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벽화 - 덕흥리 고분
1. 의의와 분포
고구려 벽화의 바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주로 초기에 그려진 춤무덤.씨름무덤.세칸무덤과 같이 벽에
회를 발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경우와, 다섯무덤(오회분) 사신무덤과 같이 잘 다듬은 돌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이들은 모두 후기 벽화에 속한다.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고분벽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마치 현대의 매스컴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기록으로 나타내 주는 신문이라면, 벽화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생생
하게 보여 주는 텔레비전 영상과 같은 것이다. 더욱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사의 상당량이 외국 기자들이 피상
적으로 쓴 외신을 인용 보도한 것이 많지만, 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직접 제작한 생생한 화면 뉴스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현대미술의 족보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복 받은 민족이다.
우리 선조가 1,500년 전에 그린 그림이 아직도 남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자부와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외국 학자는 "벽화는 현대미술의 족보입니다. 벽화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합니다"라고 했다. (이종상 '아!고구려', 조선일보)
고구려 고분벽화는 현재까지 대략 95기가 발견되었다. 집안지역에는 23기가 있는데, 모두루총, 환문총, 각저총
(씨름무덤), 무용총(춤무덤), 삼실총, 통구사신총, 오회분(다섯무덤)4호묘, 오회분(다섯무덤)5호묘, 만보정1368
호분, 장천1호분, 산연화총 등이 이곳에 있다. 또 최초의 수도였던 환인현지역에는 미창구장군묘 1기가 발견되
었다. 북한에서는 평양지역에 동명왕릉, 진파리1호분, 내리1호분을 비롯해 24기가 있고, 천왕지신총, 요동성총
등 4기가 순천지역에, 쌍영총, 강서중묘, 강서대묘, 덕흥리고분, 약수리고분 등 21기가 남포지역에 있다.
또 팔청리고분을 비롯한 6기가 대동지역에 있고, 기타 온천지역에 2기, 평원지역에 1기, 평성지역에 1기 등
평양과 평안남도 지역에만 59기가 있다. 또 황해도에는 안악지역을 중심으로 안악3호분, 평정리1호분을 비롯한
12기가 있다.
이렇듯 고분벽화는 집안지역과 평양, 안악, 남포, 순천, 대동지역 등 고구려의 중심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및 고려에도 고분벽화가 있기는 하지만, 양과 질에서 고구려와 비할 바가 못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인의 혼이 담겨진 위대한 예술작품이며, 그들의 사상과 생활모습이 담겨진 고구려사
의 귀중한 연구자료이기도 하다.
2. 벽화의 기원과 발전
고분벽화가 고구려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무덤 안에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시대의 산동성 지역
을 중심으로 성행한 석관(石棺) 등에 그림을 새긴 후 채색하지 않는 화상석(畵像石)에서 고분벽화가 발전한다.
고구려에서 최초로 벽화가 그려진 고분은 만보정1368호 고분으로 3세기 초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크게 발달한 반면, 중국에서는 요동지방에 삼도호묘(三道壕墓)를 비롯한 10여 기의
무덤이 있었을 뿐, 고분벽화가 크게 발전하지 못한다. 북위시대에는 낙양(洛陽)지역에 6세기 초의 무덤이 몇 점
있을 뿐이며, 북위가 멸망한 후 동쪽에 세워진 동위와 북제의 경우는 대략 15기 정도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나,
서쪽에 세워진 서위와 북주에는 겨우 4기 정도만이 있다. 남북조의 무덤들은 소재면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와
유사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주로 무덤주인의 연회장면이나, 행렬도 등의 그림이 주가 된다. 청룡과 백호, 신인
(神人), 기이한 동물 등의 그림이 있으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는 짜임새와 치밀한 묘사, 생동감, 색채의
화려함 등은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수준이다.
