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상)정도전이 꿈꾼 나라
기사입력 2014-03-12 09:33
삼봉 정도전은 단순한 책사로 조선을 개국한 것이 아니라
군주(이성계)를 이용해서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①“(1383년)정도전이 이성계를 따라 동북면을 방문했다.
(이성계) 정예부대의 호령과 군령이 자못 엄숙한 것을 보고 이성계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은들 못하겠습니까.(美哉此軍 何事不可濟)’
이성계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정도전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동남쪽 왜구를 칠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②“조선이 개국할 즈음, 정도전은 왕왕 취중에 슬며시 말했다.
‘한 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네. 장자방이 곧 고조를 쓴 것 뿐이라네.
(不是漢高用子房 子房乃用漢高)’라고….
무릇 임금(태조 이성계)을 위해 모든 일을 도모했으니 마침내 큰 공업을 이뤘다.
참으로 상등의 공훈을 이뤘다.(凡可以贊襄者 靡不謀之 卒成大業 誠爲上功)”
■정도전의 부음기사에 담긴 것은
①②, 두 인용문 모두 <태조실록> 1398년 8월26일자에 기록된
삼봉 정도전의 졸기(卒記), 즉 부음기사(Obituary)이다.
이날 새벽 정도전을 비롯, 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 등은
정안군(이방원)을 포함, 여러 정실 왕자들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죄로 참형을 당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세자로 옹립됐던 이방석과 방번 등도 피살됐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 죄로 참형을 당했으니 대역죄인에 해당된다.
대역죄인의 졸기인만큼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실록>의 이 ‘천인공노할 대역죄인의 부음기사’는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물론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보복하기를 좋아했고,
이색을 스승으로 삼고, 정몽주·이숭인 등과 친구가 됐으나
조준 등과 친하려고 세 사람을 참소했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애교가 아닐까.
대역죄인의 부음기사치고는 매우 관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부음기사는 되레 정도전에게 매우 긍정적인 단서를 남긴다.
즉 정도전의 사후, 최초의 기록인 이 ‘졸기’는
정도전과 정도전의 생애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자방(장량)이 한 고조(유방)를 기용한 것 뿐”
우선 ①의 기사를 보자.
정도전이 조선개국 전, 동북면을 지키던 이성계를 방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그릇이 되는 지를 탐색하려 한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군대의 엄정한 군기와 군세를 보고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고 운을 뗐다.
‘역성혁명을 할 만한 기세’라고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성계는 이 질문에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정도전도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①의 실록 기사는 두 사람이 새 왕조 개국을 위한
운명적인 만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②는 더욱 흥미로운 기록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뒤 술자리 때마다 취중진담의 형식을 빌어
‘한고조(유방)와 장자방(장량)’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도전이 언급한 장자방, 즉 장량이 누구인가.
장량은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개창한 한 고조 유방의 둘도 없는 책사였다.
지금 이 순간도 ‘책사의 전범’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고조는 훗날 “군영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일만큼은
나(유방)도 장량만 못하다”(<사기> ‘유후세가’)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도전은 술자리에서 큰 일 날 소리를 해대고 있다.
‘한 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유방을 이용해서 제국(한나라)을 개창했다’는 것이 아닌가.
두 말 할 것 없이 한고조는 태조 이성계, 장자방은 정도전 자신이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고,
이성계를 기용했다는 이야기를 술자리 때마다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춘추대의’에 반하는, 즉 역심을 한껏 드러낸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록>은 정도전이 취중에 말했다는
‘한고조와 장자방’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팩트만 담아 전하고 있다.
정도전 일파를 죽인 태종이 <태조실록>을 편찬했는데,
정도전의 역심을 이토록 담담한 필치로 쓸 수 있을까. <실록>은 더 나아가
“태조(이성계)와 함께 조선개국에 모든 힘을 쏟은 정도전이야말로
‘참으로(誠)’ 상등의 공훈을 세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참으로(誠)’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면,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정도전의 목을 벤
태종마저도 그를 ‘조선의 개창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를 죽인 것이다.
사실 삼봉 정도전의 젊은 날은 당대의 여느 사대부와 다르지 않았다.
백성을 군자가 가르쳐야 할 어리석인 대상으로 여겼으니까.
정도전이 다섯살 연상의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백성들은 어리석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모릅니다.
백성들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할 줄 알았지, 도가 바르고 나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면서
“따라서 바람이 불면 풀이 반드시 눕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삶은 부친·모친상으로 인한 3년 여의 낙향(1366~69)과,
부원파 이인임의 미움으로 인한 9년 여의 긴 유배 및 유랑(1375~84)으로 완전히 바뀐다.
