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이름없는풀뿌리 2018. 11. 19. 11:40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3/21/4IKDHC3APJFZVORWEOH3CHTHL4/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7] 1450년경에 만든 세계지도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3.03.21. 03:00업데이트 2023.03.21. 03:03
 

“인도 가는 길 있다”… 수도사의 지도가 콜럼버스 내비게이션 됐나

인도 가는 길 있다 수도사의 지도가 콜럼버스 내비게이션 됐나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7 1450년경에 만든 세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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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이 발견한 조선 지도의 가치, 정작 한국은 몰랐다

[지도와 인간사] 강리도 칭찬이 '국뽕'? 세계 학자들이 극찬하는 세계지도

18.09.19 16:06l최종 업데이트 18.09.19 16:06l
     
아마 소말리아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수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1402년 우리 선조들이 그 도시를 지도에 표기해 놓았다는 사실. 모가디슈(Mogadishu)! 이번 호에서는 모가디슈와 나일강의 이름을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탐사해 보겠습니다. 아울러 강리도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서도 논해 보겠습니다.

먼저 모가디슈의 지명에 대해 알아봅니다. 영어로는 Mogadishu이지만 현지 소말리아어로 무크디쇼(Muqdisho), 아랍어로는 무카디슈/무하디슈(Muqadīshū)라 합니다. 지리적 위치를 현대 지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소말리아 모가디슈 모가디슈 위치
▲ 소말리아 모가디슈 모가디슈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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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동아프리카 인도양 연안의 도시입니다. 모가디슈는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영화를 누렸습니다. 13세기부터 이슬람 거점 도시로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모로코 출신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1331년 소말리아 해안에 나타났을 때 모가디슈는 번영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합니다. 부유한 상인들이 수없이 많고 고급 직물을 이집트로 수출하는 큰 도시로 이븐 바투타는 모가디슈를 묘사했습니다.

한편 15세기에 그곳을 방문한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는 4층 혹은 5층 건물이 허다하고 중앙에 궁성들이 있으며 원통 모양의 뽀쪽 탑 사원이 많은 대도시라고 언급하였습니다(영문 위키피디아 참고). 이 유서 깊은 중세 도시를 과연 1402년 우리 선조들이 비단 지도에 붓으로 적어 넣었을까요? 이런 의문을 안고 이제 지명 탐험으로 들어갑니다.

일본의 교토대 스기야마 교수는 아래 지도의 麻哈苔來(중국어 발음 '마하타이라이')를 무카디슈/무하디슈(아랍어)로 봅니다(붉은 화살표). 한편 카자흐스탄의 눌란(Nurlan)은 麻哈苔來를 麻哈苔束(마하타이슈)의 오기로 봅니다. '마하타이슈'는 아랍어 지명 '무하디슈'와 매우 흡사합니다. 참고로 강리도의 서방 지명은 아랍어에서 따온 것이 많습니다.

아래 지도는 강리도의 모사본(일본 교토대 소장)인데 麻哈苔來의 위치를 현대 지도와 비교해 보면 모가디슈의 지리적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명의 발음 및 지리적 위치 그리고 도시의 유서 등으로 보아 이곳을 모가디슈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리도 서방부분과 모가디슈
▲ 강리도 서방부분과 모가디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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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바로 위를 보겠습니다. 羅的里尼(중국어 '루어디리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무엇을 가리킬까요? 힌트는 그 바로 왼쪽의 굵고 푸른 물줄기, 즉 나일강입니다. 몽골 및 원나라 역사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중국의 류잉셩(劉迎勝, Liu Yingsheng) 교수(남경대)에 의하면 '羅的里尼(루어디리니)'는 바로 나일강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도 나일강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페르시아어 '루드이닐(Rud-i-Nil)'의 음을 중국어로 옮긴 것이 '羅的里尼(루어디리니)'임이 확실하다고 류잉셩은 주장한다." - Nurlan, <The Silk Road 14(2016)>, 110쪽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1402년에 제작한 세계지도에 나일강의 이름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가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강리도의 가치

강리도가 지닌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강리도의 세계사적 가치를 강조하면 '국뽕(지나친 국수주의를 뜻하는 신조어)'이라는 조건반사가 일기도 합니다. 그건 엉뚱한 과녘을 쏘는 화살입니다. 강리도 예찬의 발신처는 국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나라 밖 유수한 대학의 학자들입니다. 

