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역사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한 저항과 전쟁으로 이어져 온다. 그런 가운데 민중과 산하가 겪었을 고통과 상처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오늘날 보이는 모습은 너무나 평온하다.아직 많은 아픈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베트남 중부지방을 보고 왔다. 다낭,호이안,후에등 도시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고대유물도 있고,중세와 근세의 유적과 현대사의 상징들이 섞여 있다.
베트남은 구석기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때부터 인류가 살아 온 지역이다. 기원전 2879년을 기원으로 삼아 5000년 역사를 이야기 한다. 홍방왕조,툭판왕조,남비엣등의 나라들이 명멸하다 기원전 111년 한무제에게 점령당한다. 이후 쯩자매에 의한 독립된 나라가 3년 정도 계속되었지만 기원후 544년 까지 중국의 지배가 계속된다. 544년에 리왕조가 성립되어 602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중국의 5대 10국 시대의 남한에 의한 지배가 938년까지 계속된다.
939년부터 응오,딘,레,리,쩐,호 왕조가 1407년까지 계속된다. 1009년에 성립된 리왕조와 1225년 성립된 쩐왕조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수차례에 걸친 원,명의 침략도 물리친다.
그러다 1407년부터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으나 1428년 레왕조가 성립되고 이어 1527년 막왕조,1533년 레 왕조,1778년 떠이선왕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베트남 북부지방에서 진행된 것이고, 중부지방 산악지대에는 인도계의 참파왕국이 192년부터 자리하고 있었고 남쪽은 인도계의 푸난왕국, 크메르제국등이 지배하고 있었다.
북부의 세력은11세기부터 남진을 계속해 18세기에는 남부의 메콩델타지역까지 진출한다. 1802년에 프랑스의 도움으로 성립된 응우엔왕조때에 이르러 현재의 베트남영역으로 확대되었다.
1858년부터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0년부터는 일본군도 진출하였으며 1945년 2차대전이 끝나자 북쪽은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고, 남쪽은 프랑스의 후원하에 바오다이 황제가 사이공에 베트남왕국을 수립하였다.
1946년부터 프랑스군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17도선을 경계로 나누어져 남쪽에는 베트남왕국이 지배했으나 1955년 고딘 지엠이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64년에 통킹만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북베트남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결국 1975년 호치민의 북쪽군과 1959년 성립되어 활동한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통일된 베트남의 오늘이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크메르루즈와 중국의 침략을 물리침으로써 승리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베트남의 역사는 이렇게 힘든 변방의 역사지만 한편으로는 승리의 역사다.
중국,프랑스,미국같은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뭉치고 싸우고 지켜 온 역정이다. 베트남인들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단다. 그래서 승자의 아량으로 그들과 싸운 중국인이나 미국.프랑스.한국인들에게도 관대하단다.이해가 되는 말이다.
<미손 유적지의 사원>
다낭 교외의 미손유적지에는 이 지역의 지배세력인 참파왕국의 힌두교사원들이 산에 둘러싸인 넓은 땅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베트남전쟁으로 거의 다 파괴된 채로 남아 있고 일부는 복원 작업중이었다.
규모는 앙코르와트에 비길바는 아니지만 400여년이 앞서 건립되었다는 점과 벽돌로 정교하게 지은 후 신들의 조각을 새겨넣은 기법의 어려움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일정한 양식에 따라 아담하게 지어진 신전이 여럿 모여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하다. 권위적이지 않고 인간적이고 친근한 모습이다. 마을에서 신도들이 꽃을 들고 찾아가 우물에서 손을 씻고 기도하는 그런 장소 같다. 아마 돌보다는 흙이 많은 지형적 영향으로 벽돌을 구워 집을 짓고 또 그들의 신을 정교하게 조각했을 것이다.
왕국에 어떤 행사가 있거나 전쟁에서 승리한때등 신께 감사하거나 기원이 필요할 때 마다 건립되었다 한다. 앙코르와트의 거대한 부조 조각이 이 참파왕국과의 전쟁을 묘사한 것이니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라 하겠다.