먼저 ‘절친’이었던 포은 정몽주가 건네준 <맹자>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씩 차근차근 정독했다.
아마도 맹자를 읽음으로써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정도전이 ‘꽂힌’ 맹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맹자> ‘양혜왕 하’일 것이다. 무엇이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상나라 성군)이 하나라 걸왕을 내쫓고,
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죽였는데 그렇습니까.”(제 선왕)
“기록에 있습니다.”(맹자)
“신하가 군주를 죽여도 됩니까.”(제 선왕)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사내’에 불과합니다.
주 무왕이 ‘한낱 사내’(상 주왕을 뜻함)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맹자)
그러니까 주나라 창업주인 무왕(기원전 1046~1043년)은
‘어짊과 올바름을 해친 한낱 사내’인 상(은)의 폭군인 주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무시무시한 ‘맹자의 말씀’이다.
또 <맹자> ‘이루’는 “걸주(桀紂·폭군의 상징인 하 걸왕과 상 주왕을 뜻함)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은 것”이라 했다.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과 같다.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이다.
그 백성을 얻는 데도 도가 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은 것이다.”
그는 조선개국 후 펴낸 <조선경국전>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임금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한다.
하나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조선경국전> ‘정보위·正寶位’)
삼봉이 이인임 일파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 유배를 떠났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비참한 백성들의 현실을 깨달았다.
■질타당한 선비의식
9년 간의 유배 및 유랑생활에서 마주친 백성들의 비참한 삶도 정도전의 혁명의식을 깨웠다.
바야흐로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 등의 외우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내환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물푸레 나무(水靑木)로 만든 회초리로 농민을 압박,
토지를 빼앗기에 혈안이 돼 토지 하나에 주인만 7~8명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반면 방방곡곡이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략으로 싸움터가 됐다.”(<고려사절요> 등)
유배지(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만난 백성들은
‘교화해야 할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 가난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질곡의 하루하루를 보내던 백성들은 정도전에게
‘탁상공론하는 유학자들의 허위의식’을 사정없이 일깨워주었다.
정도전의 <금남야인>이란 글을 보자.
어떤 야인(野人)이 “선비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선비의 몸종이 선비를 위해 대신 대답한다.
“우리 선비님은 천문·지리·음양·복서에도 능통하고
오륜 윤리에 통달하고 역사와 성리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입니다.
후진을 가르치고 책을 쓰고 의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진정한 유학자임을 자부하는 선비입니다.”
그러자 야인은 슬쩍 비웃으면서 단칼로 정리한다.
“그 말은 사치입니다. 너무 과장이 아닙니까.
실상도 없으면서 허울만 있으면 귀신도 미워할 겁니다.
선생은 위태롭군요.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까 두렵네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선비의 허위의식을 사납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숭인과 정몽주 등이 유배 중이나 유배가 풀렸을 때
임금을 향한 ‘연군시(戀君詩)’를 남겼지만, 정도전은 일절 쓰지 않았다.
백성에게 배웠는데 왜 임금에게 고마워한다는 말인가.
■이성계를 만난 날
정도전은 맨처음 인용한 대로 유랑 중
도지휘사로 동북지방 국토방위 책임자였던 이성계를 만나 혁명의 감(感)을 잡았다.
이 때가 1383년(우왕 9년)이었다. 정도전의 나이 42살이었고 이성계의 나이 49살이었다.
정도전은 이듬해(1384년) 여름 함주(함흥)를 찾았다.
아마도 이때는 ‘이성계의 장자방’으로서 본격적인 혁명모의를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1392년 7월 17일, 드디어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은 새왕조의 실질적인 설계자가 됐다. 그의 직책은 어마어마 했다.
1품인 숭록대부에다 봉화백이라는 작위는 덤이었다. 문하시랑찬성사(시중 다음 직책),
동판도평의사사사(최고정책결정기구 수장), 판호조사(국가경제 총괄), 판상서사사
(인사행정 총괄), 보문각대학사(문한의 총책임자), 지경연예문춘추관사
(역사편찬과 국왕 교육책임), 의흥친군위 절제사(태조 이성계의 친병 두번째 책임자)….
그러니까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인사행정을 도맡으며, 국가재정·군사지휘권·
왕의 교육과 교서작성·역사편찬 등 전 분야를 총괄하는 직분을 감당해낸 것이다.