강리도가 서양에 최초로 소개되어 놀라움을 일으켰던 것은 우리 국내에서는 강리도의 존재도 모르고 있을 때인 1946년이었습니다. 그 문열이는 발터 푹스(Walter Fuchs, 독일인)라는 저명한 동양학자였습니다. 1953년에 발간된 지리학 전문 잡지 <Imago Mundi>에서 발터 푹스는 이런 요지로 강리도를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1946년 출간한 중국학 소책자에서 1402 강리도에 대해 지면을 좀 할애한 바 있다. 이 중요한 문헌(강리도)을 역사 지리학도들에게 보다 널리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여기에서 좀 더 설명하고자 한다.

(...) 강리도의 극동 지역에 대해서는 1938년 아오야마(본의 역사학자)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하지만 강리도의 서방 지역은 여태 소개되거나 연구된 적이 없는데 사실상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부분은 그곳이다.

(...) 강리도의 좌편 아래쪽에 그려진 아프리카 대륙의 모습이야말로 매우 흥미롭다. 거기 나타나 있는 삼각형 모습의 아프리카,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남단의 특이한 형태를 그린 지도는 1500년 이전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Walter Fuchs, <Imago Mundi> Volume 10, 1953

참고로 강리도보다 훨씬 크면서 유사한 세계상을 담고 있는 지도가 중국에 하나 있습니다(아래 지도). '대명혼일도'라는 이름의 이 지도를 외부인으로서 최초로 열람한 후 소개한 학자도 또한 발터 푹스였습니다.

그는 대명혼일도의 제작 시기를 16세기 후반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근래 중국학자들은 대체로 1389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게 맞는다면 대명혼일도가 강리도보다 13년 앞서게 됩니다. 대명혼일도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분분하지만 서양 학계에서는 중국 측 주장에 대하여 대체로 유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발터 푹스의 영향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명혼일도의 지명은 홍무 2년 즉 1389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중국학자들은 이 지도가 1389년 혹은 그보다 조금 후에 만들어졌다고 결론을 내린다.

다른 학자들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지니고 있는데 까닭인즉 1389년에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대명혼일도의 원천 지도(대명혼일도 제작시 참고했을-역자)였을 것이고 대명혼일도 자체는 그보다 훨씬 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영문 위키피디아 참고)

대명혼일도와 강리도의 결정적 차이

그럼 이제 대명혼일도와 강리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전체적인 세계상은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다시피 대명혼일도는 한반도가 아주 엉성하고 서쪽의 아프리카도 좌단 부분이 잘려 나간 형상입니다. 강리도에는 만리장성이 선명한데 대명혼일도에서는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편 강리도의 인도는 중국대륙에 함몰되어 인식하기 어려운데 대명혼일도에서는 돌출된 반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 하나의 큰 차이점을 들자면 강리도는 지도 하단에 제작 배경과 제작자 및 제작 시기가 명시되어 있는 데 반해 대명혼일도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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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지도의 제작 시기의 선후는 차치하더라도 보다시피 강리도의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두 지도가 같은 세계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몽골세계대제국의 유산입니다. 강리도와 대명혼일도 제작 시 모본으로 삼았던 지도가 몽골제국의 지도였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강리도의 하단에 적혀 있는 글에 모본 지도의 이름과 제작자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몽골제국 시대에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세계상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 문헌적 증거가 바로 강리도라는 지도, 그리고 그 하단에 적힌 기록문이라는 말이지요. 강리도가 세계사적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대명혼일도 대명혼일도
▲ 대명혼일도 대명혼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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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 류코쿠본
▲ 강리도 류코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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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방에서 나온 세계지도가 서양보다 훨씬 앞서 아프리카의 전체 모습을 그렸다는 사실은 서양인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그 땅의 주인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과연 강리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요? 그들의 평가와 견해를 알아보겠습니다. 강리도와 대명혼일도의 가치를 알아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회의장 진왈라(Ginwala) 여사는 2002년 11월 남아공 국회의사당에서 두 지도를 전시하였습니다. 전시회는 남아공 내외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외신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당시 남아공 학자의 강리도 논평입니다. 

"강리도는 대명혼일도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동부, 남부, 서부를 정확히(accurately) 그리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항해한 누군가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유럽인들은 강리도 이후 60년이 지나서야 남부 아프리카에까지 항해한다.

대명혼일도와 강리도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회의사당에 전시된 강리도 사본은 일본의 고 오부치 전 총리가 Ginwala 남아공 국회의장에게 기증한 것이다.

강리도는 서양의 고지도보다 더욱 정확하게 남부 아프리카의 삼각형 형상을 그렸다. 나아가 아프리카 남부에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유명한 오렌지 강일 것이다. 이러한 지리 정보는 희망봉을 돌아 항해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 Lindy Stiebel, 남아공 크와줄루 나탈 대학 교수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강리도에 대한 가치 평가 혹은 예찬은 그 발신처가 국내가 아닙니다. 서양에서 근래 발간되는 세계사 혹은 지도역사 관련 서적에서 강리도의 세계사적 가치를 소개하고 있는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아래 사진은 필자가 수집한 책자들).
  
