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經國典≫과 朝鮮初期 法制整備*
鄭 肯 植**
?서울대학교 法學?제56권 제2호 2015년 6월 85∼116면
Seoul Law Journal Vol. 56 No. 2 June 2015. pp. 85∼116
<논문>
요 약
본고에서는 정도전이 편찬한 ≪조선경국전≫이 사찬이 아니라 태조와의 교감 하에 진행된 관찬의 성격이 짙음을 당시와 후대의 자료 및 중국의 사서편찬 전통을 통하여 논증하였다. 정도전의 핵심저작인 ≪佛氏雜辯≫, ≪經濟文鑑≫, ≪조선경국전≫에는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그의 사상이 표현되어 있다. 그는 ≪조선경국전≫에서 조선이 지향해야 할 통치제도의 개략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현존 ≪조선경국전≫이 전체가 아니라 서문만 초록한 것이라는 末松保和의 견해와 달리 전체임을 논증하였다. ≪조선경국전≫의 체재는 주례에 연원하는 六典體裁인데, 이는 元의 ≪經世大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周禮에 입각한 ≪조선경국전≫의 육전의 순서는 세종대의 관제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어 조선시대 법전편제의 기본이 되었다. ≪조선경국전≫ <憲典>은 ≪大明律≫ 전체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大明律≫이 형사일반법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주제어: 정도전,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대명률의 수용, 육전체재, ≪경세대전≫
* 이 논문은 서울대학교 법학발전재단 출연 법학연구소 기금의 2015학년도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았음. 아울러 이 논문은 2014년 12월 12일 수원화성박물관 학술대회 <삼봉 정도전과 조선경국전>의 발표문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또한 익명의 심사위원의 지적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만 오류는 필자의 책임이다.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법학대학원 교수.
I. 서 론
조선의 건국은 한국사의 전환점이며, 법사의 측면에서도 통일법전의 시대를 열었다. 고려는 당률을 부분적으로 계수하여 법제를 정비하였으며, 이후로 송과 원의법을 수용하였다. 고려는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국왕의 결정을 법으로 삼는 왕법국가를 지향하여서, 법령의 제정과 개정 그리고 폐지가 거듭되어 법적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개별 사건의 처리에는 합리적일지 모르지만 법적안정성과 보편적 적용에는 문제가 많아 “高麗公事三日”이라는 말까지 나타났다.
10세기 말 성종대에 완비된 고려의 제도는 1170년(의종 24) 무신란 이후 사회의 혼란과 함께 법질서가 붕괴되었으며, 원의 간섭으로 국가제도 전반이 요동을 쳤다. 고려는 원의 정치적 상황과 연동되어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고, 원의 세력이 미약해져 자주적인 역량을 지니게 되는 공민왕 대에야 비로소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여말선초의 집권자들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여 권력이 豪族이나 私門이 아닌 국가제도를 통해 중앙은 물론 지방까지 통일적으로 집행되는 것을 추구하였고,1) 자연히 법전편찬을 통한 법질서의 확립에 중점을 두었다.
공민왕은 元明交替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틈타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고 우왕의 즉위와 동시에 권문세족의 반동정치로 회귀하였다. 원으로부터 독립하여 국가체제를 재정비하려는 공민왕대 개혁은 구체적인 법제를 구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하였고, 그에 대한 반성의 결과 부분적 개혁이 아닌 국가체제 전체에 대한 개혁이 요구되어 周禮에 바탕을 둔 육전체재가 주목을 받았다. 또 공민왕 대에는 법령의 공포와 함께 구체적인 시행지침 등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제의 개편에 따라 실질적으로 행정을 집행할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지 못했다. 효과적인 개혁의 추진을 위해서는 법령과 지침을 함께 마련하여 운영체계를 확립해야 했고, 그래서 육전을 바탕으로 한 관직운영체제의 정비가 중시되었다. 관제개편의 모범인 육전체재는 각사를 6조에 분속시켜 일원적 지휘감독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다. 이는 여말 권력의 私占을 막고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제도적⋅사상적 기반이 되었다.2)
여말선초의 법제개혁은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하는 데 필수적인 형사법제의 정비와 통일적이고 일원적인 정치체제를 확보하기 위한 통일법전의 편찬에 초점이 있었다. 전자는 대명률의 수용으로 나타났고, 후자는 ≪조선경국전≫에서 기본적인 방향이 제시되었다. 고려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건국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고려의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 개별 왕법이 아니라 통일법전에 뿌리를 내린 법질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조선은 1397년 ≪경제육전≫의 편찬을 필두로 1865년(고종 2)의 ≪大典會通≫까지, 지속적으로 통일법전을 편찬하여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실천하였다.
1) 도현철, 高麗末 士大夫의政治思想硏究(일조각, 1999), 207-210쪽 참조.
2) 이상의 서술은 정긍식, “유가법사상과 경국대전의 편찬” 권연웅 외 편, 한국유학사상대계8): 법사상편(한국국학진흥원, 2008), 249-256쪽을 요약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조선시대 법치의 출발을 보아 초기부터 주목을 하였다. 한국법제사로 東京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淺\見倫太郞은, ≪조선경국전≫을 태조의 즉위교서의 취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또 여기에 나타난 통치제도의 구상을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어서 본문을 후대의 사실과 관련하여 소개하였다. 그리고 體裁를 御前 進講體, 법전의 이유서, 六典學의 提要라고 높이 평가하였다.3) 末松保和는 육전체재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조선경국전≫의 체재를 분석하였다. 우선 逸失된 법전인 元의 ≪經世大典≫의 편목을 ≪國朝文類≫에서 복원한 다음, 이를 ≪조선경국전≫의 그것과 비교하여 후자가 전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4) 또 서지적 문제만 집중하여 다루었다.5) 그는, ≪삼봉집≫에 수록되어 현전하는 “조선경국전”은 전체가 아니라 大序와 小序만을 채록한 데 그친 것이며, 개별조문을 수록한 “조선경국전”본문은 전해오지 않으며, 또 당시의 상황과 정도전의 위상과 역할을 종합하여 사찬이라기보다는 관찬에 가깝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하였다. 또 ≪조선경국전≫과 ≪경제육전≫의 관계에 대해 “전자는 종합적인 법규집이고, 후자는 수시로 반포된 수교를 수록한 신법규집이며, ≪조선경국전≫이 있었기에 2년 7개월만에 ≪경제육전≫을 편찬할 수 있었고, 또 미완이어서 계속해서 네 번6)이나 수정되었다”고 한다. 이 연구들은 ≪조선경국전≫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들로 조선초기 법전편찬사에서 그 위상을 높이 평가한 점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末松保和의 주장은 대담하지만 후술하듯이 수긍하기는 어렵다.
국내 사학계에서는 정치사상사에서 정도전의 위상을 확립한 한영우가, ≪조선경국전≫을 ≪주례≫의 육전체재를 모델로 삼되 중국의 역대제도를 절충하고 다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정한 통치규범으로 파악하고7) “새 왕조의 헌법 초안”이며, 왕조의 설계자이자 정치이론가로서의 정도전의 면모를 보여 주면서 ≪경국대전≫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8) 나아가 조선왕조는 이를 토대로 人治가 아닌 法治의 국가로 출발하였으며,
3) 淺\見倫太郞, 朝鮮法制史稿(東京: 巖松堂書店, 1921), 249-301⋅320面.
4) 末松保和, “朝鮮經國典私考” 學{叢(京城帝國大學文學會, 1943) 참조.
5) 末松保和, “朝鮮經國典再考: 李朝の法源に關する一考察” 末松保和著作集6: 朝鮮史史料(吉川弘文館, 1997) 참조(원: 1951).
6) 네 번은 1413년(태종 13)의 ≪續六典≫, 1426년(세종 8)의 ≪新續六典≫, 1433년(세종 15)의 ≪新撰經濟六典≫, 1485년(성종 16)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經國大典≫을 의미하는 듯하다.
7) 한영우, 鄭道傳思想의硏究(개정판: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38-40쪽[초판: 1973].
8) 한영우, 조선왕조의설계자정도전(지식산업사, 2000), 61쪽.
일종의 立憲君主制에 가까운 국가형태를 취하게 되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9) 정호훈은, 이상적 정치인 仁政은 통일적인 국가법제의 시행을 통하여 가능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 공권력체제를 강화하여 효율적 통치를 추구함이 필요하였다고 인식한 정도전이 麗鮮 교체의 정치⋅사회적 변동 속에서 고려말의 분권적 성격을 탈피하여 통일적 중앙집권과 유교적 문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태조에게 찬진하여 그 이상이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고 평가하였다.10) 아울러 정치사의 관점에서 고려 말의 자의적 지배에서 조선의 규범에 의한 지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정도전과 ≪조선경국전≫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법학계에서는 그동안 조선 법전편찬의 뿌리를 ≪경제육전≫에서 찾고 있으며,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대해서는 “통치이념을 구체화”11)하거나 개국의 기본정책을 규정한 법전적 법률서12) 정도로 또는 현대법학적 관점에서 정도전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조선경국전≫을 소개13)하였을 뿐, 전체적 시야에서는 다루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관찬이 아닌 정도전이 개인적으로 편찬한 사찬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하여 ≪조선경국전≫의 편찬이 정도전 개인의 사찬이 아닌 태조와의 교감 하에 진행된 관찬의 성격이 짙음을 논증하고(Ⅱ. 1), 정도전 전체 저작에서의 위상과 의의를 분석하며(Ⅱ. 2), 末松保和의 논의를 이어 현존 ≪조선경국전≫의 실체를 검토한다(Ⅱ. 3). 이어서 ≪조선경국전≫의 체재와 내용을 분석하고(Ⅲ. 1), 법전의 이상적 편제로 여겨진 육전체재의 수용과 확립과정을 복원하며(Ⅲ. 2), 마지막으로 ≪大明律≫의 수용과 憲典의 관계를 검토한다(Ⅲ. 3). 이를 통하여 ≪조선경국전≫이 조선의 법제정비와 확립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기로 한다.
9) 한영우, 앞의 책(주8), 114-122쪽.
10) 정호훈, “조선전기 법전의 정비와 ?경국대전?의 성립” 오영교 편, 조선건국과경국대전체제의형성 (혜안, 2004) 참조.
11) 박병호, 한국법제사(민속원, 2012), 39쪽.
12) 연정열, 한국법전사(학문사, 1997), 139쪽.
13) 최종고, “정도전의 법사상” 법사와법사상(박영사, 1980) 참조.