정도전은 원래 ‘백성은 풀잎같아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쓰러지는’나약한 존재이며,
따라서 가르쳐야 할 존재라고 여겼지만
유배생활을 통해 민초의 만만치 않은 힘을 깨달았다.
■혁명공약 쓴 정도전
그의 지위는 7월28일 발표한 이른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이 발표됨으로써 구체화했다.
이것은 일종의 혁명정부의 공약같은 것이었다.
정도전의 연구자인 한영우 교수(서울대)는 이 편민사목 편찬을 두고
“정도전이 조선왕조의 설계자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묘사직의 제도. 왕씨 처리 문제, 과거제도 정비. 국가재정의 수입과 지출,
군대진휼, 과전법의 준수, 공물 감면 등 혁명개혁공약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특히 정도전은 이색·이숭인·우현보·설장수 등
56명을 반혁명 세력으로 간주하고 엄중한 처벌을 언급했다.
물론 이들은 태조의 감면으로 극형을 면했다.
그러나 이색의 아들 이종학과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홍득·홍명 등 8명은
유배 도중 곤장 70대를 맞고 사망했다.
<태조실록>은 우현보 세아들의 죽음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이는 정도전과 우현보 가문의 오랜 원한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언급했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는 정도전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이 담겨있다.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문제’였다.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김진이라는 승려가 자신의 종의 아내와 사통해서 낳은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진이라는 승려는 우현보의 자손과 인척관계였다.
따라서 우현보의 자손들은 정도전의 ‘천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출생의 비밀’
그런데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를 때
대간(사간원)에서 고신(신분증)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 이 때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손들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퍼뜨려 그렇게 됐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훗날 우현보의 세 아들을 모함해서
개인감정으로‘치사하게’복수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으로서는 ‘천출(賤出)’이라는 것 때문에 무진 구설수에 시달려왔다.
예컨대 고려 공양왕 말기인 1392년 4월, 간관 김진양 등은
정도전을 탄핵하면서 다음과 같이 폄훼했다.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에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때문에 그 미천한 근본을 덮고자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조)
여기서 말하는‘본주’, 즉 본주인은 우현보 가문을 일컫는다.
정도전의 ‘출생 컴플렉스’가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거꾸로 이같은 출생의 한계 때문에 명문가 출신인 정몽주 등과 달리
세상을 완전히 갈아엎는 혁명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계속)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하)정도전이 꿈꾼 나라
기사입력 2014-03-12 09:42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쨌든 정도전은 그야말로 새 왕조 설계를 위해
‘만기친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한 일을 일별만 하더라도 과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사은사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동북면 도안무사가 되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태조는 그런 정도전을 두고
“경(정도전)의 공이 (고려 때 동북 9성을 경영한) 윤관보다 낫다”고 치하했다.
(<태조실록> 1398년 3월30일)
■정도전의 예능감
그 뿐인가. 악곡까지 만들었다.
즉 문덕곡(文德曲·이성계의 문덕을 찬양),
몽금척(夢金尺·신으로부터 금척을 받았음을 찬양),
수보록(受寶錄·태조 즉위전에 받았다는 참서),
납씨곡(納氏曲·몽고의 나하추를 격퇴한 것을 찬양),
궁수분곡(窮獸奔曲·왜구 격파의 공로를 찬양),
정동방곡(靖東方曲·위화도 회군을 찬양) 등 6개 악사를 지어 왕에게 바친 것이다.
정도전이 작사·작곡·편곡한 이 6곡은 춤으로 형상화됐다.
종묘와 조정의 각종 행사 때 연주돼 궁중무용으로 자리잡았다.
참 재주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은 정도전에게 음악가의 재능까지 선사한 것이다.
그는 또 한의학에도 천착, <진맥도지(診脈圖誌)>까지 펴냈다.
의사는 맥을 짚는데 착오가 없어야 한다면서 여러 학자들의 설을 참고해서
그림을 곁들여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대체 정도전의 ‘능력의 끝’은 어디까지였을까.
■병법에 군사훈련까지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오행진출기도>와 <강무도>,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등 병서를 지어 태조에게 바쳤다는 점이다.
이것은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정도전은 각 절제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인 가운데
무략이 뛰어난 자들을 골라 ‘진도(陣圖)’를 가르쳤다.
자신이 제작한 ‘진도’를 펴놓고 일종의 제식훈련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사병 성격의 군대를 정도전 자신이 직접 장악,
장차 요동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394년, 정도전은 중앙군 최고책임자인 판의홍삼군부사가 됐다.
