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천관율 예루살렘 구시가지 전경. 유대교의 성지 ‘통곡의 벽’ 너머로, 이슬람 성지 ‘바위 돔’(사진 왼쪽)이 보인다. |
예루살렘 사전에 평화는 없는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인 예루살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유대 국가와 이슬람 세계의 협력과 공동관리뿐”이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을지 예루살렘의 세계적인 석학들을 통해 알아보았다.
예루살렘·텔아비브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19년 01월 16일 수요일 제591호
에후드 올메르트.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이스라엘 총리를 지냈다. 2018년 11월20일 텔아비브. 73세의 전직 총리는 검은색 반팔 티셔츠에 스마트워치를 찬 차림으로 기자들을 맞이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팔 분쟁)의 해법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바스(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와 나는 영구적 평화조약에 매우 가까이 갔다. ‘두 국가 해법’이 유일하게 현실적이다.”
이라 샤르칸스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원로 정치학자이자 행정학자다. 미국 명문 위스콘신 대학 종신교수직을 버리고 1975년 이스라엘로 왔다. 지금은 히브리 대학 명예교수다. 시오니즘(유대인이 자신들의 국가를 가질 수 있다는 신념) 이론에 밝고 이스라엘 보수파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지난해 11월18일 예루살렘의 자택. 샤르칸스키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두 국가 해법도 있고 세 국가 해법도 있지만, ‘노 솔루션(no solution)’이 정확하다. 이·팔 문제는 현실에서 작동할 해법이 없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로, 이·팔 분쟁은 국제정치의 화약고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올메르트 전 총리와 샤르칸스키 명예교수는 이스라엘이 이 문제를 보는 양대 노선을 대변한다. 둘 다 ‘현실’을 말하지만, 결론은 정반대다. 올메르트는 두 국가 해법,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를 만들어 이스라엘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안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샤르칸스키는 그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왜 이다지도 복잡할까. 텔아비브에서 만난 최용환 주이스라엘 대사가 힌트를 줬다. “예루살렘에 꼭 가보길 바란다.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성지(聖地) 문제가 결국 오늘의 이·팔 분쟁과 직결된다.” 예루살렘. 세계에서 가장 골치 아픈 도시다. 1947년 유엔은 이 도시에 ‘특별 국제체제(Special International Regime)’ 지위를 부여했다.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특별 국제관리구역이라는 의미다.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풍경은 황금빛 돔이다. 이름은 ‘바위 돔’. 이슬람 사원이다. 691년에 지어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서 메카와 메디나 다음으로 신성시하는 3대 성지다. 이슬람교 역사의 초창기에는 신도들이 기도하는 방향(‘키블라’)도 메카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했다. 무슬림의 믿음에 따르면,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는 잠을 자던 중 대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를 받아 날개 달린 말을 타고 ‘가장 깊은 성소’로 날아간다. 그곳에서 무함마드는 아버지들(아담과 아브라함)과 형제들(모세와 예수)을 만난 후 하늘로 올라가는 기적을 행한다. 무슬림은 이 장소가 예루살렘의 성전산(temple mount, 아랍명 ‘하람 알샤리프’)이라고 믿는다. 바위 돔이 서 있는 그 자리다.
기독교 최고의 성지도 예루살렘에 있다. 예수가 처형당한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거룩한 무덤 성당’이 있다. 바위 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그리고 물론, 예루살렘은 어느 종교보다 먼저 유대교의 성지였다. 성전산은 유대교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다. 아브라함이 신의 뜻에 따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장소가 여기다. 성전산에는 유대교 성전이 고대에 두 차례 세워졌다 파괴된다. 유대교는 이 성전산에 제3 성전이 지어지는 날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 성지 중의 성지를 1300년 넘게 이슬람 사원이 차지하고 있다.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은 바위 돔을 파괴하고 성지를 재건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슬람 세계 전체와 충돌하는 3차 세계대전까지 가능한 어마어마한 불씨다.
바위 돔 서쪽에 성벽이 하나 있다. 서쪽 벽, 더 유명한 별명으로는 ‘통곡의 벽’이다. 유대인들은 이 성벽이 제2 성전의 잔해라고 믿는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장소다. 구시가지 언덕에서 통곡의 벽과 바위 돔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도시의 복잡한 운명을 이 한 장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성지(聖地) 문제가 오늘의 이·팔 분쟁과 직결된다”라는 최용환 대사의 말이 실감난다. 돈이나 영토는 잘만 협상하면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성지에는 민족과 종교의 영혼이 달려 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영혼은 대체 어떻게 나눠야 할까?
