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정치·시담록

육관 도사의 터" 육관도사의 風水·明堂이야기

이름없는풀뿌리 2017. 4. 17. 19:55

"육관 도사의 터" 육관도사의 風水·明堂이야기| 한민족 역사와 정신문화

등대빛 | 조회 362 |추천 0 | 2016.03.19. 05:56                   




'육관 도사의 터(상)'

손석우 지음

차례

책머리에

글을 엮으면서


제1부

육관약전

우리나라의 산세와 명혈들

전주 김씨 문장공 김태서 묘의 발복과 김일성의 운명

오대산 명당터의 비밀과 어사 박문수

동작동 국립묘지의 냉혈에 묻혀 고생하는 국모 육영수

왕비가 나는 묘터, 백담사행 법수

남원의 풍수

서울의 풍수와 한민족의 장래


제2부

탈신공 개천명

지구의 신비

2대 천자가 날 자리

형산 옥벼루와 천자의 등극

자미원의 비밀과 남연군 묘의 도굴 사건

귀룡동 복매의 발복으로 왕이 되다

 


육관약전

삼국지가 그의 인생행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행생들에게 작업을 시키는 데도 언제나 삼국지식으로 지휘감독하였다.


'은사님께서는 우리들을 데리고 소풍을 갈 때에도 특수한 통솔방법을 행사하셨습니다. 70여 명의 학생들을 3등분하여 전군 중군 후군으로 나눈 뒤 전군과 후군 앞뒤에 2명의 척후병을 배치하여 행렬 앞뒤의 변동사항을 즉각 중군으로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가령 전방(혹은 후방)에서 자동차가 온다고 가정하면 그것이 학생들의 행렬에 따른 입을 통하여 금방 중군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3. 6 25와 피난 생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4. 군인 생활과 삼국지

최지사의 환송사에 이어 모든 장정을 대표한 그의 답사가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도민 여러분의 뜨거운 환송에 깊은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배달민족은 국가에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언제나 신명을 바쳐서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신라의 화랑도가 그랬고 한말의 의병정신이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이런 위대한 호국정신을 이어 받은 우리들 일동은 신명을 바쳐서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육관은 자신의 군인생활은 그에게 많은 경험을 통하여 인생의 진미를 맛보게 하였고 넓은 세상을 헤쳐가는 동안 시야가 넓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5. 비정한 정치계

1957년 늦은 가을 육관은 약 5년간의 군인생활을 청산학고 순수한 민간인으로 돌아왔다.


... 그런 저런 이유로 도움을 청하려고 친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으나 하나같이 면회사절이요, 문전박대였다. 그는 비로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이왕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명산에 가서 기도나 한번 정성껏 드려보자. 이렇게 결심한 육관이 단신으로 찾아간 곳이 오대산 적멸보궁이었다.  


6. 땅 밑이 훤히 보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죄 많은 중생을 굽어 살펴 주옵소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군대에 자원입대 하였고 국민을 위한 대의자가 되고저 선거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에 실패하여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 미련한 중생의 앞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목숨을 걸고 하는 이 기도를 제발 성취하도록 명훈 가피 하옵소서.'


이렇게 5일째를 넘어서자 육관의 기도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시작하면 그 다음날까지 꼿꼿이 선 체로 축원이 계속되었다.


이런 기도가 8일째 되던 날 그는 최후의 결심을 굳게 하고 소원을 성취하지 못할 경우 이 자리에 선 채로 저 세상으로 떠날지언정 결단코 물러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이때 비로소 무념, 무상, 무아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이때의 기도를 통하여 깨달은 것은 우주의 만물이 그 뿌리가 하나요 그 체도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저 높은 산이 바로 내 몸이요, 저 넓은 바다가 곧 내 가슴이라는 것이다.


여태까지의 온갖 차별세계가 오직 하나로 보였다. 모든 것이 평등하게 되었으며 생과 사가 마치 번갯불 같고 아지랑이 같았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대에서 수도하는 원주스님이 그의 전신을 주무르고 있는게 아닌가?


'나도 기도를 많이 한 편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광경도 허다하게 보아왔지만 거사님처럼 생명을 내걸고 기도에 열중하는 사람은 평생 처음 보았습니다. 새벽녘에 이상한 꿈을 꾸어서 혹시나 하고 올라 왔는데 만약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 날뻔 하였습니다. 조금 전의 거사님의 몸은 완전히 송장으로 변하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금년 봄에 육관 도사와 단둘이서 조용하게 만난 자리에서 왜 조부모님을 좀더 큰자리로 모시지 않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대답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대는 남사고 선생의 행적을 알고 있는가? 명종시대의 큰 예언가였던 선생은 천문 복서 상법 뿐만 아니라, 특히 풍수 지리에는 도통한 명사라고 알려지지 않았던가? 지금까지도 격암유록이라는 비결이 성행할 정도이니 참으로 대단한 도인이였었지...


그러나 딱 한 가지 과도한 욕심때문에 9천 10장으로 끝내는 망하고 말았어... 사람이 너무 욕심이 강하면 망하는 법이지.'


 7. 풍수의 대도사

70년대 초 강남지구 개발이 한창이던 때에 D신문사에선ㄴ 지사들의 실력을 시험하는 묘안을 짜내었다. 그들은 육관에게 1호분, 2호분...이렇게 일련번호에 따라 그 묘의 현재상태가 어떠냐고 질문하였다. 이렇게 기록한 자료를 가지고 그 일대의 모든 분묘를 파헤칠 때에 실제 확인해 보니 100퍼센트 적중한 것이 육관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시험에서 대부분의 지사들은 백기의 묘소중 단 한 군데도 제대로 관평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경북도청 이전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만은 유독 지금의 도청자리인 산격동으로 옮겨 남향으로 건축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곳에 묘를 쓴다면 반드시 경상감사가 배출될 명당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리에 도청을 신축한다면 날마다 경북지사가 앉아 있을 것이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곳에 도청이 들어섰을 때 대구지방의 지기를 돋구어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국가 경영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사상에서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제일 많은 터를 잡아준 곳이 군대의 기지이다. 제1군, 2군, 3군, 사단본부의 자리도 대부분 그가 잡은 자리이다. 계룡산 신도안에 육군본부의 터를 잡아준 사람도 육관이었다.(계룡대). 그곳 일대는 원래 터가 너무 세어서 군대가 먼저 들어가 지신을 밟아 놓은 뒤에 다른 중요한 기관이 들어가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에서였다. 태조가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고 목재와 석재를 다듬다가 도중에 물러선 것도 그 터가 너무 세었기 때문이니 두 번 다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역대 지사들의 행적을 소상히 설명하면서 그들의 후손이 끊기고 대개가 빈곤하였으며 고희를 넘기도록 장수한 사람이 없었던 까닭은 백골 적악 때문이라고 거듭거듭 훈계하였다.

그의 서재에는 온갖 책으로 가득하고 책상 머리에는 다음의 글귀를 써붙여 놓고 있었다.


'욕심없는 것이 큰 부자요, 직책에 오르지 않음이 가장 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세와 명혈들


우리나라는 산의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산은 수려하고 단아하며, 천지간의 조화를 잘 갖춘 지구의 정기가 그 어느곳보다 충만해 있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국조 단군 할아버지 이래로 우리 배달민족은, 지구의 정기가 가장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 땅에서 살아왔다. 그러니 산은 우리의 어버지요 어머이였으며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산을 알지 못하는 것은 제 뿌리를 모르는 것이요, 스스로가 발 딛고 서 있는 삶의 터를 모르는 것이다.


 은 높고 신성하다. 인간이 쉬이 갈 수 없는 곳이요, 하늘의 신이 하강해서 살고 있는 곳이다. 적어도 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제천사상과 함께 산악숭배사상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민족신앙이 되었다. 신라 때는 삼신산(금강, 지리, 한라산)이 있었고, 고려 때는 지리, 삼각, 송악, 비백산 등을 사악신으로 했으며, 치악 죽령 주흘 금성 한라 오관 마니 감악 백두산 등에 제단을 만들고 나라의 제사를 지냈다. 조선에 와서는 오악(금강 묘향 지리 백두 삼각산), 오진(오대 구월 속리 장백 백악산)에서 산제를 지냈으니 이러한 숭산사상은 곧 민족의 신앙이었던 것이다.


산이라고 하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물리학적 공간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높이가 얼마요 면적이 얼마며,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까지 걸쳐 있다는 식의 생각은 제 아버지의 키와 몸무게를 수치적으로 안다고 해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하는 생각과 똑같다. 현대의 지리학은 산의 일면만을 볼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과학은 인간과 우주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보는데 그친다.  


산의 정체와 그 조화는 신묘 무궁하다. 그러므로 산을 인식하는 방식은 형이상학적이고 경험과학적이며 종합적인 사고 체계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터를 잡은 풍수의 출발이다. 풍수는 산을 종합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결국은 인간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의 유서 깊은 인식체계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온통 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거대하게 굽이치는 산맥과 산맥사이의 조그만 땅에서 오밀조밀 모여 사는 것이 우리들이다. 우리는 그저 산의 커다란 품에 안겨 대대로 그 정기를 받고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주역을 보아도 이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주역 팔괘중 칠간산에 속하기 때문에 각 민족의 운세 가운데 산에 속하는 운세이다. 예를 들어 일건천, 이태택, 삼이화...등은 각각 중국, 미국, 독일 등을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하늘 물 불도 아닌 산의 운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무한히 뻗어나갈 잠재력을 지닌 총각(소남)의 운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간'이라 함은 만물이 시작하는 곳이자 끝맺는 곳이라는 뜻이다.


