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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7] 1450년경에 만든 세계지도
서양이 발견한 조선 지도의 가치, 정작 한국은 몰랐다
[지도와 인간사] 강리도 칭찬이 '국뽕'? 세계 학자들이 극찬하는 세계지도
먼저 모가디슈의 지명에 대해 알아봅니다. 영어로는 Mogadishu이지만 현지 소말리아어로 무크디쇼(Muqdisho), 아랍어로는 무카디슈/무하디슈(Muqadīshū)라 합니다. 지리적 위치를 현대 지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 소말리아 모가디슈 모가디슈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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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동아프리카 인도양 연안의 도시입니다. 모가디슈는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영화를 누렸습니다. 13세기부터 이슬람 거점 도시로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모로코 출신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1331년 소말리아 해안에 나타났을 때 모가디슈는 번영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합니다. 부유한 상인들이 수없이 많고 고급 직물을 이집트로 수출하는 큰 도시로 이븐 바투타는 모가디슈를 묘사했습니다.
한편 15세기에 그곳을 방문한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는 4층 혹은 5층 건물이 허다하고 중앙에 궁성들이 있으며 원통 모양의 뽀쪽 탑 사원이 많은 대도시라고 언급하였습니다(영문 위키피디아 참고). 이 유서 깊은 중세 도시를 과연 1402년 우리 선조들이 비단 지도에 붓으로 적어 넣었을까요? 이런 의문을 안고 이제 지명 탐험으로 들어갑니다.
일본의 교토대 스기야마 교수는 아래 지도의 麻哈苔來(중국어 발음 '마하타이라이')를 무카디슈/무하디슈(아랍어)로 봅니다(붉은 화살표). 한편 카자흐스탄의 눌란(Nurlan)은 麻哈苔來를 麻哈苔束(마하타이슈)의 오기로 봅니다. '마하타이슈'는 아랍어 지명 '무하디슈'와 매우 흡사합니다. 참고로 강리도의 서방 지명은 아랍어에서 따온 것이 많습니다.
아래 지도는 강리도의 모사본(일본 교토대 소장)인데 麻哈苔來의 위치를 현대 지도와 비교해 보면 모가디슈의 지리적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명의 발음 및 지리적 위치 그리고 도시의 유서 등으로 보아 이곳을 모가디슈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 강리도 서방부분과 모가디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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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바로 위를 보겠습니다. 羅的里尼(중국어 '루어디리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무엇을 가리킬까요? 힌트는 그 바로 왼쪽의 굵고 푸른 물줄기, 즉 나일강입니다. 몽골 및 원나라 역사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중국의 류잉셩(劉迎勝, Liu Yingsheng) 교수(남경대)에 의하면 '羅的里尼(루어디리니)'는 바로 나일강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도 나일강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페르시아어 '루드이닐(Rud-i-Nil)'의 음을 중국어로 옮긴 것이 '羅的里尼(루어디리니)'임이 확실하다고 류잉셩은 주장한다." - Nurlan, <The Silk Road 14(2016)>, 110쪽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1402년에 제작한 세계지도에 나일강의 이름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가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강리도의 가치
강리도가 지닌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강리도의 세계사적 가치를 강조하면 '국뽕(지나친 국수주의를 뜻하는 신조어)'이라는 조건반사가 일기도 합니다. 그건 엉뚱한 과녘을 쏘는 화살입니다. 강리도 예찬의 발신처는 국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나라 밖 유수한 대학의 학자들입니다.
강리도가 서양에 최초로 소개되어 놀라움을 일으켰던 것은 우리 국내에서는 강리도의 존재도 모르고 있을 때인 1946년이었습니다. 그 문열이는 발터 푹스(Walter Fuchs, 독일인)라는 저명한 동양학자였습니다. 1953년에 발간된 지리학 전문 잡지 <Imago Mundi>에서 발터 푹스는 이런 요지로 강리도를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1946년 출간한 중국학 소책자에서 1402 강리도에 대해 지면을 좀 할애한 바 있다. 이 중요한 문헌(강리도)을 역사 지리학도들에게 보다 널리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여기에서 좀 더 설명하고자 한다.
(...) 강리도의 극동 지역에 대해서는 1938년 아오야마(본의 역사학자)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하지만 강리도의 서방 지역은 여태 소개되거나 연구된 적이 없는데 사실상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부분은 그곳이다.
(...) 강리도의 좌편 아래쪽에 그려진 아프리카 대륙의 모습이야말로 매우 흥미롭다. 거기 나타나 있는 삼각형 모습의 아프리카,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남단의 특이한 형태를 그린 지도는 1500년 이전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Walter Fuchs, <Imago Mundi> Volume 10, 1953
참고로 강리도보다 훨씬 크면서 유사한 세계상을 담고 있는 지도가 중국에 하나 있습니다(아래 지도). '대명혼일도'라는 이름의 이 지도를 외부인으로서 최초로 열람한 후 소개한 학자도 또한 발터 푹스였습니다.
그는 대명혼일도의 제작 시기를 16세기 후반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근래 중국학자들은 대체로 1389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게 맞는다면 대명혼일도가 강리도보다 13년 앞서게 됩니다. 대명혼일도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분분하지만 서양 학계에서는 중국 측 주장에 대하여 대체로 유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발터 푹스의 영향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명혼일도의 지명은 홍무 2년 즉 1389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중국학자들은 이 지도가 1389년 혹은 그보다 조금 후에 만들어졌다고 결론을 내린다.
다른 학자들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지니고 있는데 까닭인즉 1389년에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대명혼일도의 원천 지도(대명혼일도 제작시 참고했을-역자)였을 것이고 대명혼일도 자체는 그보다 훨씬 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영문 위키피디아 참고)
대명혼일도와 강리도의 결정적 차이
그럼 이제 대명혼일도와 강리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전체적인 세계상은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다시피 대명혼일도는 한반도가 아주 엉성하고 서쪽의 아프리카도 좌단 부분이 잘려 나간 형상입니다. 강리도에는 만리장성이 선명한데 대명혼일도에서는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편 강리도의 인도는 중국대륙에 함몰되어 인식하기 어려운데 대명혼일도에서는 돌출된 반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 하나의 큰 차이점을 들자면 강리도는 지도 하단에 제작 배경과 제작자 및 제작 시기가 명시되어 있는 데 반해 대명혼일도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몽골제국 시대에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세계상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 문헌적 증거가 바로 강리도라는 지도, 그리고 그 하단에 적힌 기록문이라는 말이지요. 강리도가 세계사적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 대명혼일도 대명혼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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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리도 류코쿠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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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방에서 나온 세계지도가 서양보다 훨씬 앞서 아프리카의 전체 모습을 그렸다는 사실은 서양인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그 땅의 주인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과연 강리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요? 그들의 평가와 견해를 알아보겠습니다. 강리도와 대명혼일도의 가치를 알아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회의장 진왈라(Ginwala) 여사는 2002년 11월 남아공 국회의사당에서 두 지도를 전시하였습니다. 전시회는 남아공 내외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외신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당시 남아공 학자의 강리도 논평입니다.
"강리도는 대명혼일도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동부, 남부, 서부를 정확히(accurately) 그리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항해한 누군가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유럽인들은 강리도 이후 60년이 지나서야 남부 아프리카에까지 항해한다.
대명혼일도와 강리도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회의사당에 전시된 강리도 사본은 일본의 고 오부치 전 총리가 Ginwala 남아공 국회의장에게 기증한 것이다.
강리도는 서양의 고지도보다 더욱 정확하게 남부 아프리카의 삼각형 형상을 그렸다. 나아가 아프리카 남부에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유명한 오렌지 강일 것이다. 이러한 지리 정보는 희망봉을 돌아 항해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 Lindy Stiebel, 남아공 크와줄루 나탈 대학 교수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강리도에 대한 가치 평가 혹은 예찬은 그 발신처가 국내가 아닙니다. 서양에서 근래 발간되는 세계사 혹은 지도역사 관련 서적에서 강리도의 세계사적 가치를 소개하고 있는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아래 사진은 필자가 수집한 책자들).