Ⅱ. ≪조선경국전≫ 편찬의 성격과 위상
1. 편찬의 성격
여말의 이상적인 정치제도론은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 이후 구체화되었다. 조준은 ≪주례≫ <天官 冢宰>에 입각하여 지휘계통이 정치하게 갖추어진 관료제도를 구상하였다. 즉 기본적인 행정을 분담하는 6部에 百司를 분속시켜 재상의 지휘를 받게 하여 권력구조의 일원화와 효율화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개혁과 제도의 정비는 과거의 부정만으로 달성할 수 없다. 현장의 집행자들은 제도의 변화와 무관하게 나름의 관례에 따르기 때문이다. 결국 완전한 제도의 정비는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은 金祉의 ≪周官六翼≫에 잘 나타나 있다. 주례의 영향을 받은 ≪주관육익≫은 고제를 회복하려는 선행작업으로 고려 전기의 제도와 그 원리를 규명한 것이다. 정도전과 조준 등은 주례에 바탕을 두고 육전과 육조를 중심으로 일원적 집권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는 고려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급진개혁파 사대부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14)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는 하늘을 대신해서 天民을 다스리고 천하의 인민과 토지를 소유하는 등 군주의 절대적 권위는 인정하지만, 실질적인 통치의 책임은 재상에게 일임하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주례≫에 입각하고 또 주희의 정치사상을 수용하여 왕⋅관⋅민으로 계통이 서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상하였다. 그 중심을 국왕이 아닌 재상에 두어, ≪주례≫의 “천관 총재”를 설명하면서 재상을 우선하고 군주는 부수적으로 다루었으며 주희의 글을 인용하여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송의 정치체제를 모범으로 하여 권력구조의 일원화와 효율화를 지향하는 중앙정치제도로 개편하기 위한 것이다.15)
정도전이 구상한 정치제도의 핵심인 육전체재는 ≪조선경국전≫에 개략적으로 발현되었으며, ≪경국대전≫에 구체화되어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서적의 편찬과 관련하여 전승된 사료의 내용은 의외로 간략하여, 정도전이 언제 ≪조선경국전≫의 편찬에 착수하였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1394년 (태조 3) 5월에 태조에게 바쳤는지를 소상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16)
14) 허흥식, “金祉의 選粹集⋅周官六翼과 그 價値” 奎章閣 4(서울대학교 규장각, 1980)및 김인호, “김지의 주관육익 편찬과 그 성격” 역사와현실40(한국역사연구회, 2001)참조.
15) 도현철, “여말선초 개혁사상의 전개와 ?周禮?”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한국중세의 정치사상과 周禮(혜안, 2005), 106-113쪽.
16)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조선경국전≫은 단 2회 나오는데, 이 기사와 정도전의 졸년기사이다 (≪太祖實錄≫태조 7(1398). 8. 26(기사): [鄭]道傳 字宗之, … 作 … [朝鮮]經國典, … 身與三子 俱及於死)([] 부분은 필자 보충).
현재 ≪태조실록≫과 1791년(정조 15)에 간행된 ≪三峯集≫에서 다음의 세 기사만 찾을 수 있다.
가. ○戊辰/ 判三司事鄭道傳撰進朝鮮經國典, 上觀覽嘆美 賜廐馬⋅綺絹⋅白銀.17)
나. 甲戌 六月. 上命都承旨韓尙敬 取進公所撰經國典 覽而嘉之. 特賜段子彩絹各三匹 廏馬一匹 白金五十兩.18)
다. 賜奮義佐命開國功臣 崇祿大夫 判三司事 同判都評議使司事 兼判尙瑞司事修文殿大學士 知經筵藝文春秋館事 兼 判義興三軍府事 世子貳師 奉化伯鄭道傳段19) 絹廏馬白金. 敎曰… 今賜卿段子三匹,綵絹三匹,內廏馬一匹,白銀五十兩 至可領也… 洪武二十七年六月日.20)
“가”는 ≪태조실록≫의 기사이며, “나”와 “다”는 ≪三峯集≫ <附錄>에 실려 있는 [事實]과 [敎告文]이다. 이를 종합하면 우선 ≪조선경국전≫은 1394년(갑술, 태조 3) 5월쯤에 완성되었고, 그 달 30일 태조가 이를 치하하여 정도전에게 상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세 기사는 모두 기본내용은 동일하며, 상으로 내린 물품의 표기가 약간 다를 뿐이다.21) 이런 차이는 각 사료들의 편찬방식과 시기가 다른 것에 연유하는 것으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세 기사는 정보의 양에서 차이가 있고 그 함의도 다르게 읽힌다. “≪태조실록≫”에서는 “판삼사사인 정도전이 바치니 태조가 읽고서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고
가장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17) ≪太祖實錄≫태조 3년(1394) 5월 戊辰(30): 판삼사사 정도전이 ≪朝鮮經國典≫을 지어서 바치니, 임금이 이를 읽고서 감탄하여 칭찬하면서 廐馬와 무늬비단과 명주⋅白銀을 내려 주었다.
18) ≪三峯集≫卷之十四 <附錄> [事實]: 갑술년(1394, 태조 3) 6월, 태조가 都承旨 韓尙敬에게 명령하여, 정도전이 지은 ≪(朝鮮)經國典)≫을 가져다 보고 매우 칭찬하며 특별히 段子와 彩絹 각각 3필과 구마 1필⋅백금 50냥을 하사하였다.
19) ‘段’ 원문은 ‘叚’이나 [事實]에 따라 수정하였다(이하 같음).
20) ≪三峯集≫卷之十四 <附錄> [敎告文]: 분의좌명개국공신 … 봉화백 정도전에게 段絹⋅구마⋅백금을 주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교서 내용 생략] 이제 경에게 段子 3필, 彩絹 3필과 내구마 1필, 백금 50냥을 하사하니 수령하라. … 1394년(태조 3) 6월 일.
21) 차이는 다음 표와 같다.
≪太祖實錄≫ [事實] [敎告文 표제] [敎告文 내용]
廐馬 廐馬 廐馬 內廏馬
綺絹 段子⋅彩絹 各三匹 段絹 段子 三匹,綵絹 三匹
白銀 白金 五十兩 白金 白銀 五十兩
그리고 “사실]”에서는 “태조가 도승지 한상경22)에게 명령하여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을 가져다 보고 칭찬하였다”라고 하여 ≪태조실록≫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즉 ≪태조실록≫에서는 정도전이 주체로 적극적이고 태조는 객체로 소극적이다. 하지만 “사실]”에서는 반대로 태조가 적극적으로 도승지에 게 명령하여 ≪조선경국전≫을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왜 태조는 보려고 했을까 이전에 적극적으로 저술을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관심은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이성계를 국왕에 추대하고 寶璽를 받들어 바친 그의 최측근인 도승지 한상경에게 명령한 점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三峯集≫ [사실]에서 유추하면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태조와 교감 없이 진행한 순수한 사찬으로는 보기어렵다.
가장 자세한 내용은 ≪三峯集≫ 부록의 [敎告文]으로, 편찬과 관련된 내용이 있어 ≪조선경국전≫ 편찬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장황하지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조는 인용자 이하 같음).
옛날부터 국가가 처음으로 건국되었으면 반드시 一代의 典章이 있어서, 지금까지 문헌에서 여러 왕들의 文物을 상고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장을 정비함에는 모름지기 英雄의 힘을 빌어야 한다. 경은 하늘과 사람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고, 과거와 현재를 두루 아는 학식이 있어서 지혜는 넉넉히 그 道에 통달할 수 있고, 변론은 넉넉히 그 말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 개국한 元勳은 옛날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고, 나라를 다스리는 重望은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쳤다. “堯舜의 도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는 말은 옛날에 들었거니와, 社稷을 위하여 기뻐하는 것은, 지금 그사람을 보았구나.
지어 올린 ≪(朝鮮)經國典≫은 周公과 孔子의 뜻에 따라 내용을 만들었으니, 伊訓과 說命으로 더불어 서로 안팎이 된다. 크게는 육전 별로 각각 서문이 있으며, 작게는 (육전 아래에 필자 보충) 여러 가지 조목이 모두 완비되었다. 벼리를 들면 그물코가 펼쳐지듯이, 펴놓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要綱이 된다. 말이 엄숙하고 뜻이 정당하여 은연히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생긴다.
이것으로 정치를 예찬하고, 敎化를 칭송하니, 大經大法이 경의 훌륭한 계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좋은 꾀와 훌륭한 계책은 반드시 우리 임금의 덕이라 하였다. 이것은 다만 寡人의 큰 복을 칭송할 뿐만이 아니고, 또한 장차 후손들에게 잘 보호하는 방법을 물려주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항상 보기 위하여 곁에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사에 활용하면 거의 이 말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니, 金縢에 보관하고 서로 전해 영세토록 내려가기를 원한다. … 홍무 27년(1394, 태조 3) 6월 일.23)
22) 韓尙敬(1360[공민왕 9]∼1423[세종 5]):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392년 (공양왕 4) 밀직사 우부대언에 승진하였고, 李成桂를 추대하는 모의에 가담하고, 寶璽를 받들어 이성계에게 바쳤으며, 그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추록되었다. 중추원 도승지가 되고, 簽書中樞院事⋅도평의사사사에 승진되었고, 태종 때 西原府院君⋅우의정⋅영의정에 이르렀다. ≪세종실록≫세종 5년(1423) 3월 7일(무자)에 卒年 기사가 있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aks] 검색).
23) ≪三峯集≫卷之十四 <附錄> [敎告文]: … 敎曰 自古國家之始 必有一代之典章 至今方第之間 可稽百王之文物 顧惟制作 須賴英雄 卿學際天人 識通今古 智足以達其道 辯足以行其言 開國原勳 敻超前代 經邦重望 澤潤生民 非堯舜不陳 昔聞其語 以社稷爲悅 今見其人 所進經國典 騁周情孔思而作爲文章 與伊訓說命而相爲表裏 大則六典有序 小則庶事悉完 綱擧目張 展也爲邦之要 辭嚴義正 藹然愛君之誠\ 于以黼黻王猷 于以笙鏞治化 大經大法 罔非惟爾之能 嘉謀\嘉猷 必曰我后之德 匪直遺寡人鴻休之譽亦將詒後孫燕翼之謀\ 曷不玩於尋常 置于左右 施諸政事 庶不負於斯言 藏之金縢 願
相傳於永世 … 洪武二十七年六月日(강조는 필자).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번역을 참조하여 수정하였다(이하 같다)
이 敎告文의 작성자는 알 수 없지만, 태조의 의지를 반영한 것임은 분명하다. 여기서 태조는 우선 제도의 정비에 영웅의 힘을 빌어야 하며, 그 영웅은 바로 정도전이며, 그는 개국 당시는 물론 개국 후에도 공이 많음을 칭찬하였고, 그 내용의 훌륭함과 완벽함을 언급하였다. 마지막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만대의 귀감으로 삼기 위해 금등24)에 보관하기를 명령하였다. 또 태조는 鄭摠25)에게 서문을 지을 것을 명령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判三司事 奉化伯 신 鄭道傳이 책을 지어 ≪(朝鮮)經國典≫이라 이름하여, 이를 전하에게 바치자, 전하는 마음에 기뻐하여 이를 유사에게 주어 金匱에 간직해 두게 하였으며, 신 鄭摠에게 명하여서 그 책의 끝에 서문을 쓰게 하였다. 신 정총은 생각하건대, 한 세대가 일어나면 반드시 한 세대의 법제가 있는 법이다. 만약 明君과 良臣이 마치 물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이룰 수가 있었겠는가? 지금 우리 전하는 赤心을 미루어서 재상에게 위임시키자, 三司公은 天人의 학문과 經國濟世의 재주를 가지고 왕업을 도와서 성취시키고 雄健한 문장을 가지고 능히 큰 法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비단 전하가 乙覽하는 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손 만세의 귀감이 될 것이다.26)
24) 金縢: ≪書經≫의 편명이다. 주공이 조카 成王을 도와 정치할 때, 동생 管과 蔡가 주공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모함하자 주공은 東都로 가서 은거하였다. 후에 성왕이 선친인 무왕의 생전에 주공이 남겼던 “병든 무왕 대신 죽게 해 달라”는 기도문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공을 다시 불렀다고 한다. 후대에 진실을 전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
25) 鄭摠(1358[공민왕 7]∼1397[태조 6]): 본관 청주. 1376년(우왕 2)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389년(공양왕 1) 병조판서, 1391년(공양왕 3) 이조판서를 거쳐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중국에 보낸 表箋文 대부분을 지었다.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1395년 태조 이성계의 誥命 및 印信을 줄 것을 청하러 사신으로 明에 파견되었다가, 표전문의 내용 때문에 大理衛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26) <朝鮮經國典序>: … 判三司事奉化伯 臣鄭道傳 作爲一書 名之曰經國典 以獻殿下, 宸心是悅 付諸有司藏之金樻, 爰命臣揔 序其編端. 臣揔竊伏惟念, 一代之興 必有一代之制作 苟非明良相得 有同魚水 則何以臻此焉. 今我殿下推赤心 委任宰相, 而三司公以天人之學 經濟之才 贊襄丕基 馳騁雄文 克成大典. 非唯有補 於殿下乙夜之覽 且爲子孫萬世之龜鑑也 …
이제, 정도전 본인의 말도 들어보자. 그는 <進朝鮮經國典箋>에서 그 편찬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과 같이 태조가 도승지를 통해 정도전에게 명령하였다.
