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and Pipe
December 1888 - May 1889
앙토낭 아르토가 말한 "귀를 싸매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 Gogh)
<태양(太陽)과 해바라기에의 정염(情念)의 화가 고흐(1853~1891)>
일본에서 1만엔에 경매 예정이었던 작품이 뒤늦게 네덜란드 출신의 불운했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미공개 진품인 것이 확인.
일본의 신와(新和) 예술경매사는 중년의 농부 여인을 그린 유화 작품이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으로부터 진품임을 확인받았다고
2003년 2월 7일 밝혔답니다.
현재 가치는 약 300만엔(3,0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이 팔렸다는 이야기에서 격세지감이....
* 고갱과의 빈번한 성격적 충돌에 의하여 결정적인 우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그 격분에 못이겨 자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린 귀의 비극이
1888년 크리스마스 때 일어났고,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1889년 1월 7일 퇴원을 한 고흐는 그 무렵 2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모두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다.
또 한 점의 자화상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고,
빨간 바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들라크로아나 바그너나 베를리오즈의 마음속에도 광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라고
고흐 자신은 말하고 있다.
그 비극에 대하여 많은 의학자나 평론가, 학자들이 연구하였으나,
과로에 의한 신경 과민, 환청,피해 망상 등 여러 가지 정신 병리학적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차츰 진정을 회복하여 명석한 자기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어 갔다.
http://www.youth21.com/rs/rs030021.htm에서 구한 자료이나
지금 이 사이트는 없어졌음.
귀에서 외부의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이명'이라고하는데 대부분의 이명은 내이의 와우 즉,
달팽이관 안의 유모세포가 손상을 입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인데,
외부에서 지나치게 큰 소리 즉, 총성과 같은 굉음을 들었을 때나
아미노글리코사아드 계열의
항생제(streptomycin, neomycin, kanamycin, gentamycin등)의 장기 복용
으로 인한 약물 부작용,
메니에르병 등에 의한 증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 고흐는 '메니에르병'에 의한 이명이라고 하는데
내이에 소리를 전달하는데 매개체 역할을 하는 림프액이
비정상적으로 과다하게 흘러 환청처럼 여러 주파수의 이명이
외부에서 느껴질 정도로 심하게 나다보니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귀를 잘라냈다고 하더군요.

*귀를 자른 自畵像

Self-Portrait, 1889
Musee d'Orsay, Paris
Don McLean이 부른 '빈센트'도 고흐를 모델로 삼았다죠?
-
[참고] 고흐·고갱…두 거장 고민이 담긴 ‘아를의 여인’ (2002.02.03)
고갱의 작품 ‘밤의 카페’에는 왼손을 턱에 괸 여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고흐의 유화 ‘아를의 여인’ 속 여인도 왼손을 턱에 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헤어스타일, 옷차림, 길쭉한 콧날까지 모두 똑같다.
같은 사람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고갱이 불러온 마담 지누라는 매춘부를 모델 삼아
같은 시각, 같은 아틀리에에서 그렸기 때문.
1888년 11월초, 프랑스 남부 아를시에서 고흐가 세들어 살던 ‘노란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고갱은 모델의 오른쪽 얼굴이 잘보이는 문앞에 앉았고,
고흐는 반대로 모델의 왼편 얼굴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그렸던 것.
고갱과 고흐―.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두 작가가
1888년 10월말부터 12월까지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의 우정과 정열,
그리고 반목과 갈등을 작품으로 볼 수 있는 ‘반 고흐와 고갱’전이
2~6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미술관에서 열린다.
지난해말~올해 초 미국 시카고에서 69만명이 관람한 전시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온 것.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 최근호는
‘두 거장을 위한 한 장의 캔버스천’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이 전시의 출품작을 지상 비교 전시, 두 거장의 차이점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소개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888년 2월 먼저 아를에 정착,
남불의 눈부신 햇살에 반한 고흐가 고갱을 불러
가로 6m, 세로 4.5m짜리 작은 아틀리에를 공동사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는 인상주의 거장 모네의 작품이 1000프랑,
타히티를 다녀와 명성을 얻은 고갱 그림이 250~300프랑 정도에 팔리고
고흐의 작품은 찾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가난했지만 마흔살 고갱과 다섯살 아래 고흐의 동업은 화기애애하게 시작됐다.
고흐는 고갱을 위해 안락의자를 준비했고,
고갱은 주방용기를 사왔다.
두 작가는 볕이 좋을 때는 시냇가로 나가 서로 등을 맞대고 풍경을 그리기도 했고
궂은 날엔 아틀리에에서 모델을 놓고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사온 20m짜리 싸구려 캔버스천 한 장을 잘라 나눠 쓰기도 했다.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두 작가는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흉내내기도 했다.
그 결과 고갱의 ‘가난한 여인들’과
고흐의 ‘붉은 포도나무’ 속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허리를 숙인 자세도 똑같고,
‘아를의 여인들’이란 작품 속 두 여인의 표정과 차림새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손모양까지 흡사하다.