ⓒ시사IN 천관율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전 총리, 이라 샤르칸스키 히브리 대학 명예교수, 모세 마오즈 히브리 대학 트루먼 연구소 연구교수, 야리브 오펜하이머 피스나우 사무국장(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
‘유대인의 방주 이스라엘’ 설계도의 탄생
이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인 동시에, 서로가 ‘옳다고 믿는 이야기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편에 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믿는다. “유대인은 2000년 동안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온 민족이다. 특히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은 씻을 수 없는 비극이었다. 유대인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탄생할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민족 정체성도 국가를 갖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유대인들은 둘 다 있었다.” 반대편에도 탄탄한 이야기가 있다. “팔레스타인은 2000년 동안 아랍인들이 살아온 땅이었다. 유대인은 영국 제국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고 학살했다. 지금도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장벽으로 가두고 있다. 사실상 인종분리 정책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두 이야기 중 하나가 완전한 거짓이라면 이·팔 분쟁은 진작 해결되었을지 모른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두 이야기 모두에, 피맺힌 진실과 속 편한 아전인수가 뒤섞여 있다. 그것이 이·팔 분쟁을 진정으로 까다로운 난제로 만든다.
1895년 1월, 프랑스 파리의 법정에서 유대인 육군 장교 한 명이 군사기밀 유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이 장교의 이름은 알프레드 드레퓌스. 당대 최대의 반(反)유대주의 스캔들인 ‘드레퓌스 사건’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프랑스와 같은 문명국가에 동화되어 ‘유럽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은 서유럽 문명국가조차도 유대인이 동화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동화’는 가능한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재판정에 유대인 기자가 한 명 있었다. 테오도어 헤르츨은 이 재판을 취재한 후 <유대 국가>라는 책을 써서, 유대인이 자신의 국가를 가져야 한다는 이념을 주창한다. 현대 시온주의가 여기서 탄생했다. 헤르츨의 묘는 이스라엘 국립묘지 한가운데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대 민족주의 운동은 당대의 세계 제국인 영국으로부터 ‘밸푸어 선언’을 끌어내는 데 결국 성공한다. 1917년의 일이다.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내놓은 이 선언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건설되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유대인의 방주 이스라엘’의 설계도가 이렇게 탄생한다.
밸푸어 선언이 나올 당시 팔레스타인 일대의 인구 60만명 중 유대인은 10만명을 밑돌았고, 나머지는 전부 아랍인이었다. 설계도는 있었으나 실제 건국은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나, 히틀러가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한다. 600만명이 죽어 나간 대학살은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로 격상시켰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 피해자들이 생존을 위해 국가를 요구하고 나설 때, 현실이야 어쨌든 정당성만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시사IN 천관율 예루살렘의 야드바솀(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있는 유대인 대학살 희생자 추모 전시물. |
‘두 이야기’가 중첩되는 예루살렘의 역설
야드바솀. 예루살렘 구시가지에서 서쪽으로 차로 20분쯤 달리면 나오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이름이다. 유대인 대학살의 끔찍함을 생생히 증언하는 전시 내용은,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 증언한다. 마지막 전시실에서 돌연 분위기가 달라진다.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는 영상이 전시되고 있다. 건국의 정당성은 유대인 대학살로 결정적으로 입증된다고 이스라엘은 선언한다.
그러나 야드바솀이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이야기는 야드바솀에서 북쪽으로 10분쯤 차를 달리면 나오는 크파르 사울 정신병원에서 들어야 한다. 1951년에 문을 연 공립병원이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차지한 이 땅은 한때 ‘데이르야신’이라는 팔레스타인 마을이었다. 1948년 4월9일, 이스라엘 시오니스트 120여 명이 이 마을을 공격했다. 이들은 집집마다 수류탄을 던지고, 성인 남자는 물론 여자와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아랍인을 학살했다. 정확한 숫자는 논란이 있으나 최대 254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데이르야신 학살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의 아랍인 살해와 추방 사건들 중에도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사건이다.
차로 10분 거리를 두고 야드바솀과 데이르야신이 나란히 존재하는 도시. 어디서든 ‘두 이야기’가 중첩되는 예루살렘 특유의 역설이다. 1·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영국의 유명한 장군 버나드 몽고메리는 팔레스타인 복무 경험에 진저리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은 아랍인을 죽이고 아랍인은 유대인을 죽인다. 앞으로 50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몽고메리는 너무 낙관적이었다. 5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둘은 죽고 죽이는 관계를 빠져 나오지 못했다.
‘두 이야기’가 충돌하는 역설을 가장 잘 표현한 지도자가 있다. 의외의 인물이다.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한 당사자인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건국 8년이 지난 1956년에, 세계 유대인의회 의장인 나훔 골드만에게 “내가 아랍인 지도자라면 절대 이스라엘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의 나라를 빼앗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반유대주의, 나치, 아우슈비츠가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우리가 여기 와서 그들 나라를 빼앗았다는 사실 하나만 보고 있다. 왜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늘 가슴에 품었을 질문을,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정확히 표현했다. 이 또한 역설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국가’에 대한 두 이야기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유대인이 국가를 가질 자격을 입증하는 귀환의 서사다. 이 건국서사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으로 사실상 완성된다. 이제는 아랍 국가들도 대부분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를 묵인한다.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 영토이던 요단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 영토이던 가자 지구를 점령해 현재까지 점령 중이다. 역사가 페리 앤더슨은 이를 “근대사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긴 군사점령”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 국가로 만들어 돌려줄 것인가, 돌려준다면 어떤 형식으로 할 것인가. 이것이 이·팔 분쟁의 핵심 줄기다.