▲ 강리도 아카이브 강리도 관련 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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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필자는 우리의 국사사전이나 세계사연대기 같은 책자에서 강리도를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조차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라 밖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 보는데 우리는 눈을 감고 있는 형국이지요.
▲ 역사사전 국사 사전과 세계사 연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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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를 둘러싼 오해
강리도가 중국 지도를 베낀 것인데 무슨 호들갑이냐는 반응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지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존의 다른 지도와 지리정보를 취합·활용하여 작성합니다. 처음부터 자기 혼자 만든 경우는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강리도 제작자들이 당시 가장 우수한 중국의 두 지도를 입수하여 모본으로 삼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베끼거나 기계적으로 합성한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와 일본을 새로 추가하여 조선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만들어낸 독자적인 세계상입니다. 아프리카를 넣되 실제보다 훨씬 작게 배치한 것은 오류라기보다는 당시로써는 합리적인 설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아마도 모본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임). 당시 아무 관계도 교류도 없는 아프리카를 한반도보다 몇십 배 크게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고급 비단에 말입니다.
한편 관점을 달리해 보면, 15세기 서양의 유명한 프톨레미 유형의 세계지도나 중세 아랍의 대표적인 세계지도(알 이드리시 지도)는 강리도와는 반대로 아프리카 및 그에 이어지는 대륙을 터무니 없이(?) 크게 그렸습니다. 또 서양 지도들은 중심에 예루살렘을 터무니없이 크게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강리도는 그와 반대로 한반도와 중국을 크게 그렸을 뿐입니다. 더구나 서양 지도들은 한반도를 그리지 않았지만 강리도는 서방까지 그린 점에 있어서 양자의 우열이 드러납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강리도가 중국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세종이 중국에 사대했다거나,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지금의 입장에서 비판한다면 말이 안 될 것입니다.
강리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아메리카 대륙, 오세아니아 주, 남극 및 북극의 존재를 몰랐을 때입니다. 당시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의 위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지도 제작의 관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리도 제작자가 중국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운데에 놓아야 했을까요? 중동을? 유럽을? 한반도를? 만일 호기 있게 한반도를 중심에 위치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오른편 일본 너머의 넓은 공간을 모두 태평양 바다로 채워 넣어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공간(비단) 낭비가 초래되고 구도도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강리도는 비록 중국을 중심에 위치시켰고 중국이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을 주변화하거나 왜소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상대적 비례를 따져 보면 오히려 한국을 중국보다 훨씬 크게 그렸습니다. 위치의 중심은 중국에 두었지만 상대적 무게(혹은 크기)의 중심은 한국에 두었다는 사실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강리도는 당시로써는 그 범위나 정확성에 있어서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우수한 세계지도였을 뿐 아니라 우리 나름의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세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성과 자주성(주체성)이 융합된 한국 혼의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영국의 디지털 지도와 조선의 강리도, 놀라운 공통점
[지도와 인간사] 강리도, 아프리카의 희망을 담다▲ 강리도 서방부분의 개념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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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지도들을 관람해 봅니다. 15세기-16세기에 한양에서 만들어진 강리도의 몇몇 판본(모두 일본에 있음)에서 아프리카의 모습만 떼어 온 것입니다. 첫번째는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서 현재 일본 교토의 류코쿠대학 소장본에서 따온 것이고, 두 번째는 16세기 것으로 현재 나가시키현의 혼코지(本光寺) 소장본에서, 세 번째는 일본 나라시의 텐리(天理)대학 소장본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 강리도 류코쿠대본 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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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리도 혼코지본 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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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리도 텐리대본 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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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모든 판본의 아프리카 대륙에 동일한 형태의 거대 호수(혹은 내해)가 확실히 그려져 있습니다. 확신에 차 있는 모습입니다. 면적을 보면 전체 대륙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으로 시선을 내려 보면, 산과 강이 그려져 있고 그 위로 강줄기 하나가 구불거리며 북상하여 호수와 합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시선을 거대 호수의 북단으로 옮겨 가 봅니다. 호수에서 흘러나온 강줄기가 북상하여 지중해로 사라집니다. 호수 가운데 약간 위쪽의 둥근 원 안에 '黃沙'라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을 가리킨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형상을 그리고 있는 지도는 강리도 외에는 중국의 대명혼일도가 유일합니다.
▲ 대명혼일도 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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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의 수수께끼
필자가 이전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근래 서양의 저명한 역사지리학서들이 강리도를 조명하는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 세계사 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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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서양의 강리도 연구가들은 아프리카의 독특한 거대 호수(혹은 내해)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직 확립된 정설은 없습니다. 추측과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에 대하여 근래에 몇몇 학자들이 흥미로운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영국 학자의 글을 소개합니다.
"나는 지금 BBC의 아프리카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중이다. (...)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듯이 아주 옛날에는 사하라 사막이 대평원(사바나)이었다. 매우 놀랍게도 옛날 한 때 이 대평원의 심장부에 세상에서 가장 큰 호수가 존재했다. 그게 기후변화로 증발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강리도를 떠올렸다. 제리 브로톤(Jerry Brotton)의 명저 <12개의 지도로 본 세계역사>(A History of the World in Twelve Maps, 2012)라는 책에서 나는 강리도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강리도는 1402년 당시의 세계를 묘사한 동아시아 최초의 세계지도이다. 중국인과 한국인들은 실로 지도 천재들(prodigious cartographers)이었다. 강리도는 그러한 전통이 낳은 놀라운 작품이다. 강리도가 지도의 역사에서 의미심장한 까닭은 중동, 유럽(비록 왜곡되어 있고 지중해에는 바다색이 누락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아프리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중앙에 뻥 뚫린 거대 공간이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공간에 대하여 브로톤(Brotton)은 이렇게 적고 있다.
'강리도는 우리에게 지금 익숙한 아프리카 남단을 포함한 아프리카 대륙을 보여준다. 아주 특이한 점은 아프리카 대륙에 거대한 호수같은 것이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하라 사막을 가리키는 지도 모른다.'(118-119). 이 점에 있어서는 제리 브로톤이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이런 크기의 호수는 강리도가 창조되기 이전에 5천년의 세월에 걸쳐 사라졌던 호수일 수밖에 없다. 그 호수가 변하여 오늘날 사하라 사막이 된 것이다. 그러한 정보가 어떻게 강리도에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중국 고지도 문헌에서 고대 아프리카의 거대 호수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한 내용이 여과없이 강리도 제작자에게 전달되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좀 상상력을 도약시킨다면 강리도의 거대 호수에서 고대 아프리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Dr James Baker, 서섹스대(University of Sussex) 역사학 교수
흥미롭지 않나요? 정작 우리는 그 존재도 모르고 있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우리 고지도의 아프리카 형상을 현대의 영국 역사가가 고고학적 증거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옳고 그르고는 다른 문제로 하더라도).
강리도에 그려진 아프리카의 거대한 호수
▲ <지도의 역사> 우드워드 편집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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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으로서 <지도의 역사>(HISTORY OF CARTOGRAPHY)라는 대작(위 사진)을 펴내었던 고 데이비드 우드워드(David Woodward) 박사가 아시아편(약 1000쪽) 표지에 강리도를 실은 바 있음은 예전에 설명한 바 있습니다. 지도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우드워드 박사는 강리도의 아프리카 거대 호수 혹은 내해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는 <조우>(ENCOUNTER)라는 책에 기고한 논고에서 이런 요지로 설명합니다.
"강리도 아프리카 내부에는 거대한 내해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챠드(Chad)호수와 고대 지리학에서 나일강의 원천으로 여겨졌던 두 호수에 대한 정보를 융합(conflation)해 놓은 결과로 보인다." - <ENCOUNTER> P. 27
여기에서 우드워드가 제시한 챠드호는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옛날의 챠드호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챠드호와는 그 규모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서양과 통해 있던 엄청나게 큰, 말 그대로 내해였습니다.
