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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 고분벽화 - 장군총

이름없는풀뿌리 2017. 5. 13. 20:43

장군총 ㅡ장수왕릉      /  길림성 집안

 

역사문헌자료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거쳐 28명의 왕이 있었는 데, 그중 18개의 왕릉이

길림성 집안 동구(洞沟)옛무덤군에 분포됐다. 그 가운데서도 장군총(将军坟)은 이미 확인된 왕릉 중 제일 완벽하게

보존된 하나로서 뾰족한 추형(锥形) 외관으로 하여 《동방의 피라미트》로 불리우고 있다. 장군총은 고구려 제20

대왕 장수왕의 릉묘로서 장수왕이 왕위를 물려받을 때인 기원 5세기 초에 세워졌다.

청조 동치(同治)말년에 중원의 재해민들이 봉쇄되어 있던 장백산으로 들어오면서 웅장한 이 무덤을 발견하고

변강을 지키는 장군의 릉묘로 여기고 《장군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장군총은 북쪽으로 룡산, 서쪽으로 우산(禹山)과 린접해 있으며 남쪽에는 압록강이 흐르고있다. 앞쪽으로 호태

왕비를 마주하고 고구려왕 수도인 국내성이 멀리 내다보인다. 장군총은 지세가 우월하고 건축이 웅장하다.

장군총은 화강암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석조(石条)를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다. 밑부분은 정방형에

가까우며 기단(基壇)의 한변 길이는 31.58메터, 1100여개의 석조를 22층으로 쌓아올린것으로서 높이는 12.40

메터에 달한다.

 

묘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5메터, 높이가 5.5메터로서 바닥에 두개의 크기가 부동한 석관이 놓여있다. 관두껑

돌은 50여톤의 거대한 화강암석판이다. 릉묘 천정은 한개 변이 13.2~13.7메터이고 매개 변마다 20여개의 구멍이

나있다.

장군총은 거대한 석조사이에 조약돌을 메워놓았으며 자신의 무게로 하여 외부로 생기는 장력이 생겼다.

이런 장력을 상쇄(抵消)하고 견고성을 보장하기 위해 매면에 10톤짜리 거석 3개씩 눌러놓았는데 현재는 11개만

남아있다.

이런 거대한 돌들은 전부 22키로메터 밖의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것이라고 한다. 운수도구와 기중도구도 없었던

1500여년전, 고구려 장인들은 빙상운수와 통나무를 굴리는 방식 및 비탈에 흙을 채우는 등 방식으로 한장한장씩

운반해왔고 또 한장한장씩 쌓아올렸다. 장군총의 건설은 고구려인의 총명재질을 충분히 반영했다.

 

장군총은 장수왕이 기원 427년에 고구려 수도를 평양을 옮기기 전에 이미 지어졌으며 장수왕이 세상을 뜬후

장군총에 시신을 묻었다.

장군총릉원은 설계가 완벽하고 석조공예가 정교하고 세밀하여 고구려석조릉묘중 최고급 건축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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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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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옆에서 사진촬영을 하고있는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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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무덤(陪坟).


길림신문

출처(연변모이자 yanbian.moyiza.com) : 갤러리 - 《동방의 피라미트》-집안 장군총 - http://yanbian.moyiza.com/t02_17/293648

 

 

 

 

 

 

 

  

   

동방의 금자탑, 장수왕릉(장군총)

 집안(集安)에 남아있는 만 2천여 개의 묘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능으로 거대한 크기와 빼어난 조형미를 갖추어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밑변의 길이가 32미터, 높이가 12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방단계단적석묘(方壇階段積石墓: 돌을 계단형식으로 네모지게 쌓아올린 형태의 무덤)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길이가 5.7미터인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 1100여개를 계단식으로 쌓아올렸다. 정면은 국내성 (集安)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 천지 (白頭山 天池)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7층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있는데 피라밋 위에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시설로 보이는 일종의 향당 (享堂)이 있었던 흔적으로보인다. 이는 고대 동이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유행하던 묘제의 하나이다.
    수많은 고구려 고분들 가운데 이 장군총에는 특별한 점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이 적석총을 둘러싼 12개의 받침돌(호석 護石)과 주변의 배총 (陪塚)이다.