ⓒAP Photo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분리장벽(보안장벽) 근처에서 지난해 10월5일(현지 시각)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 군을 향해 슬링(투석 끈)을 이용해 돌을 던지고 있다. |
팔레스타인 사람은 국가를 가질 권리 없나?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자신의 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서사다. 유대인이 제 국가를 가질 권리는, 이 땅에 2000년간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국가를 가질 권리와 충돌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국가를 가질 권리를 부정할 수 있을까? 국가를 가질 권리는 유대인만의 특권인가?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식인들에게 만만찮은 숙제를 던진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주이시 데모크라시(유대 민주국가)’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국가 해법이 유일한 길이다.” ‘피스나우’는 이스라엘의 평화운동 단체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다. 지난해 11월16일 텔아비브. 피스나우의 사무국장 야리브 오펜하이머의 키워드는 ‘유대 민주국가’였다. 오펜하이머는 이 공리로부터 두 국가 해법을 솜씨 좋게 유도해낸다. “지금 가자 지구에는 인종분리 장벽이 서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판 아파르트헤이트다. 이 상태로는 이스라엘이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장벽을 걷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스라엘 시민으로 받아들인다면? 팔레스타인의 인구 증가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언젠가 이스라엘은 아랍인의 국가가 된다. 이것은 유대 국가라고 할 수 없다. 팔레스타인을 독립시키는 두 국가 해법이 유대 민주국가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은 힘겨운 싸움이다. 유대 국가와 민주국가는 긴장이 필연이다. 민주국가란 구성원의 인종과 종교를 묻지 않는 체제인데, 유대 국가는 바로 그것을 묻는다. 2018년 7월19일 이스라엘 의회인 크네세트는 ‘유대인 민족국가법’을 통과시켰다. 유대인이 배타적 자결권을 갖고, 팔레스타인 점령을 합법화하며, 아랍어의 공용어 지위를 박탈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법은 기본법이어서 우리의 헌법에 준하는 지위를 갖는다. 이스라엘은 자주 유대 국가로 기운다. 팔레스타인이 자신의 국가를 가질 권리는, 명시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는 부정된다.
지난해 11월20일 예루살렘. 이스라엘 외교부 정보분석관의 비공식 브리핑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관계자는 “이·팔 분쟁의 해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얼핏 논점 일탈로 들리는 답을 내놓았다. “팔레스타인이 역대 가장 분열된 상태다. 아바스가 화합을 강조하지만 불가능해 보인다. 하마스(가자 지구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무장투쟁집단)가 협상에 관심이 없고, 이스라엘 파괴에 집중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정부를 세울 리더십이 없다는 의미다. 이러면 두 국가 해법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두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적대적으로 경쟁하는 환경은 실질적인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다. 국경 양쪽으로 적대적인 무정부 영역을 둘이나 끼고 싶은 나라는 없다.
이스라엘 외교부의 비공식 브리핑은 다시 샤르칸스키 명예교수의 한마디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자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시오니즘이 말하는 ‘자기 국가를 가질 권리’란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인 것인가, 유대 민족의 특권인가?” 그의 대답은 간접적이면서 의미심장했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매우 유동적이다. 유대인이 자기 국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유대인 자신들의 의식적인 결정이었다.” 이 노대가의 말은 이런 의미로 들렸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의지로 국가를 갖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국가를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국가를 가질 자격’을 입증했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이런 권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며(그랬다면 국가의 수는 터무니없이 늘어날 것이다), 의지와 능력을 가진 민족만이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가자의 하마스는 서안 지구의 리더십과 화합이 불가능하다.” 노대가는 팔레스타인은 그럴 자격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암시한다. 결론은 단호하다. “노 솔루션.” 시오니즘은 보편과 특권의 미묘한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19세기에 헤르츨이 ‘국가를 가질 권리’를 상상했을 때, 그의 구상은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게도 주어질 보편적 권리’에 좀 더 가까웠다. 헤르츨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이 연방정부를 꾸려 공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반면 21세기 이스라엘 주류의 목소리는, 팔레스타인이 유대인과 같은 자격을 갖고 있는지 의심하는 쪽으로 기운다.