강리도 아카이브 강리도 관련 외서
▲ 강리도 아카이브 강리도 관련 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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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필자는 우리의 국사사전이나 세계사연대기 같은 책자에서 강리도를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조차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라 밖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 보는데 우리는 눈을 감고 있는 형국이지요. 
  
역사사전 국사 사전과 세계사 연대기
▲ 역사사전 국사 사전과 세계사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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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를 둘러싼 오해

강리도가 중국 지도를 베낀 것인데 무슨 호들갑이냐는 반응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지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존의 다른 지도와 지리정보를 취합·활용하여 작성합니다. 처음부터 자기 혼자 만든 경우는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강리도 제작자들이 당시 가장 우수한 중국의 두 지도를 입수하여 모본으로 삼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베끼거나 기계적으로 합성한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와 일본을 새로 추가하여 조선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만들어낸 독자적인 세계상입니다. 아프리카를 넣되 실제보다 훨씬 작게 배치한 것은 오류라기보다는 당시로써는 합리적인 설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아마도 모본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임). 당시 아무 관계도 교류도 없는 아프리카를 한반도보다 몇십 배 크게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고급 비단에 말입니다.

한편 관점을 달리해 보면, 15세기 서양의 유명한 프톨레미 유형의 세계지도나 중세 아랍의 대표적인 세계지도(알 이드리시 지도)는 강리도와는 반대로 아프리카 및 그에 이어지는 대륙을 터무니 없이(?) 크게 그렸습니다. 또 서양 지도들은 중심에 예루살렘을 터무니없이 크게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강리도는 그와 반대로 한반도와 중국을 크게 그렸을 뿐입니다. 더구나 서양 지도들은 한반도를 그리지 않았지만 강리도는 서방까지 그린 점에 있어서 양자의 우열이 드러납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강리도가 중국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세종이 중국에 사대했다거나,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지금의 입장에서 비판한다면 말이 안 될 것입니다.

강리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아메리카 대륙, 오세아니아 주, 남극 및 북극의 존재를 몰랐을 때입니다. 당시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의 위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지도 제작의 관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리도 제작자가 중국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운데에 놓아야 했을까요? 중동을? 유럽을? 한반도를? 만일 호기 있게 한반도를 중심에 위치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오른편 일본 너머의 넓은 공간을 모두 태평양 바다로 채워 넣어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공간(비단) 낭비가 초래되고 구도도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강리도는 비록 중국을 중심에 위치시켰고 중국이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을 주변화하거나 왜소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상대적 비례를 따져 보면 오히려 한국을 중국보다 훨씬 크게 그렸습니다. 위치의 중심은 중국에 두었지만 상대적 무게(혹은 크기)의 중심은 한국에 두었다는 사실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강리도는 당시로써는 그 범위나 정확성에 있어서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우수한 세계지도였을 뿐 아니라 우리 나름의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세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성과 자주성(주체성)이 융합된 한국 혼의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조선의 지도, 놀랍고도 장엄하다"

[지도와 인간사] 강리도의 진가를 알고 싶다면, 지중해를 봐라

18.11.29 10:33l최종 업데이트 18.11.29 10:33l
 
우리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한반도는 광활한 유라시아대륙에 속해 있고 그 유라시아대륙은 다시 거대한 아프리카로 이어져 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아울러 '아프로 유라시아(Afro-Eurasia)'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프로 유라시아는 너무 커서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 보더라도 한 눈에 다 담을 수 없습니다. 동쪽 끝의 한반도를 시야에 넣으면 서쪽 끝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프로-유라시아 지구상의 아프로-유라시아
▲ 아프로-유라시아 지구상의 아프로-유라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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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유라시아 아프로-유라시아
▲ 아프로-유라시아 아프로-유라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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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모든 땅을 합친 것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프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에 우리 한반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들이 아프로 유라시아 대륙을 한 장의 평면지도에 그리려는 시도를 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유럽에서 15세기 중반에 나온 가장 혁신적인 아프로 유라시아 지도 두 장을 보겠습니다.
 