사실상 군통수권자가 된 것이다. 이성계의 친병인 의흥친군위도 이 기구에 통합됐다.
그러나 정도전의 병권장악은 순조롭지 않았다. 정안군(태종) 등 여러 왕자와 종친,
그리고 절제사들이 저마다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절제사들이 철갑을 입고 군대깃발에 제사를 지내는 제독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절제사들의 수하들에게 태형이 집행됐다.”
(<태조실록> 1394년 1월28일)
“절제사와 군사들에게 진도를 익히도록 강요하고 사졸들을 매질하니
이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태조실록> 1398년 윤5월29일)
정도전은 특히 1394년 2월29일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들을 혁파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군제개혁안을 관철시켰다.
사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모든 군통수권이 국왕 한사람에게 모여야 하는게 옳았다.
때문에 정도전의 군제개혁안은 당연한 과업이었다.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도전은 한양도성을 설계했고, 한양을 구획하고 거리와 마을의 이름까지 지었다.
■요동정벌의 야망
또 누누이 강조하지만 이 군제개혁안이야말로
정도전이 외쳐온 ‘요동정벌’을 위한 선행조건이었다.
예컨대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한
고려 태조의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宏規遠略)”이라고 칭송했다.
더불어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태조의 조처를
‘매우 어질고 은혜로운(沈仁厚澤) 정책이었다’고 숭상했다.
(<삼봉집> 중 ‘경제문감별집’ ‘군도君道·고려국 태조 高麗國太祖)
정도전의 요동정벌 의지는 확고했다.
예컨대 1397년(태조 6년) 정도전은 측근인 남은과 결탁해서
태조 임금에게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태종실록> 1405년 6월27일)
남은의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태조는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이냐”고 정도전에게 물었다.
그 때 정도전은 “예전에도 외이(外夷)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요동정벌을 촉구했다.
정도전은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 등 이른바 이민족의 나라가
중국 중원을 점령한 일을 거론하면서 요동정벌의 정당성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군제개혁안과 요동정벌 계획은 극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예컨대 정도전의 편에 선 대사헌 성석용이 정도전의 <진도>를 익히지 않은
모든 지휘관의 처벌을 강력히 주청한 일이 일어났다.(1398년 8월9일)
당시 절제사를 비롯한 군부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면 정안군(태종)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개국공신들이었다. 그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러자 태조는 “정안군(태종) 등 왕자 및 종친들과
이지란 등 개국공신들은 사면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이들의 반발을 무마했다.
여기에 병상에 누워있던 개국공신 조준은 태조 임금을 알현하고
‘요동정벌 불가론’을 조목조목 따졌다.
“(고려말 조선초의) 잦은 부역으로 백성들이 지쳤고,
신생 명나라의 국력이 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인데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도전의 야망은 전방위적인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고 만다.
■도성설계에, 동네이름까지
이밖에도 새 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한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찰만 했다.
1394년 <조선경국전>의 편찬은 그의 혁혁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역대부병시위지제>라는 군제개혁안을 그래픽을 곁들여 편찬, 임금에게 바쳤다.
얼마나 병법에 해박했으면 그림까지 그려 설명할 정도였을까.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 뿐인가. 정도전은 한양 신도읍지 건설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도성건설의
청사진을 설계한다.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까지 그려 태조 임금에게 바쳤다. 새
도읍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자 <신도가>라는 노래까지 지어
공역자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흥을 돋우어 주었다.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 덕중하신 강산 좋으매 만세 누리소서.”
경복궁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등 궁궐 및 전각의 이름과
융문루·영추문·건춘문·신무문 등 궐문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지금도 상당 부분 남아있는 한양도성을 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그는 직접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타산(낙산)에 올라
거리를 실축하고 17㎞가 넘는 도성을 설계했다.
오행의 예에 따라 숭례문·흥인지문, 돈의문, 소지문(숙정문) 등 4대문과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종로의 종각은 오행의 신(信)에 해당됐다.
한양은 이로/써 인의예지신 등 오덕을 갖춘 도시의 상징을 띠게 됐다.
신도시 한양의 행정구획을 정리하고 구역의 이름을 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한양을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수십개의 방(坊)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정했다.
예컨대 연희·덕성·인창·광통·낙선·적선·가회·안국·명통·장통·서린 등의 이름이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냥 지은 게 아니었다.