주역의 설명에 '물시어간하고 종어간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즉 우리나라에서 인류의 원래시족가 생기고 우리나라에서 최후의 마지막을 맺는다는 말인데, 이것은 세계적인 관심거리인지라 특히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고고학회 같은 데서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산은 지구의 정기가 화생하는 곳이다.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지구의 기운이 온 나라에 용출하는 곳이 바로 우리의 땅이다. 산 중에서도 백두산은 바로 지구의 정수리이다. 백두산은 모든 산의 조종이며 지구의 숨통이니 천지의 물은 땅의 생기의 정화수이다. 


'그대들은 '삼수갑산'을 아는가?'


'갑산'이란 '최고의 산'이라는 뜻이다. 성리학의 태두인 중국의 대학자 주자는 '지구의 지붕인 곤륜산(에베레스트산)으로 부터 세 갈래의 지맥이 뻗어나갔는데, 그중 간룡으로 불린 북쪽 가지가 천산산맥을 타고 몽고를 가로 질러 백두산에 이르러 결을 맺게 되었다.'고 말했다. 곤륜산의 이 북쪽 가지가 이 세상의 천하에 비길 데 없는 최고의 산이다. '갑산'이란 그런 뜻이다. 또한 이 갑산에서 발원한 물은 압록 두만 송화강으로 흘러 가는데, 이를 두고 삼수라 하니, 삼수갑산이란 백두산의 위용과 주변의 지세를 칭송하는 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세는 바로 이 백두산(갑산)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은 바로 이 지구의 숨통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봉우리 봉우리, 골짜기 골짜기마다 빼어난 모습은 우리민족의 정기 그 자체이다. 무수한 외적의 침입에도 굽히지 않고 불굴의 용기로 헤쳐나온 것은 모두가 백두산의 위용과 영기 때문이요 그 신묘한 감응때문이니, 백두산은 그마큼 영산이요 명산이다.


그 백두산이 아래로 가지를 뻗어 삼천리를 내려가니, 흘러가는 용마다 명당 명혈을 이루지 않을 수 없도다. 이여송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무리 우리의 명산을 파괴했어도 민족의 정기는 여전히 올올용용하게 살아 있으며, 이제부터는 찬란히 꽃 필것이다. 그리하여 육관은 각 산맥의 흐름을 설명하고 그곳에 있는 명당터에 대한 흥미있고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대간룡은 굽이쳐 흘러오다가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의 천불산에 하나의 명혈을 이루었는데, 이곳의 주인공은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이다. 함경산맥이 뻗어내린 이곳의 산형은 목이요, 좌향은 '해좌사향', 형국은 '선인등단'이니 이 묘는 곧 덕릉으로 불리운다. 문장 무장은 물론 왕기가 있는 유수한 명혈이다.


이곳의 왕기는 간룡의 흐름을 따라 안변 칠령을 마디로 남행 5백리하여 양주에 이르고, 동북방향으로 틀어 도봉으로 솟은 다음, 다시 용이 꿈틀거려 백운대 만경대로 재차 치솟아 남으로 뻗어 북악 아래의 양택 대혈에 와서 멈춘다. 첨불산에 묻힌 이안사의 묘의 발복으로 자손의 발복이 한양 땅의 경복궁으로 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조선왕조 5백년의 뿌리가 된 명혈중의 명혈이다.


명천 고을의 뒤산에는 칠보산을 수국으로 한 또 하나의 명혈이 있으니 이용익이 그 할아버지의 체백을 몰래 암장하여 발복한 명혈이다. 그는 기묘한 계책으로 이 묘를 쓰고 10년 후 서울에서 물장수의 천민으로 일하고 있었다. 때는 마침 고종이 임오군란으로 장호원에 피신해 있는 민비에게 정세의 역전을 알리고 상경의 희소식을 전할 '조선천지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각'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 건각으로 천민 이용익이 뽑혔고 이 희소식을 전한 당사자는 그후 민비의 총애를 받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마침내 전국의 광산권을 독점하면서 황실의 경비를 조달하니 일명 금독대감이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고려대학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인물로서 함경산맥에 묻힌 조부의 발복으로 서울에 와서 이름을 날린 풍운아였다.


'그러면 묘향산맥이 지나는 평양은 어떠합니까? 또한 평안도에는 여러 명혈이 있다고 하던데 그곳은 어디인지요?'


평안도의 최고 대혈은 압록강병의 국경도시인 강계에 있다. 이 혈은 중국의 옛 책에 전해오는 천시원국으로 불리우는데, 천하의 4대 명혈 중의 하나이다.


남북한의 자유왕래가 가능해지면 육관은 쉽사리 찾을 수 있겠으나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명혈인 자미원국은 이미 찾아 놓았다. 서산 땅에 있는 이 지구상의 최대 음택 명당인 자미원은 세계통일의 대제왕이 날 자리요, 다스리는 인구가 72억이다. 지금이 쓸 시기로서, 그 전에는 혹 알았어도 건드리기만 하면 벼락을 맞는 자리다. 강계의 천시원은 둘째가는 대명당으로 일제시대 때만 해도 무수한 풍수지사들이 엄청나게 넓은 강계땅을 평생토록 헤매어 다니곤 했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요즈음 중국사람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모택동의 선조 묘가 강계에 있다는 점이다. 혈 이름이 지주혈이다. 뭇산들이 첩첩으로 에워싼 형상이 마치 거미를 한 가운데 놓은 거미줄 모양이니 높디나 높은 곳에 있다. 모택동은 그 지주혈의 발복으로 천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평양은 이른바 국도의 터다. 묘향산맥이 흘러오다 낮게 엎드리어 평야를 이루고 대동강이 크게 흘러 바다로 빠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만한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도읍지로 자주 거론되었던 곳이다. 평양은 풍수의 형국으로 보면 행주형이니 떠나는 배의 형상이고,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곧 항해하는 배 안의 선원들과 같다. 그래서 평양에는 예로부터 우물을 파지 않는 풍습이 있는 것이다.


우물을 파면 곧 배의 구멍을 뚫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찌 되겠는가. 이 믿음은 평양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용수를 대동강에서 취하게 하였고, 그래서 봉이 김선달 같은 대동강 물장수 이야기도 전해지는 것이다.


또 읍형이 행주형이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이를 진압해야만 했다. 커다란 쇠닻을 대동강 연광정 밑 용소에 묻어놓았는데, 풍수상으로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 1923년에 일본 사람들이 수중탐사를 한 바있다. 탐사팀은 정말로 커다란 쇠닻을 발견하고 그것을 끌어올렸는데 그리고 나자 그해 평양이 생긴 이래 미증유의 폭우가 쏟아져 평야시 전체가 침수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쇠닻을 걷어올렸기 때문이라고 확신하였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그들은 다시 침정의 대제를 지내고 쇠닻을 옛모습대로 돌려놓았다. 지금도 그대로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명나라의 태조인 주원장은


'짐의 조상님은 원래 조선 사람인고로 그 나라는 산천이 빼어나 큰 명당자리가 많다고 하니 조선땅으로 가서 잘 살펴 보도록 하라.' 이런 칙명을 받은 지사들은 삼천리 강산을 차례로 답산 하다가 마침내 이 오대산 보궁자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가 어떤 성지인데 감히 이곳에다 송장을 묻으려고 했으니 하늘이 진노 하시는 것도 당연하지.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셔놓은 이 자리에 묘를 쓰려고 했으니 벼락을 맞아 죽는 것도 마땅한 일이여...'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이 묻힌 김수로 왕릉은 백자천손의 명혈이다. 김해 김씨는 남북을 통틀어 1천만명을 육박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가문이다. 백두의 연맥이 한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숨가쁘게 달려와 멈추어 스러지는 곳, 그곳이 바로 김해의 분산(분성산)이요 그 서편 끝 자락 기슭에 유명한 구지봉이 있다.


김유신은 수로왕 12대 후손으로 금관가야 구해왕의 증손이며, 7요(일월화수목금토성)의 정기를 타고나서 등에 칠성 무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인물전은 청나라 태조인 누루하치에 대한 것이다. 그는 종성이 김씨인데, 이 사람이 바로 김해 김씨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운명

김일성의 본관은 전주이고 그 시조의 묘는 전주의 모악산에 있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다. 전주 김씨는 본래 경주 김씨다. 저널리스트 문명자씨. '김주석은 북한을 방문한 인사들에게 이씨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전주 이씨고 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완산 전씨인 것이 자랑스럽다. 나도 전주 모악산의 정기 한몸에 받고 태어났고 그쪽에서도 김씨가 높은데(당시 관2호인 김재순 국회의장을 말함) 어찌 통일이 안되겠느냐고 말하곤 했다는 거에요.'


문장공 김태서의 묘는 전라북도 완주군 모악산 도립공원 내에 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갖춰진 천하대명당이다.. 이 터를 보면 49년 동안 요지부동의 절대권력자가 나올 지기가 있다. 또한 김일성이 6.25 전후 까지 꼭 세번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꿈에 태서공이 나타나 구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태서공 할아버지를 모시는 김일성의 마음은 이후 각별했던 것이다.


육관은 예언한다. 김일성의 운명은 이미 그 시조 묘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 김일성 같은 큰 인물은 산천의 정기 없이는 생겨나지도 못한다. 터의 위력은 참으로 위대하고 신묘하고 무섭기까지 한다. 지령은 인걸이다.


오대산


동대 서대 남대 북대에다 중대 등 동서남북과 중앙에 각각 대가 있고 그곳마다 각각 절이 있다. 그래서 이 산을 오대산이라 한다.


'저기 보이는 저 높은 뒷산이 바로 이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이여.'


설화에 의하면 이조 영조때의 문신 박문수 어사가 이 적멸보궁터에 올라와 보고 크게 감탄하여 그로부터는 불교에 대한 비난을 중단했다고 한다.


'진실로 굉장한 자리다. 이런 대명당에다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셨으니 그 제자인 스님들이 산 좋고 물 맑은 좋은 곳에 위치한 화려하고 큰 집에서 놀고 먹는 것도 당연하지. 이 보궁자리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 불교의 운세는 영원무궁할 것이 틀림없어. 내가 몰라서 잘못 생각한 거야. 앞으로는 불교에 대한 비판을 중단할 거이여.'


