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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베트남 역사

이름없는풀뿌리 2017. 6. 22. 09:19

 

 

 

 

 

 

베트남 역사

 

[고대국가 발생기(BC 690∼BC 111)]

베트남의 청동유물

BC 690년 경 부족국가인 반랑국, 어우락국(BC 257), 남비엣국(BC 207) 등이 차례로 건국되었다가,

BC 111년에 한 무제에 의해 정복당한 이래 약 천 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비엣(Viet)족이 중국 전국시대 월국의 유민이라고 주장하나, 베트남인들은 BC 3000년 경 동산 문화를

이루었던 락비엣(Lac Viet)족을 자신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복속시대(BC 111∼AD 972)]

 

베트남의 코끼리 테라스

유에족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중국 한족은 락비엣족의 영토를 침범하여 군(郡)을 설치하고,

BC 207년에는 한(漢)제국의 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BC 111년 완전히 중국에 병합되고 그 후 938년까지 거의 1천년 동안 베트남은 중국

지배권하게 됩니다. 베트남인들은 중국의 지배 시절 민족의식을 싹 틔우기 시작했으며 중국

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 사상을 전파 받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 리(Ly)왕조(972∼1225)] 

 

 

 

응오퀴엔 장군이 중국 당나라를 물리치고 베트남역사상 처음으로 독립왕조인 응오왕조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응오를 뒤이은 딘(Dinh)왕조는 주권을 중국에 양도하고 속국을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리왕조의 집권이

있게 되고 1010년에 리왕조가 출현하여 자주통치를 확고히 한 200여간 행정, 조세 체제가 정비되고 농업이

육성되는 등 문인정치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역사의 황금시대: 레(Le)왕조(1427∼1764)]

 

베트남의 왕궁

리왕조 내정 혼란으로 인해 쩐(Tran)왕조가 새롭게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쩐왕조는 남부 참파왕국과 연합 당시 천하를 휩쓸던 원(元)나라 징지스칸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중국의 명(明)나라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1368년) 통일을 이룬 뒤 베트남을 침략해 20년간

직접통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레러이(Le Loi)와 응우엔짜이(Nguyen Trai)가 나타나 명과

10년간 전투를 벌인 끝에 명군을 물리치고 베트남에 새로운 레(Le)왕조를 세웠습니다. 레왕조는

중국의 명나라를 물리쳤을 뿐 아니라 중부 참파왕국을 무찔러 영토를 확장하였다.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베트남 문화를 창조하며 발굴하는 황금기였다.

 

[프랑스령 식민시대(1858∼1954)]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북쪽의 중국에 대해서는 큰 경계를 했지만 남쪽의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상인들에 대해서는 별로 경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베트남 문화에 적잖은 공헌을 했는데 현재 베트남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마자화된 베트남

문자를 처음 만든 사람도 프랑스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처형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는 1858년 베트남

무력침공하여, 1887년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통치기간 동안 왕조 권위회복을 목표로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양그룹에 의해 항불운동이 전개되어

공산주의자 그룹이 주도권 확보합니다.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은 1차대전 직전 파리에서 정치수업을 쌓고 있던

민족주의자 호지민이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던 1920년 파리에서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호지민의 월맹군은 북부 산지에서 중국의 지원아래 프랑스군에 대한 총공세를 펴 결국 1954년

5월 "디엔비엔 푸 전투"에서 승전하였습니다.

 

 

 

Cho chữ

 

 

 

 

 

베트남 민족의 기원 및 특징


 

 

○ 민족 기원

 

14세기 후반에 편찬된 설화집 <영남척괴>에는 베트남 민족의 기원 및 건국에 대한 설화가 있다.

설화의 의미는 첫째, 베트남인은 용의 자손이다. 둘째, 베트남의 다종족은 하나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셋째, 베트남인은 음양의 조화를 통해서 나왔다. 넷째, 베트남인은 농업과 어업에 능하다.

 다섯째, 베트남인의 문화는 다양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베트남 민족은 다른 문화와 인종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친화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 민족 특징

 

베트남인은 황인종이지만 무덥고 습한 기후에 의해서 피부색이 약간 갈색을 띤다.

 신장은 160cm정도에 크지 않고 왜소해 보인며, 손과 발이 작고, 손 기술이 뛰어나다.

 

얼굴은 갸름하고 작으며 짙은 눈썹에 대부분이 쌍꺼풀로 눈이 크며 코가 낮다. 머리카락은 대다수가 검고 곧다.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것을 ‘미’로 여겨 결혼 전에 남녀가 치아를 물들였다.

 

과부가 죽은 남편의 동생과 재혼할 의무와 권리가 있었다는 형제연혼은 베트남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낑족의 습속이 아니라 일부 소수종족의 습속이었다.

 

성인이 되면 남녀 성구별없이 구장잎과 빈랑 열매를 씹는다. 불교가 베트남이 인도의 문화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주는 단서중 하나이며, 요즘에는 농촌에서는 씹지만, 도시에서는 노인들만 씹는다.

 

성인 남자들은 라오 담배를 피운다. 한국의 곰방대로 피우는데, 요즘은 값싸고 질좋은 담배가 생산되어

라오담배 흡연자는 줄어들고 있다.

 

베트남인들의 아오자이는 옆구리 양쪽이 갈라져 있는 사신복을 1930년에 개량한 것으로 요즘은 우리의

한복처럼 명절, 결혼, 공사기관의 공식행사 시에 주로 입는다. 남부의 경우는 날씨가 연중 더운 까닭에

일부 중,고등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교복으로 상시 입는다.

 

예부터 베트남인들은 총명하다고 일컬어지나 모방을 잘한 탓에 창조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기로 한다.

또한 사람들의 성격이 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하여 쉽게 다투기를 잘한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일단 어떠한

 명분이 주어지면 그 명분을 향해 최선을 다하기도 하는데, 이 명분이 사적으로 표현될 때 단단한

가족과 치족중심으로, 공적으로 나타날때는 무서운 공동체로 표출된다. 때문에 일상생활속에서 우유

부단하고 서로간의 화합이 부족해 보이나, 큰 재난앞에서는 사심을 버리고 굳게 뭉치거나 서로 인정해

주는 자기희생적인 민족근성이 드러난다. 즉, 다종족, 다문화 특징들이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형성되어

국가라고 하는 대의명분 앞에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한편, 베트남인들은 일찍부터 유입된 유교사상에 의하여 효, 예, 도덕, 의. 지, 신을 처세의 덕목으로 삼았다.

여기에 베트남은 가족안에 개인이 무시되는 철저한 가족중심주의 사회로서 가장 혹은 족장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효행중심주의 사회였다. 유교의 영향에 의해 일찍부터 과거제도가 있었고 학문을 사랑했다.

 

반면에 자랑하기를 좋아하여 회형과 허명에 관심이 높아 상대보다 자신이 무언가 우워란 점이 있다고

판단되면 거만하게 행동하며 과장을 잘 했다.

 

그 밖에도 베트남인은 신앙심이 깉어 조상숭배와 종교에 심취했다. 이같은 신앙심과 문화에 대한 친화력은

쉽게 베트남적인 문화를 낳는요인으로 발휘되었으며, 이러한 특징은 토착화된 오늘늘의 불교활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남녀의 역할이 구분되어 남편은 밖에서 경제담당자로서 직업을 갖고 가족을 위해 일하며, 부인은 가정에서

내조자로서 가사와 자녀교육, 그리고 시부모부양에 전념한다. 이 때문에 고부간의 갈등이 한국만큼이나 크다.

하지만 공산화나 오늘날 시장경제의 양향을 받아 사회가 변하면서 이 같은 특징은 많이 서구화되었다.

 

 

 

 

 

 

Nghệ thuật hóa trang

 

 

 

 

 

베트남 역사는 중국과 투쟁史

1979년 중·월전쟁 당시 베트남군이 포로로 붙잡은 중국군. /조선일보 DB

얼마전 베트남에서 반중 시위가 일어나 100명 이상의 중국인이

죽거나 다쳤다.  

 

한국을 포함한 베트남 투자 외국기업들도 과격한 시위에 큰 해를

입었다.

 

베트남 정부가 시위자 1000여명을 체포 혹은 구속하는 형태로

 적극 개입함에 따라 시위는 소강상태이나 긴장은 지속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육해공 연합작전을 통해 자국민 수천 명을 베트남에서

탈출시키는가 하면 일시 여행 금지를 발표했다.

 

 

 

 

베트남의 반중시위는 지난 5월 2일 중국 해양석유총공사가 베트남 해안에서 240㎞ 떨어진

파라셀군도(베트남명 황사黃沙군도, 중국명 시사西沙군도) 인근에 원유 시추 시설 설치를 강행

하면서 촉발되었다.

 

중국이 남중국해 자원을 베트남과 공동으로 개발하겠다는 합의를 무시하고 원유 시추 시설의 설치를

강행했던 것은 자원개발 자체보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속셈이 컸다.

중국이 동중국해에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뿐 아니라 중국의

파라셀군도 개발 강행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여준 미국의 힘의 한계, 중·러 밀월관계, 베트남·미국

관계의 한계, 남중국해를 둘러싼 베트남·아세안 관계의 한계 등을 간파한 중국의 치밀한 전략일 수도 있다.

베트남은 자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과 대륙붕에서 이뤄지는 중국의 원유 시추가 불법이라고 즉각

반발하면서 연안경비대 초계함과 어업지도선을 파견하여 저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양측의 선박이 일부

파손되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양국 선박의 충돌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수도 하노이와 호찌민에서

“중국은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지 말라”는 반중 피켓시위가 일어났다. 베트남 정부는 징병령을 내리는가

하면 남중국해에서 장시간 실탄 포사격을 실시하는 형태로 중국과의 대결의지를 과시하였다.

그동안 주변국들과 함께 반중 연대를 구축해온 베트남 정부는 이번 자국민의 반중시위를 정책 차원에서

이용하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과 같이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하에서 정부의

묵인 없이는 어떠한 형태의 시위도 불가능하다. 설사 시위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이번처럼 전국적일 수

없고 막대한 손실을 일으킬 수 없으며 장기간 일어날 수도 없다. 베트남 공산당 정부가 철저하게 인민을

관리하고 지배하며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의 반중시위는 베트남 정부의 의도를 넘어 격해지면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말았다.

중북부 하띵의 대만 포모사 플라스틱그룹의 제철소 공격과 남부 빙 즈엉의 중국, 싱가포르, 한국, 일본 기업

등에 대한 약탈 등 인명 살상까지 벌어진 시위는 베트남 정부로서도 뜻밖의 사태였다고 볼 수 있다.

반중시위가 살인과 약탈의 형태로 변질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외국인의 탈출이 이어지며 막대한 손실을

입은 외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재고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베트남 정부는 긴급히 군대를 파견하여

 시위를 차단하는 한편 외국 피해 기업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들고나왔다. 베트남 정부의 적극적 개입으로

반중시위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반중시위는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그리고 시위의 규모도 지금보다

더 커질 수 있다. 베트남과 중국 간에는 침략과 투쟁이라는 역사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베트남 침략은 기원전 179년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베트남은 기원후 938년까지 1000년 이상 중국에

병합되었다. 이 기간 베트남인은 중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숱하게 싸웠다. 938년 중국의 원정군에 대승리를

거둔 응오꾸엔이 939년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왕조인 응오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중국의 베트남 영토에 대한 야욕은 그치지 않았다. 베트남의 독립왕조 이후 중국의 첫 번째 베트남

침략은 송나라 때인 981년에 있었다. 당시 베트남은 거짓 항복과 유인 작전을 써서 송군을 물리쳤다.

 

당시에 송나라가 베트남을 재침하지 못했던 것은 지나친 문치주의로 국방이 약해져 있었고 북방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왕조 시대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조공과 책봉 관계였다. 그렇다고 중국이 베트남을 완전한 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춘추전국 시대나 한나라 시대의 봉건제도처럼 중국은 베트남을 자신들의 봉토로 여겼다.

 

 따라서 베트남의 왕을 교지군왕(交趾君王),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 남평왕(南平王)으로 책봉하였다.

국력에서 절대적으로 밀린 베트남은 이러한 사대 관계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토대로 베트남은 발달한

 중국의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여 힘을 축적하고 그를 기반 삼아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중국이 베트남을 완전한 독립국가로 인정했던 때는 938년 독립 후 236년이 지난 1174년이다. 이때 안남국 및

안남국왕으로 책봉했다. 이는 북방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밀려 안위에 위협을 느낀 남송이 남쪽의 베트남을

자국으로 끌어들여 기각지세를 모색하려는 고육책이었다.

중국의 베트남 침략은 그 뒤에도 있었다. 명나라는 1406년 베트남의 내정을 빌미로 다시 침략하였다.

이때부터 1428년까지 베트남은 중국에 다시 병합되었다. 이 시기 중국의 베트남 통치는 혹독하고 치밀했다.

 

그러나 10년의 투쟁을 통해 베트남은 중국을 물리치고 다시 주권을 되찾았다.

중국의 베트남 침략은 청나라 때인 1788년에도 있었다. 혼란스러운 베트남의 안정 회복을 빌미로 청군 29만이

베트남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하노이에서 참패했다. 당시 베트남은 청군에 하노이를 점령당했지만

기상천외한 기습 작전을 펼쳐 청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침략만 당한 게 아니다. 중국의 힘이 약해지면 먼저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1075년,

송나라가 왕안석의 개혁정책으로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자 베트남은 송의 침략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전략에서 10만 대군을 동원해 중국을 선제공격했다. 이는 지금까지 베트남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국을 침략했던 사건이다.

당시 베트남 리(李) 왕조는 리 트엉 끼엣 장군으로 하여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양로로 선제공격에

나서도록 하여 광동, 광시성을 점령하고 수천의 포로와 다량의 전리품을 노획하여 귀환하였다.

 

이에 송나라에서도 곽규(郭逵)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베트남 공략에 나섰으나 리 트엉 끼엣 장군은

송나라군을 대파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은 반복됐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식되자

중국(장제스 정부)의 베트남 정복 야욕은 또 수면 위로 올라왔다. 북·남 베트남에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각각 중국군과 영국군이 진출하였다. 이때 베트남을 식민지배했던 프랑스도 베트남의 재식민지화를

위하여 영국군을 따라 남베트남에 들어왔다.