물론 고흐는 다소 밝게, 고갱은 어둡게 배경을 처리하는 등 화풍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두 거장은 함께 지내기는 너무 개성이 강했고, 달랐다.
고흐는 말이 많았고, 고갱은 과묵했다.
고흐의 그림 속도는 고갱의 2배였다.
무엇보다 그림에 대한 인식차는 극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였다.
고갱은 “보이는 것만 그리지 말고, 생각과 상상도 함께 그려야 한다”고 했지만,
고흐는 반대했다.
아틀리에 안에서 똑같은 모델을 놓고 그려도 고갱은 배경을 카페 풍경으로 바꿔놓지만,
고흐는 있는 그대로 그리는 식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고흐가 왼쪽 귀를 자르는 발작으로 이어졌고,
고갱이 12월에 파리로 떠나버림으로써 두 거장의 동거는 2개월만에 끝났다.
파리마치는 “그들이 함께 지낸 기간은 두 달에 불과했지만 미술사를 바꿔놓았다”고 적었다.
이 전시에는 두 작가의 작품과 함께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도 함께 전시돼
미술사의 전설이 된 두 사람의 면모를 보여준다.
( 김한수기자 hansu@chosun.com )
- 두 사람 동성 연애자로 알려져 있죠?
1890년에 씌여진 편지랍니다.
고흐의 그림과 설명은 여러 곳에서 모은 것이니
관계 있으신 분들은 넓으신 아량을 베푸시길....
친애하는 친구 고갱에게....
또 다시 편지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하고
아울러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
매일 자네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네.
지난 번 파리에서는 사흘만 머물렀네.
파리의 소란스러움 등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서둘러 시골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지.
하지만 자네에게는 들렀어야 했는데…
그리고 내가 자네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그린
<아를의 여인>
초상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반가웠다네.
나는 종교적일 정도로 자네의 스케치에 충실했다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색채라는 매개를 통하여 중간 색조와 스케치
스타일을 자유롭게 해석해 보려고 했네.
자네가 내 그림을 좋아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함께 수개월 동안
작업하면서 아를 사람들의 드문 특성을 합성해 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나는 그 작업으로 인해 한 달 동안이나 병을 앓았다네.
그러나 자네는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일세.
그리고 우리처럼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일세.
이곳에 있는 닥터 가셰라는 사람은 한두번 머뭇거리더니
모든 것을 수긍하면서
"단순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말하더군.
사물을 강조하기 위해서 에칭 작업을 하려고 한다네.
그리고 나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손대지 않겠네.
그 방법은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할 수가 있는 방법이네.
자네도 올리브 나무를 보았겠지?
지금 나는 닥터 가셰의 초상화 한 점을 그렸는데
그 그림에서 우리 시대의 좌절감을 표현하고자 했다네.
자네가 그린 <올리브 정원의 예수 그리스도>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자네의 그러한 느낌을 완벽하게 포착하더군.
최근까지도 나는 별과 실편백나무를 그렸다네.
광체 없는 달이 떠 있는 밤하늘,
대지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위로 겨우 얼굴을 내민
가느다란 초생달, 유난히 광채를 발하는 별 하나,
자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짙은 바다빛 하늘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떠 있는 구름은
부드러운 붉은 빛과 초록빛을 발하고 있다네.
길에는 백마 한 마리가 노란 수레를 끌며 길을 재촉하고
두 사람이 뒤늦은 산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네.
매우 낭만적이면서도 무척이나 프로방스적인 풍경이라네.
어쩌면 이 풍경과 다른 풍경 그리고 소재들,
프로방스 지역에 대한 회상을 에칭으로 새겨 둘 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나서 내가 공들여 습작했던 모든 것을 정리해서
자네에게 보여 줄 생각이네.
자네가 파리에 도착해서 조금은 어리둥절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네.
나는 아직 자네의 그림을 보지 못했으니
며칠 이내로 내게 보내 주기 바라네.
자네가 하얀과 함께 브레타뉴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네.
자네가 허락한다면 한 달 동안 나도 그곳에 가서
바다 풍경 한 두점 그리고 싶고
무엇보다도 자네를 다시 만나고 하얀과도 친해지고 싶다네.
그리고 우리가 함께 그곳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일세.
나는 밀밭을 그려 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제대로 스케치할 수가 없다네.
겨우 청록색 줄기, 리본처럼 가느다란 잎사귀, 먼지로 인해
꽃망울이 생기를 잃고 노란색으로 변해 가고 있는 밀이삭을 그렸네.
밀밭 그림을 그린 다음에는 인물화 몇 점을 그려 보고 싶은데
배경은 무척 생생하면서도 침착한 느낌을 주어야 할 것일세.
산들바람 속에서 잔잔하게 흔들리는 이삭을 연상시켜 주며
전체를 흔들리는 이삭을 연상시켜 주며 전체를
같은 초록색조로 채색한다는 것인데 그 작업은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일세.
고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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