인의예지신와 덕(德)·선(善) 등 유교의 덕목을 담은 명칭이었다. 정도전은
완성된 한양의 모습을 찬미하는 6언절구의 <신도팔경시>를 지었다.(1398년 4월 26일)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몸통없이 목만 남은 유골이 발굴됐다.
재상의 나라를 꿈꾸던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참수되는 비운을 겪었다.
■ 선인교 나린 물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정치적 격변기에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면서
‘군신유의(君臣有義)’라는 유교적 덕목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유학자나 선비들의 갈등은 옛 왕조의 멸망에 대한 한탄과 회고,
고려 왕조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 새로운 왕조에 대한
긍정적 태도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시조에 반영되었다.
고려 왕업의 무상함을 노래한 조선 개국 공신의 회고가로,
망국의 슬픔에 빠져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선인교’, ‘자하동’이 흥성했던 고려 왕조의 업적을 표상한 것이라면,
그 속을 흐르는 ‘물소리’는 고려 왕업의 무상함(덧없음)을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장에서 ‘물소리뿐이로다’ 라고 하며 무상감을 나타내지만,
종장에서 ‘무러 무엇하리오’ 라고 하여 무상감을 극복하려는
개국 공신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 신도가(新都歌)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송도가(頌禱歌).
가사는 『악장가사』에 실려 있다. 창작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2년(1393)에서 태조 3년 사이로 추정된다.
내용은 신도읍(漢陽)의 형승(形勝)과 그 미성(美盛)함을 노래하고,
조선 태조의 성수(聖壽) 만년을 빈 것이다.
형식은 고려가요와 비슷한 3음보격으로 되어 있다.
전대절(前大節)과 후소절(後小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
아으 다롱다리’라는 여음이 전후절을 구분해 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행 구분과 음보 구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제1행의 끝구인 ‘올히여’를 ‘올히’로 끝맺고
‘여’자(字)는 다음 어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즉 ‘여’를 ‘디위예’로 붙여 세 번째 어구를 ‘여디위예’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 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 중에 「양주곡(楊州曲)」이 나오는데,
「신도가」의 시형이 여요형(麗謠形)이면서 가사 가운데
“잣다온뎌 당금경 잣다온뎌”와 “아으 다롱다리”를 삽입한 것으로 보아
「양주곡」의 악곡에 맞추어 지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이 「신도가」는 순우리말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가요의 형식을 취하면서 조선 초기의 시가에 흔히 쓰이는
‘∼이샷다’·‘∼이여’·‘∼ㄴ뎌’·‘∼쇼셔’ 등의
감탄어구를 지닌 대표적인 송도가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천도 직후에 지어진 것인 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못하고,
천도의 벅찬 기쁨을 직설적이고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도읍 한양의 경개(景槪)는 1398년에 정도전이 지은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에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
신도 팔경의 시를 올리다[進新都八景詩]
기전산하(畿甸山河)
기름지고 걸도다 천 리의 기전 / 沃饒畿甸千里
안팎의 산과 물은 백이(百二)로구려 / 表裏山河百二
덕교에다 형세마저 아울렀으니 / 德敎得兼形勢
역년은 천 세기를 기약하도다 / 歷年可卜千紀
도성궁원(都城宮苑)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이고 / 城高鐵甕千尋
구름 둘렀어라 봉래 오색(蓬萊五色)이 / 雲繞蓬萊五色
연년이 상원에는 앵화 가득하고 / 年年上苑鶯花
세세로 도성 사람 놀며 즐기네 / 歲歲都人遊樂
열서성공(列署星拱)
열서는 우뚝하게 서로 마주서서 / 列署岧嶤相向
마치 별이 북두칠성을 끼고 있는 듯 / 有如星拱北辰
새벽달에 한길 거리 물과 같으니 / 月曉官街如水
명가(鳴珂)는 먼지 하나 일지 않누나 / 鳴珂不動纖塵
제방기포(諸坊碁布)
제택은 구름 위로 우뚝이 솟고 / 第宅凌雲屹立
여염은 땅에 가득 서로 연달았네 / 閭閻撲地相連
아침과 저녁에 연화 잇달아 / 朝朝暮暮煙火
한 시대는 번화롭고 태평하다오 / 一代繁華晏然
동문교장(東門敎場)
북소리 두둥둥 땅을 흔들고 / 鐘鼓轟轟動地
깃발은 나풀나풀 공중에 이었네 / 旌旗旆旆連空
만 마리 말 한결같이 굽을 맞추니 / 萬馬周旋如一
몰아서 전장에 나갈 만하다 / 驅之可以卽戎
서강조박(西江漕泊)
사방 물건 서강으로 폭주해 오니 / 四方輻湊西江
거센 파도를 끌어가네 / 拖以龍驤萬斛
여보게 썩어 가는 창고의 곡식 보소 / 淸看紅腐千倉
정치란 의식의 풍족에 있네 / 爲政在於足食
남도행인(南渡行人)
남도라 넘실넘실 물이 흐르나 / 南渡之水淊淊
사방의 나그네들 줄지어 오네 / 行人四至鑣鑣
늙은이 쉬고 젊은 자 짐지고 / 老者休少者負
앞뒤로 호응하며 노래 부르네 / 謳歌前後相酬
북교목마(北郊牧馬)
숫돌같이 평평한 북녘들 바라보니 / 瞻彼北郊如砥
봄이 와서 풀 성하고 물맛도 다네 / 春來草茂泉甘
만 마리 말 구름처럼 뭉쳐 있으니 / 萬馬雲屯鵲厲
목인은 서쪽 남쪽 가리질 않네 / 牧人隨意西南
『삼봉집』권1, 「육언절구」 진신도팔경시
1)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을 말한 것이다.
