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집(三峯集)
장달수 발췌 편집
삼봉 정도전 선생은 일세의 풍운아요 큰 학자이며 위대한 정치가이다.
선생의 문집을 두고두고 읽고 또한 나의 다정한 벗들에게도 보내려고 문집을 재편집하여 보았다.
국역문은 1977년 민죽문화추진회에서 여러 사람이 분야별로 번역한 것을 인용하였고,
원문은 삼봉집에서 발췌하여 단락별로 부기하여 번역문을 보면서 바로 원문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목차의 쪽수는 큰 부문만 표기하였다 .
선생의 생애에 대한 설명은 아래 한영우 교수의 해제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생략한다.
癸巳年 7월 醉松軒에서 鶴泉 쓰다
삼봉집(三峯集) 해제(解題)
한영우(韓永愚)
Ⅰ. 정도전(鄭道傳)의 생애
1. 정도전의 가계(家系)
단양팔경(丹陽八景)의 하나에 삼봉(三峰)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이 젊었을 때 이곳을 지나다가 어떤 상(相) 보는 사람을 만났다. 상 보는 사람은 그에게 10년 후에 혼인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정운경은 그 말대로 10년 뒤에 삼봉에 다시 돌아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서 아이를 얻게 되었다. 그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이므로 호(號)를 삼봉(三峰)이라고 지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딸로서, 우연은 우현보(禹玄寶)의 족인(族人)인 김전(金戩)이라는 중이 여비(女婢)와 통하여 낳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운경의 장모는 여비의 딸인 셈이요, 여비의 딸이 바로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출생 배경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단양 지방의 거족(巨族)이던 우현보의 집안에서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고, 이 때문에 정도전은 뒤에 대간(臺諫)의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여 출세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다. 정도전이 고려의 구가 세신(舊家世臣)들과 정치적 갈등을 가졌을 때, 구신들로부터 가계(家系)가 바르지 못하고 불분명하며 미천하다는 험구를 여러 차례 듣고, 또 특히 우현보 일족과는 가장 심각한 구원(仇怨) 관계를 갖게 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도전의 부계(父系)를 보더라도 그의 가문이 현족(顯族)이 되지 못함은 사실이다. 봉화 정씨(奉化鄭氏) 세보에 의하더라도 정도전의 가계는 고조(高祖) 정공미(鄭公美)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안동군 봉화현의 향리(鄕吏) 호장(戶長)임. 이었다. 그 다음 증조 정영찬(鄭英粲)은 비서랑 동정(秘書郞同正)을 지냈고, 조부 정균(鄭均)은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벼슬은 모두가 실직이 아닌 산직(散職)에 불과하다. 실직에 오른 것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이다. 정운경은 충숙왕 때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에 형부 상서(刑部尙書)에까지 오르고, 수령 재임시에는 선정을 베풀어서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양리전(良吏傳)에 등재되었다.
정운경은 이렇듯 봉화 정씨로서는 처음으로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지만 처신이 청렴결백하여 가산(家産)은 보잘것이 없었다. 정도전과 그의 두 남동생 및 누이동생은 정운경으로부터 약간의 노비를 상속받았다고 하므로 아무리 가난했다 하더라도 중소지주적(中小地主的) 경제 기반은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도전의 집안은 신분적으로는 향리에서 출발하여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전형적인 신흥 사대부라 할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중간계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2. 정도전의 출세와 시련
청소년기의 정도전에게 학문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이색(李穡)이었다. 정운경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과 학우(學友)관계를 가져, 자연 정도전은 이색과 친밀하게 되었다. 이색의 문하에는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ㆍ이존오(李存吾)ㆍ김구용(金九容)ㆍ김제안(金齊顔)ㆍ박의중(朴宜中)ㆍ윤소종(尹紹宗) 등과 같은 인사가 모여들어 그들과도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급제한 그는 충주 사록(忠州司錄)ㆍ전교주부(典校注簿)ㆍ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등 하급 관직을 역임하다가 공민왕 15년(1366)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자 고향 영주(榮州)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공민왕 19년에 성균관이 중영(重營)되자 성균 박사에 임명되어 이색ㆍ정몽주ㆍ이숭인ㆍ이존오ㆍ김구용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 등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론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이해를 깊이하였다. 이때는 바로 대륙에서 원(元)ㆍ명(明)이 교체되는 시기로서 공민왕은 안으로 유교를 부흥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재정비하고, 밖으로는 반원친명(反元親明) 정책을 표방하면서 몽고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꾀하고 있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아직 뚜렷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하였으나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미래의 경륜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1374년에 우왕(禑王)이 즉위하고 이인임(李仁任) 일파가 집권하면서 정세는 크게 바뀌고 신진 유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안겨졌다. 이인임 일파의 친원 반명정책에 반대하던 정도전은 마침내 개경에서 쫓겨나 고달픈 유적(流謫)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나주(羅州) 부근의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고향에 4년간 복거하다가 다시 삼각산(三角山)ㆍ부평ㆍ김포 등지를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다. 우왕 9년에 함주(咸州)로 찾아가 이성계와 만날 때까지 10년간에 걸친 유배ㆍ유랑생활이 정도전에게 있어서는 가장 고달프면서도 가장 의미 있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회진현에서 소재동(消災洞)의 부곡민(部曲民)과 생활하면서 그는 농촌 현실을 몸소 체험하고 그 체험을 많은 시문(詩文)으로 남겨 놓았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로 이름붙인 글들이 그것이다. 심문ㆍ천답(心問天答)ㆍ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와 같은 성리학 관계 저서, 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ㆍ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 등과 같은 병서(兵書)가 저술된 것도 그의 10년간에 걸친 유배 시기였다.