    받침돌 혹은 호석은 돌을 쌓아 올린 무덤이 빗물이나 기타 외부압력에 인하여 밀려나거나 무너짐을 방지하기위해 세운 것으로 3개씩 4면에 총 12개가 있는데 십이지신상의 기원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현재는 그 중 하나가 소실되었다. 배총은 현재 하나만 남아있는데 과거에는 이 장군총의 네 모서리 방향에 있어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수호신을 상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배총은 고인돌 형태로 남아있다.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대를 이어 고구려의 대정벌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대 장수왕릉의 능이라는 견해가 압도적인데 아직 분명한 것은 아니다.

 

 

 

 

장군총 1930년대 모습

   

성균관대 박물관이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 통구 12호의 벽화(행렬도·왼쪽 사진)와 장군총의

1930년대 모습을 19일 처음 공개했다. 사진은 일제 총독부 박물관장을 지낸 후지타 료사쿠 경성제대 교수가

촬영한 것이다.


1937년 발견 직후 촬영된 통구 12호 벽화는 주인 부부와 시녀, 시종들이 줄지어 걷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지금은 크게 훼손돼 원형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성균관대 박물관은 고구려 유적 사진 120여점을

모아 22일부터 12월 22일까지 ‘지안(集安)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특별전시회를 연다.


 

 

 

 

장군총

 
한 밑변 길이 32미터, 높이는 12미터가 넘는다. ( 5층 아파트 높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군총은  '고구려 임금의 무덤'이 아니다.
장군총은 고구려보다 훨~씬 더 오래된 무덤이다.
장군총에 기대어 세워진 12개의 [선돌(자연석 돌기둥)]과 
장군총의 배총인 4개의 [고인돌]도 이를 밝혀준다.
 
[장군총 고인돌 - 원래는 4방에 있는데 지금은 1개 남음.]
  
[선돌]과 [고인돌]은 대강 기원전 2세기까지 만들던것.
즉 [광개토대왕]때보다 약 6백년 전에 이미 그만 만들던 것들.
그런데 6백년 후인 광개토대왕때 갑자기 다시 세웠다고?
 
장군총이 고구려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장군총 내부]
 
장군총은 [고구려 무덤들]하고 완전히 다르다.
형식도 완전히 다르고 벽화도 없다.
 
 [고구려 무용총 천장]
 
무용총 천장과 장군총 천장을 비교해 보시라.
만일 장군총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면
벽화도 없이 저리 만들어 놨을까.
그 수많은 고구려 벽화를 생각해보시라.
 
 
[덕흥리 고분]은  영락(永樂)18년
즉 광개토대왕 즉위 18년에 죽은 [유주자사의 무덤]이라고
아예 글자까지 써놓은 무덤.
물론 무덤이 흙속에 있다.
광개토대왕의 신하 무덤에는 저렇게 그림에 글자까지 다 있는데
장군총은 그림도 글씨도 전혀 없다.
장군총이 광개토대왕 혹은 장수왕의 무덤이라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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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 고분]  
 
 

[동명왕릉 - 평양 역포구역 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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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북한 평양)]

 

위 무덤은 북한이 [고구려시조 동명왕릉]이라고 발표한 것.

저 무덤이 [고구려시조의 릉]이던 아니던 간에  양식으로 보아 광개토대왕때의 고구려무덤보다 더 전 것. 

 

그런데 그때 이미  피라미드에 흙을 덮는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하단만 돌피라미드고 그 위는 흙이 보인다. 안에는 변형된 작은 피라미드 모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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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묘실을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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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묘실의 천정구조]

- 천정 주위로 벽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저 때 이미 [고분 벽화]를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장군총에는 그림도 전혀 없다.

 

정사각형 모양으로 돌들을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게 쌓아올린 형식.

변형된 피라미드다.

위와 같이 동명왕릉때는 이미 무덤 건축구조가 많이 달라져 있다.