Catalan-Estense World Map 1450-1460 경 제작
▲ Catalan-Estense World Map 1450-1460 경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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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 Mauro map 1450년경 제작
▲ Fra Mauro map 1450년경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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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정확성은 차치하고 근대적인 관측기구가 없던 그 옛날에 우주 공간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지도들이 그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프로 유라시아 동단의 한반도와 서단의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아프리카의 희망봉 일대까지를 아우르는 지도를 최초로 그린 것은 언제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혹시라도 우리가 그 주인공은 아닐까요? 1402년 한양에서 그려진 강리도(혼일역대강리국도지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강리도 강리도 달항아리 이미지
▲ 강리도 강리도 달항아리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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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우리는 강리도가 서양에서 어떻게 인식·평가되고 있는지를 엿보았습니다. 그 가치와 특징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강리도를 다른 문화권에서 나온 지도들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름답고 논쟁적인 지도"

이와 관련하여 서양의 여행 전문 사이트 컬쳐 트립(Culture Trip.com)가 흥미로운 글을 싣고 있군요. 먼저 회사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봅니다. 2011년 영국 런던에서 창업된 신흥 기업으로서 무려 1억 달러의 투자를 끌어들임으로써 구글, 페북을 추격하고 있다고 합니다(cnbc.com/2018/09/25/culture 참고). 

컬쳐 트립 사이트에는 월 평균 2천만 명가량이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이트 편집인 Luke Abraham은 "이토록 아름답고 논쟁적인 10개의 지도가 세계를 영원히 바꾸었다(These Beautiful and Controversial Maps Changed the World Forever)"라는 제목의 글(2017년 8월)을 실었습니다. 10개의 지도 중에서 처음의 네 개를 가져와 보겠습니다.
  
프톨레미 지도 Ulm판 프톨레미 세계지도
▲ 프톨레미 지도 Ulm판 프톨레미 세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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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이드리시 지도 중세 이슬람 세계상, 남쪽이 위를 향함
▲ 알 이드리시 지도 중세 이슬람 세계상, 남쪽이 위를 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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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포드 지도 중세 기독교 세계상
▲ 히어포드 지도 중세 기독교 세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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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 강리도 류코쿠본
▲ 강리도 강리도 류코쿠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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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한 문명권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지도들입니다.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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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지도는 1482년 독일 울름(Ulm)에서 출판된 것으로, 울름판 프톨레미 세계지도라고 불립니다. 2세기 그리스 천문지리학자 프톨레미(Ptolemy)가 저술한 <지오그라피>의 이론과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리지식을 보완해 제작한 것입니다.

< 지오그라피>는 지도 제작 이론(투영법)을 제시함과 동시에 무려 약 8000개에 이르는 지명의 위치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의 투영법과 경위도 개념, 수학적 지도 제작 이론 등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오그라피>는 로마제국 멸망 후 이슬람권으로 전해졌습니다. 서구에서는 근 1300년 동안 잊혀져 있었습니다.

< 지오그라피>가 유럽에서 부활한 것은 15세기의 개막과 함께 이태리 피렌체에서였습니다. <지오그라피>의 재발견은 서양의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를 여는 추동력이 됐습니다.

그후 서양에서 <지오그라피>를 바탕으로 만든 지도는 대체로 '프톨레미지도'라는 이름으로 발간됐습니다. 프톨레미가 생전에 직접 세계지도를 그렸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합니다.

프톨레미 지도에서 아프리카를 주목해 보겠습니다. 아프리카의 남부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 않고 미지의 땅 Terra Incognita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프톨레미 지도 미지의 땅
▲ 프톨레미 지도 미지의 땅
ⓒ 위키           

이 미지의 땅은 오른쪽으로 한없이 뻗어나가 아시아 대륙에 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인도양은 닫혀 있습니다. 배를 타고 희망봉을 돌 수 없습니다. 서양에서 프톨레미의 세계상이 처음으로 깨진 것은 1488년 포르투갈 항해가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아래 지도가 그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마르텔루스Martellus 지도(1490년경)입니다.
 
마르텔루스 지도 1490년경 제작
▲ 마르텔루스 지도 1490년경 제작
ⓒ 영국국립도서관           
 
우리의 세계상

이처럼 15세기 말에 이르러 비로소 서양인들에게 아프리카 남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인도양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프리카의 형상은 왜곡이 심합니다. 이 지도와 우리의 강리도(1402)이미지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두번째 지도로 시선을 옮깁니다. 중세 이슬람 문명권을 대표하는 지도입니다. 1154년 모로코 출신의 이슬람 학자 알 이드리시(al- Idrisi)가 지중해의 시칠리섬에서 그린 것입니다. 중세 이슬람 지도의 전통에 따라 남쪽이 위에 가 있습니다. 보다시피 위쪽의 아프리카가 지구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중심에 아라비아 반도가 놓여 있습니다. 인도양은 열려 있고 아프리카는 환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다음으로 중세 서양의 세계상을 보겠습니다. 세번째의 Hereford 지도입니다. 영국 Hereford 성당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동쪽이 위로 가 있습니다. 중세 이슬람권에서는 남쪽을 위에, 기독교권에서는 동쪽을 위에 두었습니다. 동쪽을 위에 두면 맨 위쪽에 에덴 동산을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 한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놓여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권의 세계상입니다.