다낭 시내에 있는 참 박물관에는 고대부터 13세기에 걸쳐 돌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들과 부서진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현재는 아주 적은 소수민족으로 살아 가는 참족의 모습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다. 역사의 이런 모습들은 때로 허무함과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호이안 시가지의 일본인 다리>
호이안은 16-17세기에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하던 곳이다. 바다에서 투본강을 따라 올라온 일본,중국,네델란드,인도등의 배들이 정박하여 각종 물품 특히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향료를 비롯해 중국의 비단등을 매매하고 배에 실어 떠나는 항구였다. 이들 외국상인들은 이 항구에 머물면서 그들이 사는 집을 짓고 길과 다리도 만들며,상점이나 회합장소,종교시설등을 갖추면서 다양한 모습을 지닌 아름다운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다 배가 커지고 강이 얕아 지면서 항구는 바닷가인 다낭으로 옮겨 가게 되고 이곳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아마 4-500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쇄락한 강가 마을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어느 폴란드건축가가 세계적인 문화재로 탈바꿈을 시켰다고 한다. 그의 흉상과 공덕비가 마을 중앙에 서 있다.
지금은 우리의 인사동같은 가게가 밀집한 구시가지가 강가에 꽤 넓게 자리하고 있고 그 외곽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으며 배를 통해 여러섬과도 연결되어 있다.구시가지는 그림,도자기,자수등 예술품, 비단,옷,기념품등을 파는 가게와 양복점,까페,음식점등이 즐비하고, 중국의 지역별 회관과 절등 오래된중국풍의 건물들과 문화공연장,박물관등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요즘 중국 곳곳에서 새롭게 만들고 있는 소위 고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이 1592년에 지었다는 지붕이 덮힌 다리가 랜드마크처럼 남아 있다.그리고 근처에 일본인 무덤도 있다. 1593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니까 그들은 그때 이미 남방의 무역항을 거점으로 해상무역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저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호이안의 밤거리>
거리에는 서양사람들이 동양인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손 잡고 거니는 노인들,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젊은이,까페의 앞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 이들은 며칠씩 여기 머물며 옷도 맞춰 입고 쇼핑도 하면서 즐겁게 보낸다고 한다. 유럽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러한 현상도 이 지역의 역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식민지였던 곳에 대한 친숙함이랄까 이런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너무 견강부회인가?
밤에는 거리에 수많은 등을 달아 놓고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역시 오래된 도시의 풍모라 할 수 있다. 멋스러움과 세련됨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좋아할 만한 도시다. 아마 오랫동안 지속된 외국과의 교류가 아직 가난한 이 나라에 이런 세련된 모습을 연출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역대왕들의 위패를 모신 건물>
후에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200여년전의 수도인 만큼 왕궁과 왕릉,사원등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왕궁인 후에성은 해자로 둘러싸인 외성의 규모가 상당하다. 그 안에 있는 정전인 태화전과 왕들의 위폐를 모신 곳등은 상당한 규모다. 태화전은 두개의 지붕을 연결한 특이한 형태다. 아마 더운 날씨를 고려하여 앞뒤로 많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건축형식인 듯 하다. 다른 건축물들은 대부분 파괴된 채로 남아 있다. 이 왕궁의 별칭이 작은 자금성이라고 한단다. 정문인 오문과 정전의 이름인 태화전의 명칭도 같다. 그러나 건물 형식과 배치는 좀 다른 것 같다. 아마 중국의 이념을 따르되 이나라의 전통과 문화에 맞는 건축을 한 것이리라. 우리의 수원성보다 조금 뒤에 지은 것이라 비교가 된다.
그리고 후에에는 13개의 왕릉이 있다는데 왕조 초기의 왕릉은 거의 중국의 형식을 따라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북경 근처에 있는 명나라의 왕릉과 흡사하다. 그러나 후대인 카이딘 왕릉은 1920-30년간에 조성된 것으로서 서양식 콘크리트 건축물에 베트남의 요소들을 혼합한 특이한 형태다. 정전에는 상감 테라코타로 기둥과 벽면조각들을 장식하고, 옥좌에 금박을 한 카이딘 황제상이 있고 그 아래에 시신이 안치된 특이한 무덤의 형식이다.
이 왕조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세워졌으나 초기의 왕들은 프랑스의 간섭을 물리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말기에는 속국이 되어 버렸다. 이런 역사들이 왕릉의 모습에도 남아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카이딘 황제 묘역>
강변에 있는 티엔무 사원은 1964년 천주교 신자인 고딘디엠의 불교탄압에 항거해 미국대사관앞에서 분신한 틱쾅둑스님이 주지로 있던 절로서 그때 타고 간 자동차와 타지않은 뇌부분등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오래된 불탑과 잎이 달리지 않는다는 나무들은 전쟁의 상처를 다독여 주고 있다. 그러나 머리를 특이하게 짜른 소년승들은 관광객들과 떠들며 장난하고 있고 부겐베리아는 붉은 꽃을 만개한 채 서 있다.