개국 후에 저술된 일련의 저서들도 그 기본구상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3. 정도전과 조선 왕조의 건국
10년간에 걸친 유배ㆍ독서생활을 청산하고 우왕 9년, 함주(咸州)의 이성계를 찾아간 이후의 정도전의 생애는 그대로 조선 왕조의 건국사(建國史)로 이어진다. 당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이성계의 막하에 들어간 것은 무엇보다도 역성 혁명(易姓革命)에 필요한 군사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던 듯하다. 실로 조선 왕조 개창에 있어서 군사적인 기여가 가장 컸던 것은 이성계이며, 사상적인 기여가 가장 컸던 것은 정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성계 휘하에는 정도전 이외에 많은 문사(文士)들이 결집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성계 일파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것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와의 관계를 한(漢)나라의 장양(張良)과 고조(高祖)와의 그것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가 장양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양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고 취중에 왕왕 토설하였다고 한다.
함주의 막부로 발길을 옮길 때부터 그는 이미 장양의 원대한 경륜과 야심을 가슴속에 품었는지도 모른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의하면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가 군기가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정연한 것을 보고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혁명의 결의는 이미 이때부터 실천에 옮겨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와 만난 다음해에 그는 서장관으로 정몽주와 더불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성균관 좨주(祭酒)와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거쳐 우왕 14년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승진에는 이성계의 도움이 컸다.
우왕 14년(1388) 6월에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밀직 부사(密直副使)로서 전제 개혁운동을 주도하고 이를 단행하였다. 그는 전제 개혁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계민수전(計民授田)의 원칙에 의한 전제 개혁을 주도한 것은 그였으며, 조준(趙浚)ㆍ윤소종(尹紹宗) 등이 그의 의견을 따라 전제 개혁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전제 개혁을 실천하는 제조관(提調官)의 자리에 있었던 것도 정도전이었다. 전제 개혁 후에 분전불균(分田不均)에 대한 원망이 그에게 집중된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1389년 11월에는 이성계ㆍ조준과 협의하여 우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왕족 가운데서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으며, 그 공으로 공신에 피봉되고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승진하였다.
공양왕 2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명나라에 성절사로 가서 윤이(尹彛)ㆍ이초(李初) 등이 이성계를 무고한 사실을 변명하였다. 즉 그들은 이성계가 종실이 아닌 요(瑤)를 공양왕으로 맞이하였고, 또 명나라를 침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명나라 황제에게 무고하였던 까닭에 명나라는 이성계를 크게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양왕 3년(1391)에 그는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에 올랐다. 5군(五軍) 제도를 파하고 3군을 설치한 것은 이성계 일파가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처로서 이성계가 도총제사, 조준이 좌군총제사를 각각 차지하였다. 군사 제도의 개혁도 기본적으로는 그의 계획에 의한 것으로, 조선 왕조 개창 후에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편하고 그 책임의 자리에 앉아 계속 병권을 장악하였다.
전제 개혁에 의하여 경제권을 장악하고, 군제 개혁에 의하여 군사권을 장악한 다음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는 반대파인 이색(李穡)ㆍ우현보(禹玄寶) 등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봉화(奉化)로 유배되었으며, 다음해 공양왕 4년(1392) 4월에 다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鄭夢周)ㆍ김진양(金震陽) 등의 탄핵을 받아 예천(醴泉)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고, 조준ㆍ남은 등도 유배되어 이성계 일파는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위급해진 이성계 일파는 역성혁명의 반대파 영수인 정몽주를 격살하고, 이어서 같은 해 7월에 정도전ㆍ조준ㆍ남은 등은 50여 명의 신하들과 함께 이성계를 신왕(新王)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기에 이르렀다.
4. 개국 이후의 업적(業績)
① 문물제도의 창제
신왕조를 개창함에 있어서 가장 공이 큰 사람이 정도전이었던 만큼, 개국 후에 있어서도 모든 실권은 그에게 돌아갔다. 그는 개국 1등 공신에 피봉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賛成事)ㆍ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ㆍ판호조사(判戶曹事)ㆍ판상서사사(判尙書司事)ㆍ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ㆍ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ㆍ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 모든 요직을 겸직 또는 역임하여 실제로 그의 권한은 왕을 능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국 후부터 태조 7년에 비명으로 죽을 때까지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새 왕조가 만세 동안 규범으로 삼아야 할 통치 조직을 확립하기 위하여 태조 3년에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태조 4년에 《감사요약(監司要約)》과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태조 6년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각각 저술하였다. 이 중에서 《조선경국전》은 태조에게 바치고, 《감사요약》은 전라도 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다. 이들 저서들은 조선 왕조의 통치 조직의 초석이 되었으며, 뒤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성립되는 기초가 되었다.
둘째, 새 왕조의 수도(首都)를 이정(移定)하는 사업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수도 이정과 관련하여 계룡산의 신도안을 도습지로 하자는 주장과 인왕산(仁王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자는 주장 등이 엇갈렸으나, 마침내 정도전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그는 새 도습이 결정된 후 왕명에 의하여 궁전과 궁문, 그리고 도성문의 이름을 짓고, 도성 내외의 49방(坊)의 이름도 지었으며, 아울러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지어 바쳤다. 또한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기리기 위하여 문덕곡(文德曲)ㆍ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籙) 등의 악사를 지어 바쳤으며, 태조가 사랑하는 끝의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世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고 그를 보양하는 책임을 맡았다.