강리도에 거대호수가 바다 무늬와 색깔로 그려져 있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일 겁니다. Mega-Chad라고 불리는 옛날의 챠드호가 가장 컸을 때에는 깊이가 180 미터, 면적 4만 평방 미터에 달하여 오늘날의 카스피해보다 더 컷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챠드호가 유럽인에 의하여 최초로 측량된 것은 1823년이었는데 그 때에도 세계에서 제일 큰 호수 중의 하나였습니다(참조: 위키 피디어, 브리타니카).
강리도의 거대 호수 혹은 내해가 옛날의 메가 챠드호 및 여타 거대 호수들을 융합한 것이라고 보면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습니다. 아래는 메가 챠드호와 옛 콩고호 등을 그린 상상도입니다. 강리도의 거대호수가 연상되는 지도입니다.
▲ 아프리카 거대 호수 상상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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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강리도에 그려진 아프리카 거대호수 혹은 내해는 우스꽝스러운 오류라기보다는 과거 어느 한 때의 지리적 형세와 정보를 담고 있는 소중한 기록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지 그 시점과 관점이 현재와 다를 뿐이지요.
한편 현재의 아프리카는 강리도에서처럼 거대 호수로 가득 찬 대륙과는 딴판입니다. 아프리카에는 세상에서 제일 크고 제일 뜨거운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있고 사막화와 가뭄, 식수 부족 등의 문제가 상존해 있으니까요. 강리도의 아프리카가 첫 눈에 엉뚱하게 보이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지표에서 지하로 옮겨봅니다. 지하의 수자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래 왼쪽 지도는 영국의 지질 조사기관이 디지털 기술로 만든 지도(2011)로 지하수의 분포를 보여줍니다. 청색의 농도는 지하수의 지표로부터의 깊이를 나타냅니다. 짙을수록 지표면에서 가깝습니다. 오른쪽 지도는 연간 배수량을 나타내 주는 지도입니다. 청색이 짙을수록 배수량이 많습니다. 두 지도를 강리도와 대조해 보면 전체적으로 유사한 형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아프리카 지하수 지도 지하수 지도 | |
ⓒ 영국 지질 조사기관 및 WaterWiki. N | 관련사진보기 |
▲ 강리도 재현본 교토대 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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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여기 담긴 지하의 수자원을 식수 및 농업 용수로 충분히 활용한다면 아프리카는 새로운 미래를 맞을 것이고 그 때 강리도의 거대 호수를 살펴 보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여기에서 강리도는 과거와 미래를 만나게 해주는 교량이 됩니다. 이 거대 호수에는 옛 아프리카 뿐 아니라 현재 및 미래의 아프리카가 담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선조들이 600여년 전에 세계지도에 옮겨 놓은 아프리카의 거대 호수는 언뜻 보면 얼토당토 않은 오류 같지만 알고 보면 이처럼 중층적인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강리도의 가치와 매력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거대 호수에 대한 원천 정보는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요? 원천이 되었던 실물 지도가 존재했던 것일까요? 그 내용은 무엇일까요? 다음 호에서 탐색해 보겠습니다.
"천하는 지극히 넓다" 조선인이 세계지도 그린 이유
[지도와 인간사] 조상들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그렸을까▲ 강리도 아프리카 | |
ⓒ 류코쿠대학 도서관 | 관련사진보기 |
15세기에 한양에서 제작된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조선시대에 제작된 세계지도)의 아프리카는 거대 호수를 품고 있습니다. 과연 이 거대 호수의 형상을 어디에서 가져온 것일까요? 그 출처는 어떤 지도일까요? 이번호의 탐험 주제입니다.
아프리카의 거대 호수가 그려진 원천 지도를 어디서부터 찾아보는 게 좋을까요? 동서양의 모든 지도를 다 뒤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혹시 지도의 맨 아래에 적힌 글 속에 무슨 힌트가 있지 않을까요? 고려말 조선 초의 학자 권근이 지도 제작 동기와 원천 자료 및 경위를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에 권근의 글을 읽어 봅니다.
▲ 강리도 권근의 발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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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는 지극히 넓다.
안으로 중국에서부터 밖으로는 아득한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몇 천 몇 만 리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이를 줄여서 몇 자(尺)의 화폭에 상세히 그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지도를 만들면 대체로 엉성해지고 마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오문(吳門, 오늘날 중국 소주) 출신 이택민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고, 역대 제왕의 연혁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에 잘 나타나 있다.
건문(建文) 4년(1402) 여름에 좌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우정승 이무(李茂)가 공무 중에 시간을 내어 이 지도들을 연구한 후 이회(李薈)로 하여금 상세히 교정하여 한 장의 지도로 만들도록 하였다.
그런데 요수의 동쪽 땅과 우리나라의 강토는 이택민의 지도에도 오류와 생략이 많았다. 이 참에 우리나라 지도를 특별히 더 넓히고 일본까지 덧붙여 새로운 지도를 완성하게 되었다. 지도가 정연하여 눈이 시원하다. 실로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금년(1402) 가을 8월(음력)에 양촌 권근이 쓰다-
이글의 첫 문장인 '천하는 지극히 넓다'는 평범하게 들리지만 의미심장한 메시지입니다. '중국만이 세계가 아니다. 중국 너머 얼마나 넓은 세상이 있는지 모른다'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중화주의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강리도를 제작하였기 때문에 중국 너머의 아라비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땅도 강리도에 그려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권근의 기록 자체가 매우 소중합니다. 만일 이 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반도가 엄청 크게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조선 사람이 만든 지도라고 추정할 수는 있겠지만 이 지도가 과연 언제 어떻게 어떤 동기에서 누구에 의해 만들어 졌는지는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아주 이상한 일지만, 권근의 글 이외에는 다른 어디에도 강리도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선실록에도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따라서 강리도 제작 배경을 이해하려면 권근의 글을 찬찬히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글의 표면에 보이지 않는 빙산의 밑 부분까지를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초에 누군가가 처음으로 세계지도의 결정판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까지 알려진 천하의 모든 영역을 한 장의 지도로 그려보겠다는 야심을 품은 것입니다. 그 주인공은 좌정승 김사형(고려말 조선 초의 명신, 학자)이었을 수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추후 살펴볼 예정).
김사형 등은 이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먼저 지도를 모으고 검토합니다. 중국에서 수집한 지도들을 열람하고 검토한 결과, 세계 지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지도 두 개를 선택합니다. 그 하나는 원나라 이택민의 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원나라 청준의 지도입니다.
놀랍게도 이택민의 지도에는 중국 저 너머 서역 세계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아라비아, 유럽, 아프리카라고 부르는 지역들입니다. 동으로는 한반도와 일본에서부터 서로는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세계가 그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몽골 제국이 개척한 초광역의 세계상이었습니다.
이들 중국제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던 김사형의 시선이 한반도에 꽂히면서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으음, 우리 조선을 이렇게 엉터리로 그리다니… 말이 안 돼. 김사형은 곧 지도 전문가 이회를 부릅니다. 그리고 지침을 일러줍니다.
강리도 모본의 존재
이와 관련해 근래에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한양에서 우리 선조들이 강리도라는 세계지도의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시기보다 좀 더 앞서 중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 절강성 출신의 오사도(烏斯道, 원나라 말 명나라 초 사람)라는 학자가 원나라 말기에 세계지도의 결정판을 만든다는 야심을 품고 지도를 수집하고 검토합니다. 진정 흥미로운 일은 오사도 역시 두 종류의 지도를 선택해 밑그림으로 삼았는데 그게 권근의 글에서 언급된 두 지도와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이택민과 청준의 지도가 그것입니다. 서로의 안목이 정확히 일치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한 학자는 일본 교토 대학의 소장 학자 미야 노리코 교수입니다. 노리코는 강리도에 대한 연구서를 단행본으로 펴낸 최초의 학자이기도 합니다. 책의 원제는 <몽골이 낳은 세계지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습니다.
미야 노리코는 말합니다.