연합군의 승리로 중국은 이전과 달리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베트남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당시 장제스는 마오쩌둥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공략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장제스 군대는 베트남에서 눈물을 삼키며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신 장제스는 베트남에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프랑스로부터 최대한 보장받는 행태로 자신들의 임무를 프랑스에 위임하였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1949년 중국이 공산 혁명에 성공하면서 달라졌다. 세계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으로 나뉘면서 중국은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르고

있는 베트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100년 지배를 종식시킬 수 있었던 데는 국경선을

접하고 있던 공산 우방국 중국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중국의 지원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일명 베트남전쟁)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소 간 간격이 벌어지고

베트남전쟁의 전세가 북베트남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미·중 간 핑퐁외교는 베·중 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갔다. 베트남전쟁 막바지인 1974년 1월, 중국이 공군과 해군을 동원해 파라셀군도를 점령해버렸다.

 

파라셀군도는 17세기부터 베트남의 영토였다.

그리고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남베트남의 영토였다. 베트남전쟁의 전세가 북베트남 측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

에서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파라셀군도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국은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실효지배하고 있다. 더 나아가 현재 중국은 양국의 공동개발협정을 무시하고 파라셀군도를

독자 개발하려고 한다. 이런 중국의 야욕은 이념보다는 국가 이익이 앞서는 냉엄한 국제질서를 보여준다.

파라셀군도 점령으로 악화된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이후 다시 전쟁으로 이어졌다. 1979년 2월 중국은 정규군

 9개 군단 예하 30개 사단으로 구성된 60만 병력으로 1400㎞에 달하는 국경선을 따라 베트남을 침략하였다.

 

1978년 12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비롯된 중국의 침략은 한 달간 지속되었다.

이른바 중·월전쟁으로 불린 당시 전쟁에서 중공군은 상당한 고전을 하였다. 중공군은 베트남 진지를 공략하기

위하여 많은 전차와 보병을 투입했지만 산악지대를 이용한 베트남군의 저항을 받으며 오히려 개전 24시간

만에 전차 13대를 격파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베트남군의 유격전과 베트남을 지원하는 소련의 위협으로 고전하던 중국은 베트남을 응징했다는 명분을

내걸며 1979년 3월 6일 철군해 일단 전쟁은 종식됐다. 당시 중공군은 무기가 낙후했고 문화대혁명 때 유능한

지휘관들을 잃어 전술에서도 취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베트남군은 미국과의 전쟁에서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효율적으로 전쟁을 치렀다. 중·월전쟁 이후 베트남군은 스스로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내보이기도 했다.

베트남의 역사는 ‘인위와 자연과의 투쟁사’라고 말한다. 그중 인위의 대표적인 존재가 중국이다. 국제관계에서

‘이웃한 국가끼리는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끈질긴 투쟁이 없었더라면 베트남은 이미 광동, 광시, 윈난, 티베트처럼 중국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중 간에는 국제관계를 운운할 상식마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트남은 무릎을 꿇지 않는 투쟁을

 통해서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것이 베트남의 생존법칙이다.

 

 

 

 

 

 

 

Rạng đông

 

 

 

 

 

10세기 무렵 베트남의 역사

 

10세기 경 중국의 5대 10국 시대의 국가들 중 하나인 남한(南漢)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베트남의 첫번째 독립왕조인 오(吳 : 베트남어로는 응오) 왕조는 건국자 오권(吳權) 이래로

4대 왕인 남진왕(南晉王) 오창문(吳昌文)의 대에 이르러 왕족 및 외척들간의 내란으로 인하여

서서히 망조가 들기 시작합니다.

 

 

 

 

 

오(吳) 왕조의 건국자 전오왕(前吳王) 오권(吳權)

 

오 왕조가 건국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1차 백당강 전투에 관한 얘기이자

이 글의 이전 상황에 대해 적어놓은 글도 참고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

 

어느 나라에서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시나리오라 하겠지만 특히 베트남은 유독 왕실과 호족의 대결 구도로
여느 역대 베트남 왕조들을 불문하고 지속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찌보면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라 할 수 있는 오 왕조가 첫 시작을 끊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건국된지 30년 남짓되었을 무렵, 중앙에서의 왕실의 내분을 틈타 성장한 지방호족 세력들은 각지에서 할거해 있었고
오 왕조는 이러한 지방호족들의 폭주를 제어하는데에 실패하여 결국은 서기 965년, 12사군의 난이라는 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12사군의 난이란 965년부터 967년까지 약 2년여간의 기간에 걸쳐 각지의 12명의 유력 호족들이 난립하여 벌어진

 전란기를 말하며

오 왕조를 몰락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이 12명이지 말그대로 유력한 호족들 12명만 지칭해서 12사군의 난이지 당시 할거한 호족들이

수십명이라 보는 이도 있습니다.

 

이렇듯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기에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베트남 판 전국시대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들 12명의 호족들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으실텐데요,

다만 최종적으로 12사군의 난을 평정한 이가 정부령(丁部領)이란 사람이란 것만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



 

 

정부령(丁部領)

 

혹시 위 지도를 보시고 정부령도 난을 일으킨 12명의 호족들 중 하나로 여기실까 싶어 말씀드리지만
정부령은 난의 주역인 12호족들의 일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화려(華閭 : 베트남어로는 호아르)라는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으로,

그의 가문은 공신가문으로서 대대로 환주(驩州 : 베트남어로는 호안 쩌우)의 자사(刺史)를 지내던 권세있는 

 

집안이었으나 12호족들의 세력에는 미치지는 못하였는지 12호족들 중 진람이라는 이의 휘하에 들어가

장군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진람 휘하에서 점차 자신만의 세력을 모으며 점차 두각을 드러내던 정부령은 2년여에 걸쳐 차례로 12명의

호족들을 쓰러뜨렸고 서기 967년, 허수아비로 전락해있던 오 왕조의 5대 왕이자 마지막 군주인 오대왕(吳代王)

오창치(吳昌)의 투항을 받아들임으로서 오 왕조를 멸하고 12사군의 난을 평정하여 베트남을 통일합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정부령은 수도를 기존에 오 왕조가 자리했던 고라(古螺), 즉 오늘날의 하노이에서 옮겨

가문이 위치했던 곳이자 자신의 세력기반이었던 화려(華閭)로 천도합니다. 

 

자신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라(古螺)보다는 통치하기에는 홈그라운드인 화려가 더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왕위에 올라 정(丁) 왕조를 개창한 정부령은 국호를 이전에 중국의 한(漢) 왕조와 맞다이를 뜰만큼 강성했던

 

남월(南越)의 국호에서 따와 대구월(大瞿越)이라 정합니다.

 

베트남인들에게 있어서 자고로 '월(越 : 베트남어로는 비엣)' 이란 글자는 베트남의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는

 

남월제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르고 피가 끓어올라 그야말로 과거의 영광스럽던

 

시절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인 국호였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베트남 최대의 대외관계인 대 중국 외교에 대한 정부령의 향후 행보가 대강이나마 짐작이 가지요.

 

하지만 정부령은 무턱대고 자주독립 노선을 표방하여 중국을 자극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대의 오 왕조에게 대패했다고는 하나 인접해있던 남한(南漢)은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요구해오는 건 적절하게 들어주면서 또 지킬건 지키자라는 식이었습니다.


 

 

 

10세기 무렵 중국의 5대 10국 시대 지도입니다. 아래에 남한이 위치해있는게 보이실겁니다.

 

정부령의 이러한 대 중국 외교태도는 이후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를 종결지은 송(宋)이 들어서면서

 

외왕내제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천하도 통일했겠다, 베트남이나 건드려봐야겠다는 심보로 송은 정부령을 교지군왕(交趾君王)으로 책봉하면서

 

송에 귀속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전의 남한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던 정부령은 송의

 

책봉을 받아들이고 입공하며
더불어 3년간 송의 국경을 넘지 않겠다는 불가침 조약을 맺습니다. 

 

하지만 내부로는 여전히 황제를 칭하고 있었고 바로 이 정부령의 정 왕조 시기에 베트남 역대 왕조들의 특징 중

 

하나인
외왕내제가 확립되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과거 남월의 조타가 한의 남월왕 책봉을 무시하고 칭제를 했던 것이 먼저이긴 하지만 말그대로 확립된 때는

 

정 왕조 시기입니다.
 

 

베트남을 통일하여 오 왕조에 이어 두번째 통일 왕조를 세운 정부령은 전대의 오 왕조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여러모로 노력했습니다.

 

오 왕조의 멸망원인을 약소한 중앙왕실과 강력한 법과 형벌의 부재에서 찾은 정부령은 지방의 호족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일반 백성들을 임의로 징발해서 사병화 시키는 것을 금하고 행여나 있을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강력하다 못해 가혹한 형벌들을 가미한 법들을 만들어냅니다. 

 

기름 솥에다 산채로 넣어 튀긴다던지, 호랑이가 있는 철장에 던져버린다던지와 같은 형벌들로 반역죄를 다스리겠다는

 

엄포를 놓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서기 978년, 정부령은 세자 정련(丁璉)과의 권력 다툼 도중에 암살당합니다. 

 

그토록 오 왕조 꼴만은 안당하려고 애썼던 정부령이지만 정작 오 왕조가 왕실 내부의 내란으로 멸망한 것을 잊기라도

 

한듯 말이지요.

 

차기 황제는 정부령의 차남 정선(丁璿)이 되었지만 겨우 다섯살배기 어린아이였던지라 생모인 양(楊) 태후가 수렴

 

청정을 하게 됩니다.


 


신제(新帝) 정선(丁璿)
 


 

 

 

생모 양태후
 

 

어린 황제가 즉위하니 어수선해진 정국을 틈타 자연스레 권신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여환(黎桓 : 베트남어로는 레 호안)이란 이로, 선대 정부령의 대에 중용되어 정선의 치세기에는

 

군권을 장악한 실력가였습니다. 

 

그리고 양 태후는 여환과 결탁하여 공동으로 섭정통치를 함으로서 여환의 지위는 한층 더 높아지니

 

사실상 정 왕조의 실권은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여환(黎桓)

 

이렇듯 여환에 의한 제위찬탈이 거의 확실시 되어가던 즈음에 그 기회는 뜻밖에도 외부로부터 찾아옵니다. 

 

정부령 사후 어린 황제가 즉위한 베트남의 정황을 지켜보던 중국의 송나라가 이를 틈타 침공해왔던 것이지요.
그러자 황태후 양씨는 참으로 뜻밖에도 자신의 아들 정선 더러 여환에게 황위를 양도하고 유능한 여환의 지휘

 

하에 송의 침입을 막을 것을 요구합니다.

 

국난을 맞아 피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아들을 내쫓으리만큼 비정한 선택을 했으리라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떠도는 얘기로는 여환과 양 태후가 남 모르게 그렇고 그런 불륜의 관계라 그랬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후 여환이 황위에 즉위한 후 양 태후는 여환의 황후가 되었으니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하지 싶네요.
 

 

아무튼 여환은 송군의 침입에 능숙하게 대처하여 송군을 격퇴했고 이 공으로 서기 980년,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

 

공식적으로 황위에 오르니 이것이 곧 여(黎 : 베트남 어로는 레 왕조) 왕조의 시작입니다. 

 

훗날 15세기 무렵에 여리(黎利)에 의해 세워진 여(黎) 왕조의 구별을 위하여 여환의 여 왕조는 전(前) 여 왕조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전(前) 여 왕조도 얼마 못가 서기 1010년, 태조 여환이 그랬던 것처럼 이공온(李公蘊)이라는 권신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이공온의 이(李) 왕조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동네 이야기도 재밌네요.
베트남판 전국시대 이야기도 누가 멋지게 이야기로 풀어내면 좋은 역사소설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배트남도 우리나라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국의 침략을 많이 겪었죠

세계사를 배워봐도 별게 없는 동네들이 많지요....


세계사 배우면서 느낌이, 서양 교과서와 서양 사관(로마 및 유럽 중심) + 동아시아사 정도인 느낌이었어요

 


4대 문명이라고들 부르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황하 네 문명 얘기하다가 갑자기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니까요....


메소포타미아와 인도쪽 중동, 남아시아사도 전혀 모르겠고, 인도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왕조 바뀔때 한번,

영국한테 식민지 배될때 한번 나오더군요


동남아, 티벳, 아메리카에는 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겠고 아프리카 역사는 이집트 이후로 역사가 없는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모른다는걸 안 것도 문명하다가 아시리아, 송가이, 에티오피아, 마야, 잉카, 아즈텍, 쇼숀, 이로쿼이,

 시암 같은 잘 안 다뤄지던 문명들을 만나면서였죠...

 

 

 

 

 

Lúa vàng Hoa Lư

 

 

 

 

 

송꼬이·메콩강 따라 흐르는 베트남의 역사

 

[新베트남 기행] (상) 송꼬이·메콩강 따라 흐르는 베트남의 역사

하노이 사회주의·호찌민시 자본주의, 문화의 이름으로 통하다


“여행에서의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얻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열대 베트남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갖고 싶어 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 25명이 지난 3월부터 여행을 준비했다. 3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지난 7월 말부터 7일간 수도 하노이를 비롯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할롱베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에와 호이안을 거쳐 한때 사이공이라고 불렸던 호찌민시를 방문했다. 열대학, 해양학, 역사학, 영문학 등 서로 다른 학문 전공자들이 모여 서로 다른 관점으로 색다른 융합을 시도했던 베트남 여행기를 2회에 걸쳐 싣는다.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내리니 날씨부터 다르다.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몹시 후덥지근하다.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미군 방송 DJ로 처음 부임한 로빈 윌리엄스가 사이공 날씨가 어제나 오늘이나 같다고 말했다가 정훈장교로부터 꾸중을 듣는다. 온대지방에서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무덥겠지만, 오랫동안 살아왔던 베트남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노이 지역에서 제일 큰 송꼬이 강을 건너서 역사박물관을 찾아가니 흥미로운 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베트남을 이루는 54개 종족이 지리적으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영향을 받아서 다종족, 다문화 사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

 

베트남 사람의 신분증 뒷면을 보면 종족 이름과 종교가 표기되어 있는 이유다. 중국에서 한족(漢族)이 다수라면,

 

여기에서는 비엣(Viet)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베트남에는 메콩강을 비롯해 무려 2000여개의 강이 흐른다. 농경사회에서 치수사업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하노이의 수상인형극장을 찾아갔다. 추수가 끝나고 농민들이 연못이나 호수에서 보여준 공연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형극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유럽에서도 공연을 했고 지난 인천세계도시축전 때도 이 인형극이 공연된 적이 있을

 

정도로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노이를 떠나기 전 공자 문묘를 방문했다. 베트남은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가족·사회·국가

 

관계에서 유교문화가 무시할 수 없는 가치체계로 남아 있다. 공자 문묘는 베트남 사람들이 중국의 유교적 가치와

 

동남아시의 삶을 어떻게 결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베트남 중부 도시 후에. 도시를 흐르는 후에 강의 자연생태적 풍경은 파리 센강의 문명적 경관보다 더욱 정답게 느껴진다.