셋째로, 그의 치적 중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군사제도의 개혁과 병법(兵法)의 개혁, 그리고 요동 수복을 위한 전쟁 준비였다. 그는 의흥삼군부의 책임자로서 중외의 병전을 장악하고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고려 말에 거의 사병화(私兵化)된 군대를 단계적으로 혁파하여 공병(公兵)으로 귀속시켰다. 그와 아울러 중국 역대의 병법을 현실에 맞게 가감하여 진법(陣法)ㆍ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ㆍ강무도(講武圖)ㆍ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ㆍ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 등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진법에 따라 군사들을 훈련하였다.
② 요동 정벌 계획과 무인(戊寅)의 난(亂)
이러한 일련의 군사 정책은 개국 직후부터 추진된 것으로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국방 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요동 수복을 위한 전쟁 준비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정도전의 요동 수복 운동은 남은(南誾)ㆍ심효생(沈孝生)ㆍ손흥종(孫興宗) 등과 긴밀히 연결되고, 태조의 승인까지 얻어서 은밀하게 추진되었으나, 명나라는 이것을 일찍부터 눈치채고 그 주동자인 정도전의 제거에 혈안이 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이 요동에 사람을 파견하여 변장(邊將)을 유인하고 여진을 설유(說誘)한 사실을 트집잡고, 태조 4년에는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表箋文)이 무례하다는 것을 이유로 정도전을 그 기초자로 지목하여 그의 압송을 요구하여 왔다. 문제가 된 표전문은 정도전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정도전을 ‘조선의 화근(禍根)’이라고까지 극언하면서 그를 제거하는 구실로 삼으려 하였다. 그의 요동 수복 정책이 명나라의 미움을 산 까닭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도전의 태도는 더한층 경직되고 요동 수복 운동은 더욱 적극화되면서 군사 훈련에 박차가 가해졌다. 요동 공벌 계획은 이미 공민왕 때부터 시도된 것으로, 정도전의 그것도 기본적으로는 고려 말기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라 볼 것이다. 이로써 이성계의 이른바 위화도 회군도 단순히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에서 취해진 것이 아니라, 전략적 후퇴였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흔히 이성계와 정도전은 사대주의사상의 표본처럼 이해되기도 하나, 사실은 명나라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인물이 그들이었다. 이성계가 즉위 후에도 끝끝내 명나라의 인신(印信)을 받지 못한 것은 이성계 정권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반영하는 것이며, 그 가장 주요한 원인은 조선측의 요동 공벌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표전문 사건 이후로 격화된 두 나라의 긴장 관계는 마침내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도전 일파의 권력 강화와 대명 관계의 긴장에 불만을 품은 국내의 정치 세력은 서로 힘을 합하여 정도전 일파의 제거에 나서게 되었다.
정도전과 가장 심각한 대립 관계에 있었던 것은 태조의 다섯째 왕자인 방원(芳遠)이었다. 그는 태조의 왕자 가운데서 가장 야심과 경륜이 있었고, 또 정몽주를 격살하고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하는 데에도 일정한 공로가 있었다. 그가 개국공신으로 뒤늦게나마 추봉(追封)된 것도 이러한 공로가 인정된 까닭이었다. 따라서 능력과 공로를 가지고 따진다면, 이성계의 왕위를 이을 사람은 방원이 가장 적격자인 셈이었다. 그러나 방원을 가장 경계한 것은 정도전이었다. 이성계가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물론 이성계 자신의 의사가 많이 작용했을 것이나, 정도전의 방조 내지는 권유도 적지 않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의 입장에서 본다면 야심많은 왕자가 집권할수록 자신의 정치적 지위나 신권(臣權) 우위의 관료정치 운영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전이 병제(兵制)를 개혁하면서 왕자들이 가진 병권을 박탈하려 한 것도 이러한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방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세자의 지위를 아우에게 빼앗기고, 병제 개혁 과정에서 병권마저 박탈당하게 되니 자신의 정치적 위치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고 말았다.
정도전과 정치적 갈등 관계를 가진 또 하나의 세력은 개국공신들 사이에도 있었다. 특히 조준(趙浚)이 그러하였다. 조준은 정도전만큼은 개국에 공로가 크지는 않았으나 그와 거의 쌍벽을 이루는 이성계의 고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국 후에는 점차로 정도전에게 밀려 정치적 지위가 하락되어 갔다. 더욱이 정도전의 공요(攻遼) 정책은 그에게는 매우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개국공신 김사형(金士衡)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여 개국공신은 마침내 공요파(攻遼派)와 공요반대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공요반대파는 차차 방원과 연결을 가지면서 공요 운동을 저지하였다.
그 다음, 정도전과 대립된 세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역성혁명에 소극적이었거나 반대적인 입장에 있었던 고려 구신(舊臣)세력이었다. 변계량(卞季良)ㆍ하윤(河崙)ㆍ권근(權近)과 같은 이는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성리학자로서도 저명한 인물들로서 신왕조에 일단 귀복하기는 하였으나 정도전 일파의 급진적 개혁 정치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보다 온건한 개혁을 지지하였다. 특히 권근은 정도전의 각종 저서에 대한 주석(註釋)을 붙여서 정도전과는 매우 친밀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적 입장까지도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역성혁명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어쨌든 이들 온건한 구신들은 정도전 일파의 급진적인 정책에 불만을 품으면서 점차로 방원 세력에 가담하였다.
태조 7년 9월에 일어난 이른바 무인난(戊寅亂) 또는 공소(恭昭)의 난은 바로 이러한 정세하에서 폭발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도전 일파는 일거에 제거되고, 태조 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정도전은 새 왕조의 건설에 분골쇄신한 보람도 없이 왕자와 종친을 모해하였다는 역적의 누명을 쓰고 방원의 칼 밑에 쓰러졌다. 그는 공이 너무 컸던 까닭에 정적(政敵)이 많았고 야심이 너무 컸던 까닭에 선종(善終)하지 못하였다.
