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대사의 생애와 사상
곡주생각 2016.06.2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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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진묵대사인가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의 이름은 일옥(一玉)이요 진묵은 그의 법호(法號)이다. 김제시 만령면 화포리(火浦里)에서 조의씨(調意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중기 명종 17년 임술년壬戌年에 만경萬頃의 불거촌佛居村에서 태어나 인조 11년 계유년癸酉年 10월 28일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의 화포리는 옛날 불거촌(佛居村이)었으니 불개(火浦)에서 유래된 말로서 부처님이 살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대사는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고 외로운 환경에서 족성(族姓)과 세계(世系)를 전하지 못한다.
진묵대사는 고려 말 공민왕 때의 나옹懶翁대사와 더불어 석가모니 후신불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진묵대사가 한국 불교사에서 위대한 선승의 한 사람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일까?
진묵대사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중반의 굶주리고 헐벗은 조선 민중들에게 희망의 등불이었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참혹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무도 황폐해진 민중들의 삶을 치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무애행無碍行을 자유자재로 실천하면서 유유히 떠도는 구름처럼 자유롭게 살았다. 창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에 양쪽 날개가 있고 땅위를 굴러다니는 수레에 두 바퀴가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 보살은 지혜와 자비라는 양 날개와 두 바퀴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진묵대사는 지혜의 깨달음을 통해 온갖 번뇌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깨침의 자유를 얻고, 그 깨침의 자유를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한없는 자비를 현실사회에서 몸소 실천으로 옮겼다.
진묵대사는 참으로 오묘한 사람이었다. 세상사에 대해 초연하고 달관한 지혜로운 사람이면서도 천지만물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지녔기 때문이다. 개인의 독자적인 삶을 실컷 향유한 해탈의 자유인이면서도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어 중생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하면서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한 구도자였다. 보살행이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자기와 남을 동시에 이롭게 하는‘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위다. 중생과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서 없애주고 즐거움을 한껏 누리게 해주는‘발고여락拔苦與樂’의 행위다. 그러기에 진묵대사의 보살행은 뭇 생명과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열렬한 찬가다.
그러나 진묵대사는 단순히 불교의 승려로만 볼 수 없다. 진묵대사의 삶에는 불자와 유자와 도인의 모습이 중복되어 있다. 왜냐하면 진묵대사는 승려이되 승려 같지 않고, 유자이되 유자 같지 않으며, 도인이되 도인 같지 않은 절묘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진묵대사는 한국불교사에서 유불선 삼교회통의 경지를 지닌 특이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방내인方內人으로서 세속 한가운데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부대끼며 살면서도 세상을 온전히 잊은 세상 밖의 사람인 방외인方外人이다.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 밖에 있고, 세상 밖에 있으면서도 세상 안에 있던 사람이 바로 진묵대사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진묵대사의 삶은 구체적인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설화의 형식으로 전해진다는 점이다. 설화는 민중이 향유하고 창작하는 민중의 문학이다.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민중들의 생각이나 기원, 희망, 원망, 고통 등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언어예술의 결정체’이다. 진묵대사가 공식적인 저술이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여러 가지 종류의 진묵설화의 전승은 아주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진묵설화에는 당대 민중들의 세계와 인간의 근원적 관계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해명이 진묵대사의 기묘한 삶의 흔적과 함께 녹아 있다는 사실이다.
2. 진묵대사의 생애와 사상
2.1 진묵대사의 생애
진묵대사의 삶에 관한 구체적인 역사적 전거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의순意恂(1786-1866)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진묵조사유적고』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생을 제도한 진묵대사의 기묘한 인연과 꽃다운 발자취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기 어렵다. 설사 남겨진 기록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세속제世俗諦의 차원에서 방편적으로 설법한 것으로 허공의 꽃이요 허깨비와 같은 자취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묵대사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한편의 제문祭文과 두 편의 게송偈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조차도 남의 입과 손을 빌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대부분 구비설화나 문헌설화의 형식으로 전해질 뿐이다. 진묵대사에 대한 최초의 문헌자료는 진묵대사가 죽은 뒤 214년이 지난 후인 1847년에 초의선사가 그에 관해 전해져 내려오는 구비설화의 내용을 모아 편찬한 『진묵조사유적고』이다. 또한 범해梵海가 편찬한 『동사열전東師史傳』과 지원芝園 조수삼趙秀三의 『영당중수기影堂重修記』 등에도 진묵대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진묵대사는 어쩌면 따로 저서를 남길 필요가 전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천지만물과 한 몸이 된 우주적 경지에서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로 살면서 온몸으로 모든 것과 더불어 소통하고 대화하였을 것이니, 무슨 말을 새삼 따로 할 필요가 있겠는가? 진묵대사에 관한 이야기가 설화의 양식으로만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른다.