 

[고구려 각저총 구조도]

 

동명왕릉도 위 각저총과 구조가 비슷하다. 

즉 안에다가 많이 변형된 작은 피라미드 형식의 묘실을 만들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장군총과 많이 다르다.
 
 
[고구려 덕흥리 벽화고분]
 
위 덕흥리 고분은 수백자의 글자가 발견되어서 유명한 [유주자사 진]의 무덤.
그런데 이 고분에 쓰여진 것이 이 고분을 [광개토대왕 18년]에 만들었다는 것. 
즉 광개토대왕과 같은 시대의 무덤.
 
이 고분은 피라미드 형식이 좀 남아있긴 하지만 이미 많은 변화를 보인다.
진짜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이 무덤과 비슷한 형식으로 크기만 클 것이다.
 
즉 장군총을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무덤으로 볼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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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태왕릉 - 누군가에 의해서 거의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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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 복원도 - (복원전문가 박진호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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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은 원래 장군총과 똑같이 생겼다.
지금은 많이 무너졌지만 장군총과 같은 [피라미드]인 태왕릉.
장군총보다도 몇배 크다.
무너진 후 지금 높이만 해도 15미터 - 원래 높이 25미터 추정. (10층 아파트 정도)
한 밑변 길이 64미터 (장군총은 32미터)
 
 
1990년도부터 중국학자들이 태왕릉을 본격발굴했다.
그런데 발굴한 유물은 공개하지 않는다.
유물이 없었던지 숨기고 있던지 둘 중 하나. 
 
나중에 유물을 하나 공개한게 
[태왕릉]이라는 글자가 써진 벽돌
 
 
저 명문전(글자 써진 벽돌) 중에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즉 [태왕릉이 산처럼 변하지 않기를 기원한다]는 귀절이 있다.
 
태왕릉은 장군총처럼 생긴 [돌 피라미드].
그런데 난데없이 무슨 벽돌인가.
장군총에도 벽돌같은 건 없다.
 
벽돌은 다음과 같은 무덤에 쓰이는 것.

 

[백제 무령왕릉 내부 - 온통 벽돌]

 
태왕릉은 크기만 클뿐 장군총과 똑같이 생긴 [돌 피라미드]
장군총에도 벽돌이 없다. 돌만 있다.
당연히 태왕릉에도 벽돌같은 건 없다.
 
만약 고구려 벽돌이 진짜 나왔다 해도 이는
고구려인들이 고대한국 피라미드가 당연히 선조의 것으로 생각하고
피라미드 위에 구조물을 지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만약 고구려인들이 피라미드 위에다가 뭔가를 지었다 해도
피라미드 자체는 원래 있었던 것이라는 것.
 
고구려 역대 임금은 한사람이 아니라 많다.
즉 많은 태왕(太王)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위에 보인 벽돌에 써있는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태왕릉이 산처럼 변하지 않기를 기원한다]는 귀절은 뭔가가 이상하다.
 
이는 마치 조선 임금 묘에다가
그냥 [조선 임금님 릉(무덤)이 변하지 않기를 기원한다]라고 써놓은 것과 같다.
조선의 [임금]은 많기 때문에 그냥 [임금님 릉 변하지 마세요]라고는 쓰지 않는다.
당연히 [세종 임금님 릉 변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어떤 임금 릉인지]를 밝히는게 당연하다.
 
그냥 [태왕릉이 산처럼 변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써 놨다는 것은
그걸 만든 사람들도 태왕릉이 [어떤 태왕]의 릉인지를 몰랐다는 얘기.
 
즉 태왕릉 피라미드가 워낙 크니까
그냥 '과거 고구려 어느 태왕의 무덤이겠지.
또는 고구려 이전의 한민족 어느 임금의 무덤이겠지' 하고  
그냥 [태왕릉이 산처럼 변하지 마세요] 하고 써 놨다는 것.
 