③ 불교에 대한 비판
정도전의 업적으로서 마지막으로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일련의 저술이다. 이미 고려 말에 회진(會津)에 유배되었을 때 심문ㆍ천답(心問天答)을 지은 바 있거니와, 개국 후에는 심기리(心氣理) 3편과 불씨잡변(佛氏雜辨),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등을 저술하여 자신의 성리철학을 완성하였다. 이들 일련의 저서는 성리학을 학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의 사회적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치가적 안목에서 지은 것이다. 정도전은 여말의 유학자 중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개혁주의자인 까닭에 불교의 사회 경제적 폐단에 대한 개혁 의지도 가장 철저하였다.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면, 그 철학적 기반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다시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제시해야만 하였으니, 성리학이 바로 그러한 대용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성리학을 총체적으로 수용한 자는 아니었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理解)의 심도나 실천의 강도에서 본다면 정몽주ㆍ권근ㆍ길재ㆍ이숭인 등과 같은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부류가 더 철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정도전에게 있어서 성리학이 갖는 의미는 그가 포용하고 있던 여러 사상 조류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며, 성리학의 철학적ㆍ윤리적 측면을 수용하여 불교와 도교의 사회적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실제로 그가 새 왕조의 통치이념과 새로운 문물제도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수용한 사상 조류와 문물제도는 매우 다양하고 폭넓은 것이었다. 밖으로는 중국 삼대(三代) 이후의 역대 왕조의 문물을 가감ㆍ손익하고, 안으로는 우리 나라 고려 시대의 문물을 참작하여 새로운 구조 속에 재구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상 체계를 성리학의 도식적 수용 체계로서 이해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가 뒷날 성리학의 도맥(道脈)에서 제외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Ⅱ. 정도전의 저술
그의 저술은 크게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시문(詩文), 둘째는 경국제세(經國濟世)에 관한 것, 셋째는 성리철학과 불교 비판에 관한 것, 넷째는 병제 및 병법에 관한 것, 그리고 끝으로 악사(樂詞)이다.
1. 시문
그가 지은 시문은 각종 형식의 시(詩)를 비롯하여 부(賦)ㆍ사(詞)ㆍ소(疏)ㆍ전(箋)ㆍ서(序)ㆍ기(記)ㆍ서(書) 등 다양하다. 이들 시문들은 대부분 새 왕조 창업 이전의 불우했던 시절에 씌어진 것으로 그의 문학적 재질이 비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시문은 중국에서도 널리 칭송되었고, 신숙주(申叔舟)는 그의 시문을 평하여,
詩文 固緖餘耳 然其詩之高澹雄偉 文之通暢辯博 亦可因以窺其學問胷次之萬一矣 況先儒如牧隱ㆍ圃隱ㆍ陽村諸公 皆所推服乎
《三峰集後序》
라 하여 시는 고담웅위하고 문은 통창변박하다고 평하였으며, 이색ㆍ정몽주ㆍ권근 같은 대문장가들로부터도 널리 칭송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시문은 역성혁명을 수행한 풍운아답게 호방하면서도 날카로운 사회의식이 번득이고 있어서 그의 사회의식을 관찰하는 데도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특히 회진 유배시에 쓴 금남잡제와 금남잡영, 그리고 유랑 독서 생활을 하던 시기에 쓴 글들은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짙게 풍기고 있다.
2. 경국제세에 관한 저술
경국제세에 관한 저술로서는 《조선경국전》ㆍ《경제문감》ㆍ《경제문감별집》ㆍ《감사요약》ㆍ《고려사》 등이 이에 속한다. 말하자면 이들 저서들은 새 왕조의 문물제도와 통치 규범을 정리하고 체계화한 것들이다. 그 내용을 개별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1394, 태조3)
태조 3년에 찬진(撰進)되었으며, 상하 2권으로 나누어 6전(六典)에 따라 조선 왕조의 모든 관제의 대강을 서술한 것이다. 원래 6전 체제는 《주례(周禮)》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경국전》도 《주례》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이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고 현실에 맞게 조정하였다. 그래서 치전(治典)ㆍ예전(禮典)ㆍ정전(政典)은 《주례》의 명칭을 그대로 따왔으나, 교전(敎典)은 부전(賦典)으로, 형전(刑典)은 헌전(憲典)으로, 사전(事典)은 공전(工典)으로 각각 바꾸었다.
6전 앞에는 치국(治國)의 대요로서 정보위(正寶位)ㆍ국호(國號)ㆍ정국본(定國本)ㆍ세계(世系)ㆍ교서(敎書)를 기술하여 천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인(仁)으로써 왕위를 지켜나가야 할 것,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것이 기자 조선의 계승이라는 점, 왕위 세습은 장자(長者)나 현자(賢者)로서 해야 한다는 것, 교서는 문신의 힘을 빌어 높은 수준으로 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각각 제시하고 있다.