삼가 도승지 신 韓尙敬이 신을 위해서 갖추어 아뢴 것[具啓]을 받았사온데, 그것은 신이 편찬한 ≪조선경국전≫을 올리라는[投進] 것이어서, 교서를 받들고 올립니다.27)
위 편찬 관련 사실을 종합하면 정도전은 1394년 5월 도승지 한상경으로부터 태조의 명을 전달받은 즉시 ≪朝鮮經國典≫을 바쳤다. 이는 이미 상당히 완성되었기에 가능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정도전의 순수한 私的인 작업이 아니라, 태조의 의지가 반영되고 그에 합치하는 公的인 저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8) ≪태조실록≫의 간략한 기사 등은 일련의 과정이 후대에 정리되면서 상당분량이 삭제되어 압축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7) <撰進朝鮮經國典箋{>: 臣言 伏承都承旨臣尙敬爲臣具啓 令臣投進所撰朝鮮經國典 奉敎投進者.
28) 정도전의 ≪조선경국전≫편찬작업의 성격은 중국에서 史書編纂의 성격을 유추하면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 司馬遷의 ≪史記≫, 班固의 ≪漢書≫는 공식역사서이지만 관찬이 아닌 私撰이다. 漢代에는 太史公이 歷史와 천문의 占候 등을 관장하였다. 宣帝代(BC73-49)에 太史令으로 개칭된 후에는 이들만이 역사를 서술한 것은 아니었다. 後漢代에는 천자 아래에서 문서를 담당한 蘭臺令史가 역사를 서술하였다. 唐 太宗代(627-648)에 ≪晉書≫를 편찬하면서 다수인이 참여하였다. 魏晉에서 唐까지는 역사편찬의 임무는 천자의 기밀문서를 취급하는 세습관리들이 맡았다. 그런데 北朝代(420-589)에서 唐 사이에 화가 생겼다. 관직이 낮은 著作郞에게 역사편찬의 책임을 맡겼지만, 실제 修史에서는 大臣이 監修國史가 되어 주관하였다. 당 태종은 秘書省 著作局 외에 별도로 사관을 禁中門下省側에 개설하여 專門史官이 아닌 他官이 사서를 편찬하였다. 이것이 이후 관례가 되었다(卓用國, 中國史學{史大要[탐구당, 1986], 74-5쪽). 그리고 중국사학자 李宗侗은 唐代에 편찬된 역사서를 “官撰 前代史, 私撰 前代史, 官撰 當代
史”로 구분하여 더욱 분명히 하였다(李宗侗/조성을 역, 중국사학사[혜안, 2009], 138쪽). 더 자세한 논의는 劉知幾의 ≪史通≫<外篇> [史官建置]를 참조하기 바란다(오항녕 역, 史通[역사비평사, 2012], 596-619쪽 참조). 따라서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편찬한 것은 개인이 한 사찬이지만 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정약용이 편찬한 ≪經世遺表≫등과는 분명히 대비된다. 중국사서 편찬에서 사찬과 관찬의 구별은 중국사 전공자인 金鐸敏(고려대 명예교수)의 조언 덕분에 알 수 있었으며, 이에 감사를 드린다. 단 오류는 필자의 책임이다.
그리고 개국 후와 ≪朝鮮經國典≫이 완성되었을 때 정도전의 관직과 역할에 주목하자. 개국 후에 그는 교고문에서 보듯이 1품인 숭록대부로, 문하시중 다음인 문하시랑 찬성사 등 정책결정, 관료인사, 국가재정, 군사지휘권, 왕의 교육과 교서의 작성, 역사편찬 등 국가경영에 필요한 핵심적 자리를 모두 겸직하였다. 또 奮義佐命開國 1등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判尙瑞司事와 世子貳師로 국왕의 위엄과 세자의 교육까지 관장하였다.29) 이러한 위상을 고려하면 정도전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朝鮮經國典≫을 편찬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즉 조선 건국 후 새 시대에 합치하는 새로운 정치체제와 그 지향점을 제시할 지침서의 필요성에 태조와 정도전은 공감하였고, 정도전은 이를 자임하고 태조는 이에 동조하여 ≪朝鮮經國典≫이 탄생하게 되었다.30)
≪朝鮮經國典≫이 정도전 개인의 저작이 아닌 점은 후대의 인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도전은 ≪經濟六典≫의 편찬에 깊게 관여하는데,31) 그 결과 후대의 ≪朝鮮經國典≫에 대한 주석에서는 ≪經濟六典≫과 혼동하거나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1791년(정조 15)에 어명으로 규장각 각신들이 간행한 ≪三峰集≫에서 ≪朝鮮經國典≫에 대해 “하륜이 다시 상정하여 「경제육전」이라고 이름하였다”32)라는 주석을 붙였는데, 그 원형은 ≪增補文獻備考≫의 “본조 태조 4년 정도전에게 명하여 경제육전을 편찬하게 하고 하륜에게 상정하도록 하였다”33)이다. 또 ≪朝鮮經國典≫의 육전 부분만 필사한 ≪經國六典≫34)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9) 문철영, 인간정도전(새문사, 2014), 174쪽.
30) 이는 공양왕 4년(1392)에 문하시중 정몽주가 편찬하여 공양왕에게 바쳤다는 “新律”도 같게 보아야 할 것이다(이는 오항녕 교수의 지적에 힘입었으며, 이에 감사한다). 즉 정몽주 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에 반대하는 온건파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高麗史≫卷四十六 <世家> 恭讓王 4年 ○二月 甲寅
守侍中鄭夢周進所撰新定律, 王命知申事李詹進講, 凡六日. 屢嘆其美, 謂侍臣曰, 此律, 須要熟究刪定, 然後可行於世也. 苟不熟審, 一切判付, 恐有可刪之條也. 法律一定, 不可變更. 講至以樂人倡妓爲室者, 杖八十離異, 政曹外敍用, 乃曰, 世實多有此等人, 深嘉納{之.
31) 金成俊, 韓國中世政治法制史硏究(일조각, 1985), 371-3쪽.
32) ≪삼봉집≫권14 <附錄> [事實]: 按河崙更詳定, 名以經濟六典(주17 참조).
33) ≪增補文獻備考≫권127 <刑考1> [刑制]: 本朝 太祖四年 命鄭道傳撰經濟六典 使河崙詳定 또 권135 <刑考9> [刑書]에서는 경제육전을 설명하면서 ≪조선경국전≫<헌전> [총서]를 발췌⋅인용하였다. ≪增補文獻備考≫는 1770년(영조 46)에 편찬된 ≪東國文獻備考≫를 보완하여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간행된 것이다. 본고와 관련하여 ≪東國文獻備考≫ <형고>는 전하지 않으나 해당 부분에 영조대 이후에 보완된 표시가 없으므로 ≪東國文獻備考≫의 기사이다.
3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奎1466; 1책 56장[크기: 34.5×21.7cm]); 전문과 서문 그리고 교고문 및 “正寶位~敎書”부분은 필사하지 않았으며, 필사자나 그 연도를 알 수 없고, 본문의 결락도 같다.
후대의 주석이나 필사본의 존재는 ≪朝鮮經國典≫이 태조의 의지를 반영하여 그의 묵인 하에 편찬되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朝鮮經國典≫은 태조의 즉위교서와 ≪경제육전≫의 가교로 인식되었고 또 ≪경제육전≫과 혼동되기도 하였다.35)
≪태조실록≫ 등에 ≪朝鮮經國典≫에 대한 기사가 소략한 이유는 ≪태조실록≫의 편찬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실록≫은 1413년 4월에 완성되었지만, 세종대와 문종대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쳤다.36) 이러한 과정에서 태종에 반기를 든 정도전과 국왕이 아닌 재상을 국정운영의 중심에 둔 ≪조선경국전≫에 대한 기사가 많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37)
2. 전체 저작에서 ≪朝鮮經國典≫의 위상
위에서 정도전은 최소한 태조의 암묵적 합의 내지 지원을 받고서 ≪조선경국전≫을 저술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건국 초부터 준비하였으며, 직접적인 계기는 7월 28일에 반포한 태조의 즉위교서이다. 정도전은 고려의 법제를 임시적으로 유지하면서(儀章法制, 一依前朝故事) 17조의 便民事目을 선언하였는데,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다.38)
①예제에 따른 종묘와 사직의 정비,
③과거와 교육제도의 정비
(㉮공적인 과거제, ㉯문과[3단계 및 시험과목 절차], 무과[시험과목 등] 각각 33인),
④冠婚喪祭의 정비,
⑤수령의 천거와 擧主의 처벌,
⑥忠臣⋅孝子⋅義夫⋅節婦의 勸奬과 旌表,
⑦鰥寡孤獨의 賑恤과 賦役의 면제,
⑧外方 吏屬의 서울 근무 폐지,
⑨국가재정의 정비 및 憲司의 監察,
⑩왕명을 전달하는 驛과 館의 사적 이용 금지,
⑪수군의 구휼과 생선과 소금의 專賣 금지,
⑫戶布의 감면과 국유 소금으로 비용 충당,
⑬國屯田의 폐지,
⑭형률과 사법기관의 정비 및 대명률의 수용,
⑮고려 田法[과전법]의 준수,
⑯慶尙道 水路貢物 감면.39)
3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奎1466; 1책 56장[크기: 34.5�1.7cm]); 전문과 서문 그리고 교고문 및 “正寶位~敎書”부분은 필사하지 않았으며, 필사자나 그 연도를 알 수 없고, 본문의 결락도 같다.