<성교광피도>의 작자 이택민에 관해서는, 권근이 오문(현재의 소주)출신이라고 만 언급했을 뿐으로, 地方志나 당시의 비문 등에도 그의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사도라고 하는 인물의 문집 <춘초제집(春草齊集)> 3권의 "<여지도> 출판의 서"라는 문장에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지리를 지도에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으나, 본조(원나라를 가리킨 것으로 보임-미야 노리코)의 이여림(李汝霖)의 '성교피화도(聲敎被化圖)'가 최후에 등장한 지도이다(최신 지도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지도를 검토해 본 결과 나는 <광륜도>가 유일하게 실제 지형과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지도는 유감스럽게도 산악지형이 정확한 장소에 실려 있지 않으며 하천은 그 원류가 확실히 표시되어 있지 않아 (...) 한편 이여림의 지도를 보자면, (…) 상세하기는 하지만 너무 번잡하고 엉켜 있어 그 경계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에 이여림 지도의 모눈에 의거하여 재차 대조하여 교정을 가했다. (...) (자료를) 폭 넓게 탐구하여 새 지도를 완성했다. 이 지도를 통해 황제의 교화가 미치는 범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며 천하의 지리서와 지도가 싣고 있는 내용을 고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109~110쪽 참조)
미야 노리코는 오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광륜도'가 권근의 글에 나오는 청준의 '혼일강리도'라는 것, 그리고 이여림이 바로 이택민의 字(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이름, 중국의 옛 풍습)이며 이여림의 '성교피화도'가 곧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앞의 책 110~111쪽). 이로써 그동안 안개에 가려져 있던 강리도의 모본 혹은 저본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매우 의미있는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야 노리코는 말합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원나라 치하에서 오사도가 이미 바로 청준과 이택민의 두 지도를 이용하여 (강리도 제작과) 비슷한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다. 역시 청준과 이택민의 두 지도가 가장 우수한 지도였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권근이 수많은 지도 중에서 이택민과 청준의 지도만을 평가하고 있는 점에서 보면, 오사도와 조선왕조의 지도 콜렉션은 거의 같은 수준이었음이 틀림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과 한국 양국의 선각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몽골 세계대제국의 지리적 유산을 새로운 세계지도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뿐더러 동일한 두 지도를 밑그림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고려말 조선 초 우리 선조들의 지도에 대한 유별난 관심, 높은 안목과 큰 시야를 확인하게 됩니다.
위에 언급한 지도 중에 강리도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실물이 전해오지 않습니다. 중국 오사도의 지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강리도 속에 그것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아프리카의 거대 호수를 그렸을 이택민의 지도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혹시 그 파편이나 잔영 혹은 잔본(殘本)이 어디 남아 전해오지 않을까요? 그게 존재한다면 거기에서 아프리카 거대 호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 그걸 찾아봅니다.
강리도의 원천을 보여주는 자료
옛 중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지도첩을 들춰 보기로 합니다. 명나라 시대에 나홍선(羅洪先), 1504~1564)이라는 학자가 편찬한 '광여도'(1555년경)라는 지도첩입니다. 나홍선은 광여도를 편찬할 때 원나라 때의 여러 지도를 참고하고 수록했습니다. 광여도는 오랫동안 널리 유포됐습니다. 청나라 시절 1799년에도 출판됐습니다. 250년 가까이 장수를 누린 셈이지요.
때문에 여러 판본이 나왔습니다. 현재 중국 국내의 많은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국회 도서관), 영국(옥스포드대 Bodleian 도서관), 일본(국립공문서관) 등지에도 서로 다른 판본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광여도 원본에 해당하는 초각본이 2012년 중국에서 출판된 바 있습니다.
▲ 광여도 초각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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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들 지도첩에 아프리카 거대 호수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초각본의 모습을 같이 보겠습니다.
▲ 광여도 서남해이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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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의 왼쪽 상단에 아프리카가 보입니다. 강리도의 아프리카와 흡사합니다. 윗쪽 부분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지도의 맨 오른쪽 상단을 보면 '서남해이도(西南海夷圖)'라 적혀 있습니다. '남서 바다 쪽에 있는 오랑케 땅의 지도'라는 뜻입니다.
그 아래에는 '경계 안은 눈금 하나가 400리(약 220km - 기자 말)이지만 경계 밖은 크기를 알 수 없어 기록하기 어렵다'라는 뜻의 글이 적혀 있습니다. 중국 땅에는 정방형의 모눈으로 축척을 표시했지만 아프리카에는 축척을 표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한편 서남해이도의 아프리카에는 몇몇 한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 글자들은 강리도의 류코쿠대 본에는 보이지 않지만 강리도의 다른 버전에는 기록돼 있습니다.
요컨대 광여도의 서남해이도가 강리도 아프리카의 원천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그렇다면 이 서남해이도의 원주인은 누구일까요? 광여도의 제작자 라홍선은 그 출처를 명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야 노리코는 서남해이도가 이택민의 지도라고 단정합니다(<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103쪽). 이러한 관점은 석연치 않은 면이 있습니다. 서남해이도의 아프리카가 이택민의 지도라면 강리도의 아프리카와 같거나 매우 흡사해야 할 것입니다. 전체적인 형상은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남부를 자세히 보면 무시하기 어려운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백문불여일도! 양자를 대조해 보겠습니다.
▲ 강리도와 서남해이도 아프리카 남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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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나일강의 원천 부분의 묘사에 뚜렷한 차이가 보입니다. 또한 강리도의 아프리카 남부에는 산맥이 그려져 있는데 서남해이도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원래 큰 지도를 줄여서 지도첩에 간략히 옮기는 과정에서 초래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리도에는 아프리카 남부에 서쪽으로 흘러드는 강(남아공의 오렌지 강)이 그려져 있는 반면 서남해이도에는 그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나아가 중국에 있는 대명혼일도의 아프리카에도 오렌지강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대명혼일도는 그 크기가 강리도의 6배 이상 되는 대작인데도 오렌지강이 그려져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거대 호수를 담은 아프리카 지도들은 두 계열의 지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하나는 오렌지 강이 없는 아프리카, 다른 하나는 더욱 발전된 버전으로서 오렌지 강이 그려진 아프리카.
광여도는 본래 원나라 시대 지도학의 거장이었던 주사본, 원나라, 1273~1333)의 지도를 바탕으로 만든 지도첩입니다(다른 지도들도 참고하고 수록함). 그런데 여기에 수록된 서남해이도의 아프리카에는 오렌지 강이 보이지 않는 반면 강리도의 모든 버전에는 오렌지강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서남해이도는 이택민의 것이 아니라 주사본의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주사본의 아프리카를 이택민이 발전시켜 오렌지 강을 그렸을 것이고 그것을 우리 선조들이 강리도에 반영시켰다고 보면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강리도가 현전하는 동서양의 지도 중에서 남아공의 오렌지강을 가장 먼저 그린 지도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가장 큰 강을 가장 먼저 그린 지도가 조선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강리도는 지금도 남아공의 국회 천년 프로젝트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15세기에 우리 선조들이 한양에서 그린 지도가 지금 아프리카에서 이처럼 주목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나요? 더욱 신기한 일은 정작 우리는 신기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 강리도 남아공 국회 천년 프로젝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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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로써 아프리카를 벗어날까 합니다. 다음 호에서는 이태리 반도로 건너가 보겠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한국의 지도를 극찬한 이유
[지도와 인간사] 평창 올림픽과 함께 소개된 강리도▲ 강리도 류코쿠대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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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리도 항아리 모양의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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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이 맨 처음 지도에 유럽을 그린 것이 언제였을까요? 개항 후인 19세기? 아닙니다. 15세기 초 1402년(태종 2)에 유럽을 그렸습니다. 지중해 등대와 섬도 그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도에 대해 서양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 걸까요? 이번 호의 주제입니다.