치전(治典)에서는 군신(君臣)의 직능과 관리 선발 방법을 항목별로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특히 재상(宰相)이 정치ㆍ경제ㆍ군사 등 모든 통치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관리 선발이 고시(考試)제도에 의거하여 능력 본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전(賦典)에서는 국가의 수입과 지출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과,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군현 제도ㆍ호적 제도가 정비되어야 하고 농상(農桑)이 장려되어야 한다는 것, 국가 수입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토지소유를 균등하게 하고 병작반수(並作半收)를 금해야 한다는 것과, 부세(賦稅)를 가볍게 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국가의 지출 항목으로서는 상공(上供 왕실경비) 국용(國用 공공행사비)ㆍ군자(軍資)ㆍ녹봉ㆍ의창(義倉)ㆍ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을 들고, 되도록 지출을 절약하여 예비 경비를 많이 비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부전(賦典)의 기본원칙은 민생을 균등하게 안정시키면서 국가 수입을 증대시켜 국리(國利)ㆍ민복(民福)의 조화를 꾀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전(禮典)에서는 조회ㆍ제사ㆍ교육ㆍ외교ㆍ기타 관혼 상제 등에 관련된 의례의 원칙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禮)는 질서로서 정의되고, 그 질서는 상하 차등을 전제로 하되 상하가 서로 화합하는 조화 관계를 중시한다. 특히 교육과 관련하여 서민 이상 신분의 교육 참여의 기회를 넓히고 고시 제도의 강화로서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제도를 확립할 것이 강조된다. 그리고 언로(言路)를 개방하여 상하의 통정(通情)이 원만해질 것과, 사대(事大) 외교의 중요성이 지적된다. 관혼 상제의 의례는 종전의 토속적이며 불교적인 의례를 버리고 유교적인 의례로서 대치할 것을 제시하면서 특히 물질적인 낭비의 폐단을 경계하고 있다.
정전(政典)은 병전(兵典)에 해당한다. 병전을 정전이라 한 것은 병제가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바르게 하는 정인(正人)의 도덕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입장에서이다. 다시 말하자면 병제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병농일치(兵農一致)라든가,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적 체제라든가 무기와 훈련의 개량ㆍ개선이라든가, 차경차전(且耕且戰)의 둔전(屯田) 제도의 중요성 등이 제시되면서, 동시에 병제를 운영하는 이념적인 기초로서 백성과 군사를 아끼고 나라를 바르게 인도한다는 대원칙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전(憲典)은 형전(刑典)과 일치한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인(仁)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 정치 즉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중요한 것이지만, 도덕만으로는 불가능한 때가 있으므로 도덕 정치를 보조하는 수단으로서 형벌의 필요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형벌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보조 수단이지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형벌과 법은 어디까지나 예방수단으로서 이용되는 것이 이상적이라 한다.
끝으로 공전(工典)에서는 국가의 각종 물품 제조나 토목공사를 운영ㆍ집행하는 원칙으로서 사치를 금할 것과 재정 낭비를 경계할 것. 그리고 백성의 노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피곤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② 《경제문감(經濟文鑑)》 (1395, 태조4)
이 책은 《조선경국전》의 보유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경국전》이 통치이념과 통치 조직의 종합적인 체계를 제시한 것이라면 《경제문감》은 그중에서 특히 치전(治典)의 내용을 보완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권근(權近)이 주해(註解)를 붙이고 정총(鄭摠)이 서문을 썼다.
상권에서는 먼저 중국과 우리 나라 역대 왕조의 재상 제도의 변천 과정과 그 득실(得失)을 서술하고, 이어서 재상의 직책과 진퇴의 자세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정도전에 의하면 재상 제도가 이상적으로 실시된 시대는 당우ㆍ삼대(唐虞三代)로서 이 시대에는 현명한 재상이 막강한 실권을 가지고 제왕(帝王)을 보필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구현하였다고 본다. 군주가 현명하고 재상까지 현명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재상이 현명하면 정치는 잘 운영된다고 한다.
한당(漢唐)시대에는 왕조 초기에 재상권이 강화되었다가 왕조 후기에 약화되어 군주의 전제권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가 재상권의 강화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그 자신이 실권을 가지려는 의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나. 유가(儒家) 특히 성리학자들의 정치사상의 이상이 일반적으로 재상중심 체제에 있었다는 사실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상중심 체제는 군주의 입장에서는 마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군주와 유신이 갈등을 일으키는 사례는 역사상 비일비재하다. 조선 초기의 정치사를 보더라도 군주 중심이냐 재상 중심이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치적 분란이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경국대전》에는 다소 애매한 상태로나마 재상 중심 체제로 규범화되었다.
《경제문감》 하권에서는 대간(臺諫)과 위병(衛兵)ㆍ감사(監司)ㆍ수령(守令)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있다. 대간은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을 합칭하는 것이다. 먼저 대관 제도가 중국 역대 왕조와 고려 시대에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를 검토하고, 대관은 정치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관료로서 그 지위와 직책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관은 군주의 이목(耳目)으로서 관료의 부정과 실정을 감독ㆍ탄핵하는 직책을 갖는 것이지만, 동시에 군주와 재상의 실정(失政)까지도 탄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 간관(諫官)은 군주와 백관의 실정을 말이나 글로써 비판하는 직책을 가진 관리로서 그 직책의 중요성이 역설된다. 그에 의하면, 삼대(三代)에는 본래 간관이 따로 없었고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사(士)ㆍ서(庶)ㆍ상고(商賈)ㆍ백공(百工)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이 모두 간쟁을 할 수 있었으나, 후세에 이르러 간관이 생겨나면서 언로(言路)가 좁아졌다고 한다. 따라서 당면의 과제는 언로를 넓히고 언권을 강화하는 일이 중요한데, 간관을 없앨 수는 없으므로 간관의 자질을 높이고 간관의 언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간관은 천자(天子)와 더불어 시비를 다투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헌체(獻替)의 임무를 유감없이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간의 임무가 중요하다고 해서 그 권한이 재상을 능가해서는 안 되고, 정권이 대간에 있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경고한다.
그 다음 위병(衛兵)에서도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대의 위병제를 개관하고, 그 장단점을 취사선택하여 조선 왕조의 위병제가 성립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그가 지향하는 부위(府衛)의 병제는 우선 병권을 재상이 통할해야 한다는 것과, 궁성수비군과 경성수비군을 구별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말하는 위병은 지방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군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군사제도 전반에 대하여 논한 것은 아니다.