다낭을 비롯한 이 중부지방은 월남전에서의 전선이다. 다낭의 미군공군기지는 북베트남 폭격의 전초기지이고 베트콩들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후에는 모든 집을 뒤져 베트콩을 색출하는 작전이 벌어 지기도 하고, 구정 총 공세로 북베트남군이 장악하기도 한 곳이다. 산악지대에 있는 숲은 가히 밀림이라 할만하고 동굴도 많아 게릴라전을 하기에 좋은 지형인 것 같다. 1964년부터 75년에 걸치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인이 150만명,미군이 6만여명,한국군도 5천여명이 사망했다니 참으로 처참한 전쟁이다. 그때 쓰인 화학무기들의 후유증이 아직남아 있어 후손들도 희생이 되고 있으니 이 또한 가혹한 일이다.
<산악 밀림>
이제 통일된 베트남은 정치체제는 사회주의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다. 개혁개방을 실시했다 한차례 실패한 경험도 있고, 현재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매우 활기차고 희망있는 나라가 아닌가 한다.넓은 국토와 긴 해안선 그리고 국토의 6%에 이른다는 강.호수 같은 수자원,3모작까지 가능한 날씨, 1억가까이 된다는 많은 인구등 우리가 부러워할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나라다
대월사기전서 표지
약 200년에 걸친 제작기간?으로 1675년 완성된 대월사기전서
베트남의 삼국사기
옛날에 한번 '반랑왕국'을 다루면서 이 책에 관해서 한번 말한적이 있는데 이렇게 쓸줄은 몰랐네여.
뭐 사람들은 한문으로 된 책은 한,중,일에서만 편찬된줄 아는듯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사대광의 자치통감, 김부식의 삼국사기, 후지와라노의 문덕천왕실록 이런책등이 대표적인 한문 역사서죠.
그런데 '대월사기전서'나 대월사기, 대남실록, 대월사략 같은 책 들어보셨나여?
아는 사람은 아시겠지만 생소한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베트남의 역사서입니다. 대월이나 대남은 베트남을 뜻하고여.
우리에게 삼국사기랑 삼국유사가 없으면 안되듯이 베트남에도 고대사를 연구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베트남은 중국과 접해있어서 유교를 도입하고 중국식 지배체제를 가져와서 당연히 한자도 쓰고 있지요. 물론 지금은 베트남어를 쓰지만요. 베트남의 진(陳)왕조는 중국식 지배체제를 이용해 당시엔 베트남 역대로 가장 번성했던 왕조라고 볼수 있습니다.
진왕조는 역사서 편찬으로 베트남의 유구한 역사를 알리고 진왕조의 역사적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습다.
1272년 2대황제 성종은 여문휴에게 역사서를 편찬할것을 명합니다. 아마 국가가 세워진지 얼마 안되니 진왕조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한것이겠제여. 연구에 의하면 여문휴는 황명을 받고 진사 진주보가 1232년 편찬한 월지를 참고해 총 30권을 정리해 바쳤다합니다. 내용은 남월의 무제(BC207년)부터 이전왕조의 마지막황제인 이소황(1225)까지를 다루었다한다. 그리고 이름은 대월사기라 지으니.. 근데 대월사기는 지금 남아있지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모본으로 한 대월사기전서가 남아있지요.
역사서 원 플러스 원
대월사기전서는 여문휴가 쓴 대월사기를 참고하여 1479년 완성된 베트남의 정사임다. 편찬을 주관한 이는 여왕조의 국사감수찬 '오사련'으로 성종의 황명을 받아 정사 편찬작업에 착수해 1479년 15권으로 지어 성종에게 바쳤습니다.
대월사기전서는 외기 5권 본기 9권 여태조기 1권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외기는 홍방왕조(BC258)부터 오권의 남한퇴치(938)까지 있으며 본기는 오왕조의 집권부터 진왕조의 멸망까지(1413) 적혀있으며 여태조기 1권은 1413년부터 여태조가 즉위하는 1428년까지 적혀있습니다.