35) 윤훈표⋅임용한⋅김인호, 경제육전과육전체제의성립(혜안, 2007), 162쪽(김인호 집필).
36) ≪태조실록≫번역 해제 참조.
37) 末松保和, 앞의 글(주5), 186-7面 참조.
38) ≪태조실록≫태조 1년 7월 28일(정미).
39) 그 외에 ②왕씨 후예에 대한 대우, ⑰우현보 등의 처벌이 더 있다.
이 즉위교서는 이성계가 7월 17일 즉위한 후 최초로 선포한 개혁강령인데,40) 이를 정도전이 지은 사실은 그가 조선왕조의 설계자임을 극명히 보여준다.41) 위 조목은 구체성이 부족한 추상적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건국 후 불과 11일만에 새로운 제도를 완벽하게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의 운영방침을 제시하여 인심을 수습해야 한다. 그래서 정도전은 “편민사목”을 지어 국정운영의 방침을 선포하고, 새로운 제도의 완비는 뒷날을 기약하였다. 약 2년 동안의 구상과 노고 끝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찬술하여 태조에게바쳤다.42)
정총의 서문과 같이 태조와 정도전은 “明君과 良臣”이고,43) ≪조선경국전≫은 “새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법”으로, 정도전의 개인 저작이 아니라 조선건국이념을 지탱하는 법제의 방향을 제시한 공식적인 입법지침서이다.
정도전이 산 시대는 변화와 혁명의 시대이었으며, 그는 앞장서서 온몸으로 혁명을 이끌었다. 그 변화와 혁명은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성리학-을 사회에 뿌리 내리는 것과 사적인 영역에서 작동된 정치권력을 공적인 영역으로 옮기고 정치를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두 작업 역시 말과 행동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뒷받침이 있어야 지속되고 실천력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보급하기 위해 불교 비판의 선봉에 섰으며 1394년(태조 3)에 ≪心氣理篇≫을 저술하고 사망하기 직전인 1398년에 ≪佛氏雜辨≫을 저술하였다. 전자에서 心氣理는 각각 불교, 도교, 유교를 나타내는데, 천지자연의 이치인 ‘理’는 ‘心’과 ‘氣’를 포용하는 상위의 존재라는 점이 핵심이다. 모두 19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불씨잡변≫에서는 이론적⋅역사적 관점에서 불교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성리학의 우월성을 다방면에서 주장하였다.44)
40) 7월 20일에 사헌부에서 10개 조목의 개혁상소문을 올린 것 이외에 제도개혁과 관련된 기사는 없다.
41) 한영우, 앞의 책(주8), 54쪽.
42)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위 사목의 내용과 ≪조선경국전≫의 그것을 대조해야 한다. 하지만 ≪경제육전≫이 현존하지 않은 현실적인 한계가 있고 또 방대한 작업이므로 훗날을 기약한다.
43) 정도전은 42세인 1383년(우왕 9) 가을에 咸州[함흥]으로 이성계를 찾아가 만났고, 46세부터는 이성계가 정도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부터 함께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여 고락을 같이 하였다(한영우, 앞의 책[주8], 39-42⋅45-50쪽 문철영, 앞의 책[주29], 24-133쪽).
44) 한영우, 앞의 책(주8), 123-4쪽 및 130-5쪽 및 김병환 역해, 불씨잡변 조선의기획자 정도전의사상혁명(아카넷, 2013) 참조.
정도전의 핵심적인 저서로는 ≪불씨잡변≫, ≪조선경국전≫, ≪經濟文鑑≫을 들 수 있다. 이 3책은 별도의 것이 아니라 솥[鼎]의 세 다리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먼저 ≪불씨잡변≫에서는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여 성리학을 보급하기 위한 이념을 논하였다.45) 이어서 ≪조선경국전≫에서는 통치제도 전반을 다루어 신국가가 지향할 제도를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경제문감≫에서는 이념과 제도를 토대로 국왕과 관인이 해야 할 직무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였다. 정도전은 이 세 저작으로 ‘이념⋅제도⋅행동’의 삼위일체를 구축하여 당장 실천하면서도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새로운 국가제도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조선경국전≫은 변혁의 시대에 출생하여 출세와 유배 그리고 재기를 거쳐 “문명교체의 길을 여는 예언자적 상상력”46)으로 살아온 革命家 정도전이 그의 상상력을 현실에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냉철한 이성의 힘을 빌려 편찬한 법서이다.
3. 현존 ≪朝鮮經國典≫의 실체
앞서 末松保和는 현전하는 ≪조선경국전≫은 전체가 아니라 大序와 小序만을 채록한 것이며, 전체는 失傳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박병호는 소개만 하고 직접적인 평가를 유보하였으며,47) 金成俊은 현전하는 ≪조선경국전≫은 小序만 수록한 것이 아닌 完本이며, 정도전의 의도는 법전의 대강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경제육전≫에서 실현한 것으로 보아 비판하였다.48) 김인호는 “정도전은 ≪경제육전≫을 염두에 두고 태조 즉위교서를 반포한 이래 제도와 법을 제정하면서 체계화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에서 나온 ≪조선경국전≫은 처음부터 서문의 형태로 존재하였고 본문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49) 그리고 윤훈표는 “태조가 구폐를 혁파하고 체제를 일신하기 위해 육전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하고, 그 성과를 ≪조선경국전≫에 담도록 정도전에 명하였다”는 정총의 序文과 정도전이 주도한 군제개혁안은 1394년 2월에 제시되었는데, ≪조선경국전≫을 편찬할 때에는 군제개편이 진행 중인 사실을 들어 末松保和 견해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즉 ≪조선경국전≫의 내용은 그때까지 이룩한 성과를 정리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보았다.50)
45) 성리학 이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비판한 점은 한계다. 그러나 당시 성리학은 개인수양이 아닌 개혁의 이념으로 수용된 측면이 더 크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이는 정도전 개인의 문제가 아닌 당대의 한계로 보아야 한다.
46) 문철영, 앞의 책(주29), “제7장 혁명”의 부제를 그대로 옮겼다.
47) 박병호, “조선초기의 법원” 韓國法制史攷(법문사, 1974), 398쪽.
48) 金成俊, 앞의 책(주31), 373-4쪽(특히 주12).
49) 윤훈표 외, 앞의 책(주35), 161-2쪽(김인호 집필).
50) 윤훈표 외, 앞의 책(주35), 200-1쪽(윤훈표 집필).
정도전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선경국전≫의 문구에서 찾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조선경국전≫은 6典 아래의 개별 門에서 내용을 서술하였고, 문의 마지막에서 그 의도를 표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憲典> 외에 5전에 걸쳐 33개가 있으며 <표 1-1>과 같다.
<표 1-1> 저작 의도 표시 문구
典 門 내 용
治典5
2. 官制 故以此附於官制之末
4. 入官 故臣於此著之 俾後來知有成法 而得所持守焉
6. 軍官 節制使以下鎭撫兵馬之號 詳著于篇1]
7. 錢穀 其錢穀之所在 隨其任而書之 以見其經費之數焉
8. 封贈 承襲載在盟府 可考而書也2]
賦典10
3. 版籍 故臣著版籍之篇而倂論之
6. 賦稅 幸當無事閒暇之時 講而行之可也
8. 鹽法 其鹽場所在與所出之數備書焉 以憑{會計3]
9. 山場水梁 其山場水梁所在可考者 悉書之
10. 金銀珠玉銅鐵 臣於此取金銀所及鐵場 悉著于篇 以備參考焉
11. 工商稅 臣故備擧工商課稅之法 著之於此 擧而行之 在朝廷焉
13. 上供 臣於此 一以上供書之 從而著其說 俾後之人 知殿下節儉克私之美意焉
14. 國用 今悉書其所入之數 著之篇者 欲其用之也量入爲出 庶乎不至於妄費也
15. 軍資 臣故倂論其食之所自生 著之於篇 以爲足食之本焉
19. 蠲免 國家損分減免之法已自行之 著在甲令 有司宜當審而行之也
禮典12
2. 朝會 宜其勒成一代之典 昭示罔極焉 其使臣諸節 州郡守令迎命之禮及自 相見禮 各以類附焉
5. 耤田 臣悉著之于篇 以見殿下重穀之意焉
7. 文廟 惟殿下豐其餼饎 潔其器皿 以致尊師重道之意 則可得而書也
9. 燕享 國家置禮賓寺 以掌燕享 其酌獻之疏數 殽羞之豐儉 皆有定制 今悉著之
16. 貢擧 其武科醫科陰陽科吏科通事科 各以類附見焉
18. 求言進書 臣取其見聞之有徵者而書之
19. 遣使 其姓名可考者 悉書之4]
22. 旌表 臣故著篇名 苟有其事 續而書之可也
24. 冠禮 臣述格言 責成人 作冠禮篇
25. 婚姻 臣稽聖}經謹本始 作婚禮篇
26. 喪制 臣重人紀 愼大事 作喪制篇
27. 家廟 臣述格言 質神明 作祭禮篇
政典5
2. 軍制 臣先述歷代 而後及國家 作軍制篇
3. 軍器 國家置軍器監 專掌工匠之事 外至州郡 造軍器有年例焉 其數可考者書
4. 敎習 古今之制備 而敎習之法明 則兵可用也 作敎習篇
6. 賞罰 故臣作賞罰篇 必以公爲說焉
11. 馬政 臣取大易之著象詩雅之格言 作馬政篇
工典
11. 金玉石木攻 故言無微而可略 此實人主之所當知也 故臣倂書之 皮塼埴等工
1] ≪經濟文鑑≫<衛兵>에서 다루었다.
2] 본문에서는 개국공신을 간략히 언급하였다.
3] 태조의 즉위교서에서는 소금의 전매금지를 선언하였다.
4] 성명을 찾을 수 없다.
우선 위의 표현에서 과거이든 미래이든 시제를 나타내는 副詞(예 : 已, 旣/ 後, 將 등)를 찾을 수 없다. 만약 末松保和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33개소에서 최소한 한 번이라도 정도전의 의지, 즉 여기서는 간략히 기술하고 본격적인 저술은 다음을 기약한다는 의지나 미래형의 표현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하지 않다. 또 그 내용은 門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많다. 이는 ≪대명률≫을 요약한 <헌전>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표 1-2>와 같다.