국모 육영수


옛 결에 이르기를, 삼각산과 남산이 분할될 때 왕이 급사하리라 했는데, 육여사가 저격당한 그날은 마침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는 날이었으니, 한양의 주산(북악)과 안산(남산)의 지맥이 끊기자 왕비가 급사해버린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풍수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박정희를 대신하여 비명에 간 셈이다.


'이거 안되겠다. 여기는 악혈이다. 내 평생 백골에 적악하는 것을 피하는게 신조요 서원인데, 이럴 수없다. 이 자리에 들면 국모의 시신은 썩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 이자리는 음양의 교구가 안되는 자리이고 냉혈입니다. 냉혈이니 시신이 썩지 않고, 음양교구가 안되니 자손이 끊어집니다. 딸이라도 시집가서는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이 동작동이라는 터는 공작이 날개를 펴서 날아가는 모양인데, 이런 공작새의 형국에는 명당이 밑에 있지 위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는 포란의 자리도 아니고 그 훨씬 윗쪽이니 윗쪽은 나쁜 곳입니다.'


'절더러 바보라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백골적악을 안하기로 서원을 세운 사람입니다. 귀신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지사로서 첫째가는 금기사항입니다. 지금의 저 자리에 쓰면 반드시 영부인의 시신이 편치 못합니다. 그러니 제가 이 돈을 받으면, 아무리 저 자리가 나쁜 자리라고 강경하게 반대했어도 결국은 동참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니 돈 아니라 비록 천하를 준다 하더라도 그리는 못합니다.'


육관이 왜 삼경도인으로 불리웠던가?


사람들은 그의 초능력에 어찌하여 세 번씩이나 놀랐는가? 반말을 턱턱놓아서 하던 경호실 과장은 그때까지 미쳐 몰랐던 것이다. 그는 육관이 천신 산신 지신 화엄신장이며, 죽은 귀신에 으르기까지 영계의 뭇 신들과 얼마나 가깝게 교감하는지를 알수 없었던 것이다.


삼경이란 무엇인가?


땅에 흐르는 생기를 한 눈에 알아서 혈을 잡아냄이요.


풍수지리서를 전혀 읽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고서도 훤히 하는 것이요.


패철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불가사의 하리만치 방향을 정확하게 잡는 것이다.


여기에다 멀리에서도 명당을 감지하니, 그저 훈훈한 김만 올라오는 걸 느끼기만 해도 명당을 판별하는 초능력이 또한 첨가되니 사경도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육관은 웬만한 경우를 빼고는 손수 답산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육관에게는 수많은 풍수서들이 무용지물이요 오히려 조리정연해 보이는 듯한 복잡한 가르침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원래 패철은 주자의 이기설에 입각한 음양오행론의 이치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감각과 천리를 통달하는 심원한 배움이 있어야 한다. 육관이 명당에 가서 패철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육관의 도통함에는 귀신도 감복하여 그에게 절을 하곤한다. 묘자리를 볼 경우 육관은 절대로 시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바로 백골절악을 피하는 것이다. 흉지에서 길지로 묘자리를 옮겨준 사례는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그 묘택의 주인공은 그날 밤 육관도사의 잠자리에 어김없이 찾아든다.


정확하게 밤12시 10분에서 1시 사이에 의관을 곱게 차려 입은 귀신들은 육관의 잠자는 방 앞에 와서 큰 절을 올리고 간다. 예외인 적은 없다. 귀신들은 말한다.


'이렇게 좋은 집으로 저를 옮겨 주시니, 말 그대로 백골난망이옵니다. 그 공덕으로 부디 큰 복을 받으십시오.'


 인걸은 지령이요 동기는 감응인데, 그 어머니가 어둡고 찬 냉혈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으니 자손이 어떻게 복을 바랄 수있겠는가? 음양의 교구가 되지 않아 머지 않아 멸손할 것이니 유념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신은 생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생기는 따듯하고 따뜻하면 살은 빨리 부패하여 인체 생기의 정화인 뼈만 남는다. 그래야만 죽은자도 삼라만상의 대질서에 편안하게 들어서고, 살아있는 동기의 후손들은 발복을 한다.



왕비가 나는 묘터, 백담사행 법수

5공화국의 핵심적인 두 인물과 관련된 풍수이야기만을 하고자 할 뿐이다.


이순자. 그녀의 할아버지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다. 이세상에 미운 인간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모두 불쌍하노니, 그 불쌍함을 서로 감싸고 위로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이규광씨는 무엇보다 효성이 지극했고 간청하는 바도 매우 남달랐다.


그곳이 바로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에 있는 금박산 높은 곳에 있는 학이 날아가는 형국의 명당터이니, 곧 왕비가 날 자리다.


'왕비가 날 자리가 있으니 가능한한 남에게 알리지 말고 새벽에 올라가 몰래 써야 합니다.'


묘를 옮긴 후 육관은 이규동씨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 그자리에서 이순자 여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신이 아마도 향후 청와대에서 영부인 노릇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아마도 힘에 부치는 자리로 보였나 봅니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간에, 육관은 터의 신비가 이토록 천지조화를 정확하게 일으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다.

전기환, 전경환 두 형제가 그들은 부모님 묘소를 보수한다며 합천으로 육관을 모셨다.


'만약에 법수를 무시하고 석물을 세우면 하늘 높이 날던 봉황이 추락할 것입니다. 이기붕씨 일족이 멸한 것도 비금수 형상의 선조 묘에 화려한 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니 각별히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겝니다. 이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석을 철거하지않으면 3년후 음력 3월 3일 9시 42분에 일족이 전멸당할 터이니...'


그러나 어찌 되었는가?


87년 6.10 민주화 항쟁 이후 육관은 전기환씨를 다시 만난다. 그나마 곧 비석을 쓰러뜨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일족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지혜롭게 하는자는 글자와 실증 너머의 것을 도리로써 깨닫는다. 그것이 참다운 앎이요 곧 지혜이다. 대통령의 형제들은 국가 원수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다같이 단죄를 받았다. 은인자중하며 덕을 쌓고 베풀었으면 그 이름이 아름답게 오래갔을 것이나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남원의 풍수


백두대간이 아래로 흘러 지리산에 와서 멈추니 예로부터 두류산이라 불리던 데가 바로 한국의 3대명산인 지리산인다.


'남원은 행주형 아니요? 배가 떠나가는 형상이지요. 그래서 예로부터 배가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꼼짝 못하게 묶어두었지요? 그걸 모두 풀어내야 합니다.'


육관은 남원의 염승법을 철저히 적용하여 고장 사람들의 이기심을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방식을 창안한 것이었다.


 

진시황의 출생 내력에 관한것이다.


한자가 생긴이래 최고의 명문장은 단언컨대 여씨춘추라 할 수 있다. 저술한 사람은 여불위다. 진시황의 아버지가 되는 인물이다. '아무래도 여공이 이 터의 임자인가 보오. 자손이 천자가 될 자리니 부디 각골명심 하십시오.'


정승 황희의 집은 언제나 가난했다. 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으면 한 80%는 남산골 가난한 선비촌에 보내고 자신은 생계유지비만 가지고 왔다. 농사도 손수 지어 먹고 살았다.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면 모든게 만사형통인데, 인생살이란 것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다.


'아버지 혼자 청백하면 무얼하나. 그 밑의 신하들, 저 까마득한 아래 직급의 사람들도 호의호식하며 잘 사는데 한나라의 정승이 집꼴이 이게 뭔가?'


하루는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들을 대문에서 맞으며 절을 올린다. 아들은 술기운이 확달아나 버렸다.


'뉘시온지 모르지만 어서 오십시오. 절더러 아버지라 하십니다만 댁은 제 아들이 아닙니다. 애비 말을 안 듣는 자식은 손님이나 마찬가지인데, 주인이 손님에게 절하는 것이 무에 그리 잘못된 일입니까?'


'아니쿠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수신이 애걸복걸하여 아버지 정승에게 용서를구하니, 황희의 자식교육이 이 정도였다.


명재상 황희가 그 할아버지의 묘택이 있는 남원땅 서선령의 발복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남기니 유방백세요, 유취만년이라 하는 옛말은 틀림이 없다.



'육관도사의 風水·明堂이야기- 터 (下권)'


제1부

천하제일福地 靑瓦臺 터

노태우 前 大統領 장인墓 사연

웅비하는 서해안 시대와 全州

무등산 정기와 김덕령 장군

지리와 사주와 관상의 만남


제2부

하회마을의 風水와 그 전설

국토비보의 사찰, 운주사와 실상사터

삼청동의 안가지기

충효세업 청백가성, 맹사성 생가

인촌 김성수 생가터

원각사터와 세조의 풍수관

보은단동, 홍순언의 집터

南山 4혈과 남산골의 명터들

염천교의 대부송과 강희맹의 집터 


3부

우리나라 風水의 비조, 도선국사

高麗왕조의 성립과 개성의 풍수

혜산스님과 낙안 오씨 이야기

무학대사와 朝鮮의 건국

태조 이성계와 활기묘의 전설

世宗大王 여주릉(영릉) 이장과 광주 이씨 문중이야기

하연 정승묘의 전설

장흥 명당과 인왕선 치마바위의 사연

묘터에 뜸 뜨는 이야기

진묵대사와 무자손 천년 향화 지지

포천 금주산과 양사언

이율곡의 잉태와 조상묘의 현몽

숙종대왕과 갈처사

祕訣편-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이야기


 

1부


웅비하는 서해안 시대와 全州


땅은 살아 있다. 그런데 육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인류학적 생태학적 유사성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땅이 움직인다, 즉 지구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곧 살아있는 生命體요, 신성하고 경외스러운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땅이 움직이는 징후를 우리 동아시아의 지각변동과 관련시켜 이야기함으로써 風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육관은 말하고자 한다.  