거꾸로 이렇게 가정해 봅니다. 만일 1402년 그 깜깜하던 시절에 우리가 전혀 몰랐던 서양의 어떤 나라 사람이 한반도를 지도에 그려 놓았고 그 사실을 우리가 최근에 알게 되었다면? 그 지도에 1402년 시절의 한양도 표시되어 있고 압록강이나 낙동강도 그려져 있다면? 강리도가 바로 서양인들에게 그런 경우일까요? 그렇습니다. 강리도에는 다뉴브강도 그려져 있고 지중해와 대서양도 나타나 있습니다. 파리, 로마, 마르세이유, 지브롤타 등의 도시명도 적혀 있습니다.
또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1402년에 남아프리카 사람이 그린 지도에 우리나라가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한강도 나타나 있고 땅끝 해남 일대의 해안선이 정확히 그려져 있다면? 강리도가 아프리가 사람들에게 그런 경우일까요?
하지만 그보다 더욱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강리도가 저 멀리 남아공 케이프 타운에 등장하기 꼭 10년 전인 1991년 10월 12일 위싱턴에 그 모습을 홀연히 나타낸 것입니다.
이듬해 1992년의 1월 12일까지 꼬박 3개월간 강리도는 워싱턴의 국립미술관(NATIONAL ART GALLERY)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일본 교토의 류코쿠(龍谷)대학 오미야(大宮) 도서관 지하의 수장고에 있던 우리의 강리도가 수백 년의 침묵을 깨고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미국이 콜럼버스 항해 5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세기적인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1492년 즈음 CIRCA 1492'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는 15세기를 전후해 각 문화권에서 성취된 걸작품 600여 점을 선별하여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 강리도가 출품된 것입니다.
강리도 실물이 지하에서 나와 해외에 전시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고 아마도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강리도의 미국 행차는 강리도 부활의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큽니다.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까닭입니다. 과연 그 당시 워싱턴에서 강리도는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요? 뉴욕 타임스 및 잡지 등에서 강리도의 반향을 찾아 볼 수있습니다. 그 요지를 여기 옮깁니다.
지도와 지구의 및 기구들이 전시회에서 가장 특별한 품목에 속한다. 프랑스로부터는 1375년의 카탈란(Catalan) 세계지도가 출품되었다. 이 지도는 유럽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세계였던 동방을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독일로부터는 1507년의 마르틴 발트제뮐러 세계지도가 왔다. 이 지도는 신대륙을 유럽인들이 최초로 묘사한 것이다.
일본으로부터는 1402년 한국에서 만들어진 지도가 왔다. 이 지도는 당시 알려진 세계를 그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벽한 동아시아발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에 그려진 유럽은 당시 어떤 유럽인들의 지도에 나타난 아시아보다 월등히 낫다. 하지만 이 지도는 한국의 세계상이다. 한국은 아프리카만큼 크게 그려져 있고 숙적 일본은 남쪽바다 멀리로 추방되었다. - Michael Kimmelman, <뉴욕 타임스> 1991년 10월 20일자
콜럼버스 이전에는 세계의 형상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국립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 "Circa 1492"는 사람들의 사고를 영원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1402년에 한국인들이 <강리도>라는 새로운 세계지도를 완성하였다. 이 지도에는 정확한 걸프만이 그려져 있고 어설프지만 식별할 수 있는 아프리카, 지중해, 남유럽이 나타나 있다.- Kay Larson, <New York Magazine> 1991년 11월 11일자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은 초대형 전시회 "1492 즈음: 탐험시대의 예술(Circa 1492: Art in the Age of Exploration)"의 개막으로 콜럼버스 항해 500주년을 기념하였다. 콜럼버스 항해 즈음에 탄생한 세계 5대륙의 예술품을 보여주는 이 전시회는 많은 대중과 열정적인 비평가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 전시회를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가 서양의 르네상스기에 과학적 천재성으로 빛났음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신흥 조선 왕조에서 세계지도가 만들어졌다. 국립 미술관에 전시된 깜짝 놀랄(startling) <강리도>에는 어느 정도 정확한 아프리카와 유럽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세계도는 이태리의 계몽 지식인들이 지도학과 기하학을 숙지하기 한 세기 전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회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즉, 왜 조선은 500년 동안 존속하면서도 자신의 봉건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는가? - Richard Ryan(호주 카톨릭 대학 교수), 미국 월간지 <COMMENTARY> 1992년 5월호
▲ Circa 1492 전시회 도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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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작품을 소개하는 대형 도록이 제작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예술사가, 역사학자 및 고고인류학자들이 국제적인 팀을 이루어 만든 이 책에 미국의 레디야드(Gari Keith Ledyard, 콜럼비아대학 석좌교수)가 강리도 논고를 실었습니다. 첫 부분의 요지를 옮깁니다.
"콜럼버스가 미지의 바다로 출항했을 당시 그는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들었겠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만일 당시 동아시아에서 제작된 가장 완전한 세계지도를 구해보려 했다면, 마땅히 조선왕국이라는 나라를 찾아갔어야 했다. 그 지도에는 중국과 일본이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인도, 이슬람 국가들, 아프리카 대륙, 그리고 몹시 놀랍게도 유럽까지도 그려져 있었으니 말이다.
콜럼버스가 그 지도를 보았다면, 스페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고 구불구불한 지중해 해안선에서 자신의 고향 제노아를 또한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유럽 지역은 불완전하게 그려져 있고 한국은 너무 크게 그려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만들어진 어떤 지도가 <강리도>가 아시아를 그린 것만큼 자신들의 유럽을 잘 그릴 수 있었다는 말인가?"
▲ Circa 1492 강리도 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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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이 동방의 지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15세기 초에 한국인들은 이미 서양을 그렸다는 사실을 강리도는 증언했습니다. 서양중심주의적 사고와 역사관을 간단히 뒤집을 수 있는 문헌이 출현한 것이지요.
▲ 강리도 유럽 부분 | |
ⓒ 류코쿠대 도서관 | 관련사진보기 |
강리도의 유럽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미흡하고 오류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동방에서 유럽을 그렸다는 사실 자체가 서양인들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발견입니다.
강리도가 일천강을 비추다
강리도가 서양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깊은 것으로 보입니다. 금년 초 평창동계올림픽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내셔널지오그래픽>지는 한국의 문화적 우수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강리도를 들었습니다. 글의 요지를 여기 옮깁니다.
동계올림픽으로 한국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때, 수세기 동안 지도 제작자들이 한반도를 묘사한 흥미로운 방식에 주목해 보자.
금년 한국의 평창동계올림픽으로 한반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불꽃놀이로수놓인 개막식으로부터 미소 짓는 호돌이 마스코트에 이르기까지 동계올림픽 행사는 한국인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호기가 되었다.
한국은 흥미롭고도 오래된 지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가 한국에서 1402년에 만들어졌다. 강리도라 불리는 이 지도는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세 개(네 개가 맞음-기자 말)의 사본이 전해온다. 모두 15세기, 16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여기 지도는 그 중의 하나로 1560년 이후의 것이다. 보다시피 지도의 맨 오른쪽에 한국이 굉장히 크게 그려져 있다. 맨 왼쪽의 아프리카 정도의 크기이다. 한반도에 비하면 남서쪽에 있는 일본은 왜소하게 보인다. - Betsy Mason, <내셔널지오그래픽> 2018년 2월 18일
참고로 여기 실린 지도는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88년 일본 나가사키의 혼코지(本光寺)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네 개의 강리도 사본(모두 일본에 있음)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한지에 그려져 있습니다. 가로 276.8cm, 세로 219cm. 이 지도의 사본 하나가 저 멀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회에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갓난이라면 모를까 김정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15세기 초 최고의 세계지도인 강리도를 남기신 위대한 조상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을 보았습니다.
