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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씨가 처음으로 신라에서 왕이 된 이유는? (5부)

이름없는풀뿌리 2017. 5. 4. 16:34

김씨가 처음으로 신라에서 왕이 된 이유는? (5부)
사랑에 빠져 신라왕을 황제로 봉한 중천태왕
 기사입력: 2015/05/08 [10:18]  최종편집: ⓒ pluskorea
성훈 컬럼니스트
<고구리사초·략>에 “중천태왕 12년 기묘(259) 봄 정월, 첨해(沾解)를 ‘신라국황제(新羅國皇帝)·동해대왕(東海大王)·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봉하여 금・은 인장 두 개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리태왕이 당시 신라의 첨해이사금을 신라국의 황제로 봉했다는 사실에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초기신라는 자치왕국(自治王國)이 아니라 고구리의 제후(속국) 같은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 지증왕 4년에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라/사로/신라라 했는데, 이제 신라라는 국호를 정하면서 ‘신은 덕업을 일신(德業日新)한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四方網羅)한다’는 뜻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또한 예로부터 국가를 지닌 분은 다 제왕(帝王)이라 칭했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22대에 이르도록 다만 방언(方言)만을 칭하고 존호(尊號)를 바로잡지 못했으니, 지금 여러 신하의 모든 의견에 의해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존호를 올리시옵소서.”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때까지 국호와 존호조차 제대로 없었던 신라의 통치자는 왕이라 불리지 못하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간(干)이란 칭호를 쓴 것으로 보아 초기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제후)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인다. 게다가 초기 신라는 고구리와 전쟁한 기록이 별로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광개토호태왕 비문에 “백잔과 신라는 예전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라는 문구와, 영락 9년(399) 왜가 신라에 쳐들어오자 신라의 통치자가 호태왕에게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하면서 ‘노객(奴客)’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신라는 본시 고구리의 속민(屬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신라에서 사신이 와서 원병을 청하는 장면                                         © 편집부

신라의 왕위를 계승한 성씨는?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워 3대까지 박씨가 다스리다가, 4대에 이르러 다른 성씨인 석탈해(昔脫解)가 통치한다. 이어 5대~8대까지 다시 박씨가 이사금(왕)이 되었다가, 9~12대까지는 석씨가 다시 이사금이 된다. 석씨인 11대 조분(助賁)이사금의 모친이 바로 아래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씨 옥모(玉帽)부인이다.  

석조분이 죽을 때 석유례(昔儒禮)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어려서 그런지 조분의 동복아우인 석첨해(沾解)가 12대 이사금에 오른다. 첨해 역시 김옥모의 아들이다. 첨해가 후사 없이 죽자 조분의 적장자가 엄연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김미추가 왕위를 계승한다.
 
김씨가 최초로 신라의 이사금이 된 이유는 바로 미추가 김옥모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옥모의 부친 김구도는 시조 김알지의 6세손이고, 미추는 구도의 아들이다. 왕족인 박씨도 석씨도 아닌 친정동생 김씨를 마음대로 왕위로 올릴 수 있었던 김옥모부인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고구리가 신라를 황제국으로 봉한 이유 
 
아래 이야기는 <고구리사초·략>에만 있고, <삼국사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기록들이다.
당시 신라의 첨해이사금은 자신의 딸을 고구리 중천태왕에게 후궁으로 바쳤고, 첨해가 어머니 옥모(玉帽)태후와 함께 고구리를 방문했을 때 옥모를 본 중천태왕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해 진귀한 선물도 주고 옥모를 태후의 예로 받들면서도 후궁으로 거두고 싶었으나, 전(鳣)태후가 이를 시샘해 그리하지 못했다. 
 
첨해가 돌아가려 하자 중천태왕은 옥모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이고는 친히 부축해 수레에 오르게 했다. 그리고는 신라에게 죽령(竹岺) 땅을 하사해 되돌려주니 신라로 귀화하는 백성들이 8천여 호나 되었는데, 세세토록 형제나라로 지내자고 쇠판에다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태왕은 옥모태후에게 여러 차례 진귀한 선물을 보내니, 옥모태후는 그 성의에 감읍하게 된다.

중천태왕 8년(255) 10월 백제의 고이왕이 신라의 봉산성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자 옥모는 몸소 국경으로 태왕을 찾아와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태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고이왕이 화친을 청해 서로 대치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삼국사기 백제·신라본기>에 공히 “백제가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그 사실성이 입증된다.

그때 관계를 맺었는지 이듬해 8월 옥모가 황자 달가(達賈)를 낳으니, 태왕은 사신을 보내 옥모를 황후로 삼고 첨해를 황자로 삼는다. 이후 중천태왕은 옥모와 가끔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 중천태왕은 12년 기묘(259) 봄 정월에 첨해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으로 봉하여 금・은 인장 두 개를 하사한다. 
 