『사기(史記)』에 “진(秦)나라는 땅이 험고하여 2만 명만 있으면
족히 제후(諸侯)의 백만 군사를 당할 수 있다” 하였다.
2)
봉래궁(蓬萊宮)은 당(唐)나라 대명궁(大明宮)인데,
여기서는 우리 궁궐에 비유하여 쓴 것. “천자(天子)의 정궁(正宮)이어서
그 뒤에는 항상 오색의 서운(瑞雲)이 떠 있다” 하였다.
3)
말굴레의 장식품이라고도 하고 또는 악기라고도 한다.
進新都八景詩
畿甸山河
沃饒畿甸千里, 表裏山河百二, 德敎得兼形勢, 歷年可卜千紀.
都城宮苑
城高鐵甕千尋, 雲繞蓬萊五色, 年年上苑鶯花, 歲歲都人遊樂.
列署星拱
列署岧嶢相向, 有如星拱北辰, 月曉官街如水, 鳴珂不動纖塵.
諸坊棋布
第宅凌雲屹立, 閭閻撲地相連, 朝朝暮暮煙火, 一代繁華晏然.
東門敎場
鐘鼓轟轟動地, 旌旗旆旆連空, 萬馬周旋如一, 驅之可以卽戎.
西江漕泊
四方輻凑西江, 拖以龍驤萬斛, 請看紅腐千倉, 爲政在於足食.
南渡行人
南渡之水滔滔, 行人四至鑣鑣, 老者休少者負, 謳歌前後相酬.
北郊牧馬
瞻彼北郊如砥, 春來草茂泉甘, 萬馬雲屯鵲厲, 牧人隨意西南.
『三峯集』卷1, 「六言絶句」 進新都八景詩
이 사료는 조선 건국 초 서울로 도읍을 옮긴 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새로운 왕도의 환경과 자신의 감정을 6언 절구로 노래한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로,
서울로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과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한 사례로 경복궁을 짓고 그 건물의 명칭을 짓는 데도
정도전이 유교의 이념을 참작하여 하나하나 이름을 손수 짓고
이를 임금에게 허락받아 확정하였다.
위의 시는 모두 8수로 이루어져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경쾌하고 새로운 왕조에 대한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다.
시의 내용은 산하(山河)•궁성(宮城)•관서(官署)•시가(市街) 등과 사방(四方)의
중요 대상물을 주제로 삼아 정도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위정(爲政)이란 먹을 것을 풍족히 하는 데 있다’는 표현은
관료이면서 문인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은 1393년(태조 2년)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1394년(태조 3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고, 그해 11월 마침내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천도하는 데는 풍수지리설을 많이 참작하였다.
그리고 1395년(태조 4년) 6월에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성은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전조후시(左廟右社, 前朝後市)’의 원칙으로 도읍을 건설하였다.
가장 먼저 서쪽에 사직을 완공하고 궁궐을 세운 뒤, 그 동쪽에 종묘를 완성하였다.
광화문 앞에는 육조관서를 배치하여 관아가(官衙街)로 하고, 한양의 방위를
튼튼히 하기 위해 북악산과 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약 17㎞의 성벽을 쌓았다.
도성의 행정구역은 동•서•남•북•중부의 오부(五部)를 두고 그 밑에 52방(坊)을 두었다.
이 시는 이렇게 정비된 서울의 모습을 시로 노래한 것이다.