이제 시선을 마지막 지도로 옮깁니다. 눈이 문득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의 강리도입니다. 북쪽이 위에 가 있고(이 점이 우수하다는 뜻은 아님) 인도양은 열려 있으며, 아프리카는 작지만 처음으로 온전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중심에 놓여 있는 중국이 압도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 오른쪽의 한반도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프톨레미 지도와 대조해 보면, 프톨레미 지도는 전체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좌우 폭이 과장되어 있고 지중해도 좌우의 폭이 실제보다 경도 20도 정도가 넓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프리카 땅도 몹시 왜곡되고 과장돼 있습니다.

반면에 강리도는 한반도와 중국이 과장되어 있습니다. 한편 알 이드리시 지도는 아프리카가 과장되어 있고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가 소재하는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문명권에 따라 지도의 중심과 방위가 다르고 특별히 크게 그린 공간도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강리도는 당시의 시점에서 최대의 지리공간, 즉 아프로 유라시아의 세계를 자주적으로 재구성한 한국인의 세계상이었습니다. 우리 땅을 특별히 크게 그렸지만 자기 중심성에 매몰되지 않았고, 초광역적인 공간을 그리면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조선 초 우리 선조들이 세계성과 주체성을 융합한, 영감으로 가득 찬 세계도를 남겼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15세기 우리 역사의 지평에서 탄생한 강리도와 한글은 실로 쌍벽을 이루는 세계사적 보물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컬쳐 트립 사이트는 강리도를 '놀랍고도 장엄한(Gorgeous and sublime)'지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까닭 없는 찬양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아무리 이렇게 강조해도 사실 강리도의 진가를 실감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매우 축소된 이미지만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크기는 158cmx163cm로 상당히 큰 지도입니다. 실물 이미지를 들여다보기 전에는 진면목을 알기 힘듭니다. 지중해 일대를 확대해 끌어와 보겠습니다. 진면목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강리도의 지중해
  
강리도 류코쿠본의 재현본
▲ 강리도 류코쿠본의 재현본
ⓒ 김선흥           
  
강리도의 모사본(1910, 일본 교토대 제작)에서 따왔습니다. 지중해는 바다색깔이 누락되어 있지만 어렵지 않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왼쪽으로 이베리아 반도, 중앙에는 이태리반도와 그리스가 보입니다. 오른쪽 방향에 보이는 파고다(붉은 화살표)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하단에 홍해가 그려져 있습니다.

지중해 전후 좌우의 지역에 지리정보가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중해 가운데 약간 왼쪽을 보면 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큰 섬이 눈에 뜨입니다. 그 위는 이태리 반도입니다. 이 녹색 섬은 위치나 크기로 보아 시칠리 섬이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참고로 12세기 알 이드리시 지도와 대조해 보겠습니다. 시칠리 섬(녹색 화살표)이 눈이 뜨이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붉은 화살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 이드리시 지도 12세기 초
▲ 알 이드리시 지도 12세기 초
ⓒ 위키           
   
알 이드리시가 이 지도를 만든 곳이 바로 시칠리섬의 팔레르모(Palermo)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시칠리아섬이 크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알 이드리시 지도 시칠리 섬
▲ 알 이드리시 지도 시칠리 섬
ⓒ 옥스포드 Bodleian 도서관           
 
강리도(류코쿠본)에서 시칠리로 추정되는 섬에 어떤 지명도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강리도의 다른 판본들도 마찬가지일까요? 거기엔 혹시 시칠리섬과 유서 깊은 팔레르모의 이름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다음 회에서 이어 설명하겠습니다.

 

 

 

 

 

지도와 인간사김선흥(ecoindian08)

"조선의 지도, 놀랍고도 장엄하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한국의 지도를 극찬한...

"천하는 지극히 넓다" 조선인이 세계지도 그...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이정표  
김사형(金士衡) 발(發)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대종회사무부총장 김태영(金泰榮, 郡)

 

포르투갈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 1450~1500)가 일행과 함께 아프리카 최남단 ‘폭풍의 언덕’에 도착한 때는 1488년이다. 폭풍속에 생사를 넘나드는 지루한 항해 끝에 살았다는 희망을 갖게된 선원들은 이곳 ‘폭풍의 언덕’을 ‘희망봉’이라 명명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처음으로 지도에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보다 86년이나 앞선 1402년 조선의 재상 김사형(金士衡, 1341~1407)선생에 의해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 아프리카 대륙을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비단위에 붓으로 그곳의 문명을 그릴 수 있었던 미스터리에 가까운 이 지도의 비밀은 무엇일까?

 

1. 김사형, 중국의 지도를 수집하다.