 

후에 관광의 절정은 배를 타고 몇몇 황제릉을 감상하는 데 있다. 참파 문명의 흔적을 지워 버리고 19세기 초 응우엔

 

왕조가 베트남을 통일하고 후에를 수도로 정했다. 왕조의 전성기였던 민망 황제릉과 프랑스에 나라를 내준 마지막

 

황제인 카이딘 릉을 서로 비교해 보면서 어느 왕조나 국가도 절정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베트남의 모든 화폐의 앞면에는 호찌민이 등장한다. 예외가 없다. 반면 뒷면은 각양각색이다. 제일 큰 화폐인 50만동

 

에는 호찌민이 살았던 생가가 나와 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호찌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호찌민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프랑스의 국민 자동차를 대표하는 푸조가 신형 자동차를 생산했을 때, 프랑스 정부는 호찌민을

 

회유하기 위해 흰색 푸조를 선물했다. 하지만, 호찌민은 당시로선 매우 비싸고 멋졌던 이 차를 한 번도 타지 않았다.

그 원형이 호찌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가 얼마나 물욕을 멀리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백범 김구와도 만났다고 전해지니 독립운동을 하던 두 사람으로선 동병상련이었으리라. 베트남에서 그는

 

‘호 아저씨’로 불린다. 한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그의 삶이 바로 현대 베트남의 역사이다.


화폐 1만동에는 베트남이 자랑하는 유전 시설이 그려져 있다. 2만동 화폐의 뒷면에는 호이안에 있는 ‘일본 다리’가

 

나와 있다. 다리를 걷는 데 10초나 걸릴까. 이렇게 작은 다리가 왜 베트남 화폐에 나와 있을까. 이를 알려면 18세기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해양 실크로드를 알 필요가 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및 일본과 무역 교류를 했다.

당시 은(銀)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일본의 상선들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의 호이안에 정박했다.

 

이 다리는 일본인들이 당시 체류하던 마을에 건조한 것이다. 그 다리가 화폐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의 문화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 기업들은 베트남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에서 경제 활동뿐 아니라, 이 지역의 문화 창달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 중에도 최근에 베트남에 기부를 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일본의 경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호찌민 시내를 걸어본다. 시내 곳곳의 오토바이 물결은 여전히 장관이다. 마주치는 젊은 여성과

 

남성들이 무엇보다도 체격이 훨씬 커져 있었고 얼굴들이 명랑하기만 하다. 그만큼 살기가 편해졌다는 것이리라.

 

베트남은 통일된 지 35년밖에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노이의 사회주의적인 문화와 남부 호찌민 시의 자본주의적

 

문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비행기로 2시간 이내에 하노이에서는 중국의 거의 모든 도시들을, 호찌민 시에서는 열대 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갈 수 있다. 이렇게 뛰어난 지정학적 조건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베트남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베트남이 갑자기 크게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Xuôi theo con nước đổ

 

 

 

 

 

베트남 역사 중대의 독립왕조들

 

 

 

중대니 중세니 하는 부분의 역사는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다. 여러 호족들 중에 어떤 유력자가 등장해서 왕조가

세워지고 외침을 받고 생존하고 다른 지역 유력자가 또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하는 것이 반복된다.

 

여러 왕조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왕조가 바뀐다고 해서 베트남의 구성원들이 확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서

그들끼리의 싸움의 반복이기 때문에 지금 현대에 큰 영향을 미친 부분을 찾는 것도 좀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사실상 당시 베트남을 말하는 다이비엣의 영역은 지금의 베트남의 영역과 조금 달랐다.

 어째서 지금에 왔는지 지금 모습이 되었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 역사를 살펴보려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일테니

 그런 부분에서 보면 이 중대라고 하는 시대의 그 수많은 왕조의 변화들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기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전에 말했듯이 베트남은 '자주성'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 스스로는 이 중대의

왕조들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교육하고 있는 것 같다.

 

 

대강의 연표

응오왕조 938-944

딩왕조 968-980

전레왕조 981-1009

리왕조 1010-1225

쩐왕조 1225-1400

호 왕조 1400-1406

후레왕조 1428-1788

남북조 시대 막 왕조 1527-1572 남조(부흥 레) 1543-1788

떠이썬 왕조 1788-1802

응우옌 왕조 1802-1945

 

 

대충 보면 10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 900년이 지나가는 동안 9개 왕조가 등장한다. 같은 기간 이곳 한반도에서는

딱 두개의 왕조가 존재했고 그 왕조의 지방 장악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 영토라고 하는 면에서

 우리는 변동이 굉장히 적은 편인데 베트남은 이 부분이 많이 다르다.

 

북부 지역의 일부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고 남부의 참파의 영토는 조금씩 잠식해 갔다.

그러니까 이 부분도 어느날 강력한 군사력으로 합병의 형태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점진적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런 부분이 어찌보면 과거 왕조와 연속성이니 통일성을 놓고 이야기 할때 약점이 될 수도 있을것 같다.

 

많은 왕조들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통치하다 사라졌고 해서 복잡하면서도 비슷한 왕위 변동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여러 나라의 역사들을 살펴 보면 이런 경우를 많이 찾게 되는데 대체 이 부분들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좀 하게 된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을때 그에 저항하거나 편승하거나 하는 기로에 서 있을때 정말 보편적인 정의니 대의니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최종적으로 승리한 쪽이 정의가 되고 그들이 역사를 쓰면서 반대편을 처절하게 비하하고 그것을 교육받은 사람들은

반대자를 욕하는 것을 애국이라 생각하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왕조 변화가 많았던 베트남은 이 부분이 한국보다 많았고 보다 많이 아팠을 것 같다.

 


응오 꾸엔(吳權)[Ng? Quy?n]은 베트남에서는 최초의 왕조를 세운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 받는다. 일부러 베트남

알파벳을 찾아서 올렸는데 저 내용으로 구글에서 찾아면 꽤 많은 베트남어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선떠이 성의

푸토(phu tho) 출신이라는데 사당도 있고 민속화도 꽤 발견할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바익 당(白藤)강 전투이다.

 

 

이 곳은 베트남 최고 명승지로 꼽히고 있고 대월사기전서에서는 이 응오왕의 건국이 최초의 독립 왕조라고 이야기

한다고 하는데 송정남의 베트남 역사 읽기에 따르면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응오왕조가 아니라 바로 뒤의 딩(丁)

왕조 최초의 독립왕조라고 본다고 한다.

 

 

 

저게 바익 당 강 전투 무슨 그림들인데 대강 설명을 하자면...

 

왕위 계승에 관한 복잡한 이야기다. 아마 정치적인 배경도 겹쳤을 것이다. 당의 지배를 받았던 이 짜오 지 지역은

뒷날 당이 분열하자 독립화 한다. 북부는 약간 중국이때에 남쪽에 세워진 남한(南漢:중국의 왕조)의 세를 등에

업었던 사람이 정권을 잡고 이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있었다.

 

이에 원한을 갖은 응오꾸엔이 그를 죽이고 정권을 잡으니 남한에서는 세를 보여주기 위해 공격을 했고 이에

응오 꾸엔은 물러나지 않고 바익 당강 하류에 말뚝을 박아 놓고 그들의 배를 유인한 후에 썰물때 물이 빠져서 배가

 옴짝 달싹 못하게 되자 보트로 건초같은 것들을 불을 붙여 보내서 대첩을 거뒀다 뭐 그런 이야기다.

 

응오 꾸엔은 이 전투의 승리 이후 중국과 독립적인 왕조를 꾸리는데 이것이 응오 왕조이다. 헌데 그 체제정비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고 지방에 수많은 세력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남한의 공격에 능력있는 군벌 밑으로 일시적으로

모인 것 뿐이라 응오 꾸엔이 6년뒤 죽자 바로 탈이 난다.

 

어린 왕자에게 왕위가 세습되지 않고 처남인 즈엉 땀 카(楊三軻)가 잠깐 정권을 빼앗는데 이때도 베트남의 그 모계

중심 흔적을 알 수 있다. 장남은 도망가서 다른 지역에 몸을 의탁하고 차남은 즈엉땀카의 필요에 의해서 대외적으로

내세워지는데 왜그랬는지 이해가 안가는데 지방에서 난 반란을 이 차남에게 해결하라고 군대 줘서 보냈다가 이 군대

이용해서 응오씨가 다시 즈엉 땀 카를 죽이고 정권을 잡는다

 

 

차남의 이름은 응오 쓰엉 반(吳昌文) 형은 응오 쓰엉 응업이었는데 어쨌거나 이들은 분열되는 나라를 수습 못하고

이른바 12사군의 난이라는 각지의 호족들이 난립하는 시대를 맞는다. 12사군은 각지의 여러 호족중 세력이 큰 것만

추린 것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세력들이 난립했다.

 

이를 통일 하는 것이 딩 보린이다. 그는 지금의 응에 안 지역의 차사였던 딩 꽁쯔의 아들로 딩보린의 통일 시기는

968년으로 나오기도 하고 일설에는 966년이라고 한다고도 하는데 그는 타이 빈 이라는 연호를 제정하고 국명은

 다이 꼬 비엣(大瞿越)으로 했는데 이 왕조의 이름은 11세기에 다이비엣으로 바뀐다.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정말로 줄서기 복잡했을 것이다. 종래의 질서는 중화에 기대는 사람들이 기득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 응오 꾸엔이 갑자기 세를 얻은 거였고 그것도 군사정권이었으니 절개를 지키려면 목숨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를 따라 응오씨에게 충성을 바쳤다면 즈엉씨가 집권할때 위험했을 것이고 이쪽으로 몸을 옮겼다고 해도 응오씨가

 바로 다시 돌아와 위험했을 것이고 그 응오씨도 결국에는 호족중 하나로 전락한 후에 그 수많은 난립한 세력중에서

딩씨가 집권하는 것이니 충신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좋은 소리 듣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일을 이룬 되는 딩보린도 그렇게 매력적이거나 대단한 대의를 위했던 사람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보통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이 바라는 영웅이란 혼란을 잠식시켜 줄 사람이며 그 혼란이 전란이라면 무자비한 방법

으로 상대를 잡아 족치는 사람이 되게 마련이다.

 

 

그 시대에 대한 묘사를 보면 딩보린은 궐 뜰에 호랑이 우리를 만들어 놓고 죄인들을 이 안에 집어 던지고 가마솥에

넣어 끓이는 등의 공포정치를 통해 권위를 세웠다고 한다. 딩씨도 오래가지 못했다. 왕위 계승과 관련한 혼란탓에

딩보린도 암살당하고 말고 왕위는 결국 6살짜리에게 넘어간다. 이 때에 송이 침입해 오자 신하들은 레 호완 장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으로 결의하고 선양을 받아 최종적으로 레 왕조가 설립되는 것이다.

 

 

 

 



이 지도는 어디서 퍼왔는지 모르겠다. 꽤 오래전에 어디 카페인지 하는 곳에서 캡쳐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난다.

지명이 너무 정리 잘 되어 있어 그냥 놔두기 아까워 올린다.

 

지도를 보자면 중간에 빨간 글씨가 보일 것이다. 인드라푸라, 비자야, 카우타라, 판두랑가. 이 도시들은 참파의 중심

도시들이다. 참파가 인도 계열의 문화를 갖고 있어 인도의 지명들을 가져왔고 이 지역들은 어느정도 정치적으로

 독립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인드라푸라는 인드라의 도시라는 뜻으로 아마라바티가 인드라푸라다.

 

각 지가 색깔이 다른 것은 복속되는 시기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이비엣의 영역은 다이꼬비엣이라고 했던 시대부터

이후 밝은 노란색 지역을 병합하고 뒷날 참파를 흡수하면서 밑으로 계속 내려오며 커진다.

 

지도 윗부분 진한 노란색 중간에 phu tho가 있다. 응오 꾸엔의 출신지고 아래 Nghe An이 딩씨의 세력지이다.

 북부지역은 친 중국 성향이 강했고 남부지역은 독립경향이 강했는데 남부지역의 세력이 결국에는 승리를 했던 것이다.

 

 


딩보린의 통일 사업때 장남 딩 리엔의 역할이 컸다. 아비 대신 볼모로 잡히기도 하면서 고생을 했는데 세자로는

어린 세째 딩 항랑이 책봉되자 열받은 딩 리엔은 동생을 죽여버린다. 이듬해 왕 딩보린과 세자 딩리엔을 도틱이란

자가 암살하고 왕위에 앉았다가 응우옌 박이 도틱을 죽이고 딩씨 왕조를 부활시키는데 살아남은 딩또안은 당시

6세였다.

 

그 해인 980년에 송나라가 침략을 해 오자 신하들끼리 회의에 의해서 장군 레 호완에게 왕위를 양위하자고 하고

왕조가 열리니 이것이 레 왕조다. 레 왕조는 뒤에 한번 더 열려서 먼저 열린 레 왕조를 전레 왕조라고 한다.

 

송과의 전쟁은 처음에는 불리하게 전개 되었다. 이에 거짓으로 항복해서 안으로 꾀어 들인 다음에 지휘관을 암살

하고 군대가 물러가자 이어 바로 조공사를 보내겠다고 하면서 정리를 했다. 송의 침입 한해 전인 979년에 남쪽의

참파가 침략했다가 별 소득 없이 물러난 일이 있었는데 송이 물러가고 정비가 되자 다이꼬비엣은 982년 참파에

대한 보복 전쟁에 들어가서 이들의 수도인 아마라바티(인드라푸라)를 점령하고 약탈한 후에 다시 돌아온다.

 

 

레 호완이라는 장군은 그 종래의 만들어 졌던 군사적인 기반을 잘 이용했던 것 같다.

 

재위도 24년동안으로 길었고 이 와중에 계속 동남아로 세력을 조금씩 넓혀서 1000년 참파의 중심도시중에 하나인

 아마라바티를 차지한다. 이 참파는 좀 도시 국가 연합체의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인도계인지 말레이계인지

일단 민족의 구성은 말레이계라고 나와있는 참족의 집단이라고 하는데 문화는 인도의 색깔이 강하다. 도시의

 이름들은 주로 인도의 도시에서 따오고 미술품과 조각품에서도 이 색깔이 여실히 드러난다. 참족은 뒤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한때는 다이비엣을 위협할 때도 있었으나 결국 흡수되고 만다.