진묵대사는 조선 명종 17년 임술년(1562)에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불거촌에서 어머니 조의씨調意氏에게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의 성이나 집안의 내력조차도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런데도 초의선사의 『진묵조사유적고』에서 진묵대사의 어머니의 이름을 조의씨라고 구체적으로 거명한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비화경悲華經』을 인용하여 진묵대사가 부처의 화신이란 점을 은연중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비화경』에 나오는 ‘바다의 신’(해신海神)인 대비보살의 어머니가 바로 조의씨이기 때문이다.
진묵대사의 탄생에는 놀라운 일화가 있다. 진묵대사가 태어날 때 3년 동안이나 초목이 시들어 말라 죽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진묵대사가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묵대사는 언제 불문佛門에 귀의한 것일까?
진묵대사는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주의 봉서사鳳棲寺로 출가했다. 봉서사는 상서로운 새(서조瑞鳥)인 봉황이 머무는 절이란 뜻을 담고 있는데, 바위산(암산巖山)인 서방산西方山에 자리하고 있다. 서방산은 불가의 이상향인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이상낙원을 뜻한다. 진묵대사가 나이 일곱 살에 봉서사로 보내진 것은 아마도 애옥살림에 먹고 살길이 없어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한 고육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진묵대사는 어릴 때부터 매우 영특한 사람이었다. 출가하여 불교의 경전을 읽을 적엔 너무도 총명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로 받지 않고서도 불법의 현묘한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였다고 한다.
진묵대사의 출생지는 묘하게도 불거촌佛居村이다. 불거촌은 말 그대로 부처가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니, 부처의 화신으로 존숭을 받는 진묵대사의 탄생을 상징하는 것이다. 진묵대사가 태어난 불거촌의 집은 조앙산 자락의 산도 들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진묵대사의 삶이 초속超俗도 세속世俗도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중도적인 것임을 미리 예시하는 것은 아닐까?
2.2 사상
진묵대사는 불교의 승려였지만, 유도나 선도를 공부하는 사람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하였다. 진묵대사는 단순히 승려로만 한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승려이면서도 불교에만 머물지 않고 선도와 유도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삼교회통의 경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불교의 관점에서 삼교융합을 주창하던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서산대사는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지어 유불선 삼교가 솥의 세 발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진묵대사는 승려이자 유자였고 선도 수행자였다. 민중과 하나가 되어 사는 부처의 화신으로서의 미물인 물고기조차도 살리려는 ‘상생의 마음’은 불도佛道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극한 효심과 가족 간의 우애중시는 유도儒道의 모습이다.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어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노니는 진묵대사의 도통의 경지나 ‘시해선尸解仙’의 모습은 선도仙道의 모습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진묵대사의 사상을 불유선佛儒仙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검토하려고 한다.
(1) 석가모니의 화신
진묵대사가 생존한 당대의 불교계는 대체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 양립하여 대립하던 시기이다. 서산대사는 선종과 교종 가운에서 선종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러나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는 서산대사의 제자로서 선종의 종통을 잘 계승하여 달라는 서산대사의 위촉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교종에 중점을 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진묵대사의 경우는 법통의 사승관계가 뚜렷하지 않다.
