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기타07) 삼봉 정도전의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 -나대용-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8. 21:37

 

삼봉 정도전의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

 

유학과 박사1기 나대용

 

목차

1. 서론

2. 정도전과 유교국가 조선의 500년 역사

3. 유교국가 건설의 초석 - 민본사상

4.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1) - 혁명론

5.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2) - 闢佛論

6.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1) - 중앙집권적 재상중심론

7.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2) - 관료선발제도, 교육

8. 결어

 

 

1. 서론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조선의 건국이념과 정치, 경제제도를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정도전이 틀을 잡은 조선의 정치, 경제제도는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실천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도전이 정비하고 만든 정치, 경제제도가

어떻게 500년의 세월 속에서도 굳건히 유지될 수 있었을까?

특히 조선조 정치제도에 나타난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오늘날 민주화의 격랑 속에 시달리는 현대 한국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의 근본 사상은 유학, 특히 주자학이다.

정도전은 중국의 주자학을 이용하여 조선조 건국의 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업적은 전 세계를 통 털어서 전무후무한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고려 말기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조선 유학의 비조라고 불리는 정몽주 까지도 당시에 배불소(排佛疏)를 올린 글에서

夷狄之敎이다. 無父無君, 潔身亂倫이다.

화복.윤회설이 무근하다.’는 등등일 뿐이고

참으로 이론적, 학술적으로 불교를 타도할 만한 논증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의 질긴 고리를 끊고 새로운 유교의 나라를 건설한 정도전은

조선유학사에서 제일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2. 정도전과 유교국가 조선의 500년 역사

정도전은 불교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당시 성리학자들처럼 불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정도전이 당시 융성하던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고

중국에서도 전혀 전례가 없는 철저한 유교 국가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당시로서는 누구도 꿈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몽주로부터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학통은 오히려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그 만큼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즉 당시의 순수 성리학자들 조차도 철저한 유교국가의 건설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도전은 개인의 출세와 영화를 위하여

불가능한 유교국가의 건설을 억지로 조장하고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500년의 역사는 정도전의 판단

(철저한 유교국가의 건설)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울러 정도전의 이러한 판단은

개인의 출세와 영화를 위해서 생각해 낸 작은 술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그의 판단은 국가의 500大計를 내다본 절묘한 선견지명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3. 유교국가 건설의 초석 - 민본사상

정도전은 여말의 철학, 정치, 경제의 혼란을 수습하는 길은

철저한 유교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확신은 정몽주를 비롯한 당대의 성리학자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들과 다른 점은 어떻게 누구와

철저한 유교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서 있었다는 점에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철저한 유교국가의 신왕조를 열 적임자로 판단하였고

그 판단이 적중하였다는 것은 조선 500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또한 정도전은 어떻게 철저한 유교 국가 건설의 초석을

놓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이미 서 있었다.

그것은 유교의 핵심사상인 민본사상이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민은 국가의 근본 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유교의 민본사상은 정도전에 의해서

민은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명확한 지침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군주가 백성을 하늘로 떠받드는 나라. 이런 나라의 군주를 聖君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민본사상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당연히 聖君만들기로 이어진다.

 

4.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1) - 혁명론

민은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지침은 <<경국 대전>>에 그대로 옮겨졌는데,

군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지침은 그냥 보아 넘길 글귀가 아닐 것이다.

이 지침은 군주가 민을 하늘로 섬기지 않았을 때

언제든지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침은 조선왕조의 모든 군주가

명심하지 않을 수 없는 실질적인 하늘의 명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이러한 내용을 <<조선 경국전>>에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人君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 만일 천하만민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긴다.....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군주가 통치하는 나라의 헌법에 민은 군주의 하늘이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라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런 헌법을 가지고 있는 조선을

과연 전제주의 국가로만 치부할 수 있는지 자못 의문이 든다.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은 유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을

조선의 헌법에 명기함으로서 구체적 실현의 틀을 갖추게 된다.

 

5.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 (2) - 闢佛論

정도전은 <<心問天答>> <<心氣理篇>><<佛氏雜辨>>

세 편의 논문으로 당시 성행하던 불교를 철학적으로 공격하였다.

정도전의 위 闢佛논문들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볼 때 불교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사회, 정치혁명의 한 수단으로 볼 때는

시대적 요청으로서 불가피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오늘날의 평가가 내려져 있다.

불교의 철학적 이론구조에 대한 평가가 오늘날에도 이러한 것을 보면,

고려 말기에는 불교철학이론에 대한 신뢰가 지금보다 훨씬 농도가 짙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예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이색은 불교를 공공연히 신봉하였고,

東方理學元祖로 추앙받던 정몽주마저도 斥佛에 온건적이었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군주들도 불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신봉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보면 조선이라는 철저한 유교국가의 건설은

정도전을 비롯한 소수의 闢佛論者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평가가 어찌하던 정도전의 위 闢佛논문들은

당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그 이유는 정도전의 闢佛논리가 유불도 삼교를 원리적으로 파헤치어

유가의 천인성명, 이기오행의 철리로써 釋老 양가의 교의가

근본적으로 그릇된 것이라 만인 앞에 설파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도전의 이 闢佛論이 세상에 발표된 지 5백 수 십년이 지났지만

그의 이론을 시비하거나 비판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정도전의 벽불논리는 비판되고 있지만,

불교이론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보다 당시가 훨씬 더 깊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의 벽불논리가 당대에 비판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벽불논리에 탁월한 철학적 기반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근거로 정도전이 벽불론을 주장했다는

오늘날의 연구는 다시 정밀히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쨋튼, 당대의 수많은 불교인들에 의해서도

반박되지 못할 정도의 깊이 있는 정도전의 벽불론은

혁명론과 더불어 유교국가 건설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1) - 중앙집권적 재상중심론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은 중앙정부의 행정체제론과 관료선발제도에서 완성된다.

