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치는 '날라리 사극' 속에서 빛나는 정통 사극 "정도전"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요즘 KBS의 ‘정도전’이란 사극(史劇)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단 내용을 떠나 오랜만에 역사와 고증을 충실하게 따르는
정통 사극이 등장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반가웠습니다. 정도전을 보고 있자니
제대로 된 사극 하나 만드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극은 차마 눈뜨고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사극이 누가누가 잘하나 하는 식의 '역사 왜곡 경연장'이 되어 온 실정입니다.
역대 역사 드라마 중에 ‘용의 눈물’(1996)이 그나마 사실에 가장 충실했고,
고증도 상당히 철저하게 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사극부터 뭔가 점점 이상해지더니
용의 눈물 10년 후에 제작된 ‘이산’(2007)이나,
‘대왕세종’(2008) 등을 거치면서는 기본적인 상황 설정이나 시대 고증 자체가 무시된
'날라리 사극'(짬뽕사극)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TV를 장악했습니다.
근래에 오면서 ‘기왕후’ 처럼 시대만 옛날을 빌려왔지
역사적 사실과 복장, 궁중 풍습에 대한 고증은 아예 대놓고 포기한
국적불명의 사극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극은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역사물이나
혹은 퓨전극이라고 할 수 있는 ‘홍길동’,‘일지매’ '쾌걸춘향' 등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예를들면,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의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재미와 감동을 위해 그의 일생을 어느 정도
허구 속에서 재구성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드라마 '대장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록에 ‘대장금이란 의녀에게 진찰을 받았다’는 짧은 기록을 바탕으로
나머지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소설이기에 극의 내용 자체가 허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장금이 사람 이름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장금이가 자기 목숨을 걸고 대비에게 내기를 요청하는 내용이라든지,
궁중의 요리대회를 통해 최고상궁을 뽑는다는 설정 등은 현대적인 설정과 사고를 가미한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최고상궁’이란 직책과 용어도 작가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허준이나 대장금의 내용은 자체가 어차피 허구이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장금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애교로 봐 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그리는 사극은 이런 시대 극과는 다릅니다.
사극에서는 분명히 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선이 있습니다.
우선 명백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먼저 일본을 쳐들어가서 일본이 반격하면서
임진왜란이 발생했다든지 하는 등의 설정은 역사 왜곡에 해당됩니다.
소품과 풍습에 대한 고증도 중요합니다.
임진왜란 전투 장면에 M16 같은 현대식 소총이 등장할 수는 없습니다.
인물의 비장함이나 신비함, 영웅적인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의 각색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일생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그의 출중함을 강조하기 위해
“안중근이 20세에 일본에 비밀리에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와 동양평화론에 대해 담판을 했다”는 식으로 내용을 전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는 역사 왜곡에 더하여 안중근을 모독하는 행위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극은 위에 예를 든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왜곡조차도
‘새로운 역사 해석’이란 이름 아래 자연스럽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냥 옛날 옷만 입혀 놓고 역사적 내용을 작가 상상력대로 꾸며 놓은 것을
다 사극이라고 한다면, 개나 소, 닭 같은 동물에게 옛날 옷을 입혀 등장시켜 놓고
사극이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극의 또하나 고질병은 의상이나 소품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장보고의 일대기를 그린 해신(海神)이란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이 거의 뒷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니거나 산발(散髮)을 하고 다닙니다.
사극에서 뒷머리를 늘어뜨린 두발은 고려 초기를 그린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뒷머리를 늘어뜨리지 않은 것이 이상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뒷머리를 늘어뜨린 장발이 등장하는 것은 중국 사극의 영향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민족은 대대로 상투를 틀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상투가 기록에 등장하는 것만 해도 무려 고조선 시대로 올라갑니다.
세계적으로 상투를 튼 민족은 우리 민족과
우리와 혈통적으로 유사한 중국 북방 소수민족밖에 없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조선시대 선비들조차
죄다 갓 쓰고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등장할 팔입니다.
드라마에서 엉터리 고증은 두발 모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드라마 해신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컴퓨터 게임에 나오는 ‘미래전사’들이나
‘바이킹의 후예’들이 입었음 직한 갑옷을 입고 다닙니다.