<표 1-2> <헌전>의 저작 의도 표시 문구
門 내 용
2. 名例 其他名例雖多 皆以恩義情法 斟酌輕重而取其中焉 蓋用法之權衡也
3. 職制 故制官刑 儆有位 作職制
4. 公式 苟或違此 邦有常刑 作公式
5. 戶役 故詳其法而嚴其禁 條目俱存 咸可書也
6. 祭祀 此祭祀之禮旣載於禮典 而其律令又載於憲典者也
7. 儀制 故遵成憲 謹王度 作儀制篇
8. 宮衛 當從重典 擧常憲 懲不恪 作宮衛篇
9. 軍政 故明號令 戢暴亂 作軍政篇
10. 關津 本仁政 詰姦細 作關津篇
11. 廏牧 故當著令 使典守者知戒焉 作廏牧篇
12. 郵驛 苟有不體聖}意 非理作弊者 刑玆無赦 條目具存 故於此申論之
13. 盜賊 本性善 懲姦寇 作盜賊篇
14. 人命⋅鬪驅 蓋辟以止辟 欲竝生也 嗚呼仁哉 作人命鬪驅篇
15. 罵詈⋅訴訟 然聽訟者先明其德 使民畏服 遏惡懲忿 無訟可聽 然後民德厚矣 故作罵詈訴訟篇
16. 受贓⋅詐僞 然其刑律亦不可廢 故作受贓詐僞篇
17. 犯姦 禮以正之 刑以懲之 聖}人之重之也如此 後之爲紀法之宗者 其可忽諸
18. 雜犯 蓋慮愚民無知而輕犯 不欲罔民以刑之 其仁亦至矣 故作雜犯篇
19. 捕亡斷獄 故臣於總序旣已言之 而於此又本之 作捕亡斷獄篇
20. 營造 若此之類 誠\非聖}人之得已 則其期限程督 亦不可稽也
21. 河防 皆有法存焉 有司之所當知也
다른 5典과 달리 ≪대명률≫을 요약한 <헌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제를 나타내는 부사가 없다. 그렇다면 정도전은 집필 당시의 시점에서는 이를 보완한 새로운 저서를 편찬할 구상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경국전≫의 개별 문은 구체적인 규정보다는 추상적 내용을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末松保和는 현존하는 것과는 다른 “조선경국전”의 존재를 상정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큰 구상 속에서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경국전≫은 정도전 나이 53세, 건국 후 만 2년이 채 되지 않은 1394년 5월에 간행되었다. 국초의 상황에서 정도전이 완전한 법전을 편찬하는 것은 정황상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조선경국전≫은 그의 구상을 선언적으로 표명한 것이며, 차차 이를 구체적인 내용으로 저술할 계획이었다.
조선 건국의 주체로서 또 장차 조선이 지향해야 할 국가에 대한 원대한 구상은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는 재상제도에 대한 그의 저술에 잘 나타난다. 정도전은 국왕이 전권을 행사하는 국왕중심의 정치제도가 아니라 국왕이 재상과 상의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재상중심의 정치체제를 지향하였다. 이는 군주의 賢愚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나아가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현인을 재상으로 삼아 그에게 국정운영을 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1394년 6월에 찬진된 ≪經濟文鑑≫에서 구체화되었는데, 이는 ≪조선경국전≫ <治典> [宰相年表]에서 간략히 다룬 권력구조의 문제를 보완한 것이다. ≪經濟文鑑(상권)≫에서는 중국과 우리의 재상제도의 연혁과 득실을 설명하였고, ≪經濟文鑑(하권)≫에서는 대간, 위병, 감사, 수령의 직책을 논하였다. 또 1397년의 ≪經濟文鑑別集≫에서는 군주의 직책에 대해 논하였으며, 서문만 전해오는 ≪監司要約≫에서는 [補吏]에서 검토한 지방관의 규찰에 대해 논하였고,51) <치전>의 6. 軍官은 ≪경제문감(하)≫ <衛兵篇>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52) 만약 정도전이 1398년 57세의 나이로 비명횡사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구상을 구체화한 다른 저작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경국전≫은 건국 초의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 등으로 바쁜 와중에 서 정도전의 손을 거쳐 완성된 제도를 그대로 수록하면서53) 한편으로는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末松保和는 과대평가하였다.
Ⅲ. ≪조선경국전≫ 체재와 그 영향
1. ≪조선경국전≫의 체재와 내용
현재 널리 이용되는 “조선경국전”은 1791년(정조 15)에 간행된 ≪三峯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三峯集≫은 네 번 간행되었다. 그의 생전인 1397년에 시문을 묶은 “초간본) 삼봉선생집”이 간행되었고, 사후인 1465년에 여기에 다른 글도 추가한 “중간본) 삼봉선생집”이, 1487년에는 다시 보완한 “중간속간본) 삼봉선생집”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1791년(정조 15)에는 왕명으로 규장각학사들이 저작을 재편집하고 교정과 주석을 한 “삼간본) 삼봉집”이 간행되었으며, 1914년에는 그대로 속간되었다.54)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국문집총간 5”로 제공하고 있는 ≪三峯集≫의 저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2957본으로 대구에서 간행된 목판본이다.55)
51) 한영우, 앞의 책(주8), 125-129쪽 참조.
52) 한영우 역, 조선경국전(올재, 2014), 60쪽.
53) 예컨대, <治典> [官制]에서는 고려의 관청에서 당시까지의 관제를 연혁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54) 오용섭, “삼봉집의 간행과 편성” 서지학연구48(한국서지학회, 2011) 및 옥영정, ≪조선경국전≫의 간행과 서지학적 가치” 학술대회자료집 <삼봉 정도전과 조선경국전> (수원화성박물관, 2014) 참조.
55)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77년 “고전국역총서 120⋅121”로 (국역 삼봉집을 간행하면서 원문을 영인⋅수록하였다. 그때 원본과 다르게 詩文을 類別로 모아 재편집하여 ≪조선경국전≫은 권13, 14에 배치하여 혼란을 야기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90년 간행한 (影印標點)韓國文集叢刊, 제5책에 영인⋅수록되었으며, 현재 국고전번역원
(http://www.minchu.or.kr/itkc/Index.jsp)에서 번역, 원문, 원본을 검색⋅열람할 수 있다.
그리고 수원화성박물관에는 ≪三峯集≫에 수록되지 않은 독립된 ≪조선경국전≫이 소장되어 있다. 그 구성은 차례대로 箋文 3장[1장 결락], 敎告文 2장, 정총의 서문 2장, 본문 73장 등 총 80장이다[현존 79장]. 이 ≪조선경국전≫은 ≪三峯先生集≫ 중간본간행 이전에 독자적으로 간행한 초기판본으로 그 시기는 ≪三峯先生佛氏雜辨≫이 간행된 1457년 이전이며, 판각양식이나 정치적 사안을 고려하면 정도전 후손에 대한 禁錮가 해제된 1416년 이후 태종과 세종 연간(1419~1450)으로 추정된다.56)
≪조선경국전≫은 ≪三峯集≫ 권7, 8에 “조선경국전 상⋅하”로 수록되었으며, 정총의 서문은 본문의 마지막에 있다. 그리고 “敎告文”은 권14 <附錄>에 “撰進朝鮮經國典箋”은 권3 <箋>에 수록되어 있다. ≪三峯集≫과 수원화성박물관 소장의 “조선경국전”의 목차는 차이가 없으며, 또 결락된 <禮典> [輿服]과 <工典> [宮苑]도 같다. ≪三峯集≫에 수록된 ≪조선경국전≫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朝鮮經國典上(권7)
가. 君事: ①正寶位, ②國號, ③定國本, ④世系, ⑤敎書
나. 治典: ①摠序, ②官制, ③宰相年表, ④入官, ⑤補吏, ⑥軍官, ⑦錢穀, ⑧封贈承襲
다. 賦典: ①摠序, ②州郡, ③版籍, ④經理, ⑤農桑, ⑥賦稅, ⑦漕運\, ⑧鹽}法, ⑨山
場水梁, ⑩金銀珠玉銅鐵, ⑪工商稅, ⑫船稅, ⑬上供, ⑭國用, ⑮軍資, ⑯祿俸,
⑰義倉}, ⑱惠民典藥局, ⑲蠲免
라. 禮典: ①摠序, ②朝會, ③宗廟, ④社稷, ⑤耤田, ⑥風雲雷雨, ⑦文廟, ⑧諸神祀典,
⑨燕享, ⑩符瑞, ⑪輿服, ⑫樂, ⑬曆, ⑭經筵, ⑮學校, ⑯貢擧, ⑰擧遺逸, ⑱求
言進書, ⑲遣使, ⑳功臣圖形賜碑, ㉑諡, ㉒旌表, ㉓鄕飮酒, ㉔冠禮, ㉕婚姻,
㉖喪制, ㉗家廟
朝鮮經國典下(권8)
마. 政典: ①摠序, ②軍制, ③軍器, ④敎習, ⑤整點, ⑥賞罰, ⑦宿衛, ⑧屯戍, ⑨功役,
⑩存恤, ⑪馬政, ⑫屯田, ⑬驛傳, ⑭騶邏, ⑮畋獵
바. 憲典: ①摠序, ②名例, ③職制, ④公式, ⑤戶役57), ⑥祭祀, ⑦儀制, ⑧宮衛,
⑨軍政, ⑩關津, ⑪廏牧, ⑫郵驛, ⑬盜賊\, ⑭人命⋅鬪驅, ⑮罵詈⋅訴訟, ⑯受贓⋅
詐僞, ⑰犯姦, ⑱雜犯, ⑲捕亡⋅斷獄, ⑳營造, ㉑河防, ㉒後序
사. 工典: ①摠序, ②宮苑, ③官府, ④倉}庫, ⑤城郭, ⑥宗廟, ⑦橋梁, ⑧兵器, ⑨鹵簿,
⑩帳幕, ⑪金玉石木攻皮塼埴等工
아. 序文58)
56) 옥영정, 앞의 발표문(주 54) 참조.
57) 실제로는 戶役, 田宅, 婚姻, 倉}庫, 課程, 錢債, 市廛 전부를 다루고 있다(후술).
58)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선경국전≫은 進朝鮮經國典箋{, 敎告文, 序文, 본문의 순서이다.
