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sr]그림,詩畵

고흐와 고갱

이름없는풀뿌리 2015. 9. 22. 13:37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and Pipe
December 1888 - May 1889
앙토낭 아르토가 말한 "귀를 싸매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 Gogh)

      <태양(太陽)과 해바라기에의 정염(情念)의 화가 고흐(1853~1891)>
      일본에서 1만엔에 경매 예정이었던 작품이 뒤늦게 네덜란드 출신의 불운했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미공개 진품인 것이 확인.
      일본의 신와(新和) 예술경매사는 중년의 농부 여인을 그린 유화 작품이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으로부터 진품임을 확인받았다고
      2003년 2월 7일 밝혔답니다.
      현재 가치는 약 300만엔(3,0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이 팔렸다는 이야기에서 격세지감이....

      * 고갱과의 빈번한 성격적 충돌에 의하여 결정적인 우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그 격분에 못이겨 자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린 귀의 비극이
      1888년 크리스마스 때 일어났고,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1889년 1월 7일 퇴원을 한 고흐는 그 무렵 2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모두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다.
      또 한 점의 자화상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고,
      빨간 바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들라크로아나 바그너나 베를리오즈의 마음속에도 광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라고
      고흐 자신은 말하고 있다.
      그 비극에 대하여 많은 의학자나 평론가, 학자들이 연구하였으나,
      과로에 의한 신경 과민, 환청,피해 망상 등 여러 가지 정신 병리학적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차츰 진정을 회복하여 명석한 자기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어 갔다.

      http://www.youth21.com/rs/rs030021.htm에서 구한 자료이나
      지금 이 사이트는 없어졌음.

      '이명'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답니다.
      귀에서 외부의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이명'이라고하는데 대부분의 이명은 내이의 와우 즉,
      달팽이관 안의 유모세포가 손상을 입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인데,
      외부에서 지나치게 큰 소리 즉, 총성과 같은 굉음을 들었을 때나
      아미노글리코사아드 계열의
      항생제(streptomycin, neomycin, kanamycin, gentamycin등)의 장기 복용
      으로 인한 약물 부작용,
      메니에르병 등에 의한 증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 고흐는 '메니에르병'에 의한 이명이라고 하는데
      내이에 소리를 전달하는데 매개체 역할을 하는 림프액이
      비정상적으로 과다하게 흘러 환청처럼 여러 주파수의 이명이
      외부에서 느껴질 정도로 심하게 나다보니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귀를 잘라냈다고 하더군요.




    *귀를 자른 自畵像


    Self-Portrait, 1889
    Musee d'Orsay, Paris

    Don McLean이 부른 '빈센트'도 고흐를 모델로 삼았다죠?


