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sr]그림,詩畵

조선시대의 화가 최북의 작품

이름없는풀뿌리 2015. 9. 22. 13:06

조선시대의 화가 최북의 작품

자존을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른 화가..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도 스스로 귀를 잘라버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안다.
그러나 그 보다 약 백 몇 십 년 앞선 시대의 스스로 눈을 찔러버린
우리나라의 화가 최 북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최 북(18세기)은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다.
산수를 잘 그렸다고 하여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리었고
호는 붓 한 자루에만 의지해 먹고살겠다는 호생관(毫生館)이었다.

그는 이름인 북(北)자를 둘로 쪼개 칠칠(七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칠칠이는 못난이, 바보를 일컫는 속어이다.
그는 아무 곳에도 매인 데가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그리고 싶지 않으면 죽어도
그리지 않았다.
화가에게 눈은 목숨과 같이 귀중한 것일 진데,
그는 스스로 눈을 찔러가면서도 기성의 권위와 강요에
굴하지 않는 기질을 보여주었다.

고흐가 자기 내면의 감정으로 귀를 잘랐다면 최 북이
눈을 찌른 것은 외적 권위와 강요에 대한 대항이었다.

한 세도가가 그에게 그림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 북은 그려주지 않았고 여러 번 강요해도
끝까지 응하지 않자 세도가는 강압적으로
신체적인 위협을 하려 들었다.

이에 최북이 불같이 화를 내며“남이
나를 강압해 해를 입히지는 못한다.
차라리 내가나를 위해하마”라며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버렸다. 그는 술을 마시며 전국을 주유했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구룡연(九龍淵)에 이르러
그 경치에 탄성을 터트리다가
“천하의 명인이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못 속에 뛰어 들기도 했다.

최 북은 전국 명승지에서 노닐며 경치에 취하고
술에 취했고 인정에 취했고 자기예술에 도취되어
숱한 명품을 남겼다.

그는 욕심이 없으면서도 광기의 기질이 있었다.
예술가는 당당한 자유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글.. 광주서예협회장

 

표훈사도(表訓寺圖) 금강산의 표훈사와 그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내듯 뚜렷하게 넓은 폭으로 
전개하여 묘사한 작품이다. 
일종의 평원산수법(平遠山水法)에 의해 내산과 외산을 
거의 동일선상에서 묘사하고 있어, 
이것은 마치 산으로 들어갈수록 멀리 있는 높은 산들이 
오히려 낮게 보이는 시각의 착각 현상을 그대로 나타낸 작품이다.
족자 종이에 수묵 담채 38.5*57.5cm 한국 개인 소장 

서치홍포

맹우도(猛牛圖)
힘차게 고개를 위로 쳐들고 물을 건너는 황소와 
그 위에 채찍을 두 손으로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몸을 꾸부린 목동으로 전체를 채운 간결한 구도의 그림이다.
물결의 무늬나 짐승의 털을 그리는데 있어 사실적 
기법의 의도가 보이나 소털 하나 하나의 올을 매우 굵게 
그려 사실감이 많이 감소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 그림은 소의 힘찬 운동감이나, 
두 눈 사이가 아주 멀어서 대단히 해학적(諧謔的)으로 
보이는 목동의 얼굴 등 매우 재미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종이에 채색 24.2*32.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옥산수(草屋山水)
이 그림은 가운데 접힌 흔적으로 보아 화첩의 
한 장이었을 듯 비교적 작은 산수화이다. 
그림 왼쪽 위에는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제(題)가 있어, 그 구절대로 공산(空山)의 텅빈 
초옥(草屋)이 보이고 그 옆에 선 
두 그루의 나무가 근경을 채우고 있다. 
그림 가운데 얕은 산봉우리가 보일락 말락 엷은 먹으로 그려져 있고, 
왼쪽으로는 약간 강한 묵점으로 숲이 울창한 계곡이 암시되었다. 
나무 가지들도 실제의 모습과는 아랑곳없다는 듯 제멋대로 뻗었다. 
일반적 화법을 무시한 이 모든 점이 작가의 기이한 성격과 
높은 예술적 감각을 잘 나타내 준다.
종이에 수묵 담채 31.*36.1cm 서울 개인 소장
조어산수(釣魚山水) 최북은 여러 분야의 소재에 두루 능하였으며 전래된 작품도 적지 않다. 비교적 섬세하게 그린 실경산수는 당시의 화풍을 대변하며, 사의적(寫意的)인 산수는 활달한 필치로 두드러진 개성이 보인다. 조어산수는 광생(狂生)이라고도 불리었던 최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듯 대담하고 거친 필치, 빠른 속도로 그린 간일한 구성, 담청 황색의 대조적인 설채(設彩) 등 중국에 있어서도 양주팔괴(揚州八怪)에 비견되는 그림이다. 화원임에도 불구하고 문인화에 방불한 격조와 의취가 담긴 수작(秀作)을 남긴 최북은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인(藝人)의 긍지를 지니고 그림에 임했던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족자 종이에 담채 66.3*42.9cm 서울 개인 소장 출처/문학의 향기/2005년/2월/ 22일/고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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