지금은 우주의 계절이 바뀌는 시기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질서는 循環한다. 우리에게 낮과 밤이 있고 사계절이 있듯이, 우주와 지구에도 음양의 기간과 계절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쉽게 말해 환절기換節期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이상 기후현상이 일어난다. 환절기에 동아시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지각변도이다. 환태평양 화산대의 바깥 쪽에 위치하고 있는 日本열도는 서서히 가라앉는다. 해마다 조금씩 가라앉다가 마침내 후지산이 조그만 섬으로 변하고 만다.


태풍 폭우 지진 화산 활동이 그 기간중에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고 우리나라는 西海가 솟아올라 국토가 확장되는 경이로운 기적을 맞이하게 된다. 평균 수심 2백미터도 안 되는 서해가 융기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 속도는 일본이 가라앉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서해는 떠오른다. 지구의 이치가 그렇다. 우리나라의 국토는 서쪽으로 확장되고 지도는 나날이 바뀐다. 우리나라의 국운은 이제 서쪽으로 이동한다. 그리하여 위대한 서해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中國과 땅이 붙어버리는 지각변동의 일대 기적이 일어나리니 지금의 서해안 일대를 개발하여 서진 정책의 전진기지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떠맡아야 할 역사의 소임인 것이다. 서해가 서서히 솟아올라 중국대륙과 연결된다. 풍수는 큰 것을 말할 수록 더욱 믿기 어려운 법이므로 독자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천운과 지운이 함께 찾아와 위대한 서해안 시대의 서막을 여는 곳, 서해의 중심도시로 부상하여 장차 세계적인 규모의 도시로 웅비할 그곳은 어디겠는가? 육관이 관을 해보니 전주가 으뜸이라!


지기가 서남방으로 이동하여 1995년 3월 무렵이면 全州의 대운이 열리기 시작한다. '평양의 기운이 왕성하면 전주의 지운은 쇠락하고, 전주의 지운이 흥하면 평양의 지운은 망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평양과 전주는 지맥의 기운이 시소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제 곧 南北의 자유왕래가 시작되면 평양의 지운은 그 빛을 크게 잃게 된다. 대신 전주의 지운이 왕성하게 활동하여 전주는 크게 번성할 것이다. 평양이 쇠하는 것만큼 반대로 전주는 흥하게 된다. 이것이 지리의 법칙이다.


전주는 다가오는 2천 년대 서해안 시대의 중핵이 되는 도시가 될 것이다. 천운이 그렇고 지운이 또한 그렇다.


 

地理와 四柱와 觀相의 만남


'이보게, 옛부터 人傑은 地靈이라 했는데, 자네의 사주와 관상이 비록 거지이지만 이제 선친의 체백을 좋은 데 모셨으니 곧 발복이 있을걸세. 만약에 이후로 이상한 조짐이 있으면 어디어디로 연락해주게. 내가 그때 다시 한번 와 봄세.'


 인간만사 만국의 도성 같은 영화 권위도


한갖 개미 집 속의 一場春夢인데


더러운 티끌 속에 뒤엉켜살면서도


천지분간을 모르는도다.


 

이 우주간에 가장 밝은 빛은


부모님을 받들어 모시는 孝性의 마음이요


이 천지간에 가장 지혜로운 바람은


수시로 모이고 흩어지는 氣이노니



밝은 효성이 이 지혜의 氣를 타면


땅이 달려와 그 앞에 열리고


하늘이 따스한 이불을 내려


인간의 허물을 감싸주네.



명당은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긴


이 우주의 보물,


꽃에 燈이 달린 향기로운 생명이니


뉘라 함부로 가질손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이 깨끗하며


선업과 적덕을 행하는 자만이


땅 속의 향기로운 바람氣을 만날 수 있나니


바라건대 부디 복을 지을 지어다.



더러운 티끌 속의 부귀 공명이


어찌 이 향기로운 세계의 悅樂(열락)을 알겠나


명당의 정기를 받은 밝은 공명은


紅塵(홍진)의 부귀를 까마득히 넘어가네.


 


하회마을의 풍수와 그 전설

하회의 主山은 花山인데 그 宗山 태백산의 맥을 이은 日月山이다. 화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산을 좌청룡으로, 북쪽 절벽에 이어지는 화산의 잔맥을 우백호로 하며 水口인 화천을 건너 원산지를 안산으로 하니 그 가운데 있는 화회는 곧바로 풍수상 명당이 되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인걸은 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 되어 求國의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서애 유성룡에 가문에는 흥미로운 비화가 많이 전한다.


서애 유성룡은 안동에 살았다. 그에게는 '숙'자가 셋이나 달린 가까운 인물이 있었는데, 사람됨이 어리석고 둔하여 '숙맥' 노릇밖에 못하던, 집안에서 '치숙'으로 불리는 그의 '숙부'였다. 이른바 '삼숙이' 삼촌이었던 샘이다.


'어찌하여 그대는 속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럭저럭 지내다보니 우연히 그렇게 되었늘 뿐이라네. 그대는 이미 출세하여 나라일에 바쁜몸이고, 나 같운 사람은 초야에 묻혀 있으니 무슨 가르칠 말이 있는가? 그러나 내일이 되면 반드시 어떤 중 하나가 찾아와서 자고 가기를 청할 것이니, 그 중이 아무리 애원을 하더라도 절대로 재우지 말고 집뒤의 망자로 보내 재우도록 하게. 이 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크게 그르칠 일이 생길 것이니, 조카님은 꼭 잊지 마시게나.'


'저는 오대산에 있는 중으로서 영남의 산천을 돌아보는 길이옵니다. 평소에 대감의 맑은 덕과 높은 이름이 당대 제일이란 말을 듣고 잠시 뵙고자 왔사온데,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을 재워주시면 내일 날이 밝은 대로 일찍 떠나겠습니다.' 했다.


서애는 숙부의 혜안에 놀라 속으로 감탄하면서,

'집안에 사정이 생겨서 재워드릴 수 없으니 집 뒤의 산속 암자에 가서 쉬도록 하시구려.' 하면서 거절하였다.

 

'어디서 오시는 존사이시기에 이러한 누지에 왕림하셨습니까?'

밤이 깊어 술이 깨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왔다. 중은 눈을 떴다가 너무나 끔찍한 장면에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거사가 자신의 배를 깔고 앉아 시퍼런 비수를 들고 쏘아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천한 중놈이 어찌 감히 이런 생각울 하였느냐? 네가 바다를 건너 이 땅에 오르던 날, 나는 이미 네 녀석이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어찌 나를 속이려 드는냐?'


'이제 소승에게 죽음이 임박했는데 터럭만큼인들 어찌속이겠습니까. 소승은 일본 중이옵니다. 토요토미가 바야흐로 군사를 내어 귀국을 치려 하는데 꺼리는 것은 오직 귀댁 대감이오. 그 때문에 여기 먼저 와서 유성룡 대감을 해치려 했던 것인데, 이제 선생의 신감神鑑에 탈로난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제 목숨을 살려주시면 맹세코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치숙은 말했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運數로 정해진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나 역시 하늘을 어기려고 하지는 않지만 이곳만은 나의 힘으로 마땅히 지킬수 있다. 장차 왜병이 여기에 들어오면 하나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터인데, 너 같은 개미목숨을 죽여서 무엇이 유악하겠느냐? 목숨은 살려줄 것인바 걷바로 돌아가서 토요토미에게 조선에 내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려라.'


임진왜란 중에도 안동의 한 고을이 편안히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중의 보고가 토요토미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국토비보의 사찰, 운주사와 실상사

음택의 경우는 예외가 많지만, 터의 규모를 크게 잡아야 하는 양택의 경우는 대체로 그 입지 조건이 몇 가지 조건에 한정되어진다. 상식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우선은 지반이 단단해야 하고 급격한 경사는 피해야 한다. 일광이 좋아야함운 물론이고 풍부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람도 막아야되며 배수도 원활해야 한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사에 편안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그터가 有情해야만 한다.


그러나 풍수지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변 산의 형상과 기운을 참조하고, 건축물의 기능과 성격에 따라 동일한 공산 내에서도 배치를 섬세하게 하며, 지기를 잘 살펴 그 기운이 힘을 쓸 수 있도록 조영해야만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러한 '조화로운 터'의 상당부분이 寺刹터라고 하는 점은 자못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육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절터가 풍수상으로 매우 좋은 자리에 터잡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기슭에 가면 운주사라고 하는 사찰이 있다. 운주사와 그 일대의 터는 매우 신비로운 곳이다.

운주사는 도선국사의 국토비보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이라 할 수가 있다.


도선스님은 우리나라의 지형 전체를 배船로 보았다. 그런데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땅이 영남에 비해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울 항상 염려 하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금수강산삼천리의 빼어난 정기가 배가 기울어지는 동쪽으로 흘러서 일본으로 가는 것을 몹시 꺼려하였다. 그래서 호남에서 제일 적격지를 골라 천불,천탑을 세웠던 것이다.


히로히토의 묘를 쓰러 갔을 때도 느꼈던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일본의 위세를 당하기가 여의치 않다. 그러나 전 국민이 힘을 모아 통일을 이루면 그 옛날 중원평야를 치달리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


더구나 앞으로 오랫동안 오경명성五庚明星이 우리나라를 비추니 國運의 대상승은 이미 보장된 것이다. 또한 머지 않아 지구의 地軸이 바로 서는 날이 오는데(정확한 날짜는 천기누설이므로 밝힐 수 없으니 양해를 바란다) 그때가 되면 천지가 개벽하고 驚天動地할 대사건이 일어난다.


 서해는 솟아오르고 일본열도는 가라앉는 것이다. 후지산이 조그만 섬으로 변하고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대륙과 연결된다. 그러니 우라나라는 이제 서진西進정책을 과감히 펼쳐야만 한다.


