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계 여행 - 2) 장가계 여정 및 개요 -
2018/4/25
03:15 야탑 콜택시(₩69,0000) -> 04:15공항도착 ->
05:15 인천 제1터미날 3층출국장 단체 8인MT -> 하나투어 안내(중국 동방항공)
07:45 인천ICN MU5050 -> 08:15 연대YNT(1:30비행, 1:45대기환승수속,
기내식샐러드제공) 10:00 연대YNT MU9943 -> 12:40 장가계DYG
(2:40비행, 기내식제공) -> 장가계에서 중식13:20 ∼ 14:10(유람, 쌈밥정식)
-> 14:10∼15:00 버스로 무릉원구로 이동
2_1) 장가계 여정
새벽 5:15 일행 공항MT여서 3:30콜택시 예약,
인천에서 바로 장가계로 가는 항공편(3:30소요)도 있다고 들었는데
상품특성상 중국 동방항공 이용 연대에서 환승하다보니 장장 6시간 소요.
비행기에서 내려보니 우리나라보다 남쪽에 위치하여 더울 줄 알았는데 비슷.
다만 짙은 운무에 간간히 이슬비가 내리는데 불운한 관광이 될까 걱정.
2_2) 장가계 개요
공항에 도착하여 가이드 안내로 버스에 올라
장가계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장가계는 년중 아열대기후로 년중 200일 이상 비가 온단다.
최근까지 대용시(大庸市)였는데 1994년 장가계시로 개명하였단다.
모택동의 고향 상탄시와 장가계시는 모두 후난성에 있어
이곳 소수민족 토가족도 지나 공산당의 원조 마오쩌뚱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여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설명.
그래서 그런지 마오쩌뚱의 얼굴을 잘 뜯어 보면
한족보다는 소수민족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다.
장가계 여행은 크게
산,
협곡,
동굴,
호수,
쇼로 대별되는데
그걸 다 보려면 눈 빠지게, 발 빠지게 다녀야 한단다.
산으로는 황석채, 원가계, 양가계, 천자산이 있고
협곡으로는 대협곡, 유리다리
동굴로는 황룡동굴, 호수는 보봉호수
쇼로는 천문산 천문호선 뮤지컬을 추천하였다.
2_3) 장가계 첫인상
장가계 공항은 우리의 청주공항 같은 자그마한 공항.
날씨가 찌뿌둥하여 첫날인 천문산 일정이 걱정이었는데
가이드의 제안으로 장가계시 인근의 천문산 관광 첫날 일정을
동굴, 호수일정으로 변경하다보니 전체 일정이 변경되다.
결과론적으로 이 변경은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가이드가 필요한가?
다음날 부터는 맑은 날씨여서 조망이 좋았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장가계 시내로 가며 보니 여기도 온통 아파트일색.
다만 건설회사는 골조만 시공 분양하고 마감공사는 소비자의 몫.
그래서 그런지 건물의 중간중간 뻥 뚫린 공간들이 보인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토지는 국가 소유로
40년 이상 임대된 토지에 지어지는 아파트는
33평 기준 1.1억, 마감비 0.5억, 계1.6억 정도인데
토지비를 감안하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가격인 것 같다.
장가계시는 2개의 현(縣)과 2개의 구(區)로 나뉘고
총 인구는 153만명이며, 20여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총 인구의 69%가 토가족(土家族, 93만명),
백족(白族, 10만명), 묘족(苗族, 2.7만명) 등 소수민족이란다.
배달9215/개천5916/단기4351/서기2018/04/2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인천공항 마스코트
2) 인천 -> 연대 기내식 샐러드
3) 연대 -> 장가계 기내식
4) 공항에 내리니 온통 장가계 천문산 홍보 현수막
5) 장가계시 교포2세 경영 식당에서 먹은 점심(쌈밥정식)
6) 지나의 변기는 모두 이렇게 생김(공항, 음식점, 호텔은 우리와 비슷)
6-1) 아파트가 뭐가 좋다고 이 좋은 관광지에 저렇게 지어댈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곳에는 저층 단독형 단지가 어울릴 듯...
7) 장가계시 -> 무릉원구(1시간 30분 소요) 이동하며 본 장가계 농촌
8) 드디어 도착한 무릉원구
9) 우리가 묵을 무릉원구 백장협(미개발)인근 “귀빈루”가 보이고...
■ 장가계,張家界,Zhangjajie / 원가계(袁家界,Yuanjiajie)
장가계시
장가계시(張家界市)는 호남성(湖南省)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신흥 국제 관광도시이며,
성도(省都)인 장사(長沙)로부터는 400㎞거리에 있다. 중국의 첫 번째 국가삼림공원인
장가계가 있어서 시 이름이 되었다. 면적 9,563㎢, 인구 155만 명으로,
그중 소수민족인 토가족(土家族), 백족(白族)과 묘족(苗族)이 60%를 차지한다.
장가계시의 원래 이름은 대용시(大庸市)였으나 1994년에 장가계로 바뀌었다.
현재는 영정(永定)과 무릉원(武陵源) 두 구역과
자리(慈利)와 상식(桑植)의 이현(二縣)으로 분할되어 있다. 장가계시의 역사는 유구하여
일찍이 "순임금이 자유롭게 숭산(崇山) 돌아보기를 좋아했다"라는 말이 있다.
호남성의 주 도시는 장사(長沙)로서 인구 580만에 이르고 이곳으로부터
약400km 서쪽에 고속도로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장가계시는 인구 약160만 이란다.
20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소수민족 중 토가족이 40%차지하고
사냥과 농사를 주로하며 특산물로는 석이, 영지버섯이 있고
공예품으로는 수정 ,나무뿌리 조각이 유명하다고 한다.