끝으로 감사(監司)와 수령(守令) 제도는 한당시대를 모범으로 하는데, 이것은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성리학자들은 한당의 중앙집권보다는 삼대의 향촌 자치제를 이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도전은 지방 제도에 관한한 성리학자들의 이상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 매우 주목된다. 그는 어디까지나 중앙정부가 전국민을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보았고, 따라서 수령의 임무와 자질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수령은 백성의 부모로서 백성과 국가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봉사해야 하는데 수령이 맡아야 할 임무로서 토지 개간, 호구의 증식, 학교 진흥, 예속의 형성, 옥송(獄訟)의 공평, 도적의 근절, 차역(差役)의 균등, 부렴(賦斂)의 절약을 들었다. 여기서 수령의 임무는 특히 물질적인 생산과 교육에 역점이 두어지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것은 그의 부국강병(富國强兵) 이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물질적인 생산을 중요시하는 법가(法家)의 체취를 다분히 풍기고 있다.
감사는 수령의 비행을 감독ㆍ규찰하고 수령의 치적을 평가하여 그 출척(黜陟)을 결정하는 임무를 가지므로 그 품질(品秩)을 높이어야 하며, 또한 감사와 수령에 대한 통할권을 재상이 가짐으로써 재상중심의 중앙집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③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1397, 태조6)
상ㆍ하 2권으로 되어 있고, 앞서 저술한 《경제문감》의 보유편에 해당한다. 역시 권근이 서문을 썼다. 《경제문감》에서는 신하의 직책에 대해서만 논했으므로 군주의 직책에 대해서 따로이 논술한 것이 별집이라 하겠다.
여기서는 먼저 당ㆍ우 삼대로부터 송ㆍ원에 이르는 중국 역대 제왕의 치적을 적고, 다음에 고려 태조에서부터 공양왕에 이르는 고려 역대 왕들의 치적을 사찬(史賛) 형식으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정치서이지만, 거의 사서(史書)에 가까운 것이다.
정도전은 본래 군주가 전제권(專制權)을 갖는 것을 배격하였으므로, 군주의 직책은 결국 신하의 의견을 존중하고, 유능한 신하를 등용하는 것으로써 족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군주의 모범으로써 당ㆍ우 삼대의 제왕을 극찬하고 있다. 반대로 한ㆍ당 이후의 군주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정도전의 중국사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주자 또는 도학자들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 다음 고려 역대 왕들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이제현(李齊賢)과 사신(史臣)들의 사찬(史賛)을 채용한 것으로 그의 독창적인 견해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지은 《고려사(高麗史)》가 남아 있지 않은 현재로서는 그의 고려사관(高麗史觀)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그의 고려사관은 대체로 고려 전기(前期)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고려 후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가 있는데, 이러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동국통감》으로 이어지면서 조선 초 고려사관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경제문감별집》은 본론을 군도(君道)라는 명칭으로 서술하여 군주의 치적을 역사적으로 개관하고, 그 말미에 의론(議論)을 붙여서 군도(君道)를 역철학(易哲學)의 입장에서 부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론은 그 일부만이 전하여 전모를 알 수가 없다. 군도와 의론의 내용은 요컨대 군주의 전제(專制)를 경계하고 신민(臣民)의 의견을 존중하며, 현자(賢者)를 등용하여 정치를 맡겨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볼 것이다.
④ 《감사요약》ㆍ《고려사》
감사요약은 지금 전하지 아니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권근의 《양촌집(陽村集)》에 의하면, 태조 4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간 이무(李茂)에게 지어준 것으로 중국과 우리 나라 역대의 감사의 연혁과 득실을 개관하고 선유(先儒)의 논설을 첨가하였으며,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경제문감》 감사편의 그것과 대동소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권근이 지은 발문(跋文)만이 전한다.
《고려사》 37권은 태조 4년에 정총(鄭摠)과 함께 찬수하여 태조에게 바친 것으로, 고려 말에 이인복(李仁復)ㆍ이색(李穡)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을 참작하고, 이제현 기타 사신들의 사찬을 수록하여 편년체로 엮은 사서이다. 이 책은 지금 전하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총이 지은 서문(序文)이 《동문선(東文選)》에 남아 있고, 태종ㆍ세종 때에 이에 대한 개찬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그 내용의 일부가 알려지게 되었으며, 위에 소개한 《경제문감별집》의 고려 역대 왕의 치적에 대한 사찬(史賛)을 통해서 그 내용의 대강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이 책은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고려사관에 입각해서 씌어진 것으로 《고려사》를 이해하는 기준은 《조선경국전》이나 《경제문감》에 반영된 통치이념 바로 그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태종ㆍ세종 때에 이 책의 결함이 일부 지적되면서 《고려사》 개찬 작업이 나타나는 것은, 정도전의 적대 세력이 집권하는 정치적 변동과 관련이 있으며, 그들의 비판은 주로 여말 정치사에 대한 서술 부분과 시호(諡號) 및 관호(官號)에 대한 개칭(改稱)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인 문제를 제외하고서는 그의 고려사관이 기본적으로 조선 초의 고려사관의 초석이 되었음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3. 성리학과 불교비판에 관한 저서
정도전의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저술로서는 심문ㆍ천답(心問天答) 2편, 심기리 3편, 불씨잡변(佛氏雜辨) 20편, 그리고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를 들 수 있다.