 

레 왕조 역시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역시 세자 책봉에 탈이 나서 몸살 좀 앓다가 롱딩이 즉위 하는데

이 사람은 사람을 고문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재미로 삼았다는 사람으로 승려들에 대해서도 함부로 대하다가

반감을 크게 사다가 1009년 죽었다. 이 사람의 사인은 성병과 치질일 것으로 추정한다.

 

왕위는 아들에게 계승 되지도 않았고 리꽁원이라는 사람이 계승한다. 하필이면 중국에 정말 많은 리 씨인데

이 사람은 유교사상을 도입하고 관직 체제를 체계화 한다. 약간 나라 성격이 고려와 비슷하다. 국체는 유교적인

성격을 갖고 사회는 불교적인 색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제도도 실시했다고 하는데

아직은 그렇게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첫 시행은 1075 두번째는 1077 세번째는 1086 네번째는 1152년.

그러니까 부정기 적이고 뭔 특별한 사안처럼 실시한 것이지 이것이 관직의 등용문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과거를 볼 수 있는 사람도 굉장히 제한적이라 관료제 국가라기보다는 신분제 고대국가의 형태를 벗어

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리 왕조 들어서면 좀 숨 좀 돌리겠다. 그 전까지는 왕조라고 해 봐야 몇 대 넘어가지도 않고 그나마도 안을

들여다 보면 신하들의 반란 왕자들의 반란만 계속되었는데 리 왕조는 그래도 200년이나 존속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관제나 이런 부분에서 송나라의 여러 제도를 모방하는데 앞으로 이 리 왕조 외에 계속 이어지는

왕조에서도 무슨 왕 이름에 타인 똥이니 하면서 무슨 똥 똥 어쩌고 하는 부분이 많이 나올것이다.

 

여기서 똥은 한자로 치면 宗이 되고 우리나라 무슨 태종 세종과 같은 것이다. 같은 예로 무슨 또 이렇게 끝나면

조를 의미한다. 세조 영조 처럼 말이다. 사실 이 중국에서 송나라라고 하는 때는 송에서 엄청나게 많은 문화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을 때였고 워낙 물자가 풍부해서 다른 곳을 점령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지도 않았던 시기라

이 시대에 송 근처에 있던 여러 나라들이 한꺼번에 전성기를 맞았다.

 

 

동남아의 경우 다이 비엣뿐 아니라 구석에서 크메르가 한창 앙코르와트를 건설해 가면서 위용을 떨쳤고 슬슬

타이족이 집단을 이뤄가던 시기였다. 태국의 역사의 시작이라는 수코타이는 13세기 초에 시작하니 이보다 약간

늦는다.

 

그래서 태국 빼고 동남아의 큰 정치세력이라면 참파와 크메르의 앙코르 세력이 다이비엣에 인접하게 된다.

 

 

리 왕조 초기에는 내부 반란으로 일부가 독립해 나가기도 하고 송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참파를 압박해 계속

해서 영역이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평온과는 거리가 먼 굉장히 변화가 많은 시대였다. 아니 계속된 전쟁의

 시기였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송 대에는 그 조공-책봉의 관계가 좀 느슨해서 주변 사방의 많은 나라가 그 왕이라는 단어보다 황제

라는 단어가 더 좋다면서 황제를 칭하는 일이 많았는데 더러 책봉 받는 나라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어

 이것을 대체 뭐라고 부르는게 옳은지 잘 모르겠다. 베트남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삼을 때도 계속 황제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렇게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리 왕조의 초기 타이족 계통인 눙씨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가 1038년이니 왕조 초기인데 대충 내용을

보면 눙씨의 추장을 탕조주의 수령으로 앉히고 그 동생을 그 옆 주 수령으로 앉히고 추장의 아내의 동생을 또

인근 지역 수령으로 앉혔는데 그러니까 좀 약한 의미의 독립된 호족쯤 되는 세력이었던 듯 싶다.

 

이들은 다이비엣과 송 양쪽에 금을 캐서 바쳐야 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대장인 눙똔뿍과

 그 큰아들 눙찌퉁을 사로잡고 계속 압박해 결국 둘째아들도 잡는데 다이비엣의 황제는 대장과 장남을 죽인 와중에

둘째아들까지 죽여서 대를 끊기가 뭐 했는지 살려준다. 이 때는 리 왕조의 타이똥 그러니까 태종이 집권할 때다.

 

이후 1043년 남쪽 참파와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런 혼란을 틈타서 살아남은 눙씨의 둘째 아들인 눙찌까오가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를 해서는 까오 방의 서쪽지방에서 1049년에 반란을 일으키고 다이비엣의 통제력을 벗어났다.

 

다이비엣은 반란 진압에 실패했고 이들은 새로 다이난(大南)이라는 나라를 세워 독립하고는 송에게 책봉을

해달라고 했는데 송은 다이비엣과의 우호탓에 이를 주저했고 이에 이들은 송의 남부 8주를 유린한다.

 

 

당시 요와 서하와 전쟁중이던 송은 처음에는 제대로 반격을 못해서 조정에서는 인정하자는 말까지 나왔다가

유명한 적청이(잘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송대의 유명한 장군이다) 나서서 결국 이 다이난을 정벌해 버린다.

 

송의 군세에 눌려 망하게 되자 다이난은 다이비엣에게 송이 몰려와서 좋을 것 없다고 도와달라고 하는데

다이비엣의 군세마저 송에게 박살나자 눙 찌까오는 대리국으로 몸을 피한다.

 

 

대리국은 송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이를 결박하여 1055년 송에게 보내어 사태는 일단락 되고 과거 다이난의 영토

였던 지역은 다이비엣과 송이 양분하게 된다. 이후 이 지역의 눙씨가 다시 불만의 움직임을 보이자 송에서 이들을

 회유해 이 눙씨들의 터전은 1062년 송나라로 귀속하게 된다.

 

 

이런 송의 압박은 남쪽의 참파에게 큰 동기가 되어서 1061년 참파는 다이비엣에 조공을 거절하고 또다시 싸움이

벌어지는데 다이비엣은 1069년 리 트엉 끼엣이 5만의 군세를 동원해서 왕을 사로 잡고 비자야를 점령하고는 살려

주는 대가로 3개주를 할양받는 등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이어 년똥이 어린나이에 즉위하게 되자 송에서는 슬슬 다이비엣을 공격하자는 말이 나오고 옹주 흠주 염주의 3개

주에 군대를 증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리트엉끼엣에게 명해서 먼저 이 3개 주를 선제공격 해 버린다.

 

이에 놀란 송은 결국 다이비엣에 군대를 보내 전쟁이 벌어지는데 장기전이 되고 서로 피곤해 졌다는데 다이비엣에

 좀 밀렸던 모양이다. 다이비엣은 위에 북방의 5개주를 할양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철군을 종용했다.

 

송의 군대가 철군하자마자 다이비엣은 바로 3개주를 되찾고 몇 해 뒤에 송과 협상을 해서 나머지 2개주도 홍의

옹주 흠주 염주를 공격하며 납치해간 사람들을 귀환시키는 조건으로 다시 돌려 받는다. 송과의 싸움은 대강 이렇게

해서 끝이 나고 이후에는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고 12세기 들어서는 초기에 앙코르 세력과 전쟁이 있었는데

공격하는 쪽이 앙코르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아 앙코르가 보다 강했나 싶기도 한데 다이비엣은 결국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뭐 다 그렇듯이 왕조 말이 되면 정권은 어지러워지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1209년 팜주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팜빙지라는 사람이 진압하는데 이에 팜주가 조정에 뇌물을 뿌려 도리어

 팜빙지가 투옥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팜빙지는 꽈익 복이라는 지방 호족의 부하였고 이에 꽈익 복은 화가 나서

군사를 이끌고 팜빙지를 구하러 다이비엣의 조정으로 쳐 들어간다. 황제는 팜빙지를 죽여버리고 도망을 치는데

이 와중에 태자 쌈이 몸을 피한 곳은 쩐씨들이 힘을 쓰는 곳이었고 쌈은 쩐씨의 딸과 결혼을 한다. 이후 안정이

되고 돌아온 후에 황제는 일년만에 죽고 쌈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후에똥이다.

 

후에똥은 뒷날 쩐씨를 의심했던지 도안씨와 응우옌 씨의 세력을 조정에 불러들여 혼란이 일어나는데

이 혼란은 1221년 후에 똥이 쩐씨를 수용하면서 일단락 되고 조정의 주요 자리는 쩐씨들이 골고루 나눠먹는

시대가 도래해 버린다. 후에똥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었는데 큰딸은 황후의 오빠인 쩐트어에게 출가했고

작은딸은 아직 어렸는데 1224년 후에 똥은 제위를 당시 7살이었던 어린 딸에게 맡기고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병세를 치유하기 위해 절에 기거한다.

 

우리나라 나이로 치면 8세. 이제 막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이긴 할텐데 이 나이 여자애가 직접 정사를 볼 수는

없어서 황후와 외척들이 완전히 정권을 잡고 황후의 사촌동생 쩐 투도는 제위를 뺏기 위해 조정 대신들의 자녀를

조정에 숙위하게 하고 일을 시키고 8살짜리 전트어의 아들을 여왕과 공놀이를 하게 한 다음 무슨 베트남 풍속중에

처녀가 맘에 드는 총각에게 물건 던져 청혼하는게 있다는데 여기에 끼워맞춰 여왕이 청혼한거네 하면서 둘을

결혼시키고는 1225년 1월 제위를 남편에게 선양하게 했다. 약간 헷갈릴텐데 그러니까 쩐 트어는 그 여왕의

어머니의 오빠니까 두 사람은 사촌 관계였다.

 

어쨌든 이 일을 마친 후 쩐 투도는 당시 진교사에 있던 후에 똥과 그 밖의 수많은 리 왕조의 왕족들을 도륙을

내 버리고 살아남은 지방의 리 왕족들은 응우옌씨로 강제 개명을 시켰다.

 

도륙을 피해서 배를타고 탈출을 한 리씨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자로 李龍祥 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고려로 흘러

들어왔고 이를 측은히 여긴 고종은 이 사람의 정착을 도와 이 사람이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베트남이나 고려의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화산이씨 족보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일전에 우리가

베트남과 수교를 할때 베트남에서는 이 화산이씨 종친회를 굉장히 환대하고 베트남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쩐씨 왕조가 시작된다.

 

 

베트남인들은 이 쩐씨 왕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왜냐면 이때 몽골의 침입이 있었고 베트남의

역사 교육과 사람들에게 심어주려고 하는 가장 강력한 가치관이 외세배격이기 때문에 베트남은 자신들이 몽골의

대규모 침략을 결국 이겨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살펴보자면 쩐 왕조는 이전 왕조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조직화 되었다. 과거제도 활성화 되고 봉록이니 고과제도도

제대로 자리잡고 2만의 금위군과 그 외의 지방군들도 갖추고 있었고 이 조직들이 뒷날 몽골과의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몽골의 1차 침입은 1257년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 들어 왔는데 당시 쩐 왕조는 도성을 비우고 도망을 가야 했다.

헌데 다이비엣의 청야전술에 말려서 물자부족탓에 몽골군은 후퇴해야 했고 이후에 쩐 왕조는 다시 전쟁을 준비한다.

 2차 침입은 남송의 원정이 끝난 이후에 일어났다.

 

 

몽골의 요구는 참파를 점령하게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고 다이비엣은 이를 거절하자 쿠빌라이는 아들 도곤에게

 명해서 50만의 병력을 조직해 다이비엣을 공격하는데 몇몇 왕후들은 기세에 눌려 항복하기도 했고 당시 쩐 왕조의

왕도 항복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것으로 보아 많이 밀렸던 모양이다. 헌데 이번에도 제대로 물자보급을 받지

 못하고 몽골은 물러가고 말았다.

 

 

이어 자존심이 상한 몽골은 1287년 30만의 군대를 몰고 내려오고 다시 17만석의 쌀을 500여척의 배에 싣고 남쪽

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과거 응오왕의 유명한 명승지인 바익 당강에 이르러 썰물때 강 하류에 박아 놓은 말뚝에

배가 잡히고 이어 화공에 당하고 매복에 당하고 하여 500여척은 전멸하고 적장 오마니는 사로잡히고 남은 몽골군은

 총 퇴각해 버리는 대승을 거두고 나라를 지켜 낸다.

 

이 바익 당 강의 전투는 베트남에서 너무 유명하고 이 하구에 박아 놓았다는 말뚝은 지금 여러개 발견된 일도 있다고

하는데 글세 바닥에 일부러 박아 놓는 어려운 공사를 할까 싶기도 하다. 그냥 큰 돌들을 옮겨 놓는 것이 보다 효율적

일것 같기도 하고 찾아보니 이 바익당강이 상당히 크다.

 

 

하구 폭이 900m 정도 되던데 아무래도 이쪽보다는 보다 상류쪽일거라는 생각도 좀 든다. 어쨌거나 이 유명한 싸움

으로 몽골과의 전쟁은 끝나는데 이후에는 참파의 공세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이 쩐 왕조도 리 왕조

처럼 쇠퇴하는 시기가 오고 만다.

 

 

14세기 말 쩐 왕조가 완연히 쇠퇴했을 무렵에 호뀌리가 등장한다. 당시는 중국의 정세는 1368년 명이 건국이 되고

원이 북으로 물러간 상황이었고 남쪽의 참파는 계속 공격을 해 오던 참이었는데 호뀌리는 년똥(藝宗)의 외척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던 인물로 참파의 공격을 막아 내어 실권을 잡았다.

 

1388년 새 황제로 (順宗)을 옹립했고 1397년에 수도를 천도하는 등의 변화를 꾀했다. 이 즈음부터 1406년까지 조세를

개혁하고 베트남 최초의 화폐를 만들고 베트남 고유 문자인 쯔놈을 이용한 문학을 장려하고 하는 등의 여러가지

노력을 펼치는데 이 와중에 1400년에 황제를 폐하고 자기가 황제가 되고 나라 이름을 다이 응우로 개칭하고 얼마후

제위를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자기는 태상황이 되는 등의 일이 있었다.

 

헌데 얼마 못가 폐위된 쩐씨의 후손이 명으로 가서 정벌을 종용하고 명에 하필이면 영락제가 즉위하는 등의 악재

탓에 결국 전쟁이 벌어졌고 호씨 왕조는 1406년에 호뀌리와 호뀌리의 장남이 사형을 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원래 후계자가 없으면 평이 좀 박하기 마련이다. 베트남에서도 이 호뀌리에 대해서 안좋게 그리는 모양이다.