민중과 더불어 살면서 대중교화에 온몸을 바친 인물이 바로 진묵대사이다. 진묵설화를 통해서 볼 때, 진묵대사의 불교관은 대체로 대승불교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근본목적은 깨침을 얻어 중생을 교화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에 있다. 위로는 깨침을 얻어 부처가 되고, 아래로는 뭇 중생을 교화하는 데 있다. 진묵대사가 물속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석가모니의 참모습이라고 말하고, 개인구제에만 집착하는 아라한의 소승불교와 명리승을 비판하며 신통한 도술력으로 민중교화에 힘쓴 것은 대승불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진묵대사는 당시 선종과 교종의 종파적 관점에 매달리지 않고 명리에만 치달리는 당대의 교계를 통렬하게 비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묵대사의 대중 교화력은 명리승들에게는 철저하게 도외시되었지만, 당대의 민중들이나 유생들에게는 대단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진묵대사의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행적은 봉서사에 출가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진묵대사는 막 출가할 당시부터 이미 부처의 화신으로 인정을 받았다. 진묵대사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라고 노래한 고려 말 나옹懶翁(1320-1376)대사와 더불어 한국 불교사에서 석가모니의 화신으로 한없는 존경을 받았다. 초의대사는 『진묵조사유적고』에서 “우리 동국의 진묵대사는 명종 때에 태어나셨으니, 곧 석가여래의 응신이다”라고 하여, 진묵대사가 석가모니의 화신불임을 밝히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진묵설화에서 진묵대사를 석가모니의 화신으로 보는 관점이 진묵의 삶의 전 과정-탄생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지속된다는 점이다.
진묵대사는 중생의 도움을 받아 살면서도 개인적 구원에만 몰두하는 당대의 관념적 불교의 한계성을 비판한다. 민초들이 어렵사리 경작하여 얻은 귀한 곡식을 야금야금 축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정작 민중의 고통과 고난을 외면하는 탐욕스런 승려의 행태를 질타한다.
진묵대사가 민중들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불교의 생활화 또는 불교의 민중화라는 ‘생활불교’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호국불교라는 기치 아래 현실참여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국가불교’의 의미가 있다면, 진묵대사는 천대를 받는 일반 민중들의 삶 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그들과 삶을 함께하는‘생활불교’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진묵대사의 삶은 그야말로 생활불교 또는 민중불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2) 지극한 효심과 우애
진묵대사는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기간의 우애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다. 진묵대사는 출가한 승려였지만, 어머니를 평생 극진히 봉양했고, 하나 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살뜰하게 돌보아 주었다. 진묵대사는 당시 자신이 거주하던 일출암 근처의 왜막촌(현재 완주군 옹진면 아중리)에 집을 마련하여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살게 했다. 진묵대사는 조석으로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며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자연에서 생겨난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기 마련이다. 이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진묵대사의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진묵대사의 어머니가 마침내 돌아가셨다. 진묵대사는 출가한 승려로서 후손이 없기 때문에 대대손손 어머니의 제사를 받들 수도 없고 묘소를 돌볼 수도 없는 처지였다. 또한 누이동생이 있기는 하지만 ‘출가외인出嫁外人’인지라 시집가면 남의 식구가 된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제사를 받들 수 없다. 풍수지리에 달통한 진묵대사는 천년만년 제사를 얻어 잡수실 수 있도록 어머니의 유해를 만경면 북쪽의 유앙산 기슭에 있는 성모암에 모셨다.
진묵대사는 성모암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술을 부어 제사를 드리면 풍년이 들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성을 들여 기도하고 소원을 빌면 바라는 것 하나는 반드시 성취한다는 소문이 세상에 떠돌았다. 그러자 인근 마을사람들이 행여 뒤질세라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다. 진묵대사가 어머니를 안장한 그 자리가 바로 자손이 없어도 향과 촛불이 천년만년 꺼지지 않는다고 하는 ‘무자손천년향화지지’의 명당이다. 풍수에서는 이런 명당자리를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성모암에는 참배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고, 그윽한 향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오르고 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자식이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발길과 집안의 평안함을 갈구하는 참배객의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진묵대사의 효성과 도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천년이 지나도록 어머니의 제사를 받들 수 있도록 한 진묵대사의 혜안과 통찰에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너무도 기묘한 일이다.
(3) 대장부의 참 자유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구도자의 삶인가? 대장부의 진면목이 무엇이고, 참 사람의 진정한 멋은 어디에 있는가? 이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진묵대사의 게송偈頌이다. 진묵대사는 명리를 초탈하여 삶을 한바탕 연극무대의 놀이마냥 아낌없이 즐기며 아무 것에도 속박을 받지 않은 대자유인이었다. 천 가지 만 가지로 온갖 구별과 차별을 일삼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감싸 안은 넉넉한 가슴과 여유를 보여준다.
天衾地席山爲枕, 하늘 이불· 땅 자리· 산 베개요,
月燭雲屛海作樽. 달 촛불· 구름 병풍· 바다 술통이로다.
大醉居然仍起舞, 크게 취해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다,
却嫌長袖掛崑崙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저어하노라.
