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더 나은 천사들' 해외 독서계 강타]
첨단 고고학의 성과 - 수천년 전 유골·혈흔 분석… '아이스맨'도 타살된 변사체
점점 더 온순해진 인류, 왜? 국가 등장…
사법制·상업 확대, 계몽·인본주의로 고문 폐지돼
인간 본성이 착해졌다? 바뀐 환경이 인간 폭력성 눌러… 전쟁과는 작별? 그건 오해
"아마도 우리는 지금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 대담한 서문을 앞세운 책 한 권이 연말 해외 식자층을 휘젓고 있다. 스티븐 핑커(57) 하버드대 진화심리학의 대가가 쓴 '우리 본성의 더 나은 천사들(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제목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취임사에서 따왔다. 요지는 명료하다. 인류는 수천년에 걸쳐 덜 폭력적이 됐다는 것. 근거로 832쪽에 걸쳐 방대한 통계와 자료를 제시한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 국가 간 전쟁부터 살인, 아동 학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폭력의 척도는 하향세다. 핑커 교수는 이를 국가의 등장과 계몽주의 확산, 문명화 등의 결과로 설명한다.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최고 도서 중 하나로 꼽았고,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장담컨대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차기 수상작감"이라고 했다.
◇선사시대엔 타살로 죽을 확률 15%
핑커 교수가 선사시대 피살률까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첨단 고고학의 성과 덕분이다. 범죄고고학 연구진은 과학수사대(CSI)처럼 수천년 전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골과 혈흔 등을 분석해 사망 경위까지 추정해낸다. 이에 따르면 선사시대 인간이 타살로 숨질 확률은 15%에 달했다. 1991년 알프스 빙하에서 발견된 5000년 전 인류 '아이스맨'도 타살된 변사체였다. 17세기 독일만 해도 '30년 전쟁'으로 인구 3분의 1이 줄었다. 반면 20세기에 오면 그 수치는 3%로 줄어든다.
- 이탈리아 화가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의 1610년 작‘아벨을 살해하는 카인’. 신이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이자 카인이 질투심에서 동생을 죽인 구약성경의 내용을 묘사했다. 핑커 교수는 과거에 폭력적인 살인이 횡행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반문할 수 있다. 1·2차 세계대전이나 홀로코스트, 문화대혁명 같은 20세기 참사들은? 2차대전 때만 5500만명, 문화대혁명 때 4000만명, 소련 스탈린 치하에서 2000만명이 숨지지 않았나? 핑커 교수는 일종의 '착시 효과'라 말한다. 전체 인구 대비 비율로 따져보면 과거가 훨씬 더 처참했다는 것. 2차대전만 해도 사망자 수로 보면 사상 최다이지만, 인구 비율로 보면 지난 1200년간 9위에 불과하다. 오히려 사상 최악의 사건은 8세기 중국 '안녹산의 난'(당의 멸망을 초래한 반란)이다. 당시 사망자 3600만명을 20세기 중반 인구로 환산하면 4억2900만명에 이른다.
문헌을 봐도 그렇다. 옛날에 전쟁·학살이 더 공공연했다. 호머 서사시에는 '자궁 속 아이까지 생명은 하나도 살려두지 말고' 같은 표현이 흔하다. 중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참수나 능지처참 같은 극형이 드물지 않았다. 코 베기는 흔한 복수 방식이었다. 셰익스피어 비극이나 그림 형제 동화에도 사지절단형이 등장한다.
◇국가·상업·계몽주의가 폭력 줄여
핑커 교수는 폭력이 줄어든 6대 전기(轉機)를 꼽는다. 첫째 약 5000년 전 정부의 탄생이다. 국가나 제국의 통치권이 확립되면서 부족 내 폭력은 감소했다. 팍스로마나(로마시대의 평화)가 대표적인 예다. 둘째, 문명화의 영향이다. 사법제도 도입과 상업 확대도 폭력 감소에 한몫했다. 사회는 제로섬 약탈 관계에서 서로 득이 되는 거래로 진화했다. 셋째, 계몽주의와 인본주의 혁명. 그전까지 정부·교회는 질서에 도전하는 자를 사지절단·화형 같은 끔찍한 벌로 응징했지만 18세기 들어 고문 폐지가 대세가 됐다. 넷째, 2차대전 이후 국가 간 전쟁이 격감했다. 그전까지 서유럽 국가들은 매년 2~3건 전쟁을 시작했지만 점차 국가들도 협상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와 무역·국제기구의 성장 덕분이다. 다섯째, 냉전 이후 각종 내전도 줄기 시작했다. 여섯째, '권리혁명'으로 일상적 폭력도 줄었다.
◇인간 본성이 착해졌다?
핑커 교수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바뀐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갓난아기들은 여전히 물어뜯고 발길질하고, 꼬마들은 싸움놀이를 좋아한다. 어른들도 격투기 구경을 통해 폭력성을 달랜다. 다만 그는 "인간은 폭력을 유발하는 여러 동기 외에도 타인과 공감하고 협력하고 자기 절제하는 성향을 동시에 갖고 있는 복합적 존재"라면서 "어떤 경향성이 우위에 나서느냐는 사회적 환경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장기적으로 폭력이 줄어든 것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바뀐 환경이 인간의 폭력성을 누르고 평화적 성향을 권장한 결과라는 것.
핑커 교수는 "앞으로 전쟁과는 작별이라는 식의 해석은 오해"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폭력이 감소했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상승할 수 있다. 다만 줄어든 원인을 알면 앞으로 평화를 키워가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핑커 교수 "유토피아적 신념이 집단 폭력 불러"]
- 핑커 교수
핑커 교수는 이메일 인터뷰를 청하자 "이번이 출간 후 101번째"라고 했다. 그의 홈페이지엔 네이처 같은 학술지를 비롯, 유력지 서평·인터뷰가 빼곡하다.
―폭력 감소를 주제로 삼은 이유는?
"인간 본성에 관한 책을 쓰면서 폭력 감소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걸 본 여러 분야 학자가 더 많은 증거를 보내왔다. 책을 써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20세기 폭력의 주범으로 이데올로기를 꼽았는데.
"일부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은 유토피아적 전망에서 나온다. 유토피아는 이상일 뿐이고 그걸 추구하는 과정의 폭력을 무제한 정당화한다. 또 그 확신은 흔히 어떤 사람들을 완전한 세상으로 가는 길의 장애물로 내몬다. 집단 폭력이 거기서 나온다."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상업이 비폭력에 기여했다고 봤다.
"자본가의 이윤 동기나 소비사회의 가치를 아무리 개탄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계급 혁명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덜 폭력적이다."
―폭력 제어 장치로서 민주주의를 말했는데.
"무정부주의와 독재 양극단을 피해 폭력을 최소화할 수 제도다.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껏 찾아낸 최선의 방안이다. 폭력을 줄이기 위해 자유 언론이나 법치주의 같은 제도적 장치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