≪조선경국전≫은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正寶位~敎書”와 “治典~工典”로 구분하여, 전자는 국왕과, 후자는 육전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이는 후술할 ≪經世大典≫에 따라 각각 “君事”와 “臣事”로 부를 수 있다. ‘君事’는 5개 항목이며, ‘臣事’는 102개 항목으로(<憲典> 後序 포함), 모두 10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臣事’의 각 육전에는 “摠序”를 두어 핵심적인 내용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개별항목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었으며, <憲典>에만 後序가 더 있다. 왕명으로 鄭摠이 지은 序59)가 마지막에 있으며, 정도전의 입장을 알 수 있는 <撰進朝鮮經國典箋>은 ≪三峯集≫ 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경국전≫의 구성은 元의 ≪경세대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경세대전≫은 1329년에 편찬에 착수하여 1331년 5월에 완성되었다. 周禮에 따라 天地春夏秋冬 6분으로 나누고 그 위에 蒙古局을 두어 7분주의를 취하였다. 명 초기에 失傳하여 전부가 전해오지 않으며 ≪國朝文類≫ 권40~42에 수록된 歐陽玄의 <進經世大典表>와 虞集의 <經世大典序錄> 등으로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大典>은 880권, <目錄>은 12권, <公牘[찬수 당시의 각종 공문]>, <纂修通議[범례]> 각각 1권이다. <君事>는 帝號, 帝訓, 帝制, 帝系로 4편, <臣事>는 治⋅賦⋅禮⋅政⋅憲⋅工典으로 6편, 총 1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臣事> [治典]은 20門, [賦典]은 21문, [禮典]은 32문, [政典]은 18문, [憲典]은 22문, [工典]은 22문으로 총 35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元史≫의 편찬에 활용되었으며, ≪永樂大典≫에서 일부 내용을 알 수 있다.60)
59) 이는 鄭摠의 문집 ≪復齋先生集(下)≫序와 ≪東文選≫卷之九十二 序에도 수록되어 있다. ≪復齋先生集≫과 ≪東文選≫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원문 등을 검색⋅열람할 수 있다.
60) 蘇振申, 元政書經世大典之硏究(臺北: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4), 22-5면 및 中華百科全書 → 元經世大典 항목[http://ap6.pccu.edu.tw/Encyclopedia_media/main-h.asp?id=2825&lp
age=1&cpage=1] 검색(蘇振申 집필).
≪조선경국전≫과 ≪國朝文類≫의 <經世大典序錄>에 수록된 ≪경세대전≫ <목록>을 비교
하면 <표 2-1~3>과 같다.61)
61) 門 앞의 숫자는 일련번호이며, 양자의 같은 門은 가능한 한 일치시켰다.
<표 2-1> ≪조선경국전≫과 ≪경세대전≫비교: 君事~賦典
經世大典 序 朝鮮經國典 나. 賦典
(1) 君事 1.摠序 1. 摠序
1. 帝號 1. 正寶位 2. 都邑(附錄 安南) 2. 州郡
2. 帝訓 2. 國號 3. 版籍 3. 版籍
3. 帝制 3. 定國本 4. 經理 4. 經理
4. 帝系 4. 世系 5. 農桑 5. 農桑
帝系 附錄 6. 賦稅(稅糧/夏稅/科差) 6. 賦稅
5. 敎書 7. 海運 7. 漕運
(2) 臣事 8. 鈔法(附錄 錢法)
가. 治典 9. 金銀珠玉銅鐵鉛錫礬鹼竹木等課10. 金銀珠玉銅鐵
1. 摠序 1. 摠序 10. 鹽}法 8. 鹽法
2. 官制 2. 官制 11. 茶法 9. 山場水梁
3. 三公 12. 酒醋
4. 宰相年表 3. 宰相年表 13. 商稅 11. 工商稅
5. 各行省 14. 市舶 12. 船稅
6. 入官 4. 入官 15. 宗親歲賜 13. 上供
7. 補吏 5. 補吏 14. 國用
8. 儒學敎官 15. 軍資
9. 軍官 6. 軍官 16. 俸秩 16. 祿俸
10. 錢穀官 7. 錢穀 17. 公用錢
10. 投下 18. 常平義倉 17. 義倉
11. 封贈 8. 封贈承襲 19. 惠民典藥局 18. 惠民典藥局
12. 承襲 20. 市糴糧草
13. 臣事 21. 蠲免(恩免差稅/災傷免差稅) 19. 蠲免
22. 賑貸(京師賑糶糧⋅紅帖糧/各處災傷賑濟)
君事는 각각 4항목으로 같으며 내용적으로도 유사하다. ≪조선경국전≫의 ‘正寶位’는 국왕의 덕목에 대해, ‘國號’는 기자와 홍범을 내세워 문명국가임을, ‘定國本’은 왕위세습원칙을, ‘世系’는 이성계의 조상의 음덕과 종친에 대한 배려를, ‘敎書’는 정치의 기준인 왕명의 중용성에 대해 말하였다.62) 이러한 구성은 기본적으로 ≪경세대전≫의 君事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의 상황과 정도전의 문제의식에 입각한 것이다.63)
<표 2-2> ≪조선경국전≫과 ≪경세대전≫비교: 禮典
다. 禮典 18. 朝貢
1. 摠序 1. 摠序 19. 瑞異 6. 風雲雷雨
2. 朝會 2. 朝會 20. 郊祀
3. 燕饗 9. 燕享 21. 宗廟 3. 宗廟
4. 行幸 22. 社稷 4. 社稷
5. 符寶 5. 耤田 23. 嶽鎭海瀆 8. 諸神祀典
6. 輿服 11. 輿服 24. 三皇
7. 樂 12. 樂 25. 先農
8. 曆 13. 曆 26. 宣聖}廟 7. 文廟
9. 進講 14. 經筵 27. 功臣祠廟 20. 功臣圖形賜碑
10. 御書 10. 符瑞 28. 諡 21. 諡
11. 學校 15. 學{校 29. 賜碑
12. 藝文 30. 旌表 22. 旌表
13. 貢擧 16. 貢擧 31. 釋 23. 鄕飮酒
14. 擧遺逸 17. 擧遺逸 32. 道 24. 冠禮
15. 求言 18. 求言進書
25. 婚姻
16. 進書 26. 喪制
17. 遣使 19. 遣使 27. 家廟
治典은 8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서에서는 총재, 즉 재상이 권력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권력의 직능별 분산, 역대 재상에 대한 포폄64), 능력주의의 인재등용, 시험-실력-에 따른 하급관리의 선발, 군사⋅재정제도의 개혁, 공신의 예우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62) 이하 ≪조선경국전≫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한영우, 앞의 책(주8), 115-122쪽을 요약하였다.
63) 이는 정전의 서술에서 잘 드러난다. ≪경세대전≫<정전>은 “軍制”외에 원의 대외정복사업을 서술한 “征伐”이 있는데, 정도전은 조선과 무관한 이 부분을 생략하였다.
64) 宰相年表는 ≪경제문감≫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었다.
賦典은 18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서에서는 국가재정의 원칙, 즉 국민부담의 완화, 공평부과, 건전한 재정구조 등을 강조하였다. 국가의 근본인 토지와 인구, 세입의 기본과 그 원천, 각종 세수와 그 감면 및 세수의 지출 또 빈민구제책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禮典은 2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서에서는 예악, 즉 질서와 그 실천에서 정성을 강조하였다. 국왕 및 제사, 외교, 교육과 과거, 언로, 풍속교화에 대해 언급하였다.
<표 2-3> ≪조선경국전≫과 ≪경세대전≫비교: 政典~工典
라. 政典 마. 憲典 바. 工典
1. 摠序 1. 摠序 1. 摠序 1. 摠序 1. 總序 1. 摠序
가. 征伐* 2. 名例 2. 名例 2. 宮苑 2. 宮{苑
나. 軍制 2. 軍制 3. 衛禁 3. 職制 3. 官府 3. 官府
1. 軍器 3. 軍器 4. 職制 4. 公式 4. 倉庫 4. 倉庫
2. 敎習 4. 敎習 5. 祭令 5. 戶役 5. 城郭 5. 城郭
3. 整點 5. 整點 6. 學規 6. 祭祀 6. 橋梁 7. 橋梁
4. 功賞 6. 賞罰 7. 軍律 7. 儀制 7. 河渠
5. 責罰 8. 戶婚 8. 宮衛 8. 郊廟 6. 宗廟
6. 宿衛 7. 宿衛 9. 食貨 9. 軍政 9. 僧寺
7. 屯戍 8. 屯戍 10. 大惡 10. 關津 10. 道宮
8. 工役 9. 功役 11. 姦非 11. 廏牧 11. 廬帳 10. 帳幕
9. 存恤 10. 存恤 12. 盜賊 12. 郵驛 12. 兵器 8. 兵器
10. 兵雜錄 13. 詐僞 13. 盜賊 13. 鹵簿 9. 鹵簿
11. 馬政 11. 馬政 14. 訴訟 14. 人命 鬪毆14. 玉工 11. 金玉石木
12. 屯田 12. 屯田 15. 鬪毆 15. 金工 攻皮塼埴
13. 驛傳 13. 驛傳 16. 殺傷 15. 罵詈 訴訟16. 木工 等工
14. 弓手 17. 禁令 16. 受贓 詐僞17. 搏埴之工
15. 急遞鋪 18. 雜亂 17. 犯姦 18. 石工
16. 祗從 14. 騶邏 19. 捕亡 18. 雜犯 19. 絲枲之工
17. 鷹房捕獵 15. 畋獵 20. 恤刑 19. 捕亡 斷獄20. 皮工
* 征伐: 平宋,高麗,日本, 21. 平反 21. 氈罽
安南,雲南,建都,緬,占城, 22. 赦宥 20. 營造 22. 畵塑
海外諸蕃,瓜哇,平倒剌沙 23. 空獄 21. 河防 23. 諸匠
24. 符籙 22. 後序
政典은 1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서에서는 군사제도가 도덕성에 바탕을 두어야 함을 역설하고, 병농일치의 군사제도, 중앙군과 지방군의 유기적 체계, 軍紀와 상벌, 궁성수비, 국경방어, 복무와 교통⋅통신 전반에 걸쳐 군사전략가의 경륜을 펼쳤다. 22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憲典은 ≪경세대전≫이 아닌 “대명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이에 대해서는 후술). 공전은 1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서에서는 재정운영, 경제활동의 대강을 다루었다. 궁궐에서의 儉朴, 관청의 건설과 여러 창고의 역할, 도로의 건설, 물품의 제조를 다루었다.
2. 六典體裁의 수용과 확립
天地春夏秋冬을 본받은 육전 또는 육전체재의 ≪주례≫가 이상국가인 주의 제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新의 王莽 등은 이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722년에 착수하여 738년에 완성된 ≪唐六典≫이다. 당 현종은 자필로 “理典, 敎典, 禮典, 政典, 刑典, 事典”을 쓰고 이에 따라 당시의 법과 제도를 분류한 典章書의 편찬을 명하였다. 하지만 당의 관제는 육전체재가 아닌 3省 6部 9寺 5監 16衛이었기 때문에, 결국 令과 式을 해당 관부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정리하였다.65) 그러나 ≪당률소의≫는 6분주의를 따르지 않고 <명례률>을 첫머리에 두고 황제를 중심으로 업무별로 12편으로 편제하여 총 30권으로 되어 있다.66) 당률에서 육부 중심인 명률로의 전환은 중국법제사에서 특기적인 사건이며, 이는 元나라의 영향이다. 1303년에 편찬된 ≪大元聖政國朝典章(약칭: 元典章)≫은 육전체재로 되어 있으며, 1346년에 반포된 ≪至正條格≫ <斷例>와 1367년 吳王元年律 그리고 ≪大明令≫과 ≪大明律≫로 이어졌다.67) 당의 영향을 받아 고려초에 도입된 6부[6조/6전]는 부분적인 명칭의 변화 등은 있었지만,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六部[曹]와 六典의 명칭과 순서의 변천 그리고 六部[曹]/六典의 역할을 핵심적으로 표현한 것은 <표 3~5>와 같다.68)
65) 김택민, “해제” 역주당육전상(신서원, 2003), 15-20쪽.