장가계가 일반인들에게 이름을 떨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는데,
1982년 9월 25일에 국가로부터 중국최초로 "장가계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또 그 후
1988년에는 국무원에서 국가급중점풍경명승구로서 지정하였고,
1992년에는 장자제국가삼림공원, 삭계욕풍경구, 천자산 풍경구가 무릉원자연풍경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록된 후 끊임없이 발전, 지금에 이른다.
원래는 대용시 였는데 1994년에 국무원에서 대용을 장가계시로 승격 시켰다.
서주(西周)시대는 형주(荊州)에, 춘추(春秋)시대는 검중(黔中)에,
진(秦)나라가 통일할 시기에는(기원전 221년) 자고현(慈姑縣)에 각각 속했다. 명(明)대에는
대용위(大庸衛)를 설치했고, 민국(民國) 11년에 대용현(大庸縣)으로 개명했다.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산수는 소박하고도 다양한 민속 문화를 배양했으니
이곳은 양희(陽戱)의 발원지이며 산가(山歌)의 고향이기도 하다.
장가계 국가삼림공원
호남성 서북부에 위치한 장가계는 중국 최대의 호수인
동정호의 남쪽에 있는 호남(허난)성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1992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중국의 독특한 자연 풍경구이다.
무릉원은 장가계 풍경구인 국가삼림공원, 삭계욕(索溪峪) 자연보호구역, 천자산(天子山)
자연보호구역, 양가채(楊家寨) 풍경구역 등 4대 풍경구역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무릉원 밖의 옥황동(玉黃洞), 구천동(九天洞), 팔대공산(八大公山), 오뢰산(五雷山),
천문산(天門山), 모암하(茅巖河) 등 주변 풍경구역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또한 하용고거(賀龍故居)와 장가계 시내 풍경 등 경관 지역까지 포함하면
장가계시의 풍경명승지 전체 면적은 500㎢에 달하게 된다.
하늘이 조화를 이룬 자연풍경지라는 명칭에 손색이 없는 곳이다.
풍경구 배치도
이 중에서도 무릉원 풍경구는 면적이 392㎢로, 동서 길이가 31㎞, 남북이 15.5㎞이다.
이 풍경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의 면적은 264㎢,
풍경구내에서 가장 높은 곳은 토끼 모양의 망월봉으로 해발 1,264.5m,
가장 낮은 곳은 삭계하곡으로 해발 320m이다.
무릉원의 장가계 자연풍경구는 국가삼림공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풍경구에는 금편계(金鞭溪), 황석채(黃石寨),
비파계(瑟琶溪), 사도구(沙刀溝), 요자채(腰子寨) 등 볼거리가 유명하다.
삭계욕 자연보호구역은 무릉원 4대 풍경구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 풍경구에는 황룡동(黃龍洞), 십리화랑(十里畵廊),
원앙계, 서해, 보봉호 등이 있다. 지방지의 기록에 의하면 '삭계욕'이란 명칭은
"계수(溪水)의 형상이 밧줄 같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이 풍경구는 산지의 80%이상이 석영사암(石英沙岩)으로 되어 있어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사암의 봉림(峰林, 봉우리 숲)과 협곡으로 형성되어 있고,
지형의 형세가 생동적이고 계곡이 종횡으로 펼쳐져 있으며,
다양한 식물들이 무성하게 분포되어 있다.
풍경구는 300여 개의 경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사암으로 이루어진 3,000여 개의 기이한 봉우리들이 있으며,
이들은 각기 우뚝우뚝 솟아 수백 가지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 봉우리들은
천여 개의 못, 호수, 시내, 폭포 등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고 있다.
천태만상의 봉우리는 운무가 자욱하여 짙은 녹음으로 신비스럽고,
계곡은 깊어질수록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매력을 뿜어낸다.
찾는 동굴마다 신비하고 오묘한 흥취가 연이어 일어나며,
각 동굴의 종유석은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난다. 또한 수려한 계곡의 물에는
오랜 옛날부터 면면히 전해 오는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의 웅장함, 맑디맑은 계곡의 물, 보봉호(寶峰湖) 등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장가계의 모습은 신선들이 노닐던 선경을 방불케 한다. 중국 사람들도 "장가계의
새로운 자연의 모습은 오악(五岳)의 황산(黃山)과는 또 다른 것이다"라는 찬사를 보낸다.
삭계욕의 대부분은 산악지형에 속해 삭계욕이나 천자산은 장가계와 비슷한 것 같았다.
장가계 풍경구는 중국인들도 계림, 구채구(九寨溝), 황산과 함께
최고의 경치가 있는 자랑스러운 자연문화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천자산 자연 보호구역은 면적이 65㎢이며, 주봉의 해발은 1,250m이다.
천자산을 비롯하여 노옥장, 차반탑, 석가담 등 경치구가 있는데 석가담 경치구에 있는
하룡공원은 중국 10대 원수 중 한 명인 하룡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곳이라 한다.
무릉원은 장가계, 삭계욕, 천자산 및 양가채 풍경구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장가계 풍경구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산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는 조각물이
찾는 이를 반긴다. 이곳을 통하여 무릉원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공식명칭은 ‘무릉원(武陵源, 우링위안)’인데,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에서 따왔다.
국내외에서 보기드문 수려한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이한 형상의 봉우리와
용암동굴은 물론 원시상태에 가까운 아열대 경치와 생물생태 환경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약4억년전 바다였으나 지구의 지각운동으로 육지로 솟아올라
오랜시간 침수와 자연붕괴등을 겪으며 현재와 같은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 물 맑은
계곡등의 자연절경을 만들어 냈다. 연평균은 기온16도이며 연강수량은 1,200~1,600mm다.
장가계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수려한 봉우리와 동굴 외에도 인적이 드문 자연 지리 조건
으로 인해 원시상태에 가까운 아열대 경치와 생물생태 환경을 지니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생태계 그대로 보전되어 있으며,
아직 외국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곳을 방문하고 간 사람들은
장가계의 웅대하면서도 아름답고 기이한 산세에 넋을 잃으며
이 때문에 수많은 학자, 전문가들은 무릉원을 "대자연의 미궁"과 "지구기념물"이라 부른다.