그러므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이 귀절은
그걸 쓴 사람들이 [태왕릉이라 불리는 피라미드]가 누구 것인지 몰랐다는 얘기.
그래서 꼭집어서 [어느 태왕의 릉]이라 쓰지 않고 그냥 [태왕릉]이라 썼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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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만 [호태왕]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방울의 [호태왕]이 광개토대왕이고

진짜로 이 [호태왕 방울종]이 [태왕릉 피라미드]에서 나왔다면 
[태왕릉 피라미드]는 더더욱 광개토대왕릉이 될 수가 없다.

 

광개토대왕 때의 신묘년(辛卯年 : 391년)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던 해.

18세 젊은 왕이 즉위하면서 이미 능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얘기인가^^

  

만약 위 방울의 [호태왕]이 광개토대왕을 뜻하는 것이라면

위 방울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그 즉위를 하늘과 선조에 고하는 행사를 태왕릉에서

했다는 얘기가 된다.

 

방울종을 만들고 피라미드에서 [즉위식]을 했다는 얘기.

 

만약 [태왕릉 피라미드]가 어느 고구려 임금의 무덤이었다면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대왕의 무덤 위에 올라가는 일은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고구려 당시에도 [태왕릉 피라미드]는 고대의 것이었고

그래서 거기서 즉위행사를 했다고 본다.

[태왕릉 피라미드]가 선조들이 만든 신성한 제단임에는 분명하므로.

 

또한 그래서 고구려인들이 피라미드위에 누각을 세웠을 수는 있다.

후에 발해인들도 태왕릉 등 거대한 고대한민족 피라미드에 누각을 세웠을 수 있다.

고대부터 원래 있던 돌 피라미드 위에다가.
 
이집트 대피라미드(기자피라미드)와  장군총, 태왕릉은 비슷하다.
겉 모양도 장군총을 그대로 크게 만들고 약간 보강하면 이집트 대 피라미드.
게다가 숱하게 나오는 [이집트 벽화]도 유독 대 피라미드에는 전혀 없다. 다른 유물도 전혀 없다.
(대피라미드는 도굴된 흔적이 전혀 없다. 도굴하기 어렵게 지어 놨다.)
 
장군총도 다른 진짜 고구려 무덤들하고 형식이 완전히 다르다.
장군총도 다른 [진짜 고구려무덤]에서 숱하게 나오는
[고구려 벽화]가 전혀 없다. 다른 유물도 전혀 없다.
 
[이집트 대피라미드 왕의 방]
 
위 사진에도 보이듯이 [이집트 대피라미드 왕의 방]은 장군총과 같은 모양.
 
[장군총 내부]
 
장군총 내부 저 방의 [천장 돌]은 무게가 무려 백톤!
이건 이집트 대피라미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장군총 내부]
 
태왕릉 내부도 장군총과 같다.
 
 
장군총에도 이집트 대피라미드 왕의 방에 있는 것 같은
석관(돌관)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누가 밀반출했을 것이다.
필자는 장군총 석관이 지금 일본에 있을 것으로 본다.
 
석관(돌관)은 고대한국에서 흔히 만들던 것.
한반도에는 고인돌처럼 석관이 널려있다.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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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 송국리 석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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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 대천동 석관묘 [연합뉴스 2006-11-15 ]

 

일반인의 무덤으로 보이는 위 석관이 여러개의 판돌을 써서 만들었다면
장군총 정도 되는 데에는 석관이 있었다면 이집트 대피라미드처럼 통석관이 있었다고 본다.
도굴꾼이나 어떤 나라의 학자가 장군총에서 훔쳐갈 거라고는 
그 통석관 밖에 없다.  
 
장군총과 이집트 대피라미드가 내부도 아주 비슷하다.
돌 쌓은 모습도 비슷하고 둘 다 벽화도 유물도 전혀 없다.
 
대피라미드의 표면에 작은 돌들로 덧쌓은 것만 걷어내면 
대피라미드는 장군총과 겉모양도 똑같다.
 
즉 이집트 대피라미드와 장군총은 같은 문명의 유물.
그런데 고대 이집트인이 한국에 온 흔적은 전혀 없다.
고대한국인이 이집트에 간 흔적은 많다.
이를 어떤 세계 학자들은 [고대 동북아에서 이집트로의 이동]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 [동북아]가 바로 고대한국.