귀족이나 호족 등의 폐해가 심각했던 고려 말의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중앙정부가 필요했다.

중앙정부의 수장은 군주이다.

군주는 종묘와 사직이 의지하여 돌아가는 곳이며

자손과 臣庶가 우러러 의뢰하는 존재로서 국가의 상징이며

국민통합의 구심체인 元首이다.

따라서 군주는 가장 존귀하고

천하의 인민과 천하의 토지를 소유하는 막강한 권력자인 동시에

최대의 부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군주의 이러한 막강한 권한은 실질적으로는 두 가지로 제한된다.

첫째는 재상을 선택하는데 있다.’(人主之職, 在擇一相)

둘째는 재상과 政事를 협의. 결정하는데 있다.’(人主之職, 在論一相)

그러나 政事를 협의하는데 있어서도 모든 문제를 재상과 협의. 처결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문제에 관해서만 협의할 권한이 있는 것이며,

작은 일들은 재상의 독자적인 처리에 맡겨져야 한다.

이제 유교국가 건설의 초점은 어떤 사람이 재상이 되어야 하며,

그 재상은 어떻게 국정을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모아진다.

재상의 자질에 대해서 정도전은 <<경제문감>>() 재상에서 자세히 명기하고 있다.

재상의 권한과 국정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조선 경국전>> () 치전과

<<경제문감>>() 재상에서 자세히 명기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유교국가 조선에 있어서

재상은 군주와 쌍벽을 이루는 실질적인 수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여러 왕조들도 왕과 재상이라는 중앙행정체제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조선의 재상처럼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 받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역대 조선의 재상들이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는지는

역사적 고증을 거쳐 연구되어야 할 것이나,

정도전의 이런 재상중심론이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 그대로 기록되었고,

조선이 議政府제도에 의해서 국정이 처리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재상중심론이 조선조 중앙행정체제의 이론적 중심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2) - 관료선발제도, 교육

정도전은 관료선발제도에 대해서 <<조선 경국전>> () 치전, 예전과

<<경제문감>>() 등에서 자세히 명기하고 있다.

정도전의 관료선발제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眞儒에 의한 . 일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周禮>>에서 취한 것이다.

眞儒에 의한 . 일치란 잘 교육시킨 선비()를 관료로 뽑는다는 것이다.

이때 교육의 전적인 내용은 유교이므로,

유교로 교육받아 유교의 근본원리를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는 자(眞儒)가 정치를 담당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교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자학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주자학을 참된 인간 교육의 학문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이런 참된 인간에 의해서 정치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이와 같은 주자학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관료선발제도와 교육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주자학이 관학화된 것을 의미한다.

조선조 500년의 세월동안 관학화된 주자학이 유지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주자학의 효용가치가 당대인들에 의해서 인정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주자학은 조선을 이끌어가는 진정한 엘리트 양산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8. 결어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유교국가 건설의 설계자이자 현장지휘감독이었다.

즉 그는 유교의 근본원리를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유교의 사회적 효용가치를 꿰뚫고 있었고,

이런 통찰력에 의해서 멸사봉공의 자세로

유교국가 건설에 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周代이래로 한번도 현실화되지 못한

이상적인 유교국가(민본주의)를 건설코자 하였으며,

혁명론, 벽불론, 중앙집권적 재상중심론,

관료선발제도 등을 통해서 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은 오늘날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늘날의 민주자본주의가 이상적인 체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민주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를 설득력있게 내 놓는 사람도 없다.

이런 상황은 고려 말기와 너무도 흡사하다.

즉 고려 말기에도 불교의 병폐를 직시하고 있었으나,

이를 일소하고 새로운 이상적 모델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것은

누구도 하지 못하는 과업이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국가의 요체가 관료에 있다고 본 것이다.

어떻게 진정으로 민에 봉사하는 관료를 안정적으로 영입할 것인가?

이것은 인간을 참되게 육성할 수 있는 학문이 존재하고,

이 학문이 국가적으로 적극 교육됨으로서 가능하다.

불교는 그런 학문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학문은 주자학이어야 한다는 것이 정도전의 판단이었고,

그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조선조 500년이라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민주자본주의체제의 진정한 문제점도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체제하에서는 참된 인간 육성의 길이 막혀 있다는 데에 있다.

조선 500년 동안 관학으로서 인재를 양성해온 유교, 주자학이

오늘날 주목받아야 하는 근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유교, 주자학은 서양철학에 의해서 정당한 학문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유교, 주자학의 근본원리들은

오늘날의 서양 철학적 학문경향에 의해 대부분 비학문적 위치로 밀려 난 상태이다.

오늘날의 서양 철학적 학문경향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증명, 증거 없이는 진리도 없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오늘날의 유교, 주자학은 서양철학의 근본경향과 일대 접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서양철학과의 끈질긴 투쟁을 통해서 현대의 진정한 학문적 지위를 회복함으로서,

유교. 주자학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

즉 참된 인간 육성의 유일한 길을 이 세상에 밝게 드리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