'장가계', '원가계'는 장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장가계'
원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원가계'라 한다.
장가계는 ‘장씨의 마을’이라는 뜻. BC200년께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이 토사구팽을 눈치 채고 도망쳐 정착한 곳이
바로 토가족이 살던 장가계다. 장량은 유방의 군사를 피해 황석채의 바위봉우리에서
무려 49일을 버텼고. 그 장량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어 장가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후세에 장가계로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장가계는 장량의 이름을 따 나온 지명으로 처음에는 이 지역의 주인으로 행세하던
토가족(土家族: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지만 이 곳에서는 지금도
장가계시 인구 150만의 66%인 98만명으로 대다수임)의 거부반응 이 거세었으나
장량은 수차(水車)를 고안하여 그들의 농사에 큰 보탬을 주는 등의 노력으로
차츰 토가족의 신임과 숭앙을 받게 되었다 한다.
소하, 한신 등을 모함하여 죽이게 한 여후는 장량도 없애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고조에게 장량이 반역할 것이라고 모함하여 정벌하도록 꾀어
한고조는 장량도 체포하고 토가족도 정벌할 생각으로 이 곳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용감한 토가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장량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결국 한고조도 이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체면상 이 곳이 ‘장량 일가의 땅(張家界)’으로 인정하고 물러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지명이 ‘장가계(張家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장량은 전쟁에서도 앞 일을 잘 내다보고 전략을 세웠지만
개인의 앞날도 잘 볼 줄 아는 명철(明哲)이었던 것이다.
"人生不到張家界, 百歲豈能稱老翁?(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장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무릉원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1,334m이고, 풍경구의 면적이 264㎢에 달하며
전체 면적은 9,563평방킬로미터로 전국의 1/1000을 차지한다.
현재는 전체 면적의 10%정도만 개방되어 있다니 그 방대함에 놀랄 뿐이다.
장가계는 크게 무릉원구와 영정구로 구분되는데
무릉원구는 장가계시의 국가 삼림공원(張家界森林公園),
츠리현(慈利县)의 삭계곡(索溪谷)풍경구, 쌍즈현(桑植县)의 천자산(天子山)풍경구,
양가계 풍경구, 대협곡 풍경구로 나뉘며
장가계 시내인 영정구에는 천문산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인접해 있어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전체를 다 보려면 최소한 4-5일 정도가 소요된다. 장가계는 약 3억 8천만년 전
이 곳은 망망한 바다였으나 후에 지구의 지각운동으로 해저가 육지로 솟아올랐다.
물 아래 잠들어 있던 지형은 하늘을 향해 솟았고
침식과 풍화를 거쳐 사람의 혼을 쏙 빼는 지금의 모습이 됐다.
융기, 침식, 풍화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단단하게 붙어 있던 하늘과 땅을
초월적 존재가 비틀어 가르면 꼭 이런 만듦새가 될 것 같다.
억만년의 침수와 자연붕괴 등의 자연적 영향으로
오늘의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 물 맑은 계곡의 자연 절경이 이루어졌다.
■ 장가계(張家界)의 개황(槪況) / 작성자 : 두류봉
㉮ 장가계시(張家界市)의 역사(歷史)
장가계(張家界)의 원래이름은 대용시(大庸市)였으며, 고대 용국(庸國)의 소재지였다.
일찍이 원시사회시대말기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선민(先民)들은 예수(澧水)강 양안에서 이미 번영된 생활을 누리며 살아왔다。
요순시대(堯舜時代)에 이르러서
“순(舜)임금께서, 남만(南蠻)이 변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다가오매,
숭산(崇山)에 투구를 씌워 환영하며 껴안았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일종의 ”남만“설로, 투구를 쓴 것과 같은
여러 봉우리가 형성된 과정을 전하는 하나의 전설이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은 장가계(張家界)일대를
검중군(黔中郡) 자고현(慈姑縣)에 속하게 하고,
자리현(慈利縣) 관탑평(官塔坪)<오늘날의 장가평향 태평촌(蔣家坪鄕 太平村)>에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현(縣)을 다스리게 하였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인 오(吳)나라 경제(景帝) 영안(永安) 6년(AD264년)에는
숭량현(崇梁縣)을 천문산(天門山)이라 불러 양보(兩普)에 이르기까지
천문군(天門郡)을 설치하였으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는 천문군(天門郡)에
속하던 누중현(溇中縣)과 임례현(臨澧縣)의 구획을 합하였다。
1369년 명(明)나라 때에는 대용현(大庸縣)을 설치하였으며,
청(淸)나라 때인 옹정(雍正) 13년(1735)에는 영정현(永定縣)을 설치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정권(政權) 수립 후부터
자리현(慈利縣)은 상덕전구(常德專區) 관할이었는데,
그 후 상덕전구(常德專區)가 지급시(地級市)로 바뀌어 상덕시(常德市)소속이 되었다。
대용현(大庸縣)과 상식현(桑植縣)은 둘다 건국후부터 주도(州都)가 길수(吉首)인
상서토가족묘족자치주(湘西土家族苗族自治州) 관할이었다。
그러다가 1988년 5월 18일에 국무원(國務院)의 비준(批准)을 거쳐
현급시(縣級市)이던 대용(大庸)을 성할 지급시(省轄地級市)인 대용시(大庸市)로 승격하여
새로운 통합시가 만들어졌다。상덕시 소관이던 자리현(慈利縣)과
상서의 상식현(桑植縣)을 승격되는 대용시(大庸市) 관할로 하였다。
대용시의 시인민정부(市廳)는 영정구(永定區)에 두기로 결정하고,
영정구와 무릉원구(武陵源區)를 신설하였다.