압구정동 거라에서 철없이 일본문화를 쫓아다니는 젊은이들이여, 명심할 지어다. 일본은 망한다. 국운이 쇠하는 정도가 아니라 땅덩어라 전체가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망하는 나라의 문화를 어짜 똥강아지처럼 뒤따라 다니는가? 정신차리고 民族의 자존심과 정기를 되찾는 일에 힘을 쓸지어다. 그 옛날 花郞道의 정신을 본받고, 예의범절을 잘 지킬 것이며, 도덕성 함양에 전력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들도 또한 감상적으로 알번을 배척할 게 아니라 오직 그 인품과 실력으로써 극일克日 해야할 것이다.

 


삼청동의 안가지기

이 동리의 지명 또한 안씨가문과 무관하지 않으니, 그 가문에 3형제의 淸白吏가 나왔음을 칭송하자는 뜻이요, 3대에 걸쳐 청백리가 대를 이어 나왔음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삼청동 '안가지기'의 연유는 이와 같은것이니, 곧 음택명당과 양택명당의 중요함이 역사와 가계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을 실증해주는 좋은 사례로써 기억해둘만하다.


삼청동의 이름 유래와 관련하여 또 다른 유력한 학설 중의 하나는 그것이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다. 三靑이란 원래 인간이 희구할수 있는 도교의 최고의 이상향으로써 옥청, 상청, 태청,을 지칭한다.


도교의 이러한 사상은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사상인 國仙道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역대로 그 흔적을 남겨왔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도교를 매우 존중한 인물이었고, 고려시대에도 복원궁, 대청관 등의 도관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소격서에 삼청전을 두어 그 전통을 이어온 바 있다. 따라서 삼청동의 이름은 바로 이 삼청전의 소재지라는데서 유래한다. 

 


3부


혜산 스님과 낙안 오씨 이야기

도선국사를 따라다니며 지리를 어느 정도 전수받은 스님 중에 혜산 이란 분이 있었다. 때는 후삼국시대였다. 민심은 피폐하였다. 허기에 지쳐 쓰러진 혜산 스님. 마침 이곳을 지나던 오씨 성을 가진 노인 한 분이 그를 본 것이다. '아이구, 이를 어째, 스님께서 길에서 돌아가시다니!'


오노인댁에서 여러 날을 보낸 후 혜산스님은 쾌차할 수 있게되었다. 그동안 오노인댁의 모든 식구들은 정성을 다하여 스님을 간병하였던 터라, 모두들 너무도 기뻐하였다.

혜산스님은 길 떠날 차비를 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소승이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땅을 좀 볼 줄 아오니 이후 커다란 福을 받을 명당터를 보아드릴까 하는데 어떠실지요?'


고려의 제2대 임금인 혜종 의공대왕의 운명의 첫 페이지는 이 한마디의 제안에서부터 시작된것이니, 신기하고 묘하도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나니, 그 후손이 훗날 대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 구나.


그래서 스님은 낙안고을 어느 산자락 아래에 이르러 훈훈한 地氣가 오르는 곳을 가리키며


'여기는 왕비가 날 자리이오니, 여기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 반드시 대통일왕국의 왕비가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지혜롭도다, 오씨 처녀여!


먼 길을 달려 물을 청하는 지친 장수에게


완사천 수양버들 잎사귀를 그 물에 띄우나니


지혜로움은 장수의 눈에 들어


훗날에 장화왕후가 되는 구나


지금도 그 수양버들 남아 있어


왕후의 지혜를 한들한들 노래하네.'


 

무학대사와 조선의 건국

무학(1327~1405)은 고려 충숙왕 14년 9월 20일에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무학은 어린나이에 근처의 절에 출가하여 동자승이 되었다.


신라때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산수기'에는 이 부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 이가 만약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그래도 나라를 연존시킬수 있는 약간의 희망이 있도다. 그러나 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시비하면 채 5세도 지나지 않아 임금자리를 뺏고 빼앗아가는 재앙이 있으며 도읍한 지 2백년 쯤 뒤 나라가 위태로운 국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스님은 곧 무학을 지칭하는 것이요, 정씨는 정도전을 말하는 것이며, 위태로운 국난이란 임진왜란을 뜻하는 것이니, 8백 년 앞을 내다 본 의상대사의 혜통함이 이와 같았다. 


서울은 국도의 터다. 조선왕조의 도읍지이자, 오늘날 우리 大韓民國의 수도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부아악(인수봉)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찾았다 하니 이미 2천년 전부터 국역풍수의 진원지가 되는 으뜸 터다. 의상스님과 도선스님이 미리 그 길기를 보았고, 마침내는 나옹스님의 법통을 이은 무학대사에 의해 국도의 터로써 정해졌다. 그러나 국도로써 쇠운의 길에 접어들었으니 머지 않아 이전될 운명에 닥친다. 


진묵대사와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

진묵화상 그는 신통자재한 큰스님이었으나 불행하게도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웅지를 펴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곧 떠나리니 그대들은 물을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물으라.'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어떤 스님의 법통을 이은 것으로 할까요?'


'비록 세간의 명리에 대한 집착에서 초탈하지는 못한 스님이라 할지라도 휴정 노장의 문하로 하려므나.'


세속 나이 72세, 법랍52하였다. 때는 인조 11년(1633) 10월 28일이었다.


진묵스님은 이름자 그대로 우뢰와 같은 큰 목소리를 가진 스님이었으나 평생토록 침묵沈默하며 살아가신 분이다.


이번 이야기는 진묵스님이 출가한 승려의 신분으로 속가의 부모님께 어떻게 孝道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묵은 어느덧 세속 나이 사십을 넘기고 있었다. 전주의 일출암에 있을 때는 암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만 집 한 채를 마련하여 불거촌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왔다. 그곳은 왜막촌으로써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아중리에 해당한다. 그는 조석으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문안을 여쭈었다.


그로부터 5, 6년이 지나서 늙으신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중의 몸이니 대를 이어 제사 모실 아들을 낳을 수 없구나. 하니, 나의 자손들이 아니더라도 뭇 사람들이 향불을 피울 그런 자리에 어머님을 모셔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오늘날 성모암 옆자리에 묘를 썼다. 그자리가 연화부수형으로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그날 진묵대사는 목수를 불러 현판을 만들고 스스로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

'여기 이 묘는 만경현 불거촌에서 나서 출가 사문이 된 진묵일옥의 어머니를 보셨는 바, 누구든지 풍년을 바라거나 질병 낫기를 바라거든 이 묘를 잘 받들지니라. 만일 정성껏 받든 이가 영험을 못 받았거든 이 진묵이 대신 결초보은 하리라.'


 그 뒤로부터 원근의 주민들이 이 묘에 향화를 받들고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오늘날까지도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 이유는 모두 그 영험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 묘에 향불을 사르고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간절히 기원하면 반드시 성취하는 바가 있으리라. 자손만이 발복을 받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곳은 누구든지 발복할 수 있으니 명당 발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깨끗하고 맑은 마음으로 이곳에 참배하라. 그로써 진묵의 영통함이 증명될 것이다.


육관은 그날 진묵스님의 어머니묘를 보고서 일행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이율곡의 잉태와 조상묘의 현몽

율곡의 가문은 덕수 이씨의 가문이다. 이 조상의 묘는 개성군 중면 덕수리 왕대동에 있는데 지금의 휴전선 부근이다. 묘택의 주인공은 고려시대에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이소 라는 분이다.


이 명당터의 형국은 야자형이고 중국의 성인인 공자를 낳은 니산과 닮았다 하여 여니산이라 한다. 이 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군자, 북성인, 서대장, 남성현의 바위봉우리가 둘러져 있으니 성인군자와 문재무장의 영기를 모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6세 이후에는 반드시 중국의 공자, 제갈공명, 이태백에 비견할 만한 위인이 나온다고 일찍이 중국의 지관들이 예언한 바 있었다. 그 소응은 예상대로였다. 6세쯤부터 동방의 군자로서 공자에 견줄만한 이율곡이 나왔고, 제갈공명에 비할 만한 이순신이 나왔고, 이태백에 비견할 만한 택당 이식이 나온 것이다.


 

숙종대왕과 갈처사

조선시대 숙종대왕은 순행을 좋아하는 임금이었다.

어느날 삼척에 도착하여 자기와 生年日時가 똑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벌을 천 통이나 치는 양봉꾼이었는데 숙종은 너무도 신기해서 그를 초대하기에 이른다.


'나는 한양 사는 이동지라는 사람인데, 우리가 기이한 인연이니 한번 우리집으로 놀러 오시게나.' 하면서 아무날이 되어서 어디어디로 오라 말하고는 돌아왔다.


얼마후 이 양봉꾼은 자신을 초청해준 주수한 용모의 선비 말대로 한양 구경도 할 겸 정말로 남대문을 들어오게 되었다. 마땅한 선물이 없어서 도토리 알맹이에 꿀을 재워서 한 통을 싸들고 그 선비가 오라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아뿔사 경복궁이 아닌가?


왕 앞에 사지를 떨며 나서니, '어이쿠, 우리 친구 어서 오시게.' 하면서 숙종은 희색이 만면이었다. 가져온 선물보따리를 풀어놓으니, 궁궐의 만조백관들은 모두 처음 보은 것이라 눈이 자못 휘둥그레졌다. 숙종임금이 먼저 맛을 보니 도토리의 떫은 맛이 약간 남아 있긴 했지만 그 속에 든 꿀은 몇 달간이나 재워져 있었던 까닭에 희한한 단맛이 입 안에 다그히 퍼지는 것이었다. 숙종은 신하들에게도 권하며, 이 음식의 이름을 '꿀밤'이라 명했다고 한다.