이후 사극에서 이런 중국풍같기도 한 국적불명의 옷이 유행을 합니다.
‘이순신’에서는 수군들이 ‘水’가 달린 헝겊을 등과
배에 매고 다니는데 아이디어는 갸륵해 보이나 너무나 어색합니다.
장군들은 전투 시에도 철모를 쓰지 않거나 맨 상투 바람에 전장을 누비고,
일본 병사들은 갑옷으로 무장을 했는데,
우리나라 병사들은 갑옷도 없이 오직 삼지창 하나로 전투를 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사극에서 무관들은 전부 칼을 손에 들고 다닙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무관은 칼을 겨드랑이 부근에 찼으며, 칼집 끝이 앞을 향합니다.
이는 박물관에 가서 전시해 놓은 갑옷을 한번 보는 수고를 하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구한말 찍어 놓은 무관의 사진을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최근 정도전에서는 허리에 칼을 찬 모습이 나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사극은 ‘새로운 해석 어쩌고’하는 명분이나 ‘드라마는 어느 정도
허구가 허용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역사 왜곡을 밥 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제는 역사를 지어내는 것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세금으로 운영하는 KBS의 사극만큼은 끝까지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
아래 글은 원로 역사극 작가인 신봉승 선생님이
2008년 당시 사극의 문제점을 비판한 글을 그의 홈페이지에 옮겨 실은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시대만 빌리고, 작가 마음대로 소설을 쓴 소위
'날라리 사극'이 덜하던 때라 그마나 사극의 내용적인 면을 주로 지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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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가 막가고 있다 / 신봉승
역사드라마가 막가고 있다.
역사드라마를 보는 대부분의 시청자는 그 드라마가
사실史實과 어느 정도 가까우냐에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다.
엄격히 따진다면 소설이나 드라마는 모두 픽션虛構을 구사하는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똑같을 필요는 없지만,
읽는 사람들이나 보는 사람들은 내심 그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역사적 사실을 터득하려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어서
사실과 같았으면 하는 희망을 지워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는 ‘사실’과 얼마간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 시대가 지닌 ‘시대정신’은 달라서는 안 되고, 왜곡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집권자의 통치신념을 제시하는 포괄적인 시대정신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집권자의 통치이념에 따라서 한 시대, 시대마다 어떤 형식이든 시대정신이
깔리게 마련이고, 바로 그것이 그 시대를 흘러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KBS-TV에서 방송되고 있는 <대왕 세종>의 경우라면
태종시대의 ‘시대적 정신’과 이탈해서는 그 시대를 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의 이인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세자책봉에서 제외되는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집권하기 위한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 어린 이복동생을 죽였고, 자신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동복형님까지 죽이면서 왕권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아버지 태조(이성계)와 는 상상을 초월하는 갈등을 겪으면서 왕권을 굳힌 사람이다.
왕위에 있으면서도 네 사람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였고,
이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며 항변하는 왕비(원경왕후)에게
거침없이 폐비를 입에 담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같은 궐 안(경복궁)에 살면서도
내왕 없이 불목으로 일관하였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여 죄인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이때까지 조선왕조의 왕위계승이 장자로 이어지지 않았다 하여 듣기 민망한
유언비어가 도는 데도 장자인 세자를 폐하는 태종의 독단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재로서의 가능성을 보이자 태종을 5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세종의 새 왕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후견인(상왕)이 되어야겠다는 그의 책임감의 발로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세종의 장인이자 국구인 심온沈溫이 ‘왕명이 두 군데서 나오면
정치에 혼란이 있게 된다.’는 불공한 말을 했다하여
그가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서 체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할 만큼 단호하고도 혹독한 군왕이었다.
어린 왕비(소헌왕후)는 상왕전의 마당에서
아비를 살려달라는 석고대죄를 올렸어도 태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태종의 재위 18년과 상왕으로 있은 4년은
태평한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자기희생의 시기였기에
어렸을 때의 친구이자 마치 분신과도 같았던 최측근인 이숙번李淑蕃까지도
“내가 죽고 백 년이 지나지 않거든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마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귀양에 처했다.