진묵대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이 오도송은 진묵대사가 태고사太古寺에 머물 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고사는 대둔산 마천대 아래에 위치한 절인데,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말 태고 보우선사가 중건하였으며, 진묵대사가 삼창하였다. 진묵대사는 이 오도송을 통해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를 문자로 표현하기 위해 침묵과 여백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섬광과도 같은 깨침의 경지를 절묘하게 그린 시다. 천지와 함께 살고 만물과 하나가 되어 자유자재로 살던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경지를 연상케 한다. 이 시 한수만으로도 진묵대사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진묵대사는 바다라는 큰 술통을 끌어안고 온 우주와 하나가 되어 한 판 신명나게 놀았던 너무도 멋스럽고 여유가 철철 넘치는 풍류객이었다.
진묵대사에게 천지는 한마당의 놀이판이다. 하늘을 이불로 덮고 땅을 자리로 깔며 산을 베개로 벤다. 달을 촛불로 밝히고 구름을 병풍으로 둘러치며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 맘껏 술을 마신다. 한껏 술을 마신다는 것은 우주만물과 혼연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크게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흔연히 일어나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 없이 자유자재하게 춤을 추다가 도리어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진묵대사는 너울너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신선의 참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선仙이란 본디 긴 소맷자락을 드날리며 춤추는 모습(선僊)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묵대사가 개인의 독자적 자유를 맘껏 향유하면서도 자신이 한 작은 행위 때문에 행여 그 어떤 것이라도 다치지나 않을까 세심하게 염려하고 배려하는 따사로운 마음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진묵대사의 이 오도송에서 우리는 세상의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하나로 끌어안아 융합하면서도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대도의 경지와 우주적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진묵대사의 인품이 천지만물과 하나가 된‘우주적 인격’으로 승화되고 있다. 천지만물을 감싸고도 남을 만큼 넓고 걸림이 없는 넉넉한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다.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었으니, 무엇이 진묵대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대자유의 화신이다. 대장부가 이 땅에 태어나서 꿈꿀 수 있는 이상적 경지이다. 더 이상 무엇을 보태고 뺄 것인가? 천지를 갓난아이처럼 돌보고 보살피는 진묵대사의 우주적 경지와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진묵에게서 배우는 진정한 자유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진정한 자유는 깨침에서 비롯된다. 참 진리를 깨쳐서 온 우주와 한 몸과 한 마음이 되어 모든 사물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데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우주적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대상적 자유의 한계에서 벗어나 그 무엇에도 막힘이 없는 근원적 자유를 맘껏 향유할 수 있다. 온 우주와 하나가 되었으니, 무엇이 그를 억압하고 통제할 수 있겠는가? 진묵대사는 생生과 사死, 승僧과 속俗, 시是와 비非, 진眞과 가假, 미美와 추醜, 선善과 악惡, 득得과 실失, 이利와 해害 등 모든 대립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에 이르렀다. 개인적 소아小我에서 우주적 대아大我로 거듭나는 길이 바로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3. 진묵사상의 세 가지 특징
진묵사상은 세 가지 주요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진묵대사와 민중과의 관계이다.
진묵대사는 명리를 도외시하고 자기구원에만 집착하는 소승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을 행한 부처의 화신이었다. 일상생활과 실천수행의 ‘불이사상不二思想’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진묵대사는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세속에 머물러 살면서도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세속에서 대중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면서도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위대한 자유인이었다. 진묵대사는 승려로되 승려가 아니었다.
둘째, 진묵대사와 가족과의 관계이다.
진묵대사는 일곱 살에 봉서사로 출가한 뒤에도 모친과 누이동생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천륜과 동기간의 우애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중시하였다. 특히 진묵대사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은 생명을 중시하고 생명의 근본을 잊지 않고 사는 보은報恩의 삶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제시한다. 진묵대사는 유자儒者보다 더 유자다운 삶을 살았다.
셋째, 진묵대사와 천지만물과의 관계이다.
진묵대사는 대도의 경지에서 천지만물과 일체가 된 ‘우주적 마음’을 지니고 인간생명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우주만물과 하나가 된 ‘천지일심天地一心’의 경지는 진묵대사가 자유를 얻게 된 진정한 원동력이다. 진묵대사는 도인보다 더 도인다운 삶을 살았다. 진묵대사는 부자유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부자유한 삶의 조건에서 진정한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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