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으로 내려온 별들, 화순 운주사
雲住寺 부처님
김대근
가을엔
어찌들 살아가는 지요.
그나마 남아있던
夕陽도 꼬리를 감추는
가을 저녁에는
무엇으로 한숨을
쉬시는지요.
올망 졸망 모여앉은 부처님네들
달도 밝은 이 밤에
무슨 얘기들로
그리 밤을
새우는 지요.
중생들 살림이야
털어보고 뒤집어봐도 한 망태,
중장터로
마실 온 부처님 빈
바랑보담은
조금 낫습지요.
참새도
보금자리트는 이 가을
雲住寺 골짜기
千佛님들 어찌들 살아 가는지요.
(詩集'내마음의 빨간불' 중에서...)
운주사는 늘 내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그런 절이다.
어쩌면 수많은 전생들의 파노라마중에서 한 컷트정도의 장면에서
야트마하고
볼품없는 산골짜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운주사는 그 단어에서도 나의 심장의
박동을 높이고 지남철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마음이
가게 된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듯이 나 역시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아뭏던지간에 끌리는 것은 어쩔수
없다.
운주사와의 첫 인연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뜻이 깊다.
와이프인 무소유와 같은 단체에서 자주 눈을 맞추다가 기울어진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부산에서는 멀고도 먼길인 화순까지의 여행을 떠났던 곳이기도 하다.
그 덕이였는지 운주사의 부처님이 잘 보살펴주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
헤헤~호호~ 거리며 잘 살고 있다.
그후 두번째는 아이를 셋이나 데리고 갔을때다.
세번째는 무소유와 단둘이 마흔이 넘은 중년의 몸으로 다시 찾았다.
이번에 운주사의 방문은 따지자면 네번째인데 이번에는 혼자서 발걸음을 했다.
운주사는 야트마한 산과 역시나 자그마한 계곡으로 이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좌우로 보이는 산과 계곡이 탑과
불상으로 이루어진
절이다. 흔히 아는 통도사나 해인사..아니면 동네에서 만나는 여느 절처럼 화려한
단청과 육중한 현판이 짓누르는
산문의 위엄도 없었지만 지금은 엄연한 사찰의
위엄을 갖추느라고 가람을 제법 꾸미기는 했다.
몇년 되었지만 세번재 방문때까지만 해도 이 탑과 불상들의 골짜기는 논밭으로
경작되고 있어서 가을이면 누렇게 벼이삭이 물결치는 그
가운데 떡하니 불상이
자리하고 있기도 했다.
나도 처음 방문했을때의 그 경이로움을 깊이 기억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주사에 들어서자 마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고 한다.
골짜기와 산등성이에 탑들이 솟아 있고 불상들은 바위 절벽 아래에 차가운 겨울바람을
피해 햇볕을 쪼이는 동네 아이들마냥 올망
졸망 모여있으니 마치 부처님 나라에 소풍을
나온듯 한 느낌을 받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내가 생각하는 운주사의 특징은 하나같이 불상들이 못나고 투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면 우리
외할배..외할매..할매..(나는 친 할아버지를 뵙지
못해서 오로지 사진으로의 영상만 기억창고에 있다)..옆집의 마음좋은 할배의
얼굴들이
여름날 뭉게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아마도 이곳의 불상들은 우리나라의 많은 불상들 중에서 가장 우리적이고 민중적인
심성을 간직한 불상일 것이다.
운주사가 보여 주는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판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집단적인 매스게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찰들이 자연과
가능하면 잘 어울어진 균형미의 소산
이라면 운주사는 산의 높이에 비해 너무 높은 탑이라던가 일부러 바위를 깍아서 까지
고집스럽게 그
위치가 안되는 것이 그렇다. 하나 하나가 보여주는 아름다움 보다는
똑같거나 비슷한 형상들이 여기저기 반복적으로 배치되어서 더욱 감동을
준다.
또 하나 운주사의 아름다움은 이국적이다. 우리가 일반적인 사찰들..특히나 경주에서
만나는 탑들과는 다른 이국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형상이 오가리를 얹어 놓은 모양, 호떡을 얹어 놓은 모양,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올린
모양 등 전혀 뜻밖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치 형식에 얽매이지 말라는 진리를 가르켜 주듯이 말이다.
불상들 역시도 조각 기법이 전문가의 손을 빌렸다기 보다는 마치 바람처럼 지나가던
이름모를 선승이 심심파적으로 새겨놓은 것처럼 수수하기
그지 없다.
그저 있어야만 할 것들..예를 들면 눈, 코, 입, 귀등 만을 단순화시켜 간단히 조각하
였으며 별다른 기교를 가미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상을 보고 석가모니불인지 비로자나불인지 아미타불인지를 구분할때는 손의
모양인 수인으로 구분을 하는데 이곳의 불상들은
수인도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그
야말로 제멋데로 자유스럽고 기발하게 처리되어 있다.
사실 운주사는 전설의 절이다. 누가 언제 무었때문에 만들었는지에 대한 사적기나 기와
조각에 새겨진 옛이름도 없는
곳이다.