      [참고] 고흐·고갱…두 거장 고민이 담긴 ‘아를의 여인’ (2002.02.03) 고갱의 작품 ‘밤의 카페’에는 왼손을 턱에 괸 여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고흐의 유화 ‘아를의 여인’ 속 여인도 왼손을 턱에 괴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헤어스타일, 옷차림, 길쭉한 콧날까지 모두 똑같다. 같은 사람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고갱이 불러온 마담 지누라는 매춘부를 모델 삼아 같은 시각, 같은 아틀리에에서 그렸기 때문. 1888년 11월초, 프랑스 남부 아를시에서 고흐가 세들어 살던 ‘노란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고갱은 모델의 오른쪽 얼굴이 잘보이는 문앞에 앉았고, 고흐는 반대로 모델의 왼편 얼굴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그렸던 것. 고갱과 고흐―.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두 작가가 1888년 10월말부터 12월까지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의 우정과 정열, 그리고 반목과 갈등을 작품으로 볼 수 있는 ‘반 고흐와 고갱’전이 2~6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미술관에서 열린다. 지난해말~올해 초 미국 시카고에서 69만명이 관람한 전시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온 것.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 최근호는 ‘두 거장을 위한 한 장의 캔버스천’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이 전시의 출품작을 지상 비교 전시, 두 거장의 차이점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소개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888년 2월 먼저 아를에 정착, 남불의 눈부신 햇살에 반한 고흐가 고갱을 불러 가로 6m, 세로 4.5m짜리 작은 아틀리에를 공동사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는 인상주의 거장 모네의 작품이 1000프랑, 타히티를 다녀와 명성을 얻은 고갱 그림이 250~300프랑 정도에 팔리고 고흐의 작품은 찾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가난했지만 마흔살 고갱과 다섯살 아래 고흐의 동업은 화기애애하게 시작됐다. 고흐는 고갱을 위해 안락의자를 준비했고, 고갱은 주방용기를 사왔다. 두 작가는 볕이 좋을 때는 시냇가로 나가 서로 등을 맞대고 풍경을 그리기도 했고 궂은 날엔 아틀리에에서 모델을 놓고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사온 20m짜리 싸구려 캔버스천 한 장을 잘라 나눠 쓰기도 했다.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두 작가는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흉내내기도 했다. 그 결과 고갱의 ‘가난한 여인들’과 고흐의 ‘붉은 포도나무’ 속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허리를 숙인 자세도 똑같고, ‘아를의 여인들’이란 작품 속 두 여인의 표정과 차림새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손모양까지 흡사하다. 물론 고흐는 다소 밝게, 고갱은 어둡게 배경을 처리하는 등 화풍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두 거장은 함께 지내기는 너무 개성이 강했고, 달랐다. 고흐는 말이 많았고, 고갱은 과묵했다. 고흐의 그림 속도는 고갱의 2배였다. 무엇보다 그림에 대한 인식차는 극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였다. 고갱은 “보이는 것만 그리지 말고, 생각과 상상도 함께 그려야 한다”고 했지만, 고흐는 반대했다. 아틀리에 안에서 똑같은 모델을 놓고 그려도 고갱은 배경을 카페 풍경으로 바꿔놓지만, 고흐는 있는 그대로 그리는 식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고흐가 왼쪽 귀를 자르는 발작으로 이어졌고, 고갱이 12월에 파리로 떠나버림으로써 두 거장의 동거는 2개월만에 끝났다. 파리마치는 “그들이 함께 지낸 기간은 두 달에 불과했지만 미술사를 바꿔놓았다”고 적었다. 이 전시에는 두 작가의 작품과 함께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도 함께 전시돼 미술사의 전설이 된 두 사람의 면모를 보여준다. ( 김한수기자 hansu@chosun.com )
          두 사람 동성 연애자로 알려져 있죠?

          1890년에 씌여진 편지랍니다.

          고흐의 그림과 설명은 여러 곳에서 모은 것이니
          관계 있으신 분들은 넓으신 아량을 베푸시길....


          친애하는 친구 고갱에게....



          또 다시 편지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하고
          아울러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
          매일 자네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네.
          지난 번 파리에서는 사흘만 머물렀네.



          파리의 소란스러움 등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서둘러 시골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지.
          하지만 자네에게는 들렀어야 했는데…

          그리고 내가 자네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그린
          <아를의 여인>
          초상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반가웠다네.



          나는 종교적일 정도로 자네의 스케치에 충실했다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색채라는 매개를 통하여 중간 색조와 스케치
          스타일을 자유롭게 해석해 보려고 했네.
          자네가 내 그림을 좋아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함께 수개월 동안
          작업하면서 아를 사람들의 드문 특성을 합성해 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나는 그 작업으로 인해 한 달 동안이나 병을 앓았다네.
          그러나 자네는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일세.
          그리고 우리처럼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일세.



          이곳에 있는 닥터 가셰라는 사람은 한두번 머뭇거리더니
          모든 것을 수긍하면서
          "단순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말하더군.
          사물을 강조하기 위해서 에칭 작업을 하려고 한다네.
          그리고 나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손대지 않겠네.
          그 방법은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할 수가 있는 방법이네.
          자네도 올리브 나무를 보았겠지?
          지금 나는 닥터 가셰의 초상화 한 점을 그렸는데
          그 그림에서 우리 시대의 좌절감을 표현하고자 했다네.




          자네가 그린 <올리브 정원의 예수 그리스도>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자네의 그러한 느낌을 완벽하게 포착하더군.
          최근까지도 나는 별과 실편백나무를 그렸다네.
          광체 없는 달이 떠 있는 밤하늘,
          대지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위로 겨우 얼굴을 내민
          가느다란 초생달, 유난히 광채를 발하는 별 하나,
          자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짙은 바다빛 하늘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떠 있는 구름은
          부드러운 붉은 빛과 초록빛을 발하고 있다네.
          길에는 백마 한 마리가 노란 수레를 끌며 길을 재촉하고
          두 사람이 뒤늦은 산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네.
          매우 낭만적이면서도 무척이나 프로방스적인 풍경이라네.
          어쩌면 이 풍경과 다른 풍경 그리고 소재들,
          프로방스 지역에 대한 회상을 에칭으로 새겨 둘 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나서 내가 공들여 습작했던 모든 것을 정리해서
          자네에게 보여 줄 생각이네.