 

고대한국계 추정 이집트 왕족들 
 
 
 

위 사진은 요녕(만주 서부) 홍산문명의 피라미드 무덤.

일종의 돌관(석관)묘인데
겉모양은 피라미드.
 
그런데
압록강 주변에는 장군총, 태왕릉 말고도 한민족 피라미드들이
무려 1만2천기나 있다.
 
 
 
 

 

위에서부터

 

1.장군총
2,3.  서울 석촌동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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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촌동 고분]
 
장군총 태왕릉과 마찬가지로
서울시 석촌동 피라미드들도 백제 때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백제보다 훨씬 더 전 것들이라는 근거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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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단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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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단군릉
 
 
 
 
 
 
 
위 사진들은 평양 단군릉 사진들 (북한 복원)
 
일제가 때려부순 단군릉을 재건하면서
북한은 장군총과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복원했다.
 
만약 북한이 단군릉을 조작한 것이라면
장군총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장군총을 고구려때 것이라 알고 있는데
고조선 무덤을 장군총과 같게 만들어 놓으면
조작한 거라는 의심을 살게 뻔하기 때문.  
 
단군릉이 장군총과 비슷한 모양인 것에 대해서 북한 측은
" 모르겠다. 고구려인들이 단군릉을 재건축한 걸수도 있고..." 라고 했다.
조작이라 하기에는 좀 어설픈 모습.
 
단군릉은 조작된게 아닌 것 같다.
북한은 단군릉의 유골이 [5,011±267년]전 사람의 것이라 말했다.
5천년도 더 전 사람의 유골이라는 것.
단군왕검은 약 4천3백여년 전 분이라 알려져 있는데 
7백년 정도 차이가 난다.
 
만약 북한이 조작을 했다면
유골이 약 4천 4백년 전 것이라 했을 것이다.
'엉뚱하게도' 5천년전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단군릉은 조작된 게 아닌 것 같다.
 
재건하면서 단지 규모를 좀 더 크게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태왕릉은 단군릉보다 더 크다.
 
단군릉 - 높이 22 미터,  한변 길이 50 미터
태왕릉 - 높이 25 미터 , 한변 길이 64 미터
 
장군총, 태왕릉도 단군릉과 비슷한 시기의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리안(알이안)을 찾아온 독일학자]들도 
만주, 서안 한민족 피라미드들의 유물 공개를
중국당국에 촉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황해 바다 속에는 1만년 이상 전의 피라미드들이 있겠지만.

 

출처;한국고대사 

 

 

 

 

장군총과 황금비율

 

 

[황금비율]이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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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나오는 [0.618] 이라는 유명한 숫자.

[황금 비율]이라는 숫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 사각형은 사람이 가장 안정감을 느낀다는 비율의 사각형.

[ 가로 : 세로] 가 [1: 0.618]

 

사람들이 가장 편안해 한다는 비율이기 때문에

명함, 신분증 등도 대체로 이러한 비율로 만들고

건축 등 실생활에 무척 많이 적용되는 비율.

 

( 검색해 보시면 [황금비율(= 황금분할)]에 대해서 많은 자료가 나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장군총]

 

후대에 즉 고조선, 고구려, 발해 때 정상에 누각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돌피라미드는 자체는 이미 고대한국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장군총.

 

장군총, 태왕릉은 고구려보다 훨씬 이전의 작품 <- 관련글

 

이 장군총에는 어떤 [황금비율]이 숨어 있을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myhome.shinbiro.com/%7Ekbyon/khome.htm]

 

옆에 기댄 돌 등을 빼고 재면

장군총의 순수한 피라미드는 위와 같은 길이와 높이.

 

[가로 대 세로]의 비율은 [29.34 : 11.28]

즉 [1: 0.384] 정도가 된다.

 

황금비율은 [1 = 0.618 + 0.382] 인데 장군총은 [0.384]가 나오는 것.

[0.382]와 [0.384]의 차이 즉 [0.002]는

오랜 세월, 거대한 돌로 만든 공사등을 고려할 때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수치.