66) ≪당률소의≫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名例(권1-6), 衛禁(권7-8), 職制(권9-11), 戶婚(권12-14), 廏牧(권15), 擅興(권16), 賊\盜(권17-20), 鬪訟(권21-24), 詐僞(권25), 雜律(권26-27), 捕亡(권28), 斷獄(권29-30).
67) 植松正, “≪至正條格≫出現の意義と課題}” 法制史硏究會回報 12(明治大學, 2008), 109-110쪽 참조.
68) <표 3~5>는 末松保和, 앞의 글(주4) 및 도현철, 앞의 책(주1), 124쪽 주240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표 3> 고려~선초 6부[조] 명칭 변천
태조조(918~) 選官 兵官 民官 刑官 禮官 工官
성종조(982~) 吏部 兵部 戶部 刑部 禮部 工部
충렬왕 1(1275) 典理司 典簿司 版圖司 典法司
충렬왕24(1298) 銓曹 兵曹 民曹 刑曹 儀曹 工曹
충렬왕34(1308) 選部 民部 讞部
공민왕 5(1356) 吏部 兵部 戶部 刑部 禮部 工部
공민왕11(1362) 典理司 軍簿司 版圖司 典法司 禮儀司 典工司
공민왕18(1369) 選部 摠部 民部 理部 禮部 工部
공민왕21(1372) 典理司 軍簿司 版圖司 典法司 禮儀司 典工司
공양왕 1(1389) 吏曹 兵曹 戶曹 刑曹 禮曹 工曹
태 조 1(1392) 吏曹 兵曹 戶曹 刑曹 禮曹 工曹
경국전(1394) 治典 賦典 禮典 政典 憲典 工典
세 종 즉위년(1418) 吏曹 戶曹 禮曹 兵曹 刑曹 工曹
<표 4> 典章書의 六典 명칭 변천
周禮 治典 敎典 禮典 政典 刑典 事典
大唐六典 吏部 戶部 禮部 兵部 刑部 工部
高麗史 百官志 吏曹 兵曹 戶曹 刑曹 禮曹 工曹
經世大典 治典 賦典 禮典 政典 憲典 工典
周官六翼 典理 軍簿 版圖 典法 禮儀 典工
朝鮮經國典 治典 賦典 禮典 政典 憲典 工典
經濟六典(1397) 吏典 戶典 禮典 兵典 刑典 工典
經國大典(1486) 吏典 戶典 禮典 兵典 刑典 工典
고려도 당의 영향을 받아 태조대부터 3성[2성] 6부제를 채택하여, 성종대에 확정되었다. 원 간섭기인 충렬왕대에 6부가 폐지되고 元制로 개정되었으며 공민왕대에는 고려 초로 복귀하였다가 다시 元制로 회귀하였다. 공양왕 원년의 주례에 따른 6부체재는 조선 건국초에도 유지되었다. 조선 태조 원년까지 육조의 순서는 “이-병-호-형-예-공”의 순서이었는데, ≪조선경국전≫에서 처음으로 주례에 따라 “이-호-예-병-형-공”의 순서로 정하였고, 이것이 세종 즉위년(1418)에 정립되어 ≪경국대전≫으로 확정되었으며 ≪대전회통≫은 물론 ≪육전조례≫까지 이어졌다. 이는 법서상 육전 순서의변천과도 일치한다.69)
69) 조선시대 육전 이외의 편을 둔 법전은 <한성부수교>, <장예원수교>을 둔 ≪各司受敎≫가 유일하다. 실용적 목적에서 편찬된 ≪典律通補≫는 육전 외에 補編과 別編을 두어 내용을 보충하였다. 다만 용성이 중시된 ≪決訟類聚補≫등 私撰 詞訟法書에서는 大典詞訟類聚≫외에는 육전체재를 벗어나 소송절차에 따라 편제하였다.
<표 5> 고려~선초 6부[조]의 기능
高麗史 百官志 周官六翼 朝鮮經國典 序 經國大典 吏典
①吏曹: 掌文選勳封之政 ①典理: 黜陟百司 治典: 以經邦國 以治官府 吏曹: 掌文選勳封考課
以紀萬民[=吏] 之政
③戶曹: 掌戶口貢賦田 ③版圖: 出納{財賦 敎典: 以安邦國 以敎官府 戶曹: 掌戶口貢賦田粮
粮之政 以擾萬民[=戶] 食貨之政
⑤禮曹: 掌禮儀祭享朝 ⑤禮儀: 朝會祭祀 禮典: 以和邦國 以統百官 禮曹: 掌禮樂祭祀宴享
會交聘學校科擧之政 以諧萬民 朝聘學校科擧之政
②兵曹: 掌武選軍務儀 ②軍簿: 約束諸衛 政典: 以平邦國 以正百官 兵曹: 掌武選軍務儀衛
衛郵驛之政 以均萬民[=兵] 郵驛兵甲器仗門戶管鑰
之政
④刑曹: 掌法律詞訟詳 ④典法: 平決刑獄 刑典: 以詰邦國 以刑百官 刑曹: 掌法律詳讞詞訟
讞之政 以糾萬民 奴隸之政
⑥工曹: 掌山澤工匠營 ⑥典工: 工匠營作 事典: 以富邦國 以任百官 工曹: 掌山澤工匠營繕
造之政 以生萬民[=工] 陶冶之政
육조[부]의 기능에 대해서는 ≪高麗史≫와 ≪經國大典≫은 구체적이지만, ≪周官六翼≫과 ≪朝鮮經國典≫에서는 추상적이다. 이 차이는 편찬의 목적과 전적의 성격 차이에 연유하는 것으로 전자는 현실의 제도를, 후자는 이상적 제도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관육익≫에서는 6부의 핵심적인 사항만 초록하여 현실의 절박함이 잘 드러난다.
중국 고대의 주례에 연원하는 육분체재는 고려 초기부터 수용되어 국가기구, 즉 관료제도를 조직하는 중요한 원리로 작동하였다. 그리고 원 간섭기에는 명칭도 바뀌고 폐지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고려는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초기의 6부를 회복하였다. 고려 6부의 순서는 주례와는 달리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조선경국전≫에서는 주례에 따랐으며, 이는 ≪경제육전≫에 반영되었고 ≪경국대전≫에서 확립되어 조선 전시기를 규정하였다. 정부조직과 법전의 편제에 ≪조선경국전≫이 미친 영향은 크고 분명하였다.
3. ≪大明律≫의 수용과 <憲典>
법 통일의 움직임은 먼저 형사법 분야에서 태동되었다. 1377년(우왕 3) 2월에 모든 형사재판은 원의 ≪至正條格≫을 따르도록 했고, 1388년에 典法司에서는 중앙과 지방에서 형벌을 집행할 때에는 전법사에 보고하도록 하고 특히 명률과 원의 ≪議刑易覽≫을 참작하여 율전을 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형사법의 통일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대명률로 귀일되었다.
≪조선경국전≫ <헌전>은 ≪경세대전≫이 아닌 ≪대명률≫을 직접적으로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摠序”외에 “後序”가 있는 점에서 다른 5전과는 많이 다르다. <헌전>은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을 집성한 형법전이다. ≪조선경국전≫ <헌전>과 ≪대명률≫ <형률>의 비교는 <표 6>과 같다.
<표 6> 헌전과 대명률 비교
經國典 大明律 經國典 大明律 經國典 大明律
1. 摠序 10. 關津 15. 關津(11) 16. 受贓 23. 受贓(11)
2. 名例 1. 名例(47#) 11. 廏牧 16. 廏牧(11) 詐僞 24. 詐僞(12)
3. 職制 2. 職制(15) 12. 郵驛 17. 郵驛(16) 17. 犯姦 25. 犯姦(10)
4. 公式 3. 公式(17) 13. 盜賊 18. 盜賊(28) 18. 雜犯 26. 雜犯(11)
5. 戶役* 4. 戶役(15) 14. 人命 19. 人命(20) 19. 捕亡 27. 捕亡( 8)
6. 祭祀 11. 祭祀( 6) 鬪毆 20. 鬪驅(22) 斷獄 28. 斷獄(29)
7. 儀制 12. 儀制(20) 15. 罵詈 21. 罵詈( 8) 20. 營造 29. 營造( 9)
8. 宮衛 13. 宮衛(17) 訴訟 22. 訴訟(12) 21. 河防 30. 河防( 4)
9. 軍政 14. 軍政(20) 22. 後序
# 대명률 편명 다음 숫자는 조문수임.
* 戶役: 田宅(11), 婚姻(18), 倉}庫(24), 課程(8), 錢債(30), 市廛(5)편 전부 언급.
<헌전>에서 고전인 ≪당률소의≫나 모본인 ≪경세대전≫도 아닌 ≪대명률≫을 받아들인 것은 당시 정도전 등을 비롯한 신진사대부의 문제의식과 직결되어 있다. 그들은 고려말 사회의 혼란을 법질서의 회복, 즉 형사법제의 정비를 통하여 극복하려고 하였다. 이때 중국의 형률을 수용하는 것은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일 뿐만 아니라 삼국 이후 율령을 수용한 경험에 비추어 무리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대명률≫이 ≪지정조격≫, ≪의형이람≫ 등 원의 법전을 제치고 선택되었다. ≪대명률≫의 수용은 원명교체의 정치적 변화와 함께 ‘당률’로 복귀하여 유교이념을 살린 ≪대명률≫의 성격 등 때문이었다.70) 그렇다고 해서 <헌전>이 ≪경세대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총서를 둔 것과 “名例”에서 전체 47개 조문 중에서 첫머리의 五刑, 五服71), 十\惡, 八議를 다룬 것은 ≪경세대전≫의 영향이다. ‘총서’에서는 형벌에 대한 일반론을 서술하고 있으며, 법을 몰라 죄를 짓는 백성들이 없도록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어서 ≪대명률≫ 30권을 차례로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호역에서는 ≪대명률≫ <호률> 전 6권 모두를 다루었는데, 이는 경제생활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人命과 鬪毆 등 네 부분에서는 내용이 서로 관련이 있는 ≪대명률≫ 2
권을 1개로 묶어 설명하였다. <후서>에서는 禮⋅法[典⋅律] 병용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대명률≫ 역시 ≪조선경국전≫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태조의 즉위교서에는 대명률을 적용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교서의 내용72)만으로는 대명률의 전면적 수용으로 볼 수 없고, 일반적 법원으로 대명률을 원칙적으로 승인한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대명률을 직해하면서 내용에 대한 이해가 증대되어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조문들에 대한 판단을 하여 아예 조문 전체를 직해하지 않거나 일부를 생략하거나 조선의 법과는 다르다는 찬자의 의견을 부기하였다.73) 그리고 세종 연간에 ≪大明律講解≫가 수입⋅활용되면서 대명률에 대한 이해 및 의존도가 높아져 결국 대명률이 ≪경국대전≫ <형전> 첫머리인 [用律]門에 “用大明律”로 규정되어 일반법으로 확정된 것이다.74)
70) 조지만, 조선시대의형사법 대명률과국전(경인문화사, 2007), 34-8쪽 참조.