올메르트 전 총리에게는 이 모든 논의가 쓸데없는 소리로 들린다. 그는 확신에 찬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분열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만큼이나 우리도 분열돼 있다. 리더십이 중요하다. 아바스는 내가 총리일 때 사인을 했어야 했다.” 맞는 얘기다. 이스라엘 정치가 이·팔 분쟁 해법의 합의에 이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분열은 팔레스타인의 현실인 동시에 이스라엘에도 현실이다. 하지만 전부 맞는 말인지는 의심스럽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초인적인 리더십이 있어야 ‘그들과 우리의 분열’을 극복하고 합의에 이를 수 있을까? 오펜하이머가 보여주었듯, 두 국가 해법이 아닌 다른 대안은 ‘유대 민주국가’ 유지가 안 된다. 현상 유지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샤르칸스키가 보여주었듯, 두 국가 해법은 너무나 초월적인 리더십을 요구한다. 자꾸 “노 솔루션”이 머리를 맴돈다.
“예루살렘을 모든 종교의 수도로 만들자”
이제 마지막 한 명을 만날 차례다. 모세 마오즈. 히브리 대학 트루먼 연구소 연구교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중동 분쟁 전문가다. 그는 인상적인 서두로 말을 시작한다. “국가는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가 있어야 안보가 보장된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이 정상국가로 작동하는 것이 이스라엘 안보에도 이익이라는 의미다. 지금 상태는 이스라엘이 사제 로켓포와 자살폭탄 테러라는 비대칭 전쟁에 대응해야 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정점으로 하는 이스라엘 보수파의 현상유지론, 그러니까 이스라엘 유일 합법정부 유지론은 이 대목에서 치명적 약점이 있다.
현상 유지는 또 다른 이유로도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한다. 다시, 문제는 예루살렘이다. “이스라엘이 지금처럼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는 상태가 계속될 경우, 수니파와 시아파 국가들이 반(反)이스라엘 연합을 형성할 수 있다. 최악의 가능성은 이란과 터키의 연합이다.” 익숙한 예루살렘 딜레마다. 출구가 있을까. 마오즈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예루살렘은 분할이 아니라 협력이 답이다. 나누지 말고,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 협력해서 예루살렘이 모든 종교의 수도가 된다고 상상해보라. 세계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다녀갈 수 있는 모든 종교의 수도. 그것은 위대한 협력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 공동관리. 이 아이디어는 역사적으로 낯설지 않다. 시오니즘의 아버지 헤르츨부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특별 영토로 만들어 누구의 소유도 아닌 동시에 모두의 소유가 되도록 해야 하며, 성지는 모든 종교인의 공동소유가 되게 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골치 아픈 도시의 딜레마는, 세계에서 가장 진취적인 해법을 통해서만 해소 가능해 보였다. ‘국가를 가질 권리’는 결국 성지에서 배타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 차원에서 딜레마는 풀리지 않는다. 유대 국가와 이슬람 세계의 협력과 공동관리. 이것은 분명 벅차 보이는 목표다. 우리는 그렇게 이타적인 종이 아니다. 종교 문제가 걸려 있으면 특히 그렇다. 하지만 길이 그것밖에 없다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내는 종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국가를 가질 권리’를 뛰어넘는 협력의 모델이 태어날 수 있을까? 그것도 유대인과 무슬림 사이에? 예루살렘은 진정으로 흥미로운 과제를 던지는 도시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중동 전문가 교육과정’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팔 분쟁의 뿌리는 역설투성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대립하고 있다.
기독교권의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이 함께 지내왔던 아랍과 이상하게 엮여 원수가 된 드문 사례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제579호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을 대표하는 갈등은 무엇일까? 대부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하 이·팔 분쟁)을 떠올릴 것이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 이래 70년간 이·팔 분쟁은 국제정치의 핵심 주제였다. 이·팔 분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일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 이스라엘 건국이 맞물리면서 문제가 불거진 것처럼 보인다. 좀 더 길게 잡으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해 재편한 유럽 열강의 개입을 기원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는 더 오랜 역사가 뒤에 있다. 바로 유럽-지중해권에 널리 퍼져 있었던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이로 인해 촉발된 시온주의(Zionism)이다.
유대인들의 역사관은 독특하다. 자신들은 결코 멸절되지 않는다는 역사 인식이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제국들이 명멸을 거듭할 때, 유대 민족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사라지지 않는 대신, 유일신 야훼의 뜻에 어긋날 때는 형벌을 받아 약속의 땅을 떠나야 했다고 믿었다. 이른바 ‘디아스포라’, 이산(離散)의 시기다. 흩어지되 소멸되지 않고 신이 부과한 형극의 기간이 지나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회복론도 함께 믿는다. ‘알리야(aliyah)’, 귀환의 시기다.ⓒAP Photo5월4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이스라엘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원형은 고대 이집트 비돔(Pithom)에서 파라오 통치하에 살아가던 히브리 공동체였다.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모세의 출애굽은 알리야의 원형이다. 유대 민족에게는 특정 공간, 야훼가 준비한 이스라엘 땅에 대한 남다른 애착의 서사가 있다. 약속의 땅, 즉 ‘에레츠 이스라엘(Eretz Ysrail, Land of Israel)’에 대한 갈망이다.