이전의 대용시(현급)의 행정구역을 영정구로 하고,
이전 현급 대용시의 협합향(協合鄕)과 중호향(中湖鄕) 및 자리현 삭계욕진(索溪峪鎭)과
상식현 천자산진(天子山鎭)은 무릉원구의 행정구역이 되고,
구인민정부(區廳)는 삭계욕진에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1982년 9월에는 국가로부터
<장가계국가삼림공원(張家界國家森林公園)>으로 지정되었다.
또 1988년에는 국무원에서 “국가급중점풍경명승구(國家級重點風景名勝區)”로 결정하였고,
1992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등록된 중국에서뿐만이 아니고 세계적인 관광지이다。
1994년 4월에는 지급시(地級市)인 대용시(大庸市)의 명칭을 장가계시(張家界市)로 바꿨다。
장가계시(張家界市)는 장가계국가삼림공원(張家界國家森林公園)으로 인하여
중국(中國)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장가계(張家界)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시(市)의 이름까지 장가계(張家界)로 하게 된 것이다。 <亨>
㉯ <張家界>라는 지명(地名)의 유래(由來)
한(漢)나라를 세운 한고조(漢高祖)는 본명이 유방(劉邦)이고,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패현(沛縣)사람으로 진(秦)나라 2세 황제 때 기병(起兵)하여
함양(咸陽)을 빼앗아 한왕(漢王)이 되었다.
같은 시대에 진(秦)의 정통 군인이던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에게 늘 밀리다가
해하(垓下)싸움에서 결정적으로 그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도읍을 장안(長安)에 잡고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부르니 한(漢)은
한족(漢族), 한어(漢語), 한자(漢字) 등과 같이 중국을 뜻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초(楚)나라의 항우(項羽)와 패권(覇權)을 다루는 투쟁에서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은
장량(張良), 한신(韓信), 소하(蕭何), 진평(陣平) 등 공신의 도움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였다. 흔히들 이 네 사람을 “한초사걸(漢初四傑)”이라 일컫는다.
상황제(上皇帝) 보좌에 오른 유방(劉邦)은 후사를 위하여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방법으로
공신인 한신(韓信), 영포(英布), 팽월(彭越) 등을 차례로 피살하였다. 이에
장량(張良)과 소하(蕭何)는 도륙(屠戮)되기 이전에 이를 눈치채고 다행히 줄행랑을 쳤다.
한초사걸 중 한 사람인 장량(張良)은 자는 자방(子房)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인데,
본래 자신이 한(韓)나라의 후예(後裔)이면서 동이족(東夷族)이다.
장량(張良)은 산 깊고 물 휘돌아가는 오지(奧地) 중 오지인 무릉원(武陵源)에 와서
토가족(土家族) 묘족(苗族) 등 대부분 동이족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숨어 들어와 살았다.
그 이후 이곳을 장씨 가문이 사는 경계지역이라는 뜻으로
장가계(張家界)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어떤 향토설화를 들어보면, 동이족인 장자방(張子房)이
말년의 토사구팽을 피하기 위해 산 깊고 물 깊은 무릉원의 동이민족인
토가족(土家族은 노자의 도가사상을 추구하는 동이족의 후예)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한(漢)나라 조정에서는 장량을 체포하고 토가족도 정벌하기 위하여 이곳을 침공하였으나,
여기에 맞서 용감한 토가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장량을 중심으로 끝까지 저항하여
결국 조정에서는 이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이 곳이 ‘장량 일가의 땅(張家界)’으로
인정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지명이 <장가계(張家界)>가 되었다고 한다.
호남성에 나도는 또 다른 이야기로는 당시 장량(張良)은
유방(劉邦)이 공신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다음 차례에 자신에게도 닥쳐올 일로 예상되어,
조정에 나아가 관직을 내놓았다. 유방이 이를 만류했으나 장량은 벼슬을 내놓고 물러났다.
유방(劉邦)이 백운산(白雲山)까지 쫓아갔으나 장량(張良)은 도(道)를 배우기 위해
환화이거(幻化而去)하여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진(秦)이 동이족(東夷族)의 나라 한(韓)을 격파하자
장량(張良)은 원수를 갚기로 맹세하고 자객들과 교분을 맺고
진시황(秦始皇)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저격했다. 이 일이 미수에 그치자
강소성(江蘇省)의 하비라는 곳으로 도망가 숨어 있다가
다행히 황석공(黃石公)을 만나 <태공병법(太公兵法)> 을 얻는다.
후일 유방에게 귀부(歸附)해 모계(謀計)로 천하도모를 꾀한다.
그는 동이족의 나라인 6국이 진(秦)에게 병탄된 뒤에
영포(英布)와 팽월(彭越)을 연결하여 한신(韓信)을 중용해
항우를 쫓아내는 전책으로 유방의 신뢰를 얻는다.
유방은 장량을 평하기를 무릇 장막 뒤에서 계책으로 천리 밖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자방(子房)만 못하다고 말했다. 천하가 이미 결정되자
장량(張良)은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능력 하나로 임금의 스승이 되고
만호에 봉해진 개국공신이 갑자기 자신이 이루어 놓은 공을 마다하고
질병을 핑계로 용퇴하여 왕실과 관계를 끊고
사가(私家)에도 누구든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는 은거생활을 한다.
그는 이때 무릉원 장가계로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장량이 죽은 뒤 돌아가기를 원했던
동이족(東夷族)의 터전 산동성(山東省)에 묻힌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한서(漢書)」의 기록에는 장자방은 여후(呂稚) 6년에 죽어
제(齊)나라 북쪽 곡성산(谷城山) 아래 황석(黃石)에 묻혔다고 하였는데
이곳은 현재 산동성(山東省) 제수(濟水)의 북쪽이다. 그의 만년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도 그 설이 하나가 아니다.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의 성도인 정주(鄭州)에서 동쪽으로 70km정도 가면
개봉(開封)시가 있고, 여기서 다시 40km정도 가면 난고현(蘭考縣)이 있다.