71) 五服은 조문이 아니지만, 친족의 범위를 나타내기 때문에 수록하였다.
72) ≪태조실록≫태조 1년 7월 28일(정미): … 一. 前朝之季, 律無定制, 刑曹⋅巡軍⋅街衢
各執所見, 刑不得中. 自今刑曹, 掌刑法⋅聽訟⋅鞫詰, 巡軍掌巡綽⋅捕盜⋅禁亂. 其刑曹所決, 雖犯笞罪, 必取謝貼罷職, 累及子孫, 非先王立法之意. 自今京外刑決官, 凡公私罪犯, 必該大明律, 追奪宣勑者, 乃收謝貼 該資産沒官者, 乃沒家産. 其附過還職⋅收贖解任等事, 一依律文科斷, 毋蹈前弊 ….
73) 차와 소금의 專賣를 규정한 課程은 전혀 직해가 되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 원문과 직해가 다르거나 직해를 하면서 적용할 수 없음을 부가한 조문이 상당하다. 자세한 것은 조지만, 앞의 책(주70), 377-9쪽 참조.
74) 조지만, 앞의 책(주70), 39-43쪽 정긍식, “조선전기 중국법서의 수용과 활용” 서울대
학교법학, 50-4(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09) 참조.
Ⅳ. 결 론
본고에서는 정치적⋅사회적 변동기인 여말선초에 법제정비로 혼란한 사회를 극복하고 주례의 육전체재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려는 과정에서 정도전이 1394년에 편찬한 ≪조선경국전≫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경국전≫은 사찬이지만, 관련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태조 이성계와의 암묵적 약속 내지 동의 아래에 수행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정도전은 태조 즉위교서에서 선언한 “편민사목 17조”에서 밝힌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하여 ≪조선경국전≫에서 새로운 국가가 지향할 입법의 大綱만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차례차례 저술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조선경국전≫에서는 간단한 “宰相年表\”가 이듬해 저술한 ≪경제문감≫에서는 자세히 서술된 점에서 분명하다. 만약 정도전이 1397년에 살해되지 않았으면 ≪조선경국전≫을 잇는 방대한 저서를 편찬하였을 것이다.
≪조선경국전≫의 육전체재 등은 원의 ≪경세대전≫의 영향을 받았다. 육전체재는 이상적인 제도로 여겨진 주례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당육전≫에서 형식적으로 확립되었다. 고려에서도 당제에 따라 삼성육부를 취하는 등 일찍부터 수용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명칭과 순서도 달라지는 등 변형되었다. ≪조선경국전≫의 육전의 명칭은 ≪경세대전≫과 같고, 순서는 ≪주례≫와 일치한다. 이 명칭과 순서는 세종대의 관제개정과 ≪경제육전≫에 그대로 반영되어, ≪경국대전≫에서 ≪대전회통≫까지 조선시대 관료조직을 규정하였다. 다만 ≪조선경국전≫ <헌전>은 ≪경세대전≫이 아닌 ≪대명률≫ 30권의 내용을 요약하였다. 이는 여말선초에 ≪대명률≫이 형사일반법으로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태조의 즉위교서에서는 ≪대명률≫을 우선 관인의 범죄에 대해서만 적용하고 나아가 점진적으로 확대할 것을 선언하였다. ≪조선경국전≫에서는 보편적 적용을 사실상 확정하였고, 동시에 ≪대명률≫을 이두로 직해하면서 조문의 적실성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나아가 개별사건에 대해 ≪대명률≫을 적용하면서 이해가 심화되고 그 위상은 굳건해졌으며, 세조대에 ≪경국대전≫ <형전>을 편찬하면서 일반법으로 확고히 되었다.
본고에서 ≪조선경국전≫의 체재 등 구조만 다루고 개별내용을 세밀히 비교⋅검토하지 않은 것, 특히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 나아가 ≪경국대전≫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것은 분명 한계이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른 법 없다”는 속담에 기대어, 우선 가설을 제시해 보았다. 개별조문을 치밀히 분석하여 본고의 가설을 검증할 것을 약속하거나 기대한다.
투고일 2015. 4. 25 심사완료일 2015. 5. 19 게재확정일 2015. 5. 29
114 ?서울대학교 法學? 제56권 제2호 (2015. 6.)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世宗實錄≫, ≪唐律疏議≫, ≪大明律≫.
鄭道傳, ≪三峯集≫, 민족문화추진회 편, (影印標點)韓國文集叢刊, 제5책, 1990.
鄭摠, ≪復齋先生集≫, 민족문화추진회 편, (影印標點)韓國文集叢刊, 제7책, 1990.
≪經國六典≫(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466).
김병환 역해, 불씨잡변: 조선의 기획자 정도전의 사상혁명, 아카넷, 2013.
한영우 역, 조선경국전, 올재, 2014.
金成俊, 韓國中世政治法制史硏究, 일조각, 1985.
김인호, “김지의 주관육익 편찬과 그 성격”, 역사와 현실 40, 한국역사연구회, 2001.
김택민, “해제”, 역주 당육전(상), 신서원, 2003.
都賢喆, 高麗末 士大夫의 政治思想硏究, 일조각, 1999.
, “여말선초 개혁사상의 전개와 ?周禮?”,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한국 중세의
정치사상과 周禮, 혜안, 2005.
문철영, 인간 정도전, 새문사, 2014.
박병호, “조선초기의 법원”, 韓國法制史攷, 법문사, 1974.
박병호, 한국법제사, 민속원, 2012.
연정열, 한국법전사, 학문사, 1997.
오영교 편, 조선 건국과 경국대전체제의 형성, 혜안, 2004.
오용섭, “삼봉집의 간행과 편성”, 서지학연구 48, 한국서지학회, 2011.
옥영정, “?조선경국전?의 간행과 서지학적 가치”, 학술대회자료집 <삼봉 정도전과
조선경국전>, 수원화성박물관, 2014.
윤훈표⋅임용한⋅김인호, 경제육전과 육전체제의 성립, 혜안, 2007.
정긍식, “유가법사상과 경국대전의 편찬”, 권연웅 외 편, 한국유학사상대계(8): 법사
상편, 한국국학진흥원, 2008.
, “조선전기 중국법서의 수용과 활용”, 서울대학교 법학, 50-4, 서울대학교 법학
연구소, 2009.
정호훈, “조선전기 법전의 정비와 ?경국대전?의 성립”, 오영교 편, 조선 건국과 경국
대전체제의 형성, 혜안, 2004.
조지만, 조선시대의 형사법: 대명률과 국전, 경인문화사, 2007.
≪朝鮮經國典≫과 朝鮮初期 法制整備 / 鄭肯植 115
최종고, “정도전의 법사상”, 법사와 법사상, 박영사, 1980.
卓用國, 中國史學史大要, 탐구당, 1986.
韓永愚, 鄭道傳思想의 硏究, 개정판: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지식산업사, 2000.
허흥식, “金祉의 選粹集⋅周官六翼과 그 價値”, 奎章閣 4, 서울대학교 규장각, 1980.
劉知幾/오항녕 역, 史通, 역사비평사, 2012.
李宗侗/조성을 역, 중국사학사, 혜안, 2009.
蘇振申, 元政書經世大典之硏究, 臺北: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4.
麻生武龜, 李朝法典考, 朝鮮總督府 中樞院 編, 1936.
末松保和, “朝鮮經國典私考”, 學叢, 京城帝國大學文學會, 1943.
, “朝鮮經國典再考: 李朝の法源に關する一考察”, 末松保和著作集6: 朝鮮史
史料, 吉川弘文館, 1997[원: 1951].
植松 正, “≪至正條格≫出現の意義と課題”, 法制史硏究會回報 12, 明治大學, 2008.
淺見倫太郞, 朝鮮法制史稿, 東京: 巖松堂書店, 1921.
花村美樹, “經濟六典について”, 法學論纂, 京城帝國大學文學會, 193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e-kyujanggak.snu.ac.kr/main.jsp).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한국고전번역원(http://www.minchu.or.kr/itkc/Index.jsp).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aks).
中華百科全書→ 元經世大典 항목:[http://ap6.pccu.edu.tw/Encyclopedia_media/main-h.
asp?id=2825&lpage=1&cpage=1]
(이상 전자자료는 2015. 6. 1. 최종 검색).
116 ?서울대학교 法學? 제56권 제2호 (2015. 6.)
<Abstract>
Chosunkyeongkukcheon and the Organization of
Legal System in the Early Chosun Dynasty
Jung, Geung Sik*
75)
This paper proves that Chosunkyeongkukcheon(朝鮮經國典) was compiled officially
in communion between King Taejo and Chung Tocheon(鄭道傳) rather than
privately, with the help of the historical materials and the tradition of compilation
in China. Chung’s idea to establish a new country was expressed in his major works,
such as BulssiJabpyeon(佛氏雜辨), Kyeongchemunkam(經濟文鑑), and Chosunkeongkukcheon.
He declared the outline of the ruling system that the Chosun
Dynasty should aim for. This paper also proves that Chosunkyeongkukcheon was
not the abstract of the preface but the whole text, as opposed to the argument of
Suematsu Yasukazu(末松保和). The system of Chosunkyeongkukcheon originated in
the sextant system of Churye(周禮) and was directly influenced by Kyeongsedaecheon(
經世大典) of the Won(元) Dynasty. The order of Chosunkyeongkukcheon
which was based upon Churye was reflected in the reform of government
organization in the ruling period of King Sejong and became the prototype of the
compilation of law books in the Chosun Dynasty. The body of Taemyeongyul(大
明律) was introduced in the chapter of Heoncheon in Chosunkyeongkukcheon,
which shows that Taemyeongyul was being received as general criminal law in the
Chosun Dynasty.
Keywords: Chung Tocheon, Chosunkyeongkukcheon, Kyeongcheyukcheon, Reception
of Taemyeongyul, sextant system of Code, Kyeongsedaecheon
* Professor, College of Law / School of Law, Seoul National University.
'09 정도전 三峯集'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타0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정도전이 꿈꾼 나라 - (0) | 2018.01.28 |
---|---|
기타07) 삼봉 정도전의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 -나대용- (0) | 2018.01.28 |
기타05) 삼봉 정도전의 의식세계(意識世界) 연구- 해배(解配) 이후 조선 건국 시기를 중심으로 - (0) | 2018.01.28 |
기타04) 정도전 사상과 현대 한국정치-정치가 양성을 중심으로- (0) | 2018.01.28 |
기타03) 三峯 鄭道傳 詩의 表現 樣相과 美意識 (0) | 2018.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