태종 이방원의 통치시대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다음 시대의 장애물이 될 위험이 있는 자를 가려서
그가 어떤 자일지라도 가차 없이 버렸던 시대’였기에
자신의 뒤를 이은 22세의 어린 세종에게
“천하의 모든 악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도록 하라" 는 명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KBS-TV의 <대왕 세종>의 잘 못하는 경우,
지금이 바로 世宗時代와 世宗의 統治哲學을 살펴보아야 하는 적절한 시기이기는 한데,
世宗時代에 대한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
타이틀까지도 그렇다. 당연히 <聖君 世宗>이어야 옳다.
1,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太宗이 너무 한가하다.
태종은 태종의시대를 초강력하게 이끌었고, 그것이 곧 세종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되었다.
무엄하게도 世子나 中殿, 臣僚들이 太宗의 면전에서까지
임금을 무시하는 듯한 諫言을 입에 담기도 한다. 당시의 태종에게는 용납될 일이 아니다.
2, 세자(讓寧大君)가 드나드는 방은 어디에 있는 무슨 방인지가 분명치 않다.
당시의 政府機關인 吏曹, 禮曹, 兵曹, 戶曹 등과 같은 건물은
광화문 밖 六曹官衙에 위치해 있었고,
임금이 불러야 궁으로 들어갔으므로 거리 감각이 살아 있어야 당연한데도
그저 아무 데서나 모이고, 헤치고 하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3, 공무에 임하고 있는 世子의 거처(이 또한 애매하지만)에
궐 밖에 있는 忠寧大君이 私服 차림으로 들어와 앉아서
감 놔라. 대추 놔라고 참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忠寧大君의 言動에서 임금이되고 싶어 하는 기미가 보이는 것은
세종을 잘 못 그리는 단초가 된다.
4, 더 끔찍한 것은 讓寧大君이
큰 아버지(定宗)가 총애하는 妓女 초궁장에게
아우들이 지켜보는 백주대낮에 수작을 거는가 하면, 거처에까지 끌어드린다.
이 不倫이 용서될 수가 있는가. 작가는 廢 世子의 빌미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변명하겠지만,
廢世子가 되는 과정은 <태종실록>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5, 또 世子가 명나라 使臣의 술상을 엎는 대목은
당시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모르는 無知에서 기인되거니와
세자가 外交使節 에게 그렇게 해도 무사할 수가 있을까.
6, 더 놀라운 것은 鄭麟趾, 崔萬理 등이 모여서
鄭道傳의 '三峰集'을 읽는 秘密結社를 하는 데, 여기에 세자가 참석한다.
三峰은 太宗에 의해 참살 된 사람이고, 이로부터 4백 년이 지난 高宗 때까지도
그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나 있는지?
더구나 아직 죽은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鄭麟趾와 같은 知識人들이 ‘三峰集’을 읽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7, 世宗朝의 名臣 尹淮는 시장바닥을 헤매는 주정뱅이로 나오는 데,
尹淮는 太宗 1년에 文科에 급제하고,
태종 10년 무렵에는 官職의 꽃인 吏曹正郞 겸 春秋館 記事官이었다.
이런 사람이 난전을 떠도는 주정뱅이면 어찌되는가.
8, 中殿이 명나라 史臣을 죽이기 위해
상궁을 시켜 독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말이 되지를 않는다.
9, 장차 科學者로 성장하게 될 將英實이
反政府軍에 몸담으면서 太平館을 공격하는 것은 무지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10, 太宗의 後宮 孝嬪 金씨가 아들 敬寧君을 後嗣로 만들 욕심으로
李叔蕃을 찾아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청하는 데,
이런 일이 있었다면 李叔蕃은 효빈 김씨의 멱살을 잡고 태종에게 갔 을 것이다.
李叔蕃은 太宗의 오랜 친구이자 分身이었기 때문이다.
11, <대왕 세종>이 국민드라마라면 왜 15세 미만은 볼 수가 없나.
中學校 2학년이 15세인데, 이들이 볼 수 없는 <대왕 세종>을 왜 만들어야 하나.