고분벽화는 주로 돌에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돌을 이용한 무덤의 분포는 산동성, 요동성, 만주와 한반도 등 주로
과거 동이족이 거주했던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남북조시대 남조의 한족의 무덤에는 고분벽화가
없고, 북조의 것들은 벽돌에 그려진 것이 있을 뿐이다. 또한 요동지방 석실묘의 고분벽화들은 선비족의 것들이
많은데, 선비족은 한족과 다른 동방문화권에서 자라 온 종족이다. 더불어 고구려에서 고분벽화가 가장 발달하여
꽃피워졌다는 사실은 4~7세기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3. 구조와 주제
벽화가 그려진 고분의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가장 완전한 형태는 입구에서부터 시신이 놓여 있는 방까지 들어
가기 위한 널길과, 무덤의 가운데에 있는 방인 앞방, 앞방 좌우에 있는 방인 곁방, 방과 방을 잇는 이음길,
그리고 무덤의 맨 뒤에 있으면서 시신을 놓는 널방의 구조로 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구조물들이 모든 고구려
벽화무덤 전부에 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벽화고분들은 초기에는 널방만 있는 간단한 구조에서 널방을
비롯해서 앞방, 곁방 등 여러 방이 있는 무덤들로 변해가기도 하지만, 후기에 들어서면 널길을 통과하면 널방이
있는 간단한 무덤으로 정리된다. 고구려의 고분은 초기의 거대한 무덤에서 후기에는 간략한 무덤으로 변해
가는 추세를 보인다. 반면에 벽화의 색채나 내용은 후기로 갈수록 보다 발전한다.
고분벽화는 죽은 자를 위한 예술이다. 고분벽화는 가장 주된 주제에 따라 크게 인물풍속, 장식무늬, 사신도
고분벽화로 구분된다. 초기의 고분벽화는 주로 주인공의 생전에 즐거웠던 일들과 업적을 그린 인물풍속도가 주로
그려졌다. 중기의 고분벽화에서는 각종 장식무늬가 그려진다. 장식무늬만이 전부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인물
풍속, 사신도와 함께 그려진다. 후기의 고분벽화는 사신도가 널방의 4벽을 가득 채우고, 천장에는 신선의 그림
들이 그려지는 특징을 갖는다. 이같이 고분벽화는 시기에 따라 양태를 달리하며 다양하게 발전한다.
안악3호분
안악3호분 전경
회랑벽화 : 행렬
앞방 오른쪽 곁방 무덤여주인
무용총
널방 왼벽 벽화 : 음식상 나르기 , 춤과 노래로 배웅함.
널방 천장고임 벽화
널방 안벽 벽화 : 무덤 주인 부부 가내생활
널방 왼벽 벽화 : 씨름
현재 남아있는 고분벽화 중 45기의 무덤에서 생활풍속을 벽화의 일부 혹은 전체의 주제로 삼고서 4~7세기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전해주고 있다. 고분벽화에는 무덤 주인이 생전에 생활했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
하고 있다.
벽화의 주된 내용들은 고구려 귀족들이 죽기 전에 생활하던 모습들로 무덤주인의 부부그림, 야외 행렬그림,
사냥하는 그림, 노래하고 춤추는 그림, 연회를 즐기는 그림, 생활주변의 모습을 그린 그림, 각종 오락을 즐기는
그림, 해와 달, 별의 그림 등이다.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안악3호분과 무용총(춤무덤), 수렵총, 각저총(씨름무덤), 덕흥리벽화고분, 수산리벽화
고분, 장천1호분 등이 있다.
나. 장식무늬계 고분벽화
5세기에 들어서 고분벽화의 구성, 주제 설정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특징은 연꽃과 같은 장식무늬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는 것이다. 장식무늬만이 그려진 벽화고분이 9기나 되며, 장식무늬의 비중이 큰 벽화는 대략 16기나 된다.
이들 중 13기가 집안지역에 밀집해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평양지역과 집안지역 사이에 어떤 종교.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주된 무늬는 동심원무늬, 왕(王)자무늬, 연꽃무늬, 불꽃무늬, 화초
무늬, 구름무늬 등이다. 각 무늬별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하겠지만, 상징성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 무늬 중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연꽃무늬이다. 연꽃무늬는 시대별로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고 있어 구체적인
종류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연꽃무늬에 대해서는 대개 불교적인 것으로 보아왔지만, 불교 전래 이전부터
연꽃무늬가 사용되어 왔고, 불교와 관련 없는 신선이 연꽃잎 위에 서있는 모습도 있으므로, 연꽃이 상징하는
의미는 매우 다양한 것이다. 연꽃은 세계 각국에서 사용된 무늬로 이집트에서는 태양과 재생을 상징하기도 했으며,
중국에서는 천제(天帝)를 상징하거나 태양을 나타내는 존재였다. 또한, 연꽃은 불교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연꽃은 직접 부처를 상징하거나, 정토세계의 여러 존재를 탄생시키는 존재로 이해된다. 연꽃무늬
만이 그려진 산연화총, 연화총 그리고 장천1호분 널방의 연꽃그림은 모두 연화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불교적 내세관의 구체적 표현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서 그려지는 연꽃은 불교적 의미가 많이 퇴색
하고 보다 폭넓은 신성함을 나타내는 무늬라고 여겨진다.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산연화총, 연화총, 환문총, 동명왕릉 등이 있다.
