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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첩' 부인의 치마에 쓴 다산의 글씨가 7억5000만원?

이름없는풀뿌리 2015. 9. 23. 17:38

[신문과 놀자!]부인의 치마에 쓴 다산의 글씨가 7억5000만원?

이광표기자

입력 2015-09-23 03:00:00 수정 2015-09-23 11:22:40

 
[이광표 기자의 문화재 이야기] 고미술품과 경매 

사람들이 종종 묻습니다. “고려청자는 얼마쯤 하나요?” 그럼 이렇게 대답합니다. “천차만별이지요. 수천만 원, 수억 원짜리도 있지만 골동품 파는 곳에 가면 50만 원, 100만 원짜리도 적지 않습니다. 보존 상태, 형태나 무늬, 색깔에 따라 차이가 많은 것이죠.” 사람들은 또 질문합니다. “그럼 한 점밖에 없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어떤가요?” 다시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건 부르는 게 값입니다.” 

① 정약용의 ‘하피첩’(보물 1683호·1810년) 가운데 일부. ‘하피첩’ 세 권은 최근 경매에서 7억5000만 원에 낙찰됐다. ②2006년 경매에서 16억2000만 원에 낙찰된 백자철화구름용무늬항아리(18세기). ③ ‘퇴우이선 생진적’(보물 585호)에 들어 있는 정선의 ‘계상정거도’(1746년). ‘퇴우이선생진적’은 2012년 경매에서 34억원에 낙찰됐다. ④ 간송 전형필이 1935년 일본인 골동상으로부터 2만 원에 구입한 청자상감구름학무늬매병(국보 68호·12세기). 당시 서울에서 가장 비싼 집 한 채가 1000∼1500원이었다.

 

퇴우 이선생 진적

 

퇴우 이선생 진적

 

퇴우 이선 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 ) 34억

보물 제585호. 1558년(명종 13)에 이루어진 이황의 「회암서절요서(晦菴書節要序)」 및 그 목록 초본이 외현손 홍유형(洪有炯)에게 입수되었고, 뒤에 홍유형의 사위 박자진(朴自振)에게로 전존(傳存)되었다.박자진은 1674년(현종 15)과 1682년(숙종 8) 두 차례에 걸쳐 수원(水原)의 무봉산(舞鳳山)에 숨어 살던 송시열에게 가서 제발(題跋)을 받았다.

박자진의 외손 정만수(鄭萬遂)가 이를 입수하여 1746년(영조 22) 아버지 정선(鄭敾)의 그림을 받고 자신이 지어(識語: 표지어)를 쓴 뒤 같은 해에 정선의 친우인 이병연(李秉淵)의 시를 받았다. 그 뒤 1872년(고종 9) 임헌회(任憲晦)가 입수하여 자신의 후지(後識)를 첨가하였고, 다시 김용진(金容鎭)의 제서(題書)가 첨가됨으로써 현재의 첩이 이루어졌다.

이황의 「회암서절요서」에는 그의 유명한 편저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선집(選輯) 의도가 나타나 있는데, 1558년 도산(陶山)에 은거할 때의 소작이다. 송시열의 제발은 2편이 실렸는데, 첫 제발은 1674년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수원 무봉산 중에 은복할 때 쓴 것으로 박자진이 이 초고를 입수하게 된 경위와 자신의 소감을 적고 있다. 두 번째 제발은 1682년에 쓴 것으로 역시 무봉산 중에서 그 초고를 다시 보게 된 소감을 적고 있다.

정선의 4폭 묵화(墨畵)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일대의 전경을 배경으로 그 안에 서안(書案)을 앞에 놓고 학문을 연마하는 이황을 주제로 그린 「계상정거(溪上靜居)」, 무봉산 일대를 배경으로 초정(草亭)에서 대좌한 송시열과 박자진을 소재로 그린 「무봉산중」, 박자진의 제택(第宅) 전경을 소재로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 정선 자신의 제택 전경을 소재로 그린 「인곡정사(仁谷精舍)」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만수의 지어에는 「회암서절요서」 초본의 입수 경위와 저간의 내력, 정선이 묵화를 그린 사실들이 적혀 있고, 이병연의 제시는 이황·송시열의 글과 정선의 그림에 대해 칠언절구로 읊은 것이다. 임헌회의 후지에는 이 첩을 입수한 사실과 자신의 소감이 적혀 있으며, 김용진의 제서는 독특한 필체로 쓴 10자인데 지보(至寶)임을 감탄하고 보장(保藏)을 다짐한 내용이다.