마지막 이산은 로마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성전은 파괴되고 유대 민족은 흩어졌다. 이후 나름대로 유대 공동체를 유지하긴 했지만 회복과 귀환을 생각하기에는 삶이 바빴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고 물경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오랜 기간 회당에 모여 ‘토라’를 읽으며 정체성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경이롭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주로 중동부 유럽과 북아프리카 및 아라비아 반도 등에 터를 잡고 살았다.
오랜 디아스포라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기독교계 유럽은 언어와 종교가 다른 유대인들을 불편하게 여겼다. 반유대주의의 출현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경으로 잡는 홀로코스트 역사학자 라울 힐버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힐버그는 정치적 격변기마다 일종의 희생양으로 유대인들이 이용된다고 본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다룬 3단계는 ‘개종-축출-박멸’이었다. 개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쫓아내고, 계속 걸리적거리면 마녀사냥 등의 방법으로 어떤 형태로든 없앴다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유대인이 개종하기도 했다. 유럽인의 정서에는 마태복음 27장 25절 이야기가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무죄를 이야기하는 로마 총독에게 유대 군중은 이렇게 외친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EPA2017년 11월2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밸푸어 선언 100년을 맞아 영국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아래).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중세 이후 유대 가문들이 부를 축적하고 자본을 독점하면서 세간의 질시가 심해졌다. 봉건 영주와 결탁한 일부 유대 가문은 교회가 금기시하는 다양한 일들을 도맡았다. 특히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수전노 샤일록이 대표하는 유대인 이미지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정치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사례가 빈발했다. 19세기 말부터 반유대 정서는 더욱 넓게 확산되었다. 1881년 제정 러시아 당시 유대인에 대한 약탈과 조직적 학살(포그롬)은 비극의 일단이다. 1894년 프랑스의 한 포병 장교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렸던 드레퓌스 사건은 반향이 컸다.
드레퓌스 사건에 위기의식을 느낀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제 알리야, 즉 귀환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은 1896년 저작 <유대 국가>를 통해 나라를 세우자고 제안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대 국가 건설이 필요하다는 시온주의 사상과 목표가 담겼다. 헤르츨은 이듬해 1차 시오니스트 대회를 열었고, 국가 건설이라는 꿈을 현실의 주제로 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디아스포라 내 초정통파 종교인 집단의 다수가 시오니즘에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희구해온 종교인들이 가장 앞장서서 반길 듯한데 실상은 달랐다. 초정통파 랍비들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형극의 시간을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작위적으로 구원을 앞당기려는 시도를 일탈로 해석한 것이다. 이 시각으로 보면 헤르츨의 시오니즘과 유대 국가 수립 운동은 일종의 거짓 메시아 운동이었고, 자칫 이산의 시기를 더욱 길게 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결국 시오니즘의 동력은 유대교 정체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속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였다. 시오니즘의 초기 주창자들은 유대 정체성의 핵심인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 서사를 도구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종교 외피를 입은 세속주의자들의 기획이었다고나 할까? 시오니스트와 초정통파 종교인들 간의 이러한 인식 차는 오늘날까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정체성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AFP PHOTO독일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을 자행했다.
주류 종교인들의 반대에도 시오니스트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헤르츨은 먼저 오스만 제국과 독일에 유대 국가 건설을 타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협상 상대를 영국으로 바꾸어 영국 식민지 중 몇몇 곳을 후보지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영국은 사이프러스와 시나이 반도 등을 제안했으나 틀어지고, 이후 우간다 안과 아르헨티나 안도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1905년 7차 시오니스트 대회는 귀환(알리야) 서사를 완성시킬 곳은 팔레스타인임을 확인하고 이곳에서 건국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1차 대전 시기, 전쟁 비용이 급했던 영국은 유대인의 대자본이 절실했다. 시오니스트들은 이를 건국의 기회로 삼았다. 로드차일드 등 유대인 명망 가문이 대영 외교에 나섰다. 마침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고향으로 인정하고 재건을 지원하겠다는 영국의 방침이 발표되었다. 1917년 11월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의 선언이다. 선언 직후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유대 국가 건설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긴장했다. 비록 밸푸어 선언에 선주민의 시민권과 종교적 자유가 명시되어 있었지만 영국이 시오니스트 국가를 세워주려 한다는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시온주의 등장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태동하게 된다.