순행을 좋아하는 숙종이 수원 지지대 고개 쪽으로 쉬엄쉬엄 걸어내려 가는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두루마기 차림에 갓을 깨끗이 쓰고 가던 중, 숙종은 고개 아래쪽 냇가 (이 냇가는 수원천으로 지금도 있다)에서 엉엉 울고 있는 어떤 총각을 발견했다. 괴이하다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그 총각은 물이 흘러 내려 가는 냇물 바로 옆에 관을 가져다 놓고 묘를 파고 있지 않은가. 조금 파내면 물이 그만 꽉 차, 삽만 갖다대도 물이 술술 오르니 그 더벅머리 총각은 엉엉 울면서도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숙종은 내심 의아스러웠다.


'저 사람이 아마도 묘를 쓰는 모양인데,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묘를 쓰려면 산에 써야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저러는지 그것 참 희한도 하다.'


'이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니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묘를 쓰려고 합니다.'


'이보게나, 여기 좀 보게. 물이 금방 이렇게 솟아나는 곳에 어찌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세상을 뜨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서는 이 자리를 무조건 파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꽤나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높은 언덕에 살고 계십니다.'


산 언덕 높은 곳에 쬐그만 오막살이가 있었다.


 숙종은 불현듯 차고 다니던 붓통에서 붓을 꺼내어 무엇인가르 급히 썼다. 그리고는 둘둘 말아 그 총각에게 전해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가지고 수원부로 급히 가거라. 수문장들이 길을 막거든 이것을 보이도록 하라.'


총각은 또한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와서 오후시간에 냇가에 묘를 쓰라고 하지, 묘를 쓰면서 하도 기가 막혀 엉엉 울고 있는데 갑자기 왠 선비가 나타나 수원부로 뛰어가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선비의 차림새가 워나 수려청정하고 목소리에 위엄이 있는지라, 총각은 그러리라며 수원부로 급히 가게 되었다.


그 서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3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한시 바삐 조치하라.'


수원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전후사정을 파악한 수원부사는 즉시 어명을 수행했다.


'아! 상감 마마, 그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떠나자 구씨를 불러 관을 지키게 한 다음, 단단히 벼르고서는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나는 한양 사는 이동지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대가 저 밑에(관이 보이는 냇가를 가리키며) 묘를 쓰라고 했소?'


'아니, 저기 저렇게 물이 펑펑 솟아나오는 곳에 어떻게 묘를 쓰라 했소? 듣자니 당신이 지리를 좀 한다던데, 그런 엉터리로 어찌 가난한 사람을 울리고 골탕 먹이는 것이오?'


'아니, 선비란 양반이 개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저 밑의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오?'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 전에 이미 쌀 3백 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하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떠냐.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조금 전에 자기 손으로 서찰을 써주지 않았던가.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어찌 하여 저 아래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천지로 많은데, 게서 호의호식하며 살지 않고 이런데서 사십니까? '


'이 양반이 또 아무 것도 모르는 이야기를 떠드네.'


'무슨 말인지...'


숙종은 아예 벌써부터 죽눅이 든다.


'저 밑에 저놈들은 말이여. 도둑질해가지고 암만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가져봐야 아무 소용 없어.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올 자리여. 그러니 이런 좋은 터가 또 어디 있겠나? 수원부 안에서 아무리 떵떵거리고 호의호식해도 임금이 찾아오는 그런 집은 없지. 여기는 비록 보잘 것 없이 누추한 집이지만 나라의 임금이 찾아오는 명당터란 말일세.'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만나고 있는 자기 스스로가 꿈속을 헤매고나 있지 않은지 꼬집어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오시네. 잠시 기다려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옛날 보자기를 풀어서는 날 잡아놓은 종이를 찾아 먼지를 털어내어 보고는, 그만 대경실색한다. 그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밖에 나와 큰절을 올리는 것이다.


'상감마마,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하면서


'나를 위해서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소?'


다정한 목소리로 신후지지를 부탁하니, 어느 분의 분부라고 거역하랴. 이틀 뒤에 갈처사는 정말 올라왔다. 그리고는 명당을 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서울의 서북쪽 고양시의 서오릉에 있는 명당 자리다.


 ''신묘神妙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명당은 냇가에도 있고


양택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이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祕訣편- 관악산, 북한산, 청계산이야기

옛날부터 관악산에 대명당이 있다고 전해왔다. 수년 전에 육관이 제자의 간청에 못 이겨 직접 올라가본 적이 있었다. 이 산을 올라가다보면 그 경치가 빼어나서 곳곳에 명승을 이뤄놓았는데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산을 찾아 호연한 기상을 연마하고 있었다.


관악산은 차령 산맥이 끝나는 곳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이 관악산이 행정구역상으로 서울 특별시에 속해 있다고 해서 삼각산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삼각산은 우리나라 모든 산의 태조가 되는 백두산에서 뻗어내려 함경도를 거쳐 남쪽으로 곧바로 달려와서 서울 북방에서 끝나는 산이다. 인구 천만이 넘는 서울의 진산이 바로 이 삼각산이다.


 그러나 관악산은 속리산 천황봉에서 시작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올라온 차령산맥의 끝머리로써, 삼각산과는 전혀 그 뿌리가 다른 산이다. 그러므로 풍수 지리상으로 본 수도 서울은 한강 이북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며, 한강 이남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관악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관망하니 첩첩한 산줄기가 이리꾸불 저리 꾸불 천변만화를 이루었도다. 서울 남산 쪽에서 바라보던 이 산의 봉우리는 마치 불꽃같이 생겼었는데 이곳에서 관악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흡사 관 같이 생겼구나. 산줄기의 기세가 너무나 웅장하여 사람과 귀신을 압도하는구나.


전체적인 산의 정기가 한 곳에 뭉쳐서 대명당을 맺었으니 예가 비로 '帝'자 혈이 아니던가. 옛날부터 일러오기를 관악산 높은 곳에 제자혈이 있으니 28대에 걸쳐 제왕이 날 자리라고 일러왔는데, 오늘에야 그 자리를 찾으니 참으로 감회가 깊도다. 대충 계산해도 약 6백년 동안을 자손 대대로 제왕 노릇할 자리이니 한 왕조를 창건하여 유지할 대명당이 틀림없도다.


그 누가 복이 있어 이런 명당을 차지할꼬? 적덕한 집안에서 그 임자가 니리로다. 기묘하고 괴상한 이 혈을 무슨 수로 알아낼꼬? 동남방과 남방에 물줄기가 비치고 '帝' 자 같이 생긴 곳을 찾아라.


 관악산 그 아래로는 천을 태을 이 비치는 양택 대명당터가 있으니, 오늘날 정부종합청사가 자리하여 제대로 들어섰다. 원래 종합청사터는 지금의 서울대공원 아래 부지를 마련해놓고 공사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왕복 8차선 도로가 계획되고 가운데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육관이 보건대 자리가 좋지 않아 古 朴正熙 大統領께 직접 건의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상권에 이미 언급한 바 있으나 관악산 명을 다루는 관계로 다시 한번 다룬다. 서울대공원 안에 있는 화원은 그 당시 종합청사터로써 만들어놓은 것이며, 다만 8차선은 4차선으로 줄였다.


북악산 안쪽에 천하의 대명당이 뭉처 있으니 현무의 세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았구나. 삼각산의 굳센 기운이 한 곳에 뭉치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자리로다.


옛날 큰 명사들이 이 자리에 큰절하고 마땅히 손좌로 해야 한다고 기록해놓았으나, 이 말을 들으면 크게 그르칠 것이다.


대대로 덕을 쌓아온 가문만이 이런 대명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즉 어찌 범상한 사람들이 이런 대지를 넘볼 수 있으랴! 마땅히 갑을묘 가운데 어떤 좌를 써야 할 것인지 깊이생각해보라.


 '東方의 靑帝가 王座에 오르시니...


萬國의 백성들이 萬萬歲를 부르네.'



이상으로 육관비결 북한산 대명당을 조금 언급하였거니와 다음은 효자원에 얽힌 박효자의 지극한 효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후기에 박태신 이라는 이가 있었다. 다동(지금의 서울시청 뒤쪽)에서 살았는데, 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 봉양을 잘 하였고 효성이 지극했다. 어느 날엔가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북한산 아래(오늘날의 효자원자리)에 묘를 썼다.


아들 박태신은 집이 다동인지라, 묘소까지 너무 멀어 매일 같이 찾아뵙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묘소에 찾아가 문안을 올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다동집을 출발하여 서대문 무악재 불광동 갈현동 구파발을 넘어서 그 아버지의 묘택에 문안을 드리고 돌아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장마가 오거나 태풍이 와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일은 3년간 계속되었다. 직선거리로만 쳐도 약 40여 리(약16킬로미터)나 되는데 돌아서 가는 길은 얼마나 멀었던가.


그는 매일 새벽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많이 내렸다. 그는 무악재를 넘기가 어려웠다. 지금이야 그리 가파른 언덕이 아니지만, 이전의 무악재는 험하고 높은 고개였던 것이다. 호랑이도 출몰하였고, 따라서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으려면 여럿이 모여서 창을 든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서 넘던 그런 고개였다.


가파르고 높은 절벽이 많은 험악한 고개인데, 폭설까지 내렸으니 신출귀몰한 재주가 없고서야 어찌 넘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박태신은 무악재를 넘기로 했다. 무플과 손으로 기어오르다시피 하여 겨우 넘을 판이었는데, 그만 발을 잘못 디뎌서 절벽 아래로 구르고 만 것이다.


그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혼절하여 쓰러져 있는 동안 옆이 훈훈하여 깨어보니 황소만한 호랑이가 지기 옆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박태신이 혹여 얼어죽을까 염려하여 자신의 열기로 그를 따뜻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등을 내려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박태신은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무서워서 양귀를 잡으니 호랑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비호처럼 날쌔다더니, 정말로 이건 날아가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달려와 멈추었는데 바로 아버님의 묘 앞이었다. 호랑이가 영물이라더니, 과연 신통하기만 했다. 박태신이 문안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호랑이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다시 올라타니 쏜살처럼 달려 무악재 아래 인가부근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하여 박태신은 호랑이를 타고 돌아가신 아버지묘에 문안드리러 다니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약 6년간을 하루도 빠짐 없이 그리했다. 