대월사기전서 편찬 백년후 누군가에 의해 여태조로부터 여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공황제(~1527)까지의 100년간 기록이 대월사기전서에 삽입되었죠. 아마 17세기 전반정도에 누가 썼다고 하는데 그 누가 누군지 아직 모릅니다. 그리고 1665년 진씨와 완씨의 남북전쟁기를 추가시키고 당시 북부(진씨)의 실권을 잡고있었던 정작에 의해 1662년 후여왕조의 신종까지의 실록이 또 추가됐으며
그리고 마침내 후여왕조의 10대황제 희종(1676~1705)이 9대황제인 가종(~1675)까지의 역사를 또 추가해 완전한 대월사기전서를 만들어냈다.
대월사기전서 본기 서문
대월사기전서가 참고했던 책들
대월사기 : 1272년 진 성종의 황명으로 여문휴가 편찬한 대월사기전서의 모태
월지 : 진주보가 1232년 편찬한 역사서이자 대월사기의 모태
월사략 : 대월사기보다 한세기 후에 만들어졌으며 오랫동안 존재가 알려지지 않다가 중국 청나라 건륭제때 편찬된 '사고전서'에 그 이름이 수록되고 나서 알려졌다. 베트남의 시초부터 이왕조 말까지 다루고 있다. 원래 이름은 대월사략이었으나 명나라에 의해 大가 사라진듯하다.
진조실록 : 13세기 중엽 역대 진왕조의 실록을 편찬한책 이역시 대월사기전서 진왕조 부분의 모태
대월사기속편 : 진왕조 건국으로 부터 명의 베트남 지배가 끝나는 1427년까지 다룬책
대월통감 : 여왕조 8대황제인 양익제때인 1511년 편찬되었으며 19세기 사라졌다.
본기실록 : 여왕조 태조부터 마지막황제 공제(1527)까지 적은 책으로 여왕조실록으로 추정된다. 언제 편찬했고 누가편찬했는지 아직 모른다.
[출처] 소외받는 역사를 찾아서 76 - 베트남의 삼국사기|작성자 구리엔탈
"베트남엔 한국이 학살 가해국.. 잘못 인정해야"
신은별 입력 2017.09.29. 20:02
한베평화재단 설립 1주년 맞아
“내년이면 꽝남성(베트남 중부) 학살 50주기에요. 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 상처는 여전한데 가해국인 우리 국민 인식은 너무 부족합니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지난 19일 한베평화재단 설립 1주년을 맞아 재단 이사진(구수정 상임이사, 장혜옥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지도자문위원, 정지영 영화감독, 정상호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이사)을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만났다. 이들은 “이제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재단은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 민간인학살 문제를 해결코자 세워졌다.
재단에 따르면 1964년 첫 파병 이후 8년6개월간 32만명에 달하는 한국군이 파병됐는데, 이들에게 희생된 베트남 민간인 수는 자그마치 9,000여명이다. “마을마다 학살 50주기 합동제사가 치러지고 있다”는 게 이들 말. 제사 이름도 ‘대한’을 뜻하는 ‘따이한 제사’. “이름이 참 부끄럽고 슬프죠?”(구 상임이사)
이들은 “우린 그동안 진실을 바로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 ‘하얀전쟁’(1992)을 감독한 정지영 이사는 “촬영 당시 느꼈던 감정 때문에 재단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에 우리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장면이 담겼는데 참전군인들이 ‘우리를 모욕했다’고 항의를 하더라”며 “파병을 ‘애국’이라 하고 참전군인을 영웅화하는 데 바빴던 정부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꼬집었다. 장혜옥 이사 역시 “정부는 ‘입장 없음‘이 유일한 입장이었다”며 “이제라도 잘못을 바로잡아야 피해국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참전군인 명예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진상규명에 나서도록 하려면 시민사회 요구가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단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베트남평화의료연대와 함께 내년 ‘시민평화법정’을 개최한다. 베트남서 건너온 학살 피해자들을 원고로 대한민국 정부(피고)를 상대로 한 국가배상소송 모의변론이 이뤄질 예정이다. 여기서 나온 피해자들 증언은 추후 한국 법원에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하는 데 사용된다.
“2000년 일본 동경에서 일본군 위안부 책임을 묻는 시민법정(여성국제전범법정)이 열린 후 한국에서도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등장했어요. 이번 법정 역시 피해자 배상뿐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국민이 실체적 역사를 보게 한다는 데 의미가 크죠.”(정상호 이사)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언급했다. 구 상임이사는 “베트남전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건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며 “우리 역시 아직 위안부 문제를 해결치 못한 피해국 국민”이라고 했다. 피해국의 마음으로 베트남을 바라보고, 가해국 일본을 보듯 우리를 돌아보자는 얘기였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mailto: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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