 

즉 장군총은 [1 = 0.618 + 0.382]라는 [황금비율]로 만들어진 것.

처음에 만들어질 때부터 일부러 이러한 [황금비율]로 만들어진 것.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즉 장군총은 황금비율로 만들어졌는데

[여백의 미]를 살려서 작은 부분인 [0.382]를 취했다.

 

장군총의 더욱 자세한 실측도면이 있다면 많은 황금비율과

기하학이 숨어있겠지만 지금은 후일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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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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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피라미드들의 꼭지점 간 거리 비율 역시 [1: 0.618] 즉 [황금비율]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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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집안의 [황제묘 태왕릉 장군총]의 거리 간격 역시  

 

[1: 0.618] 즉 [황금비율]로 보인다.

 

 고대한국 3연성 피라미드 <-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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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촌동 피라미드는 위와 같이

큰 피라미드 제일 위단의 크기와 작은 피라미드 밑단 크기를  

[1: 0.618] 즉 [황금비율]로 맞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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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1: 0.618] 비율로 작아지는 사각형들을 연속하여 그린 것.

- 원래부터 세상에서 유명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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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촌동 피라미드는 위와 같이

큰 피라미드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올려놔야 완성된다.

 

큰피라미드 1단과 3단 그리고

작은 피라미드가 연속하여 황금비율[1: 0.618]로 작아지는 모습.

 

즉 큰 피라미드가 작은 피라미드와 떨어져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피라미드라는 상징적인 표현.

 

예를들어 큰 피라미드에 부모가 묻히고 

작은 피라미드에 자식이 묻혔을 경우 이런 구도가 또한 상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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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황금나선구조]로 유명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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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피라미드의 모습에서 [황금나선구조]가 연상됨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뜻있는 수학자분들의 세밀한 분석이 요망된다 하겠다.

 

피라미드가 이집트에서 한국으로 왔을까?

아니다.

 

유물 유적은 고대한국인들이 이집트로 가서

피라미드 건축을 전파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에서.

 

 

 

 

 

 

 

 

 

 

 

 

 

 

 

미창구 장군분묘

 

 

연꽃이 담고 있는

 

 

미창구장군묘 벽화

 

환인은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이 있던 곳이다. 부여의 망명객 주몽 일행은 오랫동안 이곳 비류수 가에 터 잡아

살던 송양국의 왕에게서 나라 한 귀퉁이를 얻어 겨우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송양국을 아우르고

비류수 유역 뿐 아니라 압록강 중류일대의 강자로 입지를 확고히 한 뒤,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로 서울을

옮긴다. 건국을 선언한 지 40년, 동명성왕 주몽의 뒤를 이은 유리왕 즉위 22년(기원 3년)의 일이다.

이후 졸본은 고구려왕이 시조묘에 제사할 때에 간간히 등장할 뿐 고구려 역사의 주무대로 역할이 주어지지

않게 된다. 고구려 사람들에게 졸본은 시조 주몽을 기리는 동명왕묘(東明王廟)가 있는 곳으로만 기억되게 된

것이다.

환인의 미창구장군묘(중국 요녕성 환인만족자치현 아하향 미창구촌)는 1991년 9월 발견, 조사되었다.

외형이 절두방추형인 이 흙무지돌방무덤의 흙무지 둘레는 150m에 이르며, 바닥부터의 높이는 8m 가량이다.

널길과 두 개의 퇴화형 곁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로 널방의

벽과 천장을 쌓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 네 벽 위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20군데에 걸쳐 뚫려 있는 못구멍

이다. 동벽의 못구멍 2개에 구리못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널방에는 만장이 걸려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무덤주인부부의 장례 당시 곁방과 널방 안은 장식무늬로 채워지고, 널방 네 벽은 만장으로 둘려

졌으며 널방 안에는 두 기의 돌관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무덤의 규모, 무덤축조

에 사용된 장대한 석재, 무덤칸 내부를 장식한 벽화의 제재와 구성방식이다.