그런 어느 날 박태신도 죽고 말았다. 시신을 어버지묘 앞에 묻었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크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구슬프고 애절하게 우는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열흘 이상이나 같이 애를 태웠다.

어느날 호는 소리가 그쳐 찾아보니 호랑이는 박태신묘 앞에서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크게 감동된 바가 있었다. 호랑이가 영물이라서 효자를 따라 죽으니 동네에서는 박태신을 일러 하늘이 낸 효자라 했다. 몇몇 사람들이 호랑이 고기와 껍질을 탐하여 칼을 대고자 였으나 노인들이 크게 나무라자 잘못을 알고 물러갔다. 호랑이도 박태신의 묘 앞에 묻어주었는데 지금도 있다.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에서도 효자의 정문을 내리고 그 일대를 孝子院이라 명명하게 됐다. 


과천 청계산 서쪽 기슭에 대명당 자리가 있으니 장군대좌혈이다. 옛 비결에 이르기를 '청계산 서쪽에 장군대좌혈이 뭉쳐 있는데 우측으로 돌아서 산맥이 흘러 혈이 응결되어져 있다. 이 자리 앞쪽에 펼쳐진 안산은 군마안 이며 좌향은 서쪽을 바라보고 혈의 깊이는 일곱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육관이 오래 전에 제자 몇 명과 함께 이 명당을 찾아 청계산에 올라가 보았더니 정혈이 뭉친 곳이 깊이 파헤쳐져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행은 매우 낙담하였다. 특히 벽계는 명혈이 파손된 데 통분해 하며 육관의 논평을 부탁하였다. 


'이 사람아, 내 마음도 마찬가질세. 대저 명당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고 땅이 감추어서 수억만 년을 보전해온 천하의 보물인데 한 개인의 하찮은 욕망 때문에 무참히 파괴되어 버리니 이 얼마나 아타까운 일인가? 또 우리 배달 겨레의 후손 가운데서 위대한 인재들이 배출되어 삼신일체三神一切의 '한밝정신'으로 전세계 인류를 영도해 나가도록 태고때부터 마련해둔 명당자리를 이렇게 함부로 파헤쳐버리니, 이 아니 애석한 일인가? 그러나 청계산에는 또 하나의 명혈이 있지. 게 어진 줄 아나?'

그때 제자들은 모두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옛 비결에 의하면 말일세, 과천 동쪽 10리 쯤에 옥녀 등 공형명당이 있다고 했네. 혈이 옥녀의 콧등에 응결되었는데 천 년 후에 도인이 나타나서 묘를 쓴다고 하였다네. 그런데 내가 직접 가서 보니 말이여, 어떤 지관이 이미 자기 자리를 미리 잡아 두었지 않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그런 어려운 명당을 찾아 놓고도 혈처를 정확히 못 잡았으니 아마도 앞으로 크나큰 변고를 당할 걸세. 지관이 너무 좋은 자리를 탐하면 그 사람 꼴을 당할 테니 그대들도 유념하시게나.'


그로부터 얼마 후에, 육관의 말대로 옥녀등공에 가묘를 써두었던 지관은 부인과 아들들이 연달아 죽어버리는 변고를 당하고 말았다. 겉으로 보아서 아무리 정확한 혈처라 할지라도 그 속의 다른 경우가 허다한데, 어찌 스스로 도인이라 하며 천장지비의 혈처를 욕심내는 지관이 제자리를 찾겠는가? 그러니 청계산의 두 명당은 이미 욕심내는 사람들에 의하여 들키고 말았도다. 장군대좌는 파손되었고 옥녀등공은 혈처가 약간 틀렸다. 파손된 혈기가 되살아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혈처가 틀린 곳은 바로 잡으면 된다.


그리고 청계산에 또 하나의 명당이 있다.  


운중선좌雲中仙坐

신선이 구름 속에 앉아 있는 형상이 대명혈이니 이는 지금의 정신문화연구원의 뒤쪽에 있다. 제갈공명이 날 잘리다. 운중선좌혈은 예로부터 신비한 곳이니, 일찍이 중국의 장량이 자기 손으로 운중선좌를 잡은 바 있고, 세갈공명도 열일곱 살때 황승언에게 빌어서 운중선좌를 얻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제갈공명은 명당을 얻은 대신 지관 황승언의 딸과 결혼해만 했다. 황씨 부인은 너무도 못생겼다고 한다. 아무리 은인의 딸이라지만 신랑은 도저히 초야를 치룰 수가 없었다. 첫날밤에 도망을 쳤다. 그러나 수십리 길을 달려가도 그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부인이 도술을 부린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여러 날이 지나고 억지로나마 초야를 치루게 되었다. 그리고 나자 곧 기적이 일어났다. 초야를 지낸 신부의 흉한 얼굴이 벗겨지고 눈부시게 황홀한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하늘의 선녀였는데 황정경을 잘못 읽어 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운중선좌의 명당도 얻고 미인 아내까지 얻은 제갈공명은 이후 유비를 만나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가 각종 병법과 도술에 능통했던 까닭은 모두가 黃氏 부인의 덕택이었다고 한다. 운중선좌에 묘를 쓰는 인연이 있는 자는 앞으로 제갈공명에 버금가는 인걸이 될 것이다. 과연 누가 이 명혈의 주인공이 될꼬?




육관 손석우 자리| 지창룡 손석우 장용득, 3인

文景 閔逢基 | 조회 39 |추천 0 | 2013.10.20. 05:31

묘지 불법조성 논란 故 육관 손석우
소문날까 서둘러 장례
천하명당인데 移葬명령이라니…


박종주 月刊중앙 WI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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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망 예언 등으로 화제를 모았던 지관 손석우씨가 의문의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생전에도 세간의 평가가 엇갈렸던 손씨의 장례식은 부고도 없이 은밀히 치러졌다. 게다가 도립공원 안에 묘지를 불법조성한 사실까지 밝혀짐으로써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갖가지 억측이 나돌았다. 그 소문의 진상과 문제가 된 묘지 불법조성의 전말 등을 취재했다.

생전에 북한 김일성의 사망을 예언하고 야당 총재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 가족묘터를 잡아줘 화제가 됐던 풍수지리가 육관(六觀) 손석우(孫錫佑)씨가 지난 8월26일 세상을 뜬 후에도 숱한 이야깃거리를 낳고 있다.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대로 손씨의 묘는 묘지 조성이 금지된 도립공원 안에 조성돼 관할 군청으로부터 이장(移葬)을 요구받고 있다. 남의 명당을 잡아주던 지관(地觀)이 정작 자신의 묘가 이장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아이러니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손씨 가족들은 묘지 불법조성과는 별도로 사망원인을 둘러싸고서도 한동안 밑도끝도 없는 소문에 시달렸다. “묘터를 보러 산에 오르다 벼락을 맞고 비명횡사했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처럼 흉흉한 얘기가 나돈 것은 무엇보다 가족들이 손씨의 사망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일가친지들에게조차 부고하지 않았다. 서울 순천향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문상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발인도 새벽 3시에 했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장지에서의 하관절차도 아침 6시 무렵에 서둘러 마쳤다. 손씨의 장례는 이처럼 생전의 명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치러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손씨의 사망 전후 정황은 어떠했고, 가족들이 쉬쉬하며 장례를 치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손석우씨가 서울 용산구 보광동 자택을 떠나 경주로 내려간 것은 8월26일 아침. 수년 전 자신이 직접 관명(觀明·묘터의 운세를 보는 일)한 울릉도의 묘지를 전남 해남으로 이장하는 데 지관역을 맡기로 하고 지방출장길에 오른 것이었다.

이튿날 포항을 거쳐 울릉도로 들어가기로 하고 26일 오후 경주국민호텔에 투숙한 손씨는 밤 10시경 호텔 객실에서 갑자기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켰다. 호텔 직원들의 신고로 출동한 불국소방파출소 구급대에 의해 계명대 동산병원으로 후송되던 손씨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 구급차 안에서 절명했다. 병원측이 발부한 사체검안서상의 사인은 ‘심폐기능부전’이었다.

언론 피해의식 심했던 생전의 육관도사

나이(70)에 비해 건강한 편이었던 손씨는 지난 여름 심장병 증세로 쓰러져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보름간 입원치료받은 적이 있었다. 건축자재업을 하는 둘째 아들 광진(34)씨의 부도 후 채권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친 게 손씨의 심장병을 유발한 직접 원인이었다.

손씨의 유해는 사망 다음날인 8월27일 저녁 서울 순천향병원 영안실로 옮겨졌고, 29일 새벽에 발인해 자택 부근에서 심야 노제(路祭)를 지낸 다음 예산 장지에 묻혔다. 이처럼 쉬쉬하면서 장례를 치른 결과, 손씨의 사망사실은 사망 보름이 지난 9월12일 독자의 제보전화를 받고 사실확인을 마친 한 신문보도를 통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가족들은 손씨의 사망 사실을 숨겼던 이유를 “언론에 알려지면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명당(明堂)만 찾아다니던 사람이 묻힐 곳은 도대체 얼마나 명당이냐”는 일반인들이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면 망자(亡者)를 조용히 모시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가족들이 걱정한 것은 이처럼 ‘긍정적인 관심’이 아니었다. 충남 서산시 해미읍에 거주하는 손씨의 제자 조모(44)씨는 “언론이 선생님이 돌아가신 사실을 알면 별별 얘기까지 다 끌어모아 보도할 게 뻔한 상황이라 장례를 최대한 은밀히 치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대다수의 역술인이나 풍수지리가가 그러하듯 ‘육관도사’ 손석우씨도 언론보도를 통해 대중적 지명도를 얻은 경우였다. 그러나 손씨만큼 언론으로 인한 호된 곤욕을 치른 경우도 드물었다. 특히 지난해 4월 MBC-TV의 ‘PD수첩’이 손씨의 지관으로서의 능력과 돈 문제 등에 대한 의혹을 담은 ‘육관도사의 위험한 풍수’편을 방송한 후로는 손씨와 가족들의 언론기피증은 한층 두드러졌다. 이러한 경험 탓에 가족들은 손씨의 사망을 계기로 또 어떤 ‘일’을 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28년 4월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한때 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했던 손씨는 62년 정치인의 꿈을 안고 민주공화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공천을 받지 못해 선거에 출마해 보지도 못한 채 정치에의 꿈을 접어야 했고, 정치권 언저리를 오가는 과정에서 집안살림만 축낸 것으로 알려졌다. 손씨는 이후 정치에 미련을 버리고 오대산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 ‘신안’(神眼)을 얻고 나서 풍수지리가의 길을 걷게 됐다고 생전에 밝힌 적이 있다.