 이어 후레왕조가 시작되는 1428년까지 20여년간을 명의 식민시대라고 부른다. 이 20년간의 이야기도 외세에 대한

저항 어쩌고 해서 자부심이 상당 하다고 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에 보기로 한다.

 

 


 

Ngày hạnh phúc

 

 

 

 

 

베트남역사와 결혼 문화

 

월남(越南)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세기경에서 유래된 ‘중국의 남방’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월남이란 말은 1590년 만들어진 하노이 캄라오 파고다에 조각된 글로 새겨져 있을 정도로 유래가 깊습니다.

 

1945년까지 안남으로 불리웠지만 바오다이(B?o ??i)황제가 공식명칭을 월남으로 바꾸었습니다. 월남이라는 한자

 표기는 이때부터 중지 되었고 베트남 "Vi?t Nam"이라는 영문표기가 공식 국가명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사회민주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은 단일체제의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새국가 체재에 대한

헌법이 1992년 4월 승인되었습니다. 중앙 집권식 베트남 공산주의 정부 체재가 전 정치와 사회조직에 전파되었습니다.

 

사회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제도를 급격하게 도입하므로서 경제학자들은

 이들을 ‘열렬한 자본주의적 공산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베트남 대통령은 베트남 군대의 원수이며 국가방위안전국의 의장입니다. 최근의 베트남 국무총리는 응우엔이며 3

명의 부총리와 26명의 장관을 수장입니다. 베트남 인민민주주의공화국 의회는 선출직으로 의회와 사법부를 대표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집니다. 장관직은 의회의원으로부터 선출됩니다. 대법원 역시 의회에게 답변할 의무를 가집니다.

 

대법원 아래로 지방 법원과 군 법원이 있습니다. 정부의 모든 조직은 공산당의 지시를 받으며 대부분의 고위관리는

공산당원입니다. 베트남 인민군은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연안방위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베트남의 면적으로 이태리보다 크고 거의 독일과 크기가 같습니다. 작은 구릉과 산이 40%, 열대우림이 40% 그리고

평지가 20%를 넘지 않습니다. 베트남 북쪽지방에 높은 지대로 판시팡 산은 베트남의 가장 높은 산으로 3,143 m입니다.

 

 남쪽지방은 열대우림지역과 척박한 흙을 가진 평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베트남은 11월과 4월까지는 겨울로 간주되는 건기이고 여름의 우기에는 우기입니다.

 

일년 평균기온은 21 and 28 °C이고 남쪽평야 지역이 북쪽 산악지역보다 높습니다. 북쪽산악고원지대는 기온은 12월과

1월에는 5 °C, 7월과 8월은 37 °C로 기온의 차이가 급격합니다. 하롱베이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1986년 베트남 정부는 도이모이를 도입하여 산업과 상업과 농지를 개인소유 할 수 있게 된 이래로 2010년까지

년 7% 성장을 이루고 있고 외국인 투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세 번째 산유국(하루 400,000만 배럴 생산) 이며 오픈마켓정책으로 중국의 두 배의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는 나라입니다. 극심한 가난, 하루 1달러로 생활하는 극빈자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지금은 중국,

 인도, 필리핀보다 그 수가 적습니다. 도오모이 정책은 간난한 사람들에게 교육과 의료비를 지원합니다.

 

골드만 삭스의 경제예측보고서에 의하면 베트남은 2025년까지 세계 17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영국 영국 경제규모의 70%에 육박하는 수치입니다. 베트남은 캐슈넛 후추를 세계 시장에 30%를 수출하며,

쌀 수출은 태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출국입니다. 이외에 커피, 차, 고무와 수산품을 세계에 수출합니다. 2009년의

 베트남의 실업률은 2.9%를 기록했습니다.

 

 

 

결혼 문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족들 photo by Khuong Viet Haw

 

 

현대의 베트남 결혼은 풍습을 간직한 예전과 많이 다릅니다. 다른 것은 체면을 중시한 결혼비용과 결혼연령입니다.

 예전에는 남성이 20대 여성이 18세이면 적정연령으로 생각했습니다. 여성이 사회생활이 자유로워지고 직업적인

경력을 쌓는 동안 결혼은 미루어 졌습니다.

 

전통적인 중매결혼은 빛을 잃고 있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직도 중매결혼에 대한 믿음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상대방이 잘 살 수 있는지 사주와 점을 보는 것은 젊은층에서도 아직도 선호합니다. 만일, 사주의 결과가

나쁘면 결혼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베트남의 첫 번째 결혼순서는 신랑부모들이 자신의 아들과 결혼할 여성이 부부로서 잘 살 수 있을지를 점쟁이한테

 문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만일 사주가 좋다면 여성이 결혼을 결정해야 하는 절차를 남겨두게 됩니다.

 

결혼신청은 신랑의 부모가 신부의 부모를 찾아가 청혼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신랑 부모는 베텔잎(betel leaves)

이나 빈랑열매(areca nuts)를 준비하고 빨간 박스안에 신부 결혼예물을 준비 합니다. 그리고 신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지만 대부분 결혼식 절차에 필요한 지참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결혼은 진행됩니다.

 

다음절차는 결혼인데 대부분 수개월후로 미루지기도 합니다. 만일 배우자가 대학에 다니거나 외국에서 일을 한다면

더 늦추어 지기도 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길일을 잡는데 민감합니다. 그러므로 결혼날짜를 잡는 것도 점쟁이한테

물어 길일을 선택합니다.

 

결혼식을 할 때 신부는 붉은 아오자이를 입습니다. 피로연을 하기 전에는 조상에게 예 먼저 올립니다.

약혼식은 신부가족들이 미래의 시집사람들을 만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결혼식전까지는 신랑 신부는 불운을

막기 위해 따로 지냅니다. 결혼식 전날밤에는 신부 어머니가 신부의 머리를 여러 개의 빚으로 빚어 줍니다.

 

빚마다 다 다른 의미가 있지만, 세 번째 빚은 신부는 새로운 집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기원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결혼식 날 하객들은 신부의 집에 초청되고 신랑이 도착하기를 기다립니다. 신부는 전통 결혼의복으로 갈아입습니다.

결혼식 날의 예물은 베텔잎, 빈랑열매, 과일, 케이크, 전통술과 차를 준비합니다. 신부를 위해서는 결혼반지와

금귀걸이를 준비합니다. 빨간색은 베트남에서 전통적인 결혼예식에서 장미빛 결혼생활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색깔로 여깁니다.

 

 

신랑이 도착하며 빨간 아오자이를 입은 신부의 친구들이 신랑을 맞이합니다.

 

신랑이 집으로 들어오면 신부의 부모에게 준비한 술을 조금 마시게 합니다. 이 술을 마시면 신랑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됩니다. 몇 년전에는 이때 불꽃을 터뜨리고 축하 했지만 많은 사고가 생겨 지금은 하지 않습니다.

 

신랑의 가족들은 각자 인사하고 신부와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주례가 신부의 부모에게 신부

입장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신부는 결혼식장으로 들어옵니다. 전통적으로 신부는 빨간 아오자이를 입고 신랑은

검은 아오자이나 양복을 입습니다.

 

결혼식은 전통적인 재단 앞에서 진행됩니다.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전에 촛불에 불을 밝힙니다.

그리고 재단 앞에 무릎을 끓어 앉아 그들의 조상에게 결혼할 수 있는 허락을 구하고 새로운 신혼가족에 축복을 내려

주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난후 신랑신부는 돌아서 신부의 부모에게 신부를 낳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신랑신부는 서로에게 절하며 신혼부부로서 서로 감사하고 존경을 표합니다. 이때 주례는 새로운 신혼부부가

새 가정을 만든 것에 대해 조언하며 결혼증명서에 서명을 하게 합니다. 다음 양가의 부모가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축복을 빌어 줍니다. 그런 다음 결혼예물을 교환하고 부모들은 금팔찌와 귀걸이등과 같은 예물을 선물합니다.

 

결혼 후 피로연에서는 점심이나 저녁을 준비합니다 신랑 신부 양가의 부모는 다시한번 인사하고 하객들에게 축배를

듭니다. 피로연중 신랑신부는 각 테이블을 찾아가 인사하면 하객들은 봉투에 카드와 축하금을 넣어 줍니다.

 

피로연후 신부는 신혼살림을 할 신랑의 집으로 향합니다.

 

 

 

 

Người lính già

 

 

 

베트남, 그 강인한 역사

 

항 프랑스전쟁

 

188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민족의 독립을 표방하는 반(反)프랑스운동이 맹렬히 추진되었고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중화민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공산당은 그 후 각파의

정치세력을 규합하여 비엣민을 설립하고 2차대전의 종결을 맞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연맹

(비엣민)을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비엣민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월맹)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에 맞서서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명분없는 전쟁을 계속

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

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Kéo rồng

 

 

 

 

베트남 도로 이름속의 역사

 

 

베트남 민족의 어머니 '어우 꺼(Au Co) 

 

호치민 시의 Tân Bình 군은 교민들에게 익숙한 군이다. 호치민에 도착하는 1차 관문인 호치민 떤선녓 공항이 있고,

1세대 교민타운이었던 "꽁화(Cong hoa)"지역이 있고, 지금도 많은 한인 식당 및 레크리에이션 공간이 있는 '탄롱

(Thanh Long)" 및 슈퍼볼이 있는 곳이다.

 

 

이런 떤빈군과 서쪽의 떤푸군 및 11군과 경계선을 만드는 큰 도로가 바로 Au Co 다.

 

 

어우꺼 대로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베트남의 건국 신화를 알아야 한다. 신농씨의 자손으로 운남성에 바다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리던 "낑 즈엉 브엉 ( Kinh Duong Vuong )이 용왕의 딸 용녀와 결혼하여 '락롱꿘 (Lac Long

Quan )을 낳고, 락롱꿘은 예전 그리스의 헤라클레스가 그랬듯이 괴물들을 퇴치하고,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 등을

가르쳤으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주었다.

 

 

Au Co는 북방으로 부터 고대 베트남 지역으로 침입해 오던 라이(Lai) 황제의 딸이었는데,

아버지를 떠나 터프가이 '락롱꿘'과 결혼하여 100개의 알을 낳아 100명의 아들을 얻는다.

 

후에 성격차이로 인해 둘은 이혼을 하게 되고, 각각 50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어우꺼'는 산으로, '락롱꿘'은 해안

지역으로 가게 된다. 산으로 간 '어우 꺼'의 자손들은 형제 중에 가장 힘이센 자를 왕으로 뽑아 훙브엉(Hung vuong)을

 삼고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 국을 세우게 된다.

 

그 지역이 지금의 북부 Phu Tho 성이라, 지금도 Phu tho 성에 가면 '훙브엉'사당을 볼 수 있다. 

 

 

< '어우꺼'와 '락롱꿘'의 이별 장면를 그린 베트남 민속화 >

 

 

베트남 공산당 원조 맴버 독립투사 '응웬티밍카이(Nguyen Thi Minh Khai)' 

 

호치민 1군과 3군의 경계선이 되는 Nguyen Thi Minh Khai 대로. 호치민 세무서(140번지), Tao Dan 공원,

써머셋 빌딩 등 많은 명소들이 있다. 역시 500번지가 넘는 긴 길이다. A급 상권. 응원 티 밍 카이(Nguyen

 Thi Minh Khai )는 독립 투사다. 1940년 남끼 커이이아 봉기의 배후 지도 세력으로 지목되어 프랑스 식민

정부로 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1941년 호치민시 혹몬(Hoc Mon)에 있는 사형장에서 31살의 나이에 총살형

을 당한다. 

 

홍콩에서 호치민 주석의 비서 생황, 모스크바에 베트남 공산당 대표로 참석 하는 등 나이는 어렸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 같다.

 

남편 Le Hong Phong 역시 유명한 독립투사고, 친동생은 얼마전 타계한 보 응웬 잡(Vo Nguyen Giap)

장군의 첫번째 부인이다. 

 

 

 

식민지배에 항거한 베트남 남쪽 민중 봉기, 남끼 커이 이아 ( Nam Ky Khoi Nghia )

 

공항에서 1군 시내로 들어올때 반드시 지나는 길이다. 대략 400번지까지 있는 대로로, 호치민의 A급 상권이다.

통일궁, 사이공 스퀘어 등의 명소 들이 있다.

1940년 프랑스 식민 정부와, 일본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하여 동양공산당(베트남 공산당의 전신) 간부들의

주도하에 남쪽 전역에서 발생한 최대규모의 민중 무장 봉기의 이름을 붙인 도로. 남끼( Nam Ky ) 는 '남쪽 사람'

이라는 뜻, 커이 이아( Khoi Nghia )는 '봉기' 라는 뜻이다. 

 

당시 지도부였던 Vo Van Tan(보반떤), Phan Dang Luu(판당류), 응웬티밍카이(Nguyen thi Minh Khai),

하 휘떱 ( Ha Huy Tap), 응웬반끄(Nguyen Van Cu) 등은 역시 별도의 도로들에 이름을 붙여져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살아있었던 전투의 전설 '보 응웬 잡' 장군 ( Vo Nguyen Giap)

 

이틀전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보 응웬 잡" 장군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프랑스, 미국을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베트남 국민의 전쟁 영웅이다. 102세의 나이로 지난 4일 돌아가셨다. 베트남 주요 신문의 1면은 온통 '보' 장군을

추모하는 기사로 가득차 있다. 20세기 역사에서 베트남 국민에게 정치인 호치민이 있었다면 군인으로서는

'보 응웬 잡' 장군이 있었다. 

 

 

 

 

특히 1954년 베트남 서북부 '디에비엔푸'성에서 있었던 프랑스와의 전투에서의 승리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떠나는

분기점이 되었기에 영웅 '보'장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마음은 각별하다. 오늘 뚜오이쩨 신문 1면 탑에서는 Cecil

Currey라는 미국인 군사학 교수가, 지난 2000년간의 역사동안 포 응웬 잡 장군이 알렉산더, 나폴레옹과 어깨를

나란이 하는 군사 전략가였다는 말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보' 장군의 업적을 요약하면

 

(1)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로 프랑스 해방 전쟁 종지부 ( 적군 : 프랑스 )

(2) 1975년 사이공(호치민) 대통령궁 점령으로 베트남 통일 전쟁 승리 ( 적군 : 미국 )

(3) 1979년 10만 예비군으로 20만 중국군 격퇴 ( 적군 : 중국 )

 

Dien Bien Phu 거리는 호치민에서 빈탄군, 1군, 3군에 걸쳐 있는 가장 큰 도로의 하나이고,

하노이에서도 바딩군(호치민 묘역)에서 호아끼엠 군을 잇는 큰 길이다.