이곳은 산동성에 가까운 접경지이다. 이 난고현 현성(縣城) 서남 6km의
조신장(曹辛庄) 남측에 장량의 묘가 있는데
높이는 10m에 오래된 잣나무가 묘를 울창하게 두르고 있다.
또 다른 전설에는 한고조 유방이 죽은 후 여후가 권력을 농락하자
장량은 병을 핑계로 은거했다. 그 은거지역을 무릉원 장가계로 보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묘가 있는 하남성 난고현(蘭考縣)인 동혼현(東昏縣) 서남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해 살다가 죽은 뒤 그 곳에 묻혔다는 설이 있다.
호남성(湖南省)의 서북쪽인 상서토가족묘족자치주(湘西土家族苗族自治州)와
장가계시(張家界市)지역은 동이민족(東夷民族)인 토가족(土家族) 및 묘족(苗族)이
많이 살고, 장가계풍경구(張家界風景區)에는 청암산(靑岩山)이라는 산이 있다.
이곳은 기암괴석(奇巖怪石)의 산에다 구름도 기이(奇異)하고
나무와 물도 기이하리 만치 깊고 맑아 풍경이 절경이다.
「선석지(仙釋志)」에 이르기를, "전설에 따르면, 장량(張良)은
적송자(赤松子: 神仙)를 좇아 노닐었다. 그 묘는 청암산(靑岩山)에 있어
때에 따라 숨겨졌다가 때에 따라 나타난다"라 했는데,
이것는 청암산의 안개가 많은 이유를 닮은 것이다.
<능묘지(陵墓志)>에서 말하기를, "한(漢)나라 유후(留侯) 장량묘는 청암산에 있다.
장량(張良)은 황석공 책을 얻은 후 적송자를 좇아 노닐었다.
읍중(邑中) 천문(天門)과 청암(靑岩)의 각 산에 유적지가 허다하다."
장량은 일찍이 후(侯)에 봉해진 초기에 유방을 향해 호소하기를,
"원컨대 인간사를 포기하고 적송자를 좇아 노닐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따라서 그는 도(道)를 좇아 은둔했으며
청암산(靑岩山)의 심산야림(深山野林)에 은둔하여 노닐었다 하는데,
이 말도 상당한 일리가 있는 듯 하다. 호남성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러한 이야기는
장가계에 가보면 더욱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깊어진다. 단지 애석하게도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유적지가 흩어져 남은 게 없고
근래에 장량묘(張良墓)라는 표지석을 장가계국가공원 안 금편계곡 입구에 세워두었지만,
이 역시 실제 묘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한다. <亨>
㉰ 장가계시(張家界市)의 자연(自然)과 풍광(風光)
장가계시는 2004년 한 해 동안 중국 국내의 다른 지역이나 해외에서
장가계를 찾아온 여행객이 무려 760만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그로 인하여 장가계시의 관광수입은 32억元이 넘었으며,
입장료 수입만도 3억元을 넘어섰다.
장가계시를 찾아오는 국내외 관광객은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관광외 수입도 미화 6,200만불에 육박했다고 한다。
장가계시에서는 앞으로도 더욱 관광지를 개발하여,
여행객들이 쾌적하고 편안한 여건에서 관광을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되도록 힘쓸 것이다.
천문산(天門山), 요자채(鹞子寨), 오뢰산(五雷山), 보광선사(普光禪寺) 등
관광지로 향하는 도로를 포장하고,
특히 강오(江垭)온천지구의 시설을 조속히 완료하여
자하관(紫霞觀)과 함께 새로운 관광 코스에 넣을 것이다。
또 용왕동(龍王洞), 토가풍정원(土家風情園), 보봉호(寶峰湖) 등 관광지를
관리 경영하는 공사(公司)나 만중여행사(萬衆國旅)와 같이
관광지 안내를 담당하거나 여행사에 대하여는 지도 감독을 철저히 하여
장가계를 찾는 여행객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한다。
장가계시(張家界市)는 호남성(湖南省) 서북부(西北部)에 위치해 있다.
옛날 지구에 강력한 지각변동이 일어났을 때 지표면의 어떤 곳은 높이 솟아
고원과 높은 산맥으로 융기(隆起)하고, 또 어떤 곳은 동정호(洞庭湖)와 같이
호수로 침강(沈降)하였다. 그래서 호남성의 서북부 지역은
무릉원처럼 높게 솟은 곳과 상강(湘江)이나 동정호(洞庭湖)와 같이
깊이 가라앉은 곳으로 나눠져 완전히 대립되는 지형이 형성되었다。
장가계시(張家界市)는 경도 109°40′~111°20′E、
위도 28°52′~29°48′N 사이에 놓여 있다.
동쪽은 상덕시(常德市)의 석문현(石門縣)과 도원현(桃源縣)에 접하고
남쪽은 원릉현(沅陵縣)에 이웃하고 있으며,
북쪽은 호북성(湖北省)의 학봉현(鶴峰縣)과 선은현(宣恩縣)에 맞닿아 있다。
시계(市界)의 동서의 최장 거리는 167km이며, 남북간 최대 너비는 96km이다。
전시(全市)의 총면적은 9,653㎢인데, 이것은 호남성(湖南省) 전체면적의 4.5%를 차지한다。
장가계시(張家界市)의 지형구조(地形構造)는 매우 복잡하다.