이어 사람을 보내 옥모에게 새 궁전을 고쳐주었고, 황금 천 냥과 백금 만 냥 및 공인 200명까지 보내준다. 신라가 가물고 황충(메뚜기떼)이 일어나 도둑이 많아졌다는 보고를 듣고는 곡식 2만석, 소와 양 8천두, 타락과 술, 피륙과 비단 등을 헤아리지 말고 보내라고 어명을 내릴 정도였다. <삼국사기>에 “가을 7월 가물고 황충이 일었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그 사실성이 입증된다.  
             
보다보다 못한 전태후가 말리며 “제가 듣기엔 위(衛)왕이 하희(夏姬)를 좋아하다가 아들에게 죽었다고 합디다. 지금 폐하는 옥모를 첩으로 삼고 첨해를 아들로 삼았으니, 이는 늙은 여우를 품에 안아서 사나운 고양이를 달래려 함인데, 저는 이 일의 위험함을 감히 잊을 수 없소이다.”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태왕이 “신이 매번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허나 신에게는 모후가 계신데, 어찌 감히 그들에게 푹 빠져버리겠습니까? 신라를 병합할 계획이 있음입니다.”라고 억지로 둘러댔다.  

참고로 춘추시대 진(陳)나라의 하희는 중국역사를 통틀어 가장 음탕한 요부로 평가되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경국지색의 미모에다가 방중술까지 빼어나 남자들은 그녀와 잠자리를 못해 안달이었다. 왕과 대부들도 죽는 줄도 모르고 불나방처럼 그녀 주위로 모여 들었다. 지아비 잡아먹는 계집이라는 소문이 무색하지 않게 하희와 잠자리를 한 남자들은 모두 자기 명(命)대로 살지 못했다고 한다. 
   

▲ 성종임금도 탐한 조선조 최고의 음녀 어을우동     © 편집부

7월에 옥모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아뢰길 “친애하는 지아비 황상의 도움으로 이렇듯 새 궁전을 지었으니, 천자(天子)를 여기로 모셔서 이 원앙이 암컷의 정을 풀어내고 싶습니다.”라고 청하니 태왕이 신라에 가려고 했다. 그러자 전태후가 “폐하가 거기로 가시면, 제가 누대에서 투신할 것이오.”라고 강하게 말리니 차마 가지를 못했다. 필시 중천태왕의 눈에 옥모라는 콩깍지가 낀 것 같아 보인다.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되는 김씨  

중천태왕 14년 신사(261) 12월 28일 첨해가 갑자기 죽고, 조분(助賁)의 사위 미추(味鄒)가 황위에 올랐다. 미추는 옥모의 동생으로 글을 올려 신라국의 황제를 세움에 대해 청하기를 “조카인 황제(첨해)가 나라를 등져서 모든 신하들이 신에게 감국(監國)하라고 하나, 신은 재주가 용렬해 보위에 오르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누님이신 후(옥모)와 형황(중천태왕)께서 될 만한 사람을 정해주심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청했다.  

태왕이 옥모와 동침하다가 이 급보를 듣고서 옥모에게 묻기를 “당신 동생 미추가 조신하고 후덕하여 가장 나으니, 또한 시켜볼 만하지 않겠소?”라고 물었더니, 옥모가 눈물을 흘리며 “신첩은 이미 나라를 짊어지고 와서 지아비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아비이신 황상의 뜻이 바로 소첩의 뜻이옵니다.”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중천태왕은 명림어윤으로 하여금 칙명을 받들고 신라로 가서 미추를 ‘신라국황제(新羅國皇帝)·동해대왕(東海大王)·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봉하고 금・은으로 만든 인장들과 곤룡포와 면류관을 하사하니, 이날이 바로 임오년(262) 정월 25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신라는 격이 훨씬 향상된 황제국이 된 것이었다.  

▲ 황제와 황후의 곤룡포와 면류관     © 편집부

중천태왕에 의해 졸지에 신라의 황제가 된 미추이사금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후손으로 그 계통은 알지--> 세한--> 아도--> 수류--> 욱보--> 구도--> 미추로 이어진다. 김씨가 김알지 탄생 약 200년만인 262년에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3대 미추 이후 14~16대는 석씨가 왕을 하다가, 17대 내물이사금부터는 김씨가 계속 신라의 왕이 된다. 결국 천년 신라를 통치한 성씨는 박씨가 10왕 231년, 석씨가 8왕 173년, 그리고 김씨가 38왕 587년이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5123 참조)

신라의 11대 조분(석씨)이사금의 모친인 김옥모의 친정동생인 김미추는 조분이사금의 사위가 된다. 조분의 동복아우인 12대 첨해(석씨)이사금이 후사 없이 죽자 느닷없이 김씨인 미추가 이사금이 된 이유는 순전히 고구리 중천태왕의 황후가 된 누이 김옥모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초기신라는 고구리의 제후국(속국)이었음이 확실하다 하겠다. 또한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이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라는 말을 새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원본 기사 보기: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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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5/08 [10:18]  최종편집: ⓒ pluskorea

출처;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42538§ion=section78§ion2=한국통사/정립/유물유적문화재/역사인물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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