          로제도 문제의 그 <아를 주민>의 두상을 좋아했다하더군.
          자네가 파리에 도착해서 조금은 어리둥절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네.



          나는 아직 자네의 그림을 보지 못했으니
          며칠 이내로 내게 보내 주기 바라네.




          자네가 하얀과 함께 브레타뉴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네.
          자네가 허락한다면 한 달 동안 나도 그곳에 가서
          바다 풍경 한 두점 그리고 싶고
          무엇보다도 자네를 다시 만나고 하얀과도 친해지고 싶다네.
          그리고 우리가 함께 그곳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일세.
          나는 밀밭을 그려 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제대로 스케치할 수가 없다네.
          겨우 청록색 줄기, 리본처럼 가느다란 잎사귀, 먼지로 인해
          꽃망울이 생기를 잃고 노란색으로 변해 가고 있는 밀이삭을 그렸네.
          밀밭 그림을 그린 다음에는 인물화 몇 점을 그려 보고 싶은데
          배경은 무척 생생하면서도 침착한 느낌을 주어야 할 것일세.
          산들바람 속에서 잔잔하게 흔들리는 이삭을 연상시켜 주며
          전체를 흔들리는 이삭을 연상시켜 주며 전체를
          같은 초록색조로 채색한다는 것인데 그 작업은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일세.


        
        




        고흐 이야기


        
        
        어린시절....
        1853년 3월 30일, 빈센트는 가난한 네덜란드 시골의
        개신교 마음이 순한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와
        외향적인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투스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안나는 1년 전 같은 날 빈센트 윌렘이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고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헤이그 시절은 그의 삶에서 가장 밝은 시절이었습니다.
        구필 화랑은 네덜란드 왕국의 후원을 얻을 정도로 번창했고,
        그 화랑은 돈 많고 지위 높은 고급 손님을 끌 기 위해 멋지게 장식되었다 합니다.
        그로서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낸 부르주아 분위기였습니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빈센트는 몹시 행복했고
        그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후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전근가게 된 빈센트는 첫사랑의 고배를 들게되는데
        외로운 이국 땅에서 감성이 풍부한 청년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착각에 빠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상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 을 약속한 상태였고
        크게 낙담한 빈센트는 결국 영국을 떠나고 맙니다.
        