MBC-TV의 <이산>의 경우는 비교적 성실하게 잘 만들어지고는 있는
역사드라마임에는 분명하나,
법도에서 벗어나는 몇몇 장면의 과장이 작품천체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1, 貞純王后가 私服을 입고 궐 밖으로 나와서
朝廷重臣들을 몽땅 불러모으는 私家는 대체 누구집이며,
2, 昌德宮에서 얼마나 떨어진 위치에 있는 지 도무지 석연치 않은데도
정순왕후는 거이 매일 밤 그렇게 나간다. 요즘 식으로 하면 安家인지 모르지만….
3. 그것이 한 번이라도 危險千萬한 발상인데
貞純王后는 每回 그런 몰골로 궐 밖을 쏘다니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는 노릇이고,
어느 날은 ‘주상과 세손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발설한다.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4, 思悼世子에 관련된 기사를 洗草한답시고, 책을 찢어서 시냇물에 헹구는 데,
인쇄된 것은 洗草가 되지를 않는다. 그것을 고치자면 朱書로 고치는 것이 정도다.
왕조실록이나 정부 문건은 모두 그렇게 고쳤다.
5, 어느 날 밤에는 英祖가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어놓고,
昌德宮을 빠져 나갔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궐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뭐하였고,
더구나 세손이 그 사실을 모른다면 대궐이 아닌 여염집의 사정과 무엇이 다른가.
드라마를 재미에 맞추어 쥐어짜서 쓰면 그렇게 된다.
드라마는 유연하게 흘러가도록 써야 한다. 더 긴말을 할 필요가 없다.
역사드라마는 국민 모두에 국사정신을 심어주는 데 이바지하여야 한다.
바로 이점이 역사소설이나 역사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에게 주어진
최소한도의 책무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설혹 시청률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국민들(시청자)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었다면
작가나 PD는 큰 죄악을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통해 오늘의 한국을 읽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조선경국전>, 정도전 지음, 한영우 옮김, 올재클래식스(2012)
KBS에서 주말에 방송하는 사극 <정도전>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정통사극인데다가,
한때 나의 로망이었던 정도전을 다룬 드라마여서 첫 회부터 본방 사수하고 있다
(내가 첫 회부터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정도전’을 다룬 드라마여서 보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정도전’은 보이지 않고 권신 ‘이인임’만 보이고 있다.
전에 드라마 <선덕여왕>을 할 때에는
“<선덕여왕>이라고 쓰고 <여걸 미실>이라고 읽는다”는 말이 돌았었다.
<정도전>은 “<정도전>이라고 쓰고 <간웅 이인임>이라고 읽는다”라고 해야 할 판이다.
지난 주 일요일 이인임 역을 맡은 배우 박영규씨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좋아했다.
<정도전>을 보면서 고려말의 역사와 정도전의 삶과 사상을 반추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도전의 전기로는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었고,
한동안은 정도전 관련 논문들도 많이 찾아서 읽었다.
근래 드라마의 인기를 타고 정도전을 다룬 전기와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런 데 눈길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꺼내든 책이 재작년에 올재클래식스에서 나온 <조선경국전>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쉽게 말해서 조선의 헌법 초안(草案)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의 모습과 제도를 이 안에 담았다.
정도전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등장하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다.
솔직히 <조선경국전>을 처음 몇 장 읽으면서 느낀 감정은 ‘실망감’이었다.
‘정도전의 정치철학과 경륜을 담은 명저’라고 알고 있었는데, 무미건조했다.
제도에 대한 설명은 중국 주나라 이래 역대 왕조의 제도들과 고려의 제도,
그리고 개국 초 아직 정비가 끝나지 않은 조선의 제도를 풀이하는 데 그친 것 같았다.
간혹 드러나는 민본주의 정치철학도
<맹자> 등 유가(儒家)의 사상을 반복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법률의 초안이라는 것이 재미 있어봐야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그래도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재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도전의 정치철학, 고려말 권문세가의 횡포와 민생 파탄,
그리고 오늘날에도 유효한 국가운영의 원리 등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총재(冢宰. 재상)가 훌륭한 사람이 등용되면
육전(六典)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인주(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 대목에서는
후일 태종 이방원과 갈등을 빚다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재상중심체제에 대한 정도전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토지제도가 붕괴되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고랑이 서로 줄을 잇댈 만큼 토지가 많아지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갖지 못하게 되어 부자의 땅을 차경(借耕)하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서 그 이득을 차지하지 못하니
백성은 더욱 곤궁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졌다”
“토지제도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면서 세력가들은 서로 토지를 빼앗아서,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의 주인이 혹은 7,8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상하가 서로 이(利)를 다투고, 일어나 힘을 다투면서 서로 빼앗으니 화란이 이에 따라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라고 한 대목은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많이 그려진,
고려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기서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경제민주화’의 논리를 찾을 지도 모르겠다.