벽화를 먼저 살펴보자. 장군묘, 미창구1호묘 등으로도 불리는 이 무덤의 내부는 연꽃문과 ‘王’자문 중심의

장식무늬로 채워졌다.

 

                  (그림1)미창구장군묘 내부

 

앞방의 퇴화형으로 볼 수 있는 두 곁방 안은 온통 ‘王’자문으로 장식되었고, 널방은 벽과 천장고임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측면연꽃으로 채워졌다. 4단 평행고임 밑면에는 곁방에서와 같은 ‘王’자문이 묘사되었으며,

벽과 천장고임의 경계에 가로로 길게 띠를 이루도록 그려진 자색 대 안에는 변형용문을 그려 넣었다.

비교적 넓은 천정석 밑면에는 옥벽(玉璧)처럼 바깥은 둥글고 안쪽은 네모진 무늬 9개가 열과 행을 이루며

그려졌다.

잎맥과 꽃술까지 표현되고 꽃잎 끝이 뾰족하게 처리된 측면연꽃은 5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제재로 즐겨 선택되었다. 산연화총이나 장천2호분과 같은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중심제재였다.

‘王’자문 역시 같은 시기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제재로 선호되었다. 산성하332호분은 널방 벽면 전체를 ‘王’자

문으로 채우고, 천장고임은 연꽃으로 장식한 사례이고, 장천2호분은 장군묘처럼 두 개의 곁방은 ‘王’자문

으로 장식하고 널방은 연꽃으로 채운 경우에 해당한다. 미창구장군묘는 연꽃무늬와 ‘王’자문이 유행하던

5세기 중엽 전후 집안지역 벽화고분의 일반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벽화고분인 셈이다.

장군묘는 외형도 크지만 무덤칸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널길의 길이가 5.4m, 안쪽 너비가 1.48m이며, 왼쪽

곁방의 길이X너비X높이가 1.6mX1.17mX1.34m, 오른쪽 곁방이 1.58mX1.16mX1.34m,

널방이 3.52mX3.50mX3.5m이다. 널방 크기로 볼 때 북한에서 왕실귀족의 무덤으로 거론되는 진파리4호

분이나 왕릉급 무덤으로 평가되는 호남리사신총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더욱이 이 무덤을 축조하는 데에

사용된 석재 가운데에는 길이가 3m, 두께가 1m에 이르거나 이보다 큰 것도 여럿 확인된다.

427년, 고구려는 또 한 번 수도를 옮긴다. 새 서울이 될 도시는 압록강 일대와는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풍토를 달리 하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에 조성되었다. 장수왕 즉위 15년에 일어난 일이다.

대동강 북쪽 기슭에 조성된 왕궁과 귀족들의 저택, 불교사원들은 동아시아 4강체제의 개막을 눈앞에 둔

동방 강자 고구려의 새로운 중심이었다. 전성기 고구려 사회․문화의 내용이 준비되고 펼쳐져 나갈 진원지

에 해당했다. 동방을 제패한 패권국가 고구려의 자부심은 고구려 사람들로 하여금 새 서울과 옛 수도에

대형 기념물들을 만들게 하였고, 완성된 기념물들이 왕실의 신성성과 국가 권위의 상징이 되게 하였다.

널방 전체가 연꽃으로 장식된 (전)동명왕릉, 유사한 무덤구조의 장식무늬 벽화고분인 미창구장군묘 역시

평양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가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하던 왕실 신성화 작업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림2)(전)동명왕릉 내부

 

첫 수도 졸본에 조성되어 있던 동명왕묘를 개축, 혹은 신축하면서 ‘王’자문과 연꽃무늬로 무덤칸 내부를 장식

하여 새 왕의 즉위의례 장소로 삼고, 새 서울 평양에는 국가 및 왕실 차원의 정기적인 시조묘 제사를 위해

새롭게 동명왕릉을 축조하게 한 것은 아닐까. 역시 여래의 가호를 받는 왕권임을 나타내기 위해 연꽃을

벽화의 주제로 삼으면서….

 

(전호태)

출처 : 한국 문화의 원류
글쓴이 : 솔롱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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