 사람의 애교인지

비교적 원형보존이 잘되어 있는 문이다.

위아래부분의 돌쩌귀구멍 측벽 좌우의 빗장구멍도 잘 보존되어 있다.

바닥에 각재를 깔았다. 문짝고정석이 없다. 문짝과 빗장이 없다.

 

*제자리 찾아온 삼각점봉의 나한봉 표찰

 

나한봉명패를 삼각점봉 서쪽의 봉우리에 달아 놓고, 지도에도 그곳을 나한봉이라 표시하였는데,  나한봉명패가 이제야 제자리에 찾아왔다.

 백운봉암문의 이름도 위문이 아닌 본래의 제이름인 백운봉암문을 달았으면.

 

나한봉에서 정상

 

*부암동암문(扶旺洞暗門 원각문 소남문小南門), 521m

앞에서

 

뒤에서(역광보정)

 

유사시 대남문의 보조역할을 하는 문으로 출입구 인방이 홍예문(虹霓門)으로 되어 있고  그규모가 암문중에는 가장 크다. 뒤의 인방은 평거문으로 되어 있다.

문앞면위에 여장에 총안구를 잘못 만들었다. 바닥에 잡석을 깔았다  문짝고정석이 없다.

문짝과 빗장이 없다.

 

앞위 중앙의 암각문

 

문앞면위에 소남문(小南門)이라고 암각되어 있다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 국녕문國寧門 국령사암문國靈寺暗門이라고도 한다) 448m

앞에서

 

문앞면위에 여장에 총안구를 잘못 만들었다.

바닥에 잡석을 깔았다. 문짝고정석이 없다. 문짝과 빗장이 없다.

가사(袈裟 승복僧服)는 승려들이 입는 옷이다.

 

의상봉의 서봉정상. 미륵봉

 

의상봉 서봉에서 원효봉

 

의상봉에서 정상

 

의상봉에서 동장대

 

의상봉에서 의상능선

 

의상봉에서 비봉능선

 

*대서문(大西門) 해발150m

 

앞에서

 

내부(역광보정)

 

성문중 가장 낮은 위치(해발150m)에 있다

대서문은 산성의 서쪽을 담당하는 동시에 산성의 정문이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되어있다.

천정의 문짝을 다는 곳에 보장대석을 깔고 좌우측 끝부분에 문짝을 다는 돌저귀구멍을 파야 하는데, 목재를 깔고 돌저귀 구멍을 파지 않았다.(대동문 참고)

천정을 장대석으로 설치하여야 하는데, 장대석이 아닌 목재로 깔았다.(대동문 참고)

측벽좌우에 장군목(빗장)을 끼우는 빗장구멍과 아래부분의 좌우측에 돌저귀구멍은 있다.

문짝고정석이 없다. 문짝과 빗장이 없다.  

문루는 단층의 기와집 형태이다. 문루의 여장은 평여장이며 총구는 근총안이 한개씩 설치되어 있다.

홍예문 상부 좌우에 용머리형태의 석루조(石漏槽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문짝을 다는 돌저귀구멍을 안파는 잘못은 전문적인 식견이 아닌 일반상식으로도 알수있는 사항인데, 대서문의 복원공사를 설계한 사람, 공사한 사람, 감독한 공무원은 자기집의 대문을 달지않고 살아서 대문다는 구멍 파는것을 몰랐든지, 아니면 공사를 쉽게 하기위하여 천정에 목재를 살짝 깔고 그럴듯하게 단청을 그려넣는 눈속임으로 원형을 훼손한 것이다

자기돈으로 자기집을 짖는다면 이렇게 엉터리로 공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문지(水門) 수구산장뒤의 밑에서 

 

 

대서문밑 북한산 계곡에 있는 수구산장 음식점뒤 좌우에 성벽의 흔적만 남아 있다. 대서문과 서암문 사이로 산성내의 계곡을 가로질러 설치하였던 수문이 있었던 자리로 높이16척(5m) 넓이50척(15.5m)의 문으로 축조되었는데 1925년 8월 을축년 대홍수때 모두 유실 되었다고 한다.

 

수문터 위에있는 반원형 큰바위(경국정사앞 길옆)의 동쪽에 새겨진 암각문

 

신묘년 6월16일 착공하여 9월초10일에 완공하였다는 수구를 축성한 기록이 암각되어 있다

 

수문위의 성루(성랑) 안에서

 

성랑중 가장 낮은곳에 있는 성랑이다. 여장과 총안이 설치되어 있다

 

*치 가운데 산성에서 가장 낮은곳에 있는치와 산성에서 하나뿐인 수구  

산성지원센터위 관광산장뒤 계곡위에 높이쌓은 "ㄱ“자로 휘어진 성벽부분


 성벽안쪽에서

 

치 밖에서 

 

치안쪽의 수구 

 

수구 밖에서 

 

치 가운데 산성에서 가장 낮은곳에 있는치로 치 안쪽으로는 산성에서 하나뿐인 수구가 있다 

 

적이 공격해 오는 방향인 성 외부쪽은 수직으로 높게(고축) 쌓았고, 중앙이 성벽으로 성폭이 약90cm로 두줄로 쌓았으며, 성 안쪽은 흙을 경사지게 채워 오르내리기 쉬워서 전투를 하기 편하게 만들고, 또 적이 대포를 쏘아서 성벽을 폭파시키려 할 경우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쌓았다. 안쪽으로는 산성에서 하나뿐인 수구가 있다.