이 첩을 구성하는 개개의 문편(文篇)과 화폭들은 역사상의 명유(名儒), 명화가, 명시인의 자작자필의 것이라는 점에서 각각 독자적인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그리고 「회암서절요서」 초본이 전존되는 과정에서 이 첩이 형성되었는데, 그 형성 과정 또한 우리 선조들의 정신적인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 7억5000만 원에 팔린 다산의 글씨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피帖)’이 화제입니다. 지난주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하피첩 세 권이 7억5000만 원에 팔렸기 때문입니다.  

하피첩은 정약용이 부인의 치마를 오려 거기 글을 적어 책자 형식으로 만든 서첩입니다. 그 사연이 절절하지요.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지 10년째 되던 1810년, 경기 남양주에 있던 부인 홍씨가 5폭짜리 빛바랜 치마를 보내왔습니다. 그 치마는 부인이 시집 올 때 입었던 치마였습니다. 정약용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정약용은 치마를 오려 두 아들을 위해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어 서첩으로 만들어 보냈습니다. 그게 바로 하피첩입니다.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으로, 부인이 보낸 붉은 치마를 가리킵니다. 3년 뒤 정약용은 남은 치마폭을 오려 딸을 위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매조도(梅鳥圖)’라는 작품입니다. 

 

하피첩에 대한 경매회사의 낙찰 예상가는 4억∼5억 원이었습니다. 7억5000만 원에 팔렸으니 예상가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지요. 그래서 누군가는 “괜찮은 가격”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다산의 작품인데,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 고미술품과 경매 

경매에서 미술품을 사고파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최근 국내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린 작품은 박수근의 유화 ‘빨래터’(1950년대)입니다. 2007년 경매에서 45억2000만 원에 낙찰되었지요. 이것이 국내 미술품 경매(근현대미술 고미술 포함) 최고가 신기록입니다. 

그럼, 문화재에 해당하는 고미술품만 들여다볼까요? 고미술 경매가 세간의 관심을 끈 중요한 계기는 2001년 4월이었습니다. 서울옥션 경매에서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1755년작 ‘노송영지도(老松靈芝圖)’가 7억 원에 낙찰되었던 겁니다. 당시로서는 근현대미술을 포함해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였지요.  

이 기록은 2004년 12월 상감청자에 의해 깨졌습니다. 서울옥션 경매에서 청자 상감매화대나무새무늬 매병이 10억9000만 원에 낙찰된 것이지요. 2006년 2월엔 백자 철화구름용무늬 항아리가 16억2000만 원에 낙찰되었어요. 이어 2010년 3월 옥션단 경매에서 19세기 화집 ‘와유첩(臥遊帖)’이 17억1000만 원에, 2011년 3월엔 마이아트옥션 경매에서 조선시대 왕실 도자기인 백자 청화구름용무늬 항아리가 18억 원에 낙찰되면서 국내 고미술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어요. 

○ 34억 원짜리 정선 그림 

2012년 9월엔 놀라운 기록이 세워졌습니다. K옥션 경매에서 보물 585호인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이 34억 원에 낙찰된 것이지요. 퇴우이선생진적은 26억 원부터 5000만 원 단위로 호가(呼價)를 시작해 치열한 경합 끝에 34억 원에 팔렸습니다.

이 서첩은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의 친필 글씨와 겸재 정선의 그림 4편이 실려 있는 서화첩이랍니다. ‘퇴우’는 퇴계와 우암을 일컫는 말이지요. 서화첩에는 정선이 1746년에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들어 있습니다. 이황이 기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양성하던 안동 도산서당의 모습을 정선이 1746년에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 어디선가 본 듯하지 않나요? 바로 1000원짜리 지폐 뒷면에 들어간 그림입니다. 34억 원짜리 그림을 매일매일 지갑 속에 넣고 다닌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 전형필이 문화재를 수집한 까닭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68호 청자상감구름학무늬매병(12세기)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고려청자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작품이지요.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 헌신했던 간송 전형필이 1935년 일본인 골동상에게 2만 원을 주고 구입한 것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제일 좋은 기와집 한 채가 1000∼1500원 정도였다고 하니, 그 가격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지금 돈으로 환산해 보면 수백억 원에 이를 겁니다.

 

 이 청자가 실제로 거래된다면 수백억 원이 아니라 천억 원대에 육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청자가 거래될 일은 없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액수가 아니라 거기에 담겨 있는 의미와 가치입니다.

따라서 하피첩의 낙찰가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피첩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점에서 이번에 하피첩을 구입한 국립민속박물관에 큰 기대를 걸어봅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