 

 

 

식민세력에 맞선 베트남 역사 최초의 봉기, 하이바쯩 ( Hai Ba Trung ) 자매

 

호치민, 하노이는 물론 베트남 63개성의 어느 도시를 가나, 가장 큰 도로의 이름 중 빠지지 않는 것이 ,

하이바쯩 (Hai Ba Trung)이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2명의 쯩 할머니'라고 할 수 있는데, 40~43년 사이 중국 한나라 군대에 맞서 봉기한

 쯩짝, 쯩니 자매의 이름을 딴것이다. 외국 식민세력에 맞선 최초의 봉기라는 데 큰 의미가 있는 하이바쯩

자매의 공적은 오늘날에도 계속하여 기억되고 있다.

 

 

 

 

- 코끼리를 타고 한나라 장수를 쫓아내는 하이바쯩 자매,

고깔모자 쓴 사람들은 베트남 군, 민만항 표정 짓는 사람은 한나라 장군

 

 

호치민 주석의 뒤를 이은 2인자 똔득탕 (ToN Duc Thang)

 

 

4군에서 칸호이 다리를 건너 1군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사이공 강을 끼고 있는 똔득탕 길이 나온다.

사이공 강변에는 저녁 식사 코스가 있는 유람선 관광을 할 수 있고, 붕따우로 가는 고속 페리 선착장도 있다.

왼쪽으로는 마제스티 호텔, 르네상스 호텔, 롯데 레전드 호텔 등 5성 호텔 들이 있고, 센터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알뜰 쇼핑족을 위한 사이공 스퀘어, 여러 회사들의 사무실이 모여있는사이공센터 건물이 나온다.

이 길의 이름은 호치민 주석의 청년시절부터의 동료이자, 1969년 그의 사후에 주석(대통령) 자리를 물려받고,

1976년 7월 베트남 전쟁이후 통일 베트남의 초대 주석이 되기도 한 똔득탕 주석의 이름을 딴 것이다.

롯데마트에서 푸미흥으로 들어오는 길 사이에 있는 대학교 이름도 똔득탕 대학교라는 것, 알고 있으면 좋겠다.

 

 

베트남의 고르바초프, 경제개혁개방 "도이머이"를 이끈 응웬 반 링(Nguyen van Linh) 

 

호치민에서 한국교민이 가장 많이 사는 신도시 푸미흥. 교민들은 푸미흥의 남북을 나누어 강남, 강북으로 부르는데

그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큰길이 응웬 반 링(Nguyen Van Linh) 대로이다. 푸미흥을 가로지르는 길이므로 교민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길이다.

 

늪지대에서 호치민시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로 다시 태어난, 그리고 아직도 발전중인 신도시 푸미흥을 가로지르는

응웬반링 대로는 베트남의 개혁개방(도이머이) 시기였던 1986년~1991년에 베트남 공산당 서기관을 했던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소련의 개혁개방 페레스트로이카를 이끌었던 고르바초프와 같이 베트남의 경제개방 및 개혁인 '도이머이'를 이끈

정치가 Nguyen van Linh.

 

 

베트남의 이순신 "쩐 흥 다오 ( Tran Hung Dao ) "

 

몽골군을 2번이나 격퇴하여 나라를 지킨 쩐(Tran)왕조 초기의 장군.  베트남 호치민을 방문한 누구나 보게 되는

유명한 동상이 있다. 1군 하이바쯩 도로의 끝이자, 7개의 길이 사이공강을 끼고 만나는 로타리 중앙을 장식한 쩐흥다오

장군의 동상이다. 1257년 몽고군 격퇴 (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은 1259년 30년간의 대몽항쟁을 끝내고 몽고와 강화를

맺는다.), 1282~88년에는 강화를 주장하는 왕과 대신들의 의견을 꺽고, 원나라의 쿠빌라이칸이 보낸 군대와 전투를

통해 그들을 물러나게 한다.

 

우리네 역사의 이순신 장군만큼 베트남 역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는 쩐흥다오 장군이다.

 

호치민 1군과 5군에 걸쳐있는 쩐흥다오 거리에는 최대 나이트 고쉽(Gosip)을 포함 여러 명소들이 포진해 있다.

 

 

 

 

프랑스 제국주의 침략 시기에 독립 운동을 한 왕 함응이 ( Ham nghi ) 왕

 

응웬 왕조의 8번째 왕. 식물 국왕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전국의 지식인들에게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으로 부터

독립운동을 촉구한 죄(?)로 인해 왕권을 박탈당하고, 알제리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한다(1843년). 14세에 왕이 되어

1년 남짓한 (1884 ~ 1885) 왕 생활을 하고 1888년 알제리로 망명. 자기 생각을 가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재위 기간도 짧았고, 그의 독립운동이 프랑스 제국 주의로부터 조국을 지킨것도 아니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서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주었기에 베트남인들은 그를 존경하고, 호치민 1군의 큰 길에 그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가격 대비 적정한 품질을 갖추었다는 평을 받는 Liberty Hotel 2( 129 Ham Nghi )가 있고,

바로 옆에 호치민의 오래된 명소인 Polo Bar 가 있다. 

   

 

 

베트남의 이성계 "레 러이 ( Lê Lợi ) 왕

 

 

 VVT3 뉴스를 보다 보니 북부의 탄호아(Thanh hoa) 성에서 Lam Kinh 축제를 벌인다는 기사가 있어, 알아보니,

'레 러이" 왕과 관련된 축제였다. 베트남 후기 "레"왕조의 시조인 레러이 왕이 국민들의 힘을 규합하여 명나라에 맞선

투쟁을 시작한 "람선( Lam son) 봉기 "를 기념한 축제라고 한다.

 

"레 러이" 는 호치민시 1군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도로(까라벨 호텔에서 벤탄시장에 이르는!) 에 붙여진 이름이고,

그 동생 "레 라이"도 큰 길이고, 5군의 패션 1번지 응웬짜이(Nguyen Trai)는 그의 선봉대장이었고,

벤탄시장 앞에 있는 로타리에 있는 동상의 주인공 전 응웬 한 ( Tran Nguyen Han)도 그를 도와 명과 싸우고,

후기 레왕조 건국의 일등공신이다( 개국 후 토사구팽 되는 비극의 주인공). 

 

 

 

호치민의 길만 봐도 베트남 사람들이 레러이 왕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 알것같다.

1400년대 초 명과의 항쟁을 통해 왕조를 세우고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긴 왕조로 만든(360년) 왕이기 때문이고,

나라를 외국에 빼앗긴 응웬(Nguyen)왕조의 전 왕조의 시조이기 때문일까? 어쨌든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이라 생각된다.

 

 

 

Tắm trưa

 

 

 


베트남 개황

- 건국 신화
=> 강한 바다신 Lac Long Quan과 아름다운 산신 Au Co가 만나 100명의 아들 탄생
=> Au Co 여신의 직계후손인 Hung이 베트남 최초 부족국가인 반랑국을 건국
-> 최근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들에 의해서 흥 왕조가 풍 응웬(Phung Nguyen)이라는

고도로 발달된 문화를 건설 확인

- 고대국가 발생기 (BC690 - 111)
=> 기원전 690년 흥가가 최초의 국가인 반랑국을 건립하고 툭(Thuc)가의 어우락국(BC 257),

찌에우다 남비엣(BC 207)이 차례로 건국

=> 기원전 111년 한 무제가 남월을 정복함에 따라 중국에 병합되어 행정구역상 교주(Chiao Chau)로 명명

 

 

- 중국 복속시대 (제1차 중국지배) (BC111 - AD 972)
=> 베트남은 쯩 자매의 봉기 (AD 40-43), 리 남 데의 봉기 (AD 544 - 602) 등을 통해 중국에 줄기차게 저항
=> 938년 응오 꾸엔 이 바익당강 전투에서 중국 점령군에 대승하면서 972년 중국으로 부터 독립
-> 쯩 자매는 오늘날까지 민족운동의 선구자로서 베트남 사람들의 추앙 대상

- 전기 레(Le) 왕주 (980 - 1009)
=> 토착 세력 종장의 하나인 레 호안이 송의 칩입을 물리치고 980년 전기 레 왕조를 건ㄱㄱ
=> 남쪽의 참파 왕국과 대결하여 다낭 북쪽까지 진출

 

- 리(Ly) 왕조 (1009 - 1225)
=> 레 호안 사망후 리 꽁 우언이 관리와 승려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름

 

 

- 전 왕주 (1225 - 1400)
=> 쩐 흥 다오 장군이 세 차례 몽고칩입을 격파. 쩐 왕조는 계속적인 남진 ㅈ어책을 ㅊ진, 참파 왕국 공격
=> 난을 일으켜 무너드리고 들어선 호씨정권 (1400 - 1407)은 명나라에 의해 멸망. 20여년 간 명나라가

베트남을 지배 (제2차 중국지배)

 


- 후기 레(Le) 왕조 (1427 - 1789)
=> 레 러이가 응웬 자이 장군의 도움을 받아 명의 군대를 격퇴하고 새 왕조 창건

 

- 남북 분립기: 찡 - 응웬가의 대결
=> 레 왕조 말기에 북부에서는 징가가 레 왕조를 받들고, 중남부에서는 응웬가가 권력을 잡고 서로 주도권 쟁탈
=> 1770년대 초반 중부 지역에서 응엔 삼형제가 응웬가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떠이 선 농민반란 궐기

- 응웬 왕조 (1802 - 1859)
=>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응웬 푹 아인은 의병군 및 플아스 용병과 함게 떠이선 세력을 격파.

1802년 응웬 왕조 수립

 

=> 현재의 베트남 영토는 이때 확보. 사이공 등 남부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왕조를 수립
=> 중국 청 왕조에게 조공을 바치고 왕위를 인정 받음. 왕조 수립에 공을 세운 프랑스 상인들에게 여러가지

이권을 제공

 

=> 2대 황제인 민망제는 반란의 배후로 외국인들을 의심하여 프랑스와 자국인 성직자를 박해하여 프랑스의

군사 개입을 초래

 

=> 프랑스는 중국 내륙의 풍부한 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통로로 베트남을 이용하기 위해 무력을 앞세워

베트남을 식민지화

 

-> 응웬 왕조는 프랑스 식민 하에서도 마지막 황제 Bao Dai가 퇴위한 1945년까지 존속

- 프랑스 식민시대 (1859 - 1954)
=> 1859: 프랑스군 사이공 점령
=> 1883: 프랑스와 아르망 조약 체결 (프랑스 보호국 전락)
=> 1887: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성립 (라오스, 크메르 포함)
=> 1927: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을 줌심으로 베트남 국민당 결성. 성급한 무력봉기 시도로 지도자들 처형.
=> 1930: 베트남 공산당 결성
=> 1940: 일본군의 베트남 진주
=> 1945: 일본군의 항복
=> 1945.9.2: 호치민의 독립선언 (임시 베트남 민주 공화국)
=> 1945.9: 연합군 베트남 진주
=> 1945-1954.7: 항불전쟁 (제1차 인초아니전쟁). 1954.5. Dien Bien Phu 전투에서 프랑스 항복
=> 1950: 베트남 민주 공화국 성립 (동구권 국가들이 승인)

- 대미 항쟁시대 (Ad 1954 - 1973)
=> 1954: 제네바 협정 (프랑스군 철수. 17'로 남북분단)
=> 1955: 남부에 미국지원 베트남 성립
=> 1960: 민족해방전선(NLf, 속칭 베트콩) 결성
=> 1965: 미국의 전쟁개입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 1973.1: 파리 평화협정 체결. 미군 철수 개시

- 통일된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시대 (1973 - 현재)
=> 1975.04.30: 베트남 공산화
=> 1976.04.26: 남북통일 총선거 실시
=> 1976.07.02: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 1977: UN 가입
=> 1978.10: 캄보디아 침공
=> 1979.02: 중국-베트남 국경전쟁
=> 1989.09: 캄보디아 철군완료
=> 1991: 중국과 국교 정상화
=> 1992: 한국과 수교
=> 1995: 미국과 수교
=> 1995: ASEAN 가입
=> 1998: APEC 가입
=> 2002.12: 미국-베트남 무역협정 발효
=> 2007.01: WTO 가입

 

 

 

 

 

 

Nghệ sỹ đời thường

 

 

 

 

 

베트남역사로 본 문학



발전시기


문학 역사의 대상은 각 문학사건, 각 문학풍조, 한 시대의 문체 체계를 지배하는 심미사상이다.

이 관점을 통해 베트남 문학 역사는 10세기부터 1975년 까지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10 세기 ~ 19세기 전통 문학 시기

각 봉건왕조 아래 발전한 베트남 문학은 2부분이 나란히 발전한다. 민간문학과 지식층의 기록 문학이다.

기록 문학은 한자, 쯔놈 포함하는 승려들의 창작, 관리, 문화층 장군, 가장 많은 계층이 유학자이다.
이 두 부분은 10세기~15세기에 화합하기도 하고, 16세기~19세기에 분화하기도 한다.


기록 문학에서 쯔놈 문학은 한자 보다 더 우세하고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규율에 따라서 발전한다.
이 시기에 문학은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사람들의 의식 변화와 연관이 있다.


심미적 관점은 고대 동양의 문체, 불교, 도교,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문체 체계를 통해서 실현된다.


2) 20세기 초~1945년 근대 문학 시기

거의 50년간 진행된 이 시기는 사회와 의식에 대한 큰 변화를 겪는다.


프랑스는 베트남 식민지 개척을 시작하고 새로운 많은 사회계층들이 생겨났으며, 사상, 서양 문화들이 점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언론 활동, 출판 또한 들끓고 국어문자가 보편화 된다. 위의 모든 조건들은 문학이 빠른

발전 속도로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다.


이 시기에는 문체 형식, 심미 의식과 예술 관점이 더 깊게 발전한다.
각 학파, 경향 사이에 열띤 토론이 많이 일어나고 이 시기에 문학은 복잡했으나 많은 성과가 있다.


3) 1945년 8월 혁명 후~ 현재(1975년) 현대 문학 시기

8월 혁명 후, 베트남은 계속되는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때문에 나라를 세우지 못한다.

문학은 사상에 대한 통일, 노동 인민에 대한 방향 등 당의 노선에 따라 발전한다.