주요한 산지(山地)나 바위와 흐르는 물(岩溶), 구릉(丘陵), 산언덕과 평원(平原) 등
산지(山地)면적이 전체면적의 76%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중 최고로 특색(特色)을 갖춘 것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석영사암봉림지형(石英砂岩峰林地形)이다。
시(市)의 지형(地形)은 서북은 높으면서
예수(澧水)강 방향인 동남쪽으로 경사(傾斜)가 이루어져 있다。
무릉산맥(武陵山脈)은 귀주(貴州)의 운무산(雲霧山)에서 갈라져 나와서
장가계시(張家界市)에 들어온 후에는 다시 세 갈래로 나누어져서
장가계시(張家界市)를 뚫고 지나간다。
북쪽 갈래는 호북성(湖北省)의 내봉현(來鳳縣)과
용산현(龍山縣)을 거쳐서
시(市) 관할인 상식현(桑植縣)의 역산(歷山),
계영산(桂英山), 청룡산(靑龍山)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중간 갈래는 예수(澧水)강의 북쪽에 있는 천성산(天星山),
홍계산(紅溪山), 조천산(朝天山), 청암산(靑岩山), 모화계(茅花界)로 뻗어나간다。
마지막 셋째 갈래는 동쪽으로 쭉 뻗어 나오다가
동정호(洞庭湖)의 충적평원(沖積平原)에 이르러서는 소멸되어 버린다。
장가계시(張家界市)는 경내에 산들이 중첩해 있고,
지표의 기복(起伏)이 심하여 서로 다투듯 하며, 제일 높은 곳은 해발 1,890.4m이고,
제일 낮은 곳은 해발 75m이다。시(市) 경내(境內)의 지형은 산지위주이며,
지세(地勢)는 서북이 높고, 예수(澧水)강쪽으로 경사(傾斜)가 이루어져
물이 그쪽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중부는 예수(澧水)강 양안을 드러내 보이면서
북동방향으로는 완만하게 낮아지고,
남부 산지는 원수(沅水)강 방향을 향하여 그 높이가 점차로 낮아진다。
장가계(張家界)는 하늘이 내린 그 독특하고도 두터운
관광자원의 명성이 세상에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제일인 장가계국가급삼림공원(張家界國家级森林公園)과
천자산(天子山)과 삭계욕(索溪峪)의 두 자연보호구(自然保護區)를 합한
무릉원풍경구(武陵源风景区)로 조성되어 있는 총면적이 369㎢이다。
그 풍경구(風景區)안에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석영사암봉림협곡(石英砂岩峰林峽谷)이 있다。
그 지형(地形)은 너무나 독특하여 계림의 빼어남(桂林之秀),
황산의 기묘함(黃山之奇), 화산의 험준함(華山之險),
태산의 웅장함(泰山之雄)을 모두 갖추고 있어
이런 모든 볼거리를 함께 끌어 모아놓은 형태의 경관을 이루고 있다。 <亨>
㉱ 장가계시(張家界市)의 인문자원과 관광자원
장가계(張家界)의 아름다움을 전한 말로 흔히들
<人生不到張家界, 百歲豈能稱老翁?
(인생부도장가계 백세개능칭노옹: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장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이곳은 국가 제일의 삼림공원 및 여행 특정지역으로서 현재 계속해서
개발, 건설, 발전이 진행중인 곳이다.
행정구역상 장가계시(張家界市)는 원래 호남성(湖南省)의 대용시(大庸市)였는데,
1994년 5월 18일에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서 장가계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 관할 아래의 행정구역으로는 도시지역은
영정구(永定區)와 무릉원구(武陵源區)의 2개구(區)가 있고,
외곽지역은 상식현(桑植縣)과 자리현(慈利縣)의 2개현(縣)으로 나누어져 있다.
장가계시(張家界市)에는 2004년말 현재 50.34만 가구에
총인구는 157.43만명이 살고 있으며, 주민들의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있어
농업인구는 83%이상이나 되는 130.82만명이다.
그리고 민족별로는 한족(漢族)이 40.97만명이며 소수민족(少數民族)이 116.46만명이 산다.
장가계(張家界)에는 20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어,
그 중 최다민족(最多民族)인 토가족(土家族)이 65.2%나 되는 102.63만명이 살고,
백족(白族)이 10.83만명, 묘족(苗族)이 2.67만명 살고 있다.
행정구역별로는 2구(區) 2현(縣)중
영정구(永定區)가 40.03만명, 무릉원구(武陵源區)가 4.54만명,
자리현(慈利縣)이 67.69만명, 상식현(桑植縣)이 43.07만명이다.
시(市)의 총면적은 9,563㎢로 전 중국 국토의 1/1000을 차지한다.
장가계(張家界)는 중국과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수려(秀麗)한 봉우리와 동굴 외에도 인적이 드문 자연적인 지리여건으로 인하여
원시상태에 가까운 아열대 경치와 생물의 생태 환경을 지니고 있다.
장가계가 위치한 지역은 약 3억8천만년전에는 망망대해였으나
후에 지구의 심한 지각운동으로 말미암아 바다 밑이 육지로 솟아올랐다.
그렇게 육지로 솟아오르는 과정이 지나고, 억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떤 곳은
더욱 강하게 융기하여 높은 산맥과 봉우리가 되고,
또 어떤 곳은 심한 침강현상으로 호수와 강으로 완전히 비교적인 지형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침수와 자연붕괴 등의 자연적 영향으로
오늘날의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 물 맑은 계곡의 자연절경이 이루어졌다.
이곳의 연평균 기온은 8~16℃정도로 일년 사계절 언제나 관광하기에 적합한 온도이며,
연강수량은 1,200-1,600㎜ 정도이다.
장가계(張家界)가 일반인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1982년 9월 25일에 중국정부로부터 <장가계국가삼림공원(張家界國家森林公園)>으로
지정되었다. 그 후 1988년에는 중국의 국무원에서
<국가급중점풍경명승구(國家級重點風景名勝區)>로서 지정을 거치고,
1992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자연유산>속에 포함시켰다.