이름이 운주사인 이유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곳이 배모양이라는 것 하나 뿐이다.
이런 운주사를 한눈에 조망하기 위해서는 대웅전 뒷길을 따라 산마루턱에 오르는 것이
가장 좋다. 이곳에는 그 숱한 세월동안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공사바위'라
불리어 오는 큰 바윗돌이 있다.
이곳에 오르면 운주사 일대의 경관이 한눈에 잡히고 계곡에 흩어져 있는 탑들과 불상도
일사불란하게 살필 수 있다. 공사바위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운주사 천불천탑이 조성될
당시 이 대공사를 담당했던 감독관이 총지휘를 했던 곳으로 전해 오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바위에는 커다란 홈이 패어 있어 감독관이 앉아서 지휘했던
흔적을 보이고 있다.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자면 지금 우리가 짐작할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불상과 탑들을
목적에 따라 배치하였다는 이야기이고
하나의 탑과 불상이 모두 위치적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반증한다고 본다.
불심만으로 조성하였다면 편한곳에 아무렇게나 세우면 될일이지만
전체가 보이는 이곳에서
누군가가 공사를 지휘햇다면 당연히 불탑과 불상의 위치가 중요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화순, 나주, 장흥 3군이 교차되는 지점으로 능선을 타고 다니던 옛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의 옛지명은 일명 중장터였다. 스님들의 장터라는 이야기다.
물산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이니 스님들끼리 절에서 소용될 물건들을 서로 교환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고 위치상 이 지역이 나주의
불회사, 운흥사, 죽림사, 장흥의
보림사, 광주의 증심사, 원효사, 영암의 도갑사, 화순의 쌍봉사, 강진의 무위사 등
전라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사찰들의 중요한 교통거점이였음을 알려 준다.
운주사는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전설만을 간직한 채
창건에서 폐사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를 말해 주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어느 시기 누가 무엇 때문에 천불천탑을 조성하였는지 아직도 상상만 무성할
뿐이다.
운주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16세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되어
있는 데 "천불산은 능성현 서쪽 25리 지경에 있다.
운주사는 천불산 속에 있는데
절의 좌우쪽 허리에 석불석탑이 각기 1천개씩 있으며 또 석실이 있어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1632년에 간행된 『능주목지』와 1923년에 간행된 『나주읍지』에 이와
비슷한 기록이
실려 있다.
운주사의 명칭 또한 운주사(雲住寺)와 운주사(運舟寺)로 뒤섞여 불리었는데 1984년
전남대 박물관팀의 1차 발굴조사때
'운주사 환은천조(雲住寺 丸恩天造)' '홍치8년(
弘治八年)'이라는 명문의 암막새기와가 출토되어 본래의 명칭이 구름이 머무는
곳
이라는 뜻의 운주사(雲住寺)였음이 밝혀졌다.
배를 운전한다는 의미의 운주사(運舟寺)는 후대 설화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홍치8년(弘治八年)의 명문은 1496년에 중창된 적이 있음을 알려 주는 것으로
운주사가 조선시대 전까지만 해도 번창했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운주사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때문이다.
'장길산'은 조선조 숙종년간의 의적 장길산에 관한
이야기를 당시의 미륵신앙사건과
연결시켜 전개한 역사소설인데 이곳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민중해방의 용화세계가 열린다는 운주사 설화를 삽입시켜
대미를 장식하였다.
운주사의 창건설화에 제일 비중있게 등장하는 이가 도선국사이다.
도선국사와의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도선국사가 보기에 우리나라 지형이 행주형국(行舟形局)인데 동서가 편편하지 못하고
태백산맥이 있어 동쪽으로 기울어져 국토의
정기가 일본으로 새어 나가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위험이 있다고 보아 국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곳에 천불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도선은 신라말기의 승려로서 영암 구림에서 출생하여 화엄사에서 중이 되었으며
동리산 혜철선사 문하에서 득도하여 희양현
백계산(지금의 광양)의 옥룡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도선국사가 일생동안 공부하며 지냈던 옥룡사지에 대하여 궁금한 분은 다음의
포스트를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듯....
풍수지리의 효시, 광양 옥룡사지를
찾아..
http://blog.daum.net/roadtour/2155630 <---- 클릭
그는 일찍이 고려 태조의 탄생과 건국을 예언하였으며 산천 비보사상, 풍수지리설,
음양도참설 등을 토대로 국가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후대에 선각국사란
시호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살펴본것과 같이 도선국사는 신라말과 고려초에 활동하던 인물이다.
운주사의 불상과 불탑은 고려초기에 창건되었으나
불상과 불탑은 고려말양식으로
도선국사와는 시대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결국 운주사는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세워진 이후에 만들어 졌고
후대에 내려오면서
그만큼 자리가 좋다는 뜻으로 도선국사의 이름을 차용하였다는게 맞는 말이다.
또 하나 운주사를 세간에 크게 알린 것은 대한항공의 광고였다.