지난 10월 20일 미국, 뉴질랜드 등지에서 온 몇몇 서양인들이 강리도 제작을 주도하셨던 익원공(김사형의 시호)의 묘역을 탐방한 것입니다. 한국 역사문화 탐방 스케쥴의 일환으로 '강리도 유적지'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익원공 후손님들의 배려로 묘소를 참배하고 서양인들에게 강리도에 대해 설명하는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존경이 빛나고 있음을 또한 보았습니다. 실로 문화의 힘은 시공과 국경을 초월하는 것임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뉴턴은 말합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탔기 때문에 세상을 넓게 볼 수 있었다고. 그 옛날 세계지도를 만드셨던 거인들께 경의와 감사를 바칩니다.
▲ 익원공 묘역 서양인에게 강리도 설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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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원공 묘역 서양인 탐방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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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호에서는 강리도에서 지중해 최대의 섬 시실리(Sicily)를 탐험해 볼까 합니다.
"조선의 지도, 놀랍고도 장엄하다"
[지도와 인간사] 강리도의 진가를 알고 싶다면, 지중해를 봐라
아프로 유라시아는 너무 커서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 보더라도 한 눈에 다 담을 수 없습니다. 동쪽 끝의 한반도를 시야에 넣으면 서쪽 끝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 아프로-유라시아 지구상의 아프로-유라시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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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로-유라시아 아프로-유라시아 | |
ⓒ fineartamerica.com | 관련사진보기 |
지구상의 모든 땅을 합친 것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프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에 우리 한반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들이 아프로 유라시아 대륙을 한 장의 평면지도에 그리려는 시도를 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유럽에서 15세기 중반에 나온 가장 혁신적인 아프로 유라시아 지도 두 장을 보겠습니다.
▲ Catalan-Estense World Map 1450-1460 경 제작 | |
ⓒ myoldmaps.com |
▲ Fra Mauro map 1450년경 제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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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정확성은 차치하고 근대적인 관측기구가 없던 그 옛날에 우주 공간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지도들이 그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프로 유라시아 동단의 한반도와 서단의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아프리카의 희망봉 일대까지를 아우르는 지도를 최초로 그린 것은 언제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혹시라도 우리가 그 주인공은 아닐까요? 1402년 한양에서 그려진 강리도(혼일역대강리국도지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 강리도 강리도 달항아리 이미지 | |
ⓒ 김선흥 |
지난 번에 우리는 강리도가 서양에서 어떻게 인식·평가되고 있는지를 엿보았습니다. 그 가치와 특징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강리도를 다른 문화권에서 나온 지도들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름답고 논쟁적인 지도"
이와 관련하여 서양의 여행 전문 사이트 컬쳐 트립(Culture Trip.com)가 흥미로운 글을 싣고 있군요. 먼저 회사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봅니다. 2011년 영국 런던에서 창업된 신흥 기업으로서 무려 1억 달러의 투자를 끌어들임으로써 구글, 페북을 추격하고 있다고 합니다(cnbc.com/2018/09/25/culture 참고).
컬쳐 트립 사이트에는 월 평균 2천만 명가량이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이트 편집인 Luke Abraham은 "이토록 아름답고 논쟁적인 10개의 지도가 세계를 영원히 바꾸었다(These Beautiful and Controversial Maps Changed the World Forever)"라는 제목의 글(2017년 8월)을 실었습니다. 10개의 지도 중에서 처음의 네 개를 가져와 보겠습니다.
▲ 프톨레미 지도 Ulm판 프톨레미 세계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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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이드리시 지도 중세 이슬람 세계상, 남쪽이 위를 향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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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어포드 지도 중세 기독교 세계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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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리도 강리도 류코쿠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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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한 문명권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지도들입니다.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 지오그라피>는 지도 제작 이론(투영법)을 제시함과 동시에 무려 약 8000개에 이르는 지명의 위치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의 투영법과 경위도 개념, 수학적 지도 제작 이론 등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오그라피>는 로마제국 멸망 후 이슬람권으로 전해졌습니다. 서구에서는 근 1300년 동안 잊혀져 있었습니다.
< 지오그라피>가 유럽에서 부활한 것은 15세기의 개막과 함께 이태리 피렌체에서였습니다. <지오그라피>의 재발견은 서양의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를 여는 추동력이 됐습니다.
그후 서양에서 <지오그라피>를 바탕으로 만든 지도는 대체로 '프톨레미지도'라는 이름으로 발간됐습니다. 프톨레미가 생전에 직접 세계지도를 그렸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합니다.
프톨레미 지도에서 아프리카를 주목해 보겠습니다. 아프리카의 남부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 않고 미지의 땅 Terra Incognita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프톨레미 지도 미지의 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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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지의 땅은 오른쪽으로 한없이 뻗어나가 아시아 대륙에 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인도양은 닫혀 있습니다. 배를 타고 희망봉을 돌 수 없습니다. 서양에서 프톨레미의 세계상이 처음으로 깨진 것은 1488년 포르투갈 항해가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아래 지도가 그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마르텔루스Martellus 지도(1490년경)입니다.
▲ 마르텔루스 지도 1490년경 제작 | |
ⓒ 영국국립도서관 |
우리의 세계상
이처럼 15세기 말에 이르러 비로소 서양인들에게 아프리카 남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인도양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프리카의 형상은 왜곡이 심합니다. 이 지도와 우리의 강리도(1402)이미지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두번째 지도로 시선을 옮깁니다. 중세 이슬람 문명권을 대표하는 지도입니다. 1154년 모로코 출신의 이슬람 학자 알 이드리시(al- Idrisi)가 지중해의 시칠리섬에서 그린 것입니다. 중세 이슬람 지도의 전통에 따라 남쪽이 위에 가 있습니다. 보다시피 위쪽의 아프리카가 지구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중심에 아라비아 반도가 놓여 있습니다. 인도양은 열려 있고 아프리카는 환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다음으로 중세 서양의 세계상을 보겠습니다. 세번째의 Hereford 지도입니다. 영국 Hereford 성당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동쪽이 위로 가 있습니다. 중세 이슬람권에서는 남쪽을 위에, 기독교권에서는 동쪽을 위에 두었습니다. 동쪽을 위에 두면 맨 위쪽에 에덴 동산을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 한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놓여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권의 세계상입니다.
이제 시선을 마지막 지도로 옮깁니다. 눈이 문득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의 강리도입니다. 북쪽이 위에 가 있고(이 점이 우수하다는 뜻은 아님) 인도양은 열려 있으며, 아프리카는 작지만 처음으로 온전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중심에 놓여 있는 중국이 압도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 오른쪽의 한반도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프톨레미 지도와 대조해 보면, 프톨레미 지도는 전체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좌우 폭이 과장되어 있고 지중해도 좌우의 폭이 실제보다 경도 20도 정도가 넓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프리카 땅도 몹시 왜곡되고 과장돼 있습니다.
반면에 강리도는 한반도와 중국이 과장되어 있습니다. 한편 알 이드리시 지도는 아프리카가 과장되어 있고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가 소재하는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문명권에 따라 지도의 중심과 방위가 다르고 특별히 크게 그린 공간도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강리도는 당시의 시점에서 최대의 지리공간, 즉 아프로 유라시아의 세계를 자주적으로 재구성한 한국인의 세계상이었습니다. 우리 땅을 특별히 크게 그렸지만 자기 중심성에 매몰되지 않았고, 초광역적인 공간을 그리면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조선 초 우리 선조들이 세계성과 주체성을 융합한, 영감으로 가득 찬 세계도를 남겼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15세기 우리 역사의 지평에서 탄생한 강리도와 한글은 실로 쌍벽을 이루는 세계사적 보물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컬쳐 트립 사이트는 강리도를 '놀랍고도 장엄한(Gorgeous and sublime)'지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까닭 없는 찬양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아무리 이렇게 강조해도 사실 강리도의 진가를 실감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매우 축소된 이미지만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크기는 158cmx163cm로 상당히 큰 지도입니다. 실물 이미지를 들여다보기 전에는 진면목을 알기 힘듭니다. 지중해 일대를 확대해 끌어와 보겠습니다. 진면목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강리도의 지중해
▲ 강리도 류코쿠본의 재현본 | |
ⓒ 김선흥 |
강리도의 모사본(1910, 일본 교토대 제작)에서 따왔습니다. 지중해는 바다색깔이 누락되어 있지만 어렵지 않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왼쪽으로 이베리아 반도, 중앙에는 이태리반도와 그리스가 보입니다. 오른쪽 방향에 보이는 파고다(붉은 화살표)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하단에 홍해가 그려져 있습니다.