        네덜란드시절....
        이 시기 동안 그는 두텁고 어두운 황토색과 고동색을 사용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개인 날을 보기가 드물고, 대낮에도 새벽녘같이 어둑어둑했던 드렌테의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색깔이었을 것입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써
        경건한 노동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농부들의 손을 보면 그들이 흘린 땀방울을 읽을 수 있지.
        거친 손은 직접 일구어낸 감자를 식탁에 올리는 정당한 노동의 표시야."
        춥고 어두운 흙 속에서 수확을 여물어 내는 농부들의 표정에서
        고흐가 오랫동안 그리고 싶어했던 삶의 진실이 자연스레 묻어났을 것입니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그린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으로 '성서가 있는 정물화가'입니다.
        왜 성서를 그렸는지,
        그리고 에밀졸라의 책을 왜 같이 그렸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당시 고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그림이 목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려진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목사인 아버지에 대한 추도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옆에 놓여진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져 있는 것을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그의 기독교와의 단절과도 연결되는데
        어떤 이유로 기독교와의 단절을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그의 정신적 고통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파리시절...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빈센트는
        "프랑스의 공기는 나의 생각을 맑게 해주어 작업을 더없이 훌륭하고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준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나자 그는 파링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면서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남프랑스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반감을 느끼면서도 그나마 너그럽게 함께 있어 주고 인도해 준 사람들은
        세잔, 고갱, 쇠라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빈센트는 갑자기 파리에 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파리를 떠났습니다.
        16시간 동안 기차여행을 하고
        빈센트는 1888년 2월 20일 하얗게 눈이 내린 아를에 도착합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서른 네 살이었고, 화가에 입문한지 6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아를시절....
        나는-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자식을 갖고 싶은 생각도 안하게 되었다만,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했건만,
        그래도 서른 다섯 살이나 돼 가지고 이 꼴로 있는 것이 때로는 우울하다.
        그래서 그림하고의 악연이 지겨워진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한다."
        1888년 아를로 간 그는 여관과 식당을 겸한 "레스토랑 카렐"에 머물렀습니다.
        진실한 관계를 여성에게서 추구했다가 좌절한 그는 육체적인 관계만을 맺었으나,
        차차 라셸 이라는 조용한 창녀와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와 함께 삶을 나누었습니다.
        아를에서의 그림은 색채의 해방이 라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대담한 색으로 고양된 격렬함, 확고하고 분명하며 향상된 이미지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짙은 블랙 커리를 몇 잔이나 마시고
        몸으로 고통을 느 끼면서 그리는 가운데 황색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해가 뜨면 질 때까지 온종일 죽도록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독한 압셍트 를 마시고서 창녀를 찾거나
        집에 돌아와 테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1888년 10월 23일,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은 테오가 보내 주는 돈으 로 살았고 절약을 위해
        고갱이 요리를 했고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빈센트의 생활은 참으로 건전하고 질서가 잡히게 되어 건강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화를 내게되고,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 밤 11시반,
        아를의 창녀 촌 1번 집의 라셸은 빈센트에게 불려나가
        그로부터 무엇을 잘 맡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
        피범벅의 붕대를 머리에 두른 빈센트는 곧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신문지를 펼치자 잘린 귀가 나왔고 그녀는 바로 실신했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빈센트 가 사는 노란 집에 가보니
        그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곧 병 원에 수용되었고 2월 초, 
        그는 상당히 회복되었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지 못했습니다.
        시민들은 두려운 나머지 그를 병원에 수용시켜야 한다는 탄원서를 보냈고,
        빈센트는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1889년 5월 초, 아를 병원측은 빈센트를 생-레미 부근의 사립 요양원에 보냈습니다.
        생-레미 오베르시절....
        생-레미 시절은 참으로 평온한 시기였으나,
        미술사에서는 가장 "소용돌이 치는"광기의 작품으로
        해석되는 그림을 그런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프랑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닥터 레와 수간호사인 플레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테오의 요청으로 그를 위해 나란히 있는 방 두 개가 마련되었는데,
        하나는 화실로 사용할 방이었고,
        른 하나는 빈센트가 기거할 방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환청과 환각 증세가 이어지고
        그에 따른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발작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9월에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 두 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즈음 빈센트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되었습니다.
        11월, 빈센트는 제8회 살롱 전시회에 그의 작품을 몇 점 풀품해 달라는
        옥옥타브 마우스의 요청을 받기도 합니다.
        빈센트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1월 30일 그림 여섯 점을 보냅니다.
        그러나 12월 24일, 갑자기 심한 발작증세를 보이더니
        1주일 동안 발작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의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실리게 됩니다.
        닥터 페이롱은 빈센트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믿었지만,
        2월 22일 아를을 방문했다가 발작증세가 다시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한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4월 말 편지를 다시 쓸 정도로 회복된 빈센트는 테오에게
        "제발 오리에에게 내 그림에 대해서 더 이상 쓰지 말라고 부탁해라.
        나는 슬픔 때문에 너무나 상심해 그가 공개한 내용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나를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라고 편지를 씁니다.
        1890년 1월, 그의 그림이 브뤼셀에서 전시되었습니다.
        빈센트의 작품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비평가들은 빈센트의 강렬한 색채를 야만적일 정도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단 한 편이었지만 빈센트를 극도로 찬양하는 글이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에 실렸습니다.
        알베르 오리에의 글로 생전에 그에 대해 쓰여진 유일한 글이기도 했습니다.
        1890년 5월 17일 빈센트는 혼자서 파리로 떠났고
        그후 오베르로 간 빈센트는 그곳에서의 2달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가셰를 만납니다.
        빈 센트는 도착 이튿날부터 맹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최후의 비극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총상을 입고서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
        2층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웠다고 합니다.
        "곧 의사들이 불려 와서 치료를 했으나 그들은 모두 외과전문의가 아니었다.
        밤이되자 호흡 곤란이 격심해졌고 "이렇게 죽고 싶어"라고
        말한 형은 30분 뒤에 죽었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반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테오는 형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찾았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
        그후 테오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에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으나
        33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