■최고의 불교비판서
새왕조 개창을 향한 그의 정력은 <불씨잡변> 저술에서도 엿볼 수 있다.
1398년(윤 5월16일) 개국공신 권근이 쓴 <불씨잡변> 서문을 보자.
“무인년(1398년) 여름(4~5월) 선생(정도전)은
병 때문에 며칠 쉬고 있는 사이 이 글을 만들어 나(권근)에게 보이며 말했다.
‘불씨(부처)의 해독은 사람을 금수로 만들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니~
울분을 억제할 수 없이 이 글을 짓는 것입니다.’라고….”정도전은
더 나아가 “불교를 깨뜨릴 수 있다면 죽더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이 <불씨잡변>은 동양 역사에서 가장 수준높은 불교비판서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성리학을 조선왕조의 국교로 정착시킨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몸이 아파 쉬고 있는 사이에도 나라를 위한 정도전의 노심초사를 읽을 수 있다.
그보다 이 짧은 기간동안 이렇게 깊이 있는 저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니….
그의 내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뿐이다.
■군주의 권한은 딱 두가지 뿐
그러나 정도전의 사상 가운데 으뜸은 역시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정치였다.
1394년 <조선경국전>을, 1395년엔 그것을 보완한 <경제문감>을 지었다.
여기서 정도전 정치사상의 핵심인 ‘재상중심의 권력구조’ 의견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너무 혁명적이다.
“인주(人主·군주)의 실제 권한은 딱 두가지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임명하는 권한이다.(人主之職 在擇一相)
다른 하나의 권한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이다.(人主之職 在論一相)”
(<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경제문감> ‘상·재상’)
여기서도 주안점이 있다. 군주는 국사에 관계된 큰 문제만 협의할 뿐,
그밖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재상이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사의 주도권은 군주가 아니라 재상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왜 재상에게 사실상의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왕의 자질은 어둡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이 한결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왕이 대중의 영역에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相·재상)이라 합니다.
도와서 바로잡는다는 것입니다.”(<조선경국전> ‘상·치전총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군주의 실권은 원래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왕위는 세습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왕이 현명하면 물론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재상만 훌륭하다면 괜찮다는 것이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군주는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정도전은 이와함께 군주는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된다고 단언했다.
군주의 사유재산권은 측근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경우 왕의 측근세력은 권세와 농간을 부려
만사의 폐단이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군주는 관념상으로 가장 많은 부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국가의 경비지출에 의해 생계를 지탱해야 하는 일종의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재상은 군주가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경비를 장악해서 군주가 사치와 낭비가 없도록
엄격히 통제해야 하는 존재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그래서인가. <경제문감>은 “천하의 교령(敎令)과 정화(政化)는
모두 재상의 직책에서 나온다”(재상지직·宰相之職)고 했다.
따라서 군주는 재상을 대할 때 반드시 ‘예모(禮貌)’
즉 ‘예를 갖춘 얼굴’로 대해야 하며 함부로 언동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재상은 인사권과 군사권, 재정관할권, 작상(爵賞)형벌권 등 움켜쥔다는 것이다.
(<경제문감> ‘상 재상지직’)
■정도전이 꿈꾼 세상
정도전이 재상정치를 논하면서 전범으로 삼는 ‘재상’들이 있다.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성왕을 도와 왕조를 반석 위에 세운 이윤(요리사 출신의 재상)과,
주공(성왕의 삼촌이자 섭정 재상)이다.
물론 한나라의 소하·조참·주발·진평과
당나라의 방현령·두여회·요숭 등도 명재상이긴 하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기 몸을 수양하고 임금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경제문감> ‘상·재상 상업’)
정리해보면 미련하고 똑똑한 군주가
둘쭉날쭉할 수밖에 없는 세습군주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천하만민 가운데 뽑은 선비로 현인집단을 형성하고,
그 현인집단 가운데 선발된 관료를 중심으로한 관료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료정치를 이끌어가는 구심점은
천하만민의 영재 가운데 선택된 재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천려일실
1398년 8월26일, 정도전은 자신의 집(종로구청 자리)과 가까운
남은의 첩 집(송현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불의의 습격을 받아 참수 당한다.