지중해 전후 좌우의 지역에 지리정보가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중해 가운데 약간 왼쪽을 보면 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큰 섬이 눈에 뜨입니다. 그 위는 이태리 반도입니다. 이 녹색 섬은 위치나 크기로 보아 시칠리 섬이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참고로 12세기 알 이드리시 지도와 대조해 보겠습니다. 시칠리 섬(녹색 화살표)이 눈이 뜨이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붉은 화살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알 이드리시 지도 12세기 초 | |
ⓒ 위키 |
알 이드리시가 이 지도를 만든 곳이 바로 시칠리섬의 팔레르모(Palermo)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시칠리아섬이 크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 알 이드리시 지도 시칠리 섬 | |
ⓒ 옥스포드 Bodleian 도서관 |
강리도(류코쿠본)에서 시칠리로 추정되는 섬에 어떤 지명도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강리도의 다른 판본들도 마찬가지일까요? 거기엔 혹시 시칠리섬과 유서 깊은 팔레르모의 이름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다음 회에서 이어 설명하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이정표
김사형(金士衡) 발(發)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대종회사무부총장 김태영(金泰榮, 郡)
포르투갈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 1450~1500)가 일행과 함께 아프리카 최남단 ‘폭풍의 언덕’에 도착한 때는 1488년이다. 폭풍속에 생사를 넘나드는 지루한 항해 끝에 살았다는 희망을 갖게된 선원들은 이곳 ‘폭풍의 언덕’을 ‘희망봉’이라 명명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처음으로 지도에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보다 86년이나 앞선 1402년 조선의 재상 김사형(金士衡, 1341~1407)선생에 의해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 아프리카 대륙을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비단위에 붓으로 그곳의 문명을 그릴 수 있었던 미스터리에 가까운 이 지도의 비밀은 무엇일까?
1. 김사형, 중국의 지도를 수집하다.
김사형(金士衡)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7년이 되던 해인 1399년(정종 1) 정월, 홍제원에서 임금의 전송을 받으며 명(明)나라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어 중국에 들어 가는데, 이 때에 조선 2대 왕인 정종(定宗)의 선위(禪位) 사실도 승인을 받는다. 외교사절에는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사망함에 따라 정당문학 하륜(河崙, 1347~1416)을 진위사(進慰使)로, 판삼사사 설장수(偰長壽, 1341~1399)를 진향사(進香使)로 삼아 함께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김사형은 이 사행길에서 함께한 판삼사사 설장수의 도움으로 두 종류의 중국 지도를 입수하게 되는데 하나는 원나라 때 강소성 소주 출신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이고, 또 한 본은 절강성 출신 승려 청준(淸濬)이 제작한「혼일강리도(混日疆理圖)」이다.
설장수는 위그루 출신으로 1358년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아버지 설손(偰遜)을 따라 일가족 모두가 공민왕 때 고려에 망명했다. 이 설씨 집안은 문장과 언변이 뛰어 났으며 지도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천문도(天文圖,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동생인 설경수(偰慶壽)가 서사(書寫)했으며, 숙부 설사(偰斯)도 상당한 지도(地圖) 수집가 였던 것이다. 설장수는 4개 국어에 능통했는데 고려에서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는 설장수의 다국어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외교 관료로 발탁하여 중국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이후 조선이 개국할 때 김사형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며 대명외교의 최전선에서 외교 갈등을 순조롭게 극복한 인물이다.
2. 김사형의 프로젝트 「세계지도」를 그리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조선관 상설전시) ※일본 류코쿠대학 소장본 (필사) / 현대
김사형은 이러한 연유로 설씨 집안을 통해 입수한 두 본의 지도를 국내로 들여와서 우정승 이무(李茂, 1355~1409)에게 보여 준다. 이무는 1396년 김사형이 5도병마도통처치사가 되어 쓰시마[對馬島]와 이끼시마[壹岐島]를 정벌할 때, 5도 체찰사가 되어 함께 원정(遠征)했었고, 우정승으로 함께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의정부의 수반인 좌정승 김사형은 우정승 이무와 함께 지도 제작을 기획하였고 많은 연구와 검토를 하며 중국에서 입수한 지도와 태조6년(1400년) 봄에 박돈지(朴敦之, 1342~1422)가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 가져온 일본 지도를 기초로 해서, 「팔도도(八道圖)」를 그린 경험이 있는 검상(檢詳) 이회(李薈)에게 명하여 중국본 두 종류와 일본지도를 참고하게 하고 이슬람 계통의 지도 제작법까지 동원하여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이 제작 과정을 참찬 권근(權近, 1352~1409)에게 기록하게 하였다.
▲지도 제작에 참여했던 인물
당시 중국 지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을 상세하게 그리지 않았던 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회가 그린 「팔도도(八道圖)」를 접목하게 하였으며, 서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및 서남아시아의 모양을 상세하게 그리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한반도의 윤곽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하였으며 산맥 표현방법도 독특하게 그렸다. 이렇게 그린 지도는 중국의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으며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도가 탄생 된 것이다.
3. 외국 학자들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평가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위대한 지도는 1402년 조선에서 김사형(金士衡)에 의해 만들어 졌다. 강리도는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의 지식을 결합해 그린 것인데, 거기에는 당시 중국에 알려진 이슬람 지리학이 또한 내포돼 있다. 그 결과 이 지도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인도, 이슬람권,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에 이르기까지의 영역을 담았다. 김사형을 비롯한 제작진은 당시 유럽인들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이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하버드대학교교수 발레리 한센(Valerie Hansen)-
“원나라의 수도는 당대 세계의 지식이 모여든 장소였습니다. 고려의 신진 학자들은 성리학을 배우며 훗날 조선 건국에 기여했고, 관료로 등용된 색목인(色目人, 터키, 이란, 아랍인 등 유럽인)들과 교류하며 유럽보다 앞선 이슬람의 과학·수학·지리 등의 문물을 습득했습니다. 지금도 후세인들을 감탄시키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바로 이때 섭취한 지리적 지식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는 중국 중심으로 그려진 기존 지도와 달리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기록돼 매우 높은 정확도를 자랑합니다.” -미국 컬럼비아대교수 게리 레드야드(Gari Ledyard)-
출처 : - 오마이뉴스 김선홍의 「지도와 인간사」중에서 -
4.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경위
조선 초기 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은 ‘왕자의 난‘으로 권력싸움이 표출되던 난국의 시기에 중국지도 입수에 부심하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어 냈던 까닭은 무엇일까?
“참으로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개 지도를 보면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알게 되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두 공(公, 김사형·이무)께서 재상으로 바쁜 여가에도 중국과 일본 지도를 참조하여 연구하고 이 지도 제작에 노심초사 하시는 까닭은 먼 장래까지 염두에 둔 기획과 큰 국량을 가늠할 수 있겠다. 후일 좁은 이 나라에 살면서도 세계 여러나라를 지도로 보는 꿈이 이루어질 듯하여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다.” 의정부 참찬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발문의 일부 내용이다.
좌정승 김사형은 국방·외교·행정을 펼쳐 나가는 정치가로서 국가를 경영하는 근본에 지리(地理)와 지도(地圖)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한 대목이다.
권근은 1393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출사한 이후, 태조 5년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발문을 쓰는 등 태종대에까지 국가의 학술·문화 사업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한 조선 최초의 문형(文衡)이다. 그는 많은 서문·발문을 남겼는데 모든 내용에서 왕권을 옹호하고 왕의 덕을 칭송하는 등 창업기에 왕권의 안정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런데 유독 태종 2년에 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지문에서는 왕을 칭송하는 글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의정부의 직속 상관인 김사형과 이무를 찬양하였다. 지문에 담긴 메시지의 수사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또 한 왕조실록에 「혼일강리도」 제작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는 것으로 봐서 이 지도 제작은 국가사업이 아닌 좌정승 김사형 프로젝트로 보는 이유이다.