  

김사형(金士衡)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7년이 되던 해인 1399년(정종 1) 정월, 홍제원에서 임금의 전송을 받으며 명(明)나라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어 중국에 들어 가는데, 이 때에 조선 2대 왕인 정종(定宗)의 선위(禪位) 사실도 승인을 받는다. 외교사절에는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사망함에 따라 정당문학 하륜(河崙, 1347~1416)을 진위사(進慰使)로, 판삼사사 설장수(偰長壽, 1341~1399)를 진향사(進香使)로 삼아 함께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김사형은 이 사행길에서 함께한 판삼사사 설장수의 도움으로 두 종류의 중국 지도를 입수하게 되는데 하나는 원나라 때 강소성 소주 출신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이고, 또 한 본은 절강성 출신 승려 청준(淸濬)이 제작한「혼일강리도(混日疆理圖)」이다.

 

설장수는 위그루 출신으로 1358년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아버지 설손(偰遜)을 따라 일가족 모두가 공민왕 때 고려에 망명했다. 이 설씨 집안은 문장과 언변이 뛰어 났으며 지도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천문도(天文圖,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동생인 설경수(偰慶壽)가 서사(書寫)했으며, 숙부 설사(偰斯)도 상당한 지도(地圖) 수집가 였던 것이다. 설장수는 4개 국어에 능통했는데 고려에서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는 설장수의 다국어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외교 관료로 발탁하여 중국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이후 조선이 개국할 때 김사형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며 대명외교의 최전선에서 외교 갈등을 순조롭게 극복한 인물이다.

 

2. 김사형의 프로젝트 「세계지도」를 그리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조선관 상설전시)  ※일본 류코쿠대학 소장본 (필사) / 현대

 

김사형은 이러한 연유로 설씨 집안을 통해 입수한 두 본의 지도를 국내로 들여와서 우정승 이무(李茂, 1355~1409)에게 보여 준다. 이무는 1396년 김사형이 5도병마도통처치사가 되어 쓰시마[對馬島]와 이끼시마[壹岐島]를 정벌할 때, 5도 체찰사가 되어 함께 원정(遠征)했었고, 우정승으로 함께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의정부의 수반인 좌정승 김사형은 우정승 이무와 함께 지도 제작을 기획하였고 많은 연구와 검토를 하며 중국에서 입수한 지도와 태조6년(1400년) 봄에 박돈지(朴敦之, 1342~1422)가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 가져온 일본 지도를 기초로 해서, 「팔도도(八道圖)」를 그린 경험이 있는 검상(檢詳) 이회(李薈)에게 명하여 중국본 두 종류와 일본지도를 참고하게 하고 이슬람 계통의 지도 제작법까지 동원하여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이 제작 과정을 참찬 권근(權近, 1352~1409)에게 기록하게 하였다.  


 
 ▲지도 제작에 참여했던 인물          

 

당시 중국 지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을 상세하게 그리지 않았던 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회가 그린 「팔도도(八道圖)」를 접목하게 하였으며, 서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및 서남아시아의 모양을 상세하게 그리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한반도의 윤곽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하였으며 산맥 표현방법도 독특하게 그렸다. 이렇게 그린 지도는 중국의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으며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도가 탄생 된 것이다.

 

3. 외국 학자들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평가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위대한 지도는 1402년 조선에서 김사형(金士衡)에 의해 만들어 졌다. 강리도는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의 지식을 결합해 그린 것인데, 거기에는 당시 중국에 알려진 이슬람 지리학이 또한 내포돼 있다. 그 결과 이 지도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인도, 이슬람권,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에 이르기까지의 영역을 담았다. 김사형을 비롯한 제작진은 당시 유럽인들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이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하버드대학교교수 발레리 한센(Valerie Hansen)-

 

“원나라의 수도는 당대 세계의 지식이 모여든 장소였습니다. 고려의 신진 학자들은 성리학을 배우며 훗날 조선 건국에 기여했고, 관료로 등용된 색목인(色目人, 터키, 이란, 아랍인 등 유럽인)들과 교류하며 유럽보다 앞선 이슬람의 과학·수학·지리 등의 문물을 습득했습니다. 지금도 후세인들을 감탄시키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바로 이때 섭취한 지리적 지식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는 중국 중심으로 그려진 기존 지도와 달리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기록돼 매우 높은 정확도를 자랑합니다.” -미국 컬럼비아대교수 게리 레드야드(Gari Ledyard)-
출처 : - 오마이뉴스 김선홍의 「지도와 인간사」중에서 -

 

4.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경위

 

조선 초기 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은 ‘왕자의 난‘으로 권력싸움이 표출되던 난국의 시기에 중국지도 입수에 부심하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어 냈던 까닭은 무엇일까?