장가계의 무릉원은 오염되지 않은 생태계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아직까지 외국에 관광자원이 완전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곳을 방문하고 다녀간 사람들은 장가계의 웅대하면서도 아름답고 기이한
여러 지형에 넋을 잃고 만다. 이곳을 살펴본 많은 학자나 전문가들은
무릉원을 <대자연의 미궁>이라거나 <지구기념물>이라고 부른다. <亨>
■ 도연명(陶淵明)과 무릉도원(武陵桃源) -
진의 무릉이란 곳에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강가에 노를 저어 갔다.
문득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을 만났다. 어제까지도 없던 복숭아나무들이다.
꽃은 햇살에 눈부시고 꽃잎이 산들바람에 향기를 진동시키며 흩날리는 광경은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어부는 이상히 여기면서 계속 노를 저어 갔다.
이윽고 숲이 끝나고 동굴이 보인다. 어부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어두웠던 동굴이 어느덧 넓어지고 환하게 트이더니,
거기에는 넓은 땅이 펼쳐지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연못이 보이고 뽕나무밭이 보였다.
논두렁을 가로질러 길이 나 있고 닭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땅은 기름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보였다.
늙은이는 그늘 밑에 한가로이 앉아 있고 아이들은 즐겁게 뛰놀고 있다.
어부를 본 마을사람들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사실대로 말을 하니 그들은 술과 고기를 내놓으며 반가이 맞는다.
그들의 조상은 진 때의 난리를 피해 이곳에 왔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눌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세상의 변천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은 어부는 '이일은 세상에 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표식을 해놓은 어부는
고을 태수에게 이야기를 하니, 태수는 어부와 함께 표식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표식은 간 곳 없고 다시 도원경으로 가는 길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의 줄거리입니다.
유토피아의 실현은 불가능했지만, 도연명은 전원을 노래하는 것으로 자위하고
고독과 허무를 전원에서 달랬습니다. 화려한 수식을 추구했던 그때의 시단에서
그만은 참신한 독창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桃花源記 - 陶淵明 『陶淵明集』 卷6 -
도화원은 이상향이다.
영국소설에서도 유사한 구성을 가진 작품을 본 적이 있다.
결국 그곳을 다시 찾지 못한 것은 이상향이 환상이었음을 말하는 건 아닌지?
晉太元中, 武陵人捕魚爲業, 진태원중, 무릉인포어위업,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A.D 377-397년),
무릉(武陵)에 고기를 잡는 어부가 살고 있었다.
緣溪行, 忘路之遠近. 연계행, 망로지원근.
어느 날 시내를 따라 가다가 어디쯤인지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忽逢桃花林, 홀봉도화림,
배는 어느새 복숭아꽃 숲을 지나고 있었다.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협안수백보, 중무잡수,
강 양쪽 언덕을 끼고수백보를 가는 동안, 도중에 잡목은 보이지 않았고
芳草鮮美, 落英繽紛. 방초선미, 락영빈분.
향기 드높은 꽃들이 선연히 아름답게 피어 있었으며
꽃잎들은 어지러이 날리며 떨어지고 있어
漁人甚異之, 어인심이지,
어부는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
復前行, 欲窮其林. 부전행, 욕궁기림.
다시 앞으로 나아가니 숲이 끝나려는 곳에
林盡水源, 便得一山, 림진수원, 편득일산,
숲이 다하자 수원(水源)이 있었고 그곳에 산이 하나 막아섰다.
山有小口, 髣髴若有光. 산유소구, 방불약유광.
거기에 작은 동굴이 있었는데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便捨船從口入. 편사선종구입.
문득, 어부는 배를 버리고 동굴입구로 들어갔다.
初極狹, 纔通人, 초극협, 재통인,
들어갈 때는 구멍이 아주 좁아 겨우 사람 하나 정도 들어갈 만하더니,
復行數十步, 豁然開朗. 부행수십보, 활연개랑.
다시 몇 십 발자국 나서자 시야가 훤하게 트여왔다.
土地平曠, 屋舍儼然, 토지평광, 옥사엄연,
너른 들판에는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有良田美池桑竹之屬, 유량전미지상죽지속,
기름진 전답이며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나 대나무 등속이 눈에 들어왔다.
阡陌交通, 鷄犬相聞. 천맥교통, 계견상문.
옛날의 (즉 진시황 이전의) 토지구획 그대로 개와 닭 소리가 한가로이 들리고 있었다.
其中往來種作, 男女衣著, 悉如外人, 기중왕래종작, 남녀의저, 실여외인,
그 사이를 사람들이 오가며 경작하고 있었는데
남녀가 입은 옷이 모두 이국풍이었다.
黃髮垂髫, 竝怡然自樂. 황발수초, 병이연자락.
기름도 바르지 않고 장식도 없는 머리를 하고,
한결같이 기쁨과 즐거움에 넘치는 모습들이었다.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견어인, 내대경, 문소종래,
어부를 보더니 크게 놀라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鷄作食. 구답지. 편요환가, 설주살계작식.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더니 집으로 초대해 술을 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베풀어 주었다.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鷄作食. 구답지. 편요환가, 설주살계작식.
낯선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돌아 모두들 찾아와 이것저것 물었다.
自云,“先世避秦時亂, 率妻子邑人, 來此絶境, 자운,“선세피진시란, 솔처자읍인, 래차절경,
자기네들은 옛적 선조들이 진(秦) 통일기의 난을 피해
처자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에 왔는데,
不復出焉. 遂與外人間隔.” 불부출언. 수여외인간격.”
그 이후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는 바람에 외부와 격절되고 말았다고 했다.
問, “今是何世?” 문, “금시하세?”
그러면서 지금이 대체 어느 시대냐고 묻기도 했다.
乃不知有漢, 無論魏晉. 내부지유한, 무론위진.
진(秦) 이후 한(漢)이 선 것도, 한(漢) 이후 위진(魏晉)시대가 온 것도 알지 못했다.
此人一一爲具言所聞, 皆歎惋. 차인일일위구언소문, 개탄완.
어부가 아는 대로 일일이 대꾸해주자 모두들 놀라며 탄식했다.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여인각부연지기가, 개출주식.