5. 「혼일강리역대국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誌)」 지문
天下至廣也。內自中國。外薄四海。不知其幾千萬里也。約而圖之於數尺之幅。其致詳難矣。故爲圖者率皆踈略。惟吳門李澤民聲敎廣被圖頗爲詳備。而歷代帝王國都沿革。則天台僧淸濬混一疆理圖備載焉。建文四年夏。左政丞上洛金公 士衡,右政丞丹陽李公 茂。 爕理之暇。參究是圖。命檢詳李薈更加詳校。合爲一圖。其遼水以東及本國疆域。澤民之圖亦多闕略。方特增廣本國地圖。而附以日本。勒成新圖。井然可觀。誠可以不出戶而知天下也。夫觀圖籍而知地域之遐邇。亦爲治之一助也。二公所以拳拳於此圖者。其䂓謨局量之大可知矣。近以不才。承乏參贊。以從二公之後。樂觀此圖之成而深幸之。旣償吾平日講求方冊而欲觀之志。又喜吾他日退處環堵之中而得遂其卧遊之志也。故書此于圖之下云。是年秋八月日。誌。
- 陽村 權近 -
천하는 넓기 그지 없어, 안으로는 중국에서부터 밖으로는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 리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이를 축소하여 몇 자[尺]의 지면에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 모두를 일일이 상세하게 기록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를 축소하여 지도로 만들 때는 그 대강만을 기재하는 법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강소성 출신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고,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이 제작한 「혼일강리도(混日疆理圖)」는 역대 제왕의 수도 변천이 빠짐없이 실려 있다. 건문(建文) 4년(1402년) 여름에 상락(上洛) 김공(金士衡)과 단양 이공(李茂)이 재상(宰相)으로 있을 때 이 두 지도를 비교 연구하여 검상(檢詳) 이회(李薈)에게 명하여 한층 상세한 교감(校勘) 작업을 행하게 하여 한 장의 지도를 만들게 하였다. 요수 동쪽과 본국의 강역은 이택민의 지도에도 많이 생략되어 있다. 지금 특별히 우리 나라의 지도를 추가하고 일본 지도를 첨부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완성도가 바둑판 같이 정연하고 보기에도 좋았다. “문을 나서지 않고서도 천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라는 말이 정녕 이를 두고 하는 말로서 무엇보다 지도를 보고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은 다스림에도 하나의 보탬이 되는 법. 두 공(公)께서 이 지도 제작에 노심초사 하시는 까닭은 먼 장래까지 염두에 둔 기획과 큰 기량을 가늠할 수 있겠다. 근(近)은 재주 없는 몸으로 의정부사(議政府事)라는 직위에 임명되어 두 분을 수행할 수 있었던 덕분에 이 지도의 완성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항상 서적을 연구하며 오랜 시간 차분히 바라보는 것을 꿈 꿔왔는데,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후일 좁은 이 집에 은거하면서도 명승고적을 실은 지도를 보는 꿈이 이루어질 듯하여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다. 또한 훗날 자택에 거주하면서 와유(臥遊)하게 될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한다. 따라서 이 지도의 밑에 써서 말한다.
1402년(태종 2) 가을 8월에 양촌 권근
6.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중요성
1507년에 독일에서 제작된 발트제뮐러 지도에 'AMERICA'라는 일곱 글자의 이름이 최초로 새겨졌다. 이 지도는 종적을 감추었다가 약 500년 후인 1901년 독일의 한적한 고성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미국은 이 지도를 오랜 교섭과 거국적 모금을 통해 무려 1000만불이라는 거금을 들여 독일로부터 구입하였다. '아메리카의 출생 증명서(America's Birth Certificate)'라는 별호가 붙은 이 지도는 미국 의회 도서관 본관(제퍼슨 홀)에 영구 전시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터키의 경우는 16세기에 자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세계지도를 지폐에 새겼다. 'Piri Reis' 지도라 하는데 지도 전체는 전해 오지 않고 파편만 살아 남았다. 그걸(파편) 지폐에 새긴 것이다.
남아공에서는 1402년 조선에서 제작한 「혼일강리도」에 오렌지강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했다. 남아공 국회의장 진왈라(Frene Ginwala)여사는 이 지도의 사본을 구하여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남아공 국회의사당에 전시하며 600여년전 아프리카가 그려진 「혼일강리도」의 중요성을 알렸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은 진왈라 여사는 민주화 운동의 리더였으며 지도에 조예와 관심이 깊은 인문학자 였다.
이제 우리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가 최초로 새겨진 지도 「혼일강리도」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걸 사들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이라면 그 가치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린 동양 최초의 세계지도이자 ‘조선’이라는 출생 증명서이기 때문이다.
<출처>「오마이뉴스」김선홍선생의 ‘지도와 인간사’ 중에서...
7.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소장처
이 지도는 조선시대에 모두 4종의 사본이 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지도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류코쿠 대학’ 소장본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찰 ‘혼묘지(本妙寺)’ 에 소장하였던 2점 가운데 1점을 기증한 것이다. 이 류코쿠대학 소장본이 사본 중에 가장 오래 되었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텐리 대학’ 소장본은 혼코지(本光寺) 본을 모사한 것이고, 서울대 규장각 수장고에 있는 지도는 이찬(李燦, 1923~2003) 박사의 노력으로 ‘류코쿠 대학’ 소장본을 모사한 것이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 걸려 있는 「혼일강리도」역시 근래 ‘류코쿠 대학’ 소장본을 필사한 것이다.
8. 김사형(金士衡)은 누구인가?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은 「혼일강리도」보다 앞서 1398년(태조7)부터 1399년(정종 원년)에 걸쳐서 제생원(濟生院)과 의학원(醫學院)을 설치했고, 이 국가사업을 기념해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라는 방대한 양의 의약서도 편찬 출판했다. 또한 이책의 부록으로 수의학 서적 『마의방(馬醫方)』과 『우의방(牛醫方)』도 같은 시기에 복각(復刻)했다. 역시 권근이 서문을 썼다.
김사형은 행정업무 능력이 뛰어났다.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쳤으며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능력이 뛰어났지만 한계를 넘지 않았다. 이처럼 국방·외교·행정가로서 김사형의 모든 지식과 지혜가 조선 500년 왕조의 반석이 되었던 것이다.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의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본관은 안동이다. 대대로 귀하게 현달하여, 고조 김방경(金方慶)은 첨의중찬 상락공(上洛公)으로서 문무 겸전의 어진 재상이었고, 조부 김영후(金永煦)는 첨의정승 상락후(上洛侯)였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8년 동안 정승에 있으면서 시종일관 청렴했다. 문하 우시중 상락백(上洛伯)에 봉작되어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 호를 받았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우정승· 좌정승에 오르고 영사평부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사제(私第)로 은퇴하였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된 묘소와 신도비, 재실 등이 양평 목왕리에 있다.
9. 아쉬운 마음, 간절한 바램
조선시대 좌정승 김사형에 의해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아시아를 뛰어 넘어 세계로 향했던 우리의 기상이다. 그 자체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며 한국의 희귀한 국보급 역사적 문서라 할 수 있다.
조상의 드높은 기개와 글로벌 정신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자랑스러운 이 지도의 원본이 우리나라에 없다는 것이 참으로 통탄스럽다. 그나마 가장 오래된 사본(寫本) 마저도 임진 왜란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400여년 세월 동안 류코쿠대학 등에 비장(祕藏)되어 있다. 우리 것임에도 우리 땅에 놓아두지 못하고 일본 땅 어둠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고 이병주선생의 어록을 떠올리면서, 이 문화재가 하루빨리 환수되어 우리 땅에 놓아지고 우리 선조의 정신이 신화가 아닌 역사로 조명되어 지길 고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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