성벽위로는 다음과 같은 여장에 총안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서암문위의 있는 성벽위의 여장과 총안구(2007.9.24.사진)

 

*서암문 아래 성벽의 군벙커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 콘크리트구조로 지하벙커를 구축해 놓고 주위에 철조망을 처놓은 곳이 서암문 위아래 성벽에 여러곳 있는데 이제는 철거하고 성벽으로 원형복구했으면 좋겠다.

 

*서암문(西暗門 시구문) 180m

앞에서

 

내부(역광보정)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기 때문에 시구문이라고 불리웠다.

인방이 특이한 형태의 홍예로 되어있고 천정이 낮고 폭은 다소 넓다.

시신의 관이나 상여를 운구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문짝고정석이 없다. 문짝과 빗장이 없다.

원형보존이 잘되어 있다. 

서암문은 대서문과 같이 주변의 지형이 낮고 험하지 않은 방어상 취약지역이므로 , 주변 성벽을 높게 구축(고축)하고 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문과 연결된 성벽을 "ㄱ"자 모양으로 돌출 되도록 축조하여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도 공격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문(北門) 430m

앞에서

 

문헌에는 영조40년(1764년 11월 12일)에 정신병 병력이 있는 북한산성을 지키는 군인이엇던 훈국의 포수 한도형 이란 사람의 방화로 인해 북문의 문루가 소실되  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 장기간 복원이 안된 문이다

 

*기린봉의 북장대(北將臺)지

 

북장대는 북한산성에 있는 동장대, 남장대와 더불어 3장대 중 하나로 중성문(中城門)과 중성문에서 이어져 훈련도감(訓練都監) 뒤편으로 축성된 중성(中城, 내성內城)의 수비를 담당하는 장수의 지휘소이다. 기초석재가 남아있는 남장대지와는 달리 북장대 자리에는 장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북장대지밑의 훈련도감유영지의 연못

 

북한산성은 세 구역으로 나누고, 3군부(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가 각각 맡아서 성을 쌓고 수비까지 담당하였는데, 제1구역인 수문에서부터 원효봉을 거쳐 백운대, 만경봉 암릉을 지나 용암봉 암문에 이르는 구역을 맡아서 쌓고 수비까지 담당한 훈련도감유영이 있던 터

 

훈련도감유영지에서 노적봉

 

훈련도감유영지에서 의상능선과 앞의 상원봉


*중성문(中城門)

앞에서 

 

내부(역광보정)

 

대서문에서 대남문 쪽으로 올라가면 골짜기가 좁은 병목지점에 있다.

대서문 안쪽에 있는 행궁,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 경리청과 승병의 총지휘본부였던 중흥사. 중창 상창 등의 창고시설 등 중요한 시설을 보호하기 위하여 2중 방어선을 구축해 놓은 것이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되어있다.

천정에 보장대석을 깔고 돌저귀구멍을 파야 하는데 목재를 깔고 돌저기구멍을 파지 않았다.  

천정을 보수하면서 공사를 쉽게 하려고 장대석을 깔지않고 목재를 깔아 원형이 훼손되었다.

아래부분에 문짝을 달았던 돌쩌귀구멍과 측벽좌우에 빗장구멍이 파여져 있다. 

전,후면 홍예문위 좌우에 모두 침루조(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

바닥에 잡석을 깔았다. 문짝고정석이 없다. 문짝과 빗장이 없다.

안한것보다는 낮지안느냐고 하겠지만, 이왕 할려면 제대로 하는것이 좋을것이다.

 

*중성암문(시구문尸柩門)

앞에서

 

내부(역광보정)

 

중성문 서쪽편 옆에 있다.

양쪽바위사이에 장대석을 올려놓았다. 인방및 천정에 길이가 짧은 장대석을 올려놔 살짝 걸려있어 떨어질것 같다.

출구천정 장대석에 돌저귀구멍이 없다.

아래부분에 돌쩌귀구멍과 측벽바위좌우에 빗장구멍이 파여져 있다.

문짝과 빗장이 없다

 

 

*중성수문(수구)

앞밑에서

 

계곡서쪽의 수문의 흔적

 

중성문서쪽계곡의 좌우에 각각 수문의 흔적이 있다

1915년 8월의 대홍수로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손만대에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북한산성!

문화재복원은 원형보존이 제일 중요한데,

아까운 국민의 혈세로 복원한 북한산성은 원형대로 복원한 곳은 한곳도 없는것 같으니,

잘못된 곳은 다시 보수하여 원형을 되찾도록 하던지,

국민의 눈요기로 구파발인공폭포 같은거나 설치하던지 ? ? ?

 

구파발역의 인공폭포 (2007.10.2.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