① 심문ㆍ천답
우왕 원년에 지은 성리학 관계 저서로 불교의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의 오류를 간단한 운문체의 시로써 비판한 것이다. 먼저 심문편은 마음[心]이 상제(上帝)에게 복선화악(福善禍惡)의 법칙이 제대로 준행되지 않는 까닭을 질문한 것이며, 천답은 상제의 이에 대한 답변으로 하늘과 인간은 기(氣)가 상응하여 인간이 죄악을 저지를 때에는 하늘의 기를 손상하여 하늘이 상도(常道)를 잃게 되며 복선화악의 법칙도 어그러지는 수가 있지만, 천리(天理)가 다시 안정되면 다시금 하늘이 상도를 되찾아서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글은 인간 사회를 주재하는 천리(天理)의 우위성을 인정하여 불교철학을 비판한 것이라 하겠다.
② 심기리 3편
태조 3년에 저술된 것으로 심난기(心難氣)ㆍ기난심(氣難心)ㆍ이유심기(理諭心氣)의 3편으로 되어 있다. 심난기는 마음[心]이 기(氣)를 비난한 것이고, 기난심은 기가 마음을 비난한 것이며, 이유심기는 이(理)가 마음과 기의 잘못을 깨우쳐 준 것이다. 여기서 심ㆍ기ㆍ이는 각각 불교ㆍ도교ㆍ성리학을 상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불교철학과 도교철학의 오류를 상호 비판시킨 다음에 성리학으로 하여금 양자의 오류를 비판케 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논리를 구사하고 있다. 물론 그의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의 입장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비판이 절대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성리학적 편견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와 도교철학을 비판하는 강도의 열렬함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③ 불씨잡변
태조 7년에 그가 죽기 직전에 쓴 것으로 그의 배불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여기서는 불교의 교리를 윤회설ㆍ인과설ㆍ심성설ㆍ지옥설 등 10여 편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비판하고, 유교와 불교의 같고 다른 점, 불교의 중국수입, 불교 신앙에 의한 득화(得禍), 이단 배척의 필요성 등을 덧붙여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낱낱이 폭로한 것이다.
그의 불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심기리편에서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편견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억측과 독단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렇듯 철저하게 비판한 것은 동 아시아 세계를 통틀어서 전무후무한 것으로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불교나 성리학이나 다같이 이데올로기성을 가진 것으로 진선진미한 철학일 수는 없다. 그러나 여말ㆍ선초의 역사적 시점에서 생각할 때 불교보다 성리학은 분명히 전진적인 의미를 더 많이 가지는 것이므로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사상사의 문맥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창출(創出)운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④ 학자지남도
이 책은 유배 시절에 쓴 것으로 보이며, 지금 전하지 않으나, 뒤에 권근의 입학도설(入學圖說 공양왕 2년 저술)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아, 그 내용은 역시 성리철학을 그림으로 설명한 것으로 짐작된다.
4. 병서
정도전은 문신이면서도 병법(兵法)에 관심과 조예가 비상히 깊었다. 이것은 그의 부국강병 이념과 관련하여 무(武)를 문(文)과 동등하게 중요시한 때문이었다.
또한 당면의 과제로서 요동 공벌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병법의 개량이 시급한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은 병서로는 진법(陣法)ㆍ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ㆍ강무도(講武圖)ㆍ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 그리고 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 등이 있다.
진법은 군사 훈련을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서술한 것이다. 하나는 북과 깃발을 가지고 진퇴(進退)와 좌작(坐作)기술을 습득하는 훈련이고, 다른 하나는 창검이나 궁시를 가지고 직접 전투하는 훈련이다.
전자는 중심(衆心)을 단합하기 위한 것이고, 후자는 중력(衆力)을 통일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종전의 군사 훈련은 전자만 있고 후자가 결하여 정도전은 이를 보완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군사 훈련을 실전(實戰)에 즉각 부응할 수 있는 체제로 바꾸었으며, 또 이 진법으로써 군사들을 훈련하였다.
오행진출기도는 지금 전하지 않으나, 《주례》의 사마(司馬)의 수수법(蒐狩法)과 중국 역대의 병법을 가감ㆍ절충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강무도도 지금 남아 있지 않으나, 사마법(司馬法)을 증손한 것이라 한다. 그밖의 병서는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5. 악사
정도전이 지은 악사(樂詞)로서는 문덕곡(文德曲)ㆍ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籙)ㆍ납씨곡(納氏曲)ㆍ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이 있다.
문덕곡은 이성계가 즉위한 후의 치적을 노래한 것으로 언로의 개방, 공신의 보존, 토지제도의 개혁, 예악의 제정을 칭송한 것이다.
몽금척은 이성계가 즉위 이전에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척(金尺)을 받아 천명의 계시를 얻었다는 꿈을 노래한 것으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수보록은 이성계가 즉위하기 이전에 어떤 이가 지리산 석벽에서 참서(讖書)를 얻어 이성계에게 바쳤는데, 그 책에는 목자(木子)가 왕이 되고 주초(走肖)ㆍ비의(非衣)ㆍ삼전삼습(三奠三邑)이 그를 보좌하여 8백 년의 왕업을 이룬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성계와 조준(趙浚)ㆍ조인옥(趙仁沃) 그리고 정도전ㆍ정희계(鄭熙啓)ㆍ정총(鄭摠) 등 개국공신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지어낸 참서로 보이는데 어쨌든 이 참서의 출현을 노래한 것이 수보록이다.
납씨곡은 이성계가 나하추[納哈出]의 침략을 격퇴한 공적을 노래한 것이며 정동방곡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기린 노래이다.