다. 사신도 고분벽화
사신이란 동서남북 4방위의 수호신을 말하며, 동쪽에 청룡(靑龍), 남쪽에 주작(朱雀), 서쪽에 백호(白虎), 북쪽에
현무(玄武)가 있다. 이들은 모두 상상의 동물 형상이다. 청룡과 백호는 서로 그 모습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며, 주작은 때로는 수탉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현무는 거북과 뱀의 조화로운 형상을 띄고 있다.
사신도는 초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천장 부분에 작은 형태로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후기에 내려오면서 사신도
가 고분 전체의 주제가 되면서 고분의 4방위에 각기 한 면을 차지하는 큰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후기 고분벽화에
나온 사신도는 뛰어난 생동감과 함께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여 예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고구려 사람들에게 사신이란 저승세계로 가는 길을 호위해 주는 신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무덤을 영혼이 머무는
장소로, 영혼이 저승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장소로 생각했던 그들에게 정승으로 가는 길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사신도를 벽화 전면에 그린 것이다. 고산리1호분의 널방에 그려진 백호와 청룡에는 각기 백신(白神)과 청신
(靑神)을 나타내는 글씨가 써있기도 하다.
사신도는 현재 남아있는 문헌을 통해서 고찰한다면 중국의 문헌에 기원전 시대부터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중화문명만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 대의 화상석과 낙랑군에서 출토된 구리거울에서 사신도가 보이
기는 하지만, 중국의 고분벽화에서는 사신도가 단 한번도 벽화의 대주제가 된 적이 없다. 중국의 고분벽화에서
사신의 묘사란 극히 부분적이며, 그림 수준도 지극히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반면 고구려에서는 강서대묘의
사신도에서 보듯 고분벽화의 큰 주제로 대접받는다. 이것은 고구려만의 특징이다. 사신도가 그려진 벽화고분은
현재까지 34기나 된다. 사신도는 무용총, 장천1호분 등에도 그려져 있으나, 사신도가 벽화고분의 대주제로 나타
나는 것은 6세기 이후의 일이다.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강서대묘, 강서중묘, 오회분(다섯무덤)4호묘, 오회분(다섯무덤)5호묘, 통구사신총 등이다.
라. 기타벽화
삼실총 제3실 앞벽 벽화 : 역사(力士)
삼실총 제2실 서벽 벽화 : 갑주무사(甲胄武士)
덕흥리 고분의 별자리 ㅡ 카시오페아 & 케페우스 座
지난 주 금요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던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유산" 학술토론회에서 김일권 정신문화 연구원 연구교수의 발표를 들은 바가 있었다. 서벽에 보이는 W자 별자리를 카시오페아 별자리로 각각 추정했다. 그날 발표문에서는 좀 새롭다 정도로 끄치고 별다른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음날 서울랜드에서 열리고 있는 "고구려특별전" 개막식에서 나는 김일권 교수와 만나서 어제 발표 논문에서 이 부분이 매우 신선하다고 말하고, 이 부분을 더 적극적으로 확대해서 동서 문화 교류까지 연결시켜 보라고 했더니, 김일권 교수는 크게 자극받아 기분이 좋다며 흥분을 했었다. 고분벽화에서 표현한다는 것은 분명 재미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나 중원지역에는 아직 이런 별자리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고구려가 그리스와 직접 교섭이 있 거나, 그렇지 않다면 중원의 천문사상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천문사상의 발전의 흔적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벽화에 자주 그려지고 있는 것을 비교한다면 분명 의미잇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도상을 통해 고구려 문화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은 어떤 역사책의 한줄의 기록보다 더 큰 정보를 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북한의 이준걸 정도외에는 이런 별자리에 주목한 사람이 드물었다. 나는 김일권 박사와의 개인적인 오랜 친분(나의 1년 선배)으로 인해 내가 알고 있는 천문정보를 이미 예전에 김박사에서 넘겨주고 옆에서 박수만 쳐주어왔다. 덕흥리 고분벽화에서 선후, 선왕 별자리를 찾아낸 김일권 박사의 연구는 분명 고구려 연구에 작지만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을 것 같다. 말이다. |
