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낙서장(잡)

세상과 `인연`을 접은 금아 피천득

이름없는풀뿌리 2015. 10. 1. 12:26
세상과 `인연`을 접은 금아 피천득 [조인스]

"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억울한 것도 없고 딱히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일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그것도 참 염치없는 짓이겠지만…."

금아 피천득이 살아생전 남긴 말. 자신의 사후를 예견했던 것일까.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을"=금아 피천득(97)이 25일 오후 11시 40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금아는 지난주부터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 25일 오후부터 상태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피천득은 일상의 평범한 소재를 서정적이고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풀어낸 한국 수필문학계의 대표 작가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인연 中)

대표작 '인연'은 자신이 열일곱 되던 해 하숙집 딸인 아사코와의 세 번의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한 내용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대표작 '인연' 등 16편의 수필작품이 수록된 '피천득 수필집'이 처음으로 일본에서 출간됐을 때 그는 "살아있다면 지금 84세인데…. 샌프란시스코에는 일본인 이민자가 많으니 아마도 '인연'이 일어로 나왔다는 소식 정도는 듣겠지요"라는 말로 그때를 회상했었다.

하늘나라의 아이=소설가 최인호씨는 금아의 죽음을 두고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소년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는 딸 서영씨가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을 목욕시키고 머리를 묶어주고 옷을 갈아 입히는 등 애지중지 여겼다. 또 자신이 '마지막 애인'이라 불렀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의 사진을 가까이 두기도 해 "아직 소년이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자신의 발표작 가운데 어린이가 읽기 적당한 시와 수필 등을 엮어 '어린 벗에게'(2002년)를 내기도 했다.

금아의 딸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서영이는 내 책상 위에 '아빠 몸조심'이라고 먹글씨로 예쁘게 써 붙였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아빠 몸조심'이 '아빠 마음조심'으로 바뀌었다. 어떤 여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랬다는 것이다. (중략) 아무려나 서영이는 나의 방파제이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으며, 나의 마음 속에 안정과 평화를 지킬 수 있다."('서영이' 중)

그가 사랑한 딸 서영씨와 남편 로먼 재키(MIT 물리학 교수)씨 사이에서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 역시 금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5월 29일 태어나 같은 날 떠나=1910년 5월 29일생인 금아는 2007년 5월 29일에 장례를 치르게 됐다. 자신의 98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태어난 날 세상을 접는' 인연이 됐다. 금아는 일곱 살 때 부친을, 열살 때 모친을 여의었다. 이후 초등학교 4학년 때 춘원 이광수를 만났고 '거문고 소년'이라는 뜻의 아호 '금아'를 그에게 주었다. 이광수는 금아에게 보다 폭넓은 문화를 배워 오라며 중국 유학을 권했다. 유학 후 금아는 이광수와 3년간 함께 살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에서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안창호가 순국했을 때 금아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일본 제국의 눈이 그를 주시했기 때문. 후에 금아는 이 일로 평생 마음의 고통을 씻지 못했다고 한다.

금아는 37년 중국의 후장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다. 46년부터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69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었다. 75년부터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활동했었다.

유족으로 부인 임진호(89) 여사와 세영(재미 사업가), 수영(울산의대 신생아과 교수), 딸 서영(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9일 오전 7시. 02-3010-2631.

 

 

세상과 인연 접은 피천득 선생 [중앙일보]
장미가 좋아 … 5월에 피고 지다

금아의 영정은 장미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생전의 금아가 아꼈던 꽃이었고, 그래서 금아는 ‘장미’란 수필도 썼다. 5월의 장미가 금아를 보내고 있다. 신인섭 기자

25일 자정이 임박한 시각.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97세로 최고령 현역 문인이었던 금아는 그렇게, 유언 한 마디 없이 이승과의 인연을 접었다.

이어 유족들이 장례 일정을 논의했다. 마침 주말이 끼어있어 3일장은 어려웠고, 자연스레 5일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29일 오전 7시에 발인을 하고, 3년 전에 미리 봐둔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을 장지로 결정했다.

장례 일정을 마무리하고 난 뒤,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5월 29일은 금아의 97번째 생일이었다. "20분만 늦게 세상을 놓으셨어도…". 유족 중 한 명이 말했다. 금아의 사망시간은 25일 오후 11시 40분이었다.

금아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금아다웠다. 생전의 금아는 자신의 생일에 지인 몇몇을 불러 점심을 대접했다. 이로써 금아는 97번째 생일에도 지인을 불러 밥 한 그릇 먹인 셈이 됐다.

금아는 열두 달 중에 5월을 가장 좋아했다. 하여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5월을 부르기도 했다(수필 '오월'). 금아는 가장 좋아하는 5월에 나와 5월에 들어갔다. 금아는 또 장미를 좋아했다. '장미 한 송이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고 끝을 맺는 '장미'란 수필을 쓴 적도 있다. 그래서였을 게다. 금아의 영정은 울긋불긋한 장미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5월 장미에 파묻혀 웃는 금아 역시 화사해 보였다.