어느날 광고에 등장한 누워있는 와불을 보고 사람들은 과연 이곳이 어딜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 한동안 잡지의 여기저기를 장식하게
된 운주사의 불상은
결국 운주사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와불...누워있는 부처라는 뜻인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운주사의 와불은 사실 와불이
라고 할수 없다. 본디 와불은 부처님이
돌아기시기 전의 모습을 기리기 위하여 임종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말한다.
대개의 와불은 우리 사람들이 비스듬히 팔벼게를 하고 누워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 운주사의 와불은 입상을 만들려고 조성했다가 세우지 못한 형상이다.
실제로 하부쪽면을 잘보면 조성한후 본 돌에서
떼어내기위해 홈을 팠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와불이 누워 있는 산마루에서 절 입구 쪽을 향하여 산길을 내려가다 보면 듬성듬성한
소나무 숲에 일곱 개의 바윗돌이 놓여 있는데
주민들 사이에서는 칠성바위라고
불리우고 있다.
내력이나 까닭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옛날에 이 바윗돌을 깨뜨려
주춧돌로 사용하려 했던 사람이 날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전설과 함께 신령스런 돌로
여겨 오고 있다.
칠성이란 북극성을 축으로 하여 그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하는 북두칠성
별자리를 말한다. 우리네 조상들은 자연 숭배사상의
하나로 각 별자리마다 신성을
부여하고 그 신들이 별자리신이 우리 인간의 운명과 행불행을 주관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중에서도 북쪽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면서도 일년 열두달 사시사철 그 위치가
변화가 없는 북극성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으며 반면에 북극성을 중심으로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북두칠성을 숭배하였다.
우리들의 민중음악으로 전해내려와 지금도 그 애절함으로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의
심금을 울리는 회심곡(回心曲)이 있다.
~~이 세상 나온 사람 뉘 덕으로 나왔었나 / 불보살님 은덕으로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타고 칠성님께 명을 빌어 / 제석님께 복을 타고 석가여래 제도하사
인생일신 탄생하니 한 두 살에 철을 몰라
~~~
~~~칠성님께 발원하여 부처님께 공양한들 / 어느 곳 부처님이 감동을 하실소냐~~
이와 같이 우리네 조상들의 삶속에서 북두칠성이야 말로 우리 인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요 우리가 기대고 의지해야만 할 지표였던
것이다.
사실 운주사를 누가 무었때문에라는 명제에 대한 해답 또한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천민과 노비들의 해방구였다는 사람들도 있고 혹자는
미륵신앙의
중심사찰이였다는 사람도 있다.
또는 불감에 등을 맞대고 있는 불상을 근거로 밀교계통의 절이라는 사람도 있다.
누구처럼 소설에서 역성혁명의 근거지로 삼고 같은 패들의 용기를 위해서 라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일본으로 정기가 흘러들어갈까
두려운 마음에 조성했다거나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나온 하나의 주장에 주목을 한다.
KBS 제1TV가 역사스페셜(담당PD 우종택)을 통해 운주사의 천불천탑이
별자리를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밤하늘의 별자리와 운주사는 어떤 연관성을 갖는다는 믿음과 그를 뒷받침하는
칠성신앙이 새로운 가설의 줄거리다.
운주사의
불상과 탑들은 보기에는 무질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질서’를 가지고
조성됐다는 것이다.
역사스페셜은 박종철(성암천문대장)씨가 준비중인 논문 ‘운주사 석탑배치의 천문학적
고찰’을 근거로 이 같은 가설을 제시했다.
4년 전부터 운주사의 탑과 불상 배치에 별자리를 접목시키는 연구를 해 왔던 박씨는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천문지도에서 일등성
별들을 연결해 운주사 탑배치와
비교했더니 탑의 배치와 별자리가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역사스페셜은 일등성 별을 연결한 천체도와 운주사 탑을 연결한 배치도를
영상그래픽으로 만들어 비교하는 등 박씨의
연구내용을 뒷받침했다.
밤하늘의 별자리 가운데 일등성들을 연결한 삼각형의 구도가 운주사 가람의 탑배치도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운주사의 탑들이 세우기 어려운 능선이나 비탈에 조성된 점은 별자리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것이 박씨의 주장이다.
또 북두칠성을 표현한 칠성바위에서 정북 방향에 와불이 위치하고 있는 점도 천체의
질서를 본뜬 것이란 주장이다.
세계적으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1등성의 별자리표...
운주사의 불상과 탑들의 배치도.....
닮아도 너무나 닮아 있는 배치가 눈에 확~ 뜨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의 가설이라는 것이다.
단 하나도 분명하고 깨끗하게 운주사는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운주사라는 이름을 들었을때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은 보물지도의 수수게끼
퍼즐의
해답 때문은 아니였을까?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부는 날이다.
중장터로 마실 나온 코가 뭉텅그러지고.. 팔이 하나없고... 다리도 어디론가
가버린...
부처님들이 올망 졸망 모여서 바람이나 피하고들 계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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