“임금이나 재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관리가 되려는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여,
저 사람에게서 벼슬을 빼앗아 이 사람에게 주고, 아침에 벼슬을 주었다가
저녁에 파직하는 등 헛되이 구차하고 고식적인 방법으로 계책을 삼는 데 여가가 없으니
재지 기간이 오래되고 안 되었는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현명하고 지혜로운 인사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펴서
일의 공적을 세울 수가 있겠는가?”라고 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1987년 소위 민주화 이후 되풀이 되어 온,
대선 캠프 관련자들을 공기업 등에 낙하산 인사로 내려 보내는 일,
1년이 멀다하고 장관을 갈아 치는 일 등이 오버랩되지 않는가?
“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통치자가 자기를 부양해 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도 또한 무거운 것이다”라는 대목은 참 인상적이다.
한 마디로 정부나 정치인들은 납세자인 국민 귀한 줄 알고, 거두어간 세금을
제대로 쓰고,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600여년전 봉건정치가도 알았던 이원리를 지금의 위정자들은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있을까?
“현자로서 천록(天祿)을 타먹는 자는
마땅히 천직을 잘 수행할 것을 생각해야 옳은 일이며,
천록만 타 먹고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는 말은
공무원, 정치인들 월급값 하라는 얘기다.
“국용(國用)을 쓰는 데 있어서 반드시 양입위출(量入爲出. 수입을 기초로 하여
지출을 행함)의 원칙을 지켜서 헛되이 소비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한 대목은
나라빚 지지 말고 균형재정을 달성해야 한다는 요구다.
나라빚 1000조원 시대에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얘기 아닌가?
“의창(義倉)의 곡식을 출납할 때에는 급한 사람만을 구제하여
부유한 사람이 혜택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사실을 확실하게 하여 원액(元額)을 축나지 않게 함으로써
이 좋은 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은
복지제도 운영의 대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까지도 나랏돈 들여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보다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 한정하는
‘선택적 복지’가 바람직하고, 부정하게 복지혜택을 받은 이가 없도록 하며,
과도한 복지로 인해 재정에 부담이 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가?
사실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상황을 다시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품고 있던 정도전에 대한 로망은 많이 사라졌다.
예컨대 정도전이 주장했던 재상중심체제라는 것이 과연
당시 조선의 현실에 적실한 것이었을까?
정도전을 제거한 태종이 군권(君權) 우위의 체제를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후일 결국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가 됐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군주제를 통해
국력을 조직화하고 근대국가로 나가는 것 아니었을까?
정도전에 대한 높은 평가는, 군부 출신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권위주의정권에 대한 국사학계의 반감의 소산은 아니었을까?
특히 정도전이 구상했던 재상중심체제를 의원내각제에 비견하는 것은
억지와 무지의 소산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의 관심은
정도전에서 현실주의 정치인 태종 이방원에게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여전히 매력적인 인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시대의 모순에 대한 그의 치열한 고민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고민에 그치지 않고 그는 결국 이성계의 무력과 결탁해
역성혁명이라는 비상수단을 통해 그 시대의 숙제를 풀어냈다.
우리는 언필칭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말끝마다 ‘국민’을 앞세우는 이 시대의 정치인들 가운데,
정도전처럼 치열하게 사는 이가 있는가?
신문 정치면만 펼치면 답답한 오늘, 그래서 정도전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서 주말이면 나는 <정도전>을 본다.
비록 조재현이 연기하는 ‘386세대 같은 정도전’ 은 별로지만 말이다.
(((힘찬 기운이 넘치는 삼봉의 글씨로 알려진 편지 :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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