손씨가 매스컴으로부터 ‘주목’받은 것은 94년 초에 펴낸 “터”라는 책에서 김일성의 사망을 예언했다 이것이 적중하면서부터였다. 손씨는 이 책에서 ‘김일성의 운이 올해 음력 9월14일을 기해 소멸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이 같은해 7월 숨지자 손씨는 ‘김일성의 사망을 예언한 역술가’로 각광받았고, 그후로는 각종 매스컴이 연말연시 등을 맞아 ‘올해의 국운’ 등을 점칠 때 반드시 한 말씀을 얻어야 하는 인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손씨는 95년 5월 야당지도자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이 경기도 용인에 가족묘역을 조성할 때 그 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선친과 모친, 여동생, 사별한 전처 등의 묘가 이장돼 있는 이 가족묘역은 지난해 대통령선거 후에는 ‘대통령을 낳은 명당’으로 소문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구경오는 사람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김대통령 가족묘와의 인연은 손씨에게 ‘대통령을 배출한 명당을 점지한 지관’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지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손씨의 삶은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손씨는 ‘명당은 공짜로 봐주는 게 아니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단 한푼이라도 대가를 지불해야 땅의 복이 제대로 발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에서 손씨는 관명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돈 얘기를 꺼냈다. 이러한 언행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지관이 너무 돈을 밝힌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손석우에게는 이미 쓴 묘를 보다 좋은 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이러한 의뢰에 응할 경우 기존 묘의 운세를 먼저 봐주고, 이장할 명당을 물색해주는 순서로 일이 진행된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손석우씨의 묘. 손씨의 가족들은 군청측의 원상복구 명령을 받고 소나무를 베어냈던 묘지 주변(위)에 다시 나무를 심었다(아래).


그러나 이장할 명당을 점찍어주었지만, 사정이 생겨 의뢰인이 그 땅을 사지 못할 경우 종종 문제가 발생했다. 대부분의 산주(山主)는 자신의 산에 다른 사람의 묘가 들어서는 걸 꺼리기 때문에 아예 땅을 팔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고, 팔더라도 시가보다 엄청나게 비싼 돈을 요구하기 십상이다. 일이 이처럼 꼬여 이장을 포기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는 “이장이 불가능해졌으니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잦았다. 기존 묘의 운세를 봐준 사례비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분쟁은 또다른 잡음을 낳는 빌미가 됐다.

지금의 묘는 지난해 假墓 써두었던 자리

전국의 산을 두루 살피고 다니는 과정에서 손씨는 자신의 명의로 임야를 직접 구입하거나 매매를 중개하는 일도 잦았다. 이 과정에서 계약조건과 잔금 지급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했던 손씨는 자신의 제자를 자처하며 좋지 않은 소문을 일으킬 경우 가차없이 인연을 끊었다. 실제로 풍수지리가연하며 손씨 집을 출입하다 이러한 연유에서 손씨와 단단히 의가 상해 결별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손씨를 좋게 얘기하고 다닐 이유가 만무했다.

지난해 방영된 ‘PD수첩’은 손씨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련의 논란을 모아 손씨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 전에도 ‘땅에다 무슨 물건을 숨겨놓았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식으로 매스컴이 접근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던 손씨는 ‘PD수첩’이 방영된 후에는 극도의 언론 기피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가족들이 최대한 조용한 장례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결국 사망사실을 보도하고, 도립공원내 불법묘지 조성문제까지 제기하고 나서자 손씨 가족들의 언론에 대한 피해의식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외부 전화를 피하기 위해 핸드폰 번호를 수시로 바꿔온 차남 광진씨는 이제는 아예 다른 사람 명의로 개설한 전화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얼마 전에는 한 주간신문이 ‘생전의 손석우씨가 김대통령 가족묘터를 잡아주는 대가로 전국구 의원직을 요구했다’는 기사를 실어 가족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손씨의 묘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104 임야는 손석우씨가 지난해 3월 충남 당진에 사는 장모씨로부터 사들여 차남 광진씨 앞으로 등기한 사유지다.

손석우씨는 지난해 3월 현재 자신이 묻혀 있는 임야 1만7천평을 매입한 직후 평소 교우하던 풍수지리가 조제운(曺濟雲)씨에게 부탁해 자신의 묘터를 잡았고, 같은해 9월 석관으로 가묘(假墓)를 썼다. 손씨는 가묘를 쓸 때 부부합장을 염두에 두고 부인이 묻힐 자리도 함께 잡아놓았다. 현재 손씨의 묘 속에는 부인을 위한 빈 석관이 하나 더 묻혀 있다는 얘기다. 손씨의 묘터를 잡은 조제운씨는 “육관의 묘는 주변 산세가 용이 살아서 각 방향으로 날개를 펴는 형상인 데다, 묘터 앞에는 물이 드나드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저수지가 자리잡아 만대의 복을 발하는 명당”이라고 밝혔다. 조씨는 이 터가 ‘꿩이 매를 피해 내려앉아 웅크리고 있는 지세’로, 명당의 필수조건인 ‘힘을 받는 자리’라고 덧붙였다.

도립공원 안에 묘를 씀으로써 손씨의 가족은 자연공원법, 묘지 및 매장에 관한 법률, 산림법 등 세 종류의 실정법을 위반한 상태다. 관할 예산군청은 이 가운데 상위법인 자연공원법을 적용해 그동안 세차례에 걸쳐 ‘덕산도립공원 가야산지구내 불법행위(묘지설치)에 대한 원상복구 명령’을 차남 손광진씨 앞으로 발송했다.

군청측의 원상복구 명령에 대해 가족측은 지난10월 중순 잣나무와 단풍나무 등을 심어 96평 중 봉분을 제외한 77평을 원상복구했다. 그러나 예산군청은 11월15일까지 묘 이장을 포함한 완전한 원상복구를 요구하는 명령서를 발송했다. 예산군은 이 기간이 지나도 원상복구가 이뤄지지 않으면 가족들을 불러 청문 절차를 밟고 곧바로 경찰에 고발한다는 방침이다. 경찰고발과 검찰의 기소를 거쳐 정식재판을 받을 경우 손씨의 가족은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손씨의 묘가 다른 곳으로 이장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가족들의 입장과 관련법규 등을 감안해 보면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손씨의 가족은 “도립공원에 묘를 쓰는 게 불법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매장한지 두달이 채 지나지 않은 묘를 이장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입장이다. 손씨의 가족을 대리해 군청과 접촉해온 제자 조씨는 “도립공원 안에 있는 묘지가 한둘이 아닌데, 이번의 경우만 문제삼는 건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얘기까지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군청측은 “명백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나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정황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법대로’ 처리할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묘지 이장될 가능성 희박

그러나 현행 법규에는 묘지 불법조성에 대한 처벌을 받고서도 계속 이장을 거부할 경우 행정당국이 강제로 이장을 집행할 권한이 규정돼 있지 않다. 불법묘지의 경우, 땅 주인이 묘지 연고자를 상대로 강제이장이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손씨의 묘는 땅 주인과 묘 연고자가 동일인이기 때문에 소송이 성립될 여지도 없다.

손씨의 묘는 예산군이 지역기념물로 관리하는 남연군 묘에서 불과 5백m 거리에 있다.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는 그 자리가 천하명당임을 안 대원군이 이미 세워져 있던 절을 불태워 없애면서까지 묘를 이장한 곳이다. 남연군 묘는 덕산온천과 더불어 예산군의 대표적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손씨의 묘가 부근에 있다는 게 알려진 후로는 남연군 묘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손씨의 묘까지 둘러보고 있다. “육관도사가 묻힌 땅이 얼마나 명당인지 보자”며 일부러 먼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처럼 손씨의 묘가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하자 예산의 향토인사들 사이에서는 “묘를 이장할 게 아니라 관광자원으로 양성화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덕산온천지구, 남연군 묘 등과 연계해 홍보만 잘 하면 군의 살림살이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산군청의 한 간부는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가는 얘기지만 법규상으로는 수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밝혔다.

손씨의 묘가 일부의 희망대로 ‘양성화’되는 길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도지사가 묘터 일대를 도립공원지정지역에서 해지하고 용도변경 절차를 거쳐 공원묘지로 개발하면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임야 소유주 또는 묘지사업자가 엄청난 개발이익을 얻게 돼 특혜시비를 낳을 게 자명하다.

처음부터 공원묘지 개발이 시도되었다면 몰라도 불법조성된 특정인의 묘를 양성화한다는 명분으로 행정기관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일을 추진하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씨의 가족은 당국이 묘지를 이장하지 않아도 되게끔 ‘선처’해준다면 가족 소유의 임야 일부를 노인복지시설이나 청소년수련장 등을 건립하는 데 활용할 수 있도록 희사할 뜻이 있음을 조심스레 내비치고는 있다.

그러나 가족들의 희망이 실현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은 게 현실이다.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일세를 풍미하고 간 풍수지리가 손석우씨의 묘는 당분간 세간의 논란의 대상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