위임통치를 하던 영국은 골머리를 앓았다. 유대인 이주가 늘어날수록 팔레스타인 측의 불만과 시위는 거세졌다. 두 민족의 공존을 성사시켜보려던 영국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좌고우면하던 영국의 행태는 팔레스타인과 유대 양측을 모두 자극했다. 시위는 격화되고 영국은 속수무책이었다. 2차 대전 이후 1947년 영국은 결국 위임통치 권한을 포기했다. 시오니스트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아랍의 반대로 거부되었다. 결국 시오니스트들은 1948년 5월15일 이스라엘 독립을 전격 선포하고 건국의 꿈을 실현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날은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이주자들에게 빼앗긴 대재앙의 날(al Nakbah)이 된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보호했던 아랍 사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반유대주의는 원래 기독교계 유럽에서 기승을 부렸다. 반면 아랍 이슬람권에서 반유대주의 정서는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15세기 기독교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를 평정하며 무슬림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도 함께 축출했다. 쫓겨난 유대인이 주로 흘러들어간 곳이 북아프리카 아랍 사회였다. 이곳에서 아랍인과 유대인은 함께 지내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 괴뢰정부가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을 압박해 유대인 축출을 요구했을 때에도 아랍 사회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보호하고 나섰다. 파시스트들의 유대교 탄압에 함께 저항하면서 희생을 감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불과 수년 안에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반유대주의를 피해 자유를 찾고자 했던 시온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하자 유대인과 아랍인이 원수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고토 회복을 주장했지만, 아랍 팔레스타인에게는 이스라엘이 무도한 침략자였다. 유대인의 귀환은 기독교권의 멸시와 박해로 인해 시작된 것인데 정작 갈등은 이슬람권과 빚고 있다.
통곡의 벽에 서서 몸을 흔들며 황금의 돔 사원과 알아크사 사원이 있는 성전 산(하람 알샤리프)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는 유대 종교인들을 보면, 영락없는 유대교와 이슬람의 갈등이다. 그러나 이 갈등 뒤에 있는 더 오랜 분쟁의 씨앗은 바로 천년 넘게 지속된 기독교권의 반유대주의였다. 홀로코스트는 루터의 후예들이 저지른 일이며, 포그롬은 정통을 자처하는 정교의 후예들이 저지른 짓이다. 심지어 밸푸어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밸푸어 선언 당시 영국 정부의 저의는 유대인 보호가 아니었다는 사료들이 나오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아비 슐라임 교수는 밸푸어가 작곡가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와 나눈 대화에서 “유대 국가를 빨리 세워줘야 유럽 내 유대인들이 다 한곳으로 모여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한다.기원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팔 분쟁은 당사자 간 역사적 구원(舊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권의 멸시와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그간 큰 어려움 없이 지내왔던 아랍과 이상하게 엮여 원수가 되어버린 드문 사례다. 현재에만 시선을 두면 역사의 궤적을 놓치기 쉽다. 면밀히 과거를 읽어내지 못하면 현 상황에 포박된다. 마치 지금의 갈등관계가 과거로부터 유구한 것이며, 또 미래에도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오류가 발생한다. 이 오류는 상황을 고착화하고, 결국 어떤 형태로든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의지를 반감시킨다. 이·팔 문제의 또 다른 ‘문제’는 현재 상황이 역사적 맥락과 배경을 압도한다는 데 있다. 어쩌면 꽉 막힌 이·팔 분쟁의 해법은 상상력을 발휘해 역사적 맥락을 재현하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선물처럼 주어질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의 이·팔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먼 역사적 기원부터 살펴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의 다른 기사보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70년의 교착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적 해법은 요원하다. 국제사회는 ‘두 국가 해법’을 외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미국이 새로운 중동 평화 구상을 내놓으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2월 14일 금요일 제586호
중동에는 국경이 반듯한 국가가 많다. ‘기하학적 국경 획정’이라고 부른다. 이게 왜 신기한가? 대개 산맥과 강줄기 등 자연지리를 따라 문화적 공동체가 분포하고, 그를 바탕으로 국가가 형성된다. 국경은 삐뚤빼뚤한 경계가 자연스럽다. 기하학적인 직선 국경은 그 나라가 누군가에 의해 자의적으로 생겨났음을 뜻한다. 이란과 이집트 정도를 제외하면 중동에는 20세기 이후 등장한 신생국이 많다.
중동의 많은 ‘국가’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등장했다. 국가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제국의 백성들은 ‘국가’ 또는 ‘국민’이라는 생경한 정체성을 갑자기 부여받았다. 혼란스러웠다.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창졸간에 분리되기도 했고, 반대로 견원지간의 부족과 종파가 느닷없이 한 나라로 묶이기도 했다. 인구 3000만명이 넘는 자존심 강한 민족 쿠르드는 네 나라로 찢어졌다. 반대로 레바논과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다양한 종파와 종족이 한 국가 안에 편입되었다.
작위적 국가 형성의 부작용이랄까? 분쟁의 씨앗은 여기저기 뿌려졌다. 쿠르드 독립운동은 터키와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레바논과 시리아는 내전의 땅이 되었다. 국가 형성 과정에서 동일 집단의 원치 않는 분리 사례나, 이질적 공동체의 병합 사례는 지금까지도 중동 분쟁의 한 요인으로 작동한다. 이곳에서 ‘국가’란 얄궂은 주제다.