당시의 <실록>은 정도전은 죽기 전, “예전에 공(정안군)이 나를 살렸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한영우 교수는 정도전이 죽기 전에 읊었다는 ‘자조(自嘲)’의 시를 보면
혁명가의 기개가 엿보인다고 주장한다.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操存省察兩加功)
책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不負聖賢黃卷中),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三十年來勤苦業)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松亭一醉竟成空)”(<삼봉집>)
새왕조 건설을 위해 눈 코 뜰새 없이 움직이던 중 그만 순간 방심해서
술 한잔 마시다가 천려일실, 변을 당했음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현방은 바로 남은의 첩 집을 가리킨다.
■목만 발굴된 유골의 정체
지난 1989년 3월,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서
삼봉 정도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굴됐다.
발굴 묘는 <동국여지지> ‘과천현’편과 봉화정씨족보에서
정도전 선생의 묘로 추정한 바로 그 곳이었다.
봉화 정씨 종택이 그동안 이 묘소를 관리해왔다.
그런데 발굴결과 몸통은 없고, 머리만 남은 피장자의 유해가 발견됐다.
이와함께 상당히 정제된 조선초기의 백자가 함께 수습됐다.
무덤을 발굴한 한양대박물관은 “무덤의 지체로 보아 상당한 신분의
피장자였음이 분명하다”면서 “삼봉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특히 정도전이 “정안군이 정도전의 참수를 명했다(令斬之)”는
실록의 기사(1398년 8월26일)가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마도 어떤 뜻깊은 이가 그의 잘린 목을 수습해서 정성스럽게 묻어두었을 것이다.
조선을 설계한 위대한 혁명가이자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정도전의 최후는 이렇게 비참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정도전의 묘(서초구청 홈페이지)
지하철 양재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떨어진 우면산 끝자락
서초동 산23-1번지에는 여러기의 묘가 있는데,
이중 하나가 조선 개국 공신 삼봉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고 있다.
풍수지리학상으로 학이 날개를 펴고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는 명당으로
묘소는 학의 머리 부분에 있다. 이곳이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는 이유는
각종 문헌자료와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온 이야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지] 과천현편에는 "정도전묘재현동십팔리(鄭道傳墓 在縣東十八里)",
"양재역 재 동십오리(良才驛 在東十五里)"라는 구절이 있고,
<봉화정씨족보> 에도 "정도전묘광주사리현(鄭道傳墓廣州四理縣)"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마을 사람들로부터 대대로 전해오는 구전에 의하면 정도전의묘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1989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제1호분은 우선 신분이나 계급이 높은 지배계층의 분묘형태를 띠고 있으며,
두꺼운 회벽과 그곳에 서 나온 유물이 조선초기의 백자라는 것이었다. 또한 목관에
안치되어 있는 피장자의 유해는 머리 부분만 남아 있고 다른 부위는 발견 되지 않았다.
이것은 [태조실록]14권에 "정삼봉이 참형되었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어
피장자가 정도전일 가능성이 충분하였다. 유학의 대가인 정도전(1337년~1398년)은
1392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일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1등 개국공신으로 군사, 외교, 성리학, 행정, 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하였다.
태조9년(1398년)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참수되었다.
■장자방과 다른 점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장자방’을 자처했지만,
끝까지 장자방의 길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자방의 경우를 보자.
한 고조(유방)가 한나라를 개국한 뒤 정부인(여후)의 아들(태자)을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척부인)의 아들을 새 태자로 옹립하려 했다.
그 때 장자방은 정부인을 위해 선묘한 계책을 내어
장자(여후의 아들)의 계승원칙을 지켜냈다.
반면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가 정실이 아닌
후실(신덕왕후 강씨)의 어린 아들(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세자(방석)의 스승이 되어 미움을 자초했다.
또 하나, 장자방은 한나라가 개국되자 “이제 세속의 일은
떨쳐버리고자 한다”고 선언한 뒤 적송자(전설상의 신인)의 삶을 좇아 유유자적했다.
이 또한 정도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조선 개국 후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만기친람’하며 초인의 능력을 발휘했던 정도전과는….
■‘그 분과 견줄수 있는 영웅호걸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역사는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가 뿌린 씨앗은 조선왕조 500년은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1465년(세조 11년), 영의정 신숙주는
정도전의 손자 정문형의 부탁을 받아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이렇게 평했다.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 분(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 10월29일 낙성된 경복궁에서 연회를 베풀며
삼봉 정도전에게 네 글자를 대서특필해 선물했다.
‘유종공종(儒宗功宗)’. 즉 ‘유학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도 으뜸’이라는 글자였다.
핵심을 찌르는 당대의 평가다.
물론 삼봉의 속내는 달랐을 것이다.
이성계(한고조 유방)가 정도전(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기용한 것이라고….(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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