 

 “참으로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개 지도를 보면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알게 되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두 공(公, 김사형·이무)께서 재상으로 바쁜 여가에도 중국과 일본 지도를 참조하여 연구하고 이 지도 제작에 노심초사 하시는 까닭은 먼 장래까지 염두에 둔 기획과 큰 국량을 가늠할 수 있겠다. 후일 좁은 이 나라에 살면서도 세계 여러나라를 지도로 보는 꿈이 이루어질 듯하여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다.” 의정부 참찬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발문의 일부 내용이다.

 

좌정승 김사형은 국방·외교·행정을 펼쳐 나가는 정치가로서 국가를 경영하는 근본에 지리(地理)와 지도(地圖)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한 대목이다.

 

권근은 1393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출사한 이후, 태조 5년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발문을 쓰는 등 태종대에까지 국가의 학술·문화 사업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한 조선 최초의 문형(文衡)이다. 그는 많은 서문·발문을 남겼는데 모든 내용에서 왕권을 옹호하고 왕의 덕을 칭송하는 등 창업기에 왕권의 안정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런데 유독 태종 2년에 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지문에서는 왕을 칭송하는 글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의정부의 직속 상관인 김사형과 이무를 찬양하였다. 지문에 담긴 메시지의 수사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또 한 왕조실록에 「혼일강리도」 제작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는 것으로 봐서 이 지도 제작은 국가사업이 아닌 좌정승 김사형 프로젝트로 보는 이유이다.

 

5. 「혼일강리역대국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誌)」 지문

 

天下至廣也。內自中國。外薄四海。不知其幾千萬里也。約而圖之於數尺之幅。其致詳難矣。故爲圖者率皆踈略。惟吳門李澤民聲敎廣被圖頗爲詳備。而歷代帝王國都沿革。則天台僧淸濬混一疆理圖備載焉。建文四年夏。左政丞上洛金公 士衡,右政丞丹陽李公 茂。 爕理之暇。參究是圖。命檢詳李薈更加詳校。合爲一圖。其遼水以東及本國疆域。澤民之圖亦多闕略。方特增廣本國地圖。而附以日本。勒成新圖。井然可觀。誠可以不出戶而知天下也。夫觀圖籍而知地域之遐邇。亦爲治之一助也。二公所以拳拳於此圖者。其䂓謨局量之大可知矣。近以不才。承乏參贊。以從二公之後。樂觀此圖之成而深幸之。旣償吾平日講求方冊而欲觀之志。又喜吾他日退處環堵之中而得遂其卧遊之志也。故書此于圖之下云。是年秋八月日。誌。

 - 陽村 權近 -

 

천하는 넓기 그지 없어, 안으로는 중국에서부터 밖으로는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 리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이를 축소하여 몇 자[尺]의 지면에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 모두를 일일이 상세하게 기록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를 축소하여 지도로 만들 때는 그 대강만을 기재하는 법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강소성 출신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고,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이 제작한 「혼일강리도(混日疆理圖)」는 역대 제왕의 수도 변천이 빠짐없이 실려 있다. 건문(建文) 4년(1402년) 여름에 상락(上洛) 김공(金士衡)과 단양 이공(李茂)이 재상(宰相)으로 있을 때 이 두 지도를 비교 연구하여 검상(檢詳) 이회(李薈)에게 명하여 한층 상세한 교감(校勘) 작업을 행하게 하여 한 장의 지도를 만들게 하였다. 요수 동쪽과 본국의 강역은 이택민의 지도에도 많이 생략되어 있다. 지금 특별히 우리 나라의 지도를 추가하고 일본 지도를 첨부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완성도가 바둑판 같이 정연하고 보기에도 좋았다. “문을 나서지 않고서도 천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라는 말이 정녕 이를 두고 하는 말로서 무엇보다 지도를 보고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은 다스림에도 하나의 보탬이 되는 법. 두 공(公)께서 이 지도 제작에 노심초사 하시는 까닭은 먼 장래까지 염두에 둔 기획과 큰 기량을 가늠할 수 있겠다. 근(近)은 재주 없는 몸으로 의정부사(議政府事)라는 직위에 임명되어 두 분을 수행할 수 있었던 덕분에 이 지도의 완성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항상 서적을 연구하며 오랜 시간 차분히 바라보는 것을 꿈 꿔왔는데,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후일 좁은 이 집에 은거하면서도 명승고적을 실은 지도를 보는 꿈이 이루어질 듯하여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다. 또한 훗날 자택에 거주하면서 와유(臥遊)하게 될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한다. 따라서 이 지도의 밑에 써서 말한다.