Ⅲ. 삼봉집의 출간 경위
《삼봉집》이 처음으로 출간된 것은 우왕 말년이 아니었던가 한다. 우왕 11년에서 13년 사이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권근의 삼봉집 서문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이때 《삼봉집》에 수록된 글은 시문과 학자지남도ㆍ팔진삼십육변도보ㆍ태을칠십이국도 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후 태조 6년(1397) 8월에 정도전의 아들 정진(鄭津)은 부친의 시문 가운데서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ㆍ봉사록(奉使錄) 등을 합하여 2권의 《삼봉집》을 개간하였다. 이것을 홍무 초본(洪武初本)이라 한다. 정진의 발(跋)에 의하면, 정도전은 스스로 시문을 기초하지 않고 입으로 읊은 것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베끼게 하였는데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받아놓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그래서 정진은 타인이 소장한 원고를 모아서 《삼봉집》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초간본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시문은 성석린(成石璘)이 정선하고 권근(權近)이 비점(批點)을 찍었다.
그 후 세조 11년(1465)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정도전의 증손 정문형(鄭文炯)이 홍무 초본에다가 《경제문감》ㆍ《조선경국전》ㆍ불씨잡변(혹은 불씨 변설이라고도 함)ㆍ심기리편ㆍ심문천답을 합하여 6책으로 편성하고 안동부(安東府)에서 간행하였다. 이때 옛 판본의 산락(散落)된 부분이 많이 수정ㆍ보완되었다. 이것이 중간된 《삼봉집》으로서 신숙주(申叔舟)의 후서(後序)가 들어 있다.
정문형은 그 뒤 지방 주군과 동료들로부터 누락된 시문과 서책을 다시 수집하여 성종 17년(1486) 겨울에 강원감사로 있으면서 1백 20여 장을 속간하였다. 이때 증보된 것은 시부(詩賦) 1백여 수와 《경제문감별집》인데, 다음해에 성종 18년 강원도에서 추각된 판목(板木)을 안동부의 중판본과 합쳐 전부 8책으로 만들었다. 8책 중 2책(《경제문감》 및 《경제문감별집》)은 지금 서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3백년이 지난 정조(正祖) 15년(1791)에 왕명으로 《삼봉집》을 다시 간행하였다. 이것은 규장각에 소장되었던 정문형의 중판본의 초본(抄本)을 토대로 한 것인데, 구본에 누락된 진법(陣法)과 시문들을 수록하고, 정도전의 사실(事實)에 대한 기록을 보완하였으며, 구본의 누락된 글자나 자귀의 와류(訛謬)를 보충 또는 교정하였다. 또한 기사의 중첩된 부분을 깎아내고, 비점(批點)과 주석(註釋)을 첨가하고, 편차를 다시 분류하여 모두 14권 7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대구(大邱)에서 개간하여 일명 대구본(大邱本)이라고도 하는데 오대산(五臺山)ㆍ정족산(鼎足山)ㆍ태백산(太白山)ㆍ홍문관(弘文館) 등에 수장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로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정족산 소장본과 태백산 소장본으로 지금 서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본 역서는 이것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목차=
*삼봉집 서(序) 17쪽
*삼봉집 후서(後序) 20쪽
*범례(凡例) 22쪽
삼봉집 제1권
*부(賦) 23쪽
*오언고시(五言古詩) 28쪽
*칠언고시(七言古詩) 57쪽
*오언절구(五言絶句) 62쪽
*육언절구(六言絶句) 66쪽
삼봉집 제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68쪽
*오언율시(五言律詩) 88쪽
*칠언율시(七言律詩) 111쪽
*사(詞) 118쪽
*악장(樂章) 120쪽
삼봉집 제3권
*소(疏) 124쪽
*전(箋) 133쪽
*서(書) 138쪽
*계(啓) 153쪽
*서(序) 154쪽
삼봉집 제4권
*기(記) 178쪽
*설(說) 193쪽
*제발(題跋) 203쪽
*행장(行狀) 213쪽
*묘표(墓表) 220쪽
*제문(祭文) 221쪽
*책제(策題) 226쪽
*명(銘) 229쪽
*찬(贊) 231쪽
삼봉집 제5권
*불씨잡변(佛氏雜辨) 232쪽
삼봉집 제6권
*심기리편(心氣理篇) 280쪽
*심문(心問) 293쪽
*천답(天答) 299쪽
삼봉집 제7권
*진법(陣法) 303쪽
*습유(拾遺) 317쪽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
*사실(事實) 322쪽
*교고문(敎告文) 360쪽
*제현의 서술[諸賢叙述] 372쪽
*삼봉 시집에 씀 [題三峯詩集 ] 381쪽
삼봉집 제9권
경제문감 상(經濟文鑑 上)
*재상(宰相) 394쪽
*총론(總論) 411쪽
*재상의 직[宰相之職] 425쪽
*상업(相業) 425쪽
삼봉집 제10권
경제문감 하(經濟文鑑 下)
*대관(臺官) 447쪽
*간관(諫官) 453쪽
*위병(衛兵) 463쪽
*감사(監司) 474쪽
*주목(州牧) 481쪽
*군태수(郡太守) 481쪽
*현령(縣令) 483쪽
삼봉집 제11권
경제문감 별집 상(經濟文鑑 別集 上)
*[서] 495쪽
*군도(君道) 496쪽
경제문감 별집 하(經濟文鑑 別集 下)
*군도(君道) 553쪽
삼봉집 제12권
*의논(議論) 590족
삼봉집 제13권 ‘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보위를 바룸[正寶位] 600쪽
*국호(國號) 602쪽
*국본을 정함[定國本] 603쪽
*세계(世系) 604쪽
*교서(敎書) 605쪽
*치전(治典) 606쪽
*부전(賦典) 615쪽
*예전(禮典) 632쪽
삼봉집 제14권
조선경국전 하(朝鮮經國典 下)
*정전(政典) 648쪽
*헌전(憲典) 659쪽
*공전(工典) 6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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