그들은 문학을 창조하는 역량이자 대상이다. 문학의 첫 번째 임무는 전쟁의 선전, 교육, 정치, 전장에서

영웅들에 대한 칭송, 변치 않는 심미가치를 지니고 전반적인 사람에 대한 정세를 강조하는 것이다.

베트남 사람은 1945년~1975년까지 30년간 임시 점령 당한 적장 지방에서 진보 문학과 애국문학에 대해

열거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나라가 평화를 되찾은 후, 사람들은 문학이 민주성을 지니고 발전해야하고, 풍부한 인문내용, 높은 예술성을

가져야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Mực một nắng

 

 

 

 

 

국수 한 그릇에 담긴 슬픈 역사 - 베트남 쌀국수

 

2000년대 초 국내에 첫 선을 보인 베트남 쌀국수는 건강한 음식을 찾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굳건히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 ‘웰빙’ 열풍을 타고 낮은 칼로리와 담백한 맛, 여기에 쌀로 만든 국수라는 점이 쌀 문화권인

 한국에서 쌀국수가 성공한 배경이 된 듯하다. 하지만 이렇게 맛있는 베트남 쌀국수 ‘포(Pho)'가 전쟁과 분단의 산물

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 세계로 퍼져나가 세계화에 성공한 쌀국수이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베트남인들의 슬픈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풍부한 쌀을 가공해서 만든 음식, 쌀국수

 

 

 

베트남은 대표적인 농업국가로서 그 중에서도 쌀이 농업생산량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쌀을 가공한 음식이 발달한 나라이다.

 

베트남은 전 국민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농업 국가이다. 그중에서도 쌀을 경작하기 위한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연간 최대 3모작도 가능하다.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에 베트남의 한해 쌀 생산량은

베트남 전체 농업 생산량의 절반에 육박한다. 이처럼 풍부한 쌀을 가공하여 만든 음식이 바로 쌀국수이다.

 

 ‘포(Pho)'라고 불리는 쌀국수는 베트남 사람들이 분주한 아침의 간편한 식사 혹은 출출할 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다. 쌀국수는 쫄깃하게 삶아낸 면발에 쇠고기나 닭육수를 넣고 신선한 야채를 듬뿍 곁들여 먹는

건강식이다.

 

 

쌀국수의 유래

 

 

지금은 베트남의 대표 음식이 된 쌀국수의 역사는 의외로 짧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세기말 방직공업이 번성했던 남딘(Nam Dinh)의 공장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고기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던 것이 쌀국수의 시초이다.

 

쌀국수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강력한 설은 프랑스의 야채스프인 ‘뽀오페(Pot au feu’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초 베트남에 소개된 프랑스의 요리 ‘뽀오페’가 베트남의 식재료에 맞게끔 변형되었다는 설로서 포의 국물을 만들 때 사용되는 구운 양파와 생강이 뽀오페를 만들 때 사용되는 것과 동일하며, 베트남 이외의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이러한 조리방법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설을 지지한다.

 

또한, 예부터 베트남 농경사회에서는 노동력을 중요하게 생각해 소를 신성시하였기 때문에 식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 같은 사실은 베트남에서 프랑스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포가 만들어 졌다는 설을 뒷받침 한다.


프랑스의 야채스프 ‘뽀오페’에 들어가는 재료들
<출처: André at en.wikipedia.org>

 

쌀국수는 하노이 유역에서 서민들에게 사랑받는 대중 음식으로 자리 잡은 후, 1950년대에 이르러 남부지방과의

교류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베트남의 대표음식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서게 된다.

 

1954년 제네바 협약으로 북부지역은 월맹 공산 정권이 수립되고 프랑스군은 북위 17도선 이남으로 철군하게 된다.

 

이 당시 남하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정치적 신념이나 종규적인 문제 때문에 사이공 등의 대도시 주변이나 해외로

망명을 신청하게 되고 이들이 생계를 위해 음식점을 차리거나 포를 등에 매고 다니면서 음식을 팔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쌀국수는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남쪽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전 세계인들의 입맛까지

사로잡게 된다.

 

 

쌀국수의 종류

 

베트남의 쌀국수는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서, 혹은 육수의 종류에 따라 수십 가지 맛으로 나눌 수 있고,

각 지역마다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쌀국수는 쇠고기 육수에 숙주나물과 고수를 얹은 뒤 새콤한

라임즙을 짜 넣어 함께 먹는다.

 

쌀국수의 맛을 내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육수에 있다. 쌀국수는 소꼬리와 갈비, 사태에 계피, 향료 등을 함께 넣어

 오랫동안 우려낸 달콤한 육수에 소고기 편육을 얹어 먹는 소고기 쌀국수인 ‘포보(Pho bo)’, 그리고 닭의 고기와 뼈를

푹 고아서 만든 담백한 닭 국물에 닭살을 찢어 올린 닭고기 쌀국수인 ‘포가(Pho ga)’등 두 가지 종류로 나눠진다.

 

달고 기름진 음식을 선호하는 베트남 남부 사람들은 ‘포보’를 즐겨 먹는 반면, 담백한 맛을 즐기는 북부 사람들은

 ‘포가’를 선호하는 등 쌀국수를 통해 베트남의 지역 간 입맛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닭고기를 넣은 ‘포가‘(좌)와 소고기를 넣은 ’포보‘(우)

 

 

쌀국수의 종류에 따른 조리 방법 차이


베트남 남부지방의 쌀국수는 삶은 쌀국수를 대접에 넣고 쪽파, 파슬리, 숙주나물, 육계피 등을 얹은 다음 위에 얇게 썬

쇠고기나 닭고기를 얹어 고기 뼈로 만든 육수를 부어 먹는다.(호치민 지방 : 국수가 약간 가늘고 질기며 중국 국수와

비슷한데 맛이 독특하다.) 반면에 북부지방의 쌀국수는 숙주나 계피를 넣지 않고 육수도 담백하며, 여기에 쇠고기나

 닭고기를 동그랗게 만든 것이나 유부를 넣기도 한다. (하노이 지방 : 국수 위에 날 쇠고기를 얹기도 한다.)

 

 

베트남 쌀국수와 태국 쌀국수와의 차이점


베트남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국가인 태국도 쌀국수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이다. 주식으로 밥을 먹고 있는

태국은 쌀가루로 만든 쿠이티오, 셈미, 카놈친 등의 면이 존재할 정도로 쌀국수를 즐겨 먹는 국가이다. 베트남 쌀국수와

태국의 쌀국수의 차이는 육수에 있다. 태국 음식은 중국, 인도, 유럽의 음식문화가 융합되어 다양한 향신료가 독특한

향을 낸다.

 

태국 쌀국수에는 마늘, 고추는 물론 생선으로 만든 장류(類)인 남플라와 새우, 보리새우를 발효시켜서 만든 된장 같은

가피, 고수, 라임, 코코넛 밀크 등도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쌀국수에 비해 태국 쌀국수는 자극적이면서 맛이

 더 진하고 양념이 강하다.

 

 

태국 쌀국수는 베트남 쌀국수와 외관은 비슷하지만 육수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데, 태국 쌀국수는 향신료 맛이 강해 더 자극적이며 양념 또한 강한 편이다.

 

 

쌀국수 더 맛있게 먹는 방법


1. 생 숙주는 국수를 받자마자 면 아래로 넣어 숨을 죽인다.
2. 레몬은 국수 위에서 충분히 즙을 낸다.
3. 칠리소스와 해선장을 3:1 비율로 뿌려서 먹으면 더욱 얼큰한 맛을 느낄 수 있다.
4. 고기는 칠리소스와 해선장을 3:1 비율로 종지에 담아 찍어 먹으면 맛있다.
5. 절인 양파에 칠리소스를 적당량 넣어 버무려 먹으면 쌀국수와 조화롭게 먹을 수 있다.

 

 

 

 

Làng nghề truyền thống

 

 

 

 

 

베트남이라는 이름의 유래

 

베트남이라는 이름

 

베트남(Việt Nam)이라는 이름은 남비엣(越南; 월남)에서 온 말로 2세기 찌우(Triệu)왕조부터 불려진 이름이다.

 

 

비엣이라는 말은 고대에 현재 중국 남부에 해당되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지칭했던 박비엣(Bách Việt)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현재 의미의 베트남(Việt Nam)이라는 말은 16세기 시인 응웬 빈 킴(Nguyễn Bỉnh Khiêm)의 글에서 나타난다.

 

 

중국 지배시에 베트남은 7세기부터 안남이라고 불려졌다.

 

민족주의자이고 작가인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가 이 이름을 20세기 초에 베트남으로 바꿨다.

 

1945년 공산주의자들과 반공산주의자들이 각각 정부를 세웠을 때 두 쪽 다 베트남이라는 이름을 국호로 사용했었다.

 

영어에서는 베트남을 Vietnam의 한 단어로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2개 글자로 비엣 남(Viet Nam)이 맞는 말이고

(말 그대로 越南이라는 한자어) 베트남 정부 및 UN에서도 두 단어로 나뉘어 사용하다.

 


역사를 통해 베트남을 지칭하는 많은 이름들이 있었다.

 

공식적인 명칭 이외에도 베트남 지역을 일컫는 비공식 이름들이 존재했다.

흥붕(Hùng Vương)왕조 때에는 베트남은 반랑(Văn Lang)국이라고 불렀고,

안등(An Dương)이 왕인 시절에는 어우락(Âu Lạc)국이라고,

찌우(Triệu) 왕조 때에는 남비엣(Nam Việt),

리(Lý)왕조 시절에는 반쑤안(Van Xuan),

딘(Đinh)왕조 및 초기 레(Lê)왕조 시절에는 다이 꼬 비엣(Đại Cồ Việt)이라고 불렸었다.

1054년부터 베트남은 다이 비엣(Đại Việt, 大越)이라고 불렸었고,

호(Hồ)왕조 시절에는 다이누(Đại Ngu)라고 불렸었다.

 



베트남이라는 말의 기원

 

비엣(Việt, 유에, 유왓, 월)이라는 말은 고대 중국에서 기원한다.

 

처음에는 기원전 1200년경 상왕조 후기에 도끼를 뜻하는 상형문자인 "戉"로 처음 쓰여졌고,

이후 우리가 아는 "越"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이 글자는 상나라의 북서쪽에 사는 종족을 가리키는 글자였다.

기원전 8세기초 양자강 중부에 살던 종족을 ‘양규에’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이 후 더 남부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기원전 7세기에서 4세기 동안 유에/비엣/越 이라는 말이 양자강 유역 남부 유에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기원전 3세기부터는 중국 남부 및 남서부와 북부 베트남에 거주하는 비중국계 사람들 중에

특히 민유에(민월 閩越), 오유에, 루오유에 (베트남어: 락비엣Lạc Việt) 등의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바이유에/박비엣 (Bách Việt, 百越)이라고 불렀다.

 

이 바이유에/박비엣이라는 단어는 기원전 239년 간행된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기원전 207년, 이전 진나라의 장군이었던 조타(趙佗, 자오뚜오, 찌우다Triệu Đà)가

남비엣(Nam Việt, 南越, 난유에)를 세우고 수도를 현재 광조우인 당시 판유에 만든다.

 

 

나라 이름에 ‘南’이 들어간 이유는 다른 바이유에 왕국 즉 현재 복건성과 절강성에

각각 해당하는 민유에, 오유에의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오유에, 난유에 등과 같은 지역이 중국에 통합이 되고 나서도 이후 여러 베트남 왕조들은

이 이름을 계속 사용한다.


Sấm Trạng Trình (짱찐의 에언)에서 시인인 응웬 빈 키엠(Nguyen Binh Khiêm, 1491–1585)은

중국식에서 베트남 전통식으로 어순을 바꿈으로서 (베트남어는 형용사가 명사 뒤에 온다)

‘베트남’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이시기 베트남은 하노이의 찐(Trịnh)왕조와 후에의 응웬(Nguyễn)왕조로 나뉘어 있었다.

 

 

키엠은 당시 베트남의 여러 이름들 즉, 남비엣(南越), 안남(安南), 다이비엣(大越), 남꿕(南國)

등을 통합하여 통일 국가의 이름을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남(南)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월국의 남부를 말하지 않고 북쪽의 중국과

나른 남쪽의 베트남을 지칭하게 된다.

 

 

이에 대한 설명은 리 퉁 키엣(Lý Thường Kiệt)의 시 남꿕송하(Nam quốc sơn hà, 南國山河, 1077년)에서


“남부의 산과 강은 남쪽 황제의 것.

남북이 나뉜 것은 신의 책에 기록되었고,

너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이 땅을 침범하지 못하고,

이곳에서는 그대의 패배만이 있다”


이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학자인 응웬 푹 지악 하이(Nguyễn Phúc Giác Hải)에 의하면 하이퐁의 바오람(Bảo Lâm)탑을

비롯한 16-17세기 유물에 비엣남(Việt Nam)이라는 단어가 12개 발견되었다.


응웬 푹 추(Nguyễn Phúc Chu, 1675–1725)는 시에서 ‘Việt Nam hiểm ải thử sơn điên’

즉 ‘이것은 베트남에서 가장 위험한 산’이라는 표현으로 베트남을 언급했다.


이 후 지아 롱 황제(Gia Long, 1804-1813)가 최초로 공식 국호로 사용했다.

사실 지아롱 왕은 청나라에 남비엣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를 요청했는데 청나라 황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베트남으로 고쳐서 보냈다고 한다.


‘베트남’이라는 말은 근대에 와서 민족주의자들이 다시 많이 사용하는데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는

‘Việt Nam vong quốc sử’ (잃어버린 베트남 역사)를 1906년에 출판하고, 베트남광복회(Việt Nam Quang

Phục Hội)를 1912년에 창설한다.

 

 

그러니 일반 대중들은 계속 안남(Annam)이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했고 베트남이라는 말은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0년 베트남국민당(Việt Nam Quốc Dân Đảng)이 주도한 옌바이(Yên Bái) 봉기를 통해

베트남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1940년대 초가 되면 베트남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게 된다.

 

1941년 창설된 호치민의 베트남독립동민회(Việt Nam Độc Lập Đồng Minh Hội, 베엣민)에서도 베트남이라고

언급하고, 심지어 1942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도 베트남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베트남이라는 이름은 1945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는데, 1945. 7월 후에에 있었던 바오다이(Bảo Đại)의

황실정부에서 명명되었고, 같은 해 9월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의 공산정부에서도 명명되었다.