사람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그를 집으로 초대해 모두 술과 음식을 내주었다.
停數日辭去. 정수일사거.
그렇게 며칠을 머문 후, 어부는 이제 떠나가겠다고 말했다.
此中人語云, “不足爲外人道也.” 차중인어운, “부족위외인도야.”
마을 사람가운데 누군가가 “바깥 세상에는 말하지 말아달라 ”고 부탁했다.
旣出, 得其船, 기출, 득기선,
어부는 동굴을 나서서 배에 올라,
便扶向路, 處處志之. 변부향로, 처처지지.
방향을 잡아 나가면서 곳곳에 표지를 해 두었다.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급군하, 예태수, 설여차.
고을로 돌아와 태수에게 나아가 자초지종을 고했더니,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志, 遂迷不復得路. 태수즉견인수기왕, 심향소지, 수미불부득로.
태수는 사람을 보내 오던 길을 되짚어
표식을 더듬어 나가게 했으나 다시 그 길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南陽劉子驥, 高尙士也. 남양류자기, 고상사야.
남양(南陽)의 유자기(劉子驥)는 뜻이 높은 은자(隱者)이다.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病終. 문지, 흔연규왕. 미과, 심병종.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며 그곳을 찾아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기 전에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後遂無問津者. 후수무문진자.
그 후로는 그 나루를 다시 찾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10) 탐방해야 될 장가계의 풍경구
■ 장가계(張家界,Zhangjajie) 관광요령
지도나 글을 봐도 장가계가 감이 잡히지 않고
하루만에 못보니 일정을 어떻게 짜야할지 몰라
무작정 장가계 시내에서 먼저 천자산으로 갔다
천자산 입구는 장가계 시내에서 버스비 17원으로 2시간이 걸린다
(거리상 60km인데 나중에 길이 안좋아 오래걸린다)
천자산 입구에 도착하면 셔틀을 타는데
처음에 만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오른쪽 아래로 가면 양가계, 원가계 순이고
왼쪽 위로 가면 천자산이다
난 바보같이 내려서 천자산으로 안가고 양가계로 갔다
그럴거면 천자산까지 왜 버스타고 온거니
다녀와보니 장가계 구경하려고 천자산 입구로 갈 이유는 전혀없다
천자산은 무릉원에서 출발해 케이블카 타고 오를 수도 있다
추천 코스
1. 걸어서 산행하시는 분 - 1박 2일코스
* 첫째날
황석채 -> 금편계곡 -> 원가계 -> 원가계에서 1박
* 둘째날
원가계에서 무료셔틀버스타고 천자산으로 -> 老屋场 -> 大观台
-> 천자산 -> 하산은 십리화랑가는길로 -> 십리화랑 -> 무릉원입구쪽으로 나감
2. 걸어서 산행하시는 분 - 2박 3일코스
* 첫째날
황석채 -> 셔틀버스타고 양가계로 -> (양가계는 중국인들이 별로라고 하네요)
-> 바로 케이블카타고 천자산으로 이동 -> 천자산에서 1박
케이블카가 5:30분까지 운행을 하고 셔틀버스도 6시까지 운행.
* 둘째날
老屋场 -> 大观台 -> 천자산 -> 무료셔틀버스타고 원가계로
-> 원가계 둘러보기 -> 원가계에서 1박
* 셋째날
금편계곡이 나오는 쪽으로 하산
오후에도 시간이 있으신분들은 수요사문쪽으로 가는 셔틀버스타고
거기서 또 셔틀버스타셔서 십리화랑 둘러본 다음에 무릉원입구 쪽으로 나옴.
3. 케이블카타고 하루만에 관광하기
(하루만 관광하시는 분이라면 황석채는 생략)
금편계곡 -> 수요사문 -> 백룡엘리베리터 -> 원가계
-> 원가계에서 무료셔틀버스타고 천자산으로 이동 -> 천자산
-> 케이블카타고 하산 - 무릉원입구쪽으로 나오기
원가계로 가는 방법은
1. 금편계곡 -> 원가계 (그림의 빨간색 화살표를 따라서 걷기)
2. 금편계곡 -> 수요사문 -> 백룡엘리베이터
3. 수요사문입구 -> 수요사문 -> 백룡엘베
*백룡엘리베이터 : 편도 72元 학생 43元
3번 코스는 삼림공원정문이 아닌 수요사문쪽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입장권을 구매한 후
셔틀버스를 타고 수요사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가장 쉬운 코스입니다.
효도관광을 준비하시는, 시간이 빠듯한 분이라면 이게 최고의 코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양가계는 천자산과 원가계 사이의 석영사암 봉우리로 이뤄진 협곡이다.
산세가 험준해 개발이 늦어졌다.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 원시림이 가장 잘 보존됐다.
천자산으로 올라가는 방법은
1. 앞에 나온 코스중 한개를 따라 원가계 -> 무료셔틀버스 -> 천자산
2. 황석채쪽에서 무료 셔틀버스타고 양가계도착 -> 양가계에서 케이블카타고 -> 천자산
* 양가계 케이블카 : 편도 76元 학생 46元
3. 무릉원입구로 들어가서 입장권구매 -> 천자산 케이블카타고 -> 천자산
(위쪽 지도의 오른쪽부분의 연두색 라인이 천자산 케이블카)
* 천자산 케이블카 : 편도 72元 학생 43元
장가계삼림공원의 입구는 3개!
1. 황석채, 금편계곡 쪽 정문
2. 수요사문쪽
3. 무릉원입구 (십리화랑, 천자산케이블카 쪽)
장가계 삼림공원 내에서 숙박을 하지않고 밖에 있는 숙소를 이용할 경우
그날그날 일정에 따라 가까운 쪽의 문으로 들어가시면
더 효율적으로 여행을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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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Are We 우리는 누구인가 / T. S.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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