1402년(태종 2) 가을 8월에 양촌 권근

 

6.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중요성

 

1507년에 독일에서 제작된 발트제뮐러 지도에 'AMERICA'라는 일곱 글자의 이름이 최초로 새겨졌다. 이 지도는 종적을 감추었다가 약 500년 후인 1901년 독일의 한적한 고성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미국은 이 지도를 오랜 교섭과 거국적 모금을 통해 무려 1000만불이라는 거금을 들여 독일로부터 구입하였다. '아메리카의 출생 증명서(America's Birth Certificate)'라는 별호가 붙은 이 지도는 미국 의회 도서관 본관(제퍼슨 홀)에 영구 전시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터키의 경우는 16세기에 자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세계지도를 지폐에 새겼다. 'Piri Reis' 지도라 하는데 지도 전체는 전해 오지 않고 파편만 살아 남았다. 그걸(파편) 지폐에 새긴 것이다.

 

남아공에서는 1402년 조선에서 제작한 「혼일강리도」에 오렌지강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했다. 남아공 국회의장 진왈라(Frene Ginwala)여사는 이 지도의 사본을 구하여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남아공 국회의사당에 전시하며 600여년전 아프리카가 그려진 「혼일강리도」의 중요성을 알렸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은 진왈라 여사는 민주화 운동의 리더였으며 지도에 조예와 관심이 깊은 인문학자 였다.

 

이제 우리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가 최초로 새겨진 지도 「혼일강리도」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걸 사들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이라면 그 가치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린 동양 최초의 세계지도이자 ‘조선’이라는 출생 증명서이기 때문이다.

<출처>「오마이뉴스」김선홍선생의 ‘지도와 인간사’ 중에서... 

 

7.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소장처

 

이 지도는 조선시대에 모두 4종의 사본이 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지도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류코쿠 대학’ 소장본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찰 ‘혼묘지(本妙寺)’ 에 소장하였던 2점 가운데 1점을 기증한 것이다. 이 류코쿠대학 소장본이 사본 중에 가장 오래 되었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텐리 대학’ 소장본은 혼코지(本光寺) 본을 모사한 것이고, 서울대 규장각 수장고에 있는 지도는 이찬(李燦, 1923~2003) 박사의 노력으로 ‘류코쿠 대학’ 소장본을 모사한 것이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 걸려 있는 「혼일강리도」역시 근래 ‘류코쿠 대학’ 소장본을 필사한 것이다.

 

 

8. 김사형(金士衡)은 누구인가?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은 「혼일강리도」보다 앞서 1398년(태조7)부터 1399년(정종 원년)에 걸쳐서 제생원(濟生院)과 의학원(醫學院)을 설치했고, 이 국가사업을 기념해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라는 방대한 양의 의약서도 편찬 출판했다. 또한 이책의 부록으로 수의학 서적 『마의방(馬醫方)』과 『우의방(牛醫方)』도 같은 시기에 복각(復刻)했다. 역시 권근이 서문을 썼다.

 

김사형은 행정업무 능력이 뛰어났다.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쳤으며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능력이 뛰어났지만 한계를 넘지 않았다. 이처럼 국방·외교·행정가로서 김사형의 모든 지식과 지혜가 조선 500년 왕조의 반석이 되었던 것이다.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의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본관은 안동이다. 대대로 귀하게 현달하여, 고조 김방경(金方慶)은 첨의중찬 상락공(上洛公)으로서 문무 겸전의 어진 재상이었고, 조부 김영후(金永煦)는 첨의정승 상락후(上洛侯)였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8년 동안 정승에 있으면서 시종일관 청렴했다. 문하 우시중 상락백(上洛伯)에 봉작되어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 호를 받았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우정승· 좌정승에 오르고 영사평부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사제(私第)로 은퇴하였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된 묘소와 신도비, 재실 등이 양평 목왕리에 있다.

 

9. 아쉬운 마음, 간절한 바램

 

조선시대 좌정승 김사형에 의해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아시아를 뛰어 넘어 세계로 향했던 우리의 기상이다. 그 자체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며 한국의 희귀한 국보급 역사적 문서라 할 수 있다.

 

조상의 드높은 기개와 글로벌 정신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자랑스러운 이 지도의 원본이 우리나라에 없다는 것이 참으로 통탄스럽다. 그나마 가장 오래된 사본(寫本) 마저도 임진 왜란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400여년 세월 동안 류코쿠대학 등에 비장(祕藏)되어 있다. 우리 것임에도 우리 땅에 놓아두지 못하고 일본 땅 어둠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고 이병주선생의 어록을 떠올리면서, 이 문화재가 하루빨리 환수되어 우리 땅에 놓아지고 우리 선조의 정신이 신화가 아닌 역사로 조명되어 지길 고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