덕흥리(德興里) 고분벽화
408년, 묘주: 진(鎭)-연(燕) 출신의 망명객으로서 유주사인지 아니면 구구려인으로서 광개토왕대 고구려의
유주경략 및 경영과 관련 있는 인물인지 논란
구조
두 칸 무덤 / 천정부는 도움식 / 남향
벽과 천장부 하단에 목조가옥의 골조를 그려 넣고 그 안에 생활 풍속의 각 장면을 묘사
묘주인의 사후 저택으로 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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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고분의 평면도 요약 |
덕흥리고분벽화의 투시단면도 |
널길: 괴물 수문장, 연꽃과 인물
앞 방: 묘주인출행도, 13군태수배례도(十三郡太守拜禮圖), 묘주인의 막부업무도(幕府業務圖)
앞 방 천장: 해와 달, 60여 개의 별자리, 신앙과 관련된 상상 속의 존재들
이음길 입구 상단: 묵서로 묘지명이 기록
이음길 벽: 묘주부인 출행도
널방 벽: 연못, 묘주인의 칠보공향행사도, 마사희도, 우교차도, 묘주인정좌도, 마구간, 외양간, 누각, 고상창고,
가내실설도
고구려 귀족의 저택이 사랑채와 안채로 나워졌음을 짐작케 한다.
구조의 변화
고구려식이라고 할 수 있는 두칸 무덤으로 바뀌었다.
묘주의 초상이 곁방만이 아닌 앞방 안벽과 널방 안벽에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인식상의 문제(곤경)이 목격된다. 중국의 한, 위, 진대 고분에서 무덤 앞 방의 오른 쪽 곁방은 혼전(魂殿)
으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묘주의 초상이나 그들 부부의 초상은 오른 쪽 곁방에 그려졌다. 안악3호분도 이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덕흥리 고분은 이런 점에서 앞 시기의 전통에 대한 혼란이 인식과 표현에 들어나고 있다.
이후 고분들에서는 구조의 변화와 함께 묘주인 초상은 더 이상 앞방 벽에 그려지지 않게된다.
화면 구성의 변화: 묘주인초상, 13군태수, 묘주인 출행, 견우와 직녀
<묘주인 초상>덕흥리벽화고분 앞방 북벽 | <묘주인 초상> 부분 |
<묘주인 초상>과 <13군태수>, 408, 덕흥리벽화고분 앞방 북벽과 서벽 |
삼각형 구도가 약화된 반면 계급에 따른 인물 크기의 비례에 의존하는 표현방식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인물표현은 여전히 몰개성적이고 앞 시기에 비해 거칠고 뻣뻣한 필선으로 묘사된 인물과 동물의 움직임은
어색해 보인다.
<묘주인 출행>, 덕흥리벽화고분 앞방 안벽벽화 |
나열식으로 펼쳐진 인물과 대상들은 공간적 깊이를 느끼기 어렵게 한다.
<견우와 직녀>, 덕흥리벽화고분 앞방 천정 남벽 |
<여인들과 소수레>, 덕흥리벽화고분 널방 북벽 동쪽 |
복식이 안악3호분에 비해 훨씬 고구려의 특징을 들어내고 있다. 특히 주름치마에서 이 점은 분명하다.
<수렵>, 덕흥리벽화고분 앞방 고임벽화 |
산과 나무가 아직 독자적인 회화의 표현 대상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그 표현이 서툴다.
특징 및 종합
덕흥리 고분 벽화는 앞시기(4세기 중엽)의 안악3호분과 무덤의 구조, 벽화 중 묘사 대상의 표현 내용, 방식,
기법 등에서 구별된다.
벽화의 표현기법은 후퇴하는 기미를 보이는 반면, 무덤 구조 및 묘사 대상 가운데 인물의 복식 등은 고구려적
분위기를 더 뚜렷이 띠고 있다.
새로운 고구려 회화 양식을 읽어내기는 어려고 혼란된 국면을 보인다.
이러한 점은 5세기 초 고구려 사회는 새롭게 접하거나 영역화한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수용하거나,
이를 소화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암시한다.
덕흥리 고분 천장 세부사진
(그림1)
덕흥리벽화분 벽화 : 선인과 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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