 


 

베트남이 불리었던 여러 가지 이름


식뀌 (Xích Quỷ)

반랑 (Văn Lang)

어우락 (Âu Lạc)

남비엣 (Nam Việt, 南越 Nanyue)

자오치 (Giao Chỉ, 交趾/交阯 Jiaozhi)

띤하이꽌 (Tĩnh Hải quân, 靜海軍 Jinghai-jun)

반쑤안 (Vạn Xuân)

안남 (An Nam, 安南)

다이꼬비엣 (Đại Cồ Việt)

다이비엣 (Đại Việt)

다이누 (Đại Ngu)

다이남 (Đại Nam)

베트남 제국 (Đế quốc Việt Nam)

베트남 민주공화국 (북부)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

베트남 민족국 (남부) (Quốc gia Việt Nam)

베트남 공화국 (남부) (Việt Nam Cộng hòa)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현재) (Cộng hòa Xã hội Chủ nghĩa Việt Nam)

 

 

 

 

 

 

 

베트남 DMZ의 역사

 

 

 

꽝빈 성 사람들의 마음을 획득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백 역사에서 보면 목 봉 동 나이와 메콩 강 강을 건너 칼슘 Mau 포인트 남쪽의 대부분을 도달하기 위하여 단지 200 년

우리 나라를 취했습니다.

 

매립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러한 토지의 영광의 시대를 시작 호안 및 Ly의 국가를 정복하는 4 세기를 중심으로

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내 많은 상호간에 나는 호기심 -. 국가의 여행과 꽝빈 성 내 연구 Quang 빈은 지역의 대비에 의해 분할

되어 있습니다. 더 딘 산악 등반 나는 다른 신념, 종교와 종교 단체의 지대한 영향을 관찰했습니다.

 

Gianh 문에서 오동 나무 문에 여행 나는 모래의 색깔 변화를 칭찬. 해외 요트, 나는 녹색의 숲과 넓은 바다를 통합 지평선

의 광경에 기절했다.

 

이 땅은 유명한 철학자 집이 없습니다 왜 그 여행 동안, 나는 궁금했다. 지리적, 문화적, Quang 빈은 다른 곳이 국가보다

나이 대비와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나라 언어로는 콴은 “개방”이라는 뜻과 “큰”빈 “은 평화적인 플랫폼”을 의미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이 가파른 토지는

베트남에서 가장 좁은 토지의 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냐토루에서 거리가 달을 금지하는 디우의 Do 마을이나 ​​베트남 –

 라오스 국경은 단지 40 킬로미터입니다.

 

전쟁의 파괴적인 힘과 국민의 고통스러운 운명은 저서 「전쟁의 슬픔」에서 그려졌습니다. 연속 비극은 에픽 퀘스트에서

 전쟁 리터의 속도 걸작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Ba의 Huyen 탄 콴 의해 고전시의 환송 있습니다 :

 

“물닭 고통스럽게 그 나라의 손실을 슬퍼 자고는 잠시 동안 정지 수렁에 그 국민에 울고, 나는 천국의 영원을 엿볼

 “냐토루 강은 Quang 빈의 ‘그레이트 파이브’의 강에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개의 작은 강, 키엔 잔 롱 다이에 의해 접합되어

있습니다.

 

 

베트남 하천의 대부분 반대로, 그것은 남쪽 투 북쪽 방향으로 흐릅니다. 냐토루 강 게이트는 조수 때문에 2 역 흐름이

가끔 있습니다.

강 이름은 또한 다차원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매력”과 “빛”과 “르”를 이해하고 여전히 과거에 대한

향수 사람은“르”는 Chiem 탄 황후 내 E 또는 트란 왕조 공주 Huyen Tran 씨의 끝없는 눈물 를 참조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Quang 빈 오프 바다가 깊은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포인트는 20 킬로미터의 해안을 형성하려면 깊이가 그냥 50 미터에

이릅니다.

 

 

그러나 “심해”사람에게 말씀 하셨다 동아 호이 ID 돈 바다 원래 갈기. Quang 빈의 물은 위험한 바위를 숨길 수 있습니다.

선박이 바다의 왕국에 갇혀 또는 난파 취득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냐토루 문 북쪽에 양성 섬이라 불리는

바위 벽에위치하고 있습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

 

 

“양성 섬은 부모님입니다.

 

당신의 여행을 용이하게하기 위해 종료하지 않습니다 “

 

 

역내 또는 역외 애 샘 다우마우의 산에 의해 간과 같은 돈 Co되었다 쿠아, 년가 아니, 여보 NHO 및 혼 카오 등 대형

물고기 양식장 위치, U 보, Ba의 렌 등. 용어 사이에 그들의 탐색의 경험을 바탕으로, Quang 빈 사람들이 자주 철수

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위험에 직면하여 어부는 부표와 앵커를 만들기 위해 돛과 노를 삭제합니다. 선장은 배의

속도를 저하시켜 바람의 방향에 수직으로 뱃머리를 돌리 앵커를 해제해야합니다.

 

 

선수는 트렌디에서 또는 바람 보트를 조종하는 데 도움이됩니다. 위험에서 탈출하려면 몇 배가 투 앙앙, 후에 같은

먼 지역에 도망입니다.

Quang 빈의 가장 주목할만한 구조가 교사의 요새입니다. 다오듀이 화재의 관점에서 위치를 이상적인 트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트의 군사 건설에 의문이 있습니다. 멋진 다오듀이 Tu가 Gianh 강 남쪽과 횡단 경로의 피크

를 무시하지만, 그의 요새의 사이트로 돈 바다를 선택했습니다. 누가 사우스 – 흐르는 로버는 친 군대위한 올무와

적의 방어와는 전혀 타격 이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십시오 하지는 않습니다.

 

 

CANH Duong 성에서 집 지형, 풍향과 조류에 적응하면 폭풍을 견딜 수 있도록 구축되어 있습니다. 동부 – 그들은

북쪽으로 내장되어 있습니다. 바오닌 집은 西にあ 수 있습니다.

 

 

최근 Quanh 빈은 Sun 스파 럭셔리 리조트에 관광객 덕분에 알려지게되었습니다. 하노이에서 500 킬로미터를 ​​누워,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에 대한 지역의 요구를 존중합니다. 이 영감은 종종 달에 대해 쓴 낭만적인 시인

항맛쿠 불에 의해 공유되어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그리고 최고의 동굴 시스템의 발견에 이어 Quang 빈의 사람들이 이상한 관용구를 선보일 수있는

기회를 가지고, 그들의 연설은 암시 이중 entenders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어부의 유머 감각입니다.

 

 

 

 

Thiếu nữ H'Mông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의상 아오자이

 

베트남 역사 속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온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


아오자이와 더불어 베트남을 상징하는 삿갓모자, 논

[온라인부] 중국의 치파오, 일본의 기모노가 있듯이 베트남에는 아오자이라는 전통의상이 있다.

화려하면서도 부드러운 실루엣을 지닌 아오자이는 베트남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의상이다.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했던 아오자이의 변천사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현지인처럼 베트남에서 아오자이를 입고 베트남 거리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현지인은 물론 많은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멋진 사진 역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역사 속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온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

아오자이의 ‘아오’는 ‘옷’을 ‘자이’는 ‘길다’를 의미한다. 긴 옷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가진 아오자이의

상의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양 옆이 길게 트인 슬릿 형태와 차이나칼라, 하의는 통이 큰 헐렁한

바지로 구성되어 있다.

아오자이는 본래 아오 뜨 턴(Ao Tu Than)으로 불리며 바지를 입지 않고 치마처럼 길게 입는 옷이었다.

하지만 1407년부터 중국 명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오 뜨 턴에 중국식 바지를 입게 되었고,

독립 이후에도 보수적 정책의 일환으로 바지를 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던 1860년 무렵부터 또 한번의 변화를 맞으면서 부드럽고 얇은 소재에 화려한

 색감의 원단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본래 4갈래의 슬릿이던 상의는 두 갈래의 슬릿으로 변형되었다.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고 속이 비치는 디자인이 속속 등장하면서 보수 집단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아오자이를 비판하고 반대하기도 했다.

1976년에 베트남의 사회주의 정부는 아오자이 착용을 금지시켰지만, 이후 쇄신정책과 함께 규제가 완화되어

아오자이는 여성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초기에는 일부 상류층만 입는 옷이었지만 은행, 호텔의

유니폼과 학생 교복으로 채택되면서 일상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오자이와 더불어 베트남을 상징하는 삿갓모양의 모자, 논

몸에 딱 맞춰 입는 아오자이는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이다. 베트남의 주요도시에는 많은 아오자이 맞춤매장이

있고 실제 옷을 맞추어 입거나 선물하는 관광객 역시 많다.

신체 사이즈를 측정한 뒤에 칼라의 모양과 원단 소재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가격은 원단 실크에 따라 달라지며

보통 5만원 내외의 가격으로 맞출 수 있다.

아오자이를 맞춰 입고 거리에 나오면, 아오자이와 함께 논(non)을 쓴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논은 삿갓과

유사한 모양의 모자로 아오자이와 함께 베트남을 상징한다.

13~15세기 쩐 왕조 시대부터 유행한 모자로 비를 피하거나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어 매우 유용하다.

 본래 논의 형태는 지금의 너비보다 더 넓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편리한 농사일을 위해 41cm의 원지름으로

규격화 되어 생산되고 있다.

논은 대나무나 야자나무로 만들어지는데 나무를 얇게 자른 뒤 그늘에 말려 바니시(vanish)칠을 한다.

 그 뒤 제작용 틀에 넣고 원형으로 말아 나일론이나 낚시 줄로 묶어준다.

마지막으로 목 끈을 대어 묶어주면 완성이다. 베트남을 대표하는 ‘국민 모자’답게 길거리 상점 및 기념품샵에서

약 3,000원 정도에 쉽게 구매가 가능하며, 다양한 색상의 끈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를 수 있다.

 

 


 

 

 

Phó Bảng

 

 

 

 

 

베트남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베트남에 와서 근무하며 베트남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은 중국 짝퉁의 문화요, 속국 정도로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베트남도 중국의 1천년 지배를 받았지만,

11세기 이 후 송. 원. 명. 청나라의 침략은 대부분 물리쳤다는 거다.

 

명나라때 34년의 지배기간을 제외하곤 모두 물리친 것이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원나라와 청나라의 침입으로 치욕스런 패배를 당해서

힘 없는 백성들은 수 없이 끌려가야 했다.

 

여성들의 치욕은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흔히 우리들이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단일 민족이다"

이 말처럼 허황된 거짓말이 또 있을까 싶다.

 

삼십 몇 년을 몽골에 도륙당하며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피해를 입었는가?

 

당시 위정자들은 대국을 전쟁으로 맞서 이길 수도 없거니와 전쟁의 참화는

국민들의 고통만 가중시키니 굴요적 화친을 해서라도

전쟁 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화친을 주장했다.

 

한편에서는 전쟁을 해서라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굴욕적 화친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임금은 양 세력 간 다툼에서 우왕좌왕 했다.

결국 강화도까지 피란 간 임금은 꼼짝없이 항복해야 했다.

 

역사의 진리지만, 늘 달콤한 요설은 군주를 감동 시킨다.....

그래서 군주 옆에는 충복보다는

요설의 간신들이 더 득세하고 힘을 가지기 마련인 셈이다.

 

 

베트남은 어떻게 유럽조차 한 순간에 쓸어버린 몽골군의 기세를 꺽을 수 있었을까?

몽골의 50만 대군 2차 침입시(1284년) 베트남의 국왕 '인종'은

전국의 덕망있는 촌로들을 모아서 의견을 물었다.

 

물론, 전쟁이냐 굴복이냐의 택일을 물어본 것이다.

 

이때, '쩐홍다이'라는 왕족이자 야전 최고사령관은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항복할 거면 내 목을 먼저 베시오"

 

그의 결연한 의지에 감동받은 전국의 촌로들은 항쟁에 나서기로 의견을 모은다.

'쩐홍다이'가 이끄는 부대는 몽골군에 결사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1285년 수도가 함락된다.

 

'인종'은 항복하자고 했지만 '쩐홍다이'는 이에 불복하며 왕조의 위급함을 알리는

명 격문을 띄워 전국의 장수들과 병사들을 감동시킨다.

 

이에 자극받은' 인종'의 군대는 사기분탱 했다.

이 한몸 바쳐 조국을 지키겠노라며 다른 군대가 되어 있었다.

용감무쌍하게 사방에서 몽골군을 공격해서 격파하고 수도를 탈환한다.

이렇게 두 번째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다.

세 번째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병법은 가히 전설적이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베트남에선 '쩐홍다이' 장군이 있다.

1287년 3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서 쉽게 수도를 함락시켰다.

 

이는 '쩐홍다이'의 전략이었다....

군을 수도에서 철수시킨 것이다.

 

그는 몽골군의 보급선단이 하롱베이 입구 강에 도착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심이 낮은 곳에 목책 수천 개를 설치했다.

다음은 함대를 유인하여 만조를 이용하여 꼼짝못하게 한 것이다.

몽골군 선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불화살 공격으로 무너졌다.

 

수도에 주둔해있던 몽골군은 '쩐홍다이'의 게릴라식 기습에 견디다못해 철수를 결정했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적이 강하면 피하고 약하면 공격한다는 나름의 유연한 전략으로

후 대에 외세와의 싸움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호치민의 전술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사람의 용장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며 국민들을 단합하여 성과를 내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용장 밑에 졸장 없고 졸장 밑에 용장 없다'는 말이 생긴 게 아닐까 한다.

 

근간의 사태를 겪으며 우리 주변엔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게 전쟁보단 낮다는 애기도 종종 들린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안겨준다.

스스로 존엄을 지키지못하면 결국 무너진다는 것이며

내부의 분열이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섭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베트남과 중국 간 영토 분쟁으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결사의 자유가 없는 베트남에서 도심지에서 집회가 열린다.

중국과 전쟁을 해서라도 영토를 지키자는 결사항전의 의사표시다.

 

오랜 전쟁을 치른 퇴역한 노병이자 미국과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전 월맹군 최고 사령관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은 나라라고 해서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

우리의 영토를 죽움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만 있다면,

대국과 싸워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우리의 존엄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

 

 

비록 예전의 적이였지만 작은 체구에 노구에 걸맞지 않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그 정신은 존경스럽다.

 

 

 

 

 

 

 

 

 

 

 

 


 

 

 

 

 

 

출처 : 베트남 생활 정보 친목 여행(30세이상 남자들만의 카페)
글쓴이 : 차태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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