ⓒAFP PHOTO 11월23일 가자 시 동부 교외에서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이스라엘 군이 쏜 최루탄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 |
중동에서 국가 건설이 시작된 지 얼추 100년이 된 지금도 나라 없는 이들이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의 시오니즘과 얽히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이 땅의 아랍 선주민들은 유대 국가의 2등 국민이 되든지, 아니면 이를 거부하고 난민이 되어야 했다.
논쟁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 주민의 정체성이 여타 아랍 부족과 뚜렷이 구별되지는 않았다. 샴 지방(레반트라고도 함)이나 미스르(지금의 이집트) 또는 아라비아 반도에 흩어져 사는 여느 아랍인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후천적으로, 시오니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생겨났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다.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나라 없는 이들의 투쟁 동력이기도 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 이후 1993년 오슬로 협정까지 근 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이스라엘 타도를 목표로 했다. ‘강에서 바다까지’라는 공격적인 구호도 내걸었다. 요르단 강에서부터 지중해까지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팔레스타인이 반드시 되찾겠노라는 다짐으로, 이스라엘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냉전 해체는 변곡점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은 1991년 마드리드 다자 회의에서 처음으로 공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2년 후 오슬로 협정은 기존 틀을 바꾸었다. 시오니즘을 신봉해온 이스라엘은 ‘영토와 평화의 맞교환’이라는 과감한 변화를 수용했다. 소련의 위협이 없어지면서 이제 미국이 이스라엘의 전략적 가치를 낮출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작동했다.
팔레스타인 역시 미국의 압도적 힘을 의식했다. 전통적 지지 세력이던 소련의 해체는 두려운 변화였다. 이제는 일부 지역에서나마 국가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판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불거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위기의식이 오슬로의 ‘두 국가 해법(Two state solution)’을 태동시켰다. 이스라엘과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팔레스타인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AFP PHOTO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가운데)이 11월15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집행위원회를 소집했다. |
자연스레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개념이 핵심 주제가 되었다. 국가 구성의 3대 요소인 주권, 영토, 국민 모두에서 만만찮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오슬로의 두 국가 해법이 교착상태에 빠진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국가 구성 요소를 실제로 구현하는 게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다.
먼저 주권은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다. 대개 국제사회의 승인을 통해 구체화되곤 한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국제사회의 주력은 아랍연맹 그리고 범이슬람권 국가들이다. 팔레스타인은 특히 아랍의 힘을 통해 다자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냉전기에 아랍은 변함없이 팔레스타인 편이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 멸절 투쟁을 벌일 때도 이들은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아랍 처지에서는 식민주의의 질고를 진 팔레스타인을 편드는 게 당연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대의(Palestine cause)’였다.
힘 잃어가는 ‘팔레스타인 대의’
그러나 최근 아랍의 팔레스타인 대의가 약해지고 있다. 이란의 부상 때문이다. 아랍의 맏형을 자임하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집트는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전략적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이스라엘 멸절 투쟁을 하던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영토 분리를 통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기로 한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보수 아랍 왕정의 주적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란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친이스라엘 노선도 이런 흐름에 한몫 거든다. 아랍 주류의 미묘한 태도 변화는 팔레스타인 정치권의 위기의식을 가중시키고 있다.
남은 두 요소는 국민과 영토다. 영토는 현재로서는 답이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구 안에 자리 잡은 이스라엘 정착촌을 철수할 의지가 전혀 없다. 서안 지구와 이스라엘을 가르는 경계 안쪽을 묘하게 파고들어 와 있는 장벽도 문제다. 팔레스타인의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간 통행 보장도 무망한 상황이다. 팔레스타인 내에서도 집권 파타와 가자 지구를 장악한 하마스의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예루살렘 문제도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대사관 이전으로 크게 논쟁이 되었지만 여전히 불투명하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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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월26일 유엔본부에서 양자회담을 하고 있다. |
하지만 영토 요소는 지도를 펼쳐놓고 따져볼 수라도 있다. 서로 양보를 하려 하지 않아서 그렇지 구체적으로 논의를 진전시킬 수는 있는 쟁점이다. 반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서 더 뿌리 깊은 난제는 국민 요소다. 하나의 국민 정체성을 가진 ‘팔레스타인 국민’을 기대할 수 있을까? 회의가 적지 않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미묘하게 달라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각과 처지가 지난 70년 동안 굳어졌다. 언뜻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 투쟁하며 똘똘 뭉친 단합 세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속살은 사뭇 다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크게 아랍계 이스라엘 국민, 서안과 가자 지구 등 자치 지구 주민, 그리고 동예루살렘 거주민 등으로 나뉜다.