금아에겐 세 자녀가 있다. 장남 세영(67).차남 수영(63).딸 서영(60)씨다. 아흔이 넘은 금아가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들 세 남매도 '아버지'보다는 '아빠'가 훨씬 편했다. 수영씨는 "우리는 아버지라는 호칭보다 아빠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금아는 서영씨를 유독 아꼈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금아는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땐 허한 마음 채워 보려고 인형 난영이를 끔찍이 아꼈다. 서영씨가 등장하는 수필도 여러 편이다. 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서영씨는 그러나 선친 영정 앞에서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심정을 묻자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고 겨우 답했을 뿐, 모든 취재를 거절했다. 현재 캐나다에서 사는 장남 세영씨는 70년대에 유명했던 DJ였다. 그러나 그 역시 인터뷰를 거절했다.

금아의 아내 임진호(91)씨는 치매 때문에 남편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금아를 "나에게 참 잘해주시는 분"이라고 말한 적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남편의 소식을 아내는 아직 알지 못한다.

금아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아산병원 영안실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의 조화로 가득했다. 문인 중에선 박완서.조정래씨를 비롯해 김우창.황동규.성찬경씨 등 금아의 서울대 제자들이 조문했다. 그 중 유독 오래 울고 간 여학생이 있었다. 생전의 금아에게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한 대학생이었다. '마리아'라고 이름을 밝힌 학생은 금아에게 마지막으로 읽어준 책이 '내가 사랑하는 시'였다고 전했다. 금아가 번역한 시집이다.

26일 고 피천득 선생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아산병원 영안실. 선생의 유족들이 조문객을 맞고 있다. 왼쪽부터 장남 세영(67).차남 수영(63).딸 서영(60)씨. 오른쪽 사진은 금아가 딸 서영씨를 대신해 날마다 돌봤던 인형 난영이. 신인섭 기자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
shinis@joongang.co.kr>


73년부터 수필 연재 … 3대에 걸친 샘터사와 '인연'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의식이 또렷하셨어요. 손에 힘도 있으셨고요. 할 말이 있다고 하시기에 '댁에서 와인 한 잔 주시면서 말씀하시면 안 되겠어요?'라고 물었지요. 고개를 끄덕이셨죠. 그게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샘터사 김성구(46) 사장은 금아의 임종을 지켰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금아는 입을 열지 못했다.

금아와 샘터사의 인연은 깊다. 금아는 샘터사 창립자인 김재순(80) 전 국회의장의 서울대 은사다. 금아는 1973년 10월호부터 월간지 '샘터'에서 수필을 연재했다. 김 의장은 명절마다 은사에게 세배를 드렸고, 아들 성구 씨를 꼭 데리고 다녔다. 세월이 흘러 김 사장은 자신의 두 아들(19.16세)과 함께 금아를 찾았다.

"어릴 적 선생님께 세배하는 걸 좋아했어요. 세배 드리면 양말 같은 선물을 주셨거든요."

90년대 중반 가업을 이어받은 김 사장은 수필집 '인연'의 출간을 금아에게 청했다. 그 전까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금아 수필집은 한 해에 500부쯤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연은 인연을 찾아가는 법. 샘터에서 96년 출간된 '인연'은 현재까지 40만 부 넘게 팔렸다.

"저는 가업을 이어받을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서 농 삼아 '제가 샘터로 돌아오면 수필집 주셔야 합니다'라고 했던 것이지요. 한데 선생님이 다음날 바로 주시더라고요."

김 사장은 십수 년 전부터 금아와 목욕탕을 함께 다녔다.

김 의장은 고령에도 아침 저녁으로 금아의 빈소를 들르고, 김 사장은 장례 실무를 총괄하고 있다. 생전의 금아는 자신이 세상을 뜨면 반포동 자택에 있는 서재를 샘터 사옥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샘터는 파주출판단지에 세울 새 사옥에 '피천득의 방'을 마련할 참이다.
손민호 기자


■ 금아 피천득 선생은
.1910년 5월 29일: 서울 출생
.1919년: 경성 제일고보 입학
.1929년: 중국 상하이 후장대 입학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별곡'등 발표
.1945년: 경성대 예과 교수(~46년)
.1946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74년)
.1947년: 시집 '서정시집(抒情詩集)'(상호출판사) 출간
.1969년: 시집 '산호와 진주'(일조각) 출간
.1976년: 수필집 '수필'(범우사) 출간
.1980년: 시선집 '금아시선(琴兒詩選)'(일조각) 출간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1993년: 시집 '생명'(동학사) 출간
.1997년: '금아 피천득 문학 전집'(전 5권, 샘터) 출간
.2002년: '어린 벗에게'(여백) 출간
.2007년 5월 25일: 타계
.5월 29일: 발인,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영면

 

 

인연 원문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 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이'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연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하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졌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로 무렵, 나는 아사코 신발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꼬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 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아시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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