애매한 사람들은 동예루살렘 거주민들이다. 동예루살렘은 현재 이스라엘이 관할하고 있으나, 팔레스타인이 주권국가를 만든다면 팔레스타인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들은 일단 팔레스타인 독립을 지지한다. 그러면서도 생활 근거지가 주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독립에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 지금은 중간자적 신분이지만, 후일 팔레스타인 국민으로 확정되는 순간 이들 역시 생활 터전이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동예루살렘 프렌치힐에 잇닿은 아랍 마을 ‘이싸위야’에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서 일하는 교수와 직원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
서안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대부분 독립을 원한다. 그들은 점령 체제로 인해 이스라엘의 수탈이 지속되는 현 상황을 혐오한다. 주권국가 수립의 주축이 바로 서안 지구 주민들이다. 이 안에도 원심력이 작동한다. 서안 지구 주요 도시별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7대 부족 간의 경합과 합종연횡이라는 권력의 분쟁 요소가 있다. 유력 부족 원로들의 내밀한 의사표시에 따른 정치적 결정이 적지 않다.
이스라엘 보수파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한다. 지금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이라는 공공의 적을 앞세워서 서안 지구 부족들의 협력을 이끌고 있지만 막상 독립하게 되면 분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자존심 강한 부족들끼리 내전에 준하는 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으로 이어진다. 서안 지구의 집권 세력 파타와 가자 지구를 장악한 하마스 간 분쟁은 아예 이야기를 꺼내기도 힘든 상황이다. 이스라엘의 극우 시온주의자들이 농반진반으로 ‘여덟 국가(서안 지구 7대 부족+가자 지구) 해법’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예 부족 단위로 조각내놓아야 딴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다소 무례한 언설이다.
요르단과 ‘국가연합’ 모델 거론
팔레스타인 리더십의 무능과 탐욕도 비관적 전망을 더 무겁게 한다. 노쇠한 마무드 아바스 정부로는 거센 도전을 이겨내기 어렵다는 평이 현지의 중론이다. 미래 대안이 있느냐도 회의적이다.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독립했을 때 과연 정부 구성과 권력 배분 과정이 순탄하게 이루어질지 팔레스타인 대중조차 회의적이라는 소문도 걸린다.
그나마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이었던 오바마 대통령이 아닌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을 상대해야 한다. 주권, 영토, 국민 이슈가 모두 난제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있다.
이 와중에 한 가지 눈에 띄는 사안이 있다. 미국이 연말 혹은 내년 초에 새로운 중동 평화 구상을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물론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의 성정을 볼 때, 어쩌면 완전히 판을 깨버리는 친이스라엘 정책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코마 상태에 빠진 ‘두 국가 해법’을 되살릴 극적 요법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워싱턴에서 살짝 흘러나온 ‘국가연합’ 모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바 있다. 즉 미국과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을 즉시 독립국가로 승인하고 유엔의 정회원국으로 받아주는 동시에 요르단과 국가 대 국가로 연합하는 모델이다.
이 아이디어는 나름대로 역사적 맥락이 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기기 전까지 서안 지구와 동예루살렘은 요르단 관할이었다. 지금도 예루살렘 올드시티의 이슬람 성지인 하람 알샤리프(황금의 돔 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있는 곳)는 요르단이 관리한다. 요르단과의 국가연합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을 명시한 당시 유엔안보리 결의안 242호도 충족시킬 수 있다. 서안 지구와 동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으로 독립하고 이후 요르단과 국가연합의 형태로 묶으면 된다.
요르단 왕실은 이 모델을 일축했다.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에 더욱 매진해야 할 때라는 주장이다. 내심 계산은 복잡할 것이다. 만약 국제사회가 오슬로 협정처럼 이 국가연합 모델을 지지해준다면, 그래서 막대한 물적 지원을 요르단에 약속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요르단 처지에서는 팔레스타인과의 연대가 부담스럽지만 한 번쯤 검토해볼 만하다. 국가의 격을 올릴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오랫동안 주권국가로 독립하려 준비해온 상황에서 맥 빠지는 아이디어다. 반면 이스라엘 측은 별다른 논평을 하지 않았지만 내심 국가연합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팔레스타인 국가와 긴 국경을 마주하는 것보다야, 1994년 평화협정을 맺은 요르단 왕실을 매개로 안정 국면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쪽이 더 나을 수 있다.
중요한 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공공연히 찬반을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속내는 복잡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게는 70년 동안 독립을 열망해온 역사가 있다. 국제적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국가연합이라는 우회로를 택하라니, 내키지 않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자신들이 세울 나라가 평화 가운데 지속 가능한 성장을 구가하려면 리더십의 안정성이 중요하다. 만약 국가연합이 리더십 안정을 가져다줄 더 나은 방법이라면?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국가연합 모델은 하나의 설에 불과하다. 미국이 이와 완전히 다른 구상안을 내놓을 가능성도 높다. 지금처럼 교착된 상태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치열한 사유와 고민을 쏟아부을 값어치도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은 곧 중동의 평화이